쾌 : 젓가락 괴담 경연
미쓰다 신조 외 지음, 이현아 외 옮김 / 비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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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는 가짜일지 몰라도 저주를 건 사람의 악의는 진짜잖아요?"
이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인간의 악의보다 더 무서운 건 없어요, 후후."
소녀의 동공이 커지고 목소리가 낮고 공허하게 변했다. 물 아래서 들려오는 메아리처럼... 꿈에서만 존재했던, 질식할 것 같은 무거운 압력이 갑자기 현실이 되어 병실 안을 꽉 채웠다.      - '저주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 예터우쯔, p.321

 

초등학교 5학년인 나는 말이 별로 없고 조용한 전학생 네코와 친해진다. 어느 날 네코가 급식을 먹으면서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게 되고, 소원을 이뤄주는 '젓가락님' 의식에 대해 듣게 된다. 식사할 때 젓가락을 밥에 똑바로 꽂는 사잣밥을 만들고 소원을 이야기하는 팔십사 일 동안의 의식을 해야 하고, 젓가락님에게 들키지 않고 내용을 철저히 지키면 어떤 소원이든 들어준다는 거였다. 친오빠의 폭력으로 인해 고민하던 나는 소원을 이루기 위한 의식을 거행하기 시작하고, 그때부터 밤마다 이상하고 섬뜩한 꿈을 꾸게 된다. 과연 나는 무사히 의식을 치르고 소원을 이룰 수 있을까. 이 작품은 호러 미스터리의 거장 미쓰다 신조의 <젓가락님>이다.

 

 

중학교 3학년 겨울, 반 여학생들 사이에서 젓가락 교환 마법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사람의 젓가락 한 짝을 몰래 바꿔 치기 하고, 삼 개월 안에 상대에게 들키지 않으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거였다. 전설이나 미신이 크게 유행하던 시기였고, 중학생 시절은 연애에 대한 동경이 가득할 때라 젓가락 마법은 금세 신도들을 끌어 모았다. 나는 이 마법이 뭐가 번거롭고 어려운지 알 수 없다고, 그렇게 해서 사랑이 이뤄진다면 세상에 실연당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겠다고 얘기했고, 친구들은 그래서 연애 한 번 못하는 거라며 나를 공격한다. 덕분에 나는 반에서 가장 인기 없는 남자아이를 대상으로 젓가락 마법에 도전하게 되는데, 상황은 예상했던 것보다 쉽게 흘러가지 않는다. 그 남자아이는 선명한 핏빛의 젓가락을 늘 목에 걸고 다녔고, 굉장히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과연 나는 무사히 젓가락을 바꿔 치기 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은 타이완의 작가 세시쓰의 <산호 뼈>이다.

 

 

"예전에 저주에 관해 말했지만, 도대체 저주가 뭘까요? 사람의 사람에 대한 원한일까요, 아니면 초자연적인 신령이 금기에 저촉한 자에게 내리는 처벌일까요? 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저주의 본질에는 가닿지 못해요.... 저주는 '개인적'인 게 아니라 시스템적인 것입니다. 시스템에 속하지 않으면 저주에 걸리지 않아요. 우리 아시아인은 젓가락을 밥에 꽂으면 재수가 없다고 말하지만, 서양 사람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회 자체가 거대한 저주의 장치인 겁니다.         - '악어 꿈', 샤오샹선, p.479

 

일본의 미쓰다 신조, 홍콩의 찬호께이, 예터우쯔, 타이완의 쉐시쓰, 샤오샹선, 이렇게 3국을 대표하는 장르문학 대가들이 모여 ‘젓가락 괴담’ 릴레이를 선보인다. 미쓰다 신조가 <젓가락님>으로 포문을 열고, 찬호께이의 <해시노어>로 이야기의 막이 내린다. 다섯 개의 단편은 각각 나라의 지역적인 특색과 전설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작가들의 스타일도 조금씩 달라 개별적인 매력을 느끼며 읽을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그리고 수록된 순서대로 읽으면 서로 이어지고 어우러지다 하나의 큰 이야기로 완성되는 구성이기도 해서 릴레이 연작 소설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재미를 선사한다.

 

 

책을 읽다 보면 왜 젓가락일까 하는 의문이 들게 마련이다. 수록된 마지막 작품인 찬호께이의 <해시노어> 편에 젓가락이라는 단어의 다양한 유래가 나온다. 수천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젓가락의 유래와 뜻도 매우 흥미로웠고, 관련된 설까지 읽다 보면 왜 주술이 젓가락과 연결이 된 것인지 살짝 짐작이 될 것이다. 터무니 없어 보이는 전설도 있고, 생활과 밀접해 현실적인 설도 있었고, 그 중에서 어떤 것에 마음이 더 끌리는 지는 각자 다를 것이다. 이야기를 다 읽고 나면 일상에서 매일 같이 보아 왔던 '젓가락'이라는 물건이 조금은 다르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작품을 제대로 읽은 것이 분명하다.

 

찬호께이는 작가 후기에서 '각 소설은 분명 독립되어 있지만 서로 연결이 되고, 분명 같은 인물인데 조금씩 차이가 난다'고 말하며 어쩌면 이것이 릴레이 소설의 최상의 맛일 수도 있다고 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조화를 이루어 독특한 맛을 내는 다국적 퓨전 요리처럼 말이다. 국가를 막론하고 묘한 미신 또는 터부가 따라붙는 일상적 사물에서 시작해 다섯 작가가 정교하고 치밀하게 설계한 괴담의 세계로 지금 당신을 초대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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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와 예감
온다 리쿠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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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연주자가 훌륭했지만 밴드를 결성하고 이끄는 것은 이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였다. 음악의 발판을 다지고 상상력 넘치는 베이스 라인으로 끌어당겨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그였다. 그런 그가 싱글거리며 너새니얼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아아, 음악의 세계에는 이렇게 굉장한 사람이 많구나. 이 사람도, 너새니얼도 같은 쪽에 있다. 머나먼 저편, 음악의 나라에. 두 사람의 옆얼굴이, 그 윤곽이 조명 속에서 빛나고 있다. 가고 싶다. 저 나라로.           - '하프와 팬플루트' 중에서, p.103

 

구상 12년, 취재 11년, 집필 기간 7년, 그리고 서점대상과 나오키상을 처음으로 동시에 수상한 것으로 화제가 되었던 작품 <꿀벌과 천둥> 이후 4년 반 만에 찾아온 신작이다. 본편에서 다루지 못했던 주요 인물과 그 주변인들의 이야기 여섯 편을 담고 있는 소설집이다. 실제로 3년마다 열리고 있는 국제 피아노 콩쿠르를 배경으로 참가등록부터 1차 예선, 2차 예선, 3차 예선, 그리고 본선에 이르는 전 과정을 리얼하게 그려냈었던 <꿀벌과 천둥>을 좋아했던 독자라면, 이번 <축제와 예감>은 선물처럼 느껴지는 작품일 것 같다.

 

마사루와 그의 스승 너새니얼의 이야기, 전설적인 음악가 호프만과 천재 소년 가자마 진의 첫 만남, 입상자 특전으로 콘서트 투어에 나선 아야와 마사루와 가자마 진, 그리고 콩쿠르 과제곡 <봄과 수라>가 만들어지게 된 배경에 대한 비화 등 짧은 분량임에도 더 없이 풍성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꿀벌과 천둥>은 그 자체로도 완벽하게 서사가 마무리되는 작품이었지만, 너무도 생생한 캐릭터들이 엮어내는 이야기였기에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도 그 여운이 오래 남았었다. 그래서 이렇게 그들의 또 다른 이야기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설레이는 시간이었다.

 

 

 

성격적으로 비올라가 맞는다, 아마 내가 내는 비올라 소리는 이런 느낌, 비올라다운 비올라를 목표로, 은은한 소리로 전문가들이 좋아하는 괜찮은 연주를 한다. 그런 미래를 막연히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 저도 모르는 사이에 비올라의 세계를, 이미지를, 가능성을, 획일적으로 한정 짓고 있었던 게 아닐까? 나는 비올라의 풍부함과 포용력을 얕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훨씬 더 복잡하고 심오한, 도저히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세계가 펼쳐져 있는 것이다.        - '은방울꽃과 계단; 중에서, p.135

 

<꿀벌과 천둥>에서 치열하게 경연이 이루어지던 2차 예선 중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정말이지, 이토록 부조리하고 잔혹한 이벤트가 또 있을까?' '이토록 잔혹하고, 재미있고, 매력적인 이벤트가 또 있을까?' 이 문장들만큼 이 작품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 또 있을까 싶었다. 천재라 불리는 이들이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벌이는 자신과의 싸움과 그것에 이르는 과정의 드라마는 그야말로 피 튀기는 전쟁과도 같았으니 말이다. 줄리어드 음악원 출신의 엘리트, 16세 천재 소년, 한때 천재 소녀로 불렸지만 무대를 떠났던 인물도 있었고, 음악을 전공했지만 악기점에서 일하며 평범하게 살던 이도 있었다. 예술에 점수를 매길 수 있는가? 이들의 재능에 우열을 가릴 수 있는가? 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참가자들의 배경과 사연이 더욱 드라마틱한 경연을 만들지 않았나 생각한다.

 

관객 입장에서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는 달리 우열이 갈리는 순간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마음일 것이다. 선택 받은 자, 승리한 자, 극히 일부에게만 허락된 기프트. 정점을 찍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을 보고 싶은 동시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고 사라져가는 사람들의 눈물도 보고 싶어 한다. 엄청난 분량만큼이나 시선을 사로잡은 화려한 드라마였기에 긴장이 되는 순간도, 극중 설정에 몰입되어 땀이 나는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작품 <축제와 예감>은 조금 느긋하게 즐겨도 좋을 것이다. 그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이야기가 우리를 자연스레 4년 전 그때로 데려가 줄 테니 말이다. <꿀벌과 천둥>을 재미있게 읽었다면, 이번 작품도 놓치지 말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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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의 지도 - 위대한 정신을 길러낸 도시들에서 배우다
에릭 와이너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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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들은 전쟁과 격동 그리고 사회를 휩쓴 이념운동을 날씨 이야기하듯 다루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날씨를 그런 식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우리는 날씨를 바로 여기서 경험한다. 거대한 저기압대가 아니라 머리카락을 흠뻑 적시는 소나기, 몸을 뒤흔드는 우렛소리, 얼굴을 벌겋게 익히는 지중해의 태양으로 경험한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이야기는 쿠데타와 혁명의 이야기가 아니다. 잃어버린 열쇠와 늘어붙은 커피, 품에 안겨 잠든 아이의 이야기다. 역사는 수백만 개의 일상적 순간을 무수히 합친 것이다.       p.32~33

 

여행하는 철학자이자 철학적 여행가인 에릭 와이너 <천재의 발상지를 찾아서>가 새롭게 옷을 갈아입고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행복과 영성을 찾아 전 세계를 떠돌았던 에릭 와이너는 이 책에서 아테네, 항저우, 피렌체, 에든버러, 빈, 실리콘밸리 등 시대를 대표하는 천재들의 도시를 찾아간다. 그는 특정 시기에, 특정 장소에서 명석한 정신과 훌륭한 아이디어를 가진 이, 즉 천재가 풍성히 배출된 것일까에 의문을 가졌다. 그 동안의 천재에 대한 논의가 대부분 내면 혹은 두뇌에 집중되었다면, 에릭 와이너는 천재를 만든 '외부 요인'에 주목한 것이다. 그렇게 위대한 정신을 길러낸 일곱 도시를 직접 걸으면서 인간의 창의성이 품은 ‘도약의 비결’을 탐사한다.

 

고대 그리스인은 언제 어디서나 걸었다. 그들은 위대한 산책자인 동시에 위대한 사색가였으며 걸으면서 철학하기를 즐겁다. 에릭 와이너는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두 잔 마시고 가이드와 함께 아크로폴리스를 향해 걸어간다. 그는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걸으면서 관찰하고, 생각하고, 사유한다. 많은 천재들이 걸으면서 최고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디킨스는 도시가 잠든 밤마다 런던 뒷골목을 걸으며 줄거리를 뜯어고쳤고, 마크 트웨인은 방 안을 서성거리면서 집필한 걸로 알려 졌다. 흥미로운 것은 오늘날 그리스인들의 국민적 여가 행위가 바로 '앉아 있기'라는 점이다. 그들은 여름 햇볕을 쬐며 앉기도 하고, 겨울 찬바람을 맞으며 앉기도 하고, 빈도로경계석이나 버려진 골판지 등 아무 곳에나 앉는다. 오늘날 그리스인들이 걷기를 포기하고 앉기를 그토록 좋아하는 것에 대한 이유를 상상해보며 읽으면 더 재미있을 것이다.  그렇게 이 여행기는 기원전 450년 아테네와 관광객들이 북적이는 현재의 아테네를 넘나 들며 유쾌하게 펼쳐진다.

 

 

 

고백건데 나는 여기 카페인 때문에 왔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다. 빈 천재의 이야기는 커피숍 이야기를 빼놓고는 완성될 수 없다. 이 도시의 역사는 담뱃불 얼룩이 남은 탁자와 퉁명스럽지만 사랑스러운 종업원들의 얼굴에 쓰여 있다. 가게 안에서, 테라스에서, 빈의 천재성이 피어났다. 카페 슈페를에서 구스타프 클림트를 비롯한 일단의 미술가들은 빈 분리파 선언을 통해 빈의 근대미술운동을 일으켰다. "시대에는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라는 클림트의 유명한 구호는 과거와의 이러한 단절을 잘 보여준다. 빈의 커피숍은 연주회장처럼 세속의 성당이요, 사상의 인큐베이터요, 지적 교차로였다(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p.391

 

중국 항저우의 한 찻집에서 홀짝거리는 특별한 차의 맛, 르네상스 시대를 이끈 위대한 미술가들이 회합을 가졌던 이탈리아 피렌체의 어떤 방, 거대한 돌 귀신처럼 현무암에서 삐죽 튀어나온 에든버러성의 놀라움, 작가 키플링이 '무시무시한 밤의 도시'라고 불렀던 콜카타의 생생한 풍경들... 이 책은 마치 여행 에세이라도 읽는 것처럼 가볍게 페이지를 넘기도록 만든다. 지식은 소유하는 것이고, 지혜는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던 에릭 와이너의 말을 다시 떠올려 본다. 지혜를 얻기 위해선 기술을 습득하는 것처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그래서 부단히 여행을 떠나며 실제 경험을 통해 사유하기에 그의 글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덕분에 어렵고 딱딱한 철학도, 지루한 역사도, 에릭 와이너만의 새로운 인문학으로 재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유쾌하고 재미있는 에릭 와이너의 여행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어 읽다 보면 창조적 천재에 대한 통념이 완전히 바뀌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철학과 인문학, 지리학과 역사학을 넘나 들며 펼쳐지는 이 매혹적인 여행기를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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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
아시자와 요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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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제 의지로 시아버지를 죽였습니다.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
등을 꼿꼿이 펴고 차분히 진술하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망설임은 없었다. 깊이 반성하는 것처럼도, 얼굴에 철판을 깐 것처럼도 보였다. 
할머니의 그 말을 계기로 재판은 결판이 났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할머니가 살인이라는 불합리한 행위를 선택했다는 점은 살인이 어디까지나 충동적이었음을 증명하는 논거로 사용됐다.        -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 중에서, p. 46

 

영업부의 만년 꼴찌인 슈야는 처음으로 괜찮은 성적을 받게 되자 어리둥절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영업 성적표의 매상액란에 늘어선 숫자를 보다가 숨이 턱 막히고 말았다. 지난달에 작성한 매상 전표를 확인해보니 자신의 입력 실수로 한 개 주문인데, 열한 개를 수주했다고 입력한 것이다. 무려 35만엔이 매상에 추가됐으니 성적이 달라지는 게 당연했다. 고민 끝에 슈야는 자신의 실수를 은폐해버리기로 한다. 어차피 실수가 드러나면 상여금도 깎일 테고 변상해야 할 가능성도 있으니,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개인 사비로 35만 엔어치를 구입하고, 업체에는 원래 수주한 개수 만큼 배송해야겠다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운송 기사 역할까지 해가면서 일을 겨우 무마했는데, 배송 당시에 목격한 교통 사고로 인해 이 모든 일이 들통날 처지가 되고 만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선 모른 척 해야 했지만, 그럴 경우 억울한 피해자가 생길 수도 있었다. 슈야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니땐 굴뚝엔 연기는>과 <죄의 여백>이라는 작품으로 만났던 아시자와 요의 신작이다. 실제의 지역과 출판사를 배경으로 현실감을 부여해 괴이한 현상들을 이야기로 풀어내어 오싹한 재미를 선사했던 <아니땐 굴뚝엔 연기는>, 학교 폭력과 왕따를 소재로 저지른 죄에 맞게 주어져야 할 처벌,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죄의 여백'에 대해서 여러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던 <죄의 여백>에 이어 이번 작품에는 범죄의 계기와 동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다섯 편의 이야기를 선보인다.

 

 

 

“해서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잖아. 안, 잘 생각해봐. 이건 되는 일이야, 안 되는 일이야?” 평소 야단칠 때의 어조로 말하자 안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고 입매를 누그러뜨렸다. “장난을 한번 쳐보고 싶었던 거지? 괜찮아. 안이 반성했다면 할머니도 화 안 낼게.”
...되묻는 것과 동시에 안이 고개를 들었다. 안의 얼굴에 풀죽은 기색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알아듣지 못한 말이 형태를 이루었다.
—되는 일.           - '고마워, 할머니' 중에서, p.131

 

배타적인 마을 사람들로부터 집단 따돌림을 당하며 치매가 걸린 시아버지를 모시고 살던 할머니는 결국 살인을 저지른다. 마을 사람들이 아무리 욕을 퍼붓고 심술을 부려도 말대꾸를 하거나 반발하지 않았던 할머니는 대체 왜 그런 일을 벌인 것일까. 그냥 버려두고 마을을 떠나거나, 죽음을 위장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일흔 살에 가까웠던 할머니는 자신의 의지로 시아버지를 죽였다고, 용서는 바라지 않는다고 진술한다. 사실 할머니의 행동과 진술에는 놀라운 진실이 숨겨져 있었다. 표제작인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 외에도 다양한 이야기들이 소설집에 수록되어 있다. 자신의 업무 실수를 은폐하기 위해 증언을 거부하는 남자, 손녀를 아역 배우로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통제하려다 어린 손녀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는 할머니, 늘 언니처럼 되고 싶었던 동생이 갑작스럽게 밝혀진 언니의 범죄 사실로 인해 무너져 내리게 되는 이야기 등 치밀하게 계획된 범죄가 아니라 사소한 일로부터 시작되어 주인공을 궁지에 몰리게 하는 범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시자와 요는 독자들이 책을 덮은 후 바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야기, 책을 덮어도 기억에 남아 독자의 일상에 스며드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극중의 이야기를 통해 '살인자가 만인이 이해할 법한 동기를 가지고 있는 게 더 이상합니다.'라고 말한다. 살인의 동기는 이해가 안 되는 게 당연하고, 어쩐지 그럴싸하다 싶은 건 그저 전례가 있기 때문이라는 거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돈이 궁해서, 원한을 품어서, 복수를 위해서, 자신의 비밀이 폭로될 뻔했기 때문에, 배신을 당해서.. 등등... 누가 누군가를 죽였다는 말에 어떻게든 수긍하게 되는 건 결국 남의 일이기 때문이지, 보통의 사람들은 살인이라는 선을 넘을 일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속 따위는 완전하게 알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평생, 그 자신까지도 말이다. 이 작품은 그 틈새의 어둠과 내면을 비집고 들어가 사람들의 심리를 그려내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게 된 진짜 이유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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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
김남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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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삶을 관찰하기보다 경험하고 싶다. 삶이 줄 수 있는 더 많은 쾌락을 내 손으로 찾아내 누리고 싶다. 내 삶의 즐거움을 타인의 삶을 들여다봄으로써가 아니라 나만의 온전한 경험을 통해 스스로 찾고 싶다. 몸의 한계를 넘어서고 가능성을 확장하고 싶다. 내 육체를 매일매일 발견하고 개발하며, 몸으로 나를 표현하고 싶다. 이런 기쁨을 아는 몸이 될수록 외부의 충격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단단함이 쌓여간다. 내 육체를 움직여 만들어가는 충만함을 아는 몸은 생활을 꾸리는 일에도 성실해진다.     p.47~48

 

코로나로 인해 달라진 많은 것들 중에 가장 아쉬운 것은 바로 여행을 갈 수 없다는 것 아닐까. 마지막 해외 여행은 2019년 가을이었다. 그때만 해도 겨울이 지나 봄이 되었을 때 코로나와 마주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기에, 그게 마지막이었다는 건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2020년 한 해가 그렇게 실내에 갇혀 있는 상태로 흘러 가버리고, 2021년이 되었지만 코로나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여행은커녕 집 앞 카페에서 편하게 커피 한 잔 마시기도 쉽지 않은 일상 속에서 바로 그 여행이 직업이었던 이들은 어떻게 생계를 꾸려 나갈까.

 

이 책은 여행 경력 15년차 베테랑 여행가 김남희가 겪은 코로나 그 이후의 일상을 담고 있다. 서른넷에 방을 배고 적금을 깨 배낭을 꾸린 후 15년이 넘도록 유목민으로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살아왔지만, 코로나로 인해 여행가로서의 삶도 멈추었다. 그리하여 이 책은 그녀의 삶에서 처음으로 '여행'을 떼어놓은 글들로 이루어졌다. 생의 마지막날까지 여행을 하고 글을 쓰며 살아갈 수 있을까, 혼자서 나이 들어가는 일을 잘 견뎌낼 수 있을까, 밥벌이는 언제까지 가능할까 등의 고민이 조금씩 생겨났고, 달라진 환경에 맞춰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도 했던 시간들에 대한 기록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 온 세계를 돌아다니다 집에 갇힌 기분이 어떠냐고. 코로나라는 세계를 여행중이라 흥미진진하게 잘 지내요. 이렇게 태연하게 대답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코로나는 내 일상 풍경도 바꾸어놓았다. 무엇보다 혼자 사는 내가 정말 혼자가 되어버렸다!.... 코로나가 내게 일깨워준 건 나는 타인의 온기로 생명을 유지하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혼자 살기에 적합한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그건 일상의 공간을 혼자 점유한다는 것일 뿐. 사람에게 기대어 살아야만 했다.     p.144~145

 

싱글, 여성, 여행작가, 라는 타이틀만 보자면 제법 근사한 조합이다. 자유롭게 세계를 여행하며 살아가는, 하고 싶은 일만 해도 되는,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책임져야 할 대상이 오직 자신뿐인 라이프라니 얼마나 멋진가. 하지만 모든 일에는 이면이라는 게 있게 마련이고, 김남희 작가는 자신의 자유로움이 경제적 불안함과 동의어라고 말한다. 외로움과 불안함을 반반씩 섞어 자유 위에 덧바른 삶이라고 말이다. 다른 무엇보다 길 위의 삶이 간절했기에, 그것 하나를 얻기 위해 다른 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살아 왔는데, 그렇게 좋아하는 일을 하는 댓가로 근근이 살아가던 삶이 강제로 멈추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작가는 멀리 떠날 수 없는 시기에 여자들만의 방과후 산책단을 만들어 매일 다니던 뒷산 산책길을 함께 걸었다. 연말에는 페이스북으로 송년 맞이 사은대잔치를 열어 고마운 사람들에게 소박한 시상식을 하기도 하고, 에어비앤비를 운영하며 여행자들을 위해 정성껏 차린 아침식사를 대접하기도 하며 불안의 시기를 나름의 방법으로 살고 있다. 팬데믹 이후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왔던 많은 일상들이 대부분 사라져버렸지만, 그 속에서 다들 나름의 방법으로 각자의 일상들을 견뎌내고 있다. 단계적 일상회복이 되고는 있지만, 다시 예전처럼 자유롭게 여행을 하게 될까, 낯선 사람과 악수를 하고, 헬스클럽에 가고, 영화관에 가고, 아무 두려움 없이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를 거닐고, 걱정 없이 마스크를 끼지 않고 밖에 나갈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래서 이 책이 더 와 닿았던 것 같다. 누군가의 호의와 믿음, 따스한 눈빛과 다정한 말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이루었다고 말하는 작가의 글이 삭막하고, 불안으로 뒤덮인 일상 속에서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서로가 서로에게 다정한 위안이 되어주는 일상으로 계속 되기를 바래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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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11-25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인의 온기로 생명을 유지하는 사람˝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