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의 불편함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 지음, 김지현(아밀) 옮김 / 비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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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동생은 내가 코트를 벗지 않는 이유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해결책을 생각해내려고 애쓰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활동으로 저녁을 보낸다. 가끔은 그 애의 해결책이 정말로 효과가 있을까 봐 두렵다. 내가 동생에게서 무언가를 가져와버릴까 봐. 왜냐하면 우리에게 아직 욕망이 있는 한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안전하기 때문이다. 밭에 두엄을 뿌린 날 풍기는 숨 막히는 냄새처럼 우리는 목장의 어깨에 늘어뜨려져 있는 것이다. 내 붉은 코트의 빛이 바래는 것과 동시에 기억 속 맛히스 오빠의 모습도 흐려져간다.       p.97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겨울날, 네덜란드의 작은 농장에 사는 열 살 야스는 오빠와 동생, 가족들과 함께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식사를 한다. 그날 아침 큰오빠인 맛히스는 친구 두어 명과 함께 동네 스케이트 대회에 나가기로 되어 있어서 먼저 호수에 갈 예정이었다. 20마일짜리 경주였는데, 우승자에게는 겨자를 넣은 소 젖통 스튜 한 그릇과 2000년이라는 올해 연도가 박힌 금메달이 수여되는 대회였다. 야스는 오빠를 따라 가고 싶었다. 하지만 오빠는 야스가 더 크면 데려가 주겠다며, 털모자를 쓰고 미소 지었다. 오빠는 어두워지기 전에 오겠다고 했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호수 반대쪽 얼음이 너무 약했고, 사람들이 호수에 빠진 오빠를 꺼냈을 때는 이미 죽은 상태였다.

 

그 소식을 듣는 엄마, 아빠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했고, 야스는 그 모든 일이 착오였다고 누군가 말해주었으면 했다. 집에 있던 크리스마스트리가 치워졌고, 가족들의 삶은 칠흑 같은 암흑이 되어 간다. 죽음을 이해하기에 야스를 비롯한 아이들은 너무 어렸다. 그저 죽음이라는 것이 순식간에 파도처럼 덮쳐 온다는 것, 그리고 다시 돌이킬 수가 없는 거라는 걸 막연하게 느꼈을 뿐이다. 어른들이라고 어린 아들의 죽음을 쉽사리 받아들이고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족들의 식사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함께 미소 지을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상실감을 감당하지 못하는 부모들은 남겨진 아이들을 보살필 마음의 여유가 없었고, 야스는 오빠가 죽던 그날 입고 있던 빨간 코트를 한여름이 되어도 벗지 못한다. 마치 입고 있는 코트가 세상의 모든 상실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수 있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내 안의 폭력만이 소음을 일으킨다. 소음은 점점 커져간다. 마치 슬픔처럼. 벨러의 말마따나 오로지 슬픔만이 공간을 필요로 한다. 반면 폭력은 공간을 그냥 차지한다. 나는 죽은 나방을 손에서 떼어내 눈밭에 떨어트린다. 그리고 장화 신은 발로 그 위에 눈을 밀어 덮는다. 싸늘한 무덤이다. 화가 난 나는 축사 벽에 주먹을 휘둘러 손마디가 까지도록 후려친다. 이를 악물고서 축사 칸막이들을 바라본다.         p.326

 

이 작품은 네덜란드의 작가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가 스물일곱 살에 발표한 첫 소설이다. 그녀는 이 작품으로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연소 수상작가가 되었다. 이 작품은 여러모로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극중 야스의 가족처럼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의 가족도 농사를 짓고 목축을 했으며 네덜란드 개혁교회 신자인 부모님 아래 성경 말씀을 철저히 지키며 성장한 것이다. 그리고 작가 역시 세 살 때 오빠를 잃었고, 그 상실의 경험을 바탕으로 무려 6년에 걸쳐 집필한 소설이 바로 이 작품이다. '글을 쓴다고 치유되는 건 아니지만, 글을 쓸 때만 외롭지 않을 수 있었다'는 작가의 말이 너무도 공감되는 그런 작품이기도 했다.

 

열살 소녀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라 슬픔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죽음을 이해하고 싶은 어린 소녀가 경험하는 폭력성과 성적 욕구, 그리고 결국 자신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게 되는 과정은 너무도 마음이 아프다. 야스는 엄마의 등이 점점 더 굽어가는 모습을 보며 슬픔은 사람의 척추에까지 올라오는 거라고 이해하고, 아빠에게서 흘러나오는 슬픔이 죽은 소들에게서 나오는 묽은 똥과 피와 닮았다고 느낀다. 구제역으로 인해 애지중지 키운 소들이 죄다 살처분되는 현장에서도 아이들의 눈을 가려주지 않는 부모의 모습과 어른들의 보살핌에서 벗어난 아이들이 무심코 벌이는 행동들이 불편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졌지만, 어쩐지 그것이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 작품은 시종일관 고통과 상처를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으로 들어가 직접 경험하게 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죽음과 맞닥뜨릴 만큼 강한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당연히 죽음을 상대로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죽음과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럴 때 나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해 보게 만들어 주는 작품이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그 잔상과 여운이 오래도록 남는 작품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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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컵하우스 : 쫑긋 가족을 소개합니다 웅진 꼬마책마을 5
헤일리 스콧 지음, 피파 커닉 그림, 홍연미 옮김 / 웅진주니어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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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비는 심호흡을 하고 상자에서 찻잔을 꺼내 보았어요. 와! 그건 바로 찻잔 모양 인형의 집이었어요! 창문 여덟 개와 정문, 뒷문이 있고 나뭇잎과 꽃무늬로 화사하게 장식된 멋진 집이었죠. 세세한 부분까지 진짜 집과 똑같았어요. 파이프, 홈통, 문손잡이, 조그만 우체통까지도요! 찻잔 집 밑에는 찻잔 받침도 있었어요. 찻잔 받침은 멋진 돌길이 나 있는 예쁜 정원 모양이었죠.       p.15~16

 

도시 한복판에 있는 아주 높고 길쭉한 아파트의 꼭대기 층에 살았던 스티비와 엄마는 꽤 멀리 떨어진 시골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스티비는 지금 집과 학교, 친구들이 정말 좋았기에, 조금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시무룩해 있는 스티비에게 외할머니가 찾아와 새로운 집에 어울리는 '새로운 집' 선물을 건네 준다. 커다란 상자 안에는 차를 마시기에는 찻잔 모양을 하고 있는 인형의 집이 들어 있었다.

 

 

 

세세한 부분까지 진짜 집과 똑같고, 파란색 문 위의 조그만 문패에는 '쫑긋 가족'이라고 쓰여 있었다. 서로 연결되어 있는 찻잔 반쪽을 옆으로 젖히면,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거실과 방들이 있었다. 토끼 인형도 있었는데, 쫑긋 가족은 모두 네 명이었다. 아빠 토끼, 엄마 토끼와 누나 토리, 남동생 토미였다. 스티비는 쫑긋 가족을 작은 주머니에 넣은 채 티컵하우스를 들고 새집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토리는 도저히 자기 눈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으니까요. 토리 앞에는 웅장한 하늘과 엄청나게 커다란 정원이 펼쳐져 있었어요. 꽃들은 탑만큼이나 키가 컸고, 민들레와 데이지가 점점이 피어 있는 풀밭에 풀이 무성했어요. 무척이나 아름답고, 무척이나 무시무시하고, 무척이나 새로웠어요. 아빠는 저기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도대체 어떻게 아빠를 찾아야 할까요?         p.86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토끼 인형 가족에게는 사실 비밀이 하나 있었다.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면 진짜처럼 살아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스티비와 가족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살아서 움직이는 장난감을 한번쯤 상상해본 아이들이 너무도 좋아할 만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쫑긋 가족은 스티비와 함께 차로 이동하던 도중에 아빠 토끼가 차에서 떨어지고 만다. 거대한 풀숲에 혼자 떨어진 아빠 토끼 곁으로 아주 크고 단단해 보이는 독버섯이 있었는데, 집으로 가기 위해 점프를 하다 그만 거미줄에 얽혀서 옴짝달싹 못 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과연 아빠는 무사히 가족들을 찾아갈 수 있을까?

 

 

'티컵하우스'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인 이 책에서는 본격적인 스티비와 쫑긋 가족의 모험에 앞서 이들이 만나게 되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스티비네 가족이 시골로 이사를 가게 되고, 할머니로부터 선물 받은 티컵 하우스와 함께 새집으로 향하고, 그러다 아빠 토끼를 잃어 버리게 되는 이야기였다. 이 시리즈는 쫑긋 가족을 소개합니다,에 이어 쫑긋 가족의 케이크 만들기, 쫑긋 가족의 강아지 대소동으로 이어진다.

 

스티비는 앞으로 쫑긋 가족 넷과 무슨 모험을 벌일지, 내일은 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다재다능 요리사 토미, 든든하고 용감한 조수 토리가 쫑긋 가족만의 특별한 케이크를 만드는 이야기도, 스티비네 집에 놀러 온 강아지 리오 덕분에 쫑긋 가족의 집이 아수라장이 되는 한바탕 소동도 기대가 된다. 화사한 색상과 아기자기한 그림들과 귀여운 상상력이 만들어 낸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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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종말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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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거의 그때를 그냥 내버려 두고 싶었다. 왜냐하면 1939년의 일을 쓸 때면 나의 모든 증오가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증오는 사랑이 작동시키는 분비샘과 동일한 분비샘을 작동시키는 것 같다. 심지어 사랑이 초래하는 행동과 동일한 행동을 초래한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배우지 않았다면 과연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한 사람이 질투 많은 유다였는지 아니면 비겁한 베드로였는지 그들의 행동만으로 알 수 있겠는가?       p.47~48

 

소설가인 밴드릭스는 유부녀인 세라와 불꽃같은 사랑에 빠졌다 헤어진 이후 1년하고도 6개월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다. 그러더 어느 비오던 밤 세라의 남편인 헨리와 우연히 마주친다. 오랜만에 만난 밴드릭스에게 헨리는 아내의 일로 걱정이 있다고 말하며, 자신의 집으로 그를 초대한다. 헨리는 세라가 다른 남자와 만나고 있는 것 같다며 아내의 부정을 의심하고, 이에 호기심과 질투에 사로잡힌 밴드릭스는 사설탐정을 고용해 그녀의 뒷조사를 하게 된다. 그리고 오래 전 그녀의 갑작스러웠던 이별 통보 뒤에 숙며져 있던 뜻밖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밴드릭스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 작품은 1939년의 첫 만남부터 1944년 런던이 공습받은 날 갑작스러운 이별을 맞기까지의 이야기와 1946년 현재가 교차 진행된다. 사랑이 시작되고, 타오르다 사그라들고, 끝을 향해 가는 과정과 그 이후의 시간까지 모두 다루고 있는 셈이다. 그는 서두에 '이것은 사랑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증오의 기록에 더 가까울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사랑과 증오는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미워할 수 있고, 사랑하기 때문에 증오하기도 한다. 사랑과 질투로 시작되었던 이야기가 어느 순간 슬픔과 분노로 버무려지기도 하고, 아름답고 행복해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옹졸하고 변덕스러운 민낯을 보여주기도 하니 말이다.

 

 

 

수염과 부릅뜬 눈, 눈으로 쌓은 조그만 무덤, 영국 국기, 유행에 뒤처진 여자의 머리 같은 긴 갈기를 가진 조랑말들이 줄무늬 진 바위 사이를 나아가는 모습...... 그 죽음도 '마침표'였고, 여러 페이지에 밑줄을 긋고 느낌표를 붙이고 스콧이 집으로 보낸 마지막 편지의 여백에 단정한 글씨로 짧은 글을 써넣은 여학생 세라도 '마침표'였다... 신은 한때의 일시적인 기분을 이용하는 연인처럼, 있을 법하지 않은 일과 자신의 전설로 우리를 유혹하는 영웅처럼 음흉한 존재였다.        p.316~317

 

이 작품은 인간 실존과 신의 관계를 깊이 고찰한 가톨릭 소설가이자, 격변과 혼란의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중요하고 복합적인 인물로 여겨지는 작가인 그레이엄 그린의 장편소설이다. 그레이엄 그린의 작품은 단편소설집으로 처음 만났었다. 53편의 단편을 한 권으로 엮은, 무려 964페이지의 압도적인 분량을 자랑하는 그 책은 두툼한 페이지만큼이나 이야기꾼으로서의 매력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게 만들었던 기억이 있다. 이 작품은 <브라이턴 록>, <권력과 영광>, <사건의 핵심>에 이은 네 번째이자 마지막 가톨릭 소설로 분류되는 작품이다. 특히나 기존의 작품들이 모두 3인칭 시점으로 쓰였던 것에 비해, 이 작품은 처음으로 1인칭 시점으로 쓰였고, 그린의 실제 연애 경험이 반영된 자전적인 작품이기도 해 더욱 의미가 있다.

 

폐허가 된 전후의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결국 끝나버린 사랑과 잃어버린 연인을 기리는 애도의 기록이면서, 사랑과 증오의 이야기를 넘어서 신앙의 이야기로 확대된다. 서스펜스와 미스터리로 도덕과 신앙에 대한 질문을 던졌던 <브라이턴 록>에 이어 종교적 고뇌와 인간의 사랑이라는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 <사랑의 종말> 역시 그레이엄 그린의 문학 세계를 제대로 경험하게 해주었다. 그레이엄 그린의 아름다운 걸작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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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키스 스토리콜렉터 98
아나 그루에 지음, 송경은 옮김 / 북로드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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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게 분명해요. 저는 카피라이터지 사립탐정이 아닙니다."
아네모네가 반박하려는 걸 우르술라가 손을 들어 멈추게 하는 모습이 단의 눈에 들어왔다. "신문에선 저를 대머리 탐정이라 부르고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만 사실 그건 직업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개그에 가깝습니다."
"그래도 연쇄살인범을 찾아내시고......."         p.68

 

학생들에게 인기 많은 미술 교사 우르술라는 4개월 전에 만난 약혼자 야콥에게 푹 빠져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비록 자신의 나이가 쉰세 살에, 그의 나이가 스물아홉이었지만 말이다. 우르술라는 이미 두 번이나 결혼한 적이 있고, 딸을 얻었고, 이혼을 해본 경험도 있지만, 지금처럼 마법 같은 느낌이 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오랜 꿈이었던 호텔 운영을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그와 함께할 미래를 꿈꾼다. 하지만 그는 호텔 계약을 위해 그녀의 돈을 가지고 떠났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절망에 빠진 그녀는 유서를 남기고 한 무더기의 약을 삼킨다.

 

 

우르술라의 애제자인 라우라는 그녀가 수업 시간에 나타나지 않자 방으로 찾아가고, 교장 선생님과 함께 늦지 않게 발견해 병원으로 옮긴다. 다행히 그녀는 무사했지만, 자신이 겪은 일을 수치스러워해서 그를 고소하거나 문제 삼으려고 하지 않는다. 선생님이 안타까웠던 라우라는 아버지인 단 소메르달에게 와서 선생님하고 얘기 좀 해달라고, 아빠는 반쯤은 경찰이지 않냐고 부탁한다. 그렇게 단은 딸의 부탁을 받고 선생님을 만나러 기숙 학교로 향하고, 그 사기꾼을 잡기로 한다. 본격적으로 탐정이 되어 최초로 단독 사건을 맡게 된 것이다. 물론 여전히 그의 본업은 따로 있었고, 자신은 사립탐정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지갑이 아주 훌륭한 사과의 선물이 될 수도 있겠다고 단은 생각했다. 이 지갑이야말로 수사팀에게 지금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선의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는 플레밍한테 지갑을 조사할 우선권을 주고 싶었다. 맞다, 바로 그거다! 단은 몰래 지갑을 열어보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는 플레밍한테 당장 알려주려고 전화기를 들었다. 그러나 그가 이미 영광이 번쩍이는 것을 감지하는 동안에도 호기심이 스멀스멀 올라와 어느새 우세해졌다. 그전에 아무것도 안 봤던 것처럼 하면 그만이었다.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은가.           p.389

 

아나 그루에의 ‘단 소메르달 시리즈’, 그 두 번째 작품이다. 전체 인구 600만 명도 안 되는 덴마크에서 75만 부 판매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남긴 시리즈로 현재 7권까지 출간되었다. 덴마크에서는 TV 드라마로 제작되어 시즌3 방영을 앞두고 있고, 영화 판권도 계약되어 곧 스크린에서도 만나볼 수 있을 것 같다. 주로 무대는 작은 마을, 한정된 용의자, 매력적인 아마추어 탐정이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을 유머러스하게 그리는 미스터리를 '코지 미스터리'라고 하는데, 아나 그루에는 이 시리즈를 통해 북유럽 코지미스터리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 시리즈의 주인공인 단 소메르달은 잘나가는 광고기획자이자 카피라이터로 등장했다. 전편인 <이름없는 여자들>에서 광고대행사 쿠르트&코의 크리에이티브디렉터였던 그는 극심한 스트레스성 우울증과 번아웃 증상으로 직장을 쉬고 있다가 고교 동창인 플레밍의 수사를 도와주면서 거의 죽어버린 자신의 호기심과 직관력이 되살아나는 것을 경험했다. 빡빡머리 시절의 데이비드 베컴과 꼭 닮아 보이는 외모로 언론에서 '대머리 탐정'이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 전편의 마지막 장면에서 결국 광고 회사를 그만두는 것으로 가족들과 이야기하는 걸로 끝이 났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직접 운영하는 광고 회사를 개업한 지 4개월째 되는 걸로 나온다.

 

하지만 우연히 딸의 부탁으로 탐정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플레밍이 현재 수사 중인 사건과의 접점이 발견되고, 본격적으로 사건 해결에 뛰어 들게 된다. 광고기획자가 탐정 역할을 한다는 점도 흥미롭지만, 극중 단이 라이프 스타일 전문가로 티비에 출연한 적이 있을 정도로 집 안 구조만 보고서 사람들의 프로파일을 만들어낸다는 점도 특별한 재미를 더해준다. 풍부한 연륜을 자랑하는 수사관과 동물적 감각이 번득이는 광고쟁이가 함께 수사를 해나가는 과정도 신선하면서 매혹적이다. 북유럽 스릴러, 코지 미스터리를 좋아한다면 이 작품도 꼭 만나보길 추천한다. 탄탄한 구성과 섬세한 묘사, 그리고 독특한 캐릭터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에 빠져 들게 만들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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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벌레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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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 영리하지만 전혀 심오하지는 않은 짐 샌스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거대 생물체로 변신해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바닥에 등을 댄 자세(좋아하는 자세는 아니었다)를 유지하며 아연실색하여 멀리 있는 발들과 부족한 다리들을 바라 보았다. 다리가 네 개뿐이었고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벌써 그리워지는 원래의 작은 갈색 다리들이었다면, 아무리 절망적이더라도 허공에서 경쾌하게 흔들리고 있었을 터였다. 그는 공황에 빠지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가만히 누워 있었다.       p.13

 

누구나 이 작품을 읽기 시작했을 때 카프카의 <변신>에 대한 기시감이 들 것이다. 어느 날 아침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흉측한 모습의 한 마리 벌레로 변했다는 것을 알아 차린다. 불룩하게 솟은 갈색의 배, 가느다란 수많은 다리들을 보며 침대에 누워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언 매큐언의 <바퀴벌레>에서는 반대로 벌레가 사람으로 변신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다.

 

바퀴벌레 짐 샌스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다리가 네 개뿐인 거대 생물체로 변신했다는 것을 알아 차린다. 이상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것도 걱정스러운데, 그는 자신이 단독임무를 수행 중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물론 지금은 그게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런 일을 당하다니 억울하고, 너무 불공평하다고 혼잣말로 웅얼거리며 기억을 되짚어 보지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다. 보좌관인 것 같은 여자가 들어와 일정을 말해주면서, 우리는 짐 샌스가 총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각료 회의에 참석한 그는 참석한 각료들 거의 모두가 자신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아 차린다. 국가 최정예 부대 이삼십 마리가 지도부의 몸으로 들어가 사람이 된 것이다. 하지만 사소하고도 거슬리는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외무장관만은 원래 인간이었던 것이다.

 

 

 

우리 종의 역사는 최소 삼억 년입니다. 불과 사십 년 전만 해도 우리는 이 도시에서 소외집단으로 멸시당했으며 냉소와 조롱의 대상이었습니다. 최선의 경우가 무시당하는 것이었고, 최악의 경우엔 혐오에 시달렸지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원칙에 충실했고 우리의 신념은 처음엔 아주 느리게, 하지만 점점 가속도가 붙으며 굳어졌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는 핵심 신념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의 라틴명 블라토데아가 암시하듯, 우리는 빛을 피하는 생물입니다. 우리는 어둠을 이해하고 사랑합니다.      p.122

 

국가 최정예 부대 이삼십 마리가 지도부의 몸으로 들어가 사람이 된 것이다. 과연 인간이 된 바퀴벌레 짐 샌스는 종족의 미래를 위해 인간을 파멸시키기 위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해낼 수 있을까. 영국의 수뇌부를 장악한 최정예 바퀴벌레 군단은 계획에 걸림돌이 되는 인간 외무장관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이언 매큐언은 카프카의 <변신>을 연상시키는 이 소설로 브렉시트 사태에 대해 신랄하게 풍자한다. 브렉시트는 영국(Britain)과 탈퇴(Exit)의 합성어로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뜻한다. 2016년 국민투표로 결정되어, 유럽경제공동체(EEC)에 합류한 지 47년 만인 2020년 1월 31일 영국은 공식적으로 유럽연합을 떠났다. 브렉시트는 찬반 국민투표에서 투표에 참여한 영국 국민 51.9%가 찬성에 표를 던지면서 결정됐다. 그러나 이 합의안은 여러 쟁점으로 의회에서 잇따라 부결됐고,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연기됐다. 그 과정에서 총리가 사퇴하고, 조기 총선을 하는 등 포퓰리즘 정치의 모습을 보였다. 

 

이 사태를 보며 이언 매큐언은 '엄청나게 절망했다'고 밝혔으며, '유머와 풍자가 현시대에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응답이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그러니 이 작품은 브렉시트 사태에 대한 그의 목소리이기도 한 것이다. 사실 자기 잇속 챙기기에 급급한 정치인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비단 브렉시트 시대 영국 사회의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정치의 모습은 비슷하게 마련이니 말이다. 영국 의회를 장악한 바퀴벌레들의 활약을 만나 보자. 정치 풍자와 우화로서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이언 매큐언의 유머와 상상력만으로도 매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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