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클 크리크
앤지 김 지음, 이동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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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쓸 때의 박 유는 한국어를 쓸 때의 그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가 그렇겠거니 생각했던 대로, 언어의 유창함이 한풀 꺾이면서 유능함이나 성숙함도 한 꺼풀 같이 벗겨지는 이민자들은 어쩔 수 없이 어린아이 버전의 그들이 되고 만다. 미국으로 오기 전에 그는 자신이 맞닥뜨리리라 예상한 어려움들에 대한 대비를 했다. 말하기 전에 생각을 번역해야 하는 논리적 어색함이나, 맥락에서 단어의 뜻을 유추해야 하는 지적 부담감, 한국어에는 없는 소리를 내기 위해 혀를 익숙하지 않은 위치에 두어야 하는 신체적 난관. 하지만 그가 알지 못했고 예상하지 못했던 건, 이런 언어적 불완전성이 바이러스처럼, 발화 능력을 넘어 다른 부분들까지 오염시킨다는 사실이었다.     p.235

 

버지니아 주의 작은 마을 미라클 크리크, 워싱턴 D.C.에서 겨우 한 시간 거리인 그곳은 문명에서 몇 시간은 떨어진 것 같은 외딴 촌락의 분위기를 풍겼다. 자동차 대신 소들이 다니고, 고층빌딩 대신 허름한 나무 헛간이 있는, 마치 흐릿한 흑백영화 속으로 들어간 것 같은 그런 동네였다. '미라클'이라는 이름이 기대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기적이 일어날 곳 같아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그곳에 한국인 이민자 가족이 운영하는 고압산소 치료 시설인 미라클 서브마린이 있었다. ‘기적의 잠수함’이란 뜻의 마치 잠수함처럼 생긴 체임버 형태의 의료기기를 갖춘 미라클 서브마린은 고압산소요법을 이용해 자폐, 뇌성마비, 불임 등을 치료하는 일종의 대체의학 치료 시설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미라클 서브마린의 산소 탱크가 폭발했고, 그로 인해 걷잡을 수 없는 화재가 발생한다. 당시 서브마린 내부에는 자폐 등의 치료를 받는 아이 셋과 부모 둘, 그리고 불임치료를 받던 성인 남성 한 명이 있었다. 그리고 치료 시설의 주인인 박 유와 아내 영 유, 딸 메리가 인접 지역에 있었다. 사고로 두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네 명이 심각한 부상을 입어 신체가 마비되거나 절단되어 몇 달간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당시 치료 시설 주위에서 비과학적인 자폐 치료는 아동 학대라고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놀랍게도 사건의 용의자는 사망한 자폐 아이의 엄마였다. 항상 치료 시에 아들과 함께 산소 탱크에 들어갔던 그녀가 몸이 좋지 않다며 들어가지 않았고, 하필 그녀가 피운 담배와 성냥이 화재를 일으킨 것과 동일한 브랜드였던 것이다. 그녀는 아들이 자폐 진단을 받은 이후 하루에 두 번 왕복 몇 시간 거리를 오가며 고압산소 치료를 받게 하는 등 아이의 치료에만 매달린 열성적인 엄마였다. 정말 그녀가 방화를 저질러 자신의 아들을 죽이려 했던 것일까?

 

 

 

다른 '더 큰' 일이 많았기에 이 정도로 징징거려서는 안 되는 걸 알았다. 그러나 이런 일상적인 수치들, 뭉텅이로 허비되는 몇 분들이 그녀를 무너뜨렸고, '일반' 부모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 모를 거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물론 젖먹이를 키우는 엄마들은 그녀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겠지만 한시적일 때는 뭐든 참을 만하다. 하지만 이 짓을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 매일같이 해봐라. 팔순이 넘어서도 쉰 살 먹은 아픈 딸을 데리고 그때는 또 무슨 치료인지도 모를 치료실에 데려가는 길에... 내가 죽으면 누가 내 딸을 돌봐주나 걱정한다고 생각해보란 말이다.       p.400

 

이야기는 사건이 발생하고 일 년 후 벌어진 나흘간의 재판 과정을 디테일하게 그려내고 있다. 미라클 서브마린을 운영하는 박 유와 아내 영 유, 그들의 딸 메리, 그리고 화재 발생 당시 산소 탱크에 있었던 이들의 시점으로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작품은 2020년 에드거상을 비롯해 다수의 상을 수상하며 전미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 앤지 김은 열한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했고, 하버르 로스쿨을 거쳐 법정 변호사로 일했다. 그녀의 데뷔작인 이 작품에는 변호사로 일했던 작가의 경험과 병치레가 잦았던 아이를 키운 엄마로서의 경험, 그리고 영어를 말하지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채로 이국땅에서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이민자로서의 정체성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이 작품은 법정극으로서도 매혹적이지만, 무엇보다 각각의 인물들의 입장에서 섬세하고도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는 심리 묘사가 압도적이다. 특히나 장애아동을 키운다는 것이 단순히 삶이 변하는 게 아니라, 사람 자체가 바뀌고 중력의 축이 변경된 평행 우주로 이동하는 것이라는 것을 일상의 에피소드들로 차곡차곡 쌓아서 보여주고 있어 진짜 현실로 체감하게 해준다. 그리고 이민자의 가족이 타국에서 겪게 되는 그 모든 것들 또한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절대 알 수 없는 부분들이었다. '한국어를 쓰는 박이 배울 만큼 배운, 존경받아 마땅한 권위적인 남자였다면, 영어를 쓰는 그는 귀가 들리지 않고, 말을 못하며, 매사에 자신 없고, 걱정하고, 서투른 머저리'였다는 문장처럼 예리하게 그려내는 묘사들이 심장을 툭툭 건드리는 순간들이 많았다. 덕분에 최근에 읽었던 그 어떤 소설보다 포스트잇 플래그를 많이 붙인 작품이 되었다. 문장도, 묘사도 뛰어 나고, 서사와 구성, 반전, 플롯과 묵직한 감동까지 뭐 하나 놓치지 않는 작품이었다. 그날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 났는지에 대한 미스터리가 만들어 내는 서스펜스와 저마다의 ‘진실’과 '비밀', 그리고 각자의 사정과 입장에서 오는 차이에서 오는 극적인 긴장감, 부모로서의 죄책감과 자괴감, 기적을 바라는 마음과 희망이 사라져버리는 순간의 안타까움이 어우러지면서 만들어 내는 드라마의 감동이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한 동안 여운처럼 남는다. 그 어떤 찬사를 갖다 붙여도 부족할 만큼 근사한 작품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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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생의 무덤 모중석 스릴러 클럽 50
로버트 두고니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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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퀸 앤 애비뉴에서 살해당한 노파 기억나? 미제로 남은 사건 말이야."
"노라 스티븐스?"
"범인이 누군지 몰라 찜찜하지 않아?"
"당연히 찜찜하지."
"20년 동안 그랬다면 얼마나 찜찜할지 상상해봐.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살해당했다면, 해답을 얻기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겠어?"      p.208

 

트레이시와 세라는 각별히 사이가 좋은 자매였다. 그 날은 워싱턴 주 카우보이 액션 슈팅 챔피언을 가르는 결승전 날이었다. 스물두 살의 트레이시는 이미 세 차례 우승했지만, 작년에 네 살 어린 동생 세라에게 챔피언 타이틀을 빼앗겼다. 올해 자매는 거의 동점으로 결승에 올랐고, 트레이시는 한 발, 세라는 두 발이 빗나가 트레이시가 우승을 한다. 하지만 트레이시는 세라가 일부러 실수해 자신이 우승하도록 했다는 것을 안다. 그날 저녁 남자친구인 벤에게 청혼을 받았고, 그 준비를 동생과 벤이 함께 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필 그날은 폭풍이 예고된 날이었고, 벤과의 저녁 약속 때문에 세라를 집까지 데려다 주지 않고 혼자 보낸 것이 트레이시는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그 후 20년 동안 트레이시는 세라를 다시 보지 못했다.

 

세라는 실종됐고, 성범죄 전과가 있는 에드먼드가 범인으로 체포되어 정황증거만으로 1급 살인 유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트레이시는 재판에서 의문이 들었던 부분이 있었고, 진실을 찾기 위해 형사가 된다. 사건 이후 20년, 고향의 숲에서 세라의 유해가 발견된다. 드디어, 동생이 발견된 것이다. 하지만 트레이시의 가슴속에 차오르는 감정은 슬픔이나 회한, 자책감이 아니었다. 분노였다. 그녀는 동생의 실종이 사람들의 추측과는 다르다는 것을, 그 사건에 뭔가 더 있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마침내 그걸 입증할 수 있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사건 이후 무려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기억도 바래지고, 증거도 대부분 사라진 지금, 트레이시는 그날의 진실을 밝힐 수 있을까.

 

 

 

"걱정하지 않는 눈치로군."
"어차피 벌어질 일은 벌어져, 밴스. 이제 와서 마음을 바꾸는 건 아무 도움도 안 돼."
"한 번도 의심 안 해봤어?"
"우리가 옳은 일을 했는가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캘러웨이는 술을 다 마시고 아내가 폭풍에 대해 경고했던 일을 떠올렸다. "자네도 더 늦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 가서 아내한테 키스해줘.      p.366

 

이야기는 평범한 스릴러처럼 전개된다. 한 여성이 사라지고, 재판 과정에서 진실은 조작되고, 범인은 날조되어 유죄 판결을 받는다. 그렇게 사건은 그대로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갈 즈음, 수십 년 동안 진실을 밝히겠다는 신념으로 버텨온 가족이 형사가 되어 모든 걸 다시 파헤치기로 한다. 물론 그 과정이 쉬울 리 없다. 범인으로 지목되어 유죄 판결을 받은 자가 무고한 시민이 아니라, 가석방으로 풀려난 강간범이었으니 말이다. 법의 수호자인 형사가 유죄 판결을 받은 살인범에게 새로운 재판 기회를 주려는 것이었으니 언론의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500여 페이지 정도 되는 페이지의 반 정도가 바로 그 과정에 사용된다. 그리고 2부가 되면 본격적인 법정극이 펼쳐진다. 치밀하게 구성된 법정 장면은 긴장감을 차곡차곡 쌓아가면서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드디어 20년 전 사건을 다시 수사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고 돌아서는 순간, 작가는 그 모든 것을 완전히, 뿌리부터 뒤집어 버린다. 반전이 단순한 깜짝쇼가 아니라, 겹겹으로 숨겨진 비밀에서 오는 먹먹함과 함께 오기 때문에 그 충격과 여운에서 한동안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렇게 후반부의 100여 페이지는 어떻게 읽었는지 모를 정도로, 휘몰아치는 광풍에 휩싸인 것처럼 지나간다.  책을 펼치면 그야말로 끝까지 멈출 수 없는, 제대로 된 페이지 터너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로버트 두고니의 '형사 트레이시 시리즈'의 첫 번째 이야기이다. 이 시리즈는 현재 8권까지 출간되었고, 전세계 25개국에 번역 출간되어 800만 부 이상 판매되었으며, 곧 영상화를 앞두고 있기도 하다. 변호사였던 작가 두고니는 법정 소설로 데뷔하며 '존 그리샴의 성취를 이을 후계자'로 불리기도 했다. 트레이시 시리즈 외에도 여러 시리즈를 출간한 작가이기에 국내에 왜 이렇게 늦게 소개되었나 싶을 정도로 궁금했던 작가였다. 그리고 이 작품을 읽자 마자, 로버트 두고니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형사 트레이시 시리즈부터 아직 소개되지 않은 다른 시리즈들도 모두 국내에서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래 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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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세이지 작품집 & 원근법 테크닉 - 일러스트를 위한 투시도법 그리다
요시다 세이지 지음, 고영자 옮김 / 영진.com(영진닷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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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요시다 세이지의 첫 화집이다. 그의 개성이 가득 담긴 작품이 53점이나 수록되어 있고, 퀄리티도 아주 훌륭하다. 게다가 그의 작화 노하우를 배워볼 수 있도록 작품과 투시도법, 풍경과 배경을 그리기 위한 테크닉을 소개하고 있어 일러스트와 배경 그림에 관심이 있다면 아주 도움이 될 것 같다.

 

 

이 책은 풍경과 배경을 그리기 위한 효과적인 테크닉을 설명해준다. 퍼스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기법부터 제대로 배운 사람도 적용하기 쉬운 퍼스의 기술까지 다양한 테크닉을 소개하고 있으니, 자신의 그림에 활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일러스트의 제작 과정을 통해 그림이 어떻게 그려지는지 작가의 노하우를 배울 수 있어 요시다 세이지로부터 강의를 듣는 듯한 기분도 든다. 퍼스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지면으로부터의 높이를 맞추기만 하면 어떻게든 된다는 것, 크기를 맞추어 그릴 때 평면적으로 되지 않도록 하는 방법, 앙각과 부감으로 그리는 방법, 그럴듯한 자연 풍경을 그리는 팁 등 초보자가 읽기에도 어렵지 않고, 전공자라면 제대로 가이드가 되어줄 노하우들이 가득하다.

 

 

그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 중에서도 배경을 메인으로 그리는 사람은 정말 적어서 만화, 애니메이션, 일러스트, 게임 등의 업계에서 배경 쪽은 항상 일손이 부족하다고 한다. 무엇보다 배경은 유행을 타지 않아 한 번 그릴 수 있게 되면 오래 일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니, 배경을 그리는 전문가가 되어 보는 것도 좋다고 요시다 세이지는 적극 추천하고 있다.

 

 

특히나 원근감이 있는 그림을 그리기 위한 이론인 퍼스에 대해서 기본 지식부터 1점 투시, 2점 투시, 3점 투시 등 종류와 그리는 법, 복수의 소실점이 있는 풍경을 그리는 방법 과 다양한 퍼스의 활용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고 있어 원근법 테크닉이 필요하다면 배울 점이 많을 것 같다.

 

마지막에는 요시다 세이지의 긴 인터뷰가 세 페이지에 걸쳐 수록되어 있다. 그의 작화에 대한 신념과 미의식, 하루 스케줄과 일상 등 히스토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다. 요시다 세이지는 '배경 작업에서는 단순히 풍경이나 건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감정에까지 작용하는 그림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만화나 애니메이션, 게임에서 배경에 따라 장면의 분위기가 크게 좌우되는 것을 보면 그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배경을 가능한 한 단순화하고 즐겁게 이해하고 싶다면, 유명한 배경 아티스트 요시다 세이지의 작품과 그의 작화 노하우를 함께 배워보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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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시민 불복종 (합본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1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이종인 옮김, 허버트 웬델 글리슨 사진 / 현대지성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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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의도적인 삶을 살고 싶었으므로 숲속으로 들어갔다. 삶의 본질적인 사실을 직면하고, 삶이 내게 가르쳐주는 것을 배울 수 있을지를 살폈다. 죽을 때가 되어서야 내가 온전한 삶을 살지 못했음을 자각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삶은 너무나 소중한 것이기에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불가피하지 않는 한, 이런 목표를 단념하고 싶지 않았다... 삶을 넓게 바싹 베어내면서 구석으로 몰아붙여 삶의 가장 밑바닥 조건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p.121

 

내가 <월든>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에이모 토울스의 눈부신 데뷔작 <우아한 연인>이라는 작품을 읽고 나서였다. 극 중 남자 주인공 팅커가 오래 전 여자 주인공 케이트가 무인도에 난파할 때 소로의 월든을 가져가고 싶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그 책을 읽기 시작하는 걸로 나왔었다. 케이트는 엄청난 책벌레였고, 작품 곳곳에서 고전 문학들이 배경으로 보여지고,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 나는 8년 전 이 작품과 사랑에 빠져서 <월든>을 읽어 보려고 책을 주문했는데, 받아 보고 나니 이미 내 서재에 있었던 책이었다. 덕분에 지금 나에게는 <월든>이 각기 다른 버전으로 세 권이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출간된 현대 지성 클래식의 <월든>이 궁금했던 이유는, 전문 사진작가 허버트 웬델 글리슨이 소로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찍은 66장의 사진을 본문 순서에 맞게 재배치해 수록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월든>을 읽으면서 누구나 눈 앞에 월든 호수와 숲속 풍경들이 그려지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 사진들을 보면서 이 책을 다시 읽는 다면 얼마나 근사한 경험이 될까 기대가 되었다. <월든>은 국내에 꽤 많이 출간되어 있지만, 이렇게나 많은 풍경 사진이 함께 수록된 버전은 유일하다. 그러니 나처럼 이미 <월든>을 가지고 있거나 읽었더라도, 이번에 출간된 현대지성 클래식 버전으로 꼭 다시 만나보길 권하고 싶다. 근사한 사진들 덕분에 <월든>의 감동이 두 배가 되니 말이다.

 

 

 

단 한 차례 내린 부드러운 비가 풀을 훨씬 더 푸르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더 좋은 생각이 우리 머릿속에 들어오면 전망은 그만큼 밝아진다. 우리가 항상 현재에 살면서, 풀이 자기에게 내린 약간의 이슬방울로 인한 영향도 인정하듯 우리에게 벌어지는 모든 사건을 잘 활용할 수 있다면 축복받은 존재가 될 것이다... 계절은 이미 봄인데 우리는 겨울 속을 배회하고 있다. 상쾌한 봄날 아침에 모든 사람의 죄악은 용서된다. 이런 날은 악덕과 휴전하는 날이다.       p.415

 

소로는 매사추세츠주 콩코드에 있는 월든 호수의 가장자리에 손수 집을 지었고, 직접 노동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생활을 2년 2개월이나 했다. 이웃으로부터 1마일 떨어진 숲속에 혼자 사는 기분이란 어떨까. 외롭거나 무섭지는 않았을까. 도시의 문명 생활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사는 게 불편하고, 어렵지는 않았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을 벌어 옷을 사고, 물건을 구입하고, 집을 마련하는 등 언제나 뭔가를 더 많이 얻으려고 한다. 그에 비해 소로는 훨씬 적은 것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우려 한 것이다.

 

그는 도끼를 한 자루 빌려 윌든 호수가 있는 숲속으로 들어갔고, 집을 지으려고 하는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가 목재로 쓰기 위한 소나무를 벌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집을 짓고, 농사를 지었고, 자신이 직접 키운 곡식만 먹으며, 그 양도 딱 먹을 만큼으로 한정했다. 그리고 마을에서 측량 일, 목수 일, 다양한 일용 노동을 해서 돈을 벌었고, 그 외에 세탁과 옷 수선 등 금전적 지출을 위해 농산물을 수확해 팔기도 했다. 온갖 불필요한 물건들에 잔뜩 둘러 쌓인 채 살고 있으면서도, 늘 더 많은 것이 필요한 현대인들에게 소로의 삶은 대단히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이 책에는 소로가 같은 시기에 쓴 <시민 불복종>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월든>과 <시민 불복종>은 하나로 읽으면 더 좋다. 특히 ‘시민의 불복종’이라는 말은 정부나 점령국의 요구, 명령에 대하여 폭력 등을 취하지 않고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소극적인 저항의 의미로 널리 쓰이고 있을 정도로 하나의 개념어가 되었다고 하니, <월든>만큼이나 중요한 작품이기도 하다.

 

오래 전 <월든>을 처음 읽었을 때는 다소 지루한 부분도 있었고, 어렵게 느껴졌던 부분도 꽤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번에 다시 만난 <월든>은 굉장히 술술 잘 읽혔다. 가독성이 뛰어난 번역 덕분인 것 같기도 하고, 함께 수록된 근사한 사진들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50여 페이지에 달하는 역자의 풍성한 해제가 말미에 수록되어 있으니 작품의 이해를 도와줄 것 같다. 한 해를 마무리하게 되는 요즘같은 시기에 이 책을 읽으면서 단순하고, 소박한 삶의 미덕을 배우고 내 삶을 한 번쯤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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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법칙 - 권력, 유혹, 마스터리, 전쟁, 인간 본성에 대한 366가지 기술
로버트 그린 지음, 노승영 옮김 / 까치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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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쓰고 싶으면 책을 쓰고, 음악가가 되고 싶으면 음악을 하라. 사업을 벌이고 싶으면 창업하라. 실수나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실패에서 가장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음악이나 사업의 대가를 찾아 졸졸 따라다녀라. 그들의 발치에서 배우고 그들이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하라. 당신이 숙달하고자 하는 세계나 업계에 푹 빠져들어라. 당신이 세상에서 읽을 수 있는 어떤 책보다, 들을 수 있는 어떤 강좌보다 실천을 통한 배움이 더 낫다.       p.57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하루가 하나의 꼭지로 구성되어 하루에 한 페이지씩, 365일 1년 동안 할 수 있는 책들이 인기를 끌면서 다양한 출판사에서 여러 장르의 책들이 나왔었는데, 이번에는 로버트 그린이다. 이 책은 특히나 로버트 그린이 자신의 저작과 미공개 원고에서 직접 핵심을 추출해내고 하루하루 써내려갔기에 더윽 의미가 있다. 그의 전작들을 흥미롭게 읽어 왔다면 이번 책도 꼭 만나봐야 할 것이다.

 

이 책에는 그 동안 로버트 그린이 쓴 5권의 책과 현재 집필 중인 <숭고함의 법칙>, 그리고 지난 몇 년간의 인터뷰와 강연, 그동안 쓴 블로그와 온라인 에세이에서 추려낸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로버트 그린은 인간 관계, 심리에 관한 책으로 유명한데, 독특하게도 전공이 심리학이 아니라 고전학이다. 그래서인지 여타의 심리서와는 뚜렷하게 차별화된 스타일로 글을 써왔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권력의 법칙>은 마키아벨리 『군주론』의 현대판이라 불릴 정도였고, 고전과 역사 속 인물과 사건에서 다양한 상황을 끄집어내어 현대사회에 맞는 치밀한 전략으로 재구성한 <전쟁의 기술>은 ‘21세기 판 손자병법’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유혹의 기술>은 파리스와 헬레네가 등장하는 그리스로마 신화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유혹이라는 게임의 공격과 방어의 모든 기술을 담았으니 말이다.

 

그 모든 글들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매일 만날 수 있도록 구성해 1일 1법칙, 즉 하루에 하나, 오늘의 법칙을 만날 수 있어 가독성도 매우 뛰어난 책이다.

 

 

우리 인간은 순간을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우리 본성의 동물적인 부분이다. 우리는 보고 듣는 것에, 사건에서 가장 극적인 부분에 무엇보다 먼저 반응한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현재에만 매여 있는 동물은 아니다. 인간의 현실은 과거를 포괄한다. 모든 사건은 역사적 인과의 끝없는 연쇄 속에서 이전에 일어난 무엇인가와 연결되어 있다. 현재의 문제는 과거에 깊은 뿌리를 둔다. 인간의 현실은 미래도 아우른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은 먼 미래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p.404

 

새해의 시작인 1월 1일에는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성취하도록 운명지어진 일, 소명을 발견하고, 2월 8일에는 완벽한 멘토를 찾아 보고, 3월 11일에는 집중력을 발휘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 보자. 4월 12일에는 적과 화해하고, 그를 우리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보고, 6월 20일에는 자신의 취약점을 권력으로 탈바꿈시키는 법을 배워 보자. 각각의 날짜에 해당되는 내용 아래에는 출처가 된 책의 제목과 장이 표시되어 있으니, 더 깊이 있게 공부해보고 싶다면 해당 책을 찾아서 더 읽어 보아도 좋을 것 같다.

 

그때그때의 관심사에 따라서 원하는 부분을 골라 읽어도 무방하지만, 로버트 그린이 추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 책을 집어든 첫날부터 하루에 한 꼭지씩 읽는 것이다. 새해가 이주 정도밖에 남지 않았으니, 새해의 첫 날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전쟁의 기술>, <권력의 법칙>, <유혹의 기술> 등 로버트 그린의 책은 '벽돌책'으로 유명하다. 이들 책 모두 600페이지를 가뿐히 넘으며 700페이지 가까이 되고, <인간 본성의 법칙>은 무려 900페이지가 넘는 벽돌책이다. 무시무시한 분량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가독성이 뛰어나고 내용 자체는 어렵지 않아서 상당히 잘 읽히는 편이지만, 압도적인 분량 때문에 선뜻 시작하기가 부담스러웠을 수 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인간 심리의 대가, 로버트 그린의 핵심을 담고 있는 이 책으로 직접 만나보면 어떨까.

 

권력과 유혹, 전쟁, 전략, 정치, 심리, 생산성 등을 아우르는 인간 삶의 모든 측면에 대해 조언해주는 매일의 법칙들도 흥미롭지만, 새로운 매달이 시작하기 전에 로버트 그린이 들려주는 개인적인 경험들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개인적인 경험과 책을 쓰는 과정, 책을 출간하고 나서의 변화 등 그가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통해서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생생한 인생 지침을 배우게 해주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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