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은 장미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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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수진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뿐 아니라 자신에게서도 도망치고 싶었는지 모른다. 잘못된 장소로 와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해도 되돌아 나가서 다른 경로를 찾기에는 두려운 나이, 결코 나아질 리 없는데도 그럭저럭 머물게 되는 계약직 생활, 그리고 그런 사실들을 불현듯 깨닫게 만들었던 깨어지고 부서져서 결국 사라져버린 관계들. 수진은 이곳으로 떠나오며 그녀를 규정하는 나이와 삶의 이력에서 잠시나마 이탈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 '장미의 이름은 장미' 중에서, p.90

 

책을 사서 볼만큼 용돈이 충분하지 않던 어린 시절. 나는 동네 책방이나 도서관에 가서 주로 책을 빌려 보았다. 책은 읽어야 하는 기간이 지나면 반납을 해야 했고, 반납하고 나면 다시는 볼 수가 없었으므로 가능한 많은 문장들을 머리 속에 집어넣으려고 애썼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 나의 최애는 은희경 작가였다. 초기작인 <타인에게 말 걸기>와 <새의 선물>은 여러 번 빌려 보고, 필사하고, 결국 책을 사서 구입했을 정도로 많이 읽었던 작품들이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보면, 성격이며 외모며, 환경이며 너무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유일한 교집합은 그때 좋아했던 작가들을 다행히(?) 아직도 좋아한다는 것,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들의 신작이 출간되면 챙겨 본다는 것뿐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놀랍게도, 은희경 작가는 전성기때의 작품들에 비해서 힘이 떨어지기는 커녕 더 원숙한 깊이와 고루하지 않은 감성을 여전히 보여준다는 것이다. 장미의 이름은 장미, 당신의 이름은 당신, 그리고 은희경의 이름은 은희경, 이라는 문장이 떠오를 만큼, 은희경은 그 이름에 걸맞는 작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뉴욕 -여행자 소설 4부작으로 묶인 이 연작소설집은 팬데믹이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지난 2년 동안 쓰였다. 2020년 봄과 가을, 2021년 여름과 겨울에 발표된 네 편의 이야기는 뉴욕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뉴욕에 살고 있는 친구의 집에 열흘 정도 머물 계획으로 한국을 떠나온 이가 바라보는 낯선 타지의 풍경들, 이혼을 하고 홀로 뉴욕으로 떠나온 이가 어학원에서 만난 인물들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미국에 네번째 방문했지만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이가 현지의 친구들 사이에서 느끼는 이방인으로서의 감정, 문학 행사로 뉴욕을 방문한 오십대 소설가와 팔십대의 어머니와의 불편한 동행기가 그려진다. 각각의 이야기는 따로 완결성을 띠고 있지만, 연작소설이기도 하므로 인물들과 배경이 겹치고 교차된다.

 

 

 

처마밑 난간에 기댄 채 한참 동안 말없이 그쪽을 바라보던 어머니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늙으면 이상하게 평소 기억하던 것보다 더 어렸을 때 일이 기억이 나. 내가 마당에서 아장아장 걷고 있는데 우리 아버지가 마루끝에 앉아서 웃으며 손짓하던 것, 그런 게 말야. 그걸 뭐라고 해야 할까." 어머니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너는 작가니까, 제대로 말할 수 있을 텐데." 그런 다음 이렇게 덧붙였다. "그게 꼭, 죽으려고 연습하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어. 지금처럼." 어머니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 '아가씨 유정도 하지' 중에서, p.246

 

영화와 사진 속에서 뉴욕은 언제나 높은 빌딩과 초록의 공원에 둘러싸여 있고, 분수대 앞에서 열리는 거리 공연과 화려한 다리의 야경 등으로 상징된다. 하지만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라는 작품을 통해 느끼게 되는 뉴욕의 모습은 그것과는 정반대이다. 끔찍한 더위와 가로막힌 창문들, 거리에 샇여 있는 쓰레기들과 시간을 지키지 않은 우편물들이다. 빌딩숲이 없는 대신, 지은 지 백 년은 넘었을 만한 낡고 오래된 집들이 있다. 이국의 낯선 곳에서 두 친구가 함께 보내는 짧은 시간 동안 서로에 대한 오해로 어긋나기만 한다. 각자가 알지 못하는 서로의 사정과 성격은 너무도 달랐고, 도대체 쟤는 왜 저러는 걸까와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를 따로 오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작가는 '장미의 이름은 장미'라는 작품에서도 서로의 다름에 대해서 세심하게 그려내고 있다. 자신의 소심함과 방어적인 수동성에 신물이 나서 갑자기 어학연수라는 최악의 결정을 내린 주인공이 세네갈 대학생과 나누는 기묘한 우정, 영어 실력이 부족한 덕분에 한국에서의 성격과는 전혀 달라지는 말투와 무심코 내뱉게 되는 거짓말들이 만들어 내는 또 다른 정체성이 뉴욕이라는 세계를 만나면서 더 예민하고, 다정하게 그려진다.

 

살면서 가끔 생각한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와 결코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아주 멀리 왔다. 그렇다면 나를 지금의 인생으로 데려다 놓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잃어버린 나를 찾고 싶을 때 나는 책장에 꽂힌 책을 꺼내어 페이지 속으로 숨곤 했다. 책 속의 어떤 문장에서 오래 전 나를 발견하기도 하고, 어느 행간에서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읽은 책들은 내가 살아온 삶의 일부이고, 모든 텍스트는 언어로 만들어진 또 다른 세계이다. 언젠가 팬데믹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해외 어디든 원하는 대로 여행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이 작품을 다시 읽어 보고 싶다. 2020년의 내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지, 이 작품을 읽으면서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다시 기억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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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피플 JGB 걸작선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지음, 조호근 옮김 / 현대문학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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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우리 목표물은 계급 구조인 거로군요. 보편적인 현상 아닙니까. 미국에서도, 러시아에서도……?”
“물론이죠. 하지만 계급 구조가 정치적인 통제 수단으로 사용되는 곳은 여기뿐이에요. 그 실제 목적은 프롤레타리아를 억압하는 게 아니라 중산층을 억제해서 얌전히 굴종하게 만드는 거고요... 이곳 사람들은 중산층의 꿈이라는 강렬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어요. 삶의 목적이 그거죠. 자유주의적인 교육, 시민의 도리, 법규 준수 따위요. 자기네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사로잡혀서 빈곤에 허덕이고 있는 거예요.”      p.140~141

 

심리학자인 데이비드 마컴은 아내와 함께 플로리다에서 열리는 산업심리학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공항으로 떠나려던 참이었다. 공항에 문제가 생겨서 비행기가 전부 지연됐다는 연락을 받고,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공항의 2번 터미널에 폭탄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화면에 떠오른 잔혹한 영상들 위로 세 명이 사망했고, 스물여섯 명이 부상을 입었다는 자막이 나온다. 그리고 폭발의 충격으로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승객들과 경찰과 공항 보안 요원들 사이로 눈에 익은 한 여자가 보인다. 아무래도 그녀가 전부인인 로라같다고 생각한 그들은 직접 확인하기 위해 공항 근처의 병원으로 향한다. 결국 주동자는 물론이고 범행 성명조차 없는 이 테러로 로라는 죽음을 맞이하고, 데이비드는 죽음의 무작위성에 충격을 받는다.

 

과거에 노면전차 사고로 인해 다리가 불편한 상태로 살아야 하는 데이비드의 현재 부인 샐리는 그에게 로라의 죽음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어내, 범인을 알아내길 바란다. 그는 샐리를 위해서라도 공항 폭탄 테러의 진실을 알아내겠다고 생각하고, 관련된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고군분투한다. 그러다 런던의 호화로운 동네인 첼시마리나로 향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마침내 사건에 대한 실마리를 발견하게 된다. 중산층의 계급투쟁, 혁명의 불길, 20세기를 전복시키려는 급진적인 사상 등이 주요 스토리의 소재이지만, 생각보다 어둡거나 무겁지만은 않다. 뒤틀린 군상들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과격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이고, 당혹스러울 정도로 허무하기도 하며, 놀라울 정도로 날카롭고 예리하기도 하다. 그리고 겉보기에는 제정신인 사람들이 얼마나 괴팍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어, 살짝 정신이 나간 사람들 틈에서 길을 잃어 버리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으며 읽어야 하는 독특한 경험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렇습니다. 그곳의 수많은 죽음은 무의미하고 불가해한 것이었지만, 어쩌면 바로 그게 요지일지도 모르니까요. 동기 없는 행동은 우주의 움직임을 궤도 위에서 멈추게 합니다. 제가 당신을 죽이려 들면, 그건 여느 부랑자 범죄나 다를 바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당신을 실수로, 또는 아무 의미도 없이 죽이면, 당신의 죽음은 단 하나뿐인 중요성을 획득하는 거지요. 우리는 세계를 제정신인 곳으로 인식하기 위해 동기에 매달리고, 인과관계에 의존합니다. 그런 지지대를 전부 걷어차 버리면 무의미한 행동이야말로 진정 의미가 있는 유일한 행동임을 깨닫게 돼요. 저도 깨닫기까지 한참 걸리기는 했지만, 당신의 ‘죽음’이야말로 제가 기다리던 청신호였던 셈이지요.”      p.416~417

 

<헬로 아메리카>, <콘크리트의 섬>에 이은 'JGB 걸작선' 그 세 번째 작품이다. 이 시리즈는  2009년 타계한 밸러드의 10주기를 기리며 2019년부터 시작되었다. 세계문학 단편선을 통해서만 만났던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만나고 싶다면 이 작품들을 놓치지 말아야할 것이다. 단편소설들에 비해 'JGB 걸작선'으로 소개되는 작품들은 좀 더 진전된 주제와 작가로서의 자신을 해방시킨 듯한 ‘밸러드풍Ballardian’ 장편소설들이다. <콜린스 영어사전>에 따르면 ‘밸러드풍’은 ‘J. G. 밸러드의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에서 묘사된 환경―특별히 디스토피아적인 현대성, 암울한 인공 경관, 기술적이고 사회적 혹은 환경적 발전의 심리적인 효과―과 유사하거나 연상시키는’이라고 한다.  '지극히 밸러드스러운'이야기들을 일컫는 문학적 특수성이 형용사로 탄생해 사전에 등재되었을 정도이니 작가로서의 위상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J.G.밸러드는 단편집 후기에서 'SF에서 선호하는 만들어진 미래가 아니라, 다가오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진짜 미래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미래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지뢰가 가득 깔려서 전진하는 사람의 발목을 언제라도 물어뜯을 채비를 마친, 진입하기에 극도로 위험한 영역'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이 여타의 SF소설이나 디스토피아 문학들과는 다른 지점에 있는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20년 전에 쓰인 소설 속 런던의 모습 속에서 2022년 현재의 우리 모습이 엿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특히나 이 책에는 작가 겸 영화감독 이언 싱클레어의 <해제>와 밸러드의 촌철살인이 돋보이는 저널리스트 배너라 베넷과의 「인터뷰>, 작가 트래비스 엘버러가 정리한 <전기적 약력>, 잡지에 게재된 단편소설을 비롯해 밸러드의 저작을 총망라한 <작품 목록>을 수록하고 있어 풍성한 읽을 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21세기의 예언자’라 불리는 밸러드의 명성을 제대로 확인해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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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전지적 독자 시점 Part 1 01~08 세트 - 전8권 전지적 독자 시점
싱숑 지음 / 비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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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하다 보니 조금 찜찜한 느낌이 든다. 멸살법은 결국 작가가 만든 세계다. 그리고 그 세계는 현실이 되었다.
영혼이 입증되지 않던 세계는 이제 영혼이 당연한 세계로 변했다.
그런 세계에서 '나'라는 존재는 대체 무엇일까. 나라든가 영혼이라든가. 그런 건 원래부터 존재했을까? 아니면, 이런 '나'조차 작가가 만든 이야기의 일부일까?              - 3권, p.138

 

스물여덟의 평범한 직장인 김독자, 계약직으로 곧 계약기간이 끝나지만 정직원으로 전환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의 유일한 취미이자 낙은 웹소설 읽기이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라는 소설을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꾸준히 봐왔다. 무려 3,149화에 달하는 장편 판타지 소설로 100화부터는 계속 조회수가 1인, 대중성 없고 인기도 없는 그 작품이 독자의 인생 소설이었다. '멸살법'이라는 소설이 있어 일진들에게 찍혀 왕따를 당하던 학창 시절도, 입시를 망쳐 지방 삼류 대학에 입학했을 때도, 이직을 반복하다 겨우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도 버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10년 동안 연재되었던 작품이 드디어 완결이 되었다.

 

 

작품의 유일한 독자였던 김독자에게 작가 tls123이 쪽지를 보내온다. 덕분에 완주할 수 있었다며 감사의 인사와 함께 특별한 선물을 보내주겠다는 거였다. 그리고 작품이 내일부터 유료화될 예정이며, 에필로그도 유료로 공개할 거라고 말이다. 다음 날 평소처럼 일을 하고 퇴근 하는 길에 독자는 지하철을 탄다. 작가에게 첨부 파일과 함께 쪽지가 온다. 7시부터 유료로 전환될 예정이라고, 오분 뒤 전등이 픽 꺼지며 지하철 내부가 어두워진다. 지하철이 크게 흔들리며 급정거를 하고, 정전된 객실에 갑작스럽게 괴생명체가 허공에 등장한다. 곧 지하철은 피바다가 되었고, 사람들 눈앞에는 제각기 메인 시나리오라는 작은 창이 떠오른다.

 

김독자는 이 모든 상황들이 소설 속에서 존재하던 그대로라는 것을 알아 차린다. 안테나를 뻗은 도깨비, 객실에 쓰레기처럼 널린 시체들, 피투성이가 된 채 떠는 직장인, 노약자석에서 기도하는 할머니.... 이유는 모르겠지만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 현실이 된 것이다. 갑작스럽게 하나의 세계가 멸망하고, 새로운 세계가 태어나고 있었다. 자, 그렇다면 새로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당황스러워 하는 사람들 속에서 김독자는 '이 세계의 결말을 아는 유일한 독자'였다.

 

 

샤라락. 샤라락.
기분 좋은 소리가 들릴 때마다 활자가 눈처럼 쌓였다. 활자로 쌓은 견고한 이글루. 그 안에서 나는 주인공이 되어 모험을 하고, 사랑을 하고, 꿈을 꿨다. 그렇게 읽고, 읽고, 또 읽고.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이야기가 끝나고, 처음으로 책을 덮던 순간.
세계로부터 박탈당한 듯한 그 기분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8권, p.106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평범한 독자였던 한 남자가 주인공이 되어가는 스토리를 그리고 있다.  모든 장면들을 다 섭렵하고 있는 진짜 애독자가 소설 속 판타지 세상으로 들어가 적들을 무찌르고, 아이템을 획득하고, 미션 클리어해서 살아남아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소설이 된 현실은 원래 독자가 알던 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소설이 현실이 되면서 갑자기 생겨난 인물도 있었고, 그에 따라 이야기의 흐름이 바뀌고, 원래 죽어야 하는 인물이 살거나 설정을 변경하면서 미래도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다. 방대한 작품을 읽고 또 읽으며 설정 하나하나를 이해했고, 설명의 의미를 곱씹었으며, 마침내 작가의 의도를 알아냈다고 생각해 왔었는데,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멸살법을 이미 다 읽었다 하더라도,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사람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을 직접 겪어 내는 것은 만만치가 않았다.

 

독자는 그렇게 조금씩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나가며 새롭게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그렇게 하나씩 쌓여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독자는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멸살법의 세계를 그 동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리 텍스트를 열심히 읽고, 궁금해도 알 수 없었던 어떤 감각, 오직 손끝의 페이지로만 느꼈던, 하지만 결코 닿을 수 없던 서사의 일부가 온전하게 이해되는 기분'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읽은 것과 이해한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 순간 나 역시 독자처럼 뭉클한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이 어떤 건지 너무도 느끼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이 소설로 바뀌거나 소설 위에 덧씌워진 현실을 체험하지 않는 한 그건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네이버 시리즈’ 누적 다운로드 1억, ‘네이버’ 수요 웹툰 1위 <전지적 독자 시점>의 원작. 웹소설의 현재진행형 레전드인 전지적 독자 시점, 일명 <전독시>가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전 8권으로 나온 part 1은 전체 이야기의 1/3에 해당되는 분량이며 여름에 part 2,3이 출간될 예정이다. 웹소설은 평소에 잘 읽는 편이 아닌데, 이 작품은 워낙 재미있다고 소문난 명작인데다, 영화화도 앞두고 있어 기대가 되었다.

 

역사와 신화를 아우르며 펼쳐지는 방대한 세계관과 매력적이고 독특한 설정들 덕분에 단 한 순간도 지루할 틈 없이 이야기 속으로 훅 빠져 들어가 읽었던 것 같다. 8권의 책을 단 며칠 만에 모조리 완독했을 정도로 완전히 몰입해서 읽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아주 오래 전, 처음으로 소설을 읽었던 순간을 떠올리게 만들어 주어서 너무도 설레었다. 밤을 꼴딱 새면서 빠져 들었던 그 이야기의 마법, 활자와 활자가 만들어낸 공간에서 내가 주인공이 되어 모험을 하고, 꿈을 꿨던 그 순간을 새록새록 기억나게 만들어 주었다. 순수하게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었던, 이것저것 따지고 분석하지 않고 오롯하게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재미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그 시절들이 한 명의 평범한 독자인 나를 다시 깨어나게 한 것이다. 현실과 소설과 다르지만, 바로 그 이유로 위로가 되어주고 친구가 되어주었던 그런 작품이 분명 내게도 있었으니 말이다. 극중 김독자에게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라는 웹소설이 그러했듯이.

 

이 이야기가 끝나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계속 했다. 8권 이후의 이야기를 읽으려면 또 몇 개월을 기다려야겠지만, 그렇게 더 읽을 수 있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설레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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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으로 간 예술가 : 예술 사람이란 무엇인가 7
이미혜.이재희 지음 / 이다북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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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까지만 해도 영국에서 문학작품을 읽는 사람은 수천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시민혁명의 결과 국가의 검열권이 느슨해지고 생산력의 발전으로 인쇄물이 흔해지면서 18세기에는 독서층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독자층 증가는 신문의 번성을 통해 한눈에 알 수 있다. 검열권 완화는 다양한 신문을 발행하게 했다. 일간신문이 등장했으며 매일 수만 부의 신문이 팔렸다. 중산층은 커피하우스에 모여 신문을 돌려 읽으며 시사와 경제에 대한 정보를 얻고 문학과 가십을 화제로 삼았다. 커피하우스에서 문학의 경향, 작가의 평판, 연극의 성패 등이 결정되었다.        p.81

 

이다북스의 ‘사람이란 무엇인가’ 시리즈의 일곱 번째 책이다. 이 시리즈는 생태, 교육, 노동, 형질인류학, 전쟁, 정치, 사회, 예술, 감염을 비롯해 각 분야에서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답한다. ‘지구와 공생하는 사람’을 다룬 <생태>, '존재가 존재에 이르는 길'을 다룬 <교육>, 파괴와 혁신이라는 전쟁의 양면성과 이 안에서 인간은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펴봤던 <전쟁>, 사람다운 사람으로 나아가는 길에 대해 이야기한 <종교>, 실제 활용되는 인공지능과 기술의 한계를 살펴본 <인공지능>, 인간과 동물이 소통하고 공존하는 길을 찾았던 <인간과 동물>편에 이어 이번에는 <예술>편이다.

 

이 책은 '시장으로 간 예술가'라는 부제에서 엿볼 수 있듯이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경계를 다루며, 예술작품이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예술을 둘러싼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기 위해, 자연스레 예술의 발전 과정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예술작품은 그것을 원하고 즐기는 사람이 있기에 존재하고, 또 그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있기에 존재하는 관계의 산물이다. 따라서 예술작품의 수요자와 예술가가 어떤 사회적 맥락으로 연결되는지에 따라 예술의 형식, 주제, 내용, 성격 등이 모두 달라지는 것이다.

 

 

 

시장 제도는 음악가를 후원자로부터 독립하게 해주었고 명성과 부를 얻을 기회를 주었으며 더러는 천재 음악가로 존경받게 해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음악가의 과잉 공급과 그에 따른 실업의 위험이 내포되어 있었다. 음악가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청중에게 모든 것을 의존해야 했다. 과거라면 궁정음악가로서 풍족하지는 않아도 안정되게 살아갔을 음악가들이 생존을 위해 싸우며 작품을 음악시장에 내다팔아야 했다. 슈베르트는 시장에서 실패한 예술가의 전형이다. 19세기 전반 작곡만으로 생활할 수 있었던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p.136

 

근대사회에서는 예술작품도 시장에서 상품으로 거래되었다. 귀족이 주도한 예술 제도를 후원 제도, 근대 이후 중산층이 주도한 제도를 시장 제도라고 부른다. 전근대사회에서 예술가는 사회적 신분이 높은 이들의 후원을 기반으로 예술 작품을 제작했다. 그러다 보니 예술가는 후원자의 지시에 따라야 하는 것은 물론 그의 변덕에도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예술시장에서 주된 수요자가 중산층이 되면서, 시장 제도가 예술 생산의 기반이 된다. 예술가는 자신의 주관에 따라 작품 내용을 스스로 결정하고,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작업을 독립적으로 진행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예술을 평가하는 기준도 보편성에서 차별성으로 변모하게 되고, 개성과 독창성이 점차 중요해진다.

 

이러한 시장 제도를 기반으로 예술은 양적으로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성장하게 된다. 이 책은 미술, 음악, 문학 등 주요 예술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사회적으로 살펴본다. 소설의 발전이 중산층의 성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에, 19세기에 이르러 소설의 확산이 절정에 달했고, 소수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음악이 불특정다수의 중산층이 즐기는 것으로 바뀌면서 연주회라는 것이 시작되었다는 사실도 매우 흥미로웠다. 이 책을 읽으며 대중예술과 순수예술에 대해서, 그리고 예술의 상업화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예술이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발전해왔다는 사실 또한 예술과 사회의 관계,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예술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해주었고 말이다. 이 책을 통해 예술과 예술의 흐름을 읽고,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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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 비트윈 : 경계 위에 선 자
토스카 리 지음, 조영학 옮김 / 허블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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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항변하고 싶었으나 파수꾼들이 벌써 나를 지옥의 경계를 향해 끌고 가기 시작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트롤리는 보이지 않았다. 난 고개를 떨어트렸다. 한 발짝, 영원의 거리는 고작 한 걸음에 불과했다.
지옥에 떨어진 것을 환영하노라.        p.22

 

윈터는 엄마와 언니 재클린과 함께 신천국이라는 종교 집단에 들어간다. 그녀의 나이 일곱 살, 재클린은 열두 살 때였다. 아버지로부터 안전한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은 교주 매그너스가 지배하는 또 다른 지옥이었다. 이상한 제약이 많았고, 매그너스에게 복종해야 했으며, 모든 물건은 공유품이었고, 딸들과 엄마는 각자의 숙소에 배정되어 만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들은 신천국이 바로 천국이라는 말로 사람들을 현혹시켰다. 이 병들고 타락한 세상은 곧 끝나고, 그 후엔 선택 받은 소수만이 새 세상에서 사는 거라고 말이다. 그렇게 윈터가 사이비 종교단체에서 어른이 되어 가는 동안 바깥 세상에서는 원인불명의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었다.

 

알래스카 대륙의 한 농장에서 돼지들이 난도질 당한 채 죽어 있는 것이 발견된다. 그리고 몇 개월 뒤 포틀랜드의 오리건에서는 뇌염의 창궐로 의사들이 골치 아파하고 있는 중이다. 초기 치매 증세를 보이는데 뇌부종은 없는 환자가 벌써 일곱 명이었기 때문이다. 이 조기치매 환자는 해당 지역을 휩쓸며 급증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했다. 변종 인플루엔자를 통해 전파되는 이 질병이 폭발적으로 급증하면서 도로가 봉쇄되고, 가게들은 문을 걸어 잠갔고, 휴교령이 떨어진다. 보건국에서는 집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집이 안전하다는 경고 메세지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세상의 종말이 찾아 오는 걸까.

 

 

 

그간 온갖 종류의 두려움을 보았다. 잘못할까 봐 두렵고 잘할까 봐 두렵고 몰라서 두렵다. 미래가 두렵고 신도 두렵다. 나 자신마저 두렵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영혼이 영원히 지옥불에서 타는 건 아닐까? 두려움은 엔클라베와 매그너스의 설교 하나하나에 동력이 되어주었다. 그런데 또 다른 두려움이 생기고 말았다. 우리가 믿고 삶을 의지했던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는 사실.       p.216

 

통념에 따르면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넘지 못할 경계, 즉 무한 차원의 영원과 공간이 있다고 하지만, 윈터에게 그 경계선은 단 한 걸음에 불과했다. 이야기는 우여곡절 끝에 종교집단에서 '파문 당하는' 형태로 탈출에 성공한 윈터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무사히 지옥의 경계를 벗어났지만, 폭력과 오염으로 가득한 바깥 세상이 천국처럼 느껴지진 않는다. 게다가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잠식하고 있었으니, 그녀는 또 다른 지옥에 도착한 것일까. 아직 '신천국'에는 윈터의 언니 재클린과 조카 트룰리가 있었다. 윈터는 그들을 구출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윈터는 바이러스를 치료할 백신의 원천 재료를 손에 넣게 되고, 그것을 수의학 박사에게 전달해야 하는 임무도 맡게 된다. 공항과 고속도로가 폐쇄되고 지역 전체가 락다운되는 혼란 속에서 그녀는 무사히 그들을 바깥세상으로 데려오고,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까.

 

<라인 비트윈:경계 위에 선 자>와 속편인 <라인 비트윈:단 하나의 빛>은 모두 2019년에 출간된 작품이다. 이후 몇 개월 되지 않아 코로나19가 창궐했으니, 두 소설이 소름 끼칠 정도로 예지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것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팬데믹이 우리의 삶을 뒤바꿔 놓는 다는 것이 가상의 예언은 아니라고 작가는 말한다. 언제든 또 다른 팬데믹이 우리의 삶을 침범할 수도 있는 것이 사실이니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코로나19의 시대를 2년째 살고 있지만, 이 소설 속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비밀스러운 사이비 종교는 가상의 단체이지만, 세계 어디에 실재로 존재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으며, 기후 위기는 심각해지고 있고, 바이러스로 인한 집단 감염 역시 여전한 상황이니 말이다. 묵시론적 디스토피아 소설의 이야기가 허구가 아니라 실재라는 자각이 이 작품을 더욱 섬뜩하게 느껴지게 만든다. 물론 소설과 현실의 경계선을 뛰어 넘으며 만들어지는 장르적 재미 또한 이 작품을 읽게 만드는 매력이다. 책장을 덮어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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