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한 자루로 시작하는 느낌 있는 인물 그리기 - 논리적 데생 기법 그리다
OCHABI Institute 지음, 김재훈 옮김 / 영진.com(영진닷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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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들은 틈만 나면 이곳 저곳에 자신만의 그림을 그린다. 공부하다가도, 책을 읽다가도, 신문지에, 모래 바닥에, 돌멩이에..  어느 곳이든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려댄다. 그림 실력이 있고, 없고에 상관없이 말이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가면서 점점 여기저기 끄적이던 그림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잘 그린 그림에 대한 기준이 생긴데다, 제대로 된 도구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림을 그리겠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사실 종이와 연필만 있다면 누구나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이 책은 그림 초보들도 쉽게 도형, 인체를 그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 준비물은 종이와 연필 뿐이다. 연필 한 자루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구나 인체 드로잉과 연필 드로잉의 세계에 입문할 수 있다. 연필 쥐는 법, 선을 긋는 법부터 시작해서 명암을 그리고, 얼굴의 형태를 잡고, 선으로 소리와 촉감을 표현하는 연습을 거쳐 인체를 평면적으로, 입체적으로 그리는 법에 대해 알려 준다.

 

 

인체의 비율을 알려주고, 뼈와 관절의 위치를 잡아 골격을 표현하고, 그 비율을 참고해 사람의 형태를 그리는 과정이 굉장히 간단하면서도 놀라웠다. 특히나 움직임이 있는 자세의 중심선과 골격 잡는 법이 재미있었다. 움직임이 있어 더 생동감있게 느껴졌고, 정면을 지나 반측면의 인체를 그리는 단계가 되면 더 강한 약동감과 스토리가 느껴져서 나도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길 것이다.

 

 

마지막 장의 인물이 있는 풍경 그리는 단계가 되면, 그림 그리는 것이 점점 더 재미있어 진다. 인물과 함께 건물과 차, 나무와 구름 등 우리 주변의 사물들을 단순한 형태로 변환해 평면적으로 표현하는 풍경 그림은 다양한 요소가 있어 그리는 동안 재미도 있고, 무엇보다 결과물이 놀라울 정도로 만족스럽다. 1점투시도법으로 방 안을 그려보고, 음영을 넣어 시간의 흐름과 분위기를 표현해보자.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뭐야 나도 그림을 꽤 잘 그리는데? 하는 말이 나오게 될 것이다.

 

 

이 책은 그림에 관심 있지만, 전혀 그려본 적이 없는 사람부터, 더 잘 그리고 싶은 사람까지 만족시킬 수 있도록 어렵지 않게 기본기를 다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디자인이나 기획 업무로 그림을 그릴 기회가 많거나, 만화가나 일러스트레이터가 목표인 사람, 그리고 인물 데생의 기초를 배워보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이 책 한 권이면 누구나 연필 한 자루로 인물과 풍경을 꽤 그럴듯하게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목적은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인물을 그리는 것은 유독 어려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알려주는 '대상의 형태를 잡는 방법'만 제대로 익히더라도, 쉽고, 재미있게 데생 실력을 키울 수 있을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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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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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는 갑옷을 만져보지도 못했다. 어차피 그것은 현실적 해법이 아니라 몽상적 해법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갑옷이란 나와 함께 움직이는 철장일 뿐 아니겠는가? 그래도 만약 갑옷을 입을 수 있었다면, 어떤 면에서는 자유로웠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 시절에 나는 실제로 갑옷을 입었고 그래서 자유와 옥죄임을 둘 다 느끼면서 살았는지도 모른다. 요즘도 가끔 그렇지만, 그 시절에 나는 정말로 딱딱하고 빛을 반사하고 안을 보호하는 갑옷 같은 존재였다... 스스로 갑옷이 되기란 오늘날에도 쉽게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죽임당하지 않기 위해서 줄곧 스스로 죽는다.        p.91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걷기의 인문학>, <멀고도 가까운>등의 저서로 동시대 여성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존재가 된 리베카 솔닛의 첫 회고록이다. '우리 시대 가장 대담하고 독창적인 작가'라고 불리는 솔닛이 집을 떠난 19세부터 지난 40여년의 시간을 되돌아본다. 솔닛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보낸 서문에서 이 책에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담았지만, 그것을 모든 여성이 겪는 집단적 경험의 맥락 속에서 서술했다고 밝히고 있다. '여성이 침묵하기를 바라고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선호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갖고자 하는 여성의 분투는 그렇게 사적인 경험을 넘어 사회에 대한 이야기로 해석된다.

 

지금은 전세계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존재가 된 솔닛도 어리고 불안정했던 시절이 있었다. 세상에 서툰 부적응자, 몽상가, 쉴 새 없이 떠도는 방랑자였던 깡마른 젊은 여성이 어떻게 작가이자 활동가로서 각종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존재가 되었는지에 대한 과정은 1980~90년대 여성의 성장 기록이지만 2022년 현재와 교차되는 부분이 꽤 많다. 이는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사회의 오래된 불평등과 만연한 폭력과 여러 구조들은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일 것이다.

 

 

 

최선의 형태일 때, 논픽션은 세상을 도로 짜맞추는 행위다. 혹은 세상의 한조각을 뜯어냄으로써 세상의 통설과 관행 밑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를 살펴보는 행위다. 이런 의미에서 창조는 파괴와 비슷한 데가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열렬히 흥분되는 것일 수 있다. 뜻밖의 정보를 발견해서 그럴 수도 있고, 조각들을 조립해보니 차차 어떤 패턴이 드러나서 그럴 수도 있다. 잘 몰랐던 무언가가 차츰 또렷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세상이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되기 시작한다. 혹은 기존의 통설에서 틀린 것이 발견되고, 그래서 내가 새로 쓰게 된다.       p.188

 

이 책의 첫 페이지에는 화장대처럼 생긴 작은 책상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상은 솔닛과 함께 세 번 이사했고, 그녀는 그 책상 위에서 수백 만개의 단어를 썼다. 스무 권이 넘는 책, 리뷰, 에세이, 연애편지, 이메일 등과 학생으로서, 선생으로서 숙제를 했다. 그 '책상은 세상으로 난 문이자 솔닛이 바깥으로 도약하거나 내면으로 잠수할 때 딛는 단상'이기도 했다. 그 책상은 한 친구가 솔닛에게 선물로 준 것인데, 그 친구는 책상을 주기 1년쯤 전 헤어난 남자친구가 휘두른 칼에 열다섯 군데를 찔려 과다출혈로 거의 죽다 살았다. 친구는 목숨을 건졌고, 당시 여느 피해자들처럼 그 일로 비난 받았다. 살인미수자는 법적 처분을 전혀 받지 않았고, 친구는 일이 벌어진 곳으로부터 멀리 이사했다. 가해자가 당당하게 세상을 활보하는 동안, 왜 피해자는 세상으로부터 숨어야 하는가. 여성의 안전도, 자유도, 권리도 과거와 비교해서 지금이 더 나아졌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솔닛은 '남자에게 살해당할 뻔했던 여성으로부터 받은' 책상에 앉아서 이 책을 비롯해 많은 글들을 썼다. 여성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밖에 없었기 때문에, 글을 통해 사회에서 지워진 이들의 이야기를 찾아주고, 집단과 사회의 지배서사를 조금씩 바꿔나가기 위해서 말이다. 이 책은 솔닛이 젊은 여성들에게 보내는 편지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든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다. 그리고 사적인 에세이와 페미니즘과 정치, 환경비평까지 분야를 망라하며 유려한 글을 썼던 솔닛의 30여권에 달하는 전작을 모두 다 품고 있는 책이기도 하니, 지금껏 솔닛의 작품을 읽어 왔던 독자라면 이 책은 놓치지 말고 읽어보길 권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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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지 못한 밤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놀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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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의 기억은 몹시 뒤죽박죽이다. 지나가던 사람이 부른 구급차. 이명 때문에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 기묘한 슬로모션으로 움직이는 구급대원들의 모습... 피투성이로 땅에 널브러진 에쓰코. 춤이라도 추듯 기묘한 방향으로 내뻗은 팔다리. 경차에서 내린 나이 든 여자는 망가진 기계처럼 온몸을 떨었다. 산산이 부서진 경차의 앞 유리창. 그 앞 유리창을 깬 물체는 박살 나서 아스팔트 위에 흩어졌다. 갈색 흙. 자홍색 꽃. 흰색 도자기 조각. 그 조각 중 하나에 ‘엉겅키’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내가 무엇 하나 이해하지 못한 사이에 구급차는 달려갔다.       p.13~14

 

유키히토는 15년 전 아내가 죽은 뒤 딸 유미를 홀로 키워왔다. 그날 아내는 유미의 어린이집 등하원용 가방을 만들 천을 사러 나갔다가 사고를 당했다. 갑작스레 아파트 베란다에서 화분이 떨어졌고, 지나가던 경차 앞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면서, 그 차가 아내를 친 것이다. 그리고 그 화분을 볕이 잘 드는 곳으로 옮기려다 떨어뜨린 것은 바로 네 살 딸 유미였다. 사고 이후 유키히토는 딸의 인생을 지키기 위해, 사고의 진상을 숨겨 왔다. 살던 동네를 떠나 이사를 했고, 사고와 관련된 모든 일들을 덮어버렸다. 그런데 15년 뒤, 누군가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온다. 비밀을 알고 있다고, 사고를 친 건 당신 딸이라고, 돈을 요구하는 그는 딸에게 전부 말하겠다고 그를 협박한다.

 

협박전화를 받은 뒤 불안에 떨던 유키히토는 대학교 기말 사진을 찍으러 하타가미에 가보고 싶었다는 유미의 말에 30년 전 도망치듯 떠나온 고향으로 향한다. 협박자로부터 딸을 떼어놓고 싶었고, 오래 전부터 마음에 남아 있었던 과거의 의문을 낱낱이 풀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고향은 어머니가 의문의 사고로 돌아가시고, 자신과 누나가 벼락을 맞았고, 독버섯 사건으로 마을 사람들이 죽었으며, 아버지가 사건 용의자로 지목되어 경찰 조사를 받았던 기억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누나는 번개를 맞은 뒤 몸에 무참한 흉터가 새겨진 상태로 살아왔고, 유키히토는 당시 부분적으로 기억을 잃었으며, 사건과 관련된 사실들을 외면하며 살았다. 그리고 수십 년 만에 다시 돌아간 고향에서, 어쩌면 죽은 아버지가 정말로 살인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살의는 분명, 언제나 수없이 소용돌이치고 있을 겁니다. 그 대부분이 살인으로 이어지지 않는 건 그저 운이 좋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아야네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았다. 하타가미의 하늘은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른다는 듯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그저 새의 그림자만이 울음소리도 없이 시야 가장자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벼락처럼, 끌어들이는 요소와 응하는 요소가 우연히 맞닥뜨려서 살인이 일어나는 거겠죠. 약간의 불운이 살의를 살인으로 바꾸는 거예요.”
이 불운의 시초는 뭐였을까.         p.419

 

유키히토는 딸과 누나와 함께 찾아간 고향에서 자신이 외면하고 살아왔던 일들에 대해 직접 조사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석 달 전까지 살아 있었던 아버지가 종잡을 수 없이 모호한 존재로 기묘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오랜 시간 함께하면서 행복한 추억을 수없이 쌓아 왔고, 자신에게 요리와 장사를 가르쳐주었던 아버지였는데.. 자신이 알고 있었던 모습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지난 30년간, 아버지가 독버섯 사건의 범인이 아니라고 믿어 왔는데,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면서 가슴속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그 믿음이 조금씩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딸에게 비밀을 밝히겠다며 협박했던 남자가 고향에까지 모습을 드러내고, 유키히토는 딸의 인생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끝내기로 한다.

 

진실을 끝까지 숨기는 건 얼마나 큰 죄일까. 몰라도 되는 일을 영원히 알지 못하게, 기억에서 지워진 행동을 영원히 떠올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어느 정도의 죄일까. 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진실을 숨기더라도 용서할 수 있는 것일까. 유키히토는 수십 년 전 고향을 떠날 때 아버지가 중얼거렸던 '난 틀리지 않았어'라는 말을 그제야 이해하게 된다. 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을 걸고 가족을 지켰다. 그게 올바른 행동이었는지 그른 행동이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지만, 그 마음만은 이해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아들의 딸에 이르는 3대에 얽힌 비극은 서로가 서로를 지키기 위해 시작되었고, 각자 그 진실을 모른 채로 시간이 흘렀다. 이 작품은 '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에 대한 흥미로운 미스터리인 동시에, 수십 년간 이어져온 슬픈 가족사를 그려내고 있는 먹먹한 가족 드라마이기도 하다.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을 재미있게 읽었다면 이번 미치오 슈스케의 신작도 놓치지 말자. 특히나 이 작품은 작가 스스로 '앞으로 내가 쓰는 작품들의 강력한 라이벌이 될 것'이라며 자신감과 애정을 드러낸 작품이라고 하니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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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무죄
다이몬 다케아키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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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정의는 범인을 체포하는 것, 검찰의 정의는 재판에서 지지 않는 것, 내가 있던 법원의 정의는 법적 안정성. 딱 잘라 말해 전부 그 하나만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어. 변호인의 정의도 마찬가지야. 그런 건 통하지 않는데도 뻔하디 뻔한 변호를 해놓고, 부당한 판결이니 뭐니 부르짖을 뿐 현실에는 눈길을 주지 않지. 모두가 정의에 매몰되는 바람에 무고하고 약한 사람만 눈물을 흘려..... 힘든 싸움이 될 거야. 하지만 왜곡된 사법과 썩어빠진 정의에 새바람을 불어넣자고."        p.91~92

 

변호사인 지사는 21년 벌어졌던 유괴사건의 범인 히라야마 사토시의 재심을 담당하게 된다. 당시 일곱 살 소녀가 살해당한 채 발견되었고, 차에 남아 있던 소녀의 머리카락이 증거가 되어 취조 단계에서 자백하고 범인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히라야마는 초등학교에서 잡역부로 근무했었는데, 부근에서 있었던 소녀 실종 사건 중 한 건으로 경찰에게 의심받았고, 소아성애자라는 소문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공판 때 진술을 번복했고, 장기 복역 중임에도 여전히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아이러니하게도 사건을 담당하게 된 변호사 지사는 당시 소녀 유괴사건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세 건의 유괴사건 중 한 아이는 죽어서 발견됐고, 한 아이는 실종 상태이며, 한 아이는 살아 돌아왔다. 지사가 바로 살아 돌아온 마지막 소녀였다.

 

지금은 유명 변호사가 되었지만 여전히 어린 시절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지사는 유괴 사건의 범인으로 세상에 알려진 남자의 무고함을 밝혀낼 수 있을까. 유괴사건의 피해자가 어쩌면 자신을 납치했을지도 모르는 가해자를 변호한다는 파격적인 설정부터 호기심을 자아내는 이 작품은 사법 문제 중에서도 '원죄'에 대해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진다.

 

 

한 번이라도 경찰의 의심을 받으면 진범이 발견되지 않는 한, 그 사람은 계속 위험인물로 여겨진다. 그건 경찰을 신뢰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 내면에는 강한 힘을 따르고 싶은 굳은 의식이 존재하므로, 강한 힘으로 한번 사회에서 배제된 인간이 복귀하기는 상상 이상으로 어렵다. 무죄판결을 받았으니까 그 사람은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 없다...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려 해도 보통 사람에게는 힘든 일이다. 누명을 벗고 풀려난 '흉악한 살인범'과 단둘이 하룻밤을 보내라고 하면 분명 대다수는 겁을 먹을 것이다.       p.175~176

 

모든 정황으로 미뤄볼 때 명백한 범인임에도 명확한 증거가 없다면 기소할 수 없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고, 수사팀에서 범인이라고 확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심증만으로 처벌을 가할 수는 없는 게 법이니 말이다. 그래서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는 생각한다.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짐승보다 못한 짓을 한 인간에게 죄를 묻지 못해서야 어떻게 정의라고 할 수 있겠냐고. 그런 이유로 괴물이 풀려나는 것을 볼 수 없다는 명목으로 적법하지 않은 취조를 하고, 없는 증거를 만들어서 괴물을 가두어두는 데 성공한다면, 그것은 과연 정의인가. 악인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정의감, 적법하지 못한 취조라는 불의를 범하더라도 피해자를 위해 악인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정의감, 그것을 나쁘다고만 볼 수는 또 없지 않을까. 게다가 만약 그렇게 종결된 사건이 원죄(冤罪,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로 밝혀진다면 말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법은 지켜져야 한다,와 죄를 저질렀다면 그 과정이 적법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처벌을 받도록 해야 한다, 는 사실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이다. 법이 가려야 하는 것이 정의인지, 진실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들어 주는 작품이었다. 변호인과 경찰 등 사건 관계자들이 각자 자신의 정의 구현을 위해 치열하게 다투는 법정 소설로서도 매력적이지만, 무죄판결을 받은 범인이 진짜 범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에서 비롯되는 미스터리와 반전도 재미를 더해 주고 있다. 다이몬 다케아키는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작가이지만, 사법 문제와 관련된 사회파 미스터리를 꽤 많이 써온 중견 작가이다. 묵직한 사법 미스터리를 좋아한다면, 이 작품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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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 소울즈 버티고 시리즈
이언 랜킨 지음, 정세윤 옮김 / 오픈하우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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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너무 애정하는 존 리버스 시리즈 열 번째 작품이다. 정말 재미있는데 국내에서는 그만큼 인기를 얻지 못해 아쉬운 시리즈. 현재 스물 세번째 시리즈까지 나와 있으니.. 아직 갈길이 멀지만.. 부디 버티고에서 시리즈 끝까지 계속 출간해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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