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 하이웨이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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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남은 볼일이 있다면, 그걸 끝내기로 하자.
우리는 그 같은 문장을 말하기 위해서라면 평생을 기다릴 수 있다. 그리고 막상 그런 순간이 왔을 때, 우리는 담대함과 침착함을 유지하지 못해 그런 말을 못 하기 십상이다. 그런 종류의 침착함은 교육이나 연습의 산물이 아니다. 그 자질을 타고났든가 아니든가, 둘 중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타고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 그런 자질의 최상의 모습이 나온다.        p.131

 

<우아한 연인>, <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의 신작을 가제본으로 만나보게 되었다. 에이미 토울스는 한 작품의 완성에 4년의 집필과 1년의 독서 시간이 필요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40대 후반의 늦은 나이에 발표한 데뷔작 <우아한 연인>이 2011년 작이고, 두 번째 작품인 <모스크바의 신사>는 2016년 작이다. 이번에 나온 <링컨 하이웨이>는 2021년 작으로 기다림의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은, 그 시간만큼을 고스란히 보상해 주는 작가이기에 너무도 기대가 되었다. <우아한 연인>이 세계 대공황의 그림자가 드리운 1938년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했다면, <모스크바의 신사>는 20세기 초 볼셰비키 혁명 이후 소비에트 러시아를 배경으로 했었다.

 

이번 신작은 1954년을 무대로 어머니를 찾기 위해 네브래스카에서 캘리포니아로 차를 몰고 가려는 형제의 이야기이다. 과실치사로 소년원에 수감 중이던 에밋 왓슨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조기 퇴소해 고향 집으로 막 돌아왔다. 농사를 짓던 아버지가 남겨 준 것은 담보대출에 더해 새 대출로 인한 빚들뿐이었고, 농장은 압류당했고, 집도 곧 은행으로 넘어갈 예정이었다. 유일하게 에밋에게 남은 것은 자신의 명의로 등록된 차 한대뿐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죽게 한 소년의 피해자 가족들이 언제 그에게 분노를 쏟아낼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이곳을 떠나 다른 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야만 했다. 열여덟 에밋의 유일한 가족은 여덟 살의 조숙한 동생 빌리 밖에 없었다. 에밋은 빌리를 데리고 남부 텍사스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베개에 몸을 받친 채 울리는 여분의 약병 속 약을 재빨리 털어 넣고 편안한 자세로 누웠다. 천장을 바라보는 동안 그의 생각은 비오는 날 완성하곤 했던 조각 그림 맞추기로 돌아갔다.
모든 사람의 삶이 조각 그림 맞추기의 조각 같다면 멋지지 않을까, 울리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의 삶도 다른 사람의 삶에 불편을 초래하는 것으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의 삶도 특별히 설계된 자신의 자리에 딱 들어맞을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복잡한 전체 그림이 완성될 수 있게 할 것이다.         p.707

 

빌리는 8년 전에 아이들을 남기고 집을 나갔던 어머니가 보낸 그림엽서를 통해 캘리포니아로 가면 어머니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빌리의 주장에 에밋은 고민하다 결국 대륙 서쪽 끝으로 향하기로 결정하는데, 그들 형제 앞에 예상치도 못했던 방문객이 나타난다. 에밋을 집까지 태워다 주었던 원장의 자동차 트렁크에 소년원에서 만난 친구 더치스와 울리가 숨어들어 있었던 것이다. 형기를 아직 네다섯 달 정도 남겨두었기에 둘 다 사실상 탈옥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무단이탈 이유가 있었고, 에밋은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여정 중간에 친구들을 태워주기로 한다. 하지만 여정은 처음의 계획대로 되지 않고, 경로를 이탈한다. 이들 네 소년은 각자가 도달하기를 원하는 그곳에 갈 수 있을까.

 

이 책의 제목이자 네 소년의 여정을 통과하는 것은 미국을 횡단하는 최초의 고속도로인 '링컨 하이웨이'이다. 뉴욕시의 타임스퀘어에서 시작해서 3390마일 떨어진 샌프란시스코의 링컨 공원에서 끝나는, 미국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관통하는 도로이다. 에이브러햄 링컨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 도로를 통과하는 오갈랄라, 샤이엔, 롤린스, 록스프링스, 솔트레이크시티, 일리, 리노, 새크라멘토가 형제의 엄마가 보낸 그림 엽서의 지점들이기도 하다. 물론 샌프란시스코로 간다고 해서 엄마를 찾을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은 8년 동안 어머니로부터 어떤 소식도 듣지 못했고, 어머니가 어디 계신지도 전혀 몰랐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 작품의 방점은 목적지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 소년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 그들이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 겪게 되는 경험들에 있다. 그들이 거쳐가는 모든 순간, 모든 우여곡절, 그리고 매일매일이 특별한 날이기 때문이다.

 

무려 팔백 페이지가 넘는 엄청난 분량 동안 페이지를 넘기는 손이 멈출 새가 없었다. 이 긴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계속 되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말이다. 총 10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하루에 한 장, 열흘 동안 있었던 일을 그리고 있다. 날짜의 역순으로 장 번호를 매겨, 10, 9, 8로 카운트다운처럼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 네 소년을 비롯해 그들의 주변 인물들 각각의 다중적인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여정은 에이모 토울스의 전작들과는 여러 모로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매번 작품을 쓸 때마다 나름의 의도를 가지고 시간적, 공간적으로 판이하게 다른 이야기를 쓰려고 하기에, 그의 작품은 늘 실망시키지 않는다. 그는 현재 새로운 소설을 집필 중이며 그 이야기는 1940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시작해 1999년 뉴욕시에서 끝난다고 한다. 또 4년여의 시간을 기다려야 만날 수 있겠지만, 여전히 그 작품이 기다림을 보상해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출판사로부터 가제본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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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너는 무엇을 했는가 그날, 너는 무엇을 했는가
마사키 도시카 지음, 이정민 옮김 / 모로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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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고 있는 다이키가, 다이키의 전부가 아니었다. 그런 당연한 일을 이제야 비로소 깨달은 느낌이다.
학교에 있을 때의 다이키, 친구와 있을 때의 다이키, 자기 방에 있을 때의 다이키. 전부 다 상상하는 것밖에 할 수 없지만, 이즈미는 상상 속 다이키가 자신이 보고 있는 다이키와 똑같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p.68

 

평범한 주부 미즈노 이즈미는 그날 저녁 상을 차리면서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비싼 양과자점의 케이크와 아이들과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상을 차렸다. 딸인 사라는 1지망인 대학에 합격했고, 아들인 다이키도 1지망 고등학교에 합격한 것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가정에 충실한 남편과 반듯하고 상냥한 아이들, 결코 유복하지도 않고 주목을 받는 삶도 아니지만, 이토록 행복한 가족은 웬만해서는 없지 않을까 이즈미는 생각한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아들이 간밤에 자전거를 타고 가다 사고사를 당했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게 된다. 여성 두 명을 살해한 연쇄 살인범이 경찰서에서 도주해 뒤쫓는 중이었는데, 하필 그쪽을 지나던 다이키가 휘말려 사고가 나게 된 것이다. 그날 밤 다이키는 왜 밖으로 나갔던 것일까. 어째서 순찰차를 피해 도망을 간 것일까. 착한 우리 아들이 왜 죽어야만 했을까.

 

15년 뒤, 젊은 여성이 자신의 빌라에서 살해당한 채 발견된다. 그리고 회사 동료이자 불륜 상대인 남성도 같은 날 행방불명된다. 전과도 없고, 결혼 한지는 2년 반, 현재 아내와 아들과 셋이서 살고 있던 평범한 가장이었던 그 남성이 범인인 걸까. 사건을 수사하는 두 형사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 들며 드러난 사건의 이면을 살펴보기 시작한다. 15년 전 소년은 왜 죽어야만 했을까.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부부의 사랑 뒤에 숨겨져 있는 어둠은 무엇이었을까.

 

 

 

몇 번을 걸어도 노노코가 전화를 안 받는다. 점점 불길한 상상이 떠올라 머리가 돌 지경이었다. 다쓰히코는 행방불명, 게다가 살인 사건의 범인 취급을 받고 있다. 자신의 인생에 이런 무시무시한 일이 생기다니 믿기지 않았다.
두 형사가 돌아간 직후였다. 거실에는 그들이 가져온 무시무시한 비일상이 자욱하게 껴 있다.           p.133

 

현재 사건을 수사 중인 미쓰야는 15년 전 사건 당시 도주한 연쇄 살인범을 우연히 체포했던 경찰이었다. 그리고 그는 15년이 지난 지금도 소년의 사고사에 대해 신경쓰고 있다. '소년은 왜 트럭에 부딪쳐야 했는가. 왜 순찰차를 피해 달아나야 했는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이유를 모릅니다. 모르기 때문에 알고 싶은 겁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어린 시절 자신의 어머니가 살해된 사건의 최초 발견자였고, 끊임없이 어머니가 살해되어야만 했던 이유를 찾아 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두 형사의 시점 외에도 사건 관계자들의 다양한 시점을 통해 시종일관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이야기를 진행한다. 용의자의 아내와 어머니, 피해자의 가족 등 내 가족이 사건을 저질렀을 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추측할 수밖에 없는 남겨진 이들의 시점으로 사건에 대해 다각도로 들여다 보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왜 그는 사라졌을까. 왜 그 여자는 죽어야 했을까. 왜 그들은 보여지는 모습과 전혀 다른 행동을 했던 것일까. 왜. 왜. 왜. 제목인 '그날, 너는 무엇을 했는가'는 진실을 알 수 없는 채로 남겨진 이들을 목소리이다. 행복했다고 생각했던 아들이 사실은 집에 들어오기 싫어했다고, 내가 알고 있던 아들이 그의 전부가 아니었다고 깨닫는 엄마의 마음이란 어떤걸까. 지금껏 자신을 좋은 엄마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말이다.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아들 부부가 사실은 아무런 애정 없이 빈껍데기로 살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엄마의 마음은 또 어떨까. 그저 평범하게, 결코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으리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던 믿음이 깨졌다면 말이다. 이 작품은 우리가 쉽게 믿고 있는 '가족이라는 환상'을 집요하게 파헤쳐 그 끝에 도달했을 때 어떤 것이 보이는지, 그것을 직면하게 만들어 준다. 흡입력 있는 이야기 전개가 돋보이는, 서글픈 미스터리이다. 무더운 여름, 책을 쥔 순간 몰두해서 끝까지 읽고 싶은 작품을 찾는 다면 적극 추천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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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니피그 차모와 뭉치들 웅진 세계그림책 223
나카야 미와 지음, 김난주 옮김 / 웅진주니어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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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공원에는 작은 동물원이 있다. 동물원에서도 '기니 동산'은 아이들에게 인기 만점이다. 사육사가 기니 동산으로 연결된 다리를 꺼내면, 기니피그 집에 있던 기니피그들이 집에서 나와 동산을 오르며 숨바꼭질을 하곤 한다. 언제나 아이들이 복작복작 모여 기니피그들의 놀이를 구경한다.

 

그런데 친구들과 달리 겁이 많은 차모는 다리를 건너지 못해 집에만 웅크리고 있다. 갈색 털이 보송보송한 차모는 그래서 늘 심심하다.

 

 

어느 날 점심시간에 모두 즐겁게 밥을 먹다가 페루가 차모에게 묻는다. 너는 왜 기니 동산에 안 올라오냐고, 엄청 재미있으니 같이 가자고 말이다. 차모는 대답한다. 혹시 다리에서 떨어지거나, 아이들이 놀릴까봐, 또는 기니 동산이 무너질 수도 있어서 걱정이 된다고 말이다.

 

친구들은 차모의 지난친 걱정에 모두 어이가 없다고 깔깔 웃지만, 차모는 기분이 나쁘면서도 겁이 많은 자신이 싫어진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낮잠 시간이 되어 배가 부른 친구들은 콜콜 잠이 든다. 그런데 차모는 어떻게 하면 용감해질 수 있을까 고민하느라 잠이 오질 않는다. 그때 어디선가 차모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차모! 차모!"

 

차모의 몸에서 빠진 털이 모여서 생겨난 털 뭉치들이 통통 튀면서 말한다. 그렇게 차모는 뭉치들을 따라 혼자만의 모험을 하게 된다. 과연 겁쟁이 차모는 용감해질 수 있을까. 뭉치들과의 모험이 차모의 겁을 싹 달아나게 만들어줄 수 있을까.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러운 그림책이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반려동물 중에 집에서 키우기 쉬운 것이 바로 햄스터, 고슴도치, 기니피그일 것이다. 일단 모습이 귀엽고 작고, 건강하게 잘 키운다면 수명도 5~15년 정도 되는 반려동물이니 말이다. 그 중에서 기니피그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 그림책이라서 아이가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차모의 모험 중에 미로 찾기도 포함되어 있어 재미를 더해주고, 이야기가 끝난 뒤에는 '기니피그 강좌'라고 해서 기니피그의 언어에 담긴 뜻을 알려 준다. 사실 동물을 좋아하는 아이라면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고 싶어한 적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이런 소리를 낼 때는 어떤 기분인지, 이런 동작을 할 때는 뭘 해달라는 뜻인지 알게 된다면 사랑스러운 동물과 함께 하는 생활이 더 즐거워 질 것이다. 혹시 햄스터나 기니피그를 키우고 있는 중이라면 더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을 만한 책이고, 키우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면 이 책이 아이에게 대리만족이 되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차모와 신비한 친구 뭉치들과 함께 하는 모험을 떠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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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문구점 아저씨 - 좋아하는 일들로만 먹고사는 지속 가능한 삶
유한빈(펜크래프트)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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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대에 부의 상징으로 통하던 펜이 있었으니……. 이름하야 ‘파이롯트 하이테크’ 되시겠다. 아마 다들 기억할 거라고 생각한다. 굉장히 센세이션하고 엘레강스하며 럭셔리하고 뷰티풀한 펜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같은 회사에서 쥬스업이라는 볼펜(내가 생각하기에 하이테크의 완벽한 상위 호환 버전이다. 잉크 발색도 더 뛰어나고 색상도 다양하고 내구성도 좋고 노크식이라 쓰기도 간편하다. 그립부엔 고무가 덧대 있어 그립감도 좋다)이 나와서 그런지 대형 문구점에 가봐도 예전처럼 하이테크 앞에서 서성거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아졌다.          p.35~36

 

어린 시절에는 동네 곳곳에 보이던 것이 문구점이었는데, 요즘은 알파문구나 링코 등 대형 체인점 조차도 찾기가 어려워졌다. 대부분 온라인 몰을 통해서 문구를 주문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동네 문구점은 그야말로 버틸 수가 없는 구조일 것이다. 그 와중에 문구점 창업기라니, 호기심이 생겼다. 게다가 주인 아저씨가 문구 덕후로 긴 시간 노트 덕질을 하다가 도저히 마음에 드는 노트를 찾을 수 없어서 직접 '제작'하는 일에 뛰어 들었다고 하니, 궁금할 수밖에 없다.

 

망원동 초등학교 바로 앞에 위치한 '동백문구점'에는 초등학생이 쓸 문구를 팔지 않는다. 오히려 다 큰 어른들이 쓸 문구를 파는 곳인데, 굳이 초등학교 앞에 매장을 구했다는 것이 재미있다. 암막커튼과 조명, 사방이 노트들로 가득 찬 서재 같은 느낌의 문구점이라니... 근처 초등학생들이 들어 왔다가 깜짝 놀라 다시 나갈 것만 같다. 특히나 커튼 덕분에 가게가 문을 열었는지 안 열었는지 알기도 어려운 조용한 문구점이라,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닫힌 가게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영업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이는, 어떤 날은 하루에 한 명도 안 오는 문구점을 운영하는 주인장에 대해 궁금해졌다.

 

 

 

간판은 없다. 아는 사람만 올 수 있다. 비밀의 장소 같은 곳이다. 인스타그램에 기존엔 없었던 색다른 공간이 있다는 소문이 난다. 사람들이 찾아오지만 입구가 어딘지 찾지 못하고 주변에서 헤맨다. 우여곡절 끝에 공간에 들어오자 밝았던 바깥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마치 영화 세트장 같다. 전체적으로 어둑어둑한 분위기. 카운터로 보이는 곳 쪽에 대형 샹들리에가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사방에는 고재(빈티지 우드)로 만든 책장이 가득하다. 딱 봐도 나이가 이백 살은 돼 보인다.          p.187~188

 

이 책의 저자이자 동백문구점을 운영하는 그는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에서 ‘펜크래프트’라는 활동명 관련 책을 집필하기도 했고, 온오프라인으로 글씨 교정 강의를도 진행한다. 매일같이 책을 읽고, 필사하며, 활자뿐만 아니라 활자를 쓰는 도구인 문구류에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다. '이 담에 크면 문구점 아저씨가 될 거야'라고 생각했던 초등학생이 어른이 되어 꿈을 이룬 것이다. 어린 시절의 꿈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자라는 것도, 게다가 그 꿈을 이루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인데 말이다.  그의 '덕업일치'와 아날로그 라이프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새삼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느리고, 여유있게 슬로우 라이프를 살고 있는 것도, 좋아하는 것에 진심인 마음으로 문구를 직접 제작하고, 문구점을 창업하고 운영하는 것도 모두 말이다.

 

저자가 펜크래프트로 활동하게 된 과정도 매우 흥미롭다. 전설의 포켓몬처럼 느껴졌던 몽블랑 만년필을 구매하고 나서, 없는 살림에 산 거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사진을 찍고, 최대한 정성 들여 글씨를 썼는데.. 몽블랑 만년필의 품격에 걸맞지 않은 초등학생 글씨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글씨 연습은 결국 좋아하는 책의 내용을 베껴 쓰는 '필사' 연습으로 이어졌고, 그러다 보니 손글씨 강의까지 하게 되는 수준이 된 것이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남들보다 조금 더 열심히 좋아했을 뿐인데, 그것이 결국 직업이 되고, 삶이 되는 경우라니.. 너무도 근사했다. 손글씨, 편지, 종이책, 레코드.. 모두 불편한 것들, 아날로그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들이다. 패션조차 구식을 좋아한다는 저자의 아날로그 라이프는 그 불편함을 감수하는 데서 오는 특유의 감성이 있는 것 같다. 문구를 좋아하는 덕후라면, 아날로그 라이프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자신 안에 숨어 있던 내면의 덕후 기질을 이 책을 통해 꺼낼 수 있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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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그라비아의 음모 레이디 셜록 시리즈 2
셰리 토머스 지음, 이경아 옮김 / 리드비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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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잉그램은 힘을 받고 싶기라도 한 듯 목에 걸린 카메오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던 차에 신문에서 홈스 씨에 관한 기사를 봤어요. 나는 홈스 씨가 악명 높은 범죄 사건에만 자문하시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기사를 읽어 보니 그렇게 대수롭지 않은 문제로 고민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도 분명히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 싶더군요."
"문제는 문제니까요. 셜록은 의뢰인의 문제거리가 악명이나 선정성의 문턱을 넘지 못한다는 이유로 돌려보내지 않아요."         p.81

 

'셜록 홈스'가 빅토리아 시대 여성이라는 대담한 발상으로 우리가 알고 있던 그 모든 서사를 완전히 뒤바꿔버리는 마법을 선사하는 '레디이 셜록 시리즈 그 두 번째 작품이다. 전작에서 샬럿은 결혼이라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등식을 깨부수기 위해, 파격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데, 그로 인해 가문의 명예는 떨어지고, 그녀 자신은 추문에 휩싸여 집에서 나오게 된다. 오갈 곳 없어진 그녀의 구세주가 되어 주는 왓슨 부인을 만나게 되면서 '셜록 홈스'라는 남성의 이름을 사용해 자신만이 가진 특별한 재능인 관찰력과 추리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시작했다.

 

신문에 광고를 수록해 의뢰를 받았고, 의뢰인들은 셜록 홈스의 진짜 성별을 전혀 모르는 상태로 어퍼 베이커 스트리트의 응접실에서 샬럿과 만나게 된다. 샬럿은 자신을 셜록 홈스의 여동생으로 소개하고 사건을 해결해준다. 이 세상에 셜록 홈스라는 남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눈부신 지성을 소유한 여성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사회가 한번 뒤집어 지겠지만 말이다. 샬럿은 살인 사건뿐만 아니라 집 안의 미스터리와 일상의 괴현상 등 소소한 고민들에 대해서도 의뢰를 받는다. 여자들이 자신이 거둔 성과에 합당한 대접을 받을 수 없는 시대였기에, 샬럿은 이렇게라도 자신의 능력을 어딘가에 써먹을 수 있고, 그 노동으로 적절한 대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던 중, 샬럿의 오랜 친구인 잉그램 경의 아내, 레이디 잉그램이 의뢰를 하겠다고 찾아온다.

 

 

 

샬럿은 낭만적인 사랑은 쉽게 상하는 식품과 같아서, 한정된 시간 동안에는 가장 신선하고 맛있지만, 그 기간이 지나면 눈에 띄게 부패하지는 않더라도 퀴퀴한 냄새가 난다고 믿었다. 사랑이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주장을 조금도 신뢰하지 않으므로, 그녀는 이 청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마땅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 지점에서 자그마한 취향의 문제가 끼어 들었다. 그녀는 밴크로프트 경의 아내가 되는 것보다 혼자인 편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유일한 문제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자신의 확고한 취향을 어디까지 존중해야 하느냐였다.           p.324~325

 

레이디 잉그램은 결혼 전부터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결혼 후에도 애인을 일 년에 한 번 만나왔다. 특정한 시간, 장소에 잠깐 산책하는 것만으로 서로 살아 있고, 건강히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올해 아무런 연락도 없이, 그 사람이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 레이디 잉그램의 첫사랑을 찾아 달라는 의뢰를 조사하던 중 샬럿은 그가 자신의 배다른 오빠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와중에 샬럿은 밴크로프트 경으로부터 청혼을 받게 되고, 자신이 어차피 결혼 생활과는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민한다. 결혼을 하게 되면서 얻을 수 있는 것들과 지킬 수 있게 되는 것들 때문에 말이다. 물론 샬럿의 성격을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녀가 청혼을 수락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만 말이다.

 

샬럿은 레이디 잉그램이 의뢰한 실종 사건과 10년 전 암호에 얽힌 살인 사건을 해결하며, 거기에 언니 리비아가 한눈에 빠져든 수수께끼의 낯선 남자에 대한 문제와 자신이 받은 청혼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했다. 그리고 앞으로 운명의 라이벌이 될 모리아티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전작이 시리즈 첫 번째 작품으로 배경에 대한 묘사와 캐릭터의 성격에 대한 이야기가 꽤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것이 비해, 두 번째 작품에서는 보다 본격적으로 위험한 사건과 맞닥뜨리게 된 샬럿 홈스의 활약을 만날 수 있다.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어, 세 번째 작품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레이디 셜록 시리즈는 현재 6권까지 나와 있는 상태이다. 완벽한 추리력과 냉철한 카리스마보다는 조금 더 다정하고, 인간적인 매력으로 무장한 셜록 홈스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자. 사건 해결 외에는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 무심하고 까칠했던 셜록 홈스만 알고 있던 당신에게, 이 시리즈는 시대의 관습에 구애 받지 않으며, 당당하고 자유로운, 게다가 사랑스러운 셜록 홈스를 만나게 해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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