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로이 야스오의 캐릭터 얼굴 & 바스트업 작화 기술 그리다
무로이 야스오 지음, 김재훈 옮김 / 영진.com(영진닷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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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토>,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 파, Q>, <전뇌 코일> 등의 작품에 참여한 최고의 애니메이터 '무로이 야스오'의 캐릭터 얼굴 & 바스트업 작화 기술을 한 권에 담았다. 전체, 중간, 세부의 가장 쉬운 3단계로 완성하는 애니메이션 작화법이다. '전체, 중간, 세부'의 순서로 '배치, 크기, 각도'에 주의하면서 그리면 자연스럽게 얼굴의 형태가 된다.

 

 

‘전체’는 그리고 싶은 것을 선으로 나누고, ‘중간’은 그것을 면으로 나누는 과정이다. 이는 각각 그리고 싶은 것을 바른 위치에 배치하는 데 필요한 단계이다. 이어지는 '세부'는 배치가 끝난 뒤에 선을 정리하고 완성하는 마무리 단계이다.

 

저자에 따르면 잘 그릴 수 있고 없는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느낌만으로 우연히 잘 그려지는 일은 없다는 거다. 이 책을 통해 '전체, 중간, 세부'로 확실하게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는 순서를 경험해본다면, 어떤 그림을 그릴 때에도 적용되는 기본을 익힐 수 있을 것이다.

 

 

그림 습득에는 재능 이전에 기술과 지식이 필요하다. 스포츠와 음악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기술 습득에 필요한 룰과 순서를 익힐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재능은 기술과 지식의 습득 그리고 경험치로 꽃 피울 수 있으므로, 그림의 수준과 관계없이 처음 시작하는 이들도 이 책을 따라하는 것만으로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기초를 쌓을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세부'에 많은 시간을 쓰기 쉬운데, '전체'를 먼저 파악하는 것이 원하는 이미지의 그림을 그리는 지름길이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전체'는 건축과 마찬가지로 그림의 설계도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프레임 속의 무엇을 어디에 배치하는 것까지 생각하고 전체를 그리는 요령을 배운 뒤, 중간, 세부 순서대로 그리는 방법에 대해 디테일하게 알려 준다.

 

어떤 그림이든 방침과 구성 등의 밑그림 작업이 완성도를 거의 좌우한다고 한다. 전체를 꼼꼼하게 파악하고 준비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캐릭터 그리기, 인체 드로잉, 만화 작법이 궁금하다면 이 책 한 권으로 충분할 것 같다.

 

 

무로이 야스오는 그림을 다소 늦게 시작한 편인데, 18살 때부터 약 20년간 그림을 그려 오고 있다. 그는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을지 아닐지는 재능과 센스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그림은 기술'이라고 말해왔다. 제대로 그림 그리는 방법을 배운다면, 누구라도 기본 이상의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책은 애니메이션 작화법이 궁금했던 이들에게도 훌륭한 만화 작법서이자 드로잉 책이 되어줄 것이다. 정면 얼굴의 기본부터 시작해 옆얼굴, 반측면 얼굴, 로우앵글, 하이앵글 등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고, 눈, 코, 입, 코 등 세부사항을 거쳐 표정과 연기, 연출도 차근차근 알려준다. 좋아하는 캐릭터의 얼굴 형태를 그려보고 싶었다면, 표현과 움직임의 변화까지 더해 인체드로잉을 배우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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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선집 2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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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지난다. 그리고 또 하루. 레너드한테 전화해야지, 다짐해보지만 몇 번이고 손을 전화기로 뻗으려다가도 그만두고 만다. 물론 레너드도 똑같은 심정이겠지, 전화가 안 오는 걸 보면. 행동이 되지 못한 충동은 차곡차곡 쌓여 신경을 망가트리고, 망가진 신경은 굳어져 권태가 된다. 복잡한 감정과 망가진 신경, 그리고 마비된 의지까지 한 바퀴를 다 돌고 나면, 그제야 만나고 싶은 마음이 다시 초조하게 올라오고 전화기를 향해 뻗는 손은 마침내 동작을 완료한다.      p.10

 

비비언 고닉은 버지니아 울프에 비견되는 문학비평, 특히 회고록의 새 장을 열었다고 평가될 만큼 자전적 글쓰기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작가이다. '비비언 고닉 선집' 첫 번째 작품이었던 <사나운 애착>은 중년의 작가가 노년의 어머니와 뉴욕 거리를 거닐며 담소하고, 회상하고, 언쟁하는 이야기가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삶에 대한 통찰력과 뛰어난 문장들로 인해 매 순간 심금을 울렸다. 그리고 거의 일 년을 기다려 두 번째 책 <짝없는 여자와 도시>를 만났다. 고닉이 <사나운 애착>을 펴내고 30여 년 만에 쓴 작품으로 평생을 살아온 뉴욕을 배경으로 사랑과 우정에 대해 탐색하고 있다.

 

20년이 넘도록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게이 친구와의 에피소드들은 특히나 흥미롭다. 요즘 사는 게 어떠냐는 질문에 대해 닭뼈가 목구멍에 딱 걸린 거 같다는 대답을 하고, 나는 사는 게 적성에 안 맞아, 라는 말에 누군들 맞겠어? 라고 대꾸하는 식의 담백하고, 시크한 관계였으니 말이다. 사랑을 성배의 자리에 올려둔 엄마와는 달리 고닉은 서른다섯이 되기 전에 결혼도 두 번, 이혼도 두 번 경험했다. 그리고 예순이 된 지금, 짝 없는 여자가 되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완전하고 충만하게 느낀다. 로맨틱한 사랑의 상실 혹은 종말로 인해 굳어버린 심장이 문학비평가이자 작가로서 고닉의 문장들을 더욱 깊어지게 만들었다.

 

 

 

이런 식의 몰입은 구체적인 일상에 추상적 사고가 맞물릴 때의 짜릿한 흥분을 양분 삼아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우리 안에서 깊어져만 갔다. 우리는 함께하는 대화 속에서 일상적인 것들에 부과된 맥락의 힘을 느꼈다. 이론에 접목되는 생활의 요소들, 그러니까 버스에서 우연히 마주칠 확률, 최근에 읽기 시작했거나 다 읽은 책, 엉망이 돼버린 저녁 파티 따위를 파고들수록 세계가 점점 더 확장되는 기분이었다. 거실에 앉아 있거나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거리를 걷거나 하는 나날의 일상에 서사적 동력이 더해져 관점을 형성해가는 원료가 되었다. 집을 나서지 않고도 세상만사를 꿰뚫어볼 수 있게 된 것만 같았다.        p.83~84

 

현대 사회에서, 특히 도시에서의 사람들간에 만들어지는 관계와 우정에 관한 글들이 인상적인 부분이 많았다. 전작에서도 자주 언급되었던 고닉이 어린 시절 살았던 공동주택 이웃들의 우정, 그저 말없이 필요한 순간마다 알아주는 마음들이 사라진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은 '친구란 자기 내면의 선량함에 말을 건네는 선량한 존재'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게 느껴지는 세상이다. 우정이라는 결속, 솔직한 자아, 문화적인 착각 등 익명으로 집결한 도시 거주자들을 향한 고닉의 시선은 누구라도 공감할 만한 것들이었다.

 

고닉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들, 희미하게 짐작했던 것들을 구체화시켜서 바로 눈 앞에 들이미는 듯한 느낌을 안겨준다는 점인데, 덕분에 언제나 그리 두껍지 않은 페이지가 인덱스와 밑줄로 가득해지곤 한다. 글항아리에서 출간되는 비비언 고닉 선집은 <끝나지 않은 일: 만성 재독서가의 노트>로 이어질 예정이다. 특히나 이 책은 '다시 읽기'를 통해서 지난달 중요했던 책들의 기억을 재구성하고, 당연하던 것들을 질문으로 바꾸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해서 기대 중이다. 고닉이 '만성재독서가'를 자처한다고 하니, 그 책의 목록들과 사유가 더욱 궁금해진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오는 친밀함과 날카로운 사유에서 느껴지는 보편성으로 버무려진 고닉의 놀라운 작품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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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2-24 1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도 글이지만 이 깔맞춤 ㅎㅎ
👍

피오나 2023-02-24 22:09   좋아요 1 | URL
ㅋㅋㅋ 깔맞춤을 알아봐주시다니 감사!!
 
샌드 카운티 연감 - 자연은 스스로 조화롭고 이제 우리의 결정만 남았다
알도 레오폴드 지음, 이동신 옮김 / 이다북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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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는 이제 색을 정해서 이슬로 분사했다. 올방개 잔디는 예전보다 더 푸르고, 이제 물꽈리아재비와 분홍색 용머리와 벗풀의 우윳빛 꽃으로 가득하다. 여기저기에서 진홍로벨리아가 하늘을 향해 붉은색 창을 뻗는다. 강둑 머리에는 자주색 수레국화와 옅은 분홍색 등골나물이 버드나무 벽을 배경으로 똑바로 서 있다. 그리고 단 한 번만 아름다울 수 있는 곳을 찾을 때 당연히 그래야 하듯 조용하고 겸손하게 왔다면, 당신은 무릎까지 오는 기쁨의 정원에 서 있는 붉은 사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p.72~73

 

‘지구의 허파’로 불리는 아마존의 삼림이 기후변화와 무분별한 벌목으로 2030년에는 거의 60%가 파괴될 것으로 예상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아마존을 빽빽이 메운 3,900억 그루 이상의 나무들이 그렇게 파괴된다면, 지구온난화에 폭발적인 가속도가 붙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삼림을 보존하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생태학적 문제가 우리의 삶과 고스란히 직결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바쁘게 살아 가느라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소박하고 검소한 삶에의 미덕이란 어느 먼 세상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생태문학, 환경도서들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만난 것은 미국 생태문학의 고전이자 환경운동의 교과서이자, 캠브리지대학교 지속가능 리더십 프로그램 센터(CPSL)가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환경 도서’인 알도 레오폴드의 <샌드 카운티 연감>이다. 이 책은 생태학자이자 환경보호론자로 인간이 자연을 해치지 않으면서 자연과 조화롭게 사는 세상을 이루려고 했던 알도 레오폴드의 사후인 1949년에 출간되었다. 출간 이후 20여 년 동안은 크게 반응을 받지 못했지만, 1970년대부터 폭발적으로 성장한 환경운동의 영향으로 관심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자연을 보호할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하는 존재로 바라보는 그는 이 책에서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환경과 생태적 문제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창의적인 해결책을 알려준다.

 

 

 

모든 살아가는 것들과 이미 죽은 것들도 그 소리에 주의를 기울인다. 사슴에게는 생명체가 사는 방식에 대한 기억이고, 소나무에게는 한밤중의 싸움과 눈 위의 피에 대한 예고이며, 코요테에게는 앞으로 수확물에 대한 약속이고, 목동에게는 은행에 빚을 질 위험이고, 사냥꾼에게는 총알에 맞서는 송곳니의 도전이다. 하지만 이 명백하고 즉각적인 희망과 공포 뒤에는 산에게만 알려진 좀더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다. 산만이 객관적으로 늑대 울음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오래 살았다.       p.163

 

여러모로 흥미로운 부분이 많은 책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초반부를 재미있게 읽었다. 극심한 근대화로부터 주말 도피처인 '오두막'에서 저자가 가족들과 겪었던 자연과 함께한 삶을 에세이로 자연스럽게 풀어 내었다. '샌드 카운티의 사계'라는 컨셉으로 1월부터 1월까지 매달의 자연 풍경들을 그리고 있다. 한겨울의 눈보라가 지나가고 땅에서 물방울 소리가 들리는 해빙의 밤을 거치면, 겨우내 잠든 동물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이동하는 거위 한 무리가 겨울의 침묵을 깨고 봄이 옴을 알려준다. 꽃이 개화하고, 새가 날아 다니는 등 숲과 평원에서 일어나는 수백 편의 작은 드라마를 글로 읽다 보면, 마치 푸르른 숲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땅이 공동체라는 것은 생태학의 기본 개념이지만, 땅이 사랑받고 존경받아야 한다는 것은 윤리의 확장'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은 땅과 땅 위에서 자라는 동물과 식물과 인간의 관계를 다루는 '땅의 윤리'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고찰한다. 토양, 물, 식물, 그리고 동물들 모두의 존재를 지속하고, 자연 상태로 계속 존재할 권리가 있다. 무엇보다 인간과 자연의 합리적인 균형이 가능하다는 믿음과 그러한 균형을 인간이 합리적으로 받아들이는 실천 철학이야말로 자연과 인간이 공존과 공생의 길로 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사실 우리가 환경 재앙이라고 일컫는 것들은 모두 인간들이 저질러온 행동 때문에 발생한 문제들이다. 인간들은 편리를 위해 자연스럽게 흐르는 강물을 막아 댐을 쌓고, 언덕과 산을 파헤쳐 고속도로를 닦았으며, 광물이나 귀금속을 찾기 위해 땅속을 샅샅이 뒤졌고, 강과 바다에 온갖 쓰레기를 갖다 버렸으니 말이다. 학자들은 이대로 가다가는 2050년경이 되면 지구상에서 모든 열대 우림이 사라지고, 석탄이나 석유 같은 연료들도 모두 바닥이 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인간과 환경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환경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윤리와 지침을 알려주는 이 책을 읽어야 할 시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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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숲 양조장집
도다 준코 지음, 이정민 옮김 / ㈜소미미디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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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아빠의 말이 얼마나 기뻤던가. 그 기분을 잊지 않기 위해 최대한 많이 먹고 많이 웃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스즈메간장에는 여자가 네 명 있다. 늘 엄격한 얼굴의 '빠득빠득' 다즈코, 꿈속에 젖어 '둥실둥실' 떠다니는 엄마, 여왕처럼 도도한 '삐죽삐죽' 사쿠라코, 그리고 만사태평한 '헤실헤실' 긴카였다.
아빠와 오하라 도지가 죽고 양조장에는 다즈코 혼자 남았다. 긴카가 돕겠다고 나섰으나 단칼에 거절당했다.        p.158~159

 

제163회 나오키상 후보작이자, 국내에 두 번째로 소개되는 도다 준코의 신작이다. 150년 가까이 대대로 이어온 유서 깊은 간장 양조장 집안을 배경으로 한 소녀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초등학교 4학년인 긴카는 오사카에서 화가인 아빠와 요리를 잘하는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하지만 아빠가 그리는 그림은 상업적이지 못해 거의 팔리지 않았고, 엄마는 자신도 모르게 가게 물건이나 남의 물건을 훔치는 도벽이 있다. 지갑에 돈이 있어도, 물건이 필요하지 않아도 갑자기 손이 움직여 훔치고는 금방 들켜버린다. 두 번 다시 하지 않겠다고 후회하고 울지만, 뒷수습은 언제나 딸인 긴카의 몫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있는지도 몰랐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아버지가 가업인 간장 양조장을 이어야 하기에 본가로 가서 살게 된다. 나라현에 있는 아버지의 본가는 뒤로는 대나무 숲이 펼쳐져 있고, 오래된 살림집과 양조장 건물이 넓은 부지에 함께 있는 곳이었다. 긴카는 그곳에서 엄격한 할머니와 열한 살짜리 고모와 함께 지내게 되는데, 아빠는 그림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 양조장 일을 소홀히 하고, 천진난만하고 무신경한 엄마는 절약이 몸에 밴 할머니와 잘 지내지 못한다. 그 사이에서 긴카는 아빠 대신 양조장 일을 거들고, 엄마가 친 사고를 뒷수습하며 홀로 고군분투한다. 그 와중에 엄마의 손버릇을 감싸주려다 친구들에게 도둑이라는 누명을 쓰게 되고, 억울했지만 그저 견뎌낸다. 게다가 자신이 아빠의 진짜 딸이 아니라 의붓자식이라는 걸 알게 되는데, 긴카는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들을 겪다 보니 무엇을 어떻게 느껴야 할지 혼란스럽다.

 

 

 

"너는 정말 잘 웃는구나."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했다.
"아마 단순해서일 거예요."
"내 말에 웃어주는 사람은 너 하나뿐이다."
다즈코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진지하다 못해 심각한 얼굴은 화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눈빛에는 지금껏 알아차리지 못한 온기가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갓 찐 콩처럼 따뜻한 눈빛이다.        p.369

 

이 작품은 긴카라는 한 소녀가 환갑을 맞이하게 될 때까지의 수십 년을 고스란히 펼쳐 보이고 있다. 대대로 당주의 눈에만 보인다는 집안의 수호신 좌부동자가 나온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유서 깊은 간장 양조장에서의 삶은 어른들에게도, 어린이에게도 결코 수월하지가 않다. 그 와중에 각자가 숨기고 있는 비밀과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거짓말들이 쌓이고 쌓여서 독이 되고, 불행을 불러오고, 재앙을 만들어 내고 있으니 말이다. 세상의 모든 인간관계는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굴레라는 것을 보여주는 이들 가족의 얽히고 설킨 인연의 무게가 묵직하게 다가오는 이야기였다. 그 누구도 결코 바란 적 없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참고, 견디고, 감내할 수밖에 없는 일도 생기는 것이 삶이라는 걸, 작가는 긴카라는 소녀의 목소리로 들려 준다.

 

엄마를 사랑하지만, 엄마의 딸이라는 사실이 부끄럽고 괴롭고 힘들어서 원망하는 긴카, 한 집안의 가장임에도 불구하고 마땅한 벌이없이 생활비를 본가에서 받아 쓰던 아빠, 요리, 청소 등 실력은 뛰어나지만 도벽이 있어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엄마, 엄격한 성품과는 달리 엄청난 비밀을 간직한 할머니, 그리고 예쁜 외모와 달리 밖으로 엇나가기만 하는 고모 등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하나씩 부족한 점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이 모든 인물들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 도다 준코의 뛰어난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작품은 인간의 가혹한 운명을 드라마틱하게 그리기로 유명한 도다 준코의 작품 중에서도 주인공이 가장 고생을 덜하는 편이라고 하는데, 긴카의 드라마틱한 생을 함께 겪어 내고 나니 다른 작품들은 어떨지 상상이 되었다. 도다 준코의 다른 작품들도 국내에서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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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KUNAMATATA 2023-03-05 08: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뿌고 기분좋아지는 피오나공주(?)의 방이네요~^^
잘 읽고갑니다

피오나 2023-03-05 15:11   좋아요 1 | URL
자주 오셔서 책 이야기 나눠요^^
 
빅 도어 프라이즈
M. O. 월시 지음, 송섬별 옮김 / 작가정신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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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있는 삶은 어떤 삶인거지? 이런저런 일자리를 전전하고, 집안일을 하고, 일요일이면 십자말풀이를 하며 잡담을 나누느라 여태 미뤄왔던 꿈은 뭐였지? 그런데 살면서 이루지 못한 채 남아 있는 일들을 과연 꿈이라고 말해도 될까? 인생이 반이나 지나갈 때까지 자신에게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그런 꿈이 숙명이 될 수도 있을까? 나의 진정한 소명은 뭘까? ... 디어필드에서 평생을 보내게 되는 걸까? 이렇게 살겠다고 태어난 걸까? 어째서 더 큰일은 못 해? 더 대단한 일은? 나 역시 조만간 마흔이 되지 않나?           p.29

 

루이지애나의 작은 마을 디어필드의 한 식료품점에 어느 날 이상한 기계가 하나 등장한다. 디엔에이믹스라는 기계는 ‘DNA를 과학적으로 분석해 모든 것이 잘 이루어졌다면 될 수 있었을 나의 가능한 신분’을 알려준다. 비용은 단돈 2달러, 면봉으로 볼 안쪽을 문지르고 기계의 구멍 안으로 집어 넣기만 하면 된다. 결과지에 담겨 있는 가능성을 믿는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로 인해 영향을 받게 된다. 결과지에 핵물리학자가 될 거라고 써 있다는 이유로 앞으로 역사 수업은 듣지 않겠다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사업가가 될 수 있다는 결과를 보고 갑작스레 가게를 시작해 일주일 만에 대박이 난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마냥 무모하다고만 할 수도 없는 것이, 지금의 나와는 다른 무언가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희망에 흔들리지 않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 말이다. 중년의 역사 교사 더글러스 하버드와 그의 아내 셰릴린, 더글러스의 학교 제자인 제이컵과 죽은 쌍둥이 형의 여자친구였던 트리나, 그리고 트리나의 삼촌이자 마을의 하나뿐인 신부인 피트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그려지고 있다. 평범하고 안락한 삶을 살고 있던 그들의 잔잔한 일상에 디엔에이믹스라는 기계가 돌멩이를 던졌고, 그로 인해 생긴 작은 파문이 점점 더 커다란 물결이 되어 버린다. 운 좋게 얻은 큰 선물이라는 뜻의 제목 ‘빅 도어 프라이즈Big Door Prize’처럼, 이들이 얻게 되는 것은 예상치 못했던 선물일까, 아니면 받지 않는 것만 못하는 재앙일까. 과연 각자의 '진짜 운명'은 지금의 현실과 다른 무언가를 기대하게 만들어 줄까.

 

 

 

우리가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추억하며 웃으면 되잖아. 삶을 그런 방식으로 바라보는 건 애초부터 우리가 원한 게 아니지 않나? 기계가 우리의 운명을 알려주다니. 우리의 인생이 이미 정해진 거라니, 한꺼번에 정해진 거라니. 말도 안 되지 않나? 실망스럽지 않나? 차마 상상하기도 싫지 않나? 난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사랑해. 그렇게 말할 것이다. 고작 종이 쪼가리 하나 때문에, 우리가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는 없어.        p.257~258

 

누구나 살다 보면 기습적으로 그런 순간을 맞닥뜨리게 된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제대로 된 취미 하나 없이, 책장에 장식한 멋진 트로피 하나 없이, 세상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 하나 남기지 못한 채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게다가 자신이 좋아해서 시작한 일조차도 전만큼 보람차지 않고, 그 직업으로 인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친 것도 아니고, 이 지구상에서 수십 년을 살면서 내세울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럴 때 단돈 2달러만 내면 나의 DNA를 읽어서 미래에 일어날 수도 있는 내 가능성을 알려주는 기계가 있다면 어떨까.

 

모든 것이 제대로 됐다면 내가 했을 수도 있는 일, 지금과 다른 세계에서는 내가 될 수도 있었던 것에 대해서 궁금해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이 작품은 그렇게 알게 된 각자의 운명으로 인해 삶이 바뀌고, 흔들리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재미없는 삶이 달라질 거라는 기대만으로도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디엔에이믹스가 알려준 미래에 의지하게 된다. 하지만 이 작품은 삶이 '운 좋게 얻은 큰 선물'이 아니라, 사소한 선택들과 매 순간의 고군분투를 통해 차곡차곡 쌓아온 시간들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점을 사랑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마이 선샤인 어웨이>에서 사랑과 집착을 주제로 한 소년의 성장담을 그려냈던 M. O. 월시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한 시즌짜리 미국 TV시리즈를 연상시키는 유머와 페이소스가 넘치는 작품이라고 하는데, 애플TV+ 10부작 드라마로 2023년 상반기 방영을 앞두고 있다고 하니 안락하고 평온한 마을 전체를 흔들어 놓은 마법 같은 이야기가 영상으로는 또 어떨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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