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우주 이야기 - 밤을 깨우는 신비로운 산책, 한국출판문화진흥재단 2023년 상반기 올해의 청소년 교양도서 선정
에드비제 페출리 외 지음, 알리체 베니에로 그림, 신동경 옮김, 실비아 베키니, 윤성철 감 / 아울북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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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에서 출발한 빛은 8분이 지나서야 지구에 도착하니까, 우리가 보는 건 8분 전의 태양이야. 마찬가지로 우주 어딘가에서 지구를 볼 때도 시간의 차이가 생겨. 외계인이 자기 행성에서 망원경을 들여다보다가, 아주 멀리 떨어진 작은 점, 그러니까 지구에 사는 우리를 발견했다고 상상해 봐. 외계인이 보는 건 우리의 과거 모습일 거야. 외계인이 있는 행성이 지구에서 벌리 떨어져 있을수록 더 오래된 과거를 보게 되겠지.         p.62

 

어린 시절에 가장 좋아했던 것이 과학, 그 중에서도 천문학이었다. 과학잡지 Newton을 꽤 오래 읽었는데, 당시에 흥미로운 이슈들이 많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나를 매혹시켰던 것이 블랙홀, 우주와 관련된 분야였다. 무한대의 우주란 끊임없는 이야기 거리가 쏟아져 나오는 곳이었고, 천문학과 관련된 이야기는 신기할 만큼 읽어도 읽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주를 다루고 있는 책들도 꽤 많이 읽었는데, 대부분 너무 전문적이어서 어렵거나, 반대로 기본적인 정보의 나열들로만 이루어진 경우가 많아서 아쉬웠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우주 덕후로서 아주 만족스러운 책을 만났다.

 

 

이번에 만난 <끝없는 우주 이야기>라는 책은 저자가 무려 6명이나 된다. 실제로 초기 블랙홀을 연구하고 있는 이탈리아의 여성 천문학자 6인(에드비제 페출리, 마리아 오로피노, 라파엘라 슈나이더, 로사 발리안테, 시모나 갈레라니, 툴리아 스바라토)이 직접 기획하고 집필했는데,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해 쉽고 재미있게 설명한 것이 특징이다. 우주를 사랑하는 어린 동생과 천문학을 공부하는 대학생 언니, 두 자매를 주인공으로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어 마치 소설을 읽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우주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 게다가 너무도 아름다운 일러스트들이 시선을 사로잡고, 쉽게 읽히지만 굉장히 전문적인 내용들을 다루고 있어 어른 독자들에게도 훌륭한 우주 가이드가 되어 준다.

 

 

우리를 꿈의 세계로 초대하는 건 별로 가득한 하늘만이 아니야. 멀지 않은 곳에서도 특별한 것을 찾을 수 있어. 우리가 매일 밤 보는 달은 지구의 유일한 자연 위성이야. 쉽게 구할 수 있는 단순한 쌍안경만으로도 달 표면을 뒤덮은 크레이터와 넓은 평원을 볼 수 있단다... 그렇지만 우린 아직 달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아. 가장 큰 미스터리는 달이 '어떻게' 만들어졌냐는 거야.          p.175

 

두 자매는 모두가 잠든 밤에 어둠 속 산책을 나선다. 시간을 뛰어넘어 눈으로 우주를 관찰하기 위해서다. 별을 관찰할 때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서 적당한 장소를 찾아 편안하게 눕고, 손전등을 끄자 밤하늘이 더 깜깜해진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하나 둘 하늘에 별이 보이기 시작한다.

 

특히나 이 책이 더 흥미로운 이유 중 하나는 자매가 우주를 체험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놀이와 관찰을 한다는 것이다. 은하수의 멋진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 방법을 알려 주고, 우주가 팽창하는 것을 느껴보기 위해 풍선을 불어서 관찰하고, 세가지 색깔의 블록을 통해 갓 태어난 아기 우주를 만들어보기도 한다. 중력을 느껴 보기 위해 여러 친구들과 은하가 되어 중력 실험을 하고, 일곱 색깔 펜으로 뉴턴의 색 바퀴를 만들어 보고, 별 모빌을 직접 꾸며보기도 하고, 블랙홀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살펴볼 수 있는 간단한 실험도 해본다. 단순히 우주를 눈으로 보고, 글로 읽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체험해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모든 건 138억 년 전에 시작되었다. 물론 그때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여전히 우리는 아는 게 많지 않다. 그러다 어느 순간 '빅뱅'이 일어났고, 우주가 팽창하기 시작했다. 현재로서는 우리가 다른 은하에 직접 가서 연구할 방법은 없어, 아주 멀리 떨어진 은하들의 빛을 분석해서 우주가 팽창하는 속도를 측정하고 있다고 한다. 지구에 도달하는 빛은 저마다의 역사와 이야기를 품고 있어서 최근에 일어난 사건뿐 아니라, 아주 먼 과거에 일어난 일도 알 수 있다. 우주를 여행하는 빛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빅뱅과 블랙홀, 태양계 등 다양한 정보들을 만날 수 있어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우주에는 시간의 비밀과 모든 것이 시작된 순간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주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모든 것의 시작인 빅뱅부터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을 관찰하고, 매혹적인 우주의 전령인 빛에 대해 공부하고, 별과 행성이 모여 만들어진 은하와 그 너머를 들여다보고, 블랙홀에 대해 알아보고, 태양계를 탐험한 뒤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 사는 외계 생명체를 떠올려본다. 동생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면, 언니가 유려한 답변으로 동생의 궁금증을 해결해주며, 각종 실험과 놀이를 통해 우주를 직접 체험하게 해준다.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은 신비로운 우주에 대해 다정하게 알려주는 아름다운 이 책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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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반쪽사 - 과학은 어떻게 패권을 움직이고 불편한 역사를 만들었는가
제임스 포스켓 지음, 김아림 옮김 / 블랙피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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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여행할수록 더 많이 배운다." 1500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세 번째 신대륙 항해에서 돌아온 직후에 쓴 글의 일부다. 콜럼버스가 옳았다. 16세기 초부터 과학은 아메리카 대륙을 오가는 정복자, 선교사, 그리고 메스티소 때문에 변화를 겪었다. 이 장에서 우리는 근대과학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세계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차렸다.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화가 시작되면서, 과학 혁명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유럽과 그 너머 더 넓은 세계의 연관성을 살필 필요성이 생겼다.        p.67

 

근대과학의 기원에 대해 다수의 역사학자들은 1500년에서 1700년 사이에 유럽에서 발명되었다고 말한다. 폴란드의 천문학자 니콜라우스코페르니쿠스,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 영국의 수학자 아이작 뉴턴, 영국의 박물학자 찰스 다윈, 독일의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등 19세기의 진화론에서 20세기의 우주 물리학에 이르기까지 근대과학은 유럽에만 국한되어 발달한 산물이라는 거다. 하지만 이 책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현대 과학의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했지만, 역사책에는 없는, 오늘날 대부분 잊혀진 과학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코페르니쿠스보다 먼저 천동설의 모순을 발견한 이슬람 천문학자, <종의 기원>이 출간되기 전부터 이미 생물의 진화에 대해 생각해 왔던 러시아의 박물학자들,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 물리학과 화학의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했던 일본 과학자들, 그리고 아인슈타인에게 양자역학의 영감을 준 인도의 물리학자 등 교과서에서 볼 수 없었던 비유럽 과학자들을 재조명한다. 과학이 패권을 좌우하기 시작한 15세기 대항해 시대부터 현재까지 아우르며, 비유럽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세계사 속 주요 사건들과 함께 들려주고 있어 흥미로웠다. 우리가 반쪽만 알고 있던 역사의 이면을 과학이라는 렌즈로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현대 과학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전 지구적 역사의 관점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19세기 물리학의 역사는 특히 더 그렇다. 러시아든, 튀르키예든, 인도나 일본이든, 과학자들은 전 세계를 돌면서 서로 다른 언어로 출간하고 다른 나라의 청중을 대상으로 강연했다. 그에 따라 과학 분야의 출판물은 오늘날에 비해 언어적으로 훨씬 더 다양했다. 일본 과학자들은 독일어로 출판했고 러시아 과학자들은 프랑스어 논문을 읽었다... 이 장에서 살펴본 과학자들은 어디서 연구하든 현대 물리학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p.335

 

과학의 역사를 서술할 때 멕시코의 아즈텍제국에서 시작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전통적으로 근대과학의 역사는 흔히 '과학 혁명'이라고 불리는 16세기 유럽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서는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목성의 위성을 관찰했고, 영국에서는 로버트 보일이 기체가 어떤 특성 아래 움직이는지 처음으로 묘사했다. 이러한 과학 혁명은 운동의 법칙을 수립한 영국 수학자 아이작 뉴턴의 연구로 절정에 달한다. 그런데 이 책은 '과학 혁명에 대한 새로운 역사'를 서술하고 싶다고 밝힌다. 그리고 1500년대에서 1700년대 사이의 유럽 학자들이 기존 고대 문헌을 외면하고 스스로 자연 세계를 조사하기 시작한 배경에 아즈텍과 잉카의 지식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 준다.

 

코페르니쿠스가 유럽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을 때 오스만제국의 천문학자와 수학자들 역시 나름대로 르네상스에 접어들고 있었다는 것, 18세기 과학의 중요한 한 측면에 노예제, 식민지 무역, 전쟁이 있었다는 사실, 700개 넘는 삽화가 들어가고 12권으로 구성된 유럽 최초의 식물학 저서가 인도에서 쓰였다는 것, 중국에서도 수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자연사 연구에 대한 전통이 존재했다는 사실, 이데올로기의 갈등이 어떻게 과학을 발전시켰는지 등등 고립된 유럽의 천재들이 과학을 발전시켰다는 고정관념을 단숨에 부숴주는 놀라운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게다가 자연스럽게 세계사의 흐름도 알게 되어 과학과 역사와 정치를 단 한 번에 꿰뚫어 볼 수 있게 되는 시간이었다. 기존의 역사, 과학책에서 다루지 않았던 흥미진진한 사실들이 가득한 과학 세계사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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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꼬미 동물병원 1 - SBS TV 동물농장 X 애니멀봐 공식 동물 만화 백과 쪼꼬미 동물병원 1
김강현 지음, 이연 그림, 최영민 감수 / 서울문화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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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충과 동물에 관심이 많은 아이 덕분에 다양한 반려동물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장수 풍뎅이 한 쌍을 키우기 시작해 알과 애벌레, 번데기 과정을 거쳐 성충이 되는 단계까지 지켜보기도 하고, 물고기들도 몇 마리 키우고 있고, 도둑게라고 불리는 스마일크랩도 꽤 오래 키웠다. 요즘에는 달팽이 한 쌍과 햄스터 두 마리를 키우고 있는 중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여러 동물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더 생기게 되었는데, 사실 관련 정보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특히나 소동물들에 대한 정보는 딱히 찾을 수가 없어서 아쉬웠는데, 이번에 이 책이 나온다고 해서 상당히 기대가 되었다.

 

 

480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브 채널 <SBS TV 동물농장 X 애니멀봐>의 오리지널 콘텐츠 중 하나인 '쪼꼬미 동물병원'이 책으로 출간되었다. 여러 동물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사람과 동물의 세계를 더 가깝게 연결해준다는 컨셉으로 병원을 찾은 소동물 친구들의 치료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해서 궁금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학습 만화 형식으로 이야기가 진행이 되어 더 친근하게 동물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각각의 에피소드마다 주인공이 되는 동물의 사연이 학습만화로 소개되고, 각 장의 마지막에 해당 동물에 대한 실제 사진과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을 만화로 꾸민거라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이번에 만나게 된 동물 친구들은 무려 10종이나 된다. 펫테일 게코,와 고슴도치를 시작으로 미어캣, 골든햄스터, 페닌슐라쿠터, 스컹크, 코뉴어 앵무새, 공비단뱀, 라쿤, 프레리도그까지 쉽게 주위에서 만날 수 있는 동물들도 있었고, 처음 보는 동물들도 있었다. 사실 라쿤이나 공비단뱀, 스컹크를 반려 동물로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은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 굉장히 놀라웠다.

 

마지막에는 어떻게 하면 반려동물과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지를 고민해볼 수 있는 '반려동물을 위한 준비' 장이 있다. 반려동물을 키우기 위한 준비 단계부터 반려동물에 대한 보호자 필수 상식까지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만화 중간 중간에 쪼꼬미 퀴즈가 깜짝 등장하니, 퀴즈를 풀어보는 재미도 놓치지 말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수십만 종의 동물도 함께 살고 있다. 장난감처럼 그저 예쁘다는 이유로 키우려는 마음을 갖지 말고, 생명체에 대한 존중과 책임감으로 동물을 대할 수 있을 때 반려 동물을 맞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물과 제대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책은 동물에 대한 정보와 병원 이야기를 만화로 유쾌하고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어, 아이들이 자연스레 귀여운 쪼꼬미 동물 친구들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쪼꼬미 동물병원 1권 구매 시, 초판 한정으로 약 봉투와 메모지 도안이 들어 있다.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쪼꼬미 동물 친구들이 캐릭터로 등장해 있는 약 봉투와 메모지라 활용할 곳이 많을 것 같다. <쪼꼬미 동물병원>의 이야기는 2권에서도 계속될 예정이다. 다음 번에는 또 어떤 쪼꼬미들이 등장할 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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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약국 현대문학 핀 시리즈 에세이 1
김희선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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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도서관 앞으로 차를 몰고 지나갈 때, 나는 거대한 전면 유리 앞쪽에서 몇 개의 그림자가 일렁이며 움직이는 걸 보았다.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는 동안 그 묘한 광경을 지켜보았고, 마침내 그게 원숭이들이라는 걸 알았다. 사실, 세상의 수많은 도서관이 아무도 모르게 원숭이를 키운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것도 일종의 비밀인지 모르지만, 알고 보면 원숭이들은 책을 좋아한다.... 어디선가 들은 얘긴데, 원숭이들에게 책 정리를 처음 맡긴 곳은 중국의 오래된 도서관이었다.          p.86

 

현대문학의 '핀 시리즈'를 시와 소설에 이어 에세이로도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최근 <빛과 영원의 시계방>이라는 흥미로운 작품으로 만났던 김희선 작가의 <밤의 약국>이 첫 번째 작품이다. 김희선 작가는 핀 시리즈 소설로도 만난 적이 있는데, 시리즈 스물아홉 번째 작품으로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가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팔곡마을의 노인들과 이들을 찾아 나선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에 만연한 노인 혐오에 대해 이야기했던 작품이다. 사실 김희선 작가를 처음 만났던 건 아주 오래 전 <라면의 황제>라는 소설집이었다. 당시에 그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세상을 둘러보면 곳곳에 숨어 있는 기이한 이야기들의 집합체 같다고 생각했었다. 다소 황당하고, 생뚱맞아 보이는 소재로 세상에 대해 시시콜콜 오지랖을 펼치는 작가의 이야기는 당혹스러웠지만 유쾌했고, 어이없었지만 재미있었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김희선 작가가 낮엔 약사로, 밤엔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다는 글을 보고 그런 독특한 이력이 특유의 상상력과 허구와 실재가 뒤섞인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했었다. 이번에 만난 작가의 에세이는 기존 작품들을 통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라 더 좋았던 것 같다. 작가가 그려내는 따뜻한 시선으로 빛을 밝히는 밤의 약국 이야기는 약사가 아픈 사람에게 약을 처방해주듯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우리 동네에도 구불구불한 골목 한 켠에 할머니 약사 한 분이 운영하는 약국이 있다. 근처에 있던 편의점이 문을 닫고 나자, 밤이 되면 어두운 골목을 유일하게 비춰 주는 따스한 존재가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실제 김희선 작가가 약사로 근무하는 약국도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처음 만든 빵은 옥수숫가루에 소금을 조금 넣어 구운 진짜 시골식 빵이었는데, 집 밖에 불을 피워놓고 널빤지 위나 집 지을 때 잘라 쓰고 버린 나무토막의 한쪽 끝에 올려놓고 구운 것이었다."
어려서 처음 본 <월든>의 이 문장을, 난 마음이 허전할 때마다 찾아 읽곤 했다. 마치 페이지 어딘가에 무형의 옥수수빵 혹은 빵의 영혼 같은 게 있어서, 책을 펼치기만 하면 그것을 들이마실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하여 내 안으로 들어온 빵의 영혼이 마음을 채워주고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풍미가 구석구석 퍼져나가 몸 전체를 데워주기라도 할 것처럼.            p.145

 

인적이 드문 길모퉁이에 홀로 불을 밝히고 선 가게가 있다면, 안에서 새어 나오는 빛 때문에 어두운 길을 환하게 비춰주는 등불처럼 느껴질 것이다. 물론 벽과 유리로 둘러싸인 내부만 따뜻해 보이기 때문에, 바깥에서 바라볼 때 느껴지는 감정은 소외감과 고독감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위로와 희망의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길 잃은 사람에게는 등대 같은 존재가 되어 주고, 아픈 사람에게는 편한 밤을 선사하는 약이 되어 주기도 하고, 갈 곳 없어 방황하던 사람에게는 한 줌의 휴식 같은 공간이 되어주기도 한다. 실제로 밤에 불이라곤 다 꺼진 쓸쓸한 거리에서 혼자 빛을 밝히고 있는 약국이 어찌나 등대 같았던지, 한때 나라에선 약국마다 문 앞에 '청소년 지킴이 시설'이라는 작은 표지판을 붙이게 한 적도 있다고 하니 말이다.

 

한때 연금술에 관한 한 거의 전문가급의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작가의 고백을 시작으로 기차역에 살던 꿩이 '역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게 되었던 이야기, 조제실 옆 책장에 '독버섯 도감'을 갖다 놓았던 이유, 말하는 앵무새 인형과 할머니, 죽은 돌고래의 꿈, 둥지에서 떨어진 까치를 구조했던 일, 함께 지내고 있는 반려 동물 거북의 하루, 박스맨이라는 도시 전설 등등... 사라져가는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싶다는 말처럼 세상의 구석구석들을 두루 살펴보고, 어루만져주는 다정한 글들이 이어진다. 특히나 마음에 들었던 글은 '빵의 이데아에 관하여'라는 글이었는데, 빵이 주는 온기와 영혼에 한 번 새겨진 것은 영원히 잊히지 않는다는 말에 너무도 공감했기 때문이다. 빵을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 괜스레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 건, 세상의 모든 빵덕후들에게는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르겠다. 에세이는 그저 매일같이 사는 게 바빠서 무심코 지나치거나, 뭐 그런 걸 궁금해하냐고 무시하거나, 못 본 척 지나치거나, 아는 것처럼 넘어가는 경우가 다반사인 이야기들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이어질 핀 시리즈 에세이 선에서는 또 어떤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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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하는 언어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언어는 어떻게 창조되고 진화했는가
모텐 H. 크리스티안센.닉 채터 지음, 이혜경 옮김 / 웨일북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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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놀라운 재주의 비밀은 누구나 발견하기 쉬운 곳에 숨겨져 있다. 즉 우리는 평생에 걸쳐 언어 기술을 사용하고 다듬는 일에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바이올린으로 곡 하나를 연습할수록, 테니스 백핸드 훈련을 반복할수록, 또는 곧 발표할 프레젠테이션을 검토할수록 실력이 나아지는 것처럼 우리의 언어 기술도 매일 반복해서 연습할수록 개선된다. 우리 대부분은 깨어 있는 동안 엄청난 양의 시간을 언어에 빠져들어 보낸다.           p.63

 

지구상의 생명체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언어를 가지고 있다.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구분짓는 가장 큰 차이점 중의 하나가 바로 언어를 사용해서 의사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언어가 있었기에 인간은 지구를 지배하고, 진화의 진로를 변화시켰다. 그렇다면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인 언어는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을까? 왜 침팬지는 말을 하지 못하는가? 기계는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가? 왜 우리는 모두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가? 궁금해진다.  언어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지만, 여전히 언어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는 문제는 엄청난 난제이다.

 

만약 불가사의한 바이러스로 인간이 더 이상 언어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고 상상해보자.. 현대 문명은 급속히 무정부 상태로 전락하고, 시민들은 정보 공백 상태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서로 협력하지도, 심지어는 논리적 판단도 내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우리가 지금까지 언어에 대해 안다고 생각해 온 거의 모든 지식을 낱낱이 해부해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혁명적 관점을 제시한다. 인지과학자이자 언어과학 분야를 선도하는 모텐 크리스티안센과 닉 채터는 인류의 언어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부터 시작해, 의사소통은 어떻게 이뤄져 왔는지, 믿을 수 없이 방대한 언어의 발전 과정을 차곡차곡 짚어가며 그 동안 잘못 전해져 온 언어의 기원에 대해서 제대로 살펴본다.

 

 

 

<종의 기원>의 마지막 대목에서 찰스 다윈은 자연선택의 놀라운 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사색적인 독백을 남긴다. "시작은 너무도 단순했다. 하지만 바로 그곳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경이로운 형태들이 끝도 없이 진화되어 나왔고, 지금도 진화하는 중이다." 이는 생명 유기체의 진화를 두고 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가장 아름다운 형태들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라는 다윈의 고무적인 구절은 언어의 문화적 진화에도 정확히 그대로 적용된다.          p.332

 

이 책의 두 저자는 언어는 체계적인 문법 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우연의 결과물이며 즉흥적으로 행하는 제스처 게임과도 같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언어를 제스처 게임으로, 즉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협력 게임으로 보기 위해서는 언어에 대한 기존 관념을 비틀고, 관점을 전환해야 한다. 의사소통의 본질과 관련해 한 세기 이상 지속되어 온 오래된 사고방식을 완전히 뿌리 뽑아야 한다. 언어가 '그 순간의 필요가 이룬 서툴고 무질서한 산물'이라는 것이 대단히 흥미로웠다. 이에 대한 근거로 이 책은 다양한 사고실험과 사례들, 그리고 연구 결과를 제시하며 독자들을 설득시킨다. 언어가 유전자나 뇌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며, 생물학적인 진화가 아니라는 것은 고정불변의 법칙으로 자리 잡았던 “언어는 체계적인 문법을 바탕으로 진화되어 왔다”라는 연구 결과들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어서 더 흥미진진했다.

 

아이들은 왜 별 노력 없이도 언어를 쉽게 습득하는 걸까. 미취학 아동은 하구에 열 개 이상씩 새로운 단어의 의미를 습득하며, 이 단어들을 활용해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의미를 잘 이해한다.  아이들은 이 단어들을 사용해 좋거나 싫고, 맞거나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의견을 표현한다. 대체 아이들은 어떻게 이 단어들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걸까.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 또한 아주 재미있는데, 이 책은 이를 제스처 게임으로 풀어 나간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아무도 언어를 설계하지 않았다는 것. 언어의 복잡성과 질서는 무수한 언어적 제스처 게임이 빚어내는 혼돈 가운데서 출현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야말로 넋을 놓게 할 정도로 놀라운 발견이다. <이기적 유전자>를 쓴 리처드 도킨슨이 이 책을 왜 강력 추천했는지 이해가 될 만큼 흥미로운 책이었다. 리처드 도킨스는 언어의 기원이 진화생물학자들에게도 아직 3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고 하며, 크리스티안센과 채터가 이 문제를 놀랍도록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의사소통은 모든 종에 걸쳐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일 수 있지만, 언어는 인간에게만 나타나는 고유한 특징이다. 우리는 구어와 수어를 통해서건, 촉각 언어를 통해서건 간에 언어적 제스처 게임을 벌일 수 있다. 이는 우리에게 내재된, 선천적인 소통의 욕구가 언어의 근본적인 유연성과 결합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 138억 년 전부터 시작된 언어의 기원에 대한 경이로운 여정이 궁금하다면, 언어를 통한 인류의 발자취를 짚어보고 싶다면, 이 책을 통해 언어의 기원을 둘러싼 비밀을 만나 보자. 왜 언어가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인지 완벽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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