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모자, 피노키오를 줍고 시체를 만났습니다 옛날이야기 × 본격 미스터리 트릭
아오야기 아이토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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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에. 자경단장님, 아무튼 전 피노키오의 오른팔과 밤새 같은 침대에 있었어요. 제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가 되겠죠?"
"이런 일은 처음이군!"
조제프 자경단장은 오징어 모자 밑의 머리를 쥐어뜯었습니다.
"머리는 빨간 모자의 범행을 증언하지만 오른팔은 무죄를 증명한다? 범행 목격자와 부재 증명의 증언자가 동일하다니, 이런 건 듣도 보도 못했다고!"              p.35~36

 

빨간 모자는 숲 속 깊은 곳에 사는 사냥꾼 아저씨의 집에 쿠키와 포도주를 갖다 주러 가는 길에, 나무로 만든 인형의 팔을 줍는다. 손가락 부분이 꿈틀꿈틀 움직이는 그것은 인형의 오른팔이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여 펜을 쥐어 줬더니 자신은 제페토 할아버지가 만들어주신 피노키오로 학교에 가는 길에 서커스단에 스카우트가 되었는데, 억지로 하기 싫은 공연을 1년 동안이나 하고 있는 중이라며 자신을 구해달라고 말한다. 그렇게 빨간 모자는 피노키오의 오른팔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엄지 공연단'이 있다는 람베르소 마을에 가게 된다. 그곳에서 피노키오의 공연을 보고 돌아온 다음 날, 빨간 모자는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가 되는데.. 이게 어떻게 된 것일까. 살해된 사람은 서커스 단원인 여우 안토니오였고, 피노키오가 우연한 목격자로 빨간 모자를 범인으로 지목한 거였다. 자, 빨간 모자는 다음날 공연 시작 전까지 안토니오를 죽인 진짜 범인을 데려와야만 자신에 대한 의혹을 풀 수 있다고 한다. 공연장에서 공개 처형될 위기에 처한 빨간 모자는 진범을 밝혀낼 수 있을까.

 

 

빨간 모자를 위협하는 공연단장 엄지 공주, 그리고 빨간 모자에게 도움을 준 거짓말쟁이학 박사 질베르토 폰뮌하우젠 남작, 그리고 빨간 모자의 알리바이를 증명해준 피노키오의 팔, 틈만 나면 다투는 수박 장수 할아버지와 가면 장수 할머니...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해서 재미를 더해준다. 빨간 모자는 이후 피노키오의 부탁으로 피노키오의 몸통과 왼팔, 두 다리를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게 된다. 백설 공주와 난쟁이가 사는 숲 속부터, 온종일 음악을 연주하는 도시 하멜른을 거쳐, 아기 돼지 삼 형제가 늑대를 무찌른 뒤 독재자로 군림하고 있는 도시 부히부르크에 이르는 이 여정은 동화 속 배경에 미스터리의 트릭을 절묘하게 연결시켜 범죄 사건들의 한복판으로 빨간 모자를 데려 간다. 피리 부는 사나이가 쥐를 쫓아내 준 뒤 약속한 보수를 주지 않아 아이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으로 끝이 났던 동화 속 이야기 그 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사이 좋은 아기돼지 삼 형제의 파격적인 변신을 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동화 속 캐릭터들이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점도 이 시리즈만의 독창적인 부분이라 지루할 틈 없이 페이지를 넘기게 될 것이다.

 

 

"백설 공주, 넌 왜 이렇게 빵을 잘 만들어?"
"어릴 때 돌아가신 엄마가 가르쳐줬으니까."
"그럼."
빨간 모자는 검지를 들어 백설 공주의 코끝을 가리켰습니다.
"백설 공주, 네 범죄 계획은 왜 그렇게 허술해?"
백설 공주는 대번에 말문이 막힌 듯했습니다. 그러나 빨간 모자는 백설 공주의 눈빛이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는 걸 놓치지 않았습니다.             p.135~136

 

아오야기 아이토의 '옛날이야기 × 본격 미스터리'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이자 '빨간 모자'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다. 이 시리즈의 1권과 3권은 일본 전래 동화를 기반으로 했고, 2권과 4권은 서양 동화를 기반으로 했는데, 옛날 옛적.. 시리즈와 빨간 모자... 시리즈를 각각 별도로 읽어도 상관없다. 전작이었던 <빨간 모자, 여행을 떠나 시체를 만났습니다>에서 신데렐라, 헨젤과 그레텔, 잠자는 숲속의 공주, 성냥 팔이 소녀의 동화 속 세계를 변주했었다면, 이번 작품 <빨간 모자, 피노키오를 줍고 시체를 만났습니다>에서는 피노키오, 백설공주,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엄지 공주, 아기 돼지 삼 형제, 브레멘 음악대 등의 작품을 본격 미스터리의 세계로 가져왔다.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가 범죄의 증거가 되고,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집이 밀실 살인의 배경이 되는 등 기발한 발상과 동화의 색다른 해석으로 재미를 주었던 전작처럼 이번 작품 역시 본격 미스터리 트릭의 다양한 묘미를 보여준다. 이번 작품에서 빨간 모자는 몸이 조각난 목각 인형 피노키오의 잃어버린 다른 몸 조각들을 찾아 나서게 되는데, 이번에도 갖가지 기이한 사건들을 마주하며 조수 피노키오와 함께 명탐정으로 사건들을 해결한다. 빨간 모자 시리즈의 첫 작품 <빨간 모자, 여행을 떠나 시체를 만났습니다>는 최근에 넷플릭스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니, 영상 버전으로도 만나보면 좋을 것 같다. 아오야기 아이토는 옛날 옛적.. 시리즈와 빨간 모자... 시리즈를 교차로 내고 있는데, 올해 일본에서 시리즈 5권이자 옛날 옛적.. 시리즈 3권과 빨간 모자... 시리즈 3권이 각기 나온다고 하니 국내에서도 빨리 만날 수 있기를 바래본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익숙한 동화 속 세계에서 시체가 발견되고 살인과 실종, 독살 사건이 벌어지는 색다른 미스터리가 궁금하다면 이 시리즈를 읽어 보자. 동화 속 주인공 '빨간 모자'와 함께 다양한 동화 속 세상을 여행하며 신선하고, 기발한 미스터리의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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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작가 생활
존 스칼지 지음, 정세윤 옮김 / 구픽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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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제발. 정신줄 좀 잡으시라. 이 한 문장에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얘기가 얼마나 많은지 셀 수도 없네. 하나만 들겠다. 환상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고, 따라서 작가가 환상을 가져봐야 하나 쓸모가 없다. 자신의 재능, 출판계의 상황,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인생에 대해 환상을 가진 작가는 분명 계속해서 실망하게 된다. 현실은 당신의 환상에 전혀 개의치 않기 때문이다. 반면, 당신이 잘하는 게 뭔지, 출판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고, 당신의 일반적인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다면, 작가로서의 당신의 꿈(책이 정식으로 출판되는 것 포함)을 실현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위치에 있는 것이다.           p.152

 

이 책의 원제는 ' You're Not Fooling Anyone When You Take Your Laptop to a Coffee Shop(노트북을 들고 커피숍에 가봤자 아무도 속일 수 없어)'이다. 제목만큼이나 시니컬하고, 유머러스하고, 뼈를 때리는 직언으로 가득하지만, 그만큼 또 너무도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 <노인의 전쟁> 시리즈를 비롯, <상호의존성단> 시리즈 등 20여 년간 수많은 SF 소설을 발표해온 존 스칼지가 2001년부터 2006년 초까지 5년간 자신의 개인 블로그 Whatever에 썼던 에세이를 엮었다. 글쓰기에 대한 실제적인 조언과 금전적인 부분을 비롯한 작가 생활에 대해서, 그리고 작가들이 저지르는 어리석은 짓들과 SF에 관련된 이야기를 수록했다.

 

글쓰기를 다루는 책이지만, 글쓰기 방법에 관한 책은 아니라는 점이 매우 흥미로웠다. 이 책은 그보다는 작가들이 다른 작가들과 소통하는 방법, 각기 종류가 다른 글에 대한 다양한 생각, 작가와 출판사, 작가와 독자의 소통 방법, 그리고 작가들의 돈벌이에 대해 극사실적인 이야기들을 들려 준다. 무엇보다 스칼지 특유의 블랙 유머와 촌철살인 멘트들이 재미를 주는데, 작가가 되고 싶어요. 뭘 하면 되죠? 라는 질문에 "이런, 글을 써야죠. 멍청한 양반아" 라고 대답한다던가, 글을 한두 편 팔았으니 이제 본업을 그만둬도 되냐는 질문에 "맙소사, 안 된다. 멍청한 짓 하면 안 된다."라고 말하며, "여러분보다 재능은 부족한데 돈은 더 많이 버는 사람은 언제든지 있다. 왜냐고? 인생은(그리고 출판계는) 변덕스럽고 잔인하다"고 하는 식이라 정말 유쾌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내가 만난 고용 작가 중에는 글쓰기가 거룩한 사명이며 영혼의 표현이라는 등등의 헛소리를 끝없이 토해내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도 이런 이야기는 전기요금을 내는 문제에서는 뒷전으로 밀리기 때문이고, 어떤 작가가 '말로만 말고 실제로 보여 줘야' 하는 일을 지금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면 그 일에 대해 따로 지껄일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글쓰기도 그렇다. 또는 그래야만 한다. 사실 나는 누가 나에게 글쓰기의 거룩한 사명에 대해 지껄인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들이 물속에서 흡혈 거머리에 뒤덮인 채 점차 산소 부족으로 새파래져 가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재미있어 할 것 같다. 그렇다. 꽤 그럴싸한 이미지다.                p.284

 

존 스칼지가 들려주는 조언들은 그 어떤 글쓰기 강의에서도 얻을 수 없는 팁들이다. 글쓰기 경력을 쌓을 수 있는 방법이라든가, 작가란 글쓰기가 낭만적이고 매력적이고 흥미진진하지 않아도 어쨌든 써야 하는 직업이라는 경고, 그리고 작가가 되려는 사람은 자신들이 종사하려는 직업에 대해 어떠한 환상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 등 프로 작가 경력이 어느 정도 되어야만 알 수 있는 현실적인 부분들에 대해서 가감없이 알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작가의 급여가 낮아지게 만드는 비밀, 작가의 고료가 매우 짠데도 불구하고 수익을 낼 수 있는 방법, 출판계에서 연줄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쓰는 글의 차이점, 원고를 거절하는 방법 등등 작가와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궁금했던 내용이 가득 들어있다.

 

그리고 '작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는 일반인을 위한 글쓰기 팁'도 있다. 작가가 되고 싶지는 않지만, 글을 더 잘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한 장이다. 자신이 쓴 것을 소리 내어 읽어보고, 구두점을 언제 찍어야 하는지 공부하고, 문장은 긴 것보다 짧은 게 낫고, '빌어먹을' 철자법을 제대로 배워야 하고, 제대로 모르는 단어는 쓰면 안 되며, 요점을 앞에 배치해야 한다는 등 존 스칼지가 알려주는 10가지 팁들은 작가 지망생 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도 굉장한 도움이 될 것이다. 현실의 출판 계약, 작가의 수입, 책에 대한 비평, 불법 복제와 저작권, 작가 워크숍 등 20여 년 전에 쓰인 책이지만, 기술적인 일부분을 제외하고 출판계의 현실이 당시와 다르지 않다는 점도 이 책을 더욱 흥미롭게 만들어 준다. 작가를 직업으로 하고 싶다면, 출판계 현실이 궁금하다면, 작가 생활의 실제적인 부분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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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천개산 패밀리 1~2 세트 - 전2권 특서 어린이문학
박현숙 지음, 길개 그림 / 특서주니어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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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람이 다 나쁜 건 아니야. 좋은 사람도......"
"시끄러워! 너는 똥 더미 위에서 굶고 살았으면서도 그런 말을 하고 싶니? 네 주인이 누군지 나는 몰라. 하지만 너를 짧은 줄로 묶어 놓고 밥도 안 주었던 걸 보면 절대 좋은 사람이 아니야. 나는 살면서 좋은 사람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썩은 음식 쓰레기를 주던 농장 주인, 트럭을 몰고 왔던 그 남자, 다 똑같았어."
나는 목에서 넘어오는 울음을 꿀꺽 삼켰다.         - 1권, p.57

 

최근에 충격적인 뉴스 보도를 본 적이 있다. 경기도 화성에서 최대 규모의 불법 강아지 번식장이 적발됐는데, 그곳에서 심각한 동물학대행위가 일어나고 있었던 거다. 무려 1400여 마리가 있는 불법 개번식장의 사진을 보고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믿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다행히 보도된 곳의 개들은 모두 구조가 되었지만, 사실 알려지지 않은 곳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만약 동물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그렇게 방치하고 사육한 인간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지 끔찍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개들의 입장이 되어, 그들의 편에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천개산 패밀리>는 초등학생들에게 사랑받는 <수상한 시리즈>의 박현숙 작가가 새롭게 시작하는 시리즈이다. 기존 수상한 시리즈가 아파트를 시작으로, 우리 반, 학원, 친구 집, 식당, 편의점, 도서관, 화장실, 운동장, 기차역, 방송실, 놀이터, 지하실, 교장실 등 일상 속 아이들에게 친근한 장소들을 배경으로 그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 주었다면, 이번에는 천개산에 모여 사는 유기견들의 이야기이다. 천개산 산66번지에는 모두 다섯 마리의 개가 살고 있다. 철창 안에서 냄새나는 음식 쓰레기를 먹으며 살다 그 끔찍한 개 농장에서 탈출한 얼룩이, 어깨가 쫙 벌어지고 덩치도 큰 대장, 길고 긴 하얀 털을 가진 덩치가 작은 바다, 주인이 이사 가 버린 빈 동네에 버려진 진돗개 번개, 길에서 똥 더미 위에 묶여 있다가 탈출한 미소까지 모두 주인에게 버려졌거나 방치되어 있다 탈출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개들이다. 그들은 천개산에서 서로 어울려 살면서 때로는 다투기도 하지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서로를 위하며 가족처럼 살아가고 있다.

 

 

"그럼 그 사람도 마을 사람들과 같이 우리를 의심하고 있는 거야? 너무해. 우리가 의심을 받고 누명을 쓰고 있으면 절대 천개산 들개들 짓이 아니라고 우리 편을 들어 주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그 사람에게 체온을 나눠 주다가 얼마나 아팠는데. 어쩜 그럴 수가 있어? 먹이를 물고 계곡으로 내려가다가 미끄러져서 다치기도 했단 말이다. 그리고 대장과 번개가 싸운 것도, 번개가 여기를 떠난 것도 그 사람 때문이라고. 은혜도 모르는 사람 같으니라고. 너무 화나.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 미소야, 우리가 바보 같은 짓을 한 거 같아."            - 2권, p.35

 

그러던 어느 날 천개산 산 66번지 근처에서 부상을 당한 인간이 발견된다. 모두들 사람에게 상처받고, 배신당한 경험이 있어 인간이라는 존재자체를 믿지 못하는 게 당연하니 그냥 모른 척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거긴 깊고 험한 산속이었고, 그들이 모른 척 하면 산속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개들은 인간을 도와주고 싶어 한다. 물론 그 중에는 사람이 싫다고 도와주기 싫다는 개도 있었고, 도와주고 싶어도 어떤 식으로 도와주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개도 있었다. 버림받은 주제에 사람 편을 들다니 한심하다고, 왜 그 사람한테 신경을 쓰냐고 화를 내는 개도 물론 있었다. 그렇게 조난 당한 인간을 두고 서로 의견이 엇갈리기 시작하면서, 그들이 모아둔 식량이 사라지고, 개들은 서로를 의심하게 된다.

 

추위와 굶주림으로부터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의견도, 사람에게 배신 당한 경험이 있으면서도 왜 사람을 도와주어야 하느냐는 의견도 모두 말이 되기에 누가 옳고 그르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식량을 훔쳐간 것은 누구일까. 그리고 개들은 자신들의 아지트를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을까.

 

 

2권에서는 조난 당한 사람이 헬기로 구조되어 가고, 그 사람이 살고 있는 동네인 산아래 예쁜 집들이 모인 전원주택 마을에서 닭과 오리가 사라지는 사건이 벌어진다. 사람들은 떠돌이 들개의 소행이라고 의심할테고, 구조 당한 사람은 천개산에 들개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괜히 사람을 도와주는 바람에 이들은 자신들의 아지트를 옮겨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사라진 번개를 찾아 다니다가 마을에서 사라지는 닭과 오리 사건의 범인이 혹시 번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 마을에서 침을 질질 흘리는 누런 개의 거짓말에 속아 큰 위험에 처하게 되는데.. 천개산 패밀리는 위험에서 빠져 나와 번개를 찾을 수 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개들이 자신들을 버리고 위험에 빠뜨렸던 인간들을 끝까지 미워하지도 원망하지도 못하는 마음 약한 존재라는 점이 마음이 아팠다. 아마도 실제 현실에서도 그러할 것이다. 개들은 자신을 버리고 간 주인을 같은 자리에서 긴 시간 기다리기도 하고, 자신이 버려졌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주인을 찾아 헤매다 사고를 당하기도 하니 말이다. 해마다 명절 연휴나 휴가철에는 반려동물 유기가 크게 늘어난다고 한다. 특히 고속도로 휴게소에 버려지는 동물이 최근 2년여간 4백 마리가 넘는다고 하니,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개들의 사연을 그저 허구의 이야기라고만 볼 수 없을 것 같다. 버리지 않고, 버려지지 않고, 사람과 동물이 함께 행복한 세상이 오기를, 이 작품을 읽으면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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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반 문병욱
이상교 지음, 한연진 그림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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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년이 된 예지는 교실로 찾아가는 길이 아직 낯설다. 시끌시끌 북적대는 교실에서 병욱이는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다. 아이들은 병욱이가 말도 잘 안 하고 날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닌다며, 바보라고, 좀 이상한 애라고 수근댄다. 하지만 예지는 생각한다. 그렇다고 바보인 건 아닌데. 병욱이는 문구점에서 주인 아저씨에게 물건을 훔쳤다는 오해를 받아도, 친구들이 뒤에서 이상한 소문을 내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예지는 개학식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만났던 병욱이와 병욱이네 할머니를 떠올린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쪼글쪼글 웃어 주었던 할머니의 미소도 기억한다.

 

 

어느 날 미술 시간에 친구 얼굴 그리기를 한다. 예지는 은솔이 얼굴을 그리다 망쳐서 친구와 함께 막 웃는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그린 그림 중 다섯 장을 골라 교실 뒤에 붙여 놓았다. 그런데 병욱이가 그린 그림 속 아이가 꼭 예지같다며 옆에서 선민이가 큭큭 웃는다. 결코 잘 그렸다고는 할 수 없는 그림이었지만, 진한 눈썹도, 웃을 때 올라가는 입꼬리도, 양갈래로 묶은 머리도 꼭 자신 같아서 예지는 그림을 볼 때마다 웃음이 난다.

 

예지는 아이들이 바라보는 방식이 아닌, 자신이 보고 느끼는 대로 병욱이를 지켜본다. 그리고 예지의 그 작은 마음이 병욱이를 향한 친구들의 마음도 조금씩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 새학기가 시작이 될 때마다, 새로운 학년이 될 때마다 설레는 마음과 함께 긴장되는 기분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친한 친구와 같은 반이 되면 든든한 지원군이라도 생긴 것처럼 안심이 되었지만, 어쩐지 별로 친하지 않은 친구들과 같은 반이 되고 나면 교실 전체가 낯설게 느껴지고 서먹한 시간이 한동안 지속되었으니 말이다. 그 시절부터 책을 많이 읽던 나였기에, 그렇게 불편한 시기엔 보통 책을 펴들고 앉아 있었다.

 

나중에 단짝이 된 친구가 말해주었는데, 쉬는 시간마다 혼자 책을 읽고 있어서 말을 걸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친구가 먼저 손을 내밀어 주어서, 먼저 말을 건네주어서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용기 내어 내민 딱 한 걸음 덕분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그 시절 나와 내 친구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마도 비슷한 학창 시절의 경험을 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 작품은 한국 동시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그림책 작가인 이상교의 글과 <눈물문어>, <옥두두두두> 등의 그림책을 쓰고 그린 한연진 화가의 그림으로 완성되었다. 이어지지 않은 테두리, 형태를 벗어나 서로를 침범하고 물드는 색과 패턴으로 새롭게 시도한 그림 스타일이 예쁘기도 하지만, 작품의 주제를 더욱 잘 표현해주는 것 같아 좋았던 작품이다.

 

뭐든 시작이 어렵다고 딱 한 걸음 내딛는 것이 쉽지 않다. 이는 아이들의 관계에서도 그러할 것이다. 누군가 한 명이 쟤는 저래서 이상해, 라고 말하기 시작하면 어쩐지 그때부터 보이지 않는 울타리가 그 아이 주변에 생기기라도 한 것처럼 벽이 생겨 버린다. 그럴 때 누군가 용기를 내어 손을 내밀기라도 하면, 쉽게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건데 말이다. 이 작품 속 예지처럼 먼저 다가갈 수 있는 용기가 우리의 내일을 더욱 단단하고 빛나게 만든다는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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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 - 평생을 수치심과 싸워온 우리의 이야기
로라 베이츠 지음, 황가한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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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목록을 만들어라. 그것은 당신의 이야기다. 그것으로 뭘 할 건지는 당신에게 달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좋은 의도 또는 성차별적이고 구시대적인 핑계로 그것을 당신에게서 빼앗아 가거나 부정하거나 무시하거나 묵살하거나 없애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당신의 것, 당신만의 것이다. 그것은 진짜다. 그리고 그것은 중요하다. 우리가 이 목록들을 우리의 역사, 우리의 유산, 우리의 일부로 간주하기 시작하면 그것의 어마어마하고 방대한 영향력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p.29

 

한 여자는 상사의 성희롱에 겁먹어서 이직할 자리를 구하지도 않고 직장을 그만뒀다. 어느 성 노동자는 강간을 신고하려다가 경찰관에게 비웃음을 샀다. 한 여학생은 학교에 가던 도중에 성인 남자들이 자신을 향해 외설적인 표현의 말을 하는 것을 들었으며, 한 자매는 공원에서 소풍을 즐기다가 낯선 남자의 신체 부위를 강제로 봐야 했다. 전 세계 곳곳에서 여성들이 겪고 있는 경험담 중 극히 일부인 이러한 사례들은 결코 머나먼 다른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 공공기관 간부가 여성 직원들에게 화장 좀 하고 다니라는 성차별 발언을 해 파면 당했고, 학교에서, 회사에서, 지하철에서 거의 매일 같이 벌어지고 있는 일상의 풍경이다.

 

이 책의 저자인 로라 베이츠는 2012년 여성들이 자신이 겪은 성차별 경험을 공유할 수 있도록 ‘일상 속 성차별 프로젝트’라는 사이트(everydaysexism.com)를 만들었다. 2015년 전 세계 각지에서 도착한 사연은 10만 건에 이르렀고,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이 프로젝트는 20만 명이 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아 왔다. 이 책에 수록된 온갖 불평등 이야기들, 성차별적인 농담, 부적절한 신체 접촉, 길거리에서 일어나는 성희롱, 직장 내 차별, 성추행 등의 사건은 여성들 각자의 ‘목록’이다.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이것은 평범한 일상이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한테도 말해본 적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로라 베이츠는 생각한다. 여성의 삶이 오직 성별 때문에 공포, 학대, 괴롭힘, 차별로 얼룩지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이건 정상이 아니야, 라고 우리는 반복해서 서로에게 말해야 한다. 서로에게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고, 슬퍼하고 애도하고 화내고, 이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상기시켜야 한다. 우리 미래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우리가 겪은 괴롭힘과 억압이 아니라 그런 일이 없었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모든 여자가 무력하고 상처 입고 웅크린 피해자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 중 다수, 아니, 대다수가 역경을 견디고 살아남은 생존자라는 뜻이다.            p.240~241

 

이 책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일상화된 불평등의 원인을 사회의 제도적, 구조적 시스템에서 찾는다. 그 누구보다 평등을 지향해야 할 교육, 경찰, 사법, 정치, 언론이 어떤 식으로 여자들에게 수치심을 주고 그들의 입을 막고 좌절하게 하는지 들여다본다. 여성들이 제일 먼저 취해야 할 가장 작고 간단하고 시급한 저항의 행동이 바로 목록을 만드는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 더 많은 여성들이 용기를 낼 수 있기를 바라고 싶어졌다. 사람들의 무관심이나 우리가 사랑하고 믿는 사람들의 일축으로 인해 잊고 잃어버리고 도둑맞은 순간들을 깨닫고 분노해 그 순간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기나긴 이야기 목록을 거의 모든 여자가 가지고 있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내가 뭔가 잘못했을 수도 있다고, 자초한 것일 수도 있다고, 운이 나빴다고,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시스템을 바꿀 이유와 힘은 이미 우리에게 있다.

 

길을 걷다가 남자들이 모여 있으면 반대편으로 건너가기, 조명이 어둡거나 나무가 우거진 곳을 피하기 위해 멀리 돌아가기, 혼자 살지 않는 척하려고 자동응답기에 남자 목소리 녹음해놓기, 가짜 결혼반지 끼기, 친구나 연인에게 내 위치를 전송하는 앱 사용하기, 화장실에 여럿이 같이 가기, 호루라기나 경보기 가지고 다니기, 성희롱을 피하기 위해 옷차림 바꾸기 등등... 이는 여자들이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습관들의 목록이다. 이는 거의 매 순간 내 안위를 걱정해야 함을 경험으로 배우는 세상,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을 고칠 책임이 나에게 있다고 믿게끔 사회화하는 세상 속에서 자란 결과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새삼 개탄하게 된다. 차별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그들의 세계를 깨부수는 계기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여성들이여, 지금 당신의 목록을 만들기를. 그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당신만의 이야기를 담은 목록을.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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