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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김사과 지음 / 창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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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여기서 오해하지 마시길. 그의 영화를 싫어한다는 게 아니라, 단순히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정이 안 간다는 얘기니깐. 그냥 나의 개인적인 취향이다. 솔직하다 못해 찌질하게 보일 정도로 자신의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감정 표현도 싫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는커녕 오로지 자신 밖에 모르는 개인적인 성격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니까 같이 있으면 옆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 다음 행동이 어디로 튈지 너무 뻔히 보여서 오히려 당황스러운 사람이 싫다. 실제 현실에서 그런 인물들이 많다고 하더라도, 왜 우리가 '이야기' 속에서 조차 이런 인물들과 만나야 한단 말인가 싶은 것이다. 그래서 누가 봐도 속물인데 누구보다 고고한 척하는, 허세 돋는 행동만 하고 있으면서 정작 본인은 평범하게 살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작품이 나에겐 좀 버거웠다. 어쩔 수 없이 김사과의 작품을 읽는 내내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인물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연스레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이 되지 않아 책의 진도가 정말 나가지 않았다. 두껍지도 않은 이 책을 끝까지 다 읽는데 며칠이 걸린 건지 모르겠다. 범상치 않은, 문제적 작가라는 평가를 듣는 김사과의 작품은 이번에 처음 만나는 건데, 첫 만남부터 이렇게 삐걱거리느라 작품을 온전히 이해한 건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이야기는 맨해튼의 로어이스트사이드에 있는 오 층짜리 아파트의 옥상에서 시작한다. 건물 전체가 아버지의 소유인 매력적인 뉴요커 써머와 그녀의 남자친구 댄,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 케이는 공연과 파티와 마약으로 이어지는 세련되고 근사한, 힙해 보이지만 속은 텅 비어있는 몇 달을 보낸다. 하지만 그렇게 반짝이는 한철은 케이가 서울로 돌아오면서 끝나버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 그녀에게 일상의 모든 것은 시시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왜 서울의 베이글은 이렇게 맛이 없어? 왜 서울의 커피는 이렇게 싱거워? 왜 서울에는 센트럴 파크 같은 게 없어? ? 왜 서울은 이렇게 후진 거야? 이렇게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일이 잦아진다. 왜냐하면 뉴욕의 케이, 서울에서도 케이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즉, 케이의 친구 누구도 그녀를 본명으로 부르지 않더란 말이다. 멀쩡한 이름 놔두고, 서울에 돌아와서도 다들 그녀를 '케이'라고 지칭한다. 그리고 그게 자연스럽다는 거. 뉴욕에서 몇 달을 보내고 왔다고 해서 서울의 그녀가 뉴욕의 누군가가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솔직히 요즘 케이는 모든 것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뉴욕에 갔다 온 뒤로 시작된 증세였다. 돌아온 뒤 서울의 모든 것이 하나같이 어딘가 모르게 덜 떨어지게 느껴졌다. 특히나 사람들이 그랬다. 세련되게 젊음을 탕진하는 귀여운 백인 여자애나 3개 국어를 할 줄 아는 어딘가 천재 같은 유대인은 서울에서는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서울에서 만난 사람들도 좋은 점은 있었다. 하지만 나쁜 점도 그만큼 있었다. 한마디로 어정쩡했다. 돌아온 뒤, 모든 게 대체로 그런 식이었다. 하나같이 어정쩡했고, 그 점이 정말이지 짜증났다.

 

케이는 서울 시내에 있는 한 사립여대의 국제학부에 재학 중인, 평범한 여대생이다. 우리가 소위 중산층이라 일컫는 무리의 대표 캐릭터라 하겠다. 같은 학부의 학생들 대부분은 돈이 많고, 영어를 잘하며, 명품 백을 들고 다니며 오로지 관심이라곤 외모를 가꾸는 것과 연애를 하는 것밖에 없다. 케이는 그런 여자애들을 경멸하지만,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녀도 같은 부류이긴 하다. 어정쩡하고 평범하고, 허세 가득한 남자애한테 반해서 그와 연애를 하는 평범해 보이지만 사실은 속물 근성이 가득한 그런 여대생 말이다. 그녀는 시종일관 서울에 대한 불평을 하며 뉴욕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하지만 겨우 사실 한두 달 뉴욕에 다녀왔다고 해서 뉴요커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케이네 집안이 아슬아슬하게 서울 중산층의 생활양식을 유지하고 있고, 아버지의 퇴직이 가까워오고 있었고, 저축보다 빚이 더 많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한다거나 학비가 부족해 아르바이트를 한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다. 뭐 이건 결국은 그녀 또한 다른 여대생들과 별다를 게 없는 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주인공과 등장인물은 비 호감이고, 그다지 공감을 불러일으킬만한 부분도 없었지만, 인물들의 이야기 사이사이 작가가 짚어내고 있는 현대 사회에 대한 덤덤한 말투의 비판과 세태에 대한 건조한 문체는 매우 흥미로웠다. 인물들을 둘러싼 현실에 직설적인 어조로, 마치 기득권층에서 쏘아붙이는 기세로 말하는 대목들은 충분히 이해와 공감을 가져왔으니까. 출판사의 소개 글을 보니 <눈길을 끄는 것은 이야기 틈틈이 끼어드는 작가적 논평이다..거의 모든 인물들에 대해서, 그리고 주인공 케이와 그를 둘러싼 현실 자체에 대해서도 작가는 직접적인 논평을 덧붙이기를 잊지 않는다>라고 언급이 되어 있던데, 그렇다면 대체 이걸 왜  '소설'이라는 형태로 쓴 건지에 대해서는 약간 의문이 들긴 하다. 왜냐면 이 작품에서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의 이야기'는 그다지 매력이 없고, 마치 물 위에 동동 떠 있는 기름처럼 부유하는 느낌인데 반해, 작가가 설명하고 있는 '직접적인 논평'이라는 부분은 흥미롭고, 때로는 유쾌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 이래서 김사과라는 작가가 독특하고 개성적인 문체를 가지고 있다고들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래, 거기는 천국이었어. 그런데 여자는 울어. 대체 뭐가 잘못된 거야? 여기는 천국이야. 근데 왜 나는 울고 있냐고? ....분명히 뭔가 잘못된 거야. 뭔가 심각하게 잘못된 거라고. 그런데 여기가 천국이래. 근데 천국이 잘못되었을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잘못된 게 있다면 그건 바로 너야. 행복해하지 않는 너라고. 슬퍼하고, 화가 나는, 이 천국을 부수고 싶어하는 너야. 이 천국을 의심하는 너야. 왜냐하면 여기가 천국이라니까! 너는 천국에 있는 거라고. 네가 이상한 거라고.

 

삶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해 무력감에 시달리며 방황을 하던, 케이도 결국엔 답을 찾는다. 더 이상 뉴욕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화려한 뉴요커의 삶을 만끽하던 친구들에 대해서도 거의 잊어버리고. 왜냐하면 결국 기억이란 빠르게 희미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유한한 존재인 우리가 기억의 강을 건너 영원히 간직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우리는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재의 서울, 여기에서 살아내야 하니까. 그렇게 숨쉬며 살아 있으니까 말이다.

 

수족관 속에 있는 물고기가 수족관을 부수면 어떻게 돼?

죽겠지. 뻔하지. 하지만 수족관 속에 있는 건 살아 있는 거야? 그래, 나는 이게 묻고 싶은 거야. 그러니까 내 말은,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누구에게나 평화롭다. 실제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건 간에. 멀리서 보기엔 뭐든 쉬워 보이니까. 안전한 내부에서,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겁이 나지만, 나가본 적이 없어서 무섭지만, 그렇지만 이 안에서 더 이상 즐겁지가 않다면, 행복하지가 않다면, 그렇다면 틀을 깨뜨려버리고 한 번쯤 나가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바로 당신의 천..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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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망아지.불만의 겨울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존 스타인벡 지음, 이진.이성은 옮김, 김욱동 해설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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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만난 비채의 모던&클래식 세 번째 작품은 <분노의 포도>, <에덴의 동쪽>으로 잘 알려진 존 스타인 벡의 마지막 작품인 <불만의 겨울> 그리고 그의 초기작인 <붉은 망아지>가 함께 수록된 책이다. 특히나 <불만의 겨울>20여 년 만에 현대적인 한국어로 새롭게 완역된 거라 존 스타인 벡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선물이 될 것 같다. <분노의 포도>가 대놓고 미국 자본주의를 비판했다면 <불만의 겨울>에선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 조금 더 은연중에 비판적인 내용을 풍긴다. 아무래도 경제대공황기를 배경으로 했던 <분노의 포도>에 비해 이 작품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던 6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이 흥미로운 것은 사회적인 비판 외에도 인간이 내면에 대한 심리 묘사가 뛰어나다는 데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게 마련인 '불만'이라는 감정에 대한 보편적인 갈등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어, 고전을 어려워하거나 재미없어하는 그 누구라도 쉽게 공감할 만하다는 말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추천했다는 걸로 잠깐 화제가 되었던 스타인 벡의 <붉은 망아지>부터 살펴보자면, 열살 소년이 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붉은 망아지의 죽음을 통해서 나름의 인생을 배워가는 일종의 성장 소설이다. 4부작으로 구성된 중편이지만, 분량이 짧아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단편 같은 느낌이다. 특히나 이 작품은 스타인 벡 특유의 유머 감각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어 더 유쾌하고 재미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망아지를 사주는 것도, 총에 실탄을 넣고 쏠 수 있게 되는 것도 모두 나이와 조건을 두어 제한을 두는 아버지에 대한 어린 조디의 마음이 이렇게 표현되고. <이 년은 기다리기에 너무 긴 시간이었다. 아버지가 주는 모든 선물에는 그 선물의 가치를 떨어 트리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달렸다. 아주 훌륭한 통제 방식이었다> 그리고 첫 번째 망아지가 죽고 나서 두 번째 망아지에게도 같은 일이 벌어질까 걱정하는 조디에게 위로라고 던지는 빌리의 마음은 이렇게 표현된다. <조디가 호흡곤란으로 죽어버린 빨간 망아지 가빌란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빌리도 알고 있었다. 빨간 망아지가 죽기 전에 빌리는 한 번도 실수를 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 사실이 빌리에게서 예전의 자신감을 빼앗아갔다> 라고. 그래서 그는 괜히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하면서 망아지를 돌보겠지만, 자신이라고 뭐든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니,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거라고 말이다. <그는 잃어버린 자신의 특권을 생각하며 기분이 언짢아졌다. 빌리는 궁색하게 덧붙였다> 라는 대목을 잃으면서 심각한 표정의 조디와 그를 걱정하지만 겉으로는 퉁명스런 빌리의 얼굴이 그려지는 것 같아 큭큭 웃고 말았다. 혹시라도 고전이 따분하고 지루할 거라 편견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완... 오해다. 이런 대목들을 보고 있자면 두꺼운 분량의 페이지도 재미있어 하며 쓱쓱 그냥 넘어가고 말 테니 말이다.

 

저녁식사는 통닭구이가 훌륭하다며 외치는 감탄사와 그저 먹을 만할 뿐이라고 부인하는 감탄사의 연속이었다. 엘런이 모든 것을 다 기록할 듯한 눈초리로 우리의 손님을 살펴보았다. 머리와 화장의 세부적인 것에서 하나하나까지. 그 모습에 나는 여자들이 정말 어렸을 때부터 세밀한 관찰을 통해 자신들이 직감이라고 부르는 것의 기초를 쌓는다는 것을 알았다. 엘런은 내 눈을 피했다. 자신이 결정타를 날린 것을 알고 있었고 나의 복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좋다, 나의 잔인한 딸아.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복수를 해주마. 나는 잊어버리겠다.

 

스타인 벡의 마지막 작품인 <불만의 겨울>은 조금 더 재미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3에 나오는 첫 번째 대사에서 비롯된 불만의 겨울이라는 매력적인 제목만큼이나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은 중편이다. 한때는 내노라 하는 가문이었지만 아버지 대부터 탕진하기 시작한 재산은 주인공 이선 대에 내려와서는 집안 형편이 말도 안 되게 나빠진다. 덕분에 이선은 좋은 대학을 졸업해놓고도 식료품 가게에서 점원 노릇을 하는 위치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아내인 메리는 그의 무능과 가난을 탓하고, 아들 또한 아버지가 잘 나가는 직업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안팎의 압력으로 그는 가장으로서 체면도 살리고,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기로 결심을 하고 물질적인 성공을 거두겠다고 다짐한다. 여기서부터 도덕적인 딜레마가 발생한다. 이선은 물질적인 성공이라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어떤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도 상관없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것이다. 어차피 결과만 좋으면 그만 아닌가. 다른 부자들도 깨끗한 방법을 통해서만 부를 이룩한 건 아니지 않나.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결과만 좋다면 과정은 아무래도 상관없나?

 

몰락한 가문의 후손인 이 남자의 도덕적인 갈등을 따라가는 내면 묘사는, 지금 현대에 가져와도 고스란히 감정 이입이 될 만큼 공감대를 형성한다. 기존 집안의 내력을 아는 이들은 옛 영광을 되찾으라고 부추기고, 가족들은 돈이 없는 가장의 무능력을 비난하고, 그런 상황에서 자신만 도덕적이고, 정정당당하다고 해서 누가 알아주겠는가 말이다. 스스로를 합리화시킨 그는 자신이 일하던 가게의 주인을 불법 이민자라고 고발해서 가게를 인수하고, 술주정뱅이인 친한 친구를 속여서 땅을 빼앗는다. 원하는 것만 얻으면 그만이다. 남이야 어찌 되든 말든, 이렇게 물질 만능 주의에 대한 맹신은 자본주의의 기본 가치와도 부합하기에, 사실 그를 비난하기란 쉽지 않다. 도덕적 양심만 지킨다고 가문이 부활할 수 있는 것도,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세워주는 것도, 그에게 일자리와 양식을 주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분명 예년과는 다른 해가 있는 법이다. 하루가 다른 날과 다를 수 있듯이 기후와 동향 그리고 분위기가 다른 해 말이다. 올해 1960년은 변화의 해였다. 비밀스러운 두려움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잠재되어 있던 불만이 서서히 두려움으로 변하는 해. 내게만 아니 뉴베이타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대통령 지명을 곧 앞둔 데다가 불만이 분노로 변하는 분위기였는데 분노는 흥분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게다가 우리나라에만 국한되지도 않았다. 불만이 분노로 변하면서 어떤 행동이든 폭력적일 수만 있다면 그 행동을 통해 분노를 표출하고자 전세계가 동요와 불안으로 들썩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선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것은 누군가로부터 비난을 받거나 나쁜 행동에 대해 처벌을 받아서가 아니다. 자신이 하는 행동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는 자신의 십대 아들을 보면서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듯이 그제야 알게 되는 것이다. 아들 앨런은 유명 연설을 짜집기해서 글짓기 콘테스트에 입상하지만, 표절 행위가 밝혀졌을 때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아쉽게 사실이 발각된 것을 억울해할 뿐이다. 나쁜 행동을 해놓고도 자각은 커녕 타인을 속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아버지로서 절망감에 빠진 것이다. 자신이 한 행동이 있는데, 어찌 아들을 비난할 수 있겠냐 말이다. 도덕적 기준을 벗어난 수단과 방법이 성공이라는 목적을 정당화해줄 수는 없다. 그 어떤 경우에라도. 물론 현대 사회에서는 떳떳하지 못한, 이름 뿐인 영광을 성공이라 부르는 사회 고위층이 허다하긴 하지만 말이다. 인간성에 대한 부패, 도덕적인 타락, 성공에 대한 위선, 나만 잘 되면 된다는 부도덕은 비단 작품이 쓰여진 미국 사회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라는 사회적 특성상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맹신이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겨울이 지나면 필연적으로 봄이 오듯이, 춥고 어두운 계절이 있으면 따뜻하고 밝은 희망의 계절도 언젠가는 온다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스타인 벡의 이런 주제 의식도 참 좋지만, 독특한 묘사와 은근한 유머 감각을 좋아한다. <불만의 겨울>에서는 이런 대목들이 기억에 남는다. <월요일이 되자 배반의 봄이 겨울을 향해 홱 되돌아서더니 철석같이 믿고 있던 나무들의 연한 잎사귀를 차갑게 내리는 비와 으스스한 돌풍으로 갈가리 찢어버렸다> 라던가 <이 친구들은 두려움이나 거리낌 없이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그들에게는 그녀가 바로 잘 받아주고 판단하지 않으며 침묵을 지키는..... 일종의 안데르센의 우물이었던 까닭이다> 이런 대목들. 고전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문장들이 페이지마다 넘쳐나서 머릿속을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다. 아마도 고전이 따분하다고 많은 이들이 여기는 이유는 두툼한 분량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반짝이는 문장들과 행간에서 넘쳐나는 보석 같은 깨달음은 충분히 시간을 투자할만한 가치를 한다. 아마도 현대 소설에서는 맛볼 수 없는, 그러니까 밑줄 긋거나 베껴 써보고 싶은 페이지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는 그런 시간이 될 거라고 장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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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3-11-13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타인벡은 아무래도 현대작가라서 문장이 간결하니 영어교재에도 많이 인용되더군요.저는 장편에 부담을 가지는 이들에게 스타인벡의 중단편을 권하고 있어요.<붉은 망아지> 외에 <진주>,<생쥐와 인간>은 재미도 있고 기분좋은 뒷맛이 있더군요.

피오나 2013-11-13 14:15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영어교재에도 자주 인용되는 작가인줄은 몰랐어요. ㅎㅎ '진주'와 '생쥐와 인간'은 아직 읽어보지 않았는데, 기분좋은 뒷맛이 있다고 하시니 궁금해집니다. 찾아서 읽어봐야겠어요. ^^
 
대디 러브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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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가 영화나 소설을 통해 접하는 이야기들이 일종의 간접적인 대리체험이라고 했을 때, 내용이 궁금해서 보기는 하지만 두 번 다시는 체험하고 싶지 않은 종류의 작품이 가끔 있다. 조이스 캐롤 오츠의 작품들도 그러한 부류에 속하는데, 전작인 <좀비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가 유독 그랬던 기억이 난다. 내용은 미성년 성추행 혐의로 기소되어 집행유예 2년의 보호 관찰 형을 선고 받은 주인공이 자신에게 무조건적인 충성과 사랑을 바칠 좀비 노예를 가지려고 하는 이야기이다. 살아 있는 사람의 뇌에서 자아를 지워버리면 좀비처럼 자신에게 복종할거라고 믿으면서 잔인한 범죄를 이어가는 다소 경악 스러운 내용이다. 이 책을 적극 추천했던 박찬욱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이 책은 독자로 하여금 잠시 그 악인이 되어보도록 한다. 마치 입체영상을 보게 해주는 안경 같은 것이다. 이걸 쓰면 사이코 패스의 눈으로 세상과 사람들, 그리고 자기 내면을 관찰할 수 있다>. 이 정도면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사이코 패스의 매우 폭력적인 시선으로 보는 세상은 사실 굉장히 불편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다행히도 이번 작품 <대디 러브> <좀비>처럼 악인의 입장에서만 서술되고 있지는 않아, 충격의 강도는 조금 완화된 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 조이스 캐롤 오츠의 작품은 결코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그런데도 굳이 왜 찾아서 읽느냐고 할 수도 있겠다. 누군가 이 작품의 리뷰를 쓰면서 '괴물 같은 필력'이라는 표현을 썼던데, 나도 그 말에 적극 동의한다. 글을 잘 쓰는 작가가 어디 한 둘이 겠냐만, 조이스 캐롤 오츠는 정.. 무서우리만큼 필력이 대..하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 읽는 동안은 좀 불편해지더라도 새로운 작품이 출간되면 읽어보고 싶을 수밖에.

 

이 작품은 유괴당한 아이가 범인으로부터 도망쳐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을 그리고 있다. '유괴'라는 소재는 여타의 작품에서 자주 다뤄지고 있지만, 조이스 캐롤 오츠가 주목하는 것은 유괴라는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겪은 아이의 심리적인 변화이다. 순수하고 똑똑했던 다섯 살 아이가 '유괴'라는 폭력을 통해 어떻게 인격적으로 변하는지, 인간이 생존이라는 강박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는지,, 그녀 특유의 멋 부리지 않는 건조한 문체로 신랄하게 보여준다. 이쯤에서 자연스레 얼마 전에 개봉했던 영화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가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화이>에서는 자신을 유괴한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을 아빠로 믿으며 자란 소년이 진실을 알게 되고 결국 그들과 똑같은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이 그려지고 있다. 두 작품 모두 유괴라는 소재로 인간이 어떻게 괴물이 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출발점은 같으나, 물론 장준환 감독의 영화와 조이스 캐롤 오츠의 책은 각각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으니 완전히 다른 두 작품을 비교 해보는 재미도 있을 것 같다.

 

 

<대디 러브>는 쇼핑몰 주차장에서 주차해둔 차를 찾는 엄마와 아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평소에도 다이너는 아들 로비에게 책임감과 관찰력에 대해 주지시키기 위해, 차를 어디에 주차했었는지 위치를 기억하는 숙제를 주곤 했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쇼핑을 마치고 두 사람은 주차된 차를 찾는 게임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나타난 남자에게 머리를 맞고, 로비가 그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다이너는 그 남자의 차에 거의 끌려가다시피 하면서 피를 흘리고 무기력하게 의식을 잃는다. 로비가 유괴되기 직전까지의 5분 정도 되는 그 짧은 순간, 쇼핑몰 주차장에서 차를 찾기 전까지 벌어지는 겨우 5분 정도의 그 기억은 여러 차례 반복해서 재구성된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1에서 <내 손 잡아. 그녀가 말했다. 아이는 그렇게 했다. 작은 손을 엄마 손 위에 올렸다. 유괴되기 오 분 전쯤의 일이다.우리 차 보여? 엄마가 아이에게 물었다. 우리가 차를 어디에 세웠는지 기억나? 이것은 그녀와 아들이 하는 일종의 게임이었다. 차를 쇼핑몰 어디에 세웠는지 기억하는 것은 아이의 몫이었다. 아들이 찬찬히 보고 기억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하던 게임이었다> 차를 어디다 세워뒀는지 찾는 일종의 게임이 시작되고..

 

그들이 차를 찾는 순간 시작되는 2에서는 <"내 손 잡아, 로비." 아이는 그렇게 했다. 통통한 손을 들어 엄마의 손을 잡았고, 그녀는 아들의 손가락을 꼭 쥐었다. 엄마와 다섯 살 아이 사이에 짜릿한 행복감이 지나갔다. 그녀의 머릿속에 아파포시스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말로 다 못한다는 뜻이다. 엄마 노릇을 하면서 말로 다 못 할 것을 많이 알게 됐다. "우리 차 보여? 아빠 차가 보여? 우리가 차를 어디에 세웠는지 기억나?"> 로 다시 반복적으로 그 5분의 기억이 재구성되며 로비가 유괴되고, 그 당시의 상황이 어땠는지가 보여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3에는 <"손 좀 잡아, 로비!" 로비는 그렇게 했다. 엄마 손을 잡았다. 아이는 쇼핑몰에서 몹시 흥분했고, 엄마가 언성을 높이지 않으면 말을 안 듣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다섯 살배기는 주차장에서 혼란에 빠져 기가 죽었고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첫 번째 실수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피곤하니, 아들? 삼심 분이면 집에 도착할 거야. 엄마가 우리 차를 찾도록 도와줘, 알겠지?: 이 일은 로비의 책임이었다. 그리고 게임이었다. 로비는 게임하는 걸 좋아한다. (보통은) 게임을 잘했으니까.> 를 시작으로 다시 그 날의 상황이 재구성되며, 과거에 로비가 아팠을 때 그녀가 떠올린 기억부터, 더 살이 덧 붙여진 사건 당일이 보여진다.

 

다시 반복되는 4에서는 <내 손 잡아. 그녀가 말했다. 하루에 몇 번이나 말했을까. 둘이 밖에 있을 때면. 아들은 순종적인 아이였기에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는 작은 손을 꼭 쥐었다. 그녀가 엄마였으니까, 그리고 책임이 있었으니까. 쇼핑몰에서 아이는 수 차례 그녀에게서 빠져나갔다. 꽥꽥 소리지르고 키득대며 엄마한테서 빠져나갔고, 그녀는 아이를 쫓아 달음질쳤다. 하지만 그것은 게임이었다. 게임을 하면 아이다운 웃음이 터진다> 는 문장으로 이어지며, 사건 이후 경찰이 수색을 시작하고, 그녀가 수술을 받기 위해 들어가는 장면으로 진행된다.

 

굳이 이 문장과 단락들을 이렇게 길게 옮긴 이유는,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이들에게 조이스 캐롤 오츠의 방식에 대해 조금이라도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이다. 공포와 패닉 속에서 재구성된 기억, 혼란스러운 의식을 고스란히 독자들이 '체험'할 있도록 보여주는 것이다. 일상에서 누구라도 당할 수 있는 위험한 범죄의 순간이지만, 그 누구도 절대 자신에게 이런 일이 닥칠 수도 있다는 걸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장면을 감정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비슷한 상황이 반복적으로 서술되는 것 같지만 1장부터 4장까지의 내용은 미묘하게 다르게 묘사되고, 그만큼 다른 정보들을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아이를 유괴당한 엄마의 내면을 이토록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는 작가는 아마도 흔치 않을 테니 말이다. 고통스러운 5분 간에 대한 시간의 재구성 뒤로 이어지는 장은 교회에서 설교자로 신에 대해, 믿음에 열변을 토하는 체스터 캐시의 모습이다. 차가운 조각 같은 얼굴에, 민첩하고 매서운 눈빛을 가진, 누구에게나 호감 형인 그 설교자는 바로 로비를 납치한 연쇄살인범이자 성 범죄자이다. 허기진 영혼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축복의 씨앗을 뿌리는 설교자를 바라모는 신도들의 그 무한한 신뢰라니.

 

이후 7에서 다시 초반의 변주가 이어진다. <내 손을 잡아. 그가 말했다. 하지만 아이는 그러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너한테 말하잖아, 아가, 내 손 잡아. 아이가 떨기만 하고 손을 올리지 않자, 말을 듣지 않자, 대디 러브는 손을 낚아챘다. 작은 손가락을 곽 움켜쥐자 새끼손가락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아이가 재갈을 문 채 비명을 질렀다>로 이어지는 이후의 내용들은 소아 성애자이자 연쇄살인자 유괴범인 체스터 캐시 로비의 이름을 '기드온'으로 바꾸고 자신을 '대디 러브'라고 부르게 하면서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을 때는 가차없이 벌을 주고, 자신의 말을 따르며 순종할 경우에만 먹을 것과 마실 것으로 상을 준다. 육체적인 폭력과 성적인 폭력을 가하는 대디 러브와 살면서 로비는 점점 기드온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대디 러브는 '나쁜 엄마'에게서 어린 로비를 자신이 '구출'했으며, 아이는 그와 함께 사는 것을 '고마워한다고 생각하며 사는 인물이다. 그렇게 6년이 지나고, 기드온은 대디 러브가 자신을 대체할 다른 동생을 찾고 있으며, 이제는 나이를 먹고 커버린 자신을 여태껏 다른 아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죽이려 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리고 목숨을 지키기 위해 대디 러브로부터 도망쳐서 부모에게 돌아간 이후의 이야기가 작품의 나머지 부분이다.

 

그래서 기드온은 알렉스에게 읽기와 산수 숙제를 도와줬다. 기드온은 친구가 간단한 단어나 숫자를 그렇게 틀리게 쓴다는 데 놀랐다. 알렉스는 글자와 숫자를 거꾸로 쓰고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했다.

아마 내가 거꾸로 된 괴물인 가봐. 알렉스는 말했다. 하지만 얼굴에 웃음기가 없었다.

모두 다 괴물이야. 기드온이 말했다. 알고 보면 다 그래.

 

괴물로부터 도망쳐 다시 부모에게 돌아온 로비는 육 년 전의 그 수다스러운 아이가 아니다. 열한 살이 된 로비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아이가 되어 있었다. 영양실조, 빈혈, 심신 쇠약증 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에 대해서 추측할 수 있는 작품의 후반부는 그래서 매우 슬프고, 무섭다. 매체에서는 체스터 캐시에게 억류된 육 년 동안 로비가 도망치려고 시도하거나 억류된 사실을 주위에 알리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서 보도한다. 왜 소년은 유괴범과 지내는 동안 다니던 학교의 누구에게라도 사실을 말하지 않았던 건지, 왜 육 년 동안 도망치려고 시도하지 않았던 건지. 로비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 무서운 추측을 하게 만드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차라리 눈을 감고 회피하고 싶어질 것이다. 불편하지만 인간 내면의 어두운 부분을 이렇게나 소름 끼치게 잘 그려내는 이가 또 있을까 싶다. 사실 끔찍한 묘사나 고통스러운 대목들은 전혀 없다. 그런데도 참 아프고, 두려운 감정이 들게 하는 것은 오로지 필력의 힘인 것 같다.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소설을 쓴 작가의 힘을 느껴보고 싶다면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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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08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멋진 리뷰입니다.

피오나 2013-11-11 09:30   좋아요 0 | URL
하핫.. 긴 리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지옥계곡 모중석 스릴러 클럽 35
안드레아스 빙켈만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이 작품을 끝까지 읽고 나니 이중에 과연 누가 악인인지, 대체 이들 중에 누가 더 나쁜지, 판단하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시다 슈이치의 <악인>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다. 아주 예쁘거나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닌 평범한 여자 주인공. 그녀가 좋아했던 남자는 그녀를 무시하고 조롱하고, 업신여겼다. 그런 그녀를 짝사랑했던 또 다른 남자.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의 차에서 버려지는 여자를 걱정하며 다가가지만,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그에게 여자는 엉뚱하게 화를 낸다. 그녀가 토해내는 악담과 분노에 순간적 감정으로 남자는 순전히 우발적으로 여자를 죽이게 된다. , 여기서 과연 누가 악인일까? 여자를 우발적으로 죽이고 만 그녀를 짝사랑하던 남자일까? 아니면 자신을 좋아하는 여자를 업신여기고, 산길 도로 한 복판에서 내쫓은 남자일까? 자신의 창피한 모습을 보인 것이 수치스러워 마음에도 없는 화풀이를 하며 악담을 하고 만 그녀일까? 물론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가장 나쁘지 않냐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애초에 산길 도로에서 자신을 좋아하는 여자를 무참하게 내팽개치지 않았다면, 수치심에 있지도 않는 일을 떠벌리며 악담을 퍼붓지 않았다면, 그 남자도 우발적으로 그녀의 목을 조르지 않았을지 모른다. 요시다 슈이치는 약자들을 이용해 돈을 뜯는 양아치들, 특종을 얻기 위해 가해자의 가족을 쫓아다니는 매스컴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방치하는 사회. 그 모두가 악인일 수 있다고 작품을 통해 이야기했었다. 안드레아스 빙켈만은 요시다 슈이치와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 내면에 숨어있는 악에 대해서 말한다.

 

사진 속 젊은이들은 지쳤지만 행복해 보였다. 서로 신뢰하는 친구들. 이 신뢰가 얼마 지나지 않아 깨질 거라는 조짐은 사진에서 전혀 알아챌 수 없었다. 그늘도, 구름도 없고 이상한 눈길도 없었다.

 

심리 스릴러의 제왕이라 불리는 안드레아스 빙켈만의 신작 <지옥계곡>에서도 우리는 유사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모두 다 악인이 될 수도, 모두다 선인이 될 수도 있는 그런 상황에서, 과연 누가 더 나쁜가.에 대한 윤리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는 다섯 명의 친구가 있다. 남자 셋, 여자 둘, 거기 두 커플이 있고, 그들 중 한 여자를 남몰래 짝사랑하는 남자가 있다. 어느 날 그들 다섯은 등반을 하기로 한다. 마라는 하필 전날 저녁 먹은 것이 체해서 등반을 포기하고, 비도 억수같이 퍼붓는 날씨였지만 오래 전부터 세운 계획이라 남자들은 올라가겠다고 말한다. 라우라는 마라를 혼자 두는 것이 신경 쓰였으나, 남자친구인 리키와 함께 싶어하는 눈치였고, 마라는 혼자 괜찮으니 등반을 하라고 말한다. 날씨가 나쁠 때는 위험한 코스인 지옥계곡으로 넷은 올라갔고, 혼자 여자인 라우라는 가는 도중에 완전히 기진맥진 지치고 만다. 혼자 돌아가겠다고 하지만 여자 혼자 내려가기엔 위험한 길이었는데, 마친 누군가 산을 타고 내려온다. 리키는 전혀 모르는 남자인 그에게 자신의 여자친구인 라우라를 같이 데리고 가달라고 맡기고, 남자들만 나머지 등반을 한다. 그리고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바뀐다. 산에서 내려온 뒤 라우라는 친구들에게서 입을 닫아버린다. 내려오는 동안 낯선 그 남자와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일체 말을 꺼내지 않으면서, 친구들과의 사이에 벽을 쌓아버린다.

 

마라는 리키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리키에게 감정이입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정말 이 정도로 무감각하고 죄책감이라고는 전혀 못 느끼는 걸까?

"우리에게 보내는 신호라고, 이 빌어먹을 개 자식아. 자기를 버린 우리 모두에게! 우리는 가장 좋은 친구를 돕지 않았고, 덕분에 그 친구는 죽었어."

 

그렇게 절친이었던 친구들간의 관계는 서서히 멀어지고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갑작스럽게 라우라의 자살 소식을 듣게 된다. 그녀가 지옥계곡에서 자살하려던 순간, 그곳을 순찰 중이던 산악구조대원 로만에게 발견이 되지만, 도움을 주려던 그의 손길을 뿌리치고 라우라는 계곡 아래로 투신한다. 이야기는 이렇게 의문의 자살이라는 참혹한 결말에서 시작해서, 친구들 사이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에 대한 과정을 역순으로 추적할 수 있게 진행이 된다. 피해자와 가해자, 관찰자의 시점을 오가며 빠르게 진행되는 이야기는 매 장면마다 긴박하고 섬뜩한 공포를 느끼게 만들어준다. 라우라는 왜 스스로 방어벽을 치고는 자신의 고민을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걸까? 이들이 정말 그녀의 친구였다면, 그대로 놔두면 안 되는 거 아니었을까? 부잣집에서 어려울 것 없이 자란 오만하고 이기적인 리키는 산과 날씨에 지지 않으려고, 전혀 모르는 남자에게 완전히 지친 자기 여자친구를 데리고 내려가달라고 떠넘겼었다. 당시에 라우라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게다가 그녀의 자살 소식을 듣고도, 여전히 다른 여자를 만나고 다닌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부분을 배제하고 언급하자면, 나는 사실 범인, 즉 가해자보다 더 나쁜 놈이 이 작품에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 그녀에게 나쁜 행동을 했지만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이 정당화 될 수는 없으므로) , 사실 그녀가 죽음에 이르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다른 데 있었기 때문이다. 범인 덕분에 라이라의 평범한 일상이 험난한 지옥처럼 변해버리고 말았지만, 하지만 그때 누군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면 그녀는 결코 지옥 계곡 아래로 투신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리적으로 벼랑 끝에 몰린 그녀를 등 떠민 것은 결국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친구 중의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라이라는 그 끔찍한 배신에 대해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테지만.

 

이 작품은 <사라진 소녀들><창백한 죽음>에 이은 안드레아스 빙켈만의 세 번째 국내 출간 작이다. <사라진 소녀들>에서는 시각장애인 소녀의 실종사건을 통해 인간의 사악한 본능에 대해 그렸었고, <창백한 죽음>에서는 소시오 패스의 실체를 생생히 추적해서 수사하는 것을 보여주었었다. 두 작품 모두 겉으로는 평범하지만 그 가면 뒤에 숨어 있는 인간의 내면을 집중적으로 묘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마도 그래서 그를 심리 스릴러의 제왕이라 칭할 것이다. 우리가 도덕성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얼마나 나약한 토대 위에 세워진 모래성 같은 것인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일상 속의 지옥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 이제 스타트랙 다크니스의 '베네딕트 컴버배치' 톤으로 “shall we begin?” 이라고 당신에게 말을 건네보고 싶다. 한번 시작하면 다시는 전과 같아질 수 없다. 이 작품을 읽고 나면 당신 주변의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걸 깨닫 될 테니 말이다 내 가장 가까이 있는 그 사람도 결국에는 타인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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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긴 잠이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0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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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만에 하라 료의 신간이다.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내가 죽인 소녀>를 잇는탐정 사와자키시리즈 세 번째 작품인 <안녕 긴 잠이여>는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날 수 있었던 꿀 맛같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평상시에 책을 굉장히 빨리 읽는 편이다. 시간을 쪼개어 한 달에 수십 권의 책을 읽으려다 보니 생긴 습관이기도 하고, 재미난 책의 진짜 묘미는 두 번째 읽는 데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능한 책을 빨리 읽은 뒤에 좋은 책은 여러 번 읽는 방식으로 꽤 오래 습관이 들어버렸다. 그런데 하라 료의 작품은 이상하게도, 자꾸만 천천히 아껴서 읽고 싶어진다. 그러니까 내용이 지루해서 진도가 안 나가는 게 아니라, 다음 내용이 궁금한데도 불구하고 일부러 천천히 아끼고 싶은 마음이라고 할까. 급하게 후루룩 읽어서 페이지를 끝내버리고 싶지 않고, 가능한 책을 읽을 수 있는 가장 쾌적한 환경에서 여유 있게, 아주 느긋한 마음으로 맛을 음미하듯이 문장들을 꼭꼭 씹어먹고 싶다. 오래 기다렸으니, 그만큼 읽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다고나 할까. 그래서 책을 읽는데 무려 일주일이 걸렸는데, 그 사이에 어떤 책들은 후다닥 읽고 리뷰를 쓰기도 했으니 얼마나 이 책을 아껴가며 읽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하라 료가 작품을 쓰는 스타일에 나도 모르게 영향을 받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책을 늦게 쓴다고 독자까지 덩달아 천천히 책을 읽어야 하는 법은 없지만, 뭐 암튼.

 

 

하라 료는 자타가 인정하는 독보적인 과작(寡作) 작가이다. 데뷔 이래 19년 동안 단 여섯 권만을 썼을 뿐이다. 사와자키 시리즈 세 번째 작품 <안녕 긴 잠이여>는 전작 이후 6년이 걸렸고, 네 번째 작품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는 9년이 걸렸다고 한다. 재미있게도 국내에 출간된 <내가 죽인 소녀> 이후에 이번 작품이 나오는데도 4년이 넘었다. 이건 뭐 '기다릴 테면 기다려봐!'는 식의 으름장을 놓는 것도 아니고, 팬들이 기다림에 지쳐 나가떨어지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마치 약을 올리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이 태도가 하드보일드와 너무도 잘 어울리기도 하거니와 어딘지 마음에 든다. 집필 스타일 뿐만 아니라 전개되는 내용도 그렇기 때문이다. 이렇게 겉과 속이 한치의 오차 없이 똑같은, 정직한(?) 작가라서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번 작품에서 사와자키 탐정이 의뢰인을 만나기까지 할애되는 페이지가 무려 100페이지이다. 이러다 작품이 끝날 때까지 의뢰인이 안 나오는 거 아니야? 하는 조바심이 들 정도가 되어야, 사와자키는 의뢰인을 만날 수 있게 된다. 탐정이 의뢰인을 만나야 본격적인 스토리가 시작되기에, 그렇다면 초반 100페이지 동안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거냐고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궁금한가? 그렇다면 직접 읽어보시라. 왜 하라 료의 팬들이 그의 작품을 이리 오랜 시간 기다려서 읽게 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주쿠에 위치한 허름한 '와타나베 탐정사무소'를 운영 중인 탐정 사와자키. 그가 사백여일 동안 도쿄를 떠나 있다 오랜만에 돌아오면서 맡게 되는 사건은 십 일년 전 승부 조작 사건에 얽혔던 전직 고교 야구 선수가 의뢰한 누나의 자살문제이다. 당시에 의뢰인인 우오즈미 선수의 가방에서 다섯 개의 돈뭉치가 나와 승부조작 혐의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지만, 일주일 뒤 그의 혐의는 무죄로 풀려난다. 하지만 조사하는 과정에서 경찰서로부터 연락을 받지도, 동생과 통화를 하지도 못한 그의 누나가, 풀려나기 전날 아파트 6층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무려 십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누나는 그런 일로 자살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며, 누나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다.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명백한 자살이고, 사고나 타협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고 하는데, 대체 왜 그는 '누나가 그런 문제로 자살할 리가 없다'는 말을 십일 년 동안 계속하고 있는 걸까. 앞서 밝혔지만 의뢰인인 우오즈미를 사와자키가 만나는데 무려 100페이지 정도가 할애된다. 그리고 그들이 만나고 정식으로 의뢰를 한 다음에 우오즈미는 갑자기 낯선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하고 병원으로 실려간다. 그러니까 의뢰를 받기 전, 후 모두 이 사건은 오로지 사와자키 스스로 알아보고, 해결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는 증거도 없고, 물증도 없는 십일 년 전의 사고를 향해 차근차근 다가선다. 그리고 당시의 증언을 했던 세 명 모두 정확하지 못한 사항을 증언했다는 걸 알게 되는 등 일련의 사항들을 통해 우오즈미 유키가 자살하지 않았다는 걸 확신하지만, 그렇다고 타살이라는 것을 증명할 만한 증거는 발견하지 못한 채 이야기는 계속 된다.

 

 

하라 료의 작품에 대해 말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단어는 하드보일드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하드보일드는 스토리 그 자체로서의 매력보다는 문체와 스타일에서 묻어나는 거라고 생각한다. 하라 료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광팬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 테니, 이번 작품 <안녕 긴 잠이여>라는 제목이 챈들러의 작품에서 모티브를 따온 거라는 건 눈치 챘을 것이다. 사와자키 탐정은 챈들러의 필립 말로만큼이나 시크하고,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그래서 그가 툭툭 뱉어내는 말투, 그리고 행동에 대한 묘사에서 빚어지는 그 분위기가 참 좋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밖에서 가볍게 저녁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뒤로는 지저분한 사무실 벽의 얼룩을 노려보며 시간을 보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마음은 병원으로 가고 싶었지만 탐정의 업무 목록에 의뢰인의 침대 옆에서 마음을 졸이는 일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나는 주차장으로 내려가 블루버드를 몰고 나와 할 수 있는 일에 전념하기로 했다> 는 정도의 불필요한 수식을 뺀 무덤덤하고 시크한 행동. 가끔은 위험한 순간에조차 무모하게 용기 있는 순수함(?) 이라고나 할까. 머릿속으로 손익을 계산한다거나, 자신이 피해를 볼만한 상황에서 빠진다거나, 정의롭지 못한 일에 가담한다거나 하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캐릭터이다.

 

흔히들 하드보일드 범죄소설이라 칭해지는 부류는 범죄나 폭력, 섹스에 대해 이렇다 할 감정 없이 무미건조한 묘사를 하고, 비정하며, 냉혹한 사회의 모습을 불필요한 수식 없이 날 것 그대로 묘사하는 수법으로 지칭된다. 추리소설에서 추리사건해결그 자체보다는 탐정의 행동에 중점을 두는 하나의 유형이라 하겠다. 그래서 이런 류의 작품은 감정과 도덕적 판단을 배제하는 차가운 정서를 대표하는 걸로 알려져 있는데, 이상하게도 하드보일드 작품의 캐릭터들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건 사실 아이러니 하긴 하다. 가끔은 이런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같으니라고. 하는 생각이 드는 대목도 종종 있지만, 그럼에도 밉지 않고 정이 가는 캐릭터들이라고 할까. 아뭏튼 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것이 하드보일드 작품의 탐정 캐릭터들인 것 같다.

 

작품의 후반에 실려 있는 번역자의 멘트가 재미있어 옮겨본다.

 

역시 하드보일드란 바로 이런 거다, 라고 간결하게 설명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작가 하라 료도이거다라고 정의를 내놓지 않습니다. 다만 이런 예를 들어 그 조건을 설명합니다.

 

“《빅슬립》(출판사에 따라 《깊은 잠》 《거대한 잠》 앞머리에 어느 저택을 방문한 탐정 필립 말로에게 버릇없는 그 집 막내딸이키가 크네요?”라고 삐딱한 태도로 묻는 장면이 나온다. 이 말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어려운 질문이다. 현실적으로는 히죽히죽 멋쩍게 웃어넘기거나 아니면 화를 내거나 둘 중 하나다. 하드보일드 소설에서는 그러면 실격이다. 이 물음에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가 없는 가로 독자는 그 소설을 판정하게 된다. 말로는 어떻게 대답했을까? 《빅슬립》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여기서는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늦어진 한국어판을 기다려준 분들을 위해 그 답을 영문으로 적어둡니다. “I didn’t mean to be.”

 

 

레이먼드 챈들러의 깊은 잠을 다시 뒤져보니, 해당 장면이 기억이 났다.

 

키가 크네요, 그렇죠?” 라고 묻는 그녀에게,

필립 말로가 대답한다.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오.”

 

 

, 이제 대충 분위기가 짐작이 되는가?

 

이래서 내가 필립 말로를, 사와자키를, 그리고 하드보일드작품을 사랑할 수 밖에 없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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