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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치 - 2013 제37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이재찬 지음 / 민음사 / 2013년 10월
평점 :
대체 어디서 이런 작가가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온 거지? 싶을 만큼 작가에 대해 궁금해지는 작품이다. 이재찬 작가는 2000년에 영진위 시나리오 공모전 수상 이후, 무려 13년 만에 이 작품 <펀치>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으며 등단했다고 하는데, 그럼 십 여 년 동안 뭘 하셨던 걸까. 부질없이 작가의 지나온 시간에 대해 관심이 갈 만큼 그가 영화 시나리오를 쓸 때의 작품 분위기와 소설의 갭이 크다. 영화 <버스, 정류장>에서도 열 일곱 살의 냉소적인 여고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했었던 걸 보면, 유독 여고생의 심리에 통달할 만한 환경에 있는 걸까 싶기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가이다. 그의 다른 작품도 궁금해지는데, 출간된 소설이 아직은 단 한 권이라는 점이 아쉬울 따름.
'펀치'라는 제목에서 오는 어감만큼이나 이 작품은 책을 읽는 내내 독자들의 뒤통수를 얼얼하게 만든다. 당돌한 여고생의 대사에 당황하고, 난폭하리만큼 무서운 언어적인 냉소는 이가 시릴 만큼 오싹하다. 할말 못할 말 가리지 않고 내뱉으며, 어른보다 오히려 더 어른스러운 10대의 등장이 처음도 아니거늘, 유독 이 작품의 주인공인 여고생 방인영에게는 기존의 캐릭터에겐 없는 무언가가 있다.
자, 작품 속으로 들어가보자. 잘나가는 법무법인 소속의 변호사인 아빠와 미모가 뛰어난 엄마를 가지고 있는 고3의 여고생 인영은, 가족에 대해, 사회에 대해 불만이 가득하다. 내신도, 외모도 5등급이라 스스로를 지칭하며, 부모로부터 받는 경제적인 여유로움에 대해 전혀 감사하지 않고, 세속적인 욕망에 충실한 부모를 무시하는, 이른바 '반항 청소년'인 셈이다.
동물과 인간이 외모를 중요하게 따지는 건 조물주가 만들어 놓은 하드보일드다. 왜 누구는 아름답고 누구는 추하게 만들었을까. 방 변호사는 머리가 좋고 외모가 달린다. 엄마는 외모는 그럴듯해서 사법 고시에 패스한 남자한테 선택 받았지만 머리는 모자란다. 결정적인 불행은 내가 엄마의 머리와 방 변호사의 외모를 닮았다는 아이러니다. 내가 신을 버리기로 마음먹은 계기는 바로 이런 유전자의 장난질 때문이다.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할 쪽은 잘못을 저지르는 인간이 아니라 잘못 설정해 놓은 신이어야 한다.
남에게 거리낌없이 "자식 농사는 좆도, 죽 쒔다."라고 말하는 아빠나, 그런 아빠가 자신에게 열성유전자만 제공한 생부이므로, 그를 '방 변호사'라고 지칭하는 딸이나, 교회의 열혈 신자이면서 어떻게든 딸을 잘나가는 다른 집들과의 수준을 맞춰보려는 속물적인 엄마나, 맨날 사고치고 어떻게든 돈이나 좀 뜯어내보려는 삼촌이나.. 다들 그렇고 그런 콩가루 집안이다. 학교와 학원 역시 공부를 못하면 수술을 해서라도 외모를 뛰어나게 만들거나, 부모가 자산이 어느 정도 이상은 되어야 선생님들이 대우를 해준다거나, 실제 현실에서도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는 악취 나는 시스템의 한 단면이다. 완전 재수 밥맛인 캐릭터들만 잔뜩 모여있는, 자산 30억 이상의 부유층 인간들만 모여 있는 그 세계의 한 축을 허물어버리는 것이 이 작품의 진정한 목적이다. 아무리 되바라진 성격을 가지고 있더라도, 아무리 당돌한 말투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보통의 10대 소녀라면 머리로 상상은 할 지 언정, 절대로 실제 할 수는 없는 그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10대 소녀를 통해서 보여준다.
작품의 중요한 모티브이자 사회적 문제이기도 한 ‘존속살해’는 매우 끔찍한 범죄이긴 하지만, 그 동안 소설에서 전혀 다뤄지지 않은 색다른 소재인 것은 아니다. 더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묘사되는 살인에 대한 추리 소설들이 많으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 보다는 ‘어떻게 그것을 보여주느냐.’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저씨는 누군가를 죽이고 싶지만 죽이지 못하잖아요. 고양이는 사람이 아닌데…내 목적은 아저씨한테 기회를 만들어 주겠다는 거예요.”
“무슨 기회?”
“사람을 죽여 주세요.”
인영은 우연히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건물 한쪽 구석에서 고양이의 목을 조르고 있는 남자를 발견한다. 고양이를 죽이고 걸어가는 쓸쓸하면서도 무기력한 남자의 뒷모습에서, 자신이 즐겨보던 영화 <모래의 여자>에 나오는 남자를 떠올린다. 40대 계약직 공무원인 그 남자가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하는 걸 깨닫고는, 그에게 사람을 죽여달라고 의뢰를 한다. 나의 부모를 죽여주면, 엄청난 대가를 돈으로 주겠다고. 불만 가득한 청소년기에, 더구나 인영의 부모처럼 자식에 대한 사랑은 커녕 속물 근성만 넘쳐나는 부모를 가지고 있다면, 머릿속으로 한 번쯤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부모만 없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나를 구속하는 것도 없고,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을텐데.. 하고 말이다.
“너... 처음이 아닌가?”
그럴 리가.
살인을 계획하고, 진행하는 인영의 모습은 여고생이라고 하기엔 너무 지독하고, 지나치게 완벽해서 부담스러울 정도이다. 옷은 평범한 걸로 사고, 키 높이 구두를 사서 외모로 의심 받지 않을 구실도 마련하고, CCTV가 잘 보이는 곳에 차를 대 놓고 추석 연휴 내내 차를 사용하지 말고 등등.. 오죽하면 남자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처음이 아니냐고 반문할 정도이다. 이쯤 되면 애초에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고 싶어한다는 이유에 대한 동정심이나 환경적 공감을 독자에게 구하기란 어려워진다. 그 동안 어떤 일이 있었던 간에 ‘살인’에 대한 폭력적인 결과만 남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작가의 의도처럼 느껴진다. 이렇게나 비도덕적인 사회에서 윤리적인 질문을 던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죄를 저지른 인간에 대한 비판이나 처벌을 하려면, 최소한 사회가 도덕적이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사실, 맞는 말이다. 과연 누가, 아무런 거리낌없이 인영을 비난 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인영의 행동이 정당화되거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는 없다.
모래의 남자와 인영의 살인 계획이 이어지고, 그리고 바로 다음 장에선 '눈을 뜨니 장례식이다'라며 시간을 훌쩍 건너뛴다. 보통은 살인을 결심하기까지의 배경 설명에 이어 결말 부분쯤에 실제 살인이 벌어지고, 이후 에필로그가 덧붙여지면서 작품이 끝이 날 텐데.. 이 작품에선 살인이 벌어진 시점이 작품의 60프로 정도 지점이라, 나머지 40프로는 살인이 벌어지고 나서의 리얼한 상황 묘사가 이어진다. 그러니까, 우리가 불편해할 수밖에 없는 내용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서술된다는 말이다. 그냥 철없는 여고생의 치기 어린 상상력이나 바램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생생한 살의는 잔혹하고, 너무도 냉정한 10대 소녀의 머릿속은 이것이 허구의 극이라고 가정을 한다 해도 소름 끼치게 무섭다. 뒷목이 서늘해질 정도로 과감한 이런 방식은 아마도 호불호가 분명할 것이다. ‘뭐 이런 캐릭터가 다 있어’. 혹은 ‘와. 이런 캐릭터가 등장하다니. ‘로 극명하게 나뉠 수밖에 없는, 전대미문의 캐릭터가 탄생했으니 말이다. 유독 인물에 감정 이입 잘하는 독자인 나조차도 인영의 편에 서서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는 건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과 캐릭터는 매력적이다. 영화로 만들어서 실제 살아 숨쉬는 인물로 만나고 싶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