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사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9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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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 가나에의 작가인생 제2막의 시작을 알리는 이 작품은 굉장히 따뜻하다. 혹시 이 책을 아직 읽기 전이라면 의아할 것이다. '따뜻'하다고? 미나토 가나에가? 그만큼 그 동안의 작품들은 충격적이었고, 거침없었으며, 파격적인 반향을 일으키는 소재와 플롯으로 사랑을 받았었다. 그랬던 그녀가 '꽃사슬'이라는 예쁜 제목만큼이나 아름다운 이야기를 써냈다. 특유의 날카로움을 잊어버리지 않고, 다만 내놓는 그릇을 달리해 더 보기 좋게 플레이팅했다고 할까. 인간 내면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시선은 여전한데, 어디선가 화과자의 달콤한 냄새도 나는 것 같고, 색색깔의 꽃 냄새도 나는 것 같아 훨씬 더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미나토 가나에의 날선 문장들을 좋아했지만, 읽을 때마다 어딘가 불편하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기에, 이런 변화가 반가웠던 것도 같다.

 

말하자면, '리카梨花'의 이야기

매년 10 20, 어머니 앞으로 커다란 꽃다발이 집에 배달된다. 철들 무렵부터 그런 기억이 있다. 꽃 값은 생각도 못했던 어린 시절에는 꽃집 아저씨가 몸을 기울여야 현관에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꽃다발을 그저 예쁘다고 생각하며 바라보았다. 생일도, 결혼기념일도 아닌 날에 꽃이 오는 이유에 대해서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영어 회화 학원 강사로 일했던 리카는 갑작스런 회사 부도로 인해 퇴직금은커녕 지난달 급여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러던 차에 유일한 가족인 외할머니가 위암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곧 수술을 해야 해 돈이 필요하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그녀가 의지할 사람은 매년 엄마에게 꽃을 보내던,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신 다음 경제적 원조를 자처했던 익명의 남자 K뿐이다.

 

말하자면, '미유키美雪'의 이야기

내 잘못, 내 잘못이었어.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데 등에 따스한 손길이 닿는 것을 느꼈습니다.

"괜찮아?"

상냥한 목소리도 들립니다. 하지만 고개를 들 수도, 말을 할 수도,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멈출 수도 없었습니다.

외삼촌이 임원으로 계신 건설회사에서 만난 가즈야와 결혼한 미유키는 아이는 아직 없지만 둘만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무심코 한 사소한 행동 때문에 남편이 오랫동안 준비했던 공모전이 그들에게 좌절을 안겨준다. 게다가 이어진 갑작스런 사고,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을 견딜 수 없어 과거를 지워버리고만 싶다.

 

말하자면, '사쓰키紗月'의 이야기

"어머니는 모르겠지만 전 아버지가 안 계시다는 사실보다 아버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게 더 괴롭단 말이에요. 난 어떤 사람의 자식일까, 내 성격은 누굴 닮았을까.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있어도 어머니하고 내 감상은 어딘가 다르죠. 난 아무리 드라마라 해도 어머니처럼 달콤한 동화 같은 생각은 못해요."

일러스트레이터인 사쓰키는 시민회관에서 주최하는 꽃 수채화 교실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학창시절 친구였던 기미코에게서 연락이 오고 그녀가 어렵게 부탁을 하는 바람에 난처해진다.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려면 다른 누군가의 믿음을 배신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세 여자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데, 인물들 간의 관계가 전혀 상관없어 보이듯이 진행되던 이야기가 마지막에 이르러 긴밀하게 연결이 되며 클라이막스로 치닫게 되는 구성이다. 그들 세 여자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주는 꽃사슬은 눈과 달, 꽃을 의미하는 '설월화'이다. 미유키美雪, 사쓰키紗月, 리카梨花, 이렇게 세 명의 주인공의 이름에 눈, 달 꽃을 의미하는 한자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이 거주하는 동네에 긴쓰바를 판매하는 가게 매향당과 야마모토 꽃집이 있는데, 긴쓰바와 꽃은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네모나게 빚은 통팥에 얇은 밀가루 피를 입혀 구운 화과자와 보라색 꽃도라지 다발, 파란색 용담 다발, 그리고 코스모스... 마치 페이지마다 맛있는 냄새가 나고 달콤한 향기가 나는 것만 같은 이야기이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안고 사는 세 여자의 이야기는 일본에서 드라마라도 만들어졌다.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은 영화, 드라마등의 영상매체로도 자주 선보이고 있는데, 이 작품 역시 의문의 남자 K를 중심으로 한 미스터리와 세 명의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사연이 감정적으로 소용돌이를 만들어내어 감동을 주었을 것 같다. 따뜻하지만 평범하지 않고, 잔잔하지만 지루하지 않으니 그동안 미나토 가나에의 다소 쎈 작품을 사랑했던 이들이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완전히 달라진 그녀의 새로운 작품 세계! 다음 작품이 더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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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쉬운 해외직구 - 스마트 맘의 반값 구매
아이포터(강아름) 지음 / 제우미디어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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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브랜드를 국내에서 사는건 어쩐지 손해같아서 이제는 현명한 맘들의 필수가 되어버린 해외 직구~!!
아이용품부터 이것저것 살 것 많은 나에게 완벽하게 도움이 되는는 책을 만났다!
이 책 하나면 해외 직구 완벽 마스터할 수 있다니!! 거기다 배송비할인 쿠폰까지 있어 너무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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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 - 평범한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꾼 50편의 비밀스러운 이야기
에덤 고프닉.조지 도스 그린.캐서린 번스 엮음, 박종근 옮김 / 북폴리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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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스토리텔링의 시대이다. 영화나 소설, 드라마 등과 같이 대본을 바탕으로 만들어지거나 글쓰기를 통해 구축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 콘서트 등의 더 많은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으니 말이다. '스토리텔링'이란 '이야기하기, 만들기, 사건 서술하기 등의 뜻이다. 같은 이야기도 어떻게 스토리를 만들어 풀어내느냐에 따라 전달되는 의미까지 달라질 수 있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소위 악마의 편집으로 불리는 그것 조차 그저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면 반향을 일으키지 못할 만한 것을 한 편의 감동적인 '스토리'로 만들어내어 화제가 되곤 하니 말이다. 이렇게 일상 곳곳에서 사용되는 스토리텔링이라는 단어가 언젠가부터 콘서트의 형식으로 기사화되기 시작했다. 이야기와 음악, 연극 등을 함께 어우러지게 꾸며서 일종의 콘서트를 여는가 하면, <모스>처럼 세계 최대 스토리텔링 콘서트를 통해서 평범한 인물들의 솔직 담백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월스트리트 저널이 "뉴욕에서 가장 강렬하고 신선한 문학을 만날 수 있는 티켓"이라고 호평했던 <모스>는 스토리텔링의 예술성과 기법을 탐구하는 비영리단체로 소설가 조지 그린에 의해 생겨났다. 뉴욕에 있는 그의 집 거실에서 열린 최초의 모스 공연은 지인들과 매혹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추억을 되살려 시작되었는데, 도시 전역으로 확대된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대본 없이 즉석에서 공연을 펼치는 형식으로, 현재까지 3천 편 이상의 이야기들이 관객들에게 들려졌다. 그렇게 이 책에 실린 50편의 이야기들은 평범한 인생을 바꾸기도 하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스러운 고백을 들려주기도 한다. 현실이 소설보다 훨씬 더 가짜 같은 일들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모스의 수많은 이야기들은 고백(Confessional) 이라는 마술을 사용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고 싶어한다.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 시대의 교회와 성당은 들어주는 의무를 이미 오래 전에 저버렸지만, 사람은 남들에게 자신의 사연과 심정을 털어놓고 싶을 때가 있다. 모스는 바로 그런 욕구를 채워준다. 모스에서 듣는 최고의 이야기들은 자기 고백이나 사과와 같은 진솔한 이야기가 상당수를 차지한다.

데이미언 에컬스는 겨우 열여덟 살 때 하루아침에 인생이 산산조각 나고 만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읽고, 아이언 메이든같은 록음악에 빠져 있던 평범한 소년이 어느 순간 사형수 감방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는 교도관들에 의해 18일 동안이나 무자비한 구타를 당하고, 간수들에 의해 굶고, 고문을 당했다. 그것이 수감자들에 의해 알려져 신부님이 교도소장에게 말해 겨우 일반 감옥으로 들어가게 된다. 별다른 증거도 없이, 그저 집 주변의 정신지체아가 경찰의 강요에 의해 증언한 것을 바탕으로 감옥에 갇혔던 그는 몇 번이나 항소를 요청했고, 그렇게 그의 사건이 대중과 언론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결국 그는 감옥에서 나오게 되지만, 그러기까지 무려 18년이라는 시간이 감옥에서 흘러갔다. 지금도 그는 두려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넘어지지 않기 위해 늘 마음을 다잡고, 살아간다. 감옥에서 보낸 18년이라는 시간 동안 싸우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현재 그는 몇 권의 책을 출간하여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매튜 맥고프는 뉴욕 양키스의 열렬한 팬으로 자랐다. 어릴 때부터 매년 아버지를 따라 야구장에 가면서 야구를 즐겼던 그는 어느 날 외야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다 한 소년이 1루 쪽에서 양키스 유니폼을 입고 우익수와 공을 주고받는 모습을 발견한다. 캐치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배트보이를 보며 그는 내가 운동신경이 특출 나진 않지만 쟤보다는 잘하겠다. 라고 생각한다. 결국 그는 구단의 문을 두드려 배트보이 면접을 보게 되고, 그 어떤 연줄도 없이 배트보이 일을 맡은 최초의 소년이 된다. 그가 뉴욕 양키스의 선수를 만나고 배트조정기(?)를 진지하게 찾아 다니는 에피소드는 우스꽝스럽지만 뭉클하다. 소년의 순수한 열정이 허황되어 보이는 꿈이라도 이룰 수 있다는 집념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배트보이:뉴욕 양키스 시대의 도래>라는 책을 썼고, 이후 다른 책들도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모든 에세이는 한 편의 이야기이고 모든 이야기는 한 가지 모토를 가진다. 위대한 이야기꾼 프랭크 오코너가 이 부분을 제대로 표현했다. 그는 훌륭한 이야기는 전부 이런 문장으로 끝나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로 다시는 똑같은 기분을 느낄 수 없었다. " (그는 이 문장을 실제로 딱 한 번 사용했다.) 이것이 이야기의 가치를 가늠하는 기준이라면 이 책의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그 기준에 부합한다. 저 문장을 마지막에 덧붙였을 때 어색한 이야기가 이 책에 거의 없다는 것이다.

트리스탄 짐머슨은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살던 집은 불량주택이어서 불편했고, 낮에는 만화방에서 최저 시급을 받으며 일하고 밤엔 학교에 다녔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일주일간의 봄방학을 기다리는 게 유일한 버팀목이었고, 그것을 위해 6개월 동안 최저 시급으로 번 돈을 모았다. 기말시험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도미노피자를 시켜먹고 밤새도록 게임을 한 뒤, 집을 꾸리고 은행으로 향했다. 마지막 월급을 계좌에 넣기만 하면 집으로 돌아가 푹 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통장에는 마이너스 536달러가 적혀있었고, 입출금 내역을 확인해보니 누군가 자신도 모르게 돈을 인출하고 사용한 것을 알게 된다. 오로지 여섯 달 내내 기다렸던 것을 위해 힘들게 모았던 돈을 말이다. 은행이나 경찰이나 손 놓고 있을 것이 뻔하니 도둑은 잡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그는 직접 범인을 찾기로 결심하고는 수사에 나선다. 마치 탐정이나 경찰이 된 것처럼 말이다. 그는 결국 범인을 잡고 돈을 되찾는다. 그는 그 일주일 동안 허약하고 침울한 미대생이 아니라 진정한 사립 탐정이었다. 이렇게 살면서 가장 비현실적인 일이 나를 강타하게 되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극복해내면 멋진 추억으로 바뀌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노벨상 수상자 폴 너스, 베스트셀러 저자 말콤 글래드웰, 클린턴 대통령의 대변인 조 록하트, 전설적인 래퍼 DMC, 포커 챔피언 애니 듀크 등 유명인들의 경험담도 기상천외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라는 놀라움부터 나라도 그랬을 거다.는 공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의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97년 처음 시작한 모스의 스토리텔링 프로그램은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 진행되고 있을지 모른다.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에 목말라 있는 분들이라면,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당신도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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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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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든 생각은 '이 책 대체 뭐지?'였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한 남자의 일생이 주르륵 펼쳐지는데, 밑줄 긋고 싶을 만큼 화려한 문장이 있는 것도 아닌데,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서사도 없고, 극적인 전개도 없는데, 매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하는 뭔가가 올라온다. 대체 뭔데 이렇게 마음을 움직이는 걸까 싶어 사실 좀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너무도 오랜만에 필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고 한 글자 한 글자 모두 필사를 하면서 머릿속에 다시 새겨두고 싶어졌다. 재미있는 건 이렇게 한 인간의 삶을 담담하게 펼쳐놓는 스토리를 내가 원래 전혀 좋아하지 않는 다는 것. 나는 복잡한 구성과 스릴 넘치는 구성과 화려한 묘사에 매혹되는 편이었는데, 이렇게 소박하고 겸손(?)한 작품에 사로잡히다니 스스로에게 놀랄 정도였다. 처음 책이 발표된 후 오랜 시간 독자들에게 잊혀져 있다 출간 후 50년이 되어서야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냈다고 하는데, 어쩐지 그 이유가 짐작이 된다고 할까. 그럴 만큼의 묵직한 감동을 숨기고 있는 조용한 작품이다. , 뭐라고 더 이 책의 훌륭한 점을 짚어내어 설명하고 싶지만, 사실 온갖 미사여구를 다 갖다 붙여도 이 책을 직접 읽는 것만큼의 감동을 전달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책은 꼭 직접 읽어보아야만 한다. 이제 겨우 1월인데, 어쩌면 이 작품이 내 마음을 흔드는 올해 최고의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이렇게 꾸민 끝에 서재가 서서히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을 때 그는 오래 전부터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운 비밀처럼 마음속 어딘가에 이미지 하나가 묻혀 있었음을 깨달았다. 겉으로는 방의 이미지였지만 사실은 그 자신의 이미지였다. 따라서 그가 서재를 꾸미면서 분명하게 규정하려고 애쓰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인 셈이었다. 그가 책꽂이를 만들기 위해 낡은 판자들을 사포로 문지르자 표면의 거친 느낌이 사라졌다. 낡은 회색 표면이 조각조각 떨어져나가면서 나무 본래의 모습이 겉으로 드러나더니, 마침내 풍요롭고 순수한 질감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이렇게 가구를 수리해서 서재에 배치하는 동안 서서히 모양을 다듬고 있던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가 질서 있는 모습으로 정리하던 것도, 현실 속에 실현하고 있는 것도 그 자신이었다.

생애 처음으로 자신만의 서재를 갖게 된 스토너가 느끼는 이 감정은 그의 성격과 삶을 고스란히 드러내어 보여주는 대목 중의 하나이다. 아내인 이디스가 친정에서 엄청난 돈을 빌려와 집을 구입한 것은 스토너에게 거의 파괴적인 부담이 었다. 그래서 월말이면 항상 돈이 부족했고, 여름학기 강의를 하며 모아둔 예비비가 매달 꾸준히 들었다. 집을 산 첫해에 그는 이디스의 아버지에게 돈을 보내야 하는 날짜를 두 번이나 놓쳐 차갑게 꾸짖는 편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너는 집을 소유하게 된 것이 점점 기뻐져 그것에서 미처 예상치 못했던 위안을 얻게 된다. 그래서 빚과 궁핍이 정기적으로 거듭 압박을 가하는데도 그는 몇 년 동안 행복했다. 아내인 이디스와의 관계는 그가 신혼 시절 꿈꿨던 삶과는 전혀 달랐고, 딸에게 관심이 없는 아내 대신 여전히 그가 딸을 돌보는 일을 대부분 맡고 있었지만 말이다. 살아가는 일이 사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꿈꿔왔던 기대들은 거의 배신당하고, 우리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들은 항상 생의 길목에서 발목을 잡는다.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그의 동료들이 모두 입대를 하고 스토너만 남겨져 지도 교수에게 실망스런 이야기를 들을 때도, 결혼한지 한 달도 안 되어 결혼이 실패라는 걸 깨닫고 1년도 안 돼서 결혼생활이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버릴 때도, 그는 그저 말없이 주어진 상황을 견뎌낸다. 찰스 워커가 영문과 대학원 과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던 싸움이 실패로 끝났을 때도, 로맥스 교수와의 불편한 관계도, 캐서린과의 짧지만 강렬했던 사랑이 끝나갈 때도 그는 그저 묵묵히 시간을 보낸다. 물론 캐서린과의 사랑이 끝나버린 후 생애 처음으로 병을 앓고 급속히 늙어버렸지만 말이다.

 

그레이스는 가끔 동네 아이들과 놀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아버지와 함께 커다란 서재에 앉아 아버지가 채점하거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모습을 지켜볼 때가 많았다. 아이가 아버지에게 말을 걸면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어찌나 조용하고 진지한 대화였는지, 윌리엄 스토너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 부드러움에 감동했다.

이디스가 친정 아버지의 장례식을 위해 떠난 지 일주일이 되었을 때, 스토너는 친정어머니와 2주 더,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지내게 될 것 같다는 편지를 받는다. 그렇게 그녀는 거의 두 달 동안 집을 떠나 있었고, 스토너의 큰 집에는 그와 딸 둘뿐이었다. 일주일도 안 돼서 그는 자신이 몇 년 만에 최고로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레이스는 여섯 번째 생일을 맞았고,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매일 아침 스토너는 아이를 준비시켜 학교에 보냈고, 오후에는 아이가 집에 돌아올 시간에 맞춰 대학에서 돌아왔다. 엄마가 존재하지만 부재하는 가정에서, 아빠와 딸의 관계는 너무도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조용하고 명랑한 그레이스는 제 아비에게 향수에 찬 경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들에서 기쁨을 찾아냈다> 같은 표현들은 그들 부자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이가 위층에서 안전하게 자고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같은 대목들은 스토너의 성품을 짐작케 한다. 그가 처해진 상황은 어찌보면 불행해 보이기도 했는데, 그는 그 속에서 행복과 위안을 느끼며 그저, 살아내고 있었다. 아이의 얼굴에서 내면에서 자라나는 지성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그 모습에서 놀라움과 사랑을 느끼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는 너무 좋았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우연히 군청 직원의 권유로 농업을 배우기 위해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던 스토너. 우연히 영문학개론 수업에서 만나게 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가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고, 그가 영문학도로서 평생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남들처럼 연애하고 결혼하고 교수가 되지만, 결혼생활은 기대했던 것과 많이 달라 아내와는 거의 대화 없이 지내고, 교내에서도 출세나 권력관계에서 떨어져 나와 그저 자신만의 학문을 할 뿐인 그는 가족과 동료들로부터 고립되어 살아간다. 그러니 평범한 주인공이 그의 앞에 나타난 장애물들을 헤치고, 역경을 극복하는 통쾌한 스토리도 없고, 묵직한 가르침을 주려는 현학적인 묘사도 없고, 예상을 뛰어넘는 반전의 전개도 전혀 없다. 그냥 한 인물이 태어나 자라, 누군가를 만나고, 아이를 낳고, 살다가 죽는다.의 스토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네 평범한 삶이 모두 그렇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평범하고 소박 함들이 쌓여서 이루어내는 효과는 엄청나다. 스토너의 이야기는 나의 삶이기도 하고, 당신의 일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제각각 살아가는 모습들은 전부 다를지라도, 이상하게 스토너의 이야기가 마치 나의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졌다. 특히나 감동은 책을 읽는 순간이 아니라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파도처럼 몰려온다. 올해 당신이 꼭 읽어야 할 단 한 권의 책을 묻는다면, 단연코 먼저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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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01-28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옮겨주신 인용문 때문에 엄청 읽고 싶어졌어요, 피오나님. 박스 안의 것과 또 리뷰 중간에 옮기신 문장들도요. 조용하고 아름다운 책인 것 같아요.
:)

피오나 2015-01-28 21:32   좋아요 0 | URL
저도 종종 다락방님이 옮겨 적으신 글들 때문에 책을 사곤했어요 ㅋㅋ 이 책 너무너무 좋아요! 다락방님도 꼬옥 만나보시길..다락방님이 쓰신 리뷰도 궁금해지는 책입니다 ㅎㅎ
 
강남 1970
유하 원작, 이언 각색 / 비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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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은 유하 감독의 10년에 걸친 '거리 3부작'의 완결편이라 해서 개봉 전부터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감독의 말에 의하면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 모두 강남을 무대로 하고 있기에 엄밀하게 말하면 '강남 삼부작'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 김래원, 이민호라는 두 명의 배우가 만나는 작품이라 그 기대치가 더 컸던 것 같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밑바닥 인생부터 시작해서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겁 없는 청춘 '종대'와 조직의 보스가 되기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는 건달 '용기' 두 사람은 고아 출신으로 강남 땅을 둘러싼 이권다툼의 최전선에서 정치권력에 의해 목숨 걸고 싸우게 되는 역할이다. 책을 읽는 내내 각각의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들의 이미지가 겹쳐져서 더욱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것 같다. 그만큼 이 책은 마치 시나리오라도 읽는 것처럼 지문의 수식어가 길지 않고, 간결해 주요 사건들이 스피디하게 전개되는 것이 장점이다. 그러니까 배우들이 읽는 책처럼 이어지는 대화들로 상황 전개가 매우 빠르다는 것이다. 시인이기도 한 유하 감독 원작이라 인물의 심리를 보여주는 대목들에서 감정적인 부분도 가끔 있어 영화에서는 만날 수 없는 재미도 있다.

 

 

 

목구멍에서 왈칵 솟는 어떤 기운에 종대는 말문이 막히고 만다. 그 감정이 행여 얼굴에 드러날까 어금니를 악물어본다. 이런 것이 가족인가. 가족의 정이란 이런 것인가. 내게도, 나 같은 놈에게도 이런 것들이 허락된단 말인가.

압구정동, 청담동을 비롯하여 '강남'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부유하고, 현대적이고, 고급스럽다를 넘어서 사치스럽고, 향락적이고, 과시스럽다는 느낌으로 대다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런 강남도 1970년대에는 허허벌판, 한적한 시골 같은 풍경이었다. 정부는 과밀화되어 가고 있는 구 시가지의 인구를 한강 이남으로 분산하고 서울의 균형적인 발전을 위해 강남개발을 하려고 영동지구 개발계획을 발표했다. 당시에는 강남이라는 지명이 없었고 영동지구라고 불렸다 한다. 강남개발로 인한 부동산 붐 속에서 이 지역은 고소득층들을 위한 소비 공간으로 발전했고, 강북 다수의 소비관련 업종들이 강남 일대로 이전하게 된다. 막 개발이 시작될 즈음의 강남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논현동과 삼성동에 지어진 차관 아파트, 삼성동 경기고등학교 앞쪽 논밭, 멀리 보이는 잠실학생체육관, 압구정 현대 아파트 근처 과수원과 밭에서 소를 몰고 있는 풍경, 강남역 지하철 공사가 한창이던 강남역 사거리 등 개발초기 영동지구의 모습은 매우 이색적이라 기억에 오래 남았다. 유하 감독의 <강남 1970>은 바로 이 강 남땅의 개발이 막 시작되던 즈음의 1970년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아주공갈 백용기, 허풍은 여전하구만."

"진짜야 새끼야. 나 예전의 빽용기 아니라고."

"알았어, 나중에 갈게. 지금은 강 사장님 모시고 있잖아."

"잘 생각해라. 군인하고 건달은 줄을 잘 서야 돼."

이야기는 매우 간단하게 정리되지만, 여러 이권 다툼을 하는 인물들의 관계는 꽤 얽혀 있어 복잡하게 흘러간다. 고아로 자라 형제처럼 지내는 종대와 용기는 넝마주이 생활을 하며 간신히 살아가지만, 그들이 거주하던 무허가 판자촌을 철거하러 온 용역건달들에 맞서다 우연히 조폭이 개입된 야당 전당대회 훼방 작전에 얽히게 된다. 세 개의 파가 연합한 건달들의 집단난투극 속에서 맞고는 못 사는 성격의 종대는 누군가에게 얻어맞고 눈이 뒤집혀 그들과 같이 싸움을 시작하고, 용기는 급하게 먹은 우유에 탈이나 화장실에 갔다 그곳에서 불시에 얻어맞고는 정신을 잃는 바람에 그들을 고용한 파가 아닌 다른 파의 차에 태워지게 된다. 그리고 그 아주 사소한 우연이 그들 두 사람을 엇갈린 운명 속으로 갈라놓게 된다. 이후 종대는 조직에서 나온 길수를 아버지처럼 여기며 그의 딸 선혜와 함께 세탁소에서 살아가며 길수 몰래 조폭 생활을 하고, 용기는 명동파의중간보스가 되어 있다. 종대는 복부인 민 마담의 일을 해결해주며 돈을 빌리다 강남 개발의 이권다툼에 뛰어 들게 되고, 그 와중에 용기와 재회하게 된다. 이들 두 사람은 다른 조직에 있음에도 다시 손을 맞잡게 되고 이후 이야기는 더욱 복잡하고, 치밀하게 전개된다. 강남 개발은 조폭을 넘어 정치권이 연계되어 있던 터라 스케일이 매우 큰 이야기이다.

어떤 영화 리뷰에서는 이 작품이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1972) 한국판을 만들려는 작가의 야심이라고 소개가 되어 있더라. 아직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책으로 읽어봤을 때는 스케일 상 충분히 가능하지 않나 싶었다. 물론 <대부>가 단순히 스토리만으로 따라 잡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말이다. 영화로 보면 될 이야기를 굳이 책으로 읽을 필요가 있나 싶은 이들이라면, 캐릭터의 심리에 주목해보자. 스크린에서 만나게 될 배우들의 내면은 우리가 직접 볼 수 없으니 말이다. 책에서는 종대와 용기, 두 인물의 속마음, 심리 등이 어느 정도 드러나 있어 그들을 이해하는데 꽤 도움이 된다. 그리고 책의 후반부에 실려 있는 제작발표회 현장 스케치에서도 작품에 대해 직접 소개하는 감독, 배우들의 말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 같다. 그러니 당신이 혹시 이민호, 김래원 배우의 팬이라면, 혹은 유하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면, 이 책도 함께 읽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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