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홀리데이 (초대형 나하 일러스트 아트맵) - 내 생애 최고의 휴가 최고의 휴가를 위한 여행 파우치 홀리데이 시리즈 16
인페인터글로벌 지음 / 꿈의지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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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키나와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생뚱 맞게도 '야구'때문이다. 매년 야구 시즌이 끝나면 선수들이 전지훈련을 떠나는 나라가 바로 오키나와이다. 겨울에도 새로운 시즌을 맞이하여 연습을 해야 하는 선수들이다 보니 따뜻한 나라로 가는데, 가장 많은 팀들이 찾는 곳 중의 하나가 오키나와이다. 게다가 아시아의 하와이로 불리는 곳이라 아이와 함께 가족 여행으로 가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곳이기도 하다. 아이 돌에 맞춰 아이와 함께 가는 첫 해외 여행을 계획 중이다. 태교 여행으로 괌과 제주도를 다녀왔었는데, 아무래도 이렇게 따뜻한 휴양지이고, 비행 시간이 길지 않은 곳이 좋을 것 같아 오키나와가 일 순위가 되었다. 물론 아이와 함께 가려면 생각보다 조심해야 할 부분들이 많이 있겠지만, 괌에 다녀오고 보니 안 갔으면 후회했을 정도로 너무나도 멋지고 소중한 시간을 선물 받게 되니 자꾸만 해외로 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두 돌이 되기 전까지는 보통 항공료의 10%와 세금만 부담하면 비행기를 탈 수 있는데다 호텔 숙박료, 식비도 따로 들지 않으니 말이다. 물론 여행이 마냥 즐기는 시간이 아니라 육아의 연장이 되긴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고, 느끼게 해줄 수 있고, 육아에 지친 나에게도 힐링이 될 것 같아 떠나보려고 한다.

오키나와는 비행 시간이 짧아서 좋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섬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여유로움과 따뜻함이 배어 있어서 더욱 흥미로운 곳이다. 너무도 맑아서 속이 다 보이는 하늘빛 바다를 통해 태평양 여기저기를 맛볼 수 있는 것도 너무 좋고, 겨울에도 평균 기온이 18도일 정도로 따뜻한 것도 마음에 든다. 여행을 다녀온 지인의 말에 따르면 낮에는 관광지 이외의 지역에서는 사람을 마주치기 쉽지 않을 정도로 한산하다고 하는데, 그런 느긋한 풍경 또한 아이와 함께 하는 가족 여행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숲 곳곳에 캠핑 장이 잘 되어 있는 것도 구미를 당기게 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이 책에서는 오키나와 중심 도시 나하, 해안도로의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남부, 미군정의 흔적과 역사적 변화를 담고 있는 중부, 아열대 숲의 대자연을 느낄 수 있는 북부, 그리고 가장 오키나와스러운 모습을 간직한 미야코지마 섬과 야에야마 제도까지 오키나와의 모든 곳이 샅샅이 분석되고, 소개되어 있다. 구경해야 할 것들, 직접 체험해야 할 것들, 맛있는 먹거리와 잘 곳, 쇼핑할 것 등에 이르기까지 여행에 필요한 모든 리스트가 총망라되어 있는데, 정보들이 단순히 진열만 되어 있는 게 아니라 적재적소에 잘 배치가 되어 있어 한 눈에 들어오는 장점이 있다. 오키나와에 가면 꼭 해봐야 할 것들의 리스트 중에는 스쿠버다이빙과 스노쿨링, 자전거 여행, 해안선을 따라 즐기는 드라이빙, 전통거리 탐방, 트레킹, 선탠, 맛집 투어 등이 있는데 어떤 사진을 보아도 한적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이라 여행을 준비하는 마음을 더욱 설레게 만들어 준다. 꼭 먹어야 할 리스트 중에는 오키나와 흑설탕을 뿌린 팥빙수와 거품 가득한 부쿠부쿠차, 그리고 자색고구마로 만든 베니이모 타르트와 이시가키 소고기가 눈길을 끈다. 역시 여행지에 가면 소문난 먹거리는 지나치지 않아야 하는 법이다.

 

아이와 함께 떠나는 45일 가족 여행 일정도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어 나중에 여행 일정을 짤 때 참고가 될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아이 없이 45일 리조트 휴식 여행이나 알찬 일정으로 가득한 45일 싱글 여행 일정으로 떠나고 싶기도 했지만, 그런 욕심은 살짝 버려둬야 한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항공 스케줄과 오키나와 현지 교통 이용 방법, 섬 투어 프로그램까지 소개되어 있어 현지에 가서 들고 다니면서 찾아 보기도 좋을 것 같았다. 물론 컴팩트 한 크기와 어디서도 눈에 뛸 만한 상큼한 표지 디자인도 가지고 다니고 싶은 마음이 잔뜩 들게 만들기도 한다.

얼마 전에 배우 고형정씨가 오키나와로 여행을 다녀와서 오키나와 여행 에세이를 책으로 내었는데, 슬쩍 보니 사람들이 휴식이 필요할 때 왜 오키나와를 찾는지 짐작할 만 했다. 이상하게 일본임에도 일본의 정취가 가장 느껴지지 않는 곳이기도 한데, 오키나와가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곳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을 다 보고 나니 한낮의 더위 속에서 차가운 오리온 맥주와 금방 튀겨낸 감자칩을 먹으면서 해변가를 거닐고, 날이 지면 해안 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하고 싶어졌다. 당장이라도 공항으로 달려가고 싶게 만드는 여행 가이드 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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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릴리언스
마커스 세이키 지음, 정대단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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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스 박사는 1980년 이래 특수 능력을 가진 아이들이 100명 중 한 명 꼴로 태어났다고 추산했다. 이런 아이들은 모든 면에서 통계적인 정상 범위에 속했다. 영리하거나 그렇지 않기도 하고, 사교적이거나 그렇지 않기도 했다. 어떤 분야에 재능이 있거나 없기도 했다. , 경이로운 능력만 제외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이전 세대의 인류와 완벽하게 똑같았다.

가끔 드물게 초인적인 능력을 타고난 아이들은 대체로 어떤 식으로든 장애가 있었다. 서번트 증후군이라고 해서 사회성이 떨어지고 의사 소통 능력이 낮으며 반복적인 행동을 보이는 등의 장애가 있으나 암산, 퍼즐이나 음악적인 부분 등 특정한 부분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일컫는다. 그런데 '브릴리언트'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80년을 기점으로 이처럼 특별한 능력을 가진 새로운 인류 '브릴리언트'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30여 년 후, 그들이 각계에서 두각을 보이며 결국 그들로 인해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전체 인구의 1퍼센트에 조금 못 미치는 숫자가 브릴리언트로 태어난다. 대다수는 4급에서 5급의 능력으로 달려 외우기나 속독, 사진 같은 기억력, 높은 자시 숫자의 암산 등 재주이지만 문제가 될 만한 소지는 적었지만, 그러다 주식 시장의 움직임을 명백하게 볼 수 있는 1급들이 나타났고, 결국 그 한 명으로 인해 정부가 뉴욕 증권 거래소를 폐쇄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대부 업체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고, 회사들은 도산하게 되자 보통 인류인 노멀들이 브릴리언트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한때는 호기심의 대상에 불과하던 존재가 이제는 심각한 위협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당신은 미래를 막을 수 없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편을 고르는 것뿐이야."

그렇게 평범한 인간인 '노멀'과 돌연변이인 '브릴리언트'들이 공존하는 세상이 어쩌면 우리의 근 미래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만큼 마커스 세이키는 리얼하게 이야기를 구축해서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인 쿠퍼 또한 브릴리언트로 공정국의 분석대응부서, DAR에서 테러리스트들을 막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이자 악명 높은 테러리스트인 존 스미스와 일하는 알렉스 바스케즈를 쫓고 있다. 그의 능력은 보디랭귀지에 최적화되어 있는 패턴 인식이다. 아흐레 째 만에 겨우 바스케즈를 만나지만 대척 상황에서 그녀는 두 손을 주머니 깊숙이 넣은 채 옥상에서 머리부터 뛰어내린다. 잡혀가 집중 심문을 받기보다는 입을 다물겠다는 이야기이다. 시작하자마자 매우 강렬한 장면을 보여 주며 시선을 잡아 끈다. 영화로 만들어지더라도 관객들을 단 한방에 주목시킬 수 있을 만큼의 매력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그러니 혹시라도 당신이 서점에서 이 책을 집어들게 된다면, 당신은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만큼 멋진 오프닝이다.

  

 

쿠퍼와 DAR의 절대적인 목표는 악명 높은 테러리스트인 존 스미스이다. 그가 저지른 모노클 학살은 상원의원을 포함해 73명을 살해한 전무후무한 테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후에 여기저기서 발생한 폭탄 테러 역시 그의 수하들이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기에 그의 행방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지만, 공정국은 번번히 그를 놓치고, 그의 계획에 당하고 만다. "놈은 소시오 패스일지도 모르지만, 동시에 체스의 마스터야. 전략에 있어서는 아인슈타인이나 마찬가지지." 존 스미스는 1급 브릴리언트였고, 전략에 능한 리더였다. 쿠퍼의 능력은 패턴 인식이다. 상대방이 지금 어디로 펀치를 날리려고 하는지 등의 구체적인 의도를 읽어내어 개인적인 움직임과 패턴을 파악해내는 것이다. 게다가 쿠퍼는 이 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기관의 최정예 요원이었다. 막대한 가용 자원과 비밀 정보에 접근이 가능했고, 전화를 감청하거나 경찰을 동원할 수도 있었다. 일단 어떤 돌연변이가 타깃으로 지정되면, 쿠퍼는 법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사살할 권한이 있었고 실제로 열세 차례나 그렇게 했다. 한마디로 쿠퍼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막강한 힘을 휘두를 수 있었다. 문제는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인 존 스미스,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는 것.

"그래, 그 친구의 어린 시절은 끔찍했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살짜리 여자아이를 쏴도 되는 자격이 생기는 건 아니지. 내 말이 틀렸나?"

다른 브릴리언트들은 쿠퍼 또한 능력자이면서 왜 DAR을 위해 일하는지 의아해한다. DAR은 브릴리언트에 대한 실험과 관찰, 연구를 수행하는 부서로 그들 돌연변이의 절대 적이었으니 말이다. 쿠퍼는 자신의 아이들이 돌연변이와 정상인이 공존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이 작품의 진정한 매력은 바로 이런 부분에서 빛을 발한다. 캐릭터가 생생하게 살아있으며, 초인적인 능력을 가졌지만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순간 몇 년 전에 케이트가 3.1킬로그램을 갓 넘는 무력한 모습으로 태어났던 날을, 크리스마스 불빛을 보고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를 달래느라 잠 못 이루던 밤을 생각했다. 그 모든 날들. 그 모든 시간. 아버지가 된다는 일의 그 모든 고통과 기쁨.

..........결국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아이들을 위해서였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에 했던 일조차, 나탈리를 만나기도 전에 했던 일조차도. 그것은 쿠퍼가 부모가 되기 전에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고, 부모가 된 이후로는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진실이었다.

쿠퍼에게는 전처인 나탈리와 함께 살고 있는 아홉 살 난 아들 토드와 네 살인 딸 케이트가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케이트에게 이상한 징후가 발견된다. 인형을 알파벳 순으로 나란히 놓고, 동화책 표지를 스펙트럼에 따라 색깔 별로 꽂는 것이다. 쿠퍼는 딸아이가 돌연변이, 그것도 1급이라는 것을 직감한다. 아카데미에서는 능력자들이 서로 단결하게 내버려두지 않기 위해, 어릴 때부터 서로 신뢰하지 못하게 가르친다. 그러니까 케이트가 테스트를 받게 되어 1급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그래서 아카데미에 가게 되면 다시는 가족들을 만날 수 없게 된다. 게다가 쿠퍼는 아카데미가 실제로 어떤 곳인지, 개인에게 도청 장치를 심고, 불신과 두려움을 유도하는 곳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절대 케이트가 테스트를 받지 못하게 해야 했다. 그리고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된다. 부모가 아이를 위해 어떤 일까지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극단적인 선택을 말이다.

마커스 세이키의 데뷔작인 <칼날은 스스로를 상처 입힌다> <대니얼 헤이스 두 번 죽다>를 읽었을 때만 해도 SF 스릴러로 돌아올지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매우 궁금했던 작품이다. 게다가 표지 이미지가 압도적이었다. 특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인류를 암시하는, 역동적인 이미지가 굉장히 멋지다. 원서의 표지들은 다소 밋밋한데, 국내 버전 표지는 굉장하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표지가 얼마나 멋진지 한번 더 느낄 수 있었다. 이 작품은 3부작으로 구상하고 있는 시리즈의 첫 번째라고 하며, 「인터스텔라」, 「다크 나이트」를 만든 블록버스터 전문 제작사 레전더리 픽처스에서 영화로 만들 예정이라고 한다.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읽으면서 단 한 페이지도 지루할 틈이 없었고, 모든 상황마다 머릿속에서 장면들이 생생하게 재연되었으니 영화사에서 판권을 노릴 수밖에 없는 작품이기도 하다. 돌연변이라는 신 인류에 대한 설정부터 그들이 평범한 인간들과 어떻게 부딪치는지, 그 속에서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면서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들이 벌어지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쿠퍼를 비롯해 일명 벽을 통과해 걷는 여자 섀넌, 그리고 DAR의 동료 바비 퀸, 전처인 나탈리, 국장 드루 피터스, 라이벌 로저 디킨슨.. 등등 매력적인 캐릭터의 향연도 영화화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게다가 이런 캐릭터들을 가지고 시리즈라니, 벌써부터 다음 시리즈가 손꼽아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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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스트리트 푸드 - 다채롭고 입맛 당기는 요리 이야기 스트리트 푸드 시리즈
톰 반덴베르게 & 재클린 구슨스 & 루크 시스 지음, 유연숙 옮김 / 도도(도서출판)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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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가게 되면 항상 스트리프 푸드를 꼭 먹어보곤 한다. 각 나라의 고급 레스토랑에서보다 길거리 음식에서 훨씬 더 지역적인 특색을 살린 음식을 맛볼 수 있으니 말이다. 특히나 뉴욕은 미국의 가장 큰 도시로 이민자들이 가장 많은 걸로 유명해 세계 각국의 음식을 모두 만날 수 있으니 더할 것이다. 그들은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에서 먹던 음식을 그대로 들여와 자부심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음식을 선보인다. 우리나라의 노점상들에서도 특색 있는 음식들을 만날 수 있다는 걸 떠올려본다면, 이들은 그것보다 한 단계 더 활발하게 움직인다. 가판대나 카트, 트럭들이 빠르게 위치를 이동하고 시기에 따라 영업장소가 아예 바뀌기도 한다. 소셜 미디어는 푸드 트럭이 오늘 어디에서 음식을 파는지 알려주는 역할까지도 한다. 최근에 개봉했던 영화 <아메리칸 셰프> 에서도 그런 스트리트 푸드의 매력이 돋보였었다. 영화 속에서 일류 레스토랑의 셰프가 레스토랑 오너와의 다툼 후에 쿠바 샌드위치 푸드 트럭에 도전해서 어린 아들과 미국 전역을 일주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실시간 트윗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미국에선 소셜 미디어가 푸드 트럭의 위치도 알려주는 구나 싶어 새삼 소셜미디어의 힘도 느껴지고 말이다.

뉴욕에서는 스트리트 푸드가 성황을 이루고 있다. 맨해튼에서 정장을 입고 푸드 트럭 앞에 줄을 선 사람들부터 퀸스나 브롱크스 지역의 남미 사람이 운영하는 가판대에서 음식을 사먹는 공장 근로자 그리고 흑인들의 전통 음식인 소울 푸드를 찾는 미식가들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거리에서 음식을 즐긴다.

 

뉴욕의 스트리트 푸드는 핫독, 케밥, 프레첼 등 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책 속에 실린 무려 60가지나 되는 음식들을 보니 내가 알고 있던 건 너무 한정적이었구나 싶었다.

재미있는 건 이 책에 실린 음식들의 레시피가 저자가 직접 밝혀낸 것들이라는 사실이다. 스트리트 푸드 노점상들이 생계와 직결된 조리법을 쉽게 공개할 리가 없지 않은가. 대대로 전해 내려온 조리법이 노점상의 수입으로 직결되는 경우도 많고 말이다. 그들이 직접 찾아내어, 먹어보고, 요리를 해서 레시피를 알아낸 60가지 요리들은 집에서도 쉽게 따라해 볼 만한 것들이 많아 활용도도 높을 것 같았다. 해외에 한 번도 나가보지 않았던 어린 시절,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이 바로 뉴욕이었다. 당시 패션 디자인을 공부하던 학생들의 로망이 뉴욕과 밀라노로 대부분 나뉘었는데, 나는 스타 벅스 컵을 들고 활기차게 출근하는 뉴욕 사람들의 당당함이 좋아 보이기도 했고, 다양한 인종들이 매끄럽게 섞여 있는 문화도 경험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꽤 시간이 흘렀지만 아쉽게도 아직 뉴욕에 가보지는 못했던 터라,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뉴욕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흠뻑 들었다.

 

뉴욕에서는 평일 정오 무렵마다 조직적인 혼돈 사태가 발생한다. 그 시각만 되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배고픔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음식이 필요해! 지금 당장!' 매일 대규모 군단이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려고 준비 태세를 갖춘다. 최고급 레스토랑, 오래 전부터 굳건하게 자리를 지켜온 작은 식당, 가지각색의 샐러드 바나 샌드위치 바, 유명한 노점상과 고급 푸드 트럭까지. 관광객과 이민자 그리고 나처럼 경험이 풍부한 뉴요커도 점심시간에 움직이는 군중의 규모와 그들의 신속한 움직임에 혀를 내두른다. 더불어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음식 선택의 폭이 어마어마하게 넓다는 점에도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우리 나라 직장인들의 점심 풍경과도 다르지 않는 뉴욕의 정오 무렵 풍경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더 대규모라는 점이고, 먹고 싶은 음식이 무엇이든 간에 모두 뉴욕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매일매일 비슷한 음식을 먹는데 지쳐 뭐 좀 새로운 음식 없나 하고 점심시간 마다 동료들과 궁리를 해야 하는 우리네 직장인들에 비해선 선택의 폭이 엄청나게 넓은 것이다.

 

저자들이 소개하는 뉴욕 곳곳의 스트리트 푸드 중에서도 가장 탐나는 것은 레드훅 구장의 푸드 트럭 음식 축제이다. 5~6달러만 지불하면 하루 종일 배고프지 않을 정도로 푸짐하게 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 식사를 한 후에는 자전거를 타고 레드훅 해안과 낡은 항구 시설, 그리고 19세기에 지은 창고를 따라 달리는 산책까지. 이어지는 반 브런트 거리에 있는 랍스터 파운드의 랍스터 롤과 키 라임 파이가 있는 디저트 가게들까지.. 완벽한 하루 일정이 아닐 수 없었다. "내 생각에 뉴욕에서 화창한 일요일을 보내기에 이보다 저 좋은 코스는 없다"는 저자의 의견처럼 언젠가 뉴욕에 가게 되면 꼭 해보고 싶은 푸드 투어이다.

특히나 뉴욕의 길거리 노점들은 수많은 레스토랑 업장 보다 오히려 더 깨끗하다는 점도 인상 깊었다. 재료가 신선하지 않다면 요리사는 고객에게 그 사실을 감출 방법이 없는 것이 노점상이기도 하고, 가판대 내부 공간이 좁아서 보관할 자리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재료가 신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차이나타운에 있는 한 중국인 노점상은 겨우 4시에 재료가 다 떨어졌다며 조리 도구들을 정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흔히들 제3세계 국가에서 온 이민자들이 만든 스트리트 푸드는 위생적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길거리에서 음식을 많이 먹어본 뉴요커들은 노점상의 위생 상태가 얼마나 우수한지 잘 알고 있다고 한다. 물론 이들 길거리 노점상들도 주차 금지 규정 덕분에 매일 고양이와 쥐처럼 경찰과 쫓고 쫓기는 게임을 하고 있다고 하니 우리 나라의 노점상들과 실상이 그다지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너무도 다양하고,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은 위생뿐만 아니라 그 레시피에서도 탐나는 것들이 많아 어쩐지 뉴욕의 노점상들이 국내의 그것보다 멋져 보이긴 한다. 불고기, 김치, 파전까지.. 한국적인 색채가 섞인 음식들도 그렇고, 오코노미야키, 랍스터 롤, 키 라임 파이, 사천식 닭 볶음, 그리스 식 샐러드도 군침이 도는 메뉴 중의 하나였다. 이 책은 뉴욕의 구석구석을 소개하는 여행 가이드이자, 맛집 투어 북이자 훌륭한 레시피 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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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 -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외 30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2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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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를 알게 된 건 순전히 김연수 작가 때문이었다. 그가 어디선가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라는 단편이 10개 실린 책을 추천했고, 제목에서 오는 끌림 때문에 나는 단번에 그 책을 구입해서 읽었다. 그는 플래너리 오코너의 그림자가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들에 드리워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 그녀의 단편들이 궁금했다고 한다. . 과연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그녀의 단편 10편을 읽고 나서 들었고, 그러다 보니 무려 서른 한편의 작품이 실려 있는 현대문학의 세계문학단편선 시리즈는 어쩐지 꼭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된 것이다. 오코너는 처음에는 자신도 무슨 이야기를 쓰는지 모른다는 점에서 이야기란 발견의 서사라고 말했는데, 그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올해에야 플래너리 오코너를 발견했다고 김연수 작가가 소개하는 글 역시 동감한다. 그동안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던 이 작가는 작년에 처음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소개되었는데, (이것 또한 김연수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뒤늦은 발견은, 그만큼 감동적이었다고 할까. 플래너리 오코너는 25세에 홍반성 낭창이라는 불치병에 걸려 오랜 세월 투병 생활을 한 끝에 결국 3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장편소설 2편과 단편소설 32, 여러 권의 평론집과 에세이를 남겼는데, 단편만 쓰던 작가는 아니었지만 분량 면에서 단편이 그녀의 주 장르인 셈이긴 하다. 작가의 길에 막 들어선 20대 중반 무렵 이미 자신이 어떤 글을 써 나갈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그녀는 이후 12년만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잠시도 흔들리지 않고 글을 썼고, 불과 네 권의 책으로 문학사에 한 획을 긋는다.

처음 만난 그녀의 작품인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이번 소설집에서는 '좋은 사람은 드물다'라고 번역) 는 짧지만 강렬하게 임팩트를 남겨주었던 기억이 난다. 뭐랄까. 평범보다는 한 쪽 방향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는 인물들이 잔뜩 등장해서 읽고 나서 '여운'보다는 '불편함'이 잔뜩 남는다고 할까. 출판사 리뷰에 조이스 캐롤 오츠가 그녀에 대해 평한 문구가 실려 있는데, 마치 조이스 캐롤 오츠의 작품을 읽고 나면 섬뜩하고 기괴한 그림이 그려지는 것처럼 다소의 그로테스크함마저 느껴졌다. 일상을 배경으로 보여주는 그로테스크함이라니. 놀랍기만 하다. 오랜 투병 생활을 했고, 가톨릭계 집안에서 자랐던 것이 작품에 정서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거의 모든 작품에  미국 남부의 위선적인 삶과 기독교적인 삶에 대한 주제가 변주되어 있는데, 너무나도 차갑고, 냉정한 시선으로 신랄하게 인물들을 그려내고 있기에 가끔은 유머마저도 섬뜩하게 느껴진다. 작품 속 인물들은 종종 미신이나 종교 때문에 편견으로 누군가를 대하거나 폭력을 행사한다. 어디선가 <종교와 법, 윤리가 삶의 테두리가 되어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소위지성인들의 환상은 플래너리 오코너의 작품 안에서 완벽하게 깨진다>라는 설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녀의 단편들을 단적으로 설명해주는 문구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대부분의 작품 속 상황이 블랙유머처럼 그려지지만, 그 속에는 항상 미국 남부인들의 위선적인 삶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작가의 예리한 시선을 잃지 않는다.

"세상이 이렇게 엉망인데 우리가 무언가에 기뻐할 수 있다는 게 기적이야. 바닥이 꼭대기에 갔다니까." 어머니가 말했다.

줄리언은 한숨 쉬었다.

"물론 자기 위치를 아는 사람은 어딜 가든 상관없지만." 어머니가 말했다.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중에서

 

줄리언은 의사의 권유에 따라 혈압이 높은 어머니가 체중을 감량할 수 있도록 시내 YMCA의 감량 수업에 모시고 다닌다. 그의 어머니는 버스에 인종차별이 없어졌기 때문에 혼자서 밤에 버스를 타지 않으려고 할 정도로, 여전히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아들에게 네 증조할아버지는 이 주의 주지사였고, 노예가 200명인 대 농장주였다며, 자신은 누구에게나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강조한다. 아들은 사람의 위치는 한 세대밖에 효과가 없다며, 어머니는 지금 자신의 처지도 위치도 전혀 모른다고 거칠게 대꾸하지만 어머니의 귀에 들릴 리 없다. 그는 어머니가 자기 환상 세계의 법칙에 따라 살며, 그 바깥에 발을 내딛는 걸 본 적이 없다. 게다가 그 법칙은 아들을 위해 당신을 희생하는 것이었는데, 그러기 전에 먼저 사태를 엉망으로 만들어서 그럴 필요를 만드는 거였다. 그들 두 모자가 버스를 타고 가면서 흑인 (책에서는 깜둥이로 표기되는) 들을 만나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은 내가 마치 줄리언이 된 듯 낯뜨거운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진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장점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하지만 날카로운 시선이 아닌가 싶다.

"저 사람은 어제 우리 집에 성경 책을 팔러 온 그 착하고 멍청한 젊은이 같은걸." 호프웰 부인이 눈을 찌푸리고 말했다. "저쪽에 사는 깜둥이들한테 성경을 팔러 갔던 모양이야. 순진하기도 하지. 그래도 우리 모두가 저렇게 순진하다면 세상이 훨씬 좋아질 거야."

프리먼 부인이 앞쪽을 이리저리 찾다가 그가 언덕 아래로 사라지는 모습을 간신히 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땅에 박힌 냄새 고약한 양파 싹으로 관심을 돌리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순진하게 사는 게 불가능해요. 나는 일단 불가능해요."

                                                                                          -좋은 시골 사람들 중에서

 

"내 다리 내놔!" 라는 공포물에서나 등장할 법한 대사가 나오는 이 스토리에서는 한 청년이 소녀를 유혹해서 그녀의 다리를 훔쳐간다는 스토리이다. 다리를 훔친다는 게 무슨 말이냐 싶겠지만, 그녀는 열살 때 사냥터에서 총기 사고로 다리 한쪽을 잃어 의족을 하고 있다. 호프웰 부인은 자신의 딸아이가 춤 한 번 취 보지 못하고 평범한 즐거움도 누리지 못하는 서른두 살의 뚱뚱한 처녀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다. 부인에게는 딸이 아직도 아이처럼만 느껴지는 이유이다. 호프웰 부인이 성경 책을 팔러 온 훌륭한 젊은이라고 생각했던 그가 자신의 딸을 유혹해서 그녀의 의족에 관심을 가지고, 그녀를 농락하게 된다는 것이 주요 스토리이다. 키스를 하고, 사랑한다고 달콤한 말을 하며 사랑을 증명해 보이라고 그녀의 의족을 보여달라고 하더니, 의족을 어떻게 떼고 붙이는지 보여달라더니 결국 다리를 도로 붙여주지 않고 그걸 가지고 가버리는 것이다. "너는 그냥 좋은 시골 사람 아니었어?"라고 탄식하는 조이의 상황과 같은 단어지만 다른 의미로 읽히는 호프웰 부인의 "좋은 시골 사람은 세상의 소금이에요!"라고 흥분하던 상황은 기묘하게 대치되어 읽힌다. 딸을 농락하고 가는 그의 모습을 멀리서 보던 부인은 "그래도 우리 모두가 저렇게 순진하다면 세상이 훨씬 좋아질 거야." 라고 말한다. 세상은 그렇게 겉으로 보이는 것과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자신이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수많은 진실과 거짓말로 뒤덮여 있는 것이다.

플래너리 오코너는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어두운 면을 포착해 감정을 폭발시키고, 그들을 망가뜨린다. 쉽게 말해 우리 모두 사용하고 있는 일상의 가면 뒤에 감춰진 면을 끄집어내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너무나도 정상적으로 보이는 인물의 속마음이 실제로 어떤지 알게 된다면 세상은 정말 지옥이 될지도 모르겠다. 진실은 때로 모른 척 해야 할 순간들이 생기게 마련이니까. 그래서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들은 대부분 쉽게 읽히지만, 수월하게 넘기긴 힘들다.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마주하게 하고, 불편하게 만드니 말이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독선으로 가득 찬 인물들의 위선이 벗겨지는 순간에 통쾌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눈을 감고 살아가라 말하는 세상이지만, 그녀의 작품을 읽고 있으면 두 눈 부릅뜨고 세상의 숨겨진 이면을 직시하고 싶어지곤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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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2-14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현명한 피>라는 소설만 나오면 되겠어요. 오코너의 대표작이라던데 과연 어느 출판사가 낼 건지 궁금하군요. ^^

피오나 2015-02-14 22:05   좋아요 0 | URL
저도 <현명한 피> 궁금해요. 단편을 많이 쓴 작가의 장편이라 더 궁금하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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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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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날그날 겪는 모든 일에는 현재의 불확실성이 그 흔적을 남긴다. 그 시절 마르가레트는 길 모퉁이 하나를 돌 때마다 혹여나 부아야발과 마주치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보스망스는 정작 자신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적의와 경멸에 가득 차 그를 쫓아다니며 그가 혹 거리에서 가슴에 총탄을 맞고 죽는대도 서슴없이 그의 주머니를 뒤질 그 심란한 커플을 만나게 될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멀찍이 떨어져 세월이라는 거리를 두고 보면 우리가 현재 느끼는 불확실과 근심은 사라진다. 마치 라디오에서 나오는 깨끗한 음악을 못 듣게 방해하던 전파 잡음이 사라지듯. 그렇다, 지금에 와서 그때를 생각하면 꿈속과 꼭 같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기억은 그다지 많이 남아 있지 않은데, 그 중에서도 이상하게 마음 한 켠에 걸려 있는 기억이 있다. 유치원이 끝날 시간쯤 당시에 내가 사는 아파트 입구에 항상 서 있는 남자 아이가 있었는데, 나는 그 아이가 무섭고 싫어 집에 바로 가지 못하고 동네를 빙빙 둘러서 다니곤 했었다. 나를 기다리는 그 아이가 그때 뭔가 해코지를 하거나, 괴롭히거나 했던 것 같지도 않은데, 매일같이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는 그 남자아이의 존재 자체가 부담스럽고, 공포스럽기만 했었다. 물론 어린 시절의 일이라 그래서 결국 그 아이와 어떻게 되었는지, 내가 그걸 극복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했었는지는 잘 생각나질 않는다. 당시의 그 일은 그저 이미지로 남아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항상 제일 먼저 기억나는 사건 같은 게 되어 버렸다. 지금에 와서 떠올려보면 그게 대단히 괴로운 일도 아니었을 텐데, 어린 마음에 친구나 가족들 중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해 혼자 끙끙댔었다. 누군가에게 말해버리면 이야기를 듣게 된 누군가에게 그 아이가 해코지를 할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 그 아이는 지금 어떤 어른이 되어있을까. 하고 추억처럼 이야기 할 때가 올지도 모르고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어린 시절의 그 기억이 떠올랐다.

"잘못된 만남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어요."

모디아노는 말한다. 우리가 현재 느끼는 불확실과 근심은 세월이라는 거리를 두고 보면 사라지는 것들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보스망스의 어머니는 턱을 공격적으로 쳐들고 그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와 돈을 요구했다. 마치 어린아이를 을러대는 듯한 위압이 담긴 목소리로. 함께 온 갈색 머리 남자는 멀찍이 떨어져 가만히 서서, 마치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끼게 해주려는 양 보스망스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는 그 두 사람이 자신에게 왜 그런 경멸감을 표출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럴 때마다 주머니를 뒤져 돈을 내민다. 빨간 머리에 매정한 눈빛을 한 호적상의 어머니는 언제나 그에게, 마치 집주인이 오랫동안 집세가 밀린 세입자를 상대하듯 단호한 목소리로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마르가레트에게 말한다. "다행히 집을 옮겼으니까, 그 둘은 이제 내게서 돈을 뜯어내지 못해요."

마르가레트는 회사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지나 않을까 노심초사 두려워하는 남자가 있다. 몇 달 전부터 자신을 찾아 다니는 남자, 부아야발을 피해 다니는 중이다. 그래서 종종 보스망스에게 회사 앞으로 데리러 와달라고 말하고, 길을 걷다가도 누군가 자신을 쫓아오는 것 같다며 불안해한다. 경찰에 신고를 한 적도 있지만, 그들은 남자가 그녀를 괴롭히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저 구애를 하는 것뿐이지 않냐며, 이제 뭐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니라고 그녀에게 말한다. 그녀는 직장에서도 한참 먼 곳에 있는 오퇴유에 집을 구한다. 눈이 내린 어느 날 밤 보스망스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냥 이렇게 생각하기로 해요. 우리는 지금 파리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산속에, 앙가딘 어디쯤에 들어와 있다고. " 그제야 두 사람의 마음은 편안히 누그러지고, 그들은 그 모든 잘못된 만남을 잊는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이십 대 초반의 장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 르 코즈는 시위대가 운집해 있고, 경찰 기동대가 대로를 따라 인간 사슬을 형성하고 있던 어수선한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 여자는 기동대와 몰려든 군중 사이에서 사람들에게 벽으로 떼밀리다 상처를 입고, 남자는 그런 여자를 약국으로 데려간다. 그들 두 사람은 이 세상에 기댈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었고, 가족은커녕 도움을 청할 곳도 전혀 없었다. 보스망스는 마르가레트에게 영문도 모르게 적개심에 가득 차 자신을 쫓아다니며 돈을 요구하는 남녀도, 그녀를 두렵게 하는 부아야발도 다 별것 아니라고. 조만간 그들은 새로운 지평을 찾아 파리를 떠날 수 있으며 그렇게 우리는 자유롭다고 말하곤 했다.

그녀의 집을 나서면 그는 다시 카페로 들어가 이번에는 타자 원고를 수정했다. 긴 밤이 온전하게 그의 것이었다. 그는 그 구역에 더 머물고 싶었다. 그는 생의 한 교차로에, 보다 정확하게는 미래를 향해 도약할 수 있는 한 경계에 도달한 느낌이었다. 처음으로 그의 머릿속에 그 단어가 떠올랐다. 미래. 그리고 또 하나의 단어, 지평. 그 시절의 저녁, 그 구역의 조용하고 텅 빈 거리들은 모두 미래와 지평으로 통하는 탈주로였다.

 

보스망스는 다른 사람들 모르게 소설을 쓰고 있지만, 남들 앞에서 소설가라고 말하기에는 머뭇거림이 있다. 그의 얼굴, 말하는 방식, 걷는 방식, 앉는 방식에서도 불안이 묻어났다. 그는 언제나 의자나 소파 가장자리에 한쪽 엉덩이만 걸치고 앉았다. 마치 거기는 자기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그리고 곧 달아날 준비를 하는 사람처럼. 키도 크고 몸무게도 백 킬로그램에 달하는 거구의 사내가 보이는 이런 태도는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와 오버랩된다. 그는 언제나 미안해하는 사람의 느낌을 풍겼다. 정확히 무엇에 대해 미안해해야 하는지 스스로도 의문인 채로. 그는 가끔 홀로 길을 걷다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무엇이 미안해? ? 살아 있다는 것이?

마르가레트는 언제나 남들과 함께 있을 때 그들과 격이 맞지 않을 까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항상 다른 사람들의 격에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버지가 가끔 그립고, 어머니가 결혼한 자동차 정비사가 싫어 그녀는 기숙학교에 들어가면서 어머니와의 관계를 끊어버린다. 그리고 그녀는 보석과 시계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고, 체육관 구내 식당에서 일하고, 찻집과 서점에서의 일을 거쳐 두 아이를 돌보는 보모 자리를 얻는다. 겨우 이십 대 초반의 나이에 그녀의 삶은 한 곳에 자리잡지 못하고 여기저기 부유하며 떠돌아 다닌다.  

"한 젊은 여자가 유모차를 밀며 보스망스 앞을 걸어가는데 뒷모습이 마르가레트와 똑같다."

보스망스는 사십여 년이 지난 뒤, 거리에서 그녀와 닮은 여자가 지나가는 것을 본다. 불꽃처럼 짧고 강렬했던 사랑이 예고 없이 끝나버린 후 꽤 많은 시간이 흘러, 보스망스는 파리 곳곳에서 그녀에 대한 기억의 자취를 찾아 다닌다. 이 작품은 그렇게 기억의 편린들을 끌어 모아 과거를 돌아보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짧은 만남들, 어긋난 약속들, 잃어버린 편지들, 오래 전 수첩 속에 적혀 있었지만 이제는 잊힌 이름과 전화번호들, 그리고 의식도 못한 채 마주쳤던 여자들과 남자들." 우리의 삶에서도 자주 잃어버리곤 하는 수많은 것들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는 마치 꿈결처럼 읽힌다. 보스망스는 어디에선가 사람과 사람의 첫 만남은 마치 가벼운 상처처럼 두 사람에게 남아 그들을 고독과 무감각으로부터 깨워 일으킨다는 말을 읽었다고 기억한다. 그렇다. 타인과의 모든 첫만남은 그렇게 누군가에게 상처로 남기도 한다. 그는 마르가레트와의 첫 만남을 회상하면서, 그것이 바로 그곳, 그 지하철 입구에서, 서로 맞부딪치면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필연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은 파리 지도를 보며 그녀와의 기억을 추억하고 떠올려본다. 마치 꿈결처럼 몽환적이게도, 다소 모호하게도 읽히는 이 작품의 매력은 바로 그것에서도 빛난다. 파리의 곳곳을 마치 여행하듯이 누비는 기분으로 거리들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보스망스는 어떤 거리의 한쪽에서는 그가 젊었을 적 만난 사람들을 과거의 나이와 모습 그대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늘 상상한다. 그곳에서 시간의 테두리를 벗어나 지금도 예전 모습 그대로 살고 있을 거라고.

어쩌면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의 끊임없는 희망이 지평을 넘어 그들에게 도달할지 말지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시간의 통로들을 서로 겹치고, 얽히면서 누군가와 관계를 맺어 나가고, 먼 훗날 기억의 파편들을 그러모아 추억에 잠길 수 있는 그것 자체가 너무도 소중하게 느껴졌으니 말이다. 가끔은 나도 그처럼 기억 속에서 길을 잃어보고 싶다고 생각이 될 만큼, 이 작품은 매혹적이다. 지금도 파리에 가면 어딘가에서 보스망스가 몰스킨 수첩 맨 뒤에 실린 작은 파리 지도를 들여다보며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 길들을 찾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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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4 21: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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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4 22: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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