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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관의 피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0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5년 3월
평점 :
6년 전 내가 이 작품을 처음 만났을 때, 내 삶은 언제 무너질 지 모르는 불안한 토석 위에 서 있었다. 뭘 해도 자꾸만 넘어졌고, 여기 저기서 태클을 거는 사람들이 불쑥 나타났으며, 간절히 염원했던 일은 내 기대를 배반했고, 매일 매 순간은 마지막 한번 만 더 참아보자는 식으로 버텨야 하는 시간들이었다. 나는 점점 더 사람들과 이야기하지 않았고, 나의 앞날은 절대로 좋아질 것 같지 않았다. 그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란 두 주먹으로 꽉 쥔 손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와도 같았다. 말이 줄어든 만큼 나는 틈만 나면 책을 읽어댔고, 지금과 마찬가지로 주로 스릴러, 추리 소설들이었다. 소설 속에서는 악당 들을 물리치는 히어로가 있었으며, 그들이 가진 엄청난 매력과 능력은 거의 대부분 나에게 대리만족의 쾌감을 안겨주었다. 그러던 중에 만난 <경관의 피>라는 작품은 그 명성에 비해 나에게는 너무도 심심하고, 분량만 많은, 절대 미스터리 작품 같지 않은 그런 작품이었다. 어떤 상을 받았고, 명성이 어떻고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현실의 불행한 나를 위한 영웅, 내가 응원하고, 감정이입하고 싶은 등장 인물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캐릭터가 전혀 없었던, 그저 평범한 동네 아저씨 같은 경찰의 일상이 주욱 나열되고 있는 이 작품이 당시의 나에게 와 닿지 않았던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무려 6년이라는 시간을 지나 다시 만나게 된 이 책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은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아마도 그런 간극은 당시의 나와 지금의 내가 확연히 달라진 것만큼의 깊이일 것이다.
요즘은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두 번씩 읽을 기회가 흔치 않다. 신간들이 쏟아져 나오는 속도를 읽는 속도가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늘 다음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읽어야 하는 책들이 잔뜩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읽는 내내 감탄하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감동을 받았던 책이라도 다시 그것에 시간을 투자하기란 만만치가 않은 일이다. 6년 전에 출간되었던 버전의 개정판으로 분권이 합본으로 재 탄생한 <경관의 피>는 이번에 다시 읽게 되지 않았다면 나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하나의 작품이었을 지도 모른다. 종종 언제 보느냐가 결정적인 작품들이 있다. 그리고 그 작품이 당신에게 제 시간에 도착했을 때 그 감흥이 거의 죽고 싶을 정도로 당신의 마음을 흔들 때가 있다는 걸 잊지 말자. 그러니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작품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작품을 만났을 때, 내가 명성만큼의 감동을 받지 못했다면 시간을 좀 두고 다시 한번 읽어봐야 한다.
"단속할 상대를 닮아가는 게 형사야. 강력범을 상대하다 보면 강력범처럼 돼. 사기꾼을 상대하면 사기꾼처럼 된다더군."
"성실한 지역 주민들을 상대하면 성실한 지역 주민으로 있을 수 있어요. 그렇죠? 주재 경관이 되어요. 출세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전쟁이 끝난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시절, 공습으로 타다 남은 본채에 다다미 석 장짜리 방을 덧세워 더부살이로 얹혀 사는 부부가 있다. 어느 날 남편은 아내에게서 아이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제대로 된 직장을 얻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침 경시청에서 대대적으로 순사를 모집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순사가 만 명이나 부족하다는 기사를 읽었던 것이다. 시대가 달라졌으니 전쟁 전의 경찰과 달리 민주 경찰이 되었다며, 융통성 없이 옹고집으로 질서정연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의 세이지는 그렇게 순사가 되기로 한다. 그렇게 그의 경찰 생활이 시작되는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부부의 성격이다. 아내인 다즈는 그가 계급이 올라가서 너무 경찰관다워지는 것을 걱정한다. 세이지 또한 출세를 바라지 않는 대신 주재 경관이 되는 것을 목표로 아내와 아이들이 우선인 가장이다. 결국 그는 염원하던 주재 경관이 되고 덕분에 그들은 방이 두 개 딸린 주택에 가족과 함께 살면서 근무를 하게 된다.
대부분의 경찰이 퇴근 시간도 늦고, 외근도 잦아 가족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하는 반면에 주재소는 경관이 거주하는 집과 주재소 집무실이 함께 있으므로 아이들이 아버지의 직업과 인생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게 되는 편이다. 일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족으로서의 모습도, 직업인으로서의 모습도 모두 지켜볼 수 있기 때문이다.
"외근 경관은 근무할 때만 성실한 경관으로 있으면 되지만, 주재 경관은 이십사 시간 내내 훌륭한 경관이 아니면 안 돼."
이렇게 스토리는 미스터리 물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긴장감이 떨어지는 상태로 진행된다. 한 경찰의 삶이 그저 담담하게 펼쳐지면서 그가 겪는 사건들이 불쑥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정도이다. 그 중에 그가 경찰 일을 하면서 겪는 사고 중에 미결로 끝난 두 가지 사건이 있다. 우에노 경찰서 공원 앞 파출소에서 근무할 때 젊은 남창 하나가 연못 옆에서 살해당한 사건과, 그들이 살던 셋집 바로 뒤에서 시체로 발견된 젊은 철도원의 살해 사건이다. 그 두 사건이 어딘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서 그는 개인적으로 사건을 조사하게 되고, 결정적인 단서를 찾게 되던 날 의문의 추락사로 죽고 만다. 그것도 주재소 바로 옆에 있던 오층탑 화재 사건이 발생했을 때 현장에서 떨어진 육교 아래에서 발견된 탓에, 그는 순직으로 인정받지도 못한다. 책임감 없이 담당구역을 벗어난 그는 자살로 처리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자살이 아니라 뭔가 다른 이유로 이모사카 육교 아래로 추락했던 게 아닐까. 사고라면 사고여도 상관없다. 아니, 그것이 역시 자살이었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것이 증류수처럼 명백한 진실임을 제시해준다면,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게 세이지가 죽고 아들인 다미오는 세이지의 동료였던 가토리, 하야세, 구보타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니고, 경시청 경찰학교에 입학을 하게 된다. 가정 형편상 대학은 가지 못했던 그에게 경찰학교의 졸업이 다가왔을 때 공안의 가사이 경시가 나와 그에게 대학을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한다. 급여도 주고, 학비도 모두 지원해주겠다고 말이다. 경시청 공안부로서는 적군파가 신원을 의심하지 않을 수사원이 절실하게 필요했고, 마침 다미오가 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학교를 다니며 내부의 사정을 수시로 보고하고, 잠입 수사해 공을 세우지만 그는 "저는 공안경찰관이 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아버지처럼 주재 경관이 되는 것이 꿈입니다." 라며 공은 세웠지만 자신에게 외사과나 공안 수사원은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역시나 아버지인 세이지처럼 출세나 성공에 대한 욕심은 전혀 없이, 그저 아버지 같은 경찰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학생운동의 동향을 캐기 위해 경시청 공안부의 스파이 노릇을 하다 극도의 불안신경증을 얻게 되고, 이후 그 일을 그만두고 평범한 경찰 업무를 할 때조차도 그것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좋지 못한 이유로 술을 마셨을 때 아내인 준코에게 자기도 모르게 손찌검을 하게 되는 등 후유증이 꽤 가지만, 어렵게 극복하고 그도 결국 주재 경관이 된다. 하지만 지명 수배범이 인질을 붙들고 난동을 부리는 걸 막다가 총격에 죽고 만다. 자신은 비번인 날이었음에도 주재소 경관이라는 책임감으로 인질을 살려냈기에 그는 죽음과 동시에 2계급 특진과 순직으로 처리된다.
"한 가지만 말씀해주십시오. 이 임무에 저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보았다. 뜻밖의 질문이었을까?
오이카와가 다시 가즈야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피다. 자네에게는 훌륭한 경관의 피가 흐르고 있다. 이런 변칙적인 임무도 견딜 수 있을 만큼."
아버지인 다미오가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하는 것을 보고 자랐기에, 아버지와 그다지 각별하지 못했던 아들 가즈야도 결국 경시청 경찰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순직 경찰관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일종의 경의를 표하는 경찰서의 분위기에서 아버지의 경우는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이대, 삼대 경찰관이 된다는 것은 아버지가 아이들을 그릇되게 가르치지 않았다는 증명이기도 하고, 아이가 아버지의 직업을 자랑스러워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할아버지는 순직 처리되지 못한 자살이라 오히려 다른 시선을 받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가즈야는 문제 경찰관을 대상으로 스파이 활동을 하라는 임무를 받게 된다. 폭력단을 담당하는 민완 형사 밑에서 일을 배우다 언젠가 증거를 쥐고 그의 뒤통수를 때릴 수밖에 없는 비밀 업무를 맡게 된 것이다. 아버지가 했던 잠입 수사와 색깔은 다르지만, 어찌되었던 비밀 업무를 말이다.
결국 이들은 삼대에 걸쳐 자신의 아버지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과 뭔가 다른 이유로 죽었던 게 아닐까, 라는 죽음의 진상에 대한 답을 찾고 싶어 경찰관에 지원하고, 그 일을 해나가면서 답에 가까워진다. 아버지의 뒤를 계승한다는 그런 거창한 직업적 소명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아버지 같은 경관이 되고 싶다. 라고 자연스럽게, 마치 물 흐르듯 그렇게 같은 직업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할아버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찰이 된 손자가 그들의 죽음에 얽힌 비밀과 맞닥뜨리는 순간은 두툼한 페이지만큼 쌓인 시간의 두께덕분에 더욱 묵직한 울림을 안겨준다. 전후 일본의 풍경과 현대사 육십 년이라는 시간이 서사로 밑바탕이 되어 있는 이야기라 더 그럴 것이다. 이 작품은 스릴 넘치고, 긴장감에 땀을 쥐게 하는 미스터리는 아니지만, 쓱쓱 편하게 페이지를 넘기다 어느 순간 그 페이지의 무게만큼 이들 삼대의 삶을 체감하게 된다. 한 권의 책에 이렇게 수십 년의 시간을 오롯이 담아낼 수 있다는 것 자체도 대단하지만, 세이지, 다미오, 가즈야 각각의 스토리 자체가 독립되어 완성도와 재미가 있다는 점 또한 엄청난 필력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경관은 경계에 있다. 흑과 백, 어느 쪽도 아닌 경계 위에 서 있어."
어떻게 보면 경찰 소설인데 주인공이 사명감이 투철한 영웅도 아니고, 특출한 재능을 가진 뛰어난 천재도 아니고, 너무도 평범한 인물인데다 스토리마저 '수사'보다는 경찰관의 '일과'에 맞춰 흘러가는 이야기라 그다지 임팩트가 없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 작품을 처음 만났을 때 나도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잘 쓴 소설이지만 재미는 없고, 나에게 별로 감동을 주지는 못했던 작품으로 느꼈으니 말이다. 그런데 꽤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읽게 된 이 작품은 '경찰 수사극'이 아니라 '가족 드라마'에 가깝게 느껴졌다. 1대 경찰관인 세이지는 모범적이고 전통적인 가장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라 경찰관이 된 2대 경찰관인 다미오는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얻은 신결 질환으로 폭력적인 가장의 모습으로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이어 3대 경찰관인 가즈야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 때문에 살아 생전 가깝게 지내지 못했지만 경찰이 되어 아버지와 유사한 업무를 하면서 비로소 그의 모습을 이해하는 아들이 된다. 아들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자라고,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큰다고 하지 않나. 어린 시절 한없이 커다랗게만 느껴지던 아버지의 등이 어느 순간 작고 초라해 보인다고 느끼는 어른이 되면, 그제야 우리는 아버지의 굽은 등 속에 숨겨진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된다. 길가다 무심코 발에 채이는 돌맹이나, 매일같이 숨쉬고 있어 깨닫지 못하는 공기처럼 특별한 것 없는 시간들이 쌓여 누군가의 인생을 완성시킨다. 극중 다미오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가족의 얼굴로 기억한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몇 살 때 무슨 일이 있었다, 아이가 몇 살 때 무슨 일이 있었다. 이렇게 말이다. 이것이 바로 이렇게 많은 분량으로, 이렇게 긴 시간을 통해 삼대의 이야기를 했던 이유일 것이다. 가끔은 말해진 것보다 말해지지 않은 것이, 보여지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법이다. 그러니 이 작품은 문장보다는 행간으로 읽어야 하는 미스터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