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 불안하다면 - 불안감을 추진력으로 바꾸는 가장 과학적인 방법
트레이시 데니스 티와리 지음, 양소하 옮김 / 와이즈베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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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불안의 한가운데에 살고 있고 그 불안은 미래를 흐리게 합니다. 사람들은 각자 신문을 읽으며 새로운 재앙을 예상하죠."
세계적인 유행병, 바이러스에 관한 오보, 정치적 격변, 경제적 불평 등, 돌이킬 수 없는 환경 파괴로 인한 위협의 시대인 21세기의 초기 수십 년 동안 우리가 어떤 기분인지에 관해 이보다 더 잘 묘사한 문장이 있을까? 이 문장은 미국 역사상 또 하나의 말썽 많고 파괴적인 시기였던 남북 전쟁 몇 년 전에 언급된 에이브러햄 링컨의 말이다.         p.109

 

서점에서 '불안'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하면 수백 건에 이르는 목록이 나온다. 사랑해서 불안하고, 부모라서 불안하고, 사회적으로 불안하고, 관계가 불안하고, 미래가 불안하다. 대체 우리는 왜 이렇게 불안한 것일까. 불안이란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때 느끼는 감정을 뜻한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이쪽으로 가면 상황이 더 나빠질까? 우리는 이렇게 종종 걱정과 근심, 심지어 공황 상태에 가까운 순간을 경험한다. 그리고 누구나 불안감을 싫어한다. 하지만 뉴욕시립대학교 심리학 및 신경과학 교수인 트레이시 데니스 티와리는 이런 불안, 잘만 활용하면 오히려 우리에게 좋은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은 불안을 추진력으로 바꾸는 방법을 저자 본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예시들과 함께 과학적 연구 결과를 활용해 알려준다.

 

그 동안 수백 권의 책과 수천 개의 과학 연구, 그리고 30여 개의 서로 다른 항불안제들은 우리에게 충분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정신건강 전문가들은 이처럼 보기 좋게 실패했을까? 저자는 그 이유가 애초부터 문제 인식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정작 문제는 불안이 아니라, 우리가 불안을 다룰 수 있고 나아가 불안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음을 믿지 못하는 점이라는 거다. 우리는 불안에 대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관점부터 바꿔야 한다. 저자는 불안이 존재하는 이유와 불안감이 좋지 않게 느껴지는 원인을 신경과학적으로 분석해 알려 준다. 그리고 질병으로서의 불안과 불안의 시대적 의미를 짚어보면서 우리가 오해해 온 불안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불안의 스펙트럼 그 어디에 위치하든 간에 우리는 불안에 귀를 기울이고 때때로 이 무서운 감정이 동반자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불안을 다시 생각하지 말자. 중화시키지도 말자. 잃어버린 역사나 옷장 위 상자 속 잊고 있었던 선물처럼 되찾자. 불안은 강점이 될 수 있지만 다른 진정한 강점과 마찬가지로 안에 취약점 또한 내포하고 있다. 이런 취약점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자신의 최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불안을 구제함으로써 우리는 스스로를 구제한다.          p.236~237

 

인생에 관한 한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다. 우리는 당장 내일 우리에게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 지 알지 못한다. 매일 같은 나날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그 속에 불확실성이라는 변수가 있어 갑작스럽게 불협화음이 찾아올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니 말이다. 예를 들어 코로나로 인해 매일 엄청난 수의 감염자 수가 집계되던 시기에는 누구나 감염되지 않을까 두려워했을 것이다. 비슷한 증상이라도 보이면 검사를 해보고, 결과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초조해하고, 안절부절못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불확실성은 일종의 가능성이다. 그것이 긍정적인 의미이든 부정적인 의미이든 간에, 그 가능성은 우리를 미래로 향하게 한다. 저자는 불안과 불확실성의 관계에 대해서, 팬데믹 기간 동안 불안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불안감을 창의적이고 제대로 이용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우리는 인생의 어느 순간, 불안은 힘든 것이라는 피할 수 없는 사실에 부딪히게 된다. 이는 너무 힘겹게 느껴져 때로는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넘어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올바른 방법으로 불안해하는 것에 대한 처방이 필요하다. 이 책은 우리가 느끼는 불안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해한 뒤 삶을 더 좋게 변화시키기 위한 세 가지 원칙을 아래와 같이 정리하고 있다.

 

1.불안은 미래에 관한 정보다. 불안에 귀를 기울여라.
2.불안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당분간은 그냥 내버려두어라.
3.만약 불안이 유용하다면 그 불안으로 목적성 있는 무언가를 하라.

 

만약 '불안'이 친구이자 협력자가 될 수 있다면, 더 이상 '불안'을 나쁨으로 분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우리가 불안을 어떻게 오해해왔는지, 불안한 마음을 어떻게 구제할 것인지, 불안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제시해주고, 올바른 방법으로 불안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불안을 극복하는 게 목표가 아니라, 불안과 친해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걱정과 우울, 초조,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 매사에 불안한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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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아더 유
J. S. 먼로 지음, 지여울 옮김 / ㈜소미미디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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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가 있기 전에 케이트는 경찰에서 민간인 신분의 '초인식자'로 일을 했다. 인구의 2퍼센트는 사람의 얼굴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안면 인식 장애, 즉 안면실인증이라 불리는 병을 앓고 있다. 그리고 그 정반대 지점에는 '초인식자'라고 불리며 사람의 얼굴을 절대로 잊지 않는 1퍼센트가 존재한다. 케이트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실제로 솜씨가 아주 뛰어났다. 한번은 그저 눈만 보고 용의자를 분간해내기도 했을 정도였다.           p.23

 

한 번 본사람의 얼굴을 절대 잊지 않는다는 ‘초인식자’ 케이트는 경찰에서 민간인 신분으로 일하며 수많은 용의자들을 식별해 수사에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여섯 달 전 일어난 교통사고로 뇌를 크게 다쳤고, 현재는 병원에서 만나 연인이 된 젊은 사업가 롭의 자상한 보살핌을 받으며 요양 중이다. 어느 날 케이트는 롭과 대화를 나누다 그가 오래 전 자신의 도플갱어를 만난 적이 있었고, 그 존재를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첨단 기술 사업가로 이름을 날리는 그가 도플갱어라는 미신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의문이었던 케이트는 며칠 뒤 그가 자신이 알던 롭이 아니라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사람같다고 느끼게 된다. 혹시 그가 롭이 두려워하던 도플갱어가 아닐까 의심하게 된 케이트는 점점 혼란스러워지는데... 과연 이것은 케이트의 망상인 것일까, 아니면 회복되어 가는 케이트의 뇌가 보내는 경고인 것일까.

 

롭은 영국에서 10억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는 신생 기업의 창업주이자 뇌와 기계를 상호작용하게 하는 ‘직접 신경 인터페이스’ 기술 개발에 힘을 쏟고 있다. 냉장고나 집의 잠금장치 등 거의 모든 곳에 첨단 기술을 적용하고 있는 그는 왜 '도플갱어'라는 미신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혹시 도플갱어가 미신이 아니라 실재하는 존재라면? 그리고 그가 만난 적이 있다는 그 도플갱어가 현실에 진짜 나타나 그가 이룬 모든 것들과 집, 회사, 그리고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을 전부 빼앗아 가게 된다면 말이다. 그렇게 깨닫고 나서 보니 케이트는 그의 모든 점들이 자신이 알던 롭의 모습과 조금씩 달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프랑스어를 잘 하지 못해서 케이트가 가르쳐 줘야 했던 롭이 능수능란하게 프랑스어로 언론에서 인터뷰를 한다던가, 평소에 절대 마시지 않던 음료를 카페에서 마신다던가, 영상 통화 중에 무심코 지은 표정에서 그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을 보인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케이트의 불안과 의심은 점점 더 심해지고, 그즈음부터 그녀에게 크고 작은 사고가 하나둘 생기기 시작하는데, 과연 케이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것일까.

 

 

 

"당신도 알겠지만 누군가를 흉내낸다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야." 제이크가 앉은 자리에서 몸을 똑바로 세우더니 탁자 위에 놓인 케이트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갠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인생을 그렇게 간단히 차지할 수는 없어. 누군가의 신분을 갈취한 다음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 사람으로 살아가다니,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야.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 일란성 쌍둥이라면 혹시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롭한테는 쌍둥이 형제 같은 건 없어. 그렇지 않아?"                 p.322

 

자신의 도플갱어와 마주치는 것은 불길한 일이라고 알려져 있다. 물론 도플갱어가 실재 존재하는 지에 대해 명확하게 규정된 것이 없으므로, 그 상징이나 의미는 조금씩 다르게 속설로 전해지는 경우가 많다. 보통 자신의 도플갱어와 마주치게 되면 한 쪽이 죽게 된다는 속설로 공포영화의 소재로 사용되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오싹하기 그지 없다. 나와 똑같은 모습을 한 또 다른 존재가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해 보면 말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자아분열과 같은 정신질환의 일종으로 보기도 한다. 이 작품 속에서 케이트가 겪게 되는 증상을 '카그라스증후군'이라고 하는 망상증으로 보는 것처럼 말이다. 한때 얼굴 인식에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게 해주었던 성능 좋은 방추상회 때문에 도플갱어를 본다는 착각을 하게 되었다고 하면, 그럴듯하게 설명이 되기도 할 것이다. 이 작품은 케이트가 사고에서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도플갱어 이야기에 집착하게 되는 초반부에 이어, 사실 교통사고가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증거가 나오면서 본격적인 스릴러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뇌에서 얼굴을 인식하는 부분인 방추상회가 뛰어난 인물로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에서 등장하는 과학수사과의 베아테 뢴이라는 아주 매력적인 캐릭터가 있었다. 방추상회라는 단어 자체를 그때 처음 알게 되었었는데, 수사관 중에 정말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범죄자 검거에 아주 큰 도움이 되겠다 생각했었다. 얼굴을 알아보는 것만으로 용의자를 특정하고, 그 중에서 범인을 잡아낼 수만 있다면 수사에 굉장한 역할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J. S. 먼로는 비슷한 수천 개의 얼굴을 구분하고, 마주친 사람의 얼굴은 모조리 기억하는 능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뇌와 기계를 상호작용하게 하는 기술을 등장시키고, 도플갱어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더해 한층 더 복잡하고 스릴 있는 심리 스릴러를 탄생시켰다. 최첨단 기술과 비과학적인 미신이 공존하는, 독특한 심리 스릴러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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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무게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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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중요한 것은 언어였다. 모든 것은 이름이 불리고 이야기된 후에야 실제로 존재했다. 레이랜드가 찾아 나선 게 아니라 그게 그에게 와서 부딪쳤다. 처음부터 그랬다. 언어 없이 사물에 도달 하기를, 사물과 사람과 감정과 꿈에 닿기를 원할 때도 자주 있었지만 언제나 그 사이에 언어가 다시 끼어들었다. 언어로 이해해야 제대로 경함할 수 있다고 말할 때면 사람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곤 했다.           p.21

 

사이먼 레이랜드는 런던에 있는 삼촌이 물려준 저택으로 향한다. 동양학자였던 삼촌은 그에게 집과 가구와 책을 포함한 모든 것을 유산으로 남겼다. 그는 이곳에서 앞으로의 삶에 대한 명료함을 얻기로, 혼란스러웠던 모든 것이 지나간 지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삶을 돌아보기로 했다. 그에게 무슨 끔찍한 일이 있었고, 그것은 레오나르디 박사의 말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미 그 상황에 대한 것은 끝이 났고, 미래가 그에게 다시 열린 지 6주가 지난 시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레이먼드는 평생 번역가로 살 예정이었지만, 아내가 갑자기 사망하고 출판사를 유산으로 받은 뒤 출판사를 11년 동안 경영해 왔다.

 

 

레이랜드는 삼촌이 그에게 아라비아어로 쓰인 글을 읽어 주었던 대여섯 살 때부터 언어에 매혹되었다. 강압적인 아버지와 학교가 싫어서 가출해 낡은 호텔의 야간경비원으로 일하던 시절에도, 모두 잠든 조용한 시간에 가장 낯선 언어, 가장 낯선 단어를 배우며 그 문학적 매력을 즐겼다. 그렇게 낯선 글자와 단어, 울림과 시의 연들이 그의 몸 안에 차곡차곡 쌓였으니, 그가 번역을 독학하던 숱한 밤을 거쳐 결국 번역가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래이랜드의 과거와 현재가 교차 진행되며, 최근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우리는 알게 된다.

 

어느 날 그는 갑작스럽게 언어 장애와 마비 증상을 느끼게 되고, 자신이 뇌졸중이 아닐까 생각하며 병원으로 간다. 다행히 뇌출혈은 아니었지만, 그의 뇌 사진을 보고 의사는 그에게 악성 종양이 발견되었다고 말한다. 완전히 없애거나 멈출 수 있는 방법은 없고, 치료로 조금 늦출 수는 있겠지만 몇 달 혹은 1년쯤의 시간이 그에게 남았다고 선언한 것이다. 불안과 절망에 휩싸인 그는 다가오는 삶의 붕괴를 막기 위해 낯선 시대와 지역에 관한 책을 무더기로 사들이고, 이 모든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두문불출한다. 왜 이 모든 걸 더 일찍 읽지 않았을까, 내 인생의 시간으로 뭘 했던가? 절망하면서, 사라지는 시간에 대한 저항과 광기 속에서 집중력과 기억력으로 무장하고 맞선다. 그러다 그것이 오진임을 알게 되고, 앞으로 남은 생의 첫날을 런던의 저택에서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이다.

 

 

내 정신에 새겨졌다고 말하고 싶은, 잊을 수 없는 특별한 텍스트가 많아. 갈고 닦아 잊을 수 없는 언어로 점점 더 넓어지는 내면의 다락방, 그곳에 번역한 언어에 대한 기억이 쌓여갔어. 이런 다락방에만 살면서 평범한 삶의 공간으로 향하는 계단을 더는 찾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어. 어쩌다 그 계단을 내려오면 자연스럽고 자명하게 말하는 법을 잊은 이방인처럼 움직였지. 번역 언어, 특히 복잡한 번역 언어는 상황이 무척 특이해. 그게 내 언어이긴 해. 근원이 내 안에 있고, 그걸 빚고 만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야. 하지만 타인의 도장이 찍히지. 내 언어는 내 언어지만, 원래 언어는 원래 언어니까.               p.508

 

레이랜드는 방사선과에서 사진이 바뀌는 바람에 시한부를 선고 받았고, 그 오진과 더불어 77일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불현듯 다시 미래가 생긴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이 생긴 후에는 절대 예전과 같을 수 없을 것이고, 다가올 미래 또한 달라질 것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중요한 건 삶이 계속된다는 것이라는 걸 그는 깨닫게 된다.

 

"인생은 아름답다. 삶이란 언제나, 매 순간 시작되니까."

 

레이랜드는 책과 원고로 가득한, 천장까지 닿는 책장에 에워싸인 채 13년을 일했지만, 오진을 받고 삶을 정리하며 출판사를 팔아 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쉼표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는 오래 전 계획했던 여행을 준비했고, 먼 길을 떠나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는 다시 삶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다시 살아났으니 말이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시간 속에서 그는 죽은 아내에게 편지를 쓰고, 책상 앞에 앉아 그간의 일을 돌아보고, 마침내 자신의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누구나 살면서 삶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지는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했던 지점에서 다시 세상이 열리기도 하고, 완전한 절망에서 희망을 찾기도 하며, 지금까지 살아 왔던 방식과 다른 세계 속으로 발을 내딛게 되는 일도 있다. 그런 일을 겪고 나면 그 동안 놓치고 살았던 많은 것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그 눈부신 순간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를 더 없이 섬세하고, 사색적으로 펼쳐 보인다.

 

이 아름다운 소설은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파스칼 메르시어가 16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 장편소설이다. 현지에서는 2020년에 출간되어 13년 만에 선보이는 장편소설로 유럽 문학계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파스칼 메르시어를 세계적 작가로 만든 모든 강점이 담겼다’는 극찬을 받았다고 하는데, 직접 읽어 보니 앞으로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600페이지가 넘는 묵직한 분량 내내 수많은 작가와 번역가와 출판인, 그리고 문학을 삶의 지침으로 삼은 이 모든 이들의 삶이 우아한 언어로 그려져 있다. 레이랜드는 수십 년 동안 번역을 해 왔고, 언어에 매혹되어 끊임없이 낯선 언어들을 공부해 온 인물이라 언어에 대한 그의 열정이 매 페이지마다 그려져 있는 것도 시선을 사로잡았다. 몰타어와 사르데냐어, 베르베르어, 그리스어, 튀르키예어, 히브리어, 그리고 알바니아어, 러시아어, 라틴어 등등 그는 수많은 언어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문학과 언어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을 읽으면서 매 페이지마다 밑줄 긋게 될 것 같다. 그러니 시간을 들여서 느린 호흡으로 읽어 나가야 하는 작품이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좋아한다면, 이 작품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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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쇼맨과 환상의 여자 블랙 쇼맨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최고은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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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지 마. 가즈미는 어디 있지? 당신은 알 거 아냐?'
'그래, 잘 알지. 진짜 가즈미는 죽었어.'
다케우치는 고래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그랬군. 언제 어디서 죽었지?'
'언제? 어디서? 무슨 소리야? 그건 당신이 누구보다 잘 알 텐데.'
'무슨 소리지?'                 - '맨션의 여자' 중에서, p.50

 

도쿄의 후미진 골목에 간판도 없이 운영되는 비밀 아지트 같은 곳이 있다. '트랩핸드'는 과거 미국에서 잘 나가던 마술사 가미오 다케시가 운영 중인 바로 카운터석과 안쪽에 탁자가 하나 있는 작은 가게이다. 그곳에서 다케시는 바텐더를 하면서 손님들을 응대한다. 키가 크고 얼굴도 멀끔하고 모델처럼 스타일이 좋은 다케시에게는 타인의 속임수를 간파하거나, 수수께끼나 음모를 해결하는 뛰어난 능력이 있었다. 전작인 <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에서는 조카와 함께 형이 살해된 사건의 진범을 찾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번 작품에서는 트랩 핸드를 찾은 수상한 사람들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전작의 주인공이었던 마요가 첫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해서 반가웠다.

 

건축사인 마요는 리모델링 의뢰를 맡게 된다. 방 두 개짜리 맨션을 사서 리노베이션을 맡긴 미모의 여자는 엄청난 부자로 보였지만, 어딘가 비밀이 많은 사람같았다. 다음 번 상담을 둘이서 조용히 얘기할 만한 곳에서 하고 싶다는 요청에 마요는 삼촌인 다케시에게 부탁한다. 마요에게 대략의 사정을 듣게 된 다케시는 의뢰인이 어딘가 수상하다는 데 동의하고 장소를 빌려 주는데, 남편의 죽음으로 막대한 금액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는 의뢰인의 취향이 이상했다. 세 종류의 플랜을 준비했는데, 과감한 콘센트와 심플한 콘셉트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견적은 제일 비싸지만 평범하고 지루한 디자인을 고른 것이다. 의뢰인의 취향을 의심하는 마요에게 다케시는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미망인이 유산을 물 쓰듯 쓰면 주변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거라고. 문제는 그 남아도는 돈이 어떻게 하면 나한테까지 흘러오게 하느냐라고 말이다. 자, 과연 마요가 맡은 의뢰는 누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어지게 될지, 이후 이야기는 생각지 못했던 방향으로 급 전개 되기 시작한다.

 

 

 

"무엇이 행복이라 여길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죠." 가미오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단언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건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손안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히노 씨에게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피 흘릴 것도 각오한 친구가 있습니다. 그건 정말 멋진 일이죠. 안 그런가요?"             - '환상의 여자' 중에서, p.228~229

 

이 작품에는 블랙 쇼맨이 등장하는 세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돈 많은 미망인과 그녀를 스토킹하는 의문의 남성, 사귈까 말까 고민하는 첫 데이트 중인 커플,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한 재즈 뮤지션의 비밀 연인이 등장해 각자의 사연이 전개된다. 다케시는 거짓말을 꿰뚫어 보고, 마술 같은 트릭을 쓰고, 인물의 얼굴이나 특정 부위를 합성할 수 있는 신기술 ‘딥페이크’를 활용하는 등 각자의 사건 해결을 위해 능력을 발휘한다. 다케시는 전작에서도 형사 행세를 하며 주변 이웃을 탐문 조사한다던가, 스마트폰의 암호를 슬쩍 보는 것만으로 알아 맞추고, 무대 위의 화려한 마술사만큼이나 멋진 솜씨를 선보이며 사건을 추리해 나갔었다. 매사에 자신감 넘치고, 괴팍했던 성격 역시 여전한데, 그 모습 그대로 이번 작품에서도 특유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작가의 제안으로 전 세계 최초 공개, 한국 단독 선출간이라는 점만으로도 읽을 가치가 충분하지만, 구성이나 분량 모든 면에서 조금 가볍게 읽어 보면 좋을 것 같다. 코로나 이후의 현실을 생생하게 담아낸 것도 화제였던 전작에 비해 가볍게 에피소드 위주로 풀어 나가는 단편이라 앞으로 이어질 블랙 쇼맨 시리즈의 장편 신작을 만나기 전에 브릿지 정도로 생각해도 좋을 것 같고 말이다. 요즘 히가시노 게이고가 가장 공들여 만들고 있는 캐릭터가 블랙 쇼맨이라고 하니, 아마도 더 묵직한 다음 이야기를 위한 워밍업의 개념이라도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럼에도 이례적으로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을 빨리 만나게 된 거라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라면 반가운 마음부터 들 것이다. 속도감 있는 미스터리를 좋아한다면, 앉은 자리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 호흡에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블랙 쇼맨 시리즈의 다음 장편을 고대하며 이 작품을 읽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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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국가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50
플라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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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를 행하고도 벌받지 않는 가장 좋은 경우와 불의를 당하고도 보복하지 못하는 가장 나쁜 경우의 중간인 셈이지요. 양쪽 극단의 중간인 정의가 좋은 것이어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불의를 행할 힘이 없는 사람들이 불의를 당하지 않게 해주기 때문에 존중하는 것입니다. 불의를 행할 수 있는 진정한 남자라면 불의를 행하지도 당하지도 못하게 하자는 계약은 맺지 않을 겁니다. 제정신이라면 말이지요. 소크라테스 선생님, 이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정의의 본질 혹은 그와 비슷한 것이요 정의의 기원입니다.              p.71

 

오래 전 '러셀 서양철학사', '틸리 서양철학사' 등의 책을 읽을 때 흥미로웠던 것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관계였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사에서 매우 독특한 인물인데, 스스로 전혀 글을 쓰지 않았지만 제자 플라톤을 통하여 서양 철학의 전체 발전에서 헤아릴 수 없는 영향을 발휘한 진정한 사상가였으니 말이다. 플라톤의 대화록은 스승과 제자의 사유가 결합되어 있음을 고스란히 보여주기도 한다. 플라톤이 썼던 글은 모두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그가 길을 걷다 만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이번에 만나게 된 <국가>도 플라톤의 다른 대화편처럼 소크라테스가 전날에 케팔로스의 집에서 나눈 대화와 논의를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1권에서는 정의가 악덕이자 무지인지 아니면 지혜이자 미덕인지 살펴본다.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와의 대화에서 바르게 산다는 것, 즉 정의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진실을 말하는 것과 빌린 것을 돌려주는 것을 정의라고 할 수 있는지, 아니면 그런 일이 때에 따라 정의가 되기도 하고 불의가 되기도 하는 건지에 대해서 의견을 물은 것이다. 이 질문은 케팔로스의 아들 폴레마르코스가 이어 받아 대화가 진행된다. 친구란 무엇인지, 좋은 사람이란 어떤 의미인지, 친구인 나쁜 사람에게는 도움을 주고, 적이지만 좋은 사람에게는 해를 입히는 게 정의라고 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는 쉬지 않고 계속된다. 2권부터는 대화 상대자가 아리스톤의 아들이자 플라톤의 작은 형인 글라우콘과 플라톤의 큰형인 아데이만토스로 바뀌어 10권까지 이어진다.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무엇인지 살펴보기 위해 여러 유형의 불의한 국가들을 살펴보고, 국가의 통치자로 어떤 인물이 바람직한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내가 말했네.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의 협력자인 법도 그것을 바라는 게 분명하네. 그래서 아이들을 다스릴 때 처음에는 자유를 허용하지 않고, 우리에게 있는 가장 훌륭한 부분으로 그들의 내부에 있는 가장 훌륭한 부분을 보살피지 않는가? 우리 안에 있는 수호자와 통치자가 우리를 대신해 아이들의 내부에도 있게 하는 것이네. 국가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내부에도 바른 정치체제가 세워져야 그들이 자유로울 수 있다네."                p.475

 

이번에 현대지성 클래식의 50번째 책으로 나온 <국가>는 가독성이 매우 뛰어난 것이 특징이다. 서양 철학이라고 하면 다소 어렵고, 딱딱하고, 지루할 거라고 생각하게 마련인데, 이 책을 읽다 보면 굉장히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서 깜짝 놀랄 것이다. 그리스어 원전을 직접 옮긴 완역본이고, 사변적이고 복잡다단한 원문을 세심히 다듬었으며, 여러 번의 교정을 통해 최대한 원문을 존중하면서도 가독성 높은 편집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각주가 366개나 되는데도 본문을 벗어나지 않고 해당 페이지에서 바로 해결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더욱 내용에 집중할 수 있었다. 후반부에 수록된 18페이지의 세심한 해제 또한 이 책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무엇보다 '현실에서는 정의가 불이익을 당하는데, 정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중에 누가 더 행복한지'에 대한 질문자체가 흥미롭다. 사람들은 본질적으로는 불의를 행하는 것이 좋고, 불의를 당하는 것은 나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장 완벽한 불의를 버려두고 정의를 선택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불의를 행하더라도 고상함으로 위장하는 데 성공한다면, 누가 진정으로 정의를 존중하려고 하겠느냐는 말이다. 이는 2,400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뛰어 넘어 당대의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다. 플라톤은 <국가>를 통해 근본적으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화두를 던진다. 후세 사람들은 <국가>에 '정의론'이라는 부제를 붙이기도 했는데, 개인의 정의든, 국가의 정의든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중심 주제가 '정의'인 것은 분명하니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개인의 정의를 살펴보기 위해 이상적인 국가와 불의한 정치체제를 가진 국가들을 차례대로 고찰하며 정의를 행하는 것 자체가 더 좋고 행복한 이유에 대해 치밀하게 논변한다. 방대한 분량의 책을 읽는 내내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여러 방향으로 사유할 수 있어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플라톤 철학의 진수를 맛보고 싶다면,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으로 읽을 수 있는 현대지성 클래식의 <국가>를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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