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위험한 과학책 위험한 과학책
랜들 먼로 지음, 이강환 옮김 / 시공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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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0켈빈, 즉 절대온도 0도인 커다란 물체 옆에 있으면 위험할까요? -크리스토퍼
A. 그러니까 당신은 극도로 차가운 철 큐브를 거실에 설치하기로 했어요. 우선, 절대 만지지 마세요. 만지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기만 한다면 당장 고통 받지는 않을 거예요. 차가운 물체와 뜨거운 물체는 다릅니다. 뜨거운 물체 옆에 있으면 금방 죽을 수 있어요. (금방 죽을 수 있는 방법을 더 보려면 이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펼쳐보세요.) 하지만 차가운 물체 근처에 있다고 해서 곧바로 얼지는 않습니다.          p.24~25

 

<위험한 과학책>, <더 위험한 과학책>에 이어 이 시리즈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아주 위험한 과학책>이 나왔다. 저자인 랜들 먼로는 NASA에서 로봇 공학자로 근무하다 퇴사 후 사이언스 웹툰을 그려 엄청난 화제를 불러 일으켰고, 이 시리즈를 통해서 밀리언셀러 작가가 되었다. 랜들 먼로에게 날아드는 질문들은 점점 위험하고 엉뚱해지고 있지만, 그 어떠한 질문도 제대로 된 과학적 현실로 풀어내는 그의 답변 또한 나날이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태양계가 목성까지 수프로 채워져 있다면 어떻게 될까, 헬리콥터의 회전날개를 손으로 잡고 있는데 누가 시동을 걸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지구에서 철 덩어리를 증발시키면 어떻게 될까, 지금 당장 우주의 팽창이 멈춘다면 우주 끝까지 자동차를 타고 가는 데 얼마나 걸릴까, 뉴욕에 티라노사우루스 렉스가 나타난다면 하루에 몇 명을 잡아먹어야 필요한 칼로리를 얻을 수 있을까, 일생 동안 다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책이 너무 많아진 것은 인류 역사의 어느 지점인가 등등 엉뚱한 질문과 바보 같은 질문에도 랜들 먼로는 과학을 통해 진지하게 답변해준다. 설사 쓸모없는 답이라고 해도 읽는 동안 너무 재미있기 때문에, 유용한 정보를 얻은 듯한 기분도 들게 하는 것이 랜들 먼로의 매력이다.

 

 

Q. 토스트로 우리 집을 난방하려면 얼마나 많이 있어야 할까요? -페테르 알스트룀, 스웨덴
A.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토스터를 계속해서 돌리면 집에 불이 날 테니까요. 일단 불이 붙으면 당신 집은 다 탈 때까지 자체 난방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집에 불이 나기 전 짧은 시간 동안에는 토스터가 아주 적당히 난방을 할 거예요.            p.271

 

네 살 반인 딸이 10억 층 건물을 짓겠다고 고집을 피우는데, 그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감을 잡게 해주기도 어렵고,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설명할 수가 없다는 질문에 대해 랜들 먼로는 건물을 너무 높게 만들면 위쪽이 무거워서 아래쪽을 무너뜨린다며 땅콩버터 탑을 예로 들어 설명해준다. 땅콩버터 실험을 통해 벌어진 일이 건물에서도 일어난다고, 그것이 왜 불가능한 것인지 과학적으로 알려 주는 것이다. 부서지지 않는 20미터 너비의 유리관을 바다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서 바닥에 서면 어떻게 될지, 그러니까 해저에 세운 유리관을 타고 마리아나 해구에 닿는다면 어떨지에 대한 질문에도 아주 흥미로운 대답이 기다리고 있다. 그 외에도 재미있는 질문들이 많았다. 11사이즈의 신발 상자를 채우는 가장 비싼 방법, 진공관으로 스마트폰을 만든다면 어떨지, 한 사람이 구름 하나를 통째로 먹을 수 있는지, 돋보기를 이용해서 달빛으로 불을 붙일 수 있는지 등등 아주 쉬워 보이는 질문도 있고, 말도 안 되는 질문도 있었지만, 어떤 질문이든 그 기발한 상상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에 대한 랜들 먼로의 대답은 더 기발했고 말이다.

 

 

이 책은 그렇게 '일상적인 일들을 흔하지 않은 방법으로 접근하여 시도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지'를 살펴보는 과학책이다. 그러니까, 어떤 상황을 해결하려고 할 때 옳은 방법과 잘못된 방법과 너무나 어이없이 복잡하고 과도하며, 바보 같아서 아무도 시도하지 않을 방법이 있다면, 바로 그 세 번째 방법에 대한 것이다. 말도 안 되게 쓸모 없는 질문들로 가득 차 있음에도 아이러니하게 끝내 주게 재미있는 과학책이다. 기상천외한 궁금증에 대해 과학적인 수치와 계산, 그리고 논리적 추론 방식을 통해서 그 상상력의 현실 버전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실제 과학 이론과 수식들로 치밀하게 계산된 내용들을 수록하고 있지만, 기발한 인포그래픽과 재미있는 그림들로 가득 차 있어 전혀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도 특별한 점이다. 특히나 랜들 먼로 특유의  ‘막대 모양 캐릭터’가 등장해서 딱딱하고, 어렵게 느낄 수도 있는 과학적 추론과 이론들을 쉽고 재미있게, 위트와 풍자까지 더해가면서 보여주고 있어 누구라도 과학을 친근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물리학, 화학, 기상학, 생물학, 천문학 등의 다양한 분야의 과학적 지식을 담고 있는 이 책은 '과학에서 중요한 것은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온갖 황당한 상황을 상상해보고, 쓸모 없어 보이는 것에도 진지하게 호기심을 멈추지 않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에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던진 뒤 황당한 답을 찾아 나가는 것, 바로 그것이 진짜 과학의 세계라는 것을 유머를 통해서 들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상상만 했던 일들이 과학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이 끝내주게 재미있는 과학 책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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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의 니쿠코짱!
니시 가나코 지음, 이소담 옮김 / ㈜소미미디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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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쿠코가 둔감한 사람이라 다행이다. 이것저것 캐물으면 귀찮으니까. 동시에 마음 어딘가에서 지금 내 상황을 알아주면 좋겠다고 바랐다. 니쿠코에게 상담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지만, 이 너무나도 싫은 기분을, 자그마한 절망을 누가 알아주면 좋겠다. 생각해보면, 니쿠코가 그날 마리아 집에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지금 내 상황도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엉뚱하게도 니쿠코가 원망스러웠다. 어린애 같은 감정인 줄은 아는데, 연신 바뀌는 텔레비전 채널을 보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니쿠코가 얄미웠다.           p.114

 

북쪽 지방의 작은 항구 마을, 고깃집에서 일하는 엄마 니쿠코와 초등학생 딸 기쿠코는 달라도 너무 다른 모녀다. 키 작고, 뚱뚱한 니쿠코는 순진한 성격 때문에 나쁜 남자들만 만나 번번이 실연 당하지만, 언제나 무한 긍정 에너지가 넘치는 성격이다. 반면 기쿠코는 삐쩍 마른 체형에 길쭉한 팔다리, 하얀 피부, 짧은 머리에 호두처럼 큼지막한 눈을 가졌다. 어딜 보더라도 전혀 닮지 않은 엄마와 딸이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성격도 달라서, 사춘기가 된 기쿠코는 가끔 엄마 니쿠코가 부끄럽다. '니쿠코는 정말로 바보인가? 하는 생각'을 할 만큼, 거지같은 남자들에게 몇 번이고 속아 넘어가는 엄마를 이해하기란 딸이라도 결코 쉽지 않겠지만 말이다.

 

초등학교 5학년인 기쿠코의 반에는 브래지어를 하는 애도 있고, 생리를 시작한 애도 있었다. 하지만 기쿠코의 몸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예전 그대로다. 가슴은 납작하고 다리는 나뭇가지 같다. 기쿠코는 남자애 같은 자신의 몸이 좋다고, 앞으로도 가슴도 커지지 않고 생리 따위도 시작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렇게 어른이 되기 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빨리 이 시기가 끝나 얼른 어른이 되고 싶다는 마음도 가지고 있다. 모순이지만, 양쪽 다 기쿠코의 진심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반에서는 여자아이들의 편 가리기 싸움이 시작되고, 기쿠코는 어느 쪽에도 속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갑갑한 항구 거리에서 하루빨리 탈출하기를 바라던 기쿠코는는 색다른 소년 니노미야의 세계를 알게 되고, 마을의 따뜻하고 개성 넘치는 이웃들과 지내며 점점 이곳이 좋아진다. 그런데 엄마에게 또 다른 사랑이 찾아오면서 결국 또 그 남자에게 버림 받아서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될 까봐 불안해진다.

 

 

 

"살아 있는 한 쪽팔리는 걸 두려워할 것 읎어. 애답지 않다는 소리는 안 할 기야. 애답다느니 뭐니는 어른이 만든 환상이니까. 모두 각자 알아서 있으면 되는 기야. 다만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어른이고 뭐고 읎다. 그러니 니가 아무리 노력해서 좋은 어른이 되려 해도 괴롭고 쪽팔리는 일을 반드시, 틀림없이 겪게 될 기야. 그건 피할 수 읎지. 그러니까, 그때를 위해 비축해 두라. 어릴 때 잔뜩 쪽팔리고 폐를 끼치고 혼나고 일일이 상처 받으면서 그렇게 또 살아가는 기야."            p.260~261

 

<사라바>, <우주를 뿌리는 소녀> 등으로 만났던 니시 가나코의 이 작품은 지난 달에 애니메이션 영화로도 개봉했다. 영화로 보면 니쿠코와 기쿠코의 확연히 다른 외모와 성격이 더 두드러지는데, 너무 밝고 사랑스러운 작품이었다. 니시 가나코는 '항구에 있는 고양이를 보고 싶다는' 이유로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로 여행을 가게 되는데, 이 작품은 그 여행을 계기로 만들어졌다. 여행의 목적이었던 고양이는 단 한 마리도 보지 못했지만, 이시노마키시 주변 항구를 부지런히 돌아보고, 항구에서 작은 고깃집 한 채를 발견하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보낸 시간을 토대로 이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아마도 니쿠코가 일하는 항구 근처의 고깃집도 여기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니쿠코에게 모든 것의 기준은 자기 자신이다. 먹고 싶을 때 먹고, 말하고 싶은 건 전부 말해 버리고, 졸리면 그냥 잔다. 다른 사람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전혀 걱정하지 않고,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반성도 물론 없다. 그저 생긴 그대로, 니쿠코 그 자체로서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어떤 비극을 겪어도 퉁퉁한 볼에 발그스름한 복스러운 얼굴로 비장감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캐릭터이지만, 이상하게 사랑스럽다. 인간관계를 시작하는 것도 서툴고, 분위기를 읽는다거나 상황을 확인한다거나 그런 게 전혀 없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언제나 전력으로 니쿠코'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가끔 성가신 인간 취급을 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하고, 속아 넘어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쿠코는 슬픔이나 절망의 감정과는 거리가 멀다. 이렇게 매사에 엉망진창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의연하게 자기 식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니쿠코의 유쾌한 매력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이다. 세상 어딘가에서 여전히 긍정적인 모습으로 살고 있을 니쿠코를 그려 보면서, 이 작품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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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프고 아름다운 코끼리
바바라 포어자머 지음, 박은결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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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항상 옳다. 언제나 옳다. 그리고 감정은 합리화를 한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고, 무시될 수도 없다. 어떤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그 감정을 오롯이 느끼는 것이다. 자신이 속한 사회와 자신의 신념이 미리 적어둔 '숫자'와는 상관없이, 자신이 옳다고 느끼는 바로 그 색깔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p.51~52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가슴 위에 코끼리가 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라면 어떨까. 당연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기에는 코끼리가 너무 무거우니까. 그렇게 어둠 속에 누워 모든 게 얼마나 어려운지, 인생은 얼마나 허무한지, 나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독일의 언론사 《쥐트도이체 차이퉁》의 기자 바바라 포어자머는 이 책에서 자신이 30여 년간 앓고 있는 우울증을 '코끼리'에 비유한다. 우울증을 비롯해 가면증후군, 감정표현불능증, 번아웃 등 자신의 경험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이 책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임에도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우리 모두 우울과 무기력, 공허함이 만연한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적절한 치료를 방해하는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바로잡고, 현대인과 우울증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고, 지극히 현실적인 조언을 해 준다. 실제로 저자는 수십 년째 한 달에도 몇 번씩 편두통 발작에 시달리며, 약물과 심리치료가 필요한 심한 우울증도 반복적으로 겪어 왔다. 어느 쪽이든 우울증은 늘 그 자리에 있었고, 마치 일상처럼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 삶을 살아내는 것, 어떻게 하면 계속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결국, 우리 모두는 우울증을 앓든 말든 상관없이 이따금 좋지 않은 날들을 보낸다. 잠이 부족하거나 배우자와 싸우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슬프거나 미래를 불안해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에서 (혹은 다른 이유에서) 가끔 다른 이를 불친절하게 대하기도 하고,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고, 평소만큼 많은 일을 해내지 못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냥 가끔 산만하거나, 게으르거나, 심술궂거나, 다른 방식으로 불완전하다. 아파서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다.           p.274~275

 

언제부턴가 우울증을 겪는 이들의 자전적인 이야기나, 우울증의 치료 과정에 대한 책이 많아졌다. 우울증을 겪어 본 적도 없고, 주변에 우울증으로 힘들어 하는 경우를 접해본 적도 없는 나는 주로 이러한 책들을 통해 우울증에 대해 알게 되었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정신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혹은 엄청난 트라우마가 되는 사건을 겪었기 때문에 우울증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우울증은 특별한 계기 없이 걸릴 수 있고, 현재 괜찮다고 하더라도 언제든지 다시 찾아올 수 있으며, 누구라도 아무런 예고 없이 겪을 수 있는 것이었다. 우울증이 단순히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뇌에 영향을 미쳐서 흥미의 감소, 집중력 저하, 사고력 감퇴, 괴로움과 절망감, 그리고 건망증으로 이어진다는 점도 우리가 이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우울증을 폐렴이나 위장병처럼 평범한 질환처럼 여기지 않은 것이 사회적 시선이고, 정신적 질병도 육체적 질병처럼 평등하게 다룰 수 있게 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것이 현실이다. '우울증이 진짜 병이 아니라는 편견'부터 버릴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책의 저자는 어린 시절부터 자기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조용하고 울적한 아이였다고 한다. 16살 때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이대로 죽으면 어떨까 상상했을 정도라고 하니 말이다. 이후 성인이 되어 가정을 이루고, 출산의 과정을 겪으며 엄마가 되었고, 직업적으로도 성공했지만 우울증은 여전히 함께였다. 우울증은 '감정'이 아닌 '질환'이기 때문에 삶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녀의 상태는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저자는 부모가 이혼했던 것도 아니고, 구타, 학대, 폭력, 방치 등을 경험한 적도 없었기에 심각한 우울증에 걸릴 권리가 없다고, 우울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이제야 제대로 된 결론을 내리게 된다. 알레르기나 당뇨를 가진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자신도 그냥 그런 것이라고, 과거에 기인한 이유 같은 걸 찾을 필요는 없다고 말이다. 그래서 자신과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길 바라며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아직 우울증을 겪어 본 적은 없지만, 언젠가 나에게도 무기력이 삶을 덮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 이 책과 함께 중요한 건 그저 삶을 살아가는 거라고 말해줘야겠다. 누구나 우울할 수 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살아낼 의미가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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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뉴욕 수업 - 호퍼의 도시에서 나를 발견하다
곽아람 지음 / 아트북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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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명의 사람들이 건물 밖 의자에 기대앉아 햇볕을 쬐고 있는 그림이다. 그중 네 명은 광활한 평원과 먼 산줄기를 바라보며 이른바 '산멍'을 하고 있지만 화면 맨 왼쪽의 남자만은 무리에 속해 있지 않았다...'꼭 나 같은 사람이구나' 생각하며 나는 웃었다. 자연의 아름다움보다 책 속 세계에 더 매료되는 사람. 남들이 흥겨워할 때 고요히 자신만의 세계에 몰두하는 사람. 그래서 언제나 무리를 벗어나 길 잃은 양 같은 사람.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 호퍼는 찬란한 태양 아래 세계를 표현하면서도 한 점 고독을 그려넣는 걸 잊지 않았다. 호퍼다운 그림이라 생각했다.           p.52

 

곽아람 작가의 책을 꽤 많이 읽어 왔다. 청춘의 독서를 이야기하고, 절판 아동 도서 수집기로 유년의 독서를 돌아보고, 아메리카 문학 기행 등 책에 대한 책, 독서 에세이를 여러 권 읽었다. 글 쓰는 직장인으로 대학 시절의 공부 여정을 되돌아보는 책도 있었고, 미술사 전공을 바탕으로 그림 읽기에 대한 책도 있었다. 곽아람 작가는 20년차 신문기자이기도 하다. 2003년 기자 생활을 시작해 현재 <조선일보> 최초의 여성 출판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곽아람 작가는 직장생활 중에 주어진 1년간의 해외연수 기회를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보냈고, 그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2018년에 <결국 뉴요커는 되지 못했지만>이라는 제목으로 출간이 되었고, 이번에 개정판이 나왔다.

 

세월이 흐를수록 뉴욕 생활에 드리웠던 호퍼의 영향이 더 뚜렸해졌기 때문에 이번 개정판에서는 호퍼의 작품과 관련된 이야기를 추가해 고쳐 썼다고 한다. 기존 글을 다듬고, 새로 쓴 글을 추가한데다, 표지 디자인까지 예쁘게 바뀌어서 완전히 새로운 신간을 만나는 듯한 기분으로 읽었다. 그녀가 회사 연수차 1년간 뉴욕에서 홀로 생활했던 시기는 서른여덟의 여름 끄트머리와 가을, 겨울, 그리고 서른아홉의 봄과 여름 초입이었다. 어학연수 한번 다녀온 적 없는 30대 후반 여성이 난생처음으로 해외에서 살면서 겪어야 했던 좌충우돌 견문록은 매 순간이 수업이었고, '나란 어떤 인간인가'를 배우는 시간들이었다고 한다. 학교도 다니고 크리스티 에듀케이션 과정도 밟았지만, 교실 밖에서도 많은 걸 배웠다고 하는데, 오페라를 보고, 여행을 하고, 혼자 사는 생활을 멈추고 룸메이트들과 함께 살며 미국 사회의 이모저모를 숙고하고, 다양한 문화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자식의 고통스러운 삶을 예견하는 거창한 일과는 거리가 멀지만, 내게도 독서란 일종의 제의(祭儀)적 성격을 띠고 있다. 책읽기란 오래전부터 내게 또다른 세계와의 만남, 일종의 접신(接神)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뉴욕에서의 1년간은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그곳은 내게 이미 ‘다른 세계’여서 굳이 책읽기를 통해 또다른 세계를 꿈꿀 이유가 없었다. 대신 나는 뉴욕 구석구석을, 서점을, 낡은 책들로 가득한 헌책방을 탐험하며 내면의 성채를 쌓아올릴 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책이라는 오래된 친구를 만나고 다녔다.           p.204

 

'괴테처럼 되겠다고 결심하고 머무른 뉴욕에서 정작 내가 만난 건 괴테보다는 호퍼였다'고 그녀는 말한다. 괴테가 자신의 롤모델이었지만, 호퍼는 그냥 자기 자신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 속에서는 대도시의 고독을 주제로 하는 호퍼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작가는 호퍼와 자신의 유사점을 찾아내고, 그림 그림 속 인물을 연상시키는 사람들과 마주치고, 주변 세계에 도무지 속하지 못한 것 같은 이방인으로서의 감각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뉴욕 생활을 해낸다. 뉴욕에서 지냈던 1년 동안 낯선 환경 속에서 새로운 것들과 부딪히며 온몸으로 체득한 생경한 감각을 모조리 붙들어 매일 같이 글로 썼는데, 이 책이 바로 그 결과물이다.

 

헬스클럽 강좌에 줌바댄스가 있어서 한번 나갔다가 줌바의 매력에 푹 빠져버리기도 하고, 방문 연구원으로 있었던 NYU IFA에서 몇몇 미술사 과목을 청강하다가 알브레히트 뒤러에 대한 수업을 듣고는 뒤러의 매력을 알게 되기도 한다. 특히나 그 수업이 진행되었던 강의실에는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정도로 거동이 불편하지만 두뇌만은 그 어떤 젊은이보다 바쁘게 움직이는, 지적 열망으로 가득 찬 노인들의 열정도 기억에 남는다. 현대미술의 중심지라 일컬어지는 뉴욕의 미술 세계를 경험하고 기록한 내용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데, 아트 비즈니스의 현장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그리고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모건라이브러리, 뉴욕현대미술관, 브루클린미술관 등 도시 곳곳에 자리한 미술관들을 다니며 작품을 감상한 이야기들도 뉴욕의 풍경들을 생생하게 체감하게 해준다. 일만 하느라 노는 것도, 즐기는 것도, 자신과 온전히 시간을 보내는 것도 몰랐던 작가가 때로는 쓸쓸하고 때로는 난감했던 뉴욕이라는 도시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한 뼘 더 성장하게 된 것이다.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야겠다는, 하고 싶은 것은 미루지 말고 다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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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로 만든 마을 - 에밀리 디킨슨이 사는 비밀의 집
도미니크 포르티에 지음, 임명주 옮김 / 비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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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에밀리가 시내에 나가는 횟수를 줄이기 시작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얼마 안 가 정원까지만 나가거나 집 안에만 머물렀다. 그러다가 2층에서 꼼짝하지 않더니 결국 방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방이 에밀리의 집이 되었다. 꼭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절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에밀리는 오래전부터 방보다 더 작은 손바닥만 한 종이 위에서 살고 있었다. 그 집은 누구도 에밀리에게서 뺏을 수 없었다.          p.122

 

거의 평생 집을 떠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그 작은 방 안에서 누구보다 대담하게 글을 썼다. 에밀리 디킨슨이 쓴 시와 편지, 산문은 2000편에 달하지만, 살아 있는 동안 출간된 시는 몇 편 안 된다. 에밀리는 '쓴다'는 것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자기만족이 아니라면 굳이 출간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19세기 시의 정형을 파괴하는 새로운 형식으로 미국의 시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시인이지만, 생의 대부분을 자신의 방에만 머물렀다는 이유로도 고독과 은둔의 대명사로 더 알려져 있다. 캐나다의 소설가 도미니크 포르티에는 각종 기록과 시인의 글을 기반으로 에밀리 디킨슨의 삶을 재구성한다. 에밀리의 삶과 저자 자신의 이야기를 함께 풀어 내면서 소설과 산문시, 에세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파격적인 스타일과 섬세한 문체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에밀리 디킨슨의 사진은 단 한 장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긴 목에는 검은색 벨벳 리본을 둘렀고, 머리는 가운데 가르마를 타서 가지런히 묶었고, 옷은 소박한 줄무늬 원피스를 원피스를 입은 창백한 표정의 사진이다. 더 어렸을 때나 더 나이 들어 찍은 사진이 전혀 없기에, 에밀리 디킨슨은 영원히 그 얼굴로 우리에게 기억될 것이다. 최근에 크리스티앙 보뱅이 에밀리 디킨슨에 대해 쓴 전기물인 '흰옷을 입은 여인'의 표지 이미지로 사용된 바로 그 사진이다. 도미니크 포르티에와 크리스티앙 보뱅의 작품을 비교하면서 읽어봐도 좋을 것이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라는 책을 읽었을 때, 19세기의 거의 모든 여성 작가가 '미친 여자'라는 씁쓸한 자화상을 자기 소설의 다락방에 은닉시켰던 반면, 에밀리 디킨슨은 스스로 미친 여자가 되었다는 문구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에밀리의 삶 자체가 일종의 소설이고 이야기였다는 것이다.

 

 

 

완벽한 삶이었다. 완벽하게 닫혀 있고 완벽하게 자신만으로 둘러싸인 삶. 계란처럼 둥글고 꽉 찬 삶. 하루는 돌고 도는 순환고리다. 여름에는 황금빛, 가을에는 구릿빛, 겨울에는 은빛, 봄에는 핑크빛으로 변하는 나무 꼭대기 위로, 해가 떠오르는 것으로 시작해서 반대쪽 하늘로 해가 사라지면 마무리된다. 그러면 백지 같은 칠흑의 밤이 찾아오고 다음 날 아침 다시 하루가 시작된다. 하지만 완전히 똑같은 날은 아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반복 속에서, 그리고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에밀리는 순간순간 풀잎이 속삭이는 소리와 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포착했다.             p.186

 

캐나다의 몬트리올에 살던 저자는 딸이 태어나고 사 개월이 지났을 무렵, 남편의 회사가 보스턴에 사무소를 열게 되어 가족 모두가 세상의 반을 돌아 이사를 하게 된다. 그들은 사우스엔드 지역에 살게 되었는데, 그곳은 영국을 제외하고 빅토리아 양식 건물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곳이었다. 저자의 집은 보스턴의 전형적인 주택 형태인 높고 붉은 벽돌 건물의 3층과 4층에 자리한 복층 집이었다. 저자는 그곳이 절대 우리 집이 될 수 없었다고 느꼈다. 그곳에선 더 이상 자신의 서재 창 너머로 보이는 나무 풍경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집을 얻은 동네는 '홀리 요크'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 장의 이야기는 에밀리가 라틴어, 식물학, 문학 등을 배웠던 여학교 마운트 '홀리요크'로 이어진다. 그렇게 현재와 수백 년 전의 과거가 교차되고 연결된다. 저자가 책에서 본 사진들과 묘사를 바탕으로 자신이 만들어낸 상상의 홈스테드에서 매일 아침 에밀리를 만났던 것처럼,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종이와 펜으로 그려낸 마을에 가볼 수 있는 것이다.

 

에밀리는 종이에 문장 몇 줄, 단어 몇 개 쓰는 것만으로도 순간적으로 자신을 갉아먹는, 이름도 없고 대상도 없는 절박함으로부터 벗어나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구원을 받은 에밀리는 불행에서 시를 끄집어 내려고 애썼고, 그러한 작품들을 지금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곳에선 시간이 흐르지 않고 그대로 멈춰 있는 것만 같다. 에밀리 디킨슨의 사망 증명서에는 '직업'이라는 글자 옆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필체로 '집'이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그 집은 에밀리가 자신만의 우주를 창조했던 실제 공간이자, 종이로 이루어진 문학적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서로 다른 삶을 산 시인과 소설가의 이야기가 함께 연결되며, 기존의 전기문학과는 전혀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이 작품을 통해 지금껏 베일에 싸여 드러나지 않았던 에밀리 디킨슨의 일상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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