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미쳐 있는 - 실비아 플라스에서 리베카 솔닛까지, 미국 여성 작가들과 페미니즘의 상상력
샌드라 길버트.수전 구바 지음, 류경희 옮김 / 북하우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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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들고일어나고 있다. 우리의 불결한 몸에는 강력한 힘이 넘쳐난다. 우리의 열등한 머릿속에서 미친 듯한 분노가 일어나 선명하게 불타오른다. 머리카락을 거칠게 휘날리고 눈을 사납게 부릅뜨며 노려보고 분노에 찬 목소리를 날카롭게 다듬으면서 (...) 우리는 역사상 그 어느 세력보다 더 오래되고 잠재적으로 더 대단한 분노를 느끼며 들고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이번에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p.193

 

제인 오스틴에서 에밀리 디킨슨까지, 존 밀턴에서 월트 휘트먼까지 ‘다락방의 미친 여자’라는 키워드로 재구성한 영미 여성 문학사, 무려 천백 페이지가 넘었던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읽었다면, 이 책 역시 자연스럽게 읽게 된다. 이 책은 샌드라 길버트, 수전 구바가 19세기 여성 작가들에 대해 파고들었던 <다락방의 미친 여자> 이후 40년 만에 펴낸 신작이니 말이다.

 

 

이번에는 무대를 19세기에서 현대, 즉 1950년부터 2020년까지의 세계로 옮겨왔다. 그리고 '세상이 요동칠 때 멈추지 말고 계속 나아가라고 독려해주는 듯한 여성 작가들을 불러들인다. 실비아 플라스, 존 디디온, 에이드리언 리치, 어슐러 르 귄, 수전 손택, 토니 모리슨 등 읽고 쓰고 맞서 싸운 여성들의 계보가 이 책 속에서 펼쳐진다. 전작이 워낙 방대한 분량이었기에, 육백 페이지를 훌쩍 넘는 분량이 가뿐하게 느껴지지만, 5주간 Mad Writing Club으로 읽게 되어 차근차근 나눠서 읽었다.

 

1950년대를 다루는 1부의 1장과 2장, 1960년대를 다루는 3장과 4장에 이어 1970년대가 되면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본격적으로 가부장제에 저항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2만여 명의 여성들이 미국 여성 참정권 획득 5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사상 최대 규모의 '여성 평등 시위'를 벌이며 1970년 여름이 시작되었다. 하원에서 성평등 헌법 수정안이 짧은 토론 끝에 통과되었고, 케이트 밀릿이나 수전 손택 같은 논객들은 가족 로맨스를 해체했으며, 토니 모리슨과 에리카 종부터 리타 메이 브라운에 이르는 소설가들은 여성을 쇠약해지게 만드는 성 역할에 대해 분석했다. 그야말로 수많은 여성들이 자신을 마비시키고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는 상태를 야기하는 억압에 대한 충격적인 각성이 시작되는 1970년대였다. '우리가 먹는 것이 곧 우리지만, 우리가 읽고 쓰는 것도 우리다.' 문장이 여운처럼 길게 가슴에 남았다.

 

 

펠로시가 일어선다. 엄숙한 모습으로. 그러고 난 뒤 악평을 불러일으키는 것만큼이나 상징적이고 극적인 몸짓으로, 침착하게 대통령 연설문 각 부분의 각 장을 반쪽으로 찢는다. 거짓 텍스트, 자아도취의 텍스트, 나라를 분열시키고 나라의 안전망들을 와해시키려는 불한당의 텍스트를 찢어발기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그저 트럼프의 장광설에 등장하는 "미친 낸시"에 불과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그저 미친 여자에 불과한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타당한 이유로 여전히 미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우리 두 사람도 마찬가지다.          p.488

 

케이트 밀릿의 <성 정치학>, 수전 손택의 <O 이야기>, 토니 모리슨의 <가장 푸른 눈>, 마거릿 애트우드 <신탁받은 여자>, 실비아 플러스의 <벨 자> 등에서 여성 작가들은 등장인물의 행복을 파괴하는 사회화 과정을 주제로 여성의 삶에 대해 묘사했다. 예전에는 '정상적이고' '규범적으로' 보였던 모든 것이 기이하게 보이기 시작했고, 그동안 학교에서 배웠던, 피비린내 나지만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역사는 바로 가부장제의 역사이자 우리가 깨어나 벗어나려 애쓰는 악몽과도 같은 제도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흔들리는 1950년대에서 시작해 폭발하는 1960년대, 깨어난 1970년대를 거쳐 이번 주에는 페미니즘을 다시 쓴 1980년대와 1990년대, 후퇴와 부활의 2000년대에 이르렀다.

 

 

"이론의 여지 없이 누구나 받아야 하는 존중을 위해 싸워야 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이는 N.K.제미신이 '부서진 대지' 3부작을 쓰고 책을 헌정한 대상들에 대해 밝힌 말이다. '부서진 대지' 3부작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이라, 이 작품의 의미하는 바와 영향력에 대해 이 책에서 만날 수 있어 더욱 반갑게 읽었다. 여성의 생각과 언어가 거부되던 시대에 의문을 품고 반기를 든 여성 작가와 예술가들의 계보는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언어'가 중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열정적인 분노를 강력한 글쓰기로 승화시킨 여성 작가들의 목소리를 잊어선 안될 것이다.

 

Mad Writing Club 5주차가 되었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니 다시 첫 장을 살펴보고 싶어 졌다. 이 책의 첫 장에서 저자는 '항의 행진을 할 수 없는 사람은 글을 쓴다'고 서두를 열었다. 2017년 1월 21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다음 날 있었던 항의 시위인 여성 행진을 준비하고 있을 때, 직접적인 시위 참가가 불가능해 나름의 연대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았던 것이 바로 이 책을 집필하기 시작한 거였다고 말이다. 그리하여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여겨지는 제2물결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기 위해 대표적 여성들(시인, 소설가, 극작가, 가수, 저널리스트, 이론가 들)을 선별하면서 이 책이 시작되었다. 샌드라 길버트, 수전 구바가 19세기 여성 작가들에 대해 파고들었던 <다락방의 미친 여자> 이후 40년 만에 펴낸 신작이라는 점도 의미가 있지만, 이야기의 무대가 19세기에서 현대, 즉 1950년부터 2020년까지의 세계로 옮겨왔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게다가 실비아 플라스, 존 디디온, 에이드리언 리치, 어슐러 르 귄, 수전 손택, 토니 모리슨 등 읽고 쓰고 맞서 싸운 여성들의 서사는 그 자체로 뭉클해지는 뭔가가 있었다. 우리와 우리의 많은 친구들은 유리 천장을 깨부수고, 깨진 유리들을 밟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미쳐 있다. 현실은 여전히 미친 듯 화가 나고 혼란스럽고 반발감이 치솟게 우리를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나가기 위해선, 읽기와 쓰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이 책은 말한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읽었다면, 이 책 <여전히 미쳐 있는>도 놓치지 말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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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가르면 피가 나올 뿐이야
스미노 요루 지음, 이소담 옮김 / ㈜소미미디어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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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교차로 한가운데에서 아카네는 당연히 자기 눈을 의심했다.
그럴 리 없어. 이야기 속 인간이 이 세계에 있을 리 없어. 그러나 조금 전에 본 얼굴도 체격도 복장도, 틀림없이 머릿속에 그린 모습 그 자체였다. 잡음을 찢는 듯한 그 발소리도 뇌가 확실하게 기억한다.
쫓아가야지. 그렇게 결정한 것도 잠깐, 눈앞에 키가 큰 그림자가 나타났다. 올려다보자 양복 입은 남성이 방해된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봐서 아카네의 감정이 자기 자신에게 칼을 들이밀었다.        p.38

 

다정한 부모님, 사이좋은 친구들, 먹고사는 데에 걱정이 없고, 괴롭힘 같은 일과도 무관하게 학교에 다니고, 용돈이나 벌 생각으로 서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이고, 그동안 사귄 연인들과의 관계도 문제없이 행복했던, 평범한 여고생 아카네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한 가지 있다. 바로 끊임없이 타인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에 사로잡혀 자신의 본마음과는 다른 모습으로 연기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매순간 상대의 반응을 살피고, 자신이 좋은 인상을 준 것 같다고 느껴야 안도하는, 그럼에도 그러한 자신의 감정 때문에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그런 상태였던 것이다. 연인 앞에서도, 아르바이트 동료 앞에서도, 친구 앞에서도 오로지 한 가지 감정에 지배된 채 행동하는 자신을 절실하게 혐오하면서도, 사랑받고 싶다는 터무니없는 욕구에 충실한 삶을 사느라 아카네는 하루하루 괴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신간코너에서 <소녀의 행진>이라는 소설책을 만나게 되고, 폭발할 것 같은 경탄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은 아무도 알 리 없는 나 자신을 이해해준다고,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봐주지 않는 내면을 봐준다고, 존재해도 된다는 희미한 권리를 자신에게 부여해준다고 느낀 것이다. 그리고 소설 속 등장인물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이야기 속 인간이 현실 세계에 있을리 없다고 머리로는 생각하면서도, 얼굴도 체격도 복장도, 틀림없이 소설을 읽으며 머릿속에 그린 모습 그 자체였던 터라 아카네는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말을 걸게 된다. 그리고 아카네는 그와 함께 소설 속 주인공 소녀가 겪었던 일들을 하나씩 재현해보게 되는데... 언젠가는 자신도 주인공 소녀처럼 달라질 수 있을 거라는 바람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사람이든 물건이든 소설이든, 이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존재를 만난 건 정말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해."
그 말을 들은 아카네에게서 수줍은 미소가 사라졌다. 진지한 표정으로, 그래도 지울 수 없는 기쁜 빛을 입가에 남기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책은 저를 지탱해줘요. 고민이 많더라도 주인공처럼 언젠가 달라질 수 있다고 믿어요. 그렇지, 아이 씨도 언젠가 읽어주면 좋겠어요."               p.188

 

누구나 살면서 기댈 곳이 하나쯤 필요하다. 이 고루한 삶을 버티게 해 줄 무언가. 두려움과 불확실성을 이겨낼 수 있는 무언가. 그걸로 인해 이 세상에 나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다시 살아갈 힘이 된다. 그게 소설이든, 노래든, 영화든, 혹은 아이돌이든 간에 말이다. 그로 인해 사고방식이 달라지고, 행동이 바뀌게 되는 경험은 삶을 조금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인생의 지표로 삼게 되는 건 크게 문제가 없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자신을 만들어낸 이야기인 픽션에 완전히 빼앗기는 건 문제가 될 수 있다. 이 작품 속 아카네처럼 말이다. 소설 속 주인공을 흉내 내고, 소설 속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대상과 비슷한 행동을 하면서, 점점 자신의 현실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어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 작품에는 주인공 아카네 외에도 타인에게 보여줄 자신의 스토리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아이돌과 타인에게 사랑받기 위해 자신을 연출하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의 본성을 폭로하고자 몰래 촬영을 하는 소년,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여장을 하고 다니는 아름다운 청년 등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진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가 보여지고 있다.

 

이 작품은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화제의 데뷔작만큼이나 파격적인 제목을 가진 스미노 요루의 신작이다. 옮긴이에 따르면 '배를 가르면'이라고 번역한 원제는 본심을 털어놓는다는 관용어라고 한다. 본심을 내보이는 것을 배를 가른다고 표현하다니.... 너무 파격적이지만 진정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그만큼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 무시무시한 제목에 비해 담고 있는 내용은 스미노 요루 특유의 감성이 돋보이는 청춘물이라 부담없이 읽어도 된다. 작가 역시 집필 초기 단계에 제목을 떠올렸을 때 그로테스크하다고 판단했다고 하는데, 사실 책을 다 읽고 나면 제목이 작가의 감성과도, 의미 면에서도 적합한 것 같다고 느껴졌다. 자연스레 데뷔작과도 연결되는 제목이기도 하고 말이다. 누구나 타인에게 보여줄 수 없는 진심을 마음 속 깊은 곳에 간직한 채 살고 있을 것이다. 타인을 배려한다는 명목 하에, 혹은 내면은 보여주기가 어렵거나 싫어서 등 이유는 각기 다르더라도 말이다. 그러니 누군가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구원받았다고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기적과도 같고, 마법과도 같은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허구의 이야기가 가진 힘, 소설만이 보여줄 수 있는 힘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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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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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나도 그중 한 명이다) 해피엔드를 싫어한다. 우리는 속았다고 느낀다. 가해가 규범인데. 파탄의 길이 가로막히면 안 되는데. 산사태 때 산이 움츠린 마을을 불과 2,3피트 남겨놓고 무너지기를 그만둔다면, 산의 행동은 비정상적일 뿐 아니라 비윤리적이다. 내가 이 착한 노인이 나오는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읽고 있었다면, 그가 크레모나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강연일이 이번 주 금요일이 아니라 다음 주 금요일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편을 더 선호했을 것이다.                 p.33

 

러시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티모페이 프닌은 미국으로 망명해 웬델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치고 있다. 이야기는 기차의 객실에 앉아 있는 그의 외모에 대한 묘사로 시작되는데, 어딘가 우스꽝스럽기 그지 없다. 게다가 프닌 교수는 현재 기차를 잘못 탄 상태였고, 정작 자신은 그 사실을 모르는 상태다. 그가 맡은 러시아어 과목의 수강 현황을 보면 수강생은 몇명 되지도 않았고, 가르치는 일에 대한 태도 또한 가벼운 아마추어의 태도였다고, 작가는 다섯 페이지에 걸쳐서 그의 약점들에 대해 묘사한 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닌에게는 상대를 무장 해제시키는 고풍스러운 매력이 있다고 쓴다.

 

우스꽝스러운 외모와 엉터리 영어로 과거를 트라우마처럼 회고하는 망명자이자 아웃사이더인 프닌의 삶은 주인공 프닌의 서사와 그의 이야기를 들려 주는 화자의 서사, 그리고 작가 노보코프의 시점인 세 차원으로 서술된다. 화자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다가 나중에야 드러나고, 작가인 나보코프의 시점은 마지막 7장에서 본격적으로 보여지지만, 작품 곳곳에서 이 세 가지 서술 차원이 중첩되고 균열되고 분리되어 독자로서 읽기 결코 수월한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기존 나보코프의 다른 작품들을 충실히 읽어온 독자라면 언뜻 실험적인 시점 전환 기법이라던가, 단순해 보이지만 이면은 매우 복잡한 이야기라는 점에 있어서 흥미로운 부분이 많은 작품임에는 분명하다.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이의 마음이라는 수용적 공간에 평생 남아 있는 경우가 있는데, 가정 교사와 내가 프닌 박사의 대기실에서 보낸 시간의 공간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미니어처 창문의 푸른 자국이 벽난로 선반 위 오르몰루 시계의 유리 돔에 비치고 두 파리가 축 늘어진 샹들리에를 중심으로 느린 사각형을 그리는 공간. 깃털 장식 모자를 쓴 숙녀와 검은 안경을 쓴 그녀의 남편이 부부용 침묵 속에서 다인용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이어, 남편이 프닌 박사의 서재로 갔다. 내가 가정 교사의 얼굴에서 묘한 표정을 알아챈 것은 그때였다.               p.263~264

 

이 작품은 미국에서 출간된 지 65년여 만에 국내에 초역으로 이번에 출간되었다. 소품이라는 이유로 처음에는 호평을 받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나보코프를 단순한 망명 작가가 아닌 독창적인 작가로 각인시키는 작품이 되었다고 한다. 나보코프는 이 작품을 “<롤리타>의 참을 수 없는 마력을 벗어나 잠시 환한 곳으로 탈출하는” 글이라고 언급했고, 자신의 모든 소설 캐릭터 가운데 프닌을 인간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았다고 한다. 나보코프 연구자 브라이언 보이드는 <프닌>을 “나보코프의 모든 소설 가운데 가장 코믹하고 가장 애달프고 가장 단순한 소설”이라고 평가했고,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데이비드 로지는 "“나보코프가 가장 유명해진 책은 『롤리타』이지만 독특하고 독창성 있는 작가로서, 망명 작가가 아닌 미국인으로서 명성을 처음으로 얻은 것은 <프닌>이다.”라고 말했다.

 

재미있는 점은 나보코프가 이 작품을 구상하기 몇 달 전, <돈키호테>를 다시 읽고 하버드에서 세르반테스에 대해 강의하면서 <돈키호테>의 잔인성에 격노했다는 점이다. 독자들이 돈키호테의 고통과 치욕을 보고 즐기기를 내심 바라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을 알고 나서 <프닌>을 읽게 되면 왜 이 작품이 나보코프가 세르반테스에게 내놓는 답변인지 수긍하게 된다. 시작부터 독자들을 부추겨 소설의 주인공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조롱하게 만들려는 작가의 의지가 다분히 보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된 이 이야기는 프닌의 복잡한 내면을 점차 보여주면서 결코 보여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 준다. 나보코프는 언젠가 '책을 읽을 때는 반드시 시간을 들여 친해져야 하며, 훌륭한 독자란 책을 다시 읽는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작품 역시 그러하다. 분량이 많은 책은 아니지만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읽고,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하면 다시 첫 페이지로 가서 다시 읽어 보자. 분명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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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그림 우케쓰 이상한 시리즈
우케쓰 지음, 김은모 옮김 / 북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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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유키가 죽기 전에 그려졌다. 유키는 출산을 앞두고 자기가 죽는 그림을 몰래 그려둔 셈이다. '미래 예상도', ,,,,,, 그 말이 사사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유키는 자기가 죽으리라고 예상했던 건가......?"
"...... 뭐,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설명이 되겠지......"
"아니면.... 자기가 살해당할 줄 알고 있었다...... 거나."        p.64~65

 

나무와 집, 그리고 한 여자아이가 그려져 있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A코'라는 소녀가 그린 그림이다. A코는 열한 살 때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했다. 한 심리학자는 그림을 통해 소녀의 정신분석을 했고, 대학교 강의실에서 해당 그림으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한다. 얼핏 보기에는 평범하고 귀여운 그림으로 보이지만, 군데군데 아주 묘한 부분이 있는데, 그러한 부분들을 통해 소녀가 어머니에게 학대받았다는 것, 혼자 틀어박혀 있고 싶다는 소녀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림의 한 부분을 통해 이 심리학자는 소녀가 갱생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판단했고, 그 진단 결과에 따라 현재 성인이 된 소녀는 행복한 어머니로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심리학자의 그림 분석은 정확한 방향을 향하고 있었던 것일까.

 

 

오컬트 동아리로 활동하고 있는 사사키는 어느날 동아리 후배인 구리하라로부터 이상한 블로그에 대해 듣게 된다. '나나시노 렌 마음의 일기'라는 제목의 블로그인데, 평범해 보이지만 여러모로 이상한 점이 많다는 거였다. 제일 최근에 올린 글이 약 1년 반 전에 올린 마지막 글로, 내용은 이랬다. 그림 세 장의 비밀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오늘부로 블로그를 그만두겠다는 거였다. 사랑하는 아내와 곧 태어날 아이에 대한 기대로 가득했던 블로그는 이 글을 마지막으로 방치되어 있는 상태였다. 아이를 낳던 도중 아내가 사망했고, 몇 년이 흘러 아내가 남긴 그림들의 진실을 깨달은 남편은 충격을 받게 된다. 아내가 임신 중에 그렸던 다섯 장의 그림에 숨겨져 있는 비밀은 무엇일까. 구리하라와 사사키는 이 그림들에 숨겨진 무시무시한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까.

 

 

이와타는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기지개를 켰다. 역 앞 슈퍼에서 받은 영수증을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미우라는 죽기 직전, 어째선지 여기서 보이는 산줄기의 그림을 그렸다. 그 행동을 따라 하면 미우라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와타는 연필을 꺼내고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이제 미우라가 사랑했던 아름다운 산줄기의 경치가 보일...... 터였다. 하지만 이와타의 눈앞에는 믿기 어려운 광경이 펼쳐졌다. '그 그림과...... 달라.'               p.214~215

 

주택 평면도에서 발견된 이상한 점들로 수수께끼를 만들어 미스터리를 풀어내었던 <이상한 집>에 이어 우케쓰의 이상한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다. '우케쓰'는 전신에 검은 타이즈를 입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가오나시’를 연상시키는 흰 가면을 쓴 정체불명의 유튜버로 주로 호러‧오컬트에 관련된 영상을 올리는 콘텐츠 크리에이터이다. 구독자 수 65만 명, 누적 조회 수 7,000만 뷰의 유명 유튜버지만 나이도 성별도 거주지도 밝혀지지 않은, 그야말로 베일에 싸여 있는 인물이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주택 평면도에 숨겨져 있는 ‘위화감’을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찾아내는 내용이었던 ‘부동산 미스터리 일본의 이상한 집'이라는 컨텐츠가 조회수 1,000만 뷰를 돌파하며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누렸다. 그 영상을 보고 먼저 출판사에서 연락을 했고, <이상한 집>이라는 책으로 만들어져 일본에서 65만 부가 팔리며 인기 작가가 되었다.

 

 

우케쓰의 두 번째 작품인 <이상한 그림>은 일본에서 45만 부가 팔렸고, 일본 내에서 4천 개 이상의 리뷰가 달리며 인기를 끌었고, 현재 채널 구독자수는 9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첫 번째 작품이었던 <이상한 집>은 호기심을 자극했던 소재에 비해 작품 자체의 완성도는 크게 높지 않았다. 별다른 반전이 없었고, 결말 또한 약간 아쉬운 점이 있었는데 그에 비해 <이상한 그림>은 한층 업그레이드된 재미를 선사하는 작품이었다. 게다가 추리 과정을 도식화하여 정리하고, 그림을 보여주며 독자들도 함께 그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줘 재미를 더해준다. 다양한 이미지와 도표를 통해 마치 텍스트가 아니라 영상을 보는 것처럼 가독성 넘치는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 작품은 총 네 장으로 구성되었는데, 각각의 이야기에는 미스터리의 중심인 그림이 하나씩 나온다. 각각의 그림에 포함된 수수께끼를 풀어 나가다 보면, 어느 샌가 네 편의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하나의 커다란 서사가 완성되는데, 그것이 이 작품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네 편의 이야기를 단편처럼 따로 읽어도 상관없는데, 각장의 수수께끼는 해당 장에서 완결이 되기 때문이다. 단편 미스터리로도 재미있지만, 그 네 편의 이야기가 연결되면서 이루어지는 장편 미스터리 서사가 정말 오싹하고, 소름끼치면서 완성도가 있다. 개인적으로 <이상한 집>보다 <이상한 그림>이 훨씬 흥미롭고 재미있었기에 적극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이다. 본모습을 감춘 채 오직 미스터리 콘텐츠로만 승부를 보는 수수께끼에 싸인 인물인 '우케쓰'가 소설가로서도 특별한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바로 이 두 번째 작품에서 제대로 증명했다고 생각한다. 우케쓰의 세 번째 소설도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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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몸 박물관 - 이토록 오싹하고 멋진 우리 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과학이 동동 그림책
레이철 폴리퀸 지음, 클레이턴 핸머 그림, 조은영 옮김 / 동녘주니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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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상한 몸 박물관'이라는 제목처럼, 우리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몸의 여러 기관들이 아니라 몸 중에서도 '쓸모없는' 부분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망가지고 쪼그라들어서 아무도 쓰지 않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문제만 일으키는 신체 부위들이다. 과학자들은 이런 것들에 대해 '흔적 '기관'이라는 특별한 이름을 붙여 줬다.

 

흔적 기관이란 한때 우리의 조상에게는 없어서는 안되었던 중요한 신체 부위였지만, 이제는 대부분 쓸모가 없어진 신체 부위들을 말한다. 오랜 세월 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환경이 바뀌고 식습관이 달라지면서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것들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초등 3학년인 아이가 요즘 한참 인류의 진화에 대해 관심이 생겨서 영상이며 책들을 찾아 보는 중이다. 최초의 생명 탄생부터 현재의 인류에 이르기까지 40억 년 인류 진화에 대해서 얼마나 열심히 보고, 읽었던지 수십 개에 달하는 인류의 종들의 복잡하고 어려운 이름들을 줄줄 외울 정도이다. 그래서 진화와 관련이 있지만, 조금 색다른 관점에서 진화를 살펴볼 수 있는 책을 찾아가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책은 과학 그림책 시리즈 '과학이 동동 그림책'의 첫 번째 책으로 더 이상 아무도 쓰지 않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아니면 문제만 일으키는 신체 부위 혹은 흔적들을 소개하며 이러한 기관들이 진화의 과정에서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지를 살펴본다.

 

 

실제로 박물관에 들어가서 전시를 관람하는 것 같은 구성으로 되어 있어 매우 흥미진진했다. 박물관 로비로 들어서서 화살표가 가리키는 데로 관람실을 둘러 보면서 흔적기관들을 만나보는 과정이라 책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박물관같은 컨셉으로 되어 있다. 사랑니, 원숭이 근육, 털, 꼬리, 주름진 손가락, 사라진 콩팥 등 이제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고 신경 쓰지 않는 흔적기관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몸에 수십만 년에 걸친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가 담겨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재미있는 것은 각각의 테마마다 자신의 흔적 기관을 찾아 볼 수 있는 코너가 있다는 거다. 내 사랑니는 몇 개인지, 어떻게 하면 몸에 소름이 돋게 할 수 있는지, 내 발에 아직 원숭이의 능력이 남아 있는지, 얼마 만에 손가락이 쪼글쪼글해지는지 등등을 체크해보면서 흔적기관에 대해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다.

 

 

자, 마지막으로 우리 흔적 기관들의 영웅은 바로 '딸꾹질'이라고 한다. 과학자들은 딸꾹질이 무려 3억 5000만 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의 먼 조상들도 공기 중에서 하는 호흡과 물속에서의 호흡을 서로 바꿀 때, 공기를 들이마시고 목구멍을 조이는 근육의 경력으로 딸꾹질을 했을 거라고 한다. 그렇다면 왜 인간과 다른 포유류가 3억 5000만 년이 지난 지금도 딸꾹질을 하는 걸까. 이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라고 한다. 그러니 이유가 무엇이든 오랜 세월 살아남은 딸꾹질은 우리 흔적 기관의 영웅인 셈이다.

 

몇 백만 년 전만 해도 지금의 인간은 세상에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몸에 털이 수북한 우리의 먼 조상들이 이 땅에 살고 있었다. 그보다 훨씬 전에는 네발로 돌아다녔고,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4억 년 전에는 모두가 바다에 사는 물고기였고 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진화의 흐름에 따라 알게 되는 이야기들은 언제나 새롭고, 또 흥미진진한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우리 몸의 몰랐던 부분들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면서 인간의 과거를 되짚어 보면, 진화의 본질에 대해서 색다른 시선으로 배우게 될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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