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의 증언 - 미제 사건부터 의문사까지, 참사부터 사형까지 세계적 법의인류학자가 밝혀낸 뼈가 말하는 죽음들
수 블랙 지음, 조진경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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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인류학자는 뼈의 주인을 평가하고, 배제하며, 확인하는 엄격한 과정을 따라야 한다. 경험과 진솔한 학문적 토론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아하!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말이네, 왓슨, 이것은 다리를 저는 23세 여성의 제3등뼈의 왼쪽 상판 관절면 조각일세!' 슬프게도 뼛조각을 들고 이렇게 외치는 셜록 홈즈를 항상 불러낼 수는 없다. 이것은 1000피스 직소 퍼즐 중 한 조각을 갖고 있는 것과 같다. 해부학적으로 똑같은 퍼즐 조각이 두 개는 없기 때문이다. 가장자리의 조각인가? 패턴이 보이는가? 그 패턴이 있는 위치가 한 곳 이상인가?       p.47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교외의 숲속 빈터에서 사이클을 타던 사람이 잠시 쉬던 중에 무심코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다 땅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얼굴을 보게 된다. 놀라서 뒷걸음쳤다가 자신이 본 것이 얼굴이 아니라 그냥 나무뿌리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봤지만 역시 얼굴이 맞았다. 그렇게 그는 우연히 목과 손발이 잘린 여성의 시신이 숨겨진 얕은 무덤을 발견하게 된다. 유해 분석을 통해 피해자의 나이, 성별, 키, 둔기에 의한 외상, 목 졸림이 확인되었고, 신원 확인을 위해 컴퓨터를 이용해 초상화를 제작했다. 두개골 CT 영상 위에 근육과 연조직을 하나씩 겹쳤고, 뼈대 위에 피부를 덧씌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사실적이고 인상적인 초상화를 제작했다.

 

그 이미지는 아일랜드 전역에 배포되었고, 실제로 피해자의 가족이 뉴스를 통해 복원된 얼굴을 보고 스코틀랜드 경찰에 연락했다. 피해자는 아들을 보러 에든버러에 왔다가 살해되었고, 아들이 모친 살해 혐의로 체포된다. 이는 뼈를 통해 얼굴을 복원해 내는 기술로 사건을 해결했던 많은 사례 중 하나이다. 어떻게 두개골 만으로 얼굴을 복원해낼 수 있는 것인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 책은 법의학 선진국인 영국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세계적인 법의인류학자이자 해부학자 수 블랙이 밝혀낸 뼈에 기록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법의인류학이란 의료법적 목적을 위해 인간 또는 인간의 유골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고고학, 인류학, 법의학 등 다양한 지식을 응용해서 뼈를 분석한다. 법의학자가 주로 시체에서 사망 원인을 찾는다면 법의인류학자는 뼈를 분석해 유골의 정확한 신원을 확인하고, 사망의 종류와 원인을 관찰해낸다. 이 책에서 저자는 현실에서 적용되는 해부학과 법의인류학의 렌즈를 통해 인체를 크게 머리, 몸통, 사지로 나뉘고, 세분화해 뇌, 얼굴, 척추, 가슴, 목, 손, 발 등으로 구분해 살펴본다.

 

 

 

법의인류학은 그런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도움을 주어 범죄자를 재판에 회부할 수 있다. 나는 우리가 하는 일 때문에 범죄자들이 더 용의주도해지지 않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내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인체 해부학에서 피해자의 신원확인이나 범죄자 기소, 결백한 사람의 면죄를 위해 가치 없는 부분은 없다고 굳게 믿고 있다. 우리의 일은 뼈에서 알아낼 수 있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리고 기법과 기술이 계속 발전함에 따라 우리 몸에서 밝혀낼 수 있는 증거도 증가할 것이다.            p.327

 

자신의 집에서 태아나 신생아의 유해가 발견된다면 큰 충격일 수 있다. 스코틀랜드 섬의 외딴 지역에서 어느 부부가 작은 농장이 딸린 오래된 농가를 구입했다. 이 부부는 집을 대대적으로 개조하면서 마룻바닥을 뜯었는데, 흙으로 된 토대 아래에서 뼈를 발견한다. 이 섬에는 오래된 매장지와 유물이 풍부한 유적지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근처 유적지에서 일하는 고고학자들에게 조사를 부탁한다. 아주 작은 그 뼈들은 동물의 것도 있었지만, 불행히도 사람의 뼈도 있었다. 그래서 경찰을 부르게 된다. 조사 결과 그 뼈들은 최소 세 명의 아기의 유골이었다. 신생아의 뼈는 300개가 넘는데, 발견된 것은 그 중 2퍼센트 정도에 불과했다. 뼈들은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법으로 아주 오래되었을 것으로 보였고, 그에 얽힌 이야기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갔다. 이렇듯 뼈는 살아 있을 때와 세상을 떠난 뒤에 겪은 일을 모두 담고 있다. 그러니 뼈는 망자의 세계와 현실 세계를 잇는 다리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 책에는 수많은 범죄 사례들이 수록되어 있다. 언제 사망했는지도 모르는 채 발견된 시신을 비롯해서 대규모 참사나 테러로 인한 시신 등 실제 사례들을 바탕으로 쓰인 그만큼 놀랍고 생생하다. 저자는 범죄소설 작가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한다고 한다. 우리가 현실에서 접하는 사건들을 글로 쓴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고, 그 내용은 터무니없고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치부될 것이라고 말이다. 현실이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일이 비일비재한 하다는 뜻이다. 법의인류학자들은 억울하게 잊히는 죽음이 없도록 지금도 사건 현장에서 묵묵히 진상을 밝혀나가고 있다. 뼈, 근육, 피부, 힘줄, 섬유 조직에 상세히 기록된 이야기를 찾아서 이해하고, 슬픈 사건으로 최후를 맞이한 시신들을 가족들에게 돌려보내 시신과 그의 이야기가 영면하도록 연결시키는 다리가 되어 준다. 뼈를 통해 사건을 하나씩 해결해나가는 범죄과학 수사의 세계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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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라와 아키라
이케이도 준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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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아키라는 저도 모르게 외삼촌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외삼촌은 어쩐지 겸허한 표정을 지었다. "아키라는 앞으로 계속 살아가야 해. 즐거운 일도 있겠지만 괴로울 때도 있겠지. 하지만 거기에 맞서 싸워 이겨야만 해. 그게 인생이야."
"지면 어떻게 되는데?" 아키라는 물어보았다.
"지면? 외삼촌은 조금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것 역시 인생일지 모르지." 아빠는 진 거야? 아키라는 그런 질문을 삼켰다.          p.60

 

태어난 곳도, 자라난 환경도 처음부터 완전히 다른 두 명의 아키라가 있다. 야마자키 아키라, 영세공장 '야마자키 프레스 공업'을 운영하는 공장주의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가 경영하던 공장이 도산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야반도주하듯 집을 떠났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가이도 아키라, 대형 해운업 '도카이해운' 집안의 장남이다. 자연스럽게 후계자가 될 운명이었지만, 차기 사장 자리를 거부하고 자신이 관심가는 회사에 지원한다. 같은 이름을 가진 두 아키라는 소위 흙수저와 금수저를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두 사람의 환경은 능력이나 노력 여하에 따라 크게 바뀌지 못할 만큼, 정해진 운명처럼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현실의 파도에 휩쓸려 흘러가는 것을 거부하고,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 운명을 바꾸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두 삼촌과 아버지가 서로 미워하고 차갑게 견제하는 걸 보며 자란 가이도는 유복하다는 것이 동시에 그에 합당한 운명을 짊어진다는 뜻이라는 것을 보고 배웠다. 아버지와 삼촌들이 태어날 때부터 그런 운명을 짊어진 것처럼 자신과 동생 또한 앞으로 그 길로 가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가이도는 그러한 자신의 운명이 지독하게 싫었다. 야마자키는 아버지의 회사를 보면서 약한 자는 어째서 약한지, 항상 의문을 품었다.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장사의 꿈을 이루고 싶다는 마음과 아버지를 냉혹하게 대한 은행과 가차 없이 빚을 독촉하러 왔던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에, 그만한 실력을 갖추겠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두 아키라는 일본의 대형 은행에 동시에 입사하게 되고, 야마자키는 돈이 아닌 사람을 구하겠다는 신념으로, 가이도는 돈은 사람을 위해 빌려주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뛰어난 실력을 선보인다. 하지만 그들 앞에 가혹한 시련이 들이닥치고, 두 아키라는 각자의 인생을 건 싸움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그곳에 존재하는 것은 야마자키 아키라라는 걸출한 뱅커의 눈으로 본 하나의 우주였다. 마이크로 수준의 분석으로부터 모든 방향으로 쏘아올린 논리의 화살. 그것이 기상천외하면서도 의문의 여지 없이 마땅한 필연성과 결합해 화려하고도 대담한 결론으로 집약되어간다. 끝까지 읽은 뒤에도 간나는 한동안 그 품의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연하게 머릿속 어딘가로 제 숨소리를 듣고 있었다... 적확한 업무 처리, 신속하고 정확한 판단. 그것은 매일 옆에서 보았으니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이것은...... 차원이 다르다.              p.566

 

<한자와 나오키> 시리즈를 비롯해서, <변두리 로켓> 시리즈와 <일곱 개의 회의>, <루스벨트 게임>, <하늘을 나는 타이어> 등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직장인들의 통쾌한 반란과 도전을 탄탄한 구성과 생생한 캐릭터로 그려냈었던 이케이도 준의 신작이다. 이케이도 준의 작품들은 언제나 두툼한 분량을 자랑하는데, 이번에도 육백여 페이지 가까이 되었지만 단 한 페이지도 지루할 틈 없이 재미있게 읽었다. 특히나 흥미로웠던 것은 두 명의 주인공이 경쟁 구도가 아니라 각자의 계층을 대변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두 사람은 어린 시절 스치듯 지나가는 장면 두 번을 거쳐 성인이 되었고, 대학을 졸업하고 은행의 신입 사원 연수에서 파이널에 오른 두 팀으로 만나는 게 전부다. 그렇게 시종일관 각자의 인생을 살다가 후반부에 결정적인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두 사람의 삶이 제대로 교차한다. 이름은 같은데 한 쪽은 풍족한 삶을 살아왔고, 나머지 한쪽은 힘겨운 삶을 헤쳐왔다면 라이벌 구도로 가는 서사가 대부분일 텐데, 이 작품은 보기 좋게 예상을 벗어나는 것부터 시선을 사로잡는다. 게다가 이케이도 준 특유의 현실적인 디테일들이 차곡차곡 드라마를 쌓아 가며 197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경제적인 혼란으로 얼룩진 시대를 그려가고 있기 때문에 그 몰입감도 대단하다.

 

이 작품은 2006년부터 2009년까지 3년에 걸쳐 연재된 작품으로, 연재가 끝나고 8년 후 무카이 오사무, 사이토 다쿠미 주연의 TV 드라마 <아키라와 아키라>로 영상화되면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2022년에는 다케우치 료마, 요코하마 류세이 주연으로 동명의 영화가 제작, 공개되었다고 한다. 이케이도 준의 작품들은 영상화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만큼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가 많고, 캐릭터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에서는 누계 부수 100만 부 이상 판매된 작품이기도 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가난하다고 마냥 불행하기만 한 것이 아니고, 부유하다고 마냥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작품은 바로 그러한 점을 두 주인공을 통해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두 아키라가 30년에 걸쳐 성장하는 과정은 인물의 서사라는 관점에서도, 시대를 관통하는 경제적인 흐름으로 읽더라도 매우 흥미롭다. 부잣집 소년과 가난한 소년, 두 아이가 자신의 운명에 맞서지 않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순응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수십년 뒤에도 여전히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주어진 운명에 맞섰고, 온갖 수라장을 겪으면서 성장해나간다. 이케이도 준은 '소설은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는 명제를 가장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작가답게 이 작품에서도 극강의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 재미있는 소설을 찾는다면, 이케이도 준의 작품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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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일본책 - 서울대 박훈 교수의 전환 시대의 일본론
박훈 지음 / 어크로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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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네가 옛날에 한 일을 다 알고 있다......' 사실 한국인만큼 일본을 비판할 능력과 자격을 갖춘 사람들도 드물 것이다. 일본에 오랜 기간 고초를 겪었고 일본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판을 위한 비판’이 되어서는 안 된다. 피해의식에 기초한 일본 비난은 더 많은 사람을 장기간에 걸쳐 설득하는 데 한계가 있다. 우리는 일본 비판을 통해 한 차원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민족주의가 아니라 자유와 민주, 법치와 인권, 평화와 복지의 세상을 여는 담론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럴 때 일본도, 세계인들도 우리를 존중할 것이며, 한국인들도 그를 통해 한 차원 높은 단계로 고양될 것이다.         p.8

 

일본 근대사 최고 권위자 서울대 박훈 교수가 막연한 혐오와 적대감을 걷어내고 일본과 한일 관계를 새롭게 바라볼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책이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가 시작되어 공분을 사고 있는 요즘 읽기에 좋은 책은 아닌 것 같지만, 마음을 다잡고 읽어 보았다. 저자는 한국의 일본에 대한 감정을 '모르는 대상에 대한 공포와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대상에 대한 비하가 콤플렉스'처럼 엉켜 자리하고 있다며, 먼저 일본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책은 한국과 일본의 장단점과 다른 점과 비슷한 점을 짚어 보고, 근대사의 성패를 살펴보며 반일을, 혐한을 넘어서 새로운 관계를 도모해야 한다고 한다.

 

저자는 한국의 민족주의가 일치단결하는 지점이 바로 '반일'이라고 말한다. 식민지 된 지 110년이 넘었고, 해방된 지 8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반일 민족주의는 약해지기는커녕 더 기세를 떨치고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반일 담론들이 과학, 학문적 근거하거나, 건전한 상식에 기초하지도 않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점이 우려스럽다고 말이다. 그러니 목청만 높이는 대신, 차분히 앉아 생각하고 공부하고 조사해서 신중히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저자가 그동안 <경향신문>과 그외 몇몇 매체에 기고한 글들을 모은 것이다. 가깝지만 판이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는 어떻게 지금에 이르게 되었는지, 두 나라의 상호 인식을 어렵게 하는 장애물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한국 시민들만큼 일본에 '관심'이 많은 경우도 달리 찾기 힘들 것이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일본에 경쟁심을 불태우고, 그 동향에 신경을 쓰며 자주 비교한다. 젊은 세대는 꼭 그렇지는 않다고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일본 여행, 일본 음식, 일본 문화가 우리의 일상이 된 지는 이미 오래다. 그러나 그 '관심'에 비해 일본을, 특히 일본사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자문해보면, 자신 있는 대답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관심'은 과도한데, 풍부한 지식과 정보에 기초한 체계적인 이해는 너무도 부족한, 그래서 무지와 오해가 난무하는 상황이 지금껏 계속되고 있다.            p.246

 

혼술도, 혼밥도 익숙하고, 기괴한 복장으로 거리를 활보해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는 일본 사회는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개인주의가 매우 희박한 사회라고 한다. 소속 집단보다 개인이 더 우선한다고 생각하는 보통의 일본인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한국은 개인주의 혹은 개인이 강한 사회로, 그것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만들어 냈다. 일본은 시위도 없고, 국민들의 정치 행동 또한 자주 일어나지 않는 나라이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여론 정치의 나라로 여전히 민심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일단 이것은 저자의 견해다) 한국이 민심의 나라라면 일본은 엘리트, 그중에서도 야쿠닌(관리 혹은 공무원)의 나라이다. 역사상 1000번에 가까운 외침을 받은 한국은 지정학적 지옥이고, 지진을 비롯해 자연재해가 많은 일본은 지질학적 지옥이다. 이런 식으로 이 책은 한국과 일본 두 나라를 비교하는 것으로 시작해 강화도조약부터 메이지유신까지, 김옥균부터 사카모토 료마까지, 한일 근대사의 주요 장면과 인물들을 되짚어 본다.

 

저자는 무시와 두려움이라는 콤플렉스에 발 묶여 있는 한일 상호 인식을 역사와 현실에 비추어 이야기한다. 오늘날 한국인이 말하는 ‘반일’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준다는 점은 흥미로웠다. 아쉬운 점은 한일 상호 인식을 역사에 비추어 차근차근 들려 주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 같은 시국에 '한국은 일본을 경시하는 맨 마지막 나라가 돼야 한다'는 외침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공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본에 대한 이야기들이 통찰력 있는 시각으로 담겨 있고, 막연한 반일과 혐한 대신에 상대에 대해 저 정확히 알아야 하는 것은 맞다. 일본에 대한 비판은 무력한 공포탄이 아니라 뼈 때리는 비판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화를 거부하고 불편한 진실도 직시해야 한다는 의견에도 동의한다. 그럼에도 편한 마음으로 읽을 수는 없었던 책이다. 어쩌면 더 다양한 담론을 위해서는 꼭 읽어야 하는 책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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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인간 - 오야부 하루히코 문학상 수상작
츠지도 유메 지음, 장하나 옮김 / 리드리드출판(한국능률협회)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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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개입한다고 해서 그들이 호적을 취득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사회적 약자인 그들의 처지는 그대로 유지될 것이다. 창고와 공장을 오가는 단조롭고 소박한 삶에서, 돌아갈 집과 직장을 동시에 잃고 의지할 곳 없이 바깥세상에 툭 내던져질 것이다. 이는 정의를 앞세운 일개 형사의 행동이 그들의 삶을 파괴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들은 딱히 누구에게 폐를 끼치지도 않았는데, 이 도쿄의 한구석에서 조용히 살다가 조용히 죽어가려 했을 뿐인데. 리호코는 이제껏 법을 지키는 것과 자신의 양심을 따르는 일은 같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지금 리호코는 태어나 처음으로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에 직면했다.           p.90~91

 

한적한 주택가, 20대 남성이 갑자기 뒤에서 습격 당했다는 신고가 들어 온다. 발소리를 알아 차리고 피한 탓에 큰 피해를 입지는 않은 남자는 범인이 전 여자친구일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한다. 술집에서 헤어지자는 얘기를 했는데, 집요하게 쫓아와서는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갔다는 것이다.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출동한 가마타경찰서 강력계 여형사 리호코는 현장 근처에 숨어서 그쪽을 살피던 갸날픈 여성 하나를 체포한다. 순순히 자신의 범행을 자백해 수월하게 끝이 날 것 같았던 수사는 시작하자마자 암초에 부딪힌다. 하나가 이름도 주민번호도 없는 무호적자였던 것이다. 신분증이 없는 것은 물론 주소도, 직업도 없었고, 자신의 성도, 생년월일도, 출생지도 본적도 죄다 모른다는 그녀의 사연을 듣고 리호코는 연민을 느낀다.

 

결국 모든 것이 미상인 채 사건은 검찰로 송치되지만, 하나가 자백을 번복해 범행을 전면 부인하게 되고, 유력한 용의자임은 분명했지만 명백한 증거가 없었으므로 결국 그녀는 풀려나게 된다. 리호코는 연민과 의심으로 하나의 뒤를 쫓다가 무호적자들이 모여 만든 수상한 집단공동체 '유토피아'를 발견하게 된다. 무호적자들이 사회 보험도 없이 공장에서 일하며, 거주용이 아닌 건물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세상의 도움 없이 자기들끼리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폐쇄된 이상향, 그중에는 미취학 아동까지 있었다. 리호코는 유토피아의 정체에 대해 취재하면서 리더인 료와 하나가 함께 버려진 아이였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두 사람이 남매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22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새장 사건의 당사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살인 미수 사건과 미제로 끝난 아동학대, 실종 사건이 연결되면서 서서히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세상에 완벽이란 없다. 마찬가지로 완벽한 인간도 없다. 불완전한 인간끼리 부족하더라도 서로 보듬어주며 겨우 그럴듯한 형태를 유지하며 산다. 그러나 태어난 순간, 한 사회의 그물망에서 빠져나온 사람도 있다. 자신이 사는 곳이나 직업을 자기 의지로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고통에 비하면 일에서도 가정에서도 완벽을 추구하려는 자신이 얼마나 오만하고 사치스러웠는지 돌아보게 된다. 삶은 '완벽'이 아니라 '충분'을 지향하면 되는 것이었다. 사소한 부분은 눈감아주고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따뜻한 사람들과 함께.             p.325~326

 

오야부 하루히코 문학상 수상작이자, 국내에 <나와 그녀의 왼손>, <지금, 죽는 꿈을 꾸었습니까> 등의 작품으로 소개되었던 츠지도 유메의 신작이다. 도쿄대 법대를 졸업한 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우수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녀가 호적에 이름이 없는 사람, 즉 ‘무호적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데뷔작인 <사라진 나에게>였다고 한다. 등장인물의 호적에 대해 독자들이 의구심을 품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하면서 무호적자들이 호적을 얻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 작가의 숙고 끝에 작품으로 탄생하게 된 이야기라 그런지 무거운 사회문제를 매우 현실적이고도, 먹먹한 드라마로 그려내어 공감과 연민의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이었다.

 

작품의 서두에서 보여진 '새장 사건'은 세 살 남자아이와 한 살 여자아이가 빌라에 갇혀 지내다 구조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두 자녀만 두고 수일 동안 집을 비워 양육을 방임한 두 아이의 어머니가 체포되면서 사건은 종료되었지만, 수년간 아이들이 새와 함께 방에 감금된 상태로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도, 교육을 받지도 못했다는 사실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다. 이 사건 보도는 당시 여섯 살이던 리호코가 어른이 되어 경찰이 되도록 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사실 이러한 부모의 아동 학대 사건은 여전히 현실에서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어 결코 이야기 속 상황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었다. 인간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 부모의 육아 방임, 믿을 수 없는 학대에 관한 뉴스를 세상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드는데 그치지 말고 사회적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당연하게 학교에 다니고, 직장에 취업해서 사회 보험을 들고, 세금이며 연금을 내며 한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어딘가에서는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채 버젓이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곳에 섞여서, 살아 있는 유령처럼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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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알래스카 샌더스 사건 1~2 - 전2권
조엘 디케르 지음, 임미경 옮김 / 밝은세상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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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저 집이 아니라 추억을 사랑하는 거야. 일종의 '향수병'이라고 할 수 있지. 지난날은 행복했고, 그 시절 우리의 선택이 최선이었다고 믿게 만드는 게 바로 향수병이지. 지난날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그때가 좋았지.'라고 생각하는 건 사실 우리의 뇌가 병들어 향수든 우수든 찔끔찔끔 분비하는 탓이거든. 지난 과거가 헛일은 아니었다고, 공연히 시간을 허비한 건 아니었다고 믿게 하려는 거야. 시간을 허비하는 건 인생을 내다 버리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 1권, p.60

 

오래 전에 만났던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이라는 작품을 아주 좋아했었다. 미스터리와 소설쓰기라는 매혹적인 소재를 절묘하게 그려낸 작가의 능력에 감탄했고, 캐릭터, 플롯, 반전 모두 너무 흥미진진했던 터라 조엘 디케르라는 작가에게 한 눈에 반해버렸으니 말이다. 그 뒤로 출간되었던 <볼티모어의 서>와 <스테파니 메일러 실종사건>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오랜 만에 만나게 되는 조엘 디케르의 신작이 이렇게 두툼한 분량으로 출간되어 매우 설레이는 마음으로 읽었다. 특히나 이번 작품은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과 <볼티모어의 서>를 잇는 삼부작의 완결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앞선 작품들을 재미있게 읽었다면 이번 신작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세 작품은 스토리 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건을 수사하는 중심 인물이 겹치기 때문에 연작소설 같은 느낌도 든다.

 

이 작품은 극중 작가인 마커스 골드만이 스승이자 멘토인 해리 쿼버트가 관련되었던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을 발표하고 유명인사가 된 시점 바로 그 다음부터 시작된다. 현재 시점인 2010년과 11년 전인 1999년 시점을 끊임없이 오가며 알래스카 샌더스라는 아름다운 여인이 살해된 사건을 파헤친다. 마커스 골드만이 형사인 페리와 함께 사건을 수사하며 과거에 묻혀 있는 진실을 찾아내는 구성이라 자연스럽게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이 돌아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이 작품을 가제본으로 만나본 사람들이 많을 텐데, 본격적인 이야기는 1권의 후반부부터 시작되어 2권에서 제대로 무르익은 재미를 보여주고 있으니 두 권짜리 본책으로도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 본책은 1권이 484페이지, 2권이 5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인데, 가제본 도서는 358페이지까지라 1권도 채 되지 않는 분량이기 때문에 가제본만 읽고 나서 그 뒤의 내용을 읽지 않는다면 후회하게 될테니 말이다. 11년 전 당시 수사를 맡았던 페리가 알래스카 샌더스 사건에 관한 의문의 편지를 받고 베스트셀러 작가인 마커스와 함께 재수사에 착수하게 되는 것이 주요 플롯이다. 하지만 워낙 방대한 분량의 이야기이다 보니 1권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두 사람이 사건을 재수사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니 진짜 이야기는 바로 그 다음부터 시작인 셈이다.

 

 

 

"사장님이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질문을 받게 되실 수도 있어요." 로렌이 말했다.
주유소 주인은 로렌의 말을 듣더니 재미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부부는 결혼생활 50년째야. 서로 숨길 게 뭐가 있겠어. 필리스는 나를 속속들이 알아. 아내가 모르는 비밀이 나에게 있을 리 없잖아."
그렇지만 루이스에게는 비밀이 있었다. 비밀을 깊이 감추면 그 자신조차 잊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잊고 있던 비밀이 하수구가 흘러넘치듯이 지표로 흘러나온다.           - 2권, p.203

 

알래스카 샌더스는 환한 햇살처럼 밝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게다가 어찌나 상냥하고 친절한지 그녀가 일하는 주유소 사장은 물론, 손님들 또한 모두 그녀를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운트플레전트의 스코탐 호수 근처 모래밭에서 알래스카의 시신이 발견된다. 곰이 시신을 훼손하고 있는 걸 누군가 발견해 신고한 것이다. 처음에는 곰에 의한 피해인가 했지만, 그녀의 사인은 교살이었다. 피해자의 가죽바지 뒷주머니에서 종이가 한 장 발견된다. '나는 네가 한 짓을 알아.'라는 컴퓨터로 쓴 짤막한 문구 한 줄이었다. 여러 미인대회에서 수상할 정도로 미모가 출중했고, 영화배우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스물 두 살의 젊은 여성은 대체 왜 살해된 것일까.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자, 그리고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과 <볼티모어의 서>에서도 화자로 등장했던 마커스 골드먼이 등장한다. 작가인 마커스 골드만은 스물여덟의 나이에 발표한 첫 소설로 단 몇 주만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를 유명 작가로 만들어준 작품은 바로 스승이자 멘토였던 해리 쿼버트가 관련되었던 그 사건이다. 해리의 집에서 유해 한 구가 발견되었는데, 수십 년 전에 실종되었던 소녀로 추정되었고, 그 일로 해리는 체포된다. 어린 소녀와의 부적절한 관계, 살인과 오랜 세월의 은폐로 인해 도서관마다 비치될 정도의 문학적 교과서같은 위대한 작품을 쓴 국민 작가는 한순간에 추락한다. 마커스는 스승에게도 분명 무슨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믿고, 그 사건에 뛰어들어 진실을 파헤치는 데 일조를 하게 되고, 그 과정을 소설로 써서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둔다. 이 작품 <알래스카 샌더스 사건>에 등장하는 마커스는 바로 그 시점의 마커스이다. 첫 소설이 영화로 각색되어 크랭크인에 들어가고, 두 번째 책 <해리 커버트 사건의 진실>이 출간되어 영화 판권 계약을 논의하고 있는, 유명 작가가 된 마커스말이다. 하지만 그는 친구이자 스승이었던 해리가 사라진 뒤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던 중 11년 전에 있었던 알래스카 샌더스 사건의 재수사가 결정되고, 마커스는 페리와 함께 수사를 펼치게 된다. 그렇게 이 작품은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업그레이드 된 조엘 디케르의 면모를 보여준다.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까지 단숨에 읽어 내리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재미있는 소설을 찾고 있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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