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아의 나라 - 문화의 경계에 놓인 한 아이에 관한 기록
앤 패디먼 지음, 이한중 옮김 / 반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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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가장 볼만한 것은 중심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다른 무엇과 만나는 가장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해안선, 기상전선, 국경이 좋다. 이런 곳에서는 흥미로운 충돌과 부조화가 일어나며 경계에 서 있으면 어느 한 쪽의 중심에 있을 때보다 양쪽이 더 잘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문화일 때는 특히 더 그렇다고 생각한다.  9년 전 머세드에 처음 갈 때 나는, 내가 조금은 아는 미국의 의료 문화와 내가 전혀 모르는 몽족 문화 사이에서 양측의 십자포화에 피격당하지 않는다면 그 둘을 서로 어떤 식으로든 비출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p.18

 

<서재 결혼시키기>의 저자 앤 패디먼의 데뷔작으로 국내에는 2010년에 소개되었었는데, 이번에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개정판은 사실관계에 관한 저자의 전면적인 수정과 새로운 후기를 더한 15주년 개정판을 저본으로 삼았다. 이 작품은 라오스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몽족의 이민자 가족과 미국의 의료 체계 사이의 갈등을 무려 9년에 걸쳐 취재한 르포르타주이다. 이 책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1980년대의 미국에서 벌어진 것이지만, 다른 문화에 대한 혐오와 차별은 2022년 현재에도 사라지지 않은 문제이므로, 지금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로 충분하다.

 

리 부부는 1975년 라오스가 공산 세력에 완전히 넘어가면서 살던 땅을 떠나게 된 15만 몽족 가운데 하나이다. 리 부부의 열네 번째 아이인 리아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현대식 공립병원에서 태어났다. 리 부부는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데다 주변에 몽족 언어를 아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병원에서 아기를 낳은 것은 썩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미국 의학 자체에 의문을 품게 된 것은 리아가 병원에 자주 가게 되면서부터였다. 몽족 사람들은 다양한 원인 때문에 병이 난다고 생각하는데, 그들이 꼽는 병의 가장 큰 원인은 혼을 잃어버려서이다. 특히 신생아의 생명의 혼은 떠나버리기 쉽다고 생각해, 아기를 기를 때 조심하는 부분이 많았다.

 

 

 

메울 수 ‘없는’ 간극이었다고? 나는 리아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리 부부가 MCMC 의료진과 처음 마주치던 때를 자꾸 떠올리게 되었다. 당시 통역자는 아무도 없었고 리아의 뇌전증은 폐렴으로 오진되었다. 만일 응급실의 전공의들이 ‘동물 병원 의사’가 되는 대신, 몽족이 믿거나 두려워하거나 바라는 걸 알려고 노력해 애초부터 리 부부의 신뢰를 얻어낼 수 있었다면(아니면 적어도 신뢰를 짓밟지 않았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p.427

 

리아가 생후 3개월이 되었을 무렵, 아파트 현관문이 쾅 닫히는 소리에 놀라 기절하는 일이 생겼다. 리 부부는 리아의 증상을 '코 다 페이'로 보았는데, 이는 '영혼에게 붙들리면 쓰러진다'는 뜻이다. 이 병은 몽족에게 잘 알려져 있으며 이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양면적이다. 한쪽에서는 이 병을 심각하고 위험한 질환으로 받아들이고, 한편에서는 이를 영예로운 병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래서 리아의 발작을 바라보는 리 부부의 태도엔 걱정과 자부심이 뒤섞여 있었다. 그 후 몇 달 동안 리아는 적어도 스무 번의 발작 증세를 보였고, 리 부부는 서구 의술의 효능을 의심했음에도 너무 걱정이 되어 리아를 병원으로 데려가야 했다. 의사 입장에선 리 부부가 딸의 증세를 '영혼에게 붙들려 쓰러진 병'으로 이미 진단했다는 사실을 알 방법이 없었고, 리 부부 입장에서는 의사가 리아를 뇌전증으로 진단했으며 그것이 가장 흔한 신경질환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 도리가 없었다. 비극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한 아이의 병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면서 치료는 두 문화 사이를 헤매게 된 것이다. 의사들은 처방된 약을 제대로 투약하지 않는 리아 가족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리아의 가족들은 리아에게 나타나는 부작용을 보며 의사들과 약물을 불신한다. 앤 패디먼은 9년에 걸쳐 이 사건에 연루된 수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방대한 문헌 자료를 조사해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고 문제점을 정밀하게 파헤치고 있다.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으로 치료하고자 하는 미국 의료진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밤낮없이 애쓰며 최선을 다했고, 리아의 부모 역시 가장 전통적인 몽족 치료법을 병용하길 원했던 것이 리아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했기 때문이었으니, 양쪽 누구도 틀렸다고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좋은 의도와 노력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화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리아를 중심으로 의사들과 가족들간의 대립과 전쟁으로 인해 살던 곳을 떠나야 했던 몽족의 역사가 교차로 진행되는 무겁고, 복잡한 이야기이지만 층층이 쌓인 문화 간 갈등을 이렇게 진지하면서, 생동감있게 그려내는 앤 패디먼의 글솜씨에 감탄하면서 읽었다. 더 나은 사회를 꿈꾸며, 다양한 문화의 소통을 위해 한번쯤 읽어보기를 적극 추천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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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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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천히 쓰고 있다. 사실과 선택의 집합에서 한 인생을 잘 나타내는 실타래를 밝혀내기 위해 애쓰면서, 조금씩 아버지만의 특별한 모습을 잃어가는 듯한 기분이다. 글의 초안이 온통 자리를 차지하고, 생각이 혼자 뛰어다닌다. 반대로 기억의 장면들이 슬며시 미끄러져 들어오게 두면, 아버지의 있는 모습 그대로가 보인다. 그의 웃음, 그의 걸음걸이, 그가 내 손을 잡고 장터에 데려가고, 나는 놀이기구를 두려워한다. 다른 이들과 나눴던 상황의 모든 조건들이 중요하지 않게 된다. 나는 매번 개인적이라는 함정에서 빠져나온다.            p.40

 

아니 에르노의 작품은 국내에 꽤 많이 소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 권 만나보지 못했다. 어쩌면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다는 이유로, 언제든 읽으면 된다는 안이함으로 사두고는 아직 읽지 못한 책들 사이에 쌓여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올해 노벨문학상 발표 이후에 여러 출판사들이 바빠졌는데, 이유는 아니 에르노의 작품이 다양한 출판사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아니 에르노의 작품들을 가장 열심히 국내에 소개해왔던 것이 아마도 1984Books일 것이다. 세련된 표지 디자인 때문에 나 역시 크리스티앙 보뱅의 작품들을 비롯해서 1984Books의 책들을 꽤 가지고 있다. 그러니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다시 찾아 읽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 이 작품을 고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남자의 자리>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니 에르노가 아버지의 삶을 회고하며 쓴 작품이다. 그 동안 철저하게 객관적인 회상을 통해서 자전적 글쓰기를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듯한 작품을 선보여왔던 아니 에르노였기에, 이 작품 역시 최대한 단조로운 글이 되도록, 한 존재의 모든 객관적인 표적을 모으고 있다. 흥미진진하거나, 감동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고, 시처럼 쓴 추억도, 환희에 찬 조롱도 없이, 물기를 쫙 빼고 덤덤하게 흘러가는 글이다.

 

 

 

어느 오래된 가게의 종이 덜컹대며 울리는 소리, 너무 익은 멜론 향기 속에서 나는 나 자신과 Y시의 여름 방학만을 되찾았을 뿐이다. 하늘 색깔도, 가까운 우아즈강에 비친 포플러 나무도 내게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다. 사람들이 대합실에서 앉아 지루해하거나, 아이들을 부르거나, 기차역 플랫폼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는 방식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찾았다. 나는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는 익명의 존재들이자 자신도 모르게 힘 혹은 굴욕의 징표들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서 아버지가 살던 환경의 잊고 있던 현실을 되찾았다.                p.92~93

 

누구에게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린, 혹은 규정해버린 어느 순간, 어떤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차마 남들에게 말하기 부끄러운 어떤 것이든, 소중한 존재를 잃어버린 순간이든 간에 말이다. 그 중에서도 부모의 죽음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온다. 영원히 곁에 있을 것만 같았던 존재의 상실에서 오는 비탄 때문일 수도 있고, 그것이 하나의 시절이 끝났음을 알려주는 일종의 신호이자 단절의 표식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에르노는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 '이 모든 것을 설명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아버지가 주인공인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20세기로 넘어가기 몇 달 전, 바다에서 25km 떨어진 코 고장의 어느 마을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아버지의 어린 시절부터, 농장의 인부로 일하고, 전쟁으로 인해 군대에 갔다가, 제조 공장에서의 노동을 거치고, 어머니를 만나 결혼을 하고, 가게를 운영하면서 한 가정의 아버지가 되기까지의 삶이 그려진다. 과장이나 왜곡 없이, 꼭 필요한 단어로만 표현하는 미화되지 않은 기억의 세계가 그렇게 펼쳐진다. 사는 데 책이나 음악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다고 했던 아버지의 삶, 다만 물질적 필요에 의해 앞으로 달려가듯 살아온 한 남자의 자리가 여기 있다.

 

여자로, 아내로, 사람으로 살아온 엄마의 서러움과 회한, 그리고 남자로, 남편으로, 사람으로 살아온 아빠의 슬픔과 후회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처음부터 어른의 모습이었던 부모이기 때문에, 그들의 빛나던 시절을, 그들의 꿈과 열정을, 살아온 세월만큼의 실패와 고난을 알 수 없다. 이제 어른이 된 우리가 부모의 삶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은, 대부분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을 때이다. 긴 세월 동안 아버지라 불렀던 한 남자의 삶을, 아버지라는 이름 아래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믿었던 많은 것들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를 떠나 보낸 뒤에야 우리는 상상한다. 아니 에르노의 글은 굉장히 개인적이면서도 이상하게 보편적인 감정을 불러 온다. '가치에 대한 판단을 철저하게 없앤, 현실에 가장 가까운, 정서를 벗겨낸 글쓰기'가 에세이가 아니라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쓰인다는 것도 흥미로운 점이다. 어떤 현대 문학과도 닮지 않은, 문학적 요소를 뺀 문학이 보여주는 압도적인 힘을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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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여자들
메리 쿠비카 지음, 신솔잎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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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아. 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문자 옆에는 까맣게 파인 커다란 눈구멍과 치아가 있는 회색빛 해골 이모티콘이 있었다.
근육이 긴장했다. 심장이 빨라졌다. 당황스러웠다. 작은 욕실이 갑자기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숨이 막혔다. 자욱한 김이 습하고 뜨거웠다. 뚜껑이 덮인 변기 위로 주저앉았다. 맥박이 귀에 들릴 정도로 크게 뛰었다.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앞의 글자들을 다시 쳐다봤다. 잘못 읽은 게 분명하다.           p.81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밤, 메러디스와 그녀의 여섯 살 난 딸 딜라일라가 사라진다. 메러디스의 남편 조시는 네 살 아들 레오를 데리고 이웃들을 찾아가 보지만, 그녀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메러디스와 가까웠던 이웃 케이트는 연락이 안 된다는 소식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왜냐하면 바로 열흘 전 저녁, 조깅을 하러 갔다가 실종된 젊은 여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 후 실종되었던 여성이 시체로 발견되고, 메러디스가 그녀의 출산을 도와주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메러디스는 시내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요가 강사로 일하며, 출산 도우미 일도 함께 병행하고 있었다. 케이트는 메러디스가 걱정이 되어 혼자 조사에 나서고, 그녀가 출산을 도와 주다 산모와 의사의 의료 분쟁에 휘말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가 사라진 것이 이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이야기는 현재와 11년 전 과거 시점으로 교차 진행된다. 과거의 장면들은 메러디스와 딜라일라가 사라진 시기인 5월의 케이트의 시점과 실종 2개월 전인 3월 메러디스의 시점으로 번갈아 가며 보여진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현재 시점인데, 현재는 열다섯 살이 된 레오의 시점이다. 바로 11년 전에 사라졌던 누나 딜라일라가 다시 돌아온 뒤에 벌어지는 일들이 현재의 주요 스토리이다. 메러디스는 당시 죽은 채로 발견되었었고, 딜라일라는 그 동안 계속 실종상태였다가 이제야 다시 돌아온 것이다. 대체 과거에 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시간 개념이 사라졌다. 사고가 벌어지고 얼마나 지난 건지, 운전을 해서 얼마나 온 건지 전혀 가늠이 안 되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더 깊숙한 숲으로 옮기는 와중에 셸비가 자꾸 손아귀에서 미끄러졌다. 손이 젖어 사람의 발목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고 있는 것 같았다. 발목이 손에서 자꾸 빠져나갔다. 땅이 질었다. 비아와 나는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졌다. 진흙에 발이 빠졌다.
여기서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었다.          p.374

 

<굿 걸>, <디 아더 미세스>라는 작품으로 만났던 메리 쿠비카의 신작이다. 전작에서 정유정 작가가 극찬을 한 추천평으로 화제를 모았었는데, 이번 신작 역시 그에 못지 않게 흡입력 있는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전작은 꽤 두툼한 페이지를 여러 인물의 시점으로 교차 진행시키면서 후반부에 전체 이야기의 구조 자체를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한 방이 있었다. 꼼꼼하게 설계된 복선들이 구석구석 포진하고 있었으며, 독창적인 구성과 플롯이 탄탄한 재미를 선사했었다. 이번 신작 역시 여러 인물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교차 진행되고 있으며,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미스터리를 만들어 간다.

 

어느 날 갑자기 메러디스의 핸드폰으로 온 의문의 문자.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아. 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처음에 그녀는 잘못 온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협박성 문자는 계속 되고, 메러디스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이 떠오르지 않는다. 자신은 나쁜 짓을 한 적도 없었고, 무척이나 양심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분명 누군가는 그녀에게 악의를 품고 있었고,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사건은 점점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후반부의 전개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결말에 이르게 된다. '스릴러의 여왕'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메리 쿠비카는 특히 여성들의 심리 묘사를 섬세하게 잘 그려낸다. 이번 작품에서도 임신과 산부인과 진료라든가, 학부모 커뮤니티 내의 신경전 등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부분들에 대해 놀랍도록 현실적으로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심리 스릴러라는 장르를 좋아한다면, 이 작품을 적극 추천해주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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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작은 죽음들 - 최초의 여성 법의학자가 과학수사에 남긴 흔적을 따라서
브루스 골드파브 지음, 강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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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피할 수 없는 보편적 사실이다. 그러나 사망 사건은 일어날 때마다 인간 경험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아는 모든 사람이 언젠가 죽으리라는 사실을 머리로 알고 있다. 그래도 누군가 죽으면, 충격을 받고 불쾌함을 느낀다. 죽음에 관한 해답이 필요하다는 욕구는 뿌리가 깊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이 사람은 왜 죽은 걸까?           p.37~38

 

서론을 지나면 사망 현장을 그대로 재연한 작은 모형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도배지가 벗겨진 침실에 누워 있는 여성, 빨랫줄에 옷이 가득 널려 있는 2층 집 아래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성, 온갖 물건들이 널부러져 있는 산지기의 오두막, 차고와 침실 등 실사가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세밀하게 만들어진 모형들이다. 타일 바닥의 무늬와 꽃무늬 벽지, 금이 간 바닥과 스탠드, 화장대 위의 화장품들까지 정교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이것은 '의문사에 관한 손바닥 연구'라는 이름의 디오라마로 살인사건 현장을 그대로 재연한 작은 모형이다.

 

 

이 책은 그렇게 폭력과 죽음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는 미니어처로 과학수사와 법의학의 발전에 기여한, 최초의 여성 법의학자인 '프랜시스 글레스너 리'의 삶과 법의학의 역사를 담고 있다. 리는 1940년대부터 경찰을 교육하기 위해 실제 사건 현장을 그대로 재연한 작은 모형을 만들었는데, 이 디오라마는 현재 18개가 남아 있으며 현재까지도 법의학 훈련에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을 쓴 저자 브루스 골드파브는 메릴랜드주 수석 검시관실 공공정보관으로 리의 디오라마를 관리하며, 그녀의 공식 전기 작가가 되었다. 그는 디오라마와 관련된 그림, 미술품, 서류들을 모았고 70년 된 이 디오라마의 보존 작업을 위해 전문가들과 함께 모든 작업 과정에 참여했다. 덕분에 디오라마들은 박물관에서 공개 전시되었고, 그를 통해 프랜시스 그레스너 리의 이름도 재조명된 것이다.      

                                                                                           

 

범죄 현장 사진이나 영상을 보여줄 수도 있겠지만, 그런 방법은 학생의 목덜미를 잡아끌며 증거를 하나하나 짚어주는 방식이 될 것이었다. 주의를 끄는 사진이나 자료 없이 실제 범죄 현장에서 증거를 찾는 일은 이와 매우 달랐다... 문득 리는 오래전 어머니에게 만들어주었던 시카고 교향악단 디오라마와 더 록의 다락방에 있는 인형의 집 가구며 비스크 도자기 상자들을 떠올렸다. 그녀는 모리츠에게 말했다. "범죄 현장의 모습과 시신을 원래 자리에 그대로 배치한 모형을 내가 직접 만들면 어떨까요? 그걸 가지고 가르칠 수 있겠어요?"          p.275

 

20세기 중반만 해도 경찰은 과학적 살인 수사를 할 만한 능력이 전혀 없었다. 고등학교조차 졸업하지 않은 경찰관도 많았고, 많은 경찰관들이 글을 읽고 쓸 줄 몰랐으며, 경찰 업무를 위한 훈련은 최소한에 그쳤다. 그저 힘이 세고 겁이 없으며 싸움을 말리거나 용의자를 완력으로 구속할 수 있다는 이유로 채용이 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실정이니 사망 현장에서 경찰은 증거를 훼손하거나, 현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수사가 처음부터 난항을 겪는 일도 다반사였다.

 

리의 목표는 부패한 코로너 제도 대신 검시관을 현장에 투입하고, 갑작스러운 의문사에 관한 조사를 현대화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리는 미국 최초로 법의학과를 하버드 의대에 개설하고, 경찰을 위한 살인사건 세미나를 열었고, 살인사건 현장을 미니어처로 만든 디오라마를 제작해 과학 수사의 발전을 이끌었다. 하지만 여자가 대학에 가는 일조차 흔치 않았던 시절이었기에, 결코 수월하지는 않았다.

 

 

어려서부터 의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리가 다니고 싶었던 하버드 의대에서는 여학생을 받지 않았다. 이후 결혼을 하고, 세 명의 자녀를 두고, 시간이 한참 지나 51세가 되었을 때 병에 걸려 요양하며 우연히 같이 입원했던 검시관 매그래스를 만나면서 그녀의 인생이 달라진다. 매그래스 덕분에 법의학에 매료되었던 리는 법의학을 독학하며 엄청난 자료를 모았고, 이 모든 역사적인 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무엇보다 그 시작이 50세가 훌쩍 넘은 시기에 일어났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녀가 없었더라면, 법의학과 과학 수사의 발전은 아마도 한참 더 늦어졌을 것이다. 그 추진력과 굳건한 믿음과 성실한 희생이 있었기에, 수많은 억울한 죽음의 이유가 밝혀지게 된 것이니 말이다. 이 책을 통해서 초창기 과학수사에 대한 히스토리와 최초의 여성 법의학자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만나 보자. 법의학과 과학수사에 관심이 있다면, 정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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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태양
린량 지음, 조은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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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어른에게는 이런 인생의 비밀이 있다. 다들 '목숨을 건 외줄타기'를 하면서 자랐다. 어른이 되려면 살얼음판을 건너야 한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찌 보면 운이다. 나에게 자식이 생기고 나니 마음이 싹 변했다. 완전히 딴판이 되었다. 나는 자식이 어떤 '외줄'도 건너지 않길 바란다. 차차리 내 몸이 부서져라 일해서 12미터 너비의 널찍한 시멘트 다리를 놓아주겠다. 나는 자식이 어떤 살얼음판도 건너지 않길 바란다. 차라리 내 어깨에 태워 강을 건너고, 얼음이 깨진다면 아이를 물 위로 쳐들고 기꺼이 얼음물을 마실 것이다.         p.80

 

이 작품은 타이완의 국민 작가 린량이 쓴 에세이로 지난 반세기 동안 무려 160쇄를 찍은 책이다. 린량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이지만, 60년간 어린이 책을 쓰고 번역하고 연구한 타이완 아동문학의 거목이다. 이 책 역시 '아홉 살부터 아흔아홉 살까지 읽는, 세대를 뛰어넘는 책'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애니메이션과 뮤지컬로도 제작되었던 작품이다.

 

이야기는 신혼 살림을 시작한 단칸방에서 시작된다. 방은 너무나도 작았고, 주위는 시끄러웠지만, 작고 얄팍한 종이상자 같은 집이라도 둘이 함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시간이 흘러 타이베이대학병원 분만실 앞 어두컴컴한 복도에서 심장을 두근거리며 아이가 태어나길 기다린다. 갓 태어난 딸아이는 더없이 아름다웠고, 무엇도 더 바랄 게 없다는 마음으로 부부는 눅눅하고 비좁은 단칸방으로 돌아온다. 아이가 태어난 뒤로 모든 것이 달라졌지만, 그들 부부에겐 작은 태양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첫째 잉잉, 둘째 치치, 막내 웨이웨이가 태어나고 시끌 벅적한 가족의 15년 세월이 44편의 산문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세상 모든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나한테도 아버지가 있단다. 세상 모든 '아이'가 그렇듯 나도 '아버지' 역할을 맡고 나서야 '아버지'가 '얼마나 고된 직업인지' 깨달았지. 엄청나게 '애가 타는' 일이건만 '대우'는 형편없거든. 그때 나는 '내 아버지를 찾아가 이야기 나누고픈' 마음이 간절했어. 나날이 어려워지는 '시험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두 아버지가 만나' '지혜의 불꽃'을 피워 알아냈으면 했지. 그러나 하늘 아래 살아가는 아버지의 반 이상에게 이는 헛된 바람이란다. 너무 늦었거든.         p.294

 

소소하지만 공감되는, 담백한 묘사들이 눈앞에 그림을 그려주는 듯해서 읽는 내내 기분이 설레었다. '헐거운 수도꼭지에서 똑똑 물 떨어지는 소리, 아내가 사각사각 옷 자르는 소리, 첫째가 나직이 문법 교과서 읽는 소리, 둘째가 사삭사삭 연필로 쓰는 소리, 막내가 고롱고롱 코 고는소리(p.34)' 등으로 그려지는 '우리 집 소리'들이 실제로 귀에 들리는 듯했다. 조용한 집안에서,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 글을 쓰고 있는 린량의 모습이 자연스레 보였으니 말이다. 온 식구가 지켜야 하는 '가정 규칙'을 만들고, 함께 여행을 다녀오고, 밥을 먹고, 놀이를 하고, 대화를 나누는 일상의 풍경들이 정겹기 그지없다. 작가라는 직업적 특성상 남들이 잘 때 깨어 있고, 남들이 깨면 자는 생활 습관을 가지고 있는 린량이 가족들이 깨지 않도록 소리를 내지 않으며 책을 꺼내고, 음식을 찾아 먹는 에피소드도 아주 유쾌하게 그려져 있다.

 

무엇보다 어른으로서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 부모의 위치에서 자녀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도 와 닿았다. 부모가 되어야만 알 수 있는 심정, 나이를 먹은 만큼의 깊이 있는 시선이 페이지마다 가득해 배우고 싶은 부분들도 많았다. 린량은 아동문학을 ‘평이한 말로 이루어진 예술’이라고 정의했고, 아동문학은 이해하기 쉽고 통속적인 언어로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산문집을 읽어 보니 아직 한 번도 읽어 보지 못한 그의 아동문학 작품들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되었다. 언젠가 린량의 아동문학 작품도 국내에서 만나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꾸밈없이 그려낸 린량의 다섯 가족 이야기는 따스하고, 유쾌하고, 다정하다. 서로를 배려하는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도 이런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이 들 것이다. 그의 가족사 15년을 만나게 되면, 우리 집, 내 가족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질 것이다. 어린 시절이 떠오른 날, 가족과의 추억을 기억하고 싶은 날, 이 책을 만나보길 적극 추천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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