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사서 볼만큼 용돈이 충분하지 않던 어린 시절. 나는 동네 책방이나 도서관에 가서 주로 책을 빌려 보았다. 책은 읽어야 하는 기간이 지나면 반납을 해야 했고, 반납하고 나면 다시는 볼 수가 없었으므로 나는 가능한 많은 문장들을 머리 속에 집어넣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많은 문장들을 다 외울 수는 없었으므로, 맘에 드는 구절들을 노트에 메모하기 시작했고, 그러다 정말 매혹적인 작품을 만나면 아예 전체 책을 필사하기에 이른 것이다. 필사를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책이란 건 눈으로 읽을 때와, 한 글자 한 글자씩 직접 옮겨 적을 때 전달되는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가슴을 철렁 내려 앉게 만드는 섬세한 어휘들과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그 문장들은 나의 감수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그렇게 나는 수많은 책들과 함께 질풍노도의 시절을 흘려 보냈다. 문장과 문장을 이어 단락을 만들고, 그 단락들을 이어 하나의 글이 만들어 질 때마다, 시시해 보이는 나의 일상들이 근사해지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책을 읽다 보니 종종 길을 걷다 우연히 책 속의 인물들을 마주치곤 한다. 지상에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존재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바로 소설이다 보니, 나는 그 인물들에게서 위로를 받곤 했던 것 같다. 때로는 남자친구를 기다리는 카페에서, 때로는 쇼핑을 하던 백화점에서, 때로는 북적거리는 지하철 안에서 어떤 문장들이 복병처럼 튀어나오곤 했다.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소설 속 그 인물들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현실 속의 친구들 외에 여러 친구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직도 기억나곤 하는 친구가 바로 <새의 선물> 속의 애어른 같은 열두 살 진희이다. 너무도 조숙하고 똑부러져서 아이처럼 느껴지지 않는, 하지만 유년 시절부터 삶의 이면을 보아 냉소적인 시선을 가져 안쓰러운 그런 소녀. 진희는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면 먼저 스스로를 두 개의 나로 분리시킨다. 하나의 나는 내 안에 그대로 있고 진짜 나에게서 갈라져나간 다른 나로 하여금 내 몸 밖으로 나가 내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거리를 유지하는 긴장으로써 지탱했고, 언제나 자신의 삶을 거리 밖에서 지켜보기를 원했다. 여섯 살 때 죽은 엄마에 대한 기억을 단 하나도 가지고 있지 못하고 할머니에게서 자랐던 진희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면 자기만의 극기훈련을 했던 것이다. 실성해 목매달아 자살한 엄마와 사라진 아빠, 드러내놓고 애정표현 한번 하지 않는 외할머니와 이모, 삼촌과 함께 생활하는 열 두 살 소녀는 찬물을 조금씩 끼얹다 보면 얼마 안 가 물이 차갑다는 걸 모르게 되는 것처럼, 그러면 양동이째 끼얹어도 차갑지 않으니 슬픔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똑똑히 느끼자고 생각했다. 어린 소녀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설정 자체가 마음이 아프기도 했지만, 고등학생이던 나랑 너무도 비슷했기 때문에 친근감 같은 것이 들었던 것 같다. 삶에 냉소적인 사람만이 삶에 성실하다는 작가의 말처럼, 나도 그랬으니까. 그러니까 행복한 일이 생겼을 때는 내가 그것을 잃었을 때를 미리 걱정했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는 헤어지게 될 때의 상실감에 대비하려고 했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당시의 내가 왜 그랬나 싶긴 하지만, 뭐 그땐 나름 또래의 친구보다 많이 조숙했고, 생각도 많다 보니 나름 심각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고등학교 시절 나를 버티게 해준 건 은희경의 책이었다. 아직도 책장 구석에 손 때가 까맣게 타있는 낡은 책과 올 초에 한국문학전집으로 새로 출간된 책을 함께 보고 있자니, 1996년 겨울 고등학생이었던 나와 2014년 겨울 어느덧 아이 엄마가 되어 있는 나를 보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내 친구들이 아이돌 그룹에 열광할 때, 나의 우상은 은희경 작가였다. 그래서 나는 구할 수 있는 그녀의 모든 책을 읽었는데, 아름다운 문장들과 예리한 표현들은 매 페이지마다 밑줄 긋고 싶은 충동을 불러 일으켰었다. 소설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허구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녀의 작품 속에서만은 그 인물들이 모두 다 '진짜'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은희경 작가 특유의 생생한 묘사와 세밀한 관찰력이 인물들과 그들이 처해진 상황에 설득력을 부여해주어서, 어찌 보면 외로운 나르시스트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인물들이었지만, 내가 동화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소설은 서사의 예술이지만, 나는 소설을 읽을 때 하여튼 그 인물과 만나야만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극중 인물들을 진짜라고 믿어야 그들이 처한 상황과 배경과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은희경 작가의 그런 '진심'이 참 좋다. 그래서 은희경 작가의 책을 처음 만난 지 십 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녀의 새로운 작품을 설레이며 기다린다.

 

대학에 들어가자 마치 정해진 수순처럼 누구나 연애를 했고, 나에게도 찐한 첫사랑의 달콤함이 찾아왔지만 두 해를 넘기지 못하고 이별의 쓴맛을 봐야 했다. 사람이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는 법이 당연하거늘, 헤어짐 그 자체보다 과정에 있어서 나는 상처를 많이 받았던 것 같다. 학과 선배이던 그는 후배들에게는 일종의 모범처럼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교수들에게는 신임 받고, 동료들에게는 믿음직스러운 그런 남자였다. 거기다 스마트한 외모와 유행에 뒤쳐지지 않는 깔끔한 옷차림도 호감을 만들어주었기에, 우리 과에서 그에게 한번쯤 연정을 품어보지 않은 신입생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어찌하다 보니 나와 인연이 되어 두 해 동안 우리는 연인이었지만,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문자로 그에게 이별 통보를 받았다. 그가 과대표가 되고 나서 한달 쯤 뒤의 일이었다. 원래 나서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는데, 친구들의 호응에 얼결에 과대표가 되고 보니 그게 너무 적성에 맞았던지 학교를 바쁘게 누비고 다니던 그였다. 자연스레 나와 만날 시간은 차츰 줄어들었고, 그러다 다른 학과의 신입생 퀸카가 그에게 마음이 있어 한다는 소문이 잠깐 나기도 했지만, 나는 그를 믿었기에 의심조차 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 사랑을 하다가 마음이 변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전에 아무런 설명도, 변명도 없이 그저 일방적인 통보로 그만 만나자고 하는 건 함께한 두 해 동안의 시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나. 나는 너무 상처받아서 그에게 이유를 따져 묻는 것도, 왜 그러느냐고 애원하는 것도 하지 못한 채 며칠을 앓아 누웠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학교에 나왔을 때는 이미 그는 소문 속의 그 퀸카와 커플이 되어 캠퍼스를 활보하고 있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누군가를 순수하게 믿지 못하게 된 것이.

<내 생애 꼭 하루 뿐일 특별한 날>에서 미흔은 크리스마스 날 남편 회사 직원이라고 찾아온 젊은 여자를 만난다. 그녀는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며 아주머닌 아무것도 모른다고 집안을 한바탕 휘젓는다. 남편을 인생의 전부로 알고 살아온 미흔은 남편의 애인을 만난 뒤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 든다. 그 이후 지독한 두통에 시달렸고, 남편은 바닷가 근처 시골 마을로 이사를 하자고 한다. 그리고 거기서 만난 윗집에 사는 남자 규는 그녀에게 구름 모자 벗기 게임을 제안한다. 게임의 유효 기간은 사 개월, 그 동안 서로를 허용하고, 누군가 상대방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 게임은 끝난다고. 육체적인 탐닉에 빠져들게 된 그들의 게임은 걷잡을 수 없이 깊어져 간다. 권태에 사로잡혀 게임을 하듯이 사랑을 나누는 불륜 그 자체에 공감하기는 내가 너무 어렸지만, 미흔이 받았던 상처때문에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이해하고 싶었다. 스물한 살에 만난 남자가 그의 전 생애 동안 오직 자신만을 사랑하고, 자신 또한 단 하나의 남자만을 사랑하며 평생 하나의 생을 함께 사는 것이 꿈이었던 여자가 '순수'가 아니라 '순진'이 되어버리는 게 세상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말 행복이란 무지한 상태의 다른 말인 걸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나 행복이라는 단어가 성립되는 걸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바보 같았던 나 자신이 미워졌고, 그만큼 그런 나를 발견하게 만든 그가 원망스러웠다. 그런 감정이 쌓이다 보니 사랑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래서 사랑을 위해 언제라도 모든 것을 다 바치겠다는 열정보다는 당장 잃어버려도 상관없다는 식의 냉소가 더 익숙해졌던 것 같다. 물론 덕분에 숱한 연애를 경험했고, 나를 스쳐간 수많은 남자들 중에 소울 메이트를 찾아 지금은 결혼까지 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이후 나의 연애는 전경린 작가의 책 한 권 때문에 꽤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래서 내게는 지금도 최고의 연애소설을 쓰는 작가는 전경린 하나뿐이다. 나는 여태까지도 이렇게나 발칙하고, 매혹적이고, 슬픈 연애 소설을 만나 본 적이 없다.

 

때로 책 속 어떤 문장, 어떤 행간에서 그 시절의 내가 보이는 경험을 한다. 나에게는 그런 책이 유독 많은데, 이상하게도 책이 출간되었던 그 시간, 내가 만났던 그 시기가 나에게 모두 특별한 경험으로 이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많이 반복해서 읽었고 아직도 아무 페이지나 펼치면 문장들이 나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은 책이 있다. 바로 대학시절 방황하던 나를 잡아주었던 신경숙의 <외딴 방>이다. 나는 아빠와의 전쟁에 실패해 내가 원했던 학과가 아닌 취업률이 높은 학과에 들어갔는데, 그래서인지 학과 생활이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공부에 흥미 없이 그저 학점만 채우려고 학교를 다녔고,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집에 사고가 생겼다. 엄마가 한밤중에 갑자기 쓰러지셔서 구급차로 병원에 실려가셨고, 뇌출혈이라는 진단을 받았던 것이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 우리 가족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나는 엄마의 병실을 지키기 위해 학교에 미련없이 휴학계를 던졌고,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아르바이트를 마치면 병원으로 가서 엄마 곁의 보호자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자면서 뭐랄까, 생각이 많아졌다. 몸은 지쳐가고,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은 빨리 흐르는데 나는 친구들과 연락을 끊고 오로지 병원, 직장만 반복해 가다보니 내 삶이 방부처리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나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나와는 다른 삶을 사는 것 같았고, 나만 홀로 외딴 공간에 놓여진 것 같았던 거다. 휴학했던 학교로 나는 다시 돌아가지 못했고, 결국 자퇴 후 아르바이트로 하던 일을 직업으로 하게 되었다. 그때 지친 몸을 이끌고 일을 하러 가던 지하철에서 읽었던 책이 바로 <외딴방>이다.

이 책에서 서른 두 살의 소설가인 ''는 낮에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산업체 특별학급에서 공부하던 열여섯의 나를 떠올려본다. 구로공단 입구에 있던 직업훈련원에 들어가면서 살게 된 외딴방. 그곳에 간 것이 열여섯이었고, 거기서 뛰쳐나온 건 열아홉이었다.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는 희재 언니의 죽음 때문에 그 사 년의 삶과 좀처럼 화해하지 못했던 ''가 열여섯으로부터 십육 년이 흐른 어느 날, 과거와 마주하게 된다. 책을 읽으며 어쩌면 나도 지금 내 삶의 '외딴방'에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언젠가 세월이 아주 많이 흘러 이 시절을 떠올려보았을 때, 나도 이 시기를 그저 건너뛰고 싶은 시간으로 기억하지 않을까. 당시 나에게 주어진 상황들이 어렵다거나 고통스럽다거나 힘들다는 생각조차도 못했기에,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전부였던, 그저 매일 해결해야 할 일들을 마치면 얼른 자거나 일어나는 게 전부였던 시간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극중 ''에게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 같다. 대학은커녕 공장에서 일하며 겨우 산업체 특별학급에서 공부하던 그녀가 작가가 되겠다는, 누가 보면 말도 안 되는 꿈을 꾸었지만 결국 소설가가 되었듯이 내 삶도 좀 오래 시간이 흐르면 이것 보다는 나아지지 않을까. 결국 엄마는 건강을 되찾으셨고, 현재까지 정정하게 잘 계시지만 나는 여간 친하지 않으면 그 시절 얘기를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살아왔다. 나 자신이 스스로를 무슨 비밀을 가진 사람으로 취급하며, 천성이 낙천적이었던 나를, 내성적으로 만들어왔던 건지도 모르겠다. 글쓰기에 마음을 매고 있음으로써, , 라는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소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극중 ''처럼 나도 그렇게 이 책을 붙들고 몇 년을 보냈다. 그렇게 나의 대학 시절이 짧게 흘러가 버렸다.

 

김연수 작가는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그 순간 우리가 예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는 점에서 인생은 신비롭다'라고 말했다. 누구든 그런 순간을 최소한 한 번은 만나게 되는 것 같다. 그날 이후의 나, 그날 이전의 나로 명확하게 구분되어 완전히 색채를 달리하게 되는 그런 순간 말이다. 그것이 누군가한테는 결혼일수도, 대학합격이나 유학일수도 있고, 주식투자처럼 선택의 문제일 수도, 혹은 친구를 사귀는 순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삼십대를 앞두고 있던 2007년의 나는 그런 일생일대의 선택 앞에 망설이고 있었다. 직장생활도 어느덧 안정이 되고, 경력도 인정받아 숙련된 업무처리가 가능하던 이십 대 후반이었다. 하지만 나는 안정된 직장과 연봉을 버리고, 모험을 해보려고 하는 중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못할 것 같았기에, 어쩐지 서른이 넘어 버리면 이런 무모한 도전 같은 건 해보지 못할 것 같았기에 말이다. 결국 나는 기존 연봉의 반 토막도 안 되는 급여에, 업무시간도 두 배나 되는 새로운 일에 무작정 도전을 하게 되었다.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저 그 일을 할 수 있어 행복했다. 마치 내가 직장 생활을 처음 시작하면서 미친 듯이 열정을 퍼붓던 이십 대 초반으로 돌아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은 다들 이해가 안된다며 왜 고생을 사서 하느냐, 그 동안 쌓은 경력이 아깝지 않으냐, 벌써 서른이 다 되어가는데 앞으로 어떻하려고 그러냐 등등.. 우려 섞인 목소리를 냈지만 어차피 내 인생을 누가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었던 일은 해보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이 선택으로 인해 리스크가 많더라도, 언젠가 후회하게 되더라고 말이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의 화자인 '' '5월투쟁'이 끝난 후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던 대학생이다. 그는 방북 학생 대표 자격으로 베를린으로 건너가지만, 갑작스럽게 학생운동 지도부가 붕괴되고 교체되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북한으로 들어가게 될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지, 아니면 독일에 계속 남아 있어야 할지 말이다. 그렇게 불확실하고 불투명하고,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어쩌면 내가 당시에 겪었던 상황과 비슷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매번 의도와 다르게 벌어지는 상황, 예상을 벗어나는 사고, 계획했던 것들이 한 순간에 무너지곤 하는 어긋남들이 평탄치 않은 삶일 수도 있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삶이야말로 살아있는 진짜가 아닐까 생각했다. 극중가 베를린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들에게서 들은 온갖 사연들은 역사의 폭력에 의해 삶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였는데, 물론 지금은 개인의 삶이 시대의 역사와 운명을 같이하는 시대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공감이 갔던 이유는, 완전히 바닥을 치고 나서 남아있는 개인 각각의 삶이 보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무리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간다고 해도 결국 나는 나'이며, 우리의 삶이란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져있으니 말이다. 내가 공들여 지어온 집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내가 반석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들이 한낱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 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너의 인생을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맡기지 말라'는 것. '자기 자신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나의 그 무모한 도전은 결국 실패로 끝이 났지만 나는 여전히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며, 당시에 이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이 위로를 받았던 것을 고맙게 기억하고 있다.

 

얼마 전에 김연수 작가의 신작 <소설가의 일>을 읽는데, 이런 대목이 나왔다. 뭔가 일이 안 풀릴 때, 내가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이라는 생각을 하는 건 좋지만, 다시 태어나려면 조건이 하나 있다는 거다. 다시 태어나려면 일단 나부터 죽어야 한다는 것. . 이 얼마나 명쾌한 진리인가. 다른 사람이 되려면 제일 먼저 내가 바뀌어야만 한다는 것. 다시 태어나려면 일단 내가 죽어야만 한다는 것. 모든 건 내 쪽의 문제였다는 것. 내가 김연수 작가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이렇게 단순하지만, 언제나 삶을 꿰뚫어 보는 명쾌함 때문이다. 언젠가 토머스 H. 쿡의 글을 읽다가 문장과 단락들이 빚어내는 분위기가 너무도 매혹적이어서, 다시 태어난다면 꼭 이렇게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뭐 김연수 작가의 말대로 굳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길 기다릴 필요가 뭐 있나. 그런 글을 쓰고 싶다면, 그만큼 쓰고 공부하고 노력부터 하면 되지. 너무 너무 맘에 드는 책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태어나도 이 책들은 읽겠어! 그러나 기약 없는 다음 생을 위해 아껴두는 것보다는 현재 생에서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기억하고, 더 많이 느끼고 생각하는 게 더 좋지 않겠느냔 말이다.

지금은 생후 60일을 넘긴 아기를 키우고 있어 사실 책을 읽을 시간을 내기가 굉장히 어렵다.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줘야 하는 아기를 키운다는 건 단 일분도 나를 위한 시간이 없다는 걸 미처 알지 못했던 초보엄마라 매일매일이 전쟁이다. 하지만 나는 너무 피곤하고 졸려서 돌아버릴 것 같아도 매일 책을 읽는다. 젖을 먹이는 동안 한 손으로 책을 읽었고, 아기가 잠들었을 때 한밤중 어두운 거실 소파에서 스탠드를 켜고 책을 읽고 있다. 그러다 보니 책을 끝까지 읽으려면 시간이 한참 걸려 새로운 책을 읽기 시작하면 좀처럼 진도가 나가질 않는다. 그래서 요즘은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어 읽고 있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내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그래서 시간에 쫓겨 읽느라 진도가 나가질 않아 조바심 낼 필요가 없는 그런 책 말이다. 특히 오늘 소개한 이 네 권의 책은 요즘 나를 새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당시에 너무 여러 번 읽어서 어떤 장면이 펼쳐져도 당황하지 않고 책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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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기 활동 마감 페이퍼를 작성해주세요!

어느새 14기 신간평가단 활동이 모두 완료가 되었다.

이번에는 소설분야 파트장으로 활동을 했었는데, 덕분에 매월 초 추천도서를 취합하면서 새로운 정보들을 많이 얻게 되었다. 새로 출간되는 신작들의 정보를 파악하게 되는 즐거움과 미처 관심을 두지 않았던 작품에 대한 소식도 매우 쏠쏠했다.

13기에 이어 14기로 활동을 하면서 느낀 점은, 매 기수마다 신간 취합 시에 특정 분위기가 있다는 것.ㅎㅎ 아무래도 이번 14기는 개인적인 나의 취향과는 좀 다른 부분이 많았지만, 그 덕에 다양한 책을 만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 그럼 14기 활동을 정리해보자.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김중혁 작가의 책은 항상 기발한 소재와 재기발랄한 필체로 기억되곤 하는데, 이번 작품 역시 단박에 나를 사로잡은 제목부터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는 이야기이다

소년이 온다

작품을 읽어 가는 내내, 어쩐지 숨죽이고 가슴 조이며 읽었던 것 같다. 편한 마음으로, 그저 소설을 읽는 다는 기분으로 읽어나가기엔 너무도 무겁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투명인간

챕터가 따로 나뉘어 진 것도 아니고, 인물 별로 화자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처음에는 스토리를 따라잡기에 다소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차근차근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는 특별한 재미가 있다.

무의미의 축제

쿤데라의 나이를 감안하자면 (어쩌면) 그의 마지막 소설이 될지도 모를 이번 작품은 농담이 거짓말로 받아들여지는 시대에 관한 우화다. 겨우 150페이지도 안 되는 짧은 분량이라 페이지는 금방 넘어가지만, 삶의 본질을 탐구하는 끊임없는 사유는 책을 여러 번 읽게 만들어준다.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그래, 까짓것. 인생 뭐 있나? 이리 살아도, 저리 살아도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이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흘려 보내도 시간은 가고, 매 순간을 치열하게 겪어내도 시간은 마찬가지로 지나가게 마련이다. 그러니 돌이킬 수 없다면, 어차피 부딪쳐야 한다면 즐겨보자. 나의 하나뿐인 생을.

 

 

 가장 좋았던 책은 에밀 졸라의 제르미날!!!!!

국내에 소개된 에밀 졸라의 장편소설은 연작으로 읽을 수 있다. 대표작 <목로주점>을 중심으로 <나나>, <제르미날>를 연결해서 읽으면 된다. 아쉽게도 <제르미날>은 절판상태였으나, 문학동네의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로 다시 만나게 되어 매우 반갑다. 사회적 약자들이 가진 불의에 대한 분노와 정의에 대한 열정이 페이지마다 넘쳐 흐르는 매우 뜨거운 작품이다.

에밀 졸라의 장례식에서 광부들의 대표단이 세 시간 넘게 "제르미날! 제르미날!"을 외치며 작가에게 경의를 표했다는 일화는 이 작품이 얼마나 혁명적이고 위대한 소설인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세상 모든 노동자들에게 이만큼 희망을 심어줄 수 있는 작품이 또 있을까 싶을 만큼, 고전이지만 지금도 묵직한 무게 감을 선사하는 현재 진행형의 매력적인 작품이 아닐 수가 없다.

 

신간평가단 여러분과 알라딘 담당자분 모두 6개월 동안 너무 수고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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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신간평가단 2014-10-28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오나님, 파트장으로 활동해주셔서 정말 너무 너무 감사드려요!! 피오나님마저 <제르미날>을 베스트로 꼽으시니 전 그 책을 꼭꼭 읽어봐야겠습니다!!! 너무 고맙습니다~ 건강하고 즐거운 계절 보내세요!!

피오나 2014-10-28 14:58   좋아요 0 | URL
ㅎㅎ담당자님도 너무 고생 많으셨구요^^ <제르미날>은 정말 좋으니 꼬옥 읽어보시길ㅎㅎ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는데 감기조심하시구요. 늘 수고가 많으십니다^^
 

홍대 와우북 페스티벌!!

오늘부터 3일간 홍대 주차장거리에서 거리도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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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4-10-03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딱 가고 싶어할만한 곳들 골라 주셨네요. 진짜 딱 저 두 군데일 것 같은데. ㅎ
잭 리처 다시 시리즈로 싹 구비하고 싶고, 북스피어 에스프레소 노벨라 빠진 것 몇 권 있거든요.
내일은 나가봐야겠어요.

피오나 2014-10-03 17:45   좋아요 0 | URL
오..잘됐네요..저는 에스프레소 노벨라시리즈도,잭 리처 시리즈도 이미 다 가지고 있어서 너무 아쉬웠어요ㅋㅋ
 

알라딘 책베개 도착!!!

쿠션감도 장난아니고 완전 맘에듬!!!

덕분에 또 책사느라 칠만원이나 써버렸지만.. ㅋㅋ

알라딘 책배개 너무 좋다!!! 최고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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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4-09-30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생각보다 크네요. 정말 베개!

피오나 2014-09-30 19:00   좋아요 0 | URL
넹.진짜책으로된베개ㅋㅋㅋㅋㅋ

ICE-9 2014-09-30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큰데다 쿠션감까지 좋다니 엄청 유혹적인데요😀 이거 또 통장 잔고 줄어드는 소리가 들리는군요😒

피오나 2014-09-30 19:01   좋아요 0 | URL
하핫..그러니까요..저도다른디자인책베개를조만간구엡할꺼같다는..^^;;;;
 

교고쿠 나쓰히코의 무당거미의 이치!!
이 정도 판본과 페이지라면 두 권으로 만들어도 좋았겠구만...세권짜리라 가격의 압박이....ㅡㅡ;;
그래도 덕분에 주말이 행복할듯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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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4-09-27 14: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도 진짜 내지처럼 얇고, 양장에서 반양장 된것도 맘에 안 드는데, 두권할꺼 세권으로 쪼개고 가격은 반양장 분권 각권이 양장 가격.. 진짜 맘에 안들어요;

피오나 2014-09-27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그러니까요.이번에는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ICE-9 2014-09-27 16: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양장이 아니라는 게 참 마음에 걸리네요. ㅠㅠ

피오나 2014-09-27 16:39   좋아요 0 | URL
그쵸? 뭔가 표지가 너무 빈약한..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