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스트리트 푸드 - 다채롭고 입맛 당기는 요리 이야기 스트리트 푸드 시리즈
톰 반덴베르게 & 재클린 구슨스 & 루크 시스 지음, 유연숙 옮김 / 도도(도서출판)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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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행을 가게 되면 항상 스트리프 푸드를 꼭 먹어보곤 한다. 각 나라의 고급 레스토랑에서보다 길거리 음식에서 훨씬 더 지역적인 특색을 살린 음식을 맛볼 수 있으니 말이다. 특히나 뉴욕은 미국의 가장 큰 도시로 이민자들이 가장 많은 걸로 유명해 세계 각국의 음식을 모두 만날 수 있으니 더할 것이다. 그들은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에서 먹던 음식을 그대로 들여와 자부심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음식을 선보인다. 우리나라의 노점상들에서도 특색 있는 음식들을 만날 수 있다는 걸 떠올려본다면, 이들은 그것보다 한 단계 더 활발하게 움직인다. 가판대나 카트, 트럭들이 빠르게 위치를 이동하고 시기에 따라 영업장소가 아예 바뀌기도 한다. 소셜 미디어는 푸드 트럭이 오늘 어디에서 음식을 파는지 알려주는 역할까지도 한다. 최근에 개봉했던 영화 <아메리칸 셰프> 에서도 그런 스트리트 푸드의 매력이 돋보였었다. 영화 속에서 일류 레스토랑의 셰프가 레스토랑 오너와의 다툼 후에 쿠바 샌드위치 푸드 트럭에 도전해서 어린 아들과 미국 전역을 일주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실시간 트윗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미국에선 소셜 미디어가 푸드 트럭의 위치도 알려주는 구나 싶어 새삼 소셜미디어의 힘도 느껴지고 말이다.

뉴욕에서는 스트리트 푸드가 성황을 이루고 있다. 맨해튼에서 정장을 입고 푸드 트럭 앞에 줄을 선 사람들부터 퀸스나 브롱크스 지역의 남미 사람이 운영하는 가판대에서 음식을 사먹는 공장 근로자 그리고 흑인들의 전통 음식인 소울 푸드를 찾는 미식가들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거리에서 음식을 즐긴다.

 

뉴욕의 스트리트 푸드는 핫독, 케밥, 프레첼 등 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책 속에 실린 무려 60가지나 되는 음식들을 보니 내가 알고 있던 건 너무 한정적이었구나 싶었다.

재미있는 건 이 책에 실린 음식들의 레시피가 저자가 직접 밝혀낸 것들이라는 사실이다. 스트리트 푸드 노점상들이 생계와 직결된 조리법을 쉽게 공개할 리가 없지 않은가. 대대로 전해 내려온 조리법이 노점상의 수입으로 직결되는 경우도 많고 말이다. 그들이 직접 찾아내어, 먹어보고, 요리를 해서 레시피를 알아낸 60가지 요리들은 집에서도 쉽게 따라해 볼 만한 것들이 많아 활용도도 높을 것 같았다. 해외에 한 번도 나가보지 않았던 어린 시절,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이 바로 뉴욕이었다. 당시 패션 디자인을 공부하던 학생들의 로망이 뉴욕과 밀라노로 대부분 나뉘었는데, 나는 스타 벅스 컵을 들고 활기차게 출근하는 뉴욕 사람들의 당당함이 좋아 보이기도 했고, 다양한 인종들이 매끄럽게 섞여 있는 문화도 경험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꽤 시간이 흘렀지만 아쉽게도 아직 뉴욕에 가보지는 못했던 터라,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뉴욕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흠뻑 들었다.

 

뉴욕에서는 평일 정오 무렵마다 조직적인 혼돈 사태가 발생한다. 그 시각만 되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배고픔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음식이 필요해! 지금 당장!' 매일 대규모 군단이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려고 준비 태세를 갖춘다. 최고급 레스토랑, 오래 전부터 굳건하게 자리를 지켜온 작은 식당, 가지각색의 샐러드 바나 샌드위치 바, 유명한 노점상과 고급 푸드 트럭까지. 관광객과 이민자 그리고 나처럼 경험이 풍부한 뉴요커도 점심시간에 움직이는 군중의 규모와 그들의 신속한 움직임에 혀를 내두른다. 더불어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음식 선택의 폭이 어마어마하게 넓다는 점에도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우리 나라 직장인들의 점심 풍경과도 다르지 않는 뉴욕의 정오 무렵 풍경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더 대규모라는 점이고, 먹고 싶은 음식이 무엇이든 간에 모두 뉴욕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매일매일 비슷한 음식을 먹는데 지쳐 뭐 좀 새로운 음식 없나 하고 점심시간 마다 동료들과 궁리를 해야 하는 우리네 직장인들에 비해선 선택의 폭이 엄청나게 넓은 것이다.

 

저자들이 소개하는 뉴욕 곳곳의 스트리트 푸드 중에서도 가장 탐나는 것은 레드훅 구장의 푸드 트럭 음식 축제이다. 5~6달러만 지불하면 하루 종일 배고프지 않을 정도로 푸짐하게 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 식사를 한 후에는 자전거를 타고 레드훅 해안과 낡은 항구 시설, 그리고 19세기에 지은 창고를 따라 달리는 산책까지. 이어지는 반 브런트 거리에 있는 랍스터 파운드의 랍스터 롤과 키 라임 파이가 있는 디저트 가게들까지.. 완벽한 하루 일정이 아닐 수 없었다. "내 생각에 뉴욕에서 화창한 일요일을 보내기에 이보다 저 좋은 코스는 없다"는 저자의 의견처럼 언젠가 뉴욕에 가게 되면 꼭 해보고 싶은 푸드 투어이다.

특히나 뉴욕의 길거리 노점들은 수많은 레스토랑 업장 보다 오히려 더 깨끗하다는 점도 인상 깊었다. 재료가 신선하지 않다면 요리사는 고객에게 그 사실을 감출 방법이 없는 것이 노점상이기도 하고, 가판대 내부 공간이 좁아서 보관할 자리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재료가 신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차이나타운에 있는 한 중국인 노점상은 겨우 4시에 재료가 다 떨어졌다며 조리 도구들을 정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흔히들 제3세계 국가에서 온 이민자들이 만든 스트리트 푸드는 위생적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길거리에서 음식을 많이 먹어본 뉴요커들은 노점상의 위생 상태가 얼마나 우수한지 잘 알고 있다고 한다. 물론 이들 길거리 노점상들도 주차 금지 규정 덕분에 매일 고양이와 쥐처럼 경찰과 쫓고 쫓기는 게임을 하고 있다고 하니 우리 나라의 노점상들과 실상이 그다지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너무도 다양하고,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은 위생뿐만 아니라 그 레시피에서도 탐나는 것들이 많아 어쩐지 뉴욕의 노점상들이 국내의 그것보다 멋져 보이긴 한다. 불고기, 김치, 파전까지.. 한국적인 색채가 섞인 음식들도 그렇고, 오코노미야키, 랍스터 롤, 키 라임 파이, 사천식 닭 볶음, 그리스 식 샐러드도 군침이 도는 메뉴 중의 하나였다. 이 책은 뉴욕의 구석구석을 소개하는 여행 가이드이자, 맛집 투어 북이자 훌륭한 레시피 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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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 -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외 30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2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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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를 알게 된 건 순전히 김연수 작가 때문이었다. 그가 어디선가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라는 단편이 10개 실린 책을 추천했고, 제목에서 오는 끌림 때문에 나는 단번에 그 책을 구입해서 읽었다. 그는 플래너리 오코너의 그림자가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들에 드리워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 그녀의 단편들이 궁금했다고 한다. . 과연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그녀의 단편 10편을 읽고 나서 들었고, 그러다 보니 무려 서른 한편의 작품이 실려 있는 현대문학의 세계문학단편선 시리즈는 어쩐지 꼭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된 것이다. 오코너는 처음에는 자신도 무슨 이야기를 쓰는지 모른다는 점에서 이야기란 발견의 서사라고 말했는데, 그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올해에야 플래너리 오코너를 발견했다고 김연수 작가가 소개하는 글 역시 동감한다. 그동안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던 이 작가는 작년에 처음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소개되었는데, (이것 또한 김연수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뒤늦은 발견은, 그만큼 감동적이었다고 할까. 플래너리 오코너는 25세에 홍반성 낭창이라는 불치병에 걸려 오랜 세월 투병 생활을 한 끝에 결국 3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장편소설 2편과 단편소설 32, 여러 권의 평론집과 에세이를 남겼는데, 단편만 쓰던 작가는 아니었지만 분량 면에서 단편이 그녀의 주 장르인 셈이긴 하다. 작가의 길에 막 들어선 20대 중반 무렵 이미 자신이 어떤 글을 써 나갈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그녀는 이후 12년만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잠시도 흔들리지 않고 글을 썼고, 불과 네 권의 책으로 문학사에 한 획을 긋는다.

처음 만난 그녀의 작품인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이번 소설집에서는 '좋은 사람은 드물다'라고 번역) 는 짧지만 강렬하게 임팩트를 남겨주었던 기억이 난다. 뭐랄까. 평범보다는 한 쪽 방향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는 인물들이 잔뜩 등장해서 읽고 나서 '여운'보다는 '불편함'이 잔뜩 남는다고 할까. 출판사 리뷰에 조이스 캐롤 오츠가 그녀에 대해 평한 문구가 실려 있는데, 마치 조이스 캐롤 오츠의 작품을 읽고 나면 섬뜩하고 기괴한 그림이 그려지는 것처럼 다소의 그로테스크함마저 느껴졌다. 일상을 배경으로 보여주는 그로테스크함이라니. 놀랍기만 하다. 오랜 투병 생활을 했고, 가톨릭계 집안에서 자랐던 것이 작품에 정서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거의 모든 작품에  미국 남부의 위선적인 삶과 기독교적인 삶에 대한 주제가 변주되어 있는데, 너무나도 차갑고, 냉정한 시선으로 신랄하게 인물들을 그려내고 있기에 가끔은 유머마저도 섬뜩하게 느껴진다. 작품 속 인물들은 종종 미신이나 종교 때문에 편견으로 누군가를 대하거나 폭력을 행사한다. 어디선가 <종교와 법, 윤리가 삶의 테두리가 되어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소위지성인들의 환상은 플래너리 오코너의 작품 안에서 완벽하게 깨진다>라는 설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녀의 단편들을 단적으로 설명해주는 문구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대부분의 작품 속 상황이 블랙유머처럼 그려지지만, 그 속에는 항상 미국 남부인들의 위선적인 삶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작가의 예리한 시선을 잃지 않는다.

"세상이 이렇게 엉망인데 우리가 무언가에 기뻐할 수 있다는 게 기적이야. 바닥이 꼭대기에 갔다니까." 어머니가 말했다.

줄리언은 한숨 쉬었다.

"물론 자기 위치를 아는 사람은 어딜 가든 상관없지만." 어머니가 말했다.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중에서

 

줄리언은 의사의 권유에 따라 혈압이 높은 어머니가 체중을 감량할 수 있도록 시내 YMCA의 감량 수업에 모시고 다닌다. 그의 어머니는 버스에 인종차별이 없어졌기 때문에 혼자서 밤에 버스를 타지 않으려고 할 정도로, 여전히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아들에게 네 증조할아버지는 이 주의 주지사였고, 노예가 200명인 대 농장주였다며, 자신은 누구에게나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강조한다. 아들은 사람의 위치는 한 세대밖에 효과가 없다며, 어머니는 지금 자신의 처지도 위치도 전혀 모른다고 거칠게 대꾸하지만 어머니의 귀에 들릴 리 없다. 그는 어머니가 자기 환상 세계의 법칙에 따라 살며, 그 바깥에 발을 내딛는 걸 본 적이 없다. 게다가 그 법칙은 아들을 위해 당신을 희생하는 것이었는데, 그러기 전에 먼저 사태를 엉망으로 만들어서 그럴 필요를 만드는 거였다. 그들 두 모자가 버스를 타고 가면서 흑인 (책에서는 깜둥이로 표기되는) 들을 만나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은 내가 마치 줄리언이 된 듯 낯뜨거운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진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장점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하지만 날카로운 시선이 아닌가 싶다.

"저 사람은 어제 우리 집에 성경 책을 팔러 온 그 착하고 멍청한 젊은이 같은걸." 호프웰 부인이 눈을 찌푸리고 말했다. "저쪽에 사는 깜둥이들한테 성경을 팔러 갔던 모양이야. 순진하기도 하지. 그래도 우리 모두가 저렇게 순진하다면 세상이 훨씬 좋아질 거야."

프리먼 부인이 앞쪽을 이리저리 찾다가 그가 언덕 아래로 사라지는 모습을 간신히 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땅에 박힌 냄새 고약한 양파 싹으로 관심을 돌리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순진하게 사는 게 불가능해요. 나는 일단 불가능해요."

                                                                                          -좋은 시골 사람들 중에서

 

"내 다리 내놔!" 라는 공포물에서나 등장할 법한 대사가 나오는 이 스토리에서는 한 청년이 소녀를 유혹해서 그녀의 다리를 훔쳐간다는 스토리이다. 다리를 훔친다는 게 무슨 말이냐 싶겠지만, 그녀는 열살 때 사냥터에서 총기 사고로 다리 한쪽을 잃어 의족을 하고 있다. 호프웰 부인은 자신의 딸아이가 춤 한 번 취 보지 못하고 평범한 즐거움도 누리지 못하는 서른두 살의 뚱뚱한 처녀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다. 부인에게는 딸이 아직도 아이처럼만 느껴지는 이유이다. 호프웰 부인이 성경 책을 팔러 온 훌륭한 젊은이라고 생각했던 그가 자신의 딸을 유혹해서 그녀의 의족에 관심을 가지고, 그녀를 농락하게 된다는 것이 주요 스토리이다. 키스를 하고, 사랑한다고 달콤한 말을 하며 사랑을 증명해 보이라고 그녀의 의족을 보여달라고 하더니, 의족을 어떻게 떼고 붙이는지 보여달라더니 결국 다리를 도로 붙여주지 않고 그걸 가지고 가버리는 것이다. "너는 그냥 좋은 시골 사람 아니었어?"라고 탄식하는 조이의 상황과 같은 단어지만 다른 의미로 읽히는 호프웰 부인의 "좋은 시골 사람은 세상의 소금이에요!"라고 흥분하던 상황은 기묘하게 대치되어 읽힌다. 딸을 농락하고 가는 그의 모습을 멀리서 보던 부인은 "그래도 우리 모두가 저렇게 순진하다면 세상이 훨씬 좋아질 거야." 라고 말한다. 세상은 그렇게 겉으로 보이는 것과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자신이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수많은 진실과 거짓말로 뒤덮여 있는 것이다.

플래너리 오코너는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어두운 면을 포착해 감정을 폭발시키고, 그들을 망가뜨린다. 쉽게 말해 우리 모두 사용하고 있는 일상의 가면 뒤에 감춰진 면을 끄집어내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너무나도 정상적으로 보이는 인물의 속마음이 실제로 어떤지 알게 된다면 세상은 정말 지옥이 될지도 모르겠다. 진실은 때로 모른 척 해야 할 순간들이 생기게 마련이니까. 그래서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들은 대부분 쉽게 읽히지만, 수월하게 넘기긴 힘들다.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마주하게 하고, 불편하게 만드니 말이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독선으로 가득 찬 인물들의 위선이 벗겨지는 순간에 통쾌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눈을 감고 살아가라 말하는 세상이지만, 그녀의 작품을 읽고 있으면 두 눈 부릅뜨고 세상의 숨겨진 이면을 직시하고 싶어지곤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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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2-14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현명한 피>라는 소설만 나오면 되겠어요. 오코너의 대표작이라던데 과연 어느 출판사가 낼 건지 궁금하군요. ^^

피오나 2015-02-14 22:05   좋아요 0 | URL
저도 <현명한 피> 궁금해요. 단편을 많이 쓴 작가의 장편이라 더 궁금하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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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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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날그날 겪는 모든 일에는 현재의 불확실성이 그 흔적을 남긴다. 그 시절 마르가레트는 길 모퉁이 하나를 돌 때마다 혹여나 부아야발과 마주치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보스망스는 정작 자신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적의와 경멸에 가득 차 그를 쫓아다니며 그가 혹 거리에서 가슴에 총탄을 맞고 죽는대도 서슴없이 그의 주머니를 뒤질 그 심란한 커플을 만나게 될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멀찍이 떨어져 세월이라는 거리를 두고 보면 우리가 현재 느끼는 불확실과 근심은 사라진다. 마치 라디오에서 나오는 깨끗한 음악을 못 듣게 방해하던 전파 잡음이 사라지듯. 그렇다, 지금에 와서 그때를 생각하면 꿈속과 꼭 같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기억은 그다지 많이 남아 있지 않은데, 그 중에서도 이상하게 마음 한 켠에 걸려 있는 기억이 있다. 유치원이 끝날 시간쯤 당시에 내가 사는 아파트 입구에 항상 서 있는 남자 아이가 있었는데, 나는 그 아이가 무섭고 싫어 집에 바로 가지 못하고 동네를 빙빙 둘러서 다니곤 했었다. 나를 기다리는 그 아이가 그때 뭔가 해코지를 하거나, 괴롭히거나 했던 것 같지도 않은데, 매일같이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는 그 남자아이의 존재 자체가 부담스럽고, 공포스럽기만 했었다. 물론 어린 시절의 일이라 그래서 결국 그 아이와 어떻게 되었는지, 내가 그걸 극복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했었는지는 잘 생각나질 않는다. 당시의 그 일은 그저 이미지로 남아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항상 제일 먼저 기억나는 사건 같은 게 되어 버렸다. 지금에 와서 떠올려보면 그게 대단히 괴로운 일도 아니었을 텐데, 어린 마음에 친구나 가족들 중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해 혼자 끙끙댔었다. 누군가에게 말해버리면 이야기를 듣게 된 누군가에게 그 아이가 해코지를 할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 그 아이는 지금 어떤 어른이 되어있을까. 하고 추억처럼 이야기 할 때가 올지도 모르고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어린 시절의 그 기억이 떠올랐다.

"잘못된 만남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어요."

모디아노는 말한다. 우리가 현재 느끼는 불확실과 근심은 세월이라는 거리를 두고 보면 사라지는 것들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보스망스의 어머니는 턱을 공격적으로 쳐들고 그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와 돈을 요구했다. 마치 어린아이를 을러대는 듯한 위압이 담긴 목소리로. 함께 온 갈색 머리 남자는 멀찍이 떨어져 가만히 서서, 마치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끼게 해주려는 양 보스망스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는 그 두 사람이 자신에게 왜 그런 경멸감을 표출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럴 때마다 주머니를 뒤져 돈을 내민다. 빨간 머리에 매정한 눈빛을 한 호적상의 어머니는 언제나 그에게, 마치 집주인이 오랫동안 집세가 밀린 세입자를 상대하듯 단호한 목소리로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마르가레트에게 말한다. "다행히 집을 옮겼으니까, 그 둘은 이제 내게서 돈을 뜯어내지 못해요."

마르가레트는 회사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지나 않을까 노심초사 두려워하는 남자가 있다. 몇 달 전부터 자신을 찾아 다니는 남자, 부아야발을 피해 다니는 중이다. 그래서 종종 보스망스에게 회사 앞으로 데리러 와달라고 말하고, 길을 걷다가도 누군가 자신을 쫓아오는 것 같다며 불안해한다. 경찰에 신고를 한 적도 있지만, 그들은 남자가 그녀를 괴롭히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저 구애를 하는 것뿐이지 않냐며, 이제 뭐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니라고 그녀에게 말한다. 그녀는 직장에서도 한참 먼 곳에 있는 오퇴유에 집을 구한다. 눈이 내린 어느 날 밤 보스망스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냥 이렇게 생각하기로 해요. 우리는 지금 파리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산속에, 앙가딘 어디쯤에 들어와 있다고. " 그제야 두 사람의 마음은 편안히 누그러지고, 그들은 그 모든 잘못된 만남을 잊는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이십 대 초반의 장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 르 코즈는 시위대가 운집해 있고, 경찰 기동대가 대로를 따라 인간 사슬을 형성하고 있던 어수선한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 여자는 기동대와 몰려든 군중 사이에서 사람들에게 벽으로 떼밀리다 상처를 입고, 남자는 그런 여자를 약국으로 데려간다. 그들 두 사람은 이 세상에 기댈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었고, 가족은커녕 도움을 청할 곳도 전혀 없었다. 보스망스는 마르가레트에게 영문도 모르게 적개심에 가득 차 자신을 쫓아다니며 돈을 요구하는 남녀도, 그녀를 두렵게 하는 부아야발도 다 별것 아니라고. 조만간 그들은 새로운 지평을 찾아 파리를 떠날 수 있으며 그렇게 우리는 자유롭다고 말하곤 했다.

그녀의 집을 나서면 그는 다시 카페로 들어가 이번에는 타자 원고를 수정했다. 긴 밤이 온전하게 그의 것이었다. 그는 그 구역에 더 머물고 싶었다. 그는 생의 한 교차로에, 보다 정확하게는 미래를 향해 도약할 수 있는 한 경계에 도달한 느낌이었다. 처음으로 그의 머릿속에 그 단어가 떠올랐다. 미래. 그리고 또 하나의 단어, 지평. 그 시절의 저녁, 그 구역의 조용하고 텅 빈 거리들은 모두 미래와 지평으로 통하는 탈주로였다.

 

보스망스는 다른 사람들 모르게 소설을 쓰고 있지만, 남들 앞에서 소설가라고 말하기에는 머뭇거림이 있다. 그의 얼굴, 말하는 방식, 걷는 방식, 앉는 방식에서도 불안이 묻어났다. 그는 언제나 의자나 소파 가장자리에 한쪽 엉덩이만 걸치고 앉았다. 마치 거기는 자기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그리고 곧 달아날 준비를 하는 사람처럼. 키도 크고 몸무게도 백 킬로그램에 달하는 거구의 사내가 보이는 이런 태도는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와 오버랩된다. 그는 언제나 미안해하는 사람의 느낌을 풍겼다. 정확히 무엇에 대해 미안해해야 하는지 스스로도 의문인 채로. 그는 가끔 홀로 길을 걷다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무엇이 미안해? ? 살아 있다는 것이?

마르가레트는 언제나 남들과 함께 있을 때 그들과 격이 맞지 않을 까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항상 다른 사람들의 격에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버지가 가끔 그립고, 어머니가 결혼한 자동차 정비사가 싫어 그녀는 기숙학교에 들어가면서 어머니와의 관계를 끊어버린다. 그리고 그녀는 보석과 시계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고, 체육관 구내 식당에서 일하고, 찻집과 서점에서의 일을 거쳐 두 아이를 돌보는 보모 자리를 얻는다. 겨우 이십 대 초반의 나이에 그녀의 삶은 한 곳에 자리잡지 못하고 여기저기 부유하며 떠돌아 다닌다.  

"한 젊은 여자가 유모차를 밀며 보스망스 앞을 걸어가는데 뒷모습이 마르가레트와 똑같다."

보스망스는 사십여 년이 지난 뒤, 거리에서 그녀와 닮은 여자가 지나가는 것을 본다. 불꽃처럼 짧고 강렬했던 사랑이 예고 없이 끝나버린 후 꽤 많은 시간이 흘러, 보스망스는 파리 곳곳에서 그녀에 대한 기억의 자취를 찾아 다닌다. 이 작품은 그렇게 기억의 편린들을 끌어 모아 과거를 돌아보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짧은 만남들, 어긋난 약속들, 잃어버린 편지들, 오래 전 수첩 속에 적혀 있었지만 이제는 잊힌 이름과 전화번호들, 그리고 의식도 못한 채 마주쳤던 여자들과 남자들." 우리의 삶에서도 자주 잃어버리곤 하는 수많은 것들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는 마치 꿈결처럼 읽힌다. 보스망스는 어디에선가 사람과 사람의 첫 만남은 마치 가벼운 상처처럼 두 사람에게 남아 그들을 고독과 무감각으로부터 깨워 일으킨다는 말을 읽었다고 기억한다. 그렇다. 타인과의 모든 첫만남은 그렇게 누군가에게 상처로 남기도 한다. 그는 마르가레트와의 첫 만남을 회상하면서, 그것이 바로 그곳, 그 지하철 입구에서, 서로 맞부딪치면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필연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은 파리 지도를 보며 그녀와의 기억을 추억하고 떠올려본다. 마치 꿈결처럼 몽환적이게도, 다소 모호하게도 읽히는 이 작품의 매력은 바로 그것에서도 빛난다. 파리의 곳곳을 마치 여행하듯이 누비는 기분으로 거리들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보스망스는 어떤 거리의 한쪽에서는 그가 젊었을 적 만난 사람들을 과거의 나이와 모습 그대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늘 상상한다. 그곳에서 시간의 테두리를 벗어나 지금도 예전 모습 그대로 살고 있을 거라고.

어쩌면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의 끊임없는 희망이 지평을 넘어 그들에게 도달할지 말지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시간의 통로들을 서로 겹치고, 얽히면서 누군가와 관계를 맺어 나가고, 먼 훗날 기억의 파편들을 그러모아 추억에 잠길 수 있는 그것 자체가 너무도 소중하게 느껴졌으니 말이다. 가끔은 나도 그처럼 기억 속에서 길을 잃어보고 싶다고 생각이 될 만큼, 이 작품은 매혹적이다. 지금도 파리에 가면 어딘가에서 보스망스가 몰스킨 수첩 맨 뒤에 실린 작은 파리 지도를 들여다보며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 길들을 찾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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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4 2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2-14 2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구나무
백지연 지음 / 북폴리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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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데스크 최연소 앵커부터 국내 최초 프리랜서 앵커 선언까지... 하는 일마다 이슈를 불러왔던 최고의 앵커, 앵커계의 전설 백지연씨의 첫 번째 소설이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가 두세 살 되던 생일날 문득 엉뚱한 생각을 했다고 한다. 아이가 스무 살 성인이 되는 생일이 되기 전까지 책 10권을 써보자고. 물론 그때만해도 자신조차 그 결심을 믿지 못했었는데, 어느덧 이 책 <물구나무> 10번째 책이라고 한다. 그 동안 써왔던 에세이와는 달리 소..을 쓰기로 결심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앵커 백지연'이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신뢰와 파워 때문인지 그녀의 창작물도 기대가 어느 정도 되기는 했다. 감상에 빠져 멋만 부린 소설은 아닐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이 소설은 첫 번째라는 이름에 걸 맞는 부분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소설가 백지연의 다음 작품을 궁금하게 만들어 주었다.

방송국을 나와 회사를 차리고 독립해 전문 인터뷰어로 일하고 있는 민수에게 어느 날 여고시절 단짝 친구 수경에게서 연락이 온다. 고등학교 시절 3년간 붙어 다니던 친구들 중 하나였지만, 졸업 후 정확하게 27년 만에 온 연락이다. 그들이 27년 동안이나 연락 두절 상태로 지내게 된 계기는 너무도 사소한 거였지만, 때로 인생은 그런 것 같다. 아무 것도 아닌 일로 다투고, 어찌하다 보니 서로에게 손을 내밀 시기를 놓쳐 그저 시간이 무덤이 되어 쌓이기도 하는 것이다. 명문대에 합격하고 영원한 우정을 맹세했던 친구들은 지금 돌아보면 너무도 사소해 보이는 미팅 사건으로 무려 27년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버린다. 지금이라면 그저 웃어 넘어갈 헤프닝으로 보이지만, 그때 그 시절 어린 마음에는 이해하지 못할 배신감이었으리라. 학창시절 뛰어난 실력으로 학교의 수재였던 수경은 대학 졸업하자마자 선 보고 바로 결혼을 하고 그 다음해 엄마가 되었다. 그들 중에 가장 결혼을 늦게 할 것 같았던 그녀가 제일 먼저 결혼하고, 일은 전혀 안하고 주부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그건 우리 주변 누구에게나 찾아 볼 수 있는 인생의 아이러니이다. 이럴 거면 죽어라 공부해서 명문대는 뭐 하러 갔나. 시집 잘 가려고 공부한 건가. 하는 한탄이 나오기도 할 만큼 말이다.

"이제 나는 그냥 누구의 와이프고 누구 엄마고, 언젠가 우리 애들 결혼하면 그때는 또 누구의 사돈, 누구의 할머니로만 불리겠지. 나도 한때 잘하는 게 있는 인재였다는 걸 누가 알아나 주겠니. 나도 모르겠는걸 뭐. 그리고 공부 잘한 사람이 인재라고 할 수 잇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

그녀도 엄격한 아버지의 뜻대로 졸업 후 바로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재벌집 사모님이 아니라 잘나가는 커리어 우먼이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현재의 인생이 달라졌겠지요." 라는 말은 생각보다 꽤 자주 통용되는 말인 셈이다. 내가 그때 이 길로 가지 않고 저 길로 갔다면, 이 사람을 선택하지 말고 저 사람과 함께 했더라면.. 삶을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이기에 언제나 뒤돌아 후회만 하지만, 사실 또 그래서 인생이 재미있는 것이기도 하다. 내 앞에 기다리고 있을 위험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부딪혀야 하는 거니까. 최고의 수재로 서울대에 입학했던 수경, 치대에 입학했던 하정, 언제나 당당했지만 집안 환경은 어려웠던 승미, 3개 국어 능통에 유난히 자상한 아버지를 가진 문희, 공부보다는 소설에 빠져 살았던 미연. 그리고 인터뷰어인 민수. 이렇게 여섯 여자의 인생이 주요 스토리이다.

27년 만에 이들을 하나로 다시 연결하게 되는 계기는 하정이의 죽음이다. 민수는 수경으로부터 하정이가 죽었고 자살인지 타살인지도 확실치 않아 남편, 가족, 주변인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죽은 채 입에서 발견됐다는 것 외에 알려진 게 없지만, 열세 살이나 차이가 나는 남편과 죽기 전에 부부관계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 거기다 하정이 부모님은 부검을 해야 한다 하고, 남편 쪽은 세상 시끄러우니 어서 장례를 치르자고 부검을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남편의 바람과 이혼 요구로 상처받아 힘겨운 수경은 민수에게 친구들을 만나보라고 권한다. 하정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아보자고. 그렇게 인터뷰어로 오래 전 친구들을 만나 그 동안의 일들을 다시 듣게 되는 민수의 앞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그녀가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전개로 치닫는다. 명문대에 합격하기만 하면 인생이 순탄대로 흘러갈 것 같았지만, 어디 사는 게 내 맘 같기만 하겠는가. 무려 삼십 여년 가까이 왕래가 없었던 친구들이기에 그들 각자가 겪어야 했던 시간의 골과 각자의 입장에서 한 사람을 기억하는 내면의 풍경은 많은 생각을 가지게 한다.

"인생 정말 모를 일이지. 내 일에 하정이 일까지 겪고 나니 확 자신이 없어지더라. 산다는 것에 대해 더럭 겁이 나.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되는 건가. 어릴 때는 물어볼 사람도 있었고 힘들면 팔 붙잡고 늘어질 사람이라도 있었지만 이 나이쯤 되고 보니 뭐 하나 붙들게 없네."

이제는 중년의 나이가 되어 소녀 시절의 풋풋함도, 치기 어린 열정도 없이 살아가는 여자들의 이야기는 진부한 듯 보여도 공감되어지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나 화자를 전문 인터뷰어인 민수로 정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 또한 매끄러워 몰입도를 높여주었던 것 같다. 아마도 백지연씨의 분신처럼 보이는 민수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방송, 인터뷰에 대한 자세나 준비, 상황들이 리얼해서 더욱 그런 거였을 수도 있고 말이다. 하정이의 죽음이 시작이었지만, 이야기는 미스터리보다는 각자 연결되어 있는 여자들의 삶에 주목해서 담백하게 펼쳐진다. 어쩌면 이 작품은 '앵커' 백지연이 아니라 '여자' 백지연으로서의 첫 번째 이야기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두 번째 소설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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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산보
플로랑 샤부에 지음, 최유정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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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일본에 관한 책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도쿄 여행에 관한 책이다. 하지만 여행안내서도 아니고 모험 기행문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절판된 여행안내서처럼 잘못된 정보가 없는 것도 아니고 모험 주인공의 지루한 개인사가 안 나오는 것도 아니다. 우선 내가 도쿄에 간 첫 번째 이유는 여자 친구 클레르 때문이었고, 2006 6월부터 12월까지, 정확히는 클레르의 인턴십 기간 동안 도쿄에 머물렀다.

 

플로랑 샤부에는 파리에 사는 만화 작가 겸 일러스트레이터이다. 그는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어쩌다 보니 온 도쿄에서 그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기에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열심히 페달을 밟으며 동네 곳곳을 누비고 다녀 그림지도를 만들고, 사물을 살펴보고, 일상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도쿄 북부의 마칭야에 방 2개짜리 다다미방을 계약했는데, 매일 아침 미니 키보드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곤 했다. 짜증나는 상황을 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상상해본 그림으로 풀어내는 유쾌함이 재미있다.

 

 

이런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금방이라도 삼 년 전 일본에서 갔던 우동집이 떠오른다. 어쩌면 사진보다 더 생생하게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마법 같은 그림이다.

 

집안풍경, 너무도 아기자기하고, 세밀하게 그려진 이곳들을 보고 있자면 요즘 유행하는 컬러링 북을 하나 사볼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색깔을 칠하고, 그림을 그리는 동안 일상의 시름을 모두 잊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플로랑 샤부에의 일러스트는 공간이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클레르랑 집에서 나오는데 한국인 아줌마 여러 명이 몰려와서는 근처에 교회가 문을 열었으니 들렀다 가라고, 신도가 아니어도 오면 공짜 한국 도시락을 잔뜩 먹을 수 있다며 친절하게 우리를 초대했다. 이 말에 귀가 번쩍 뜨여 광신도에게 끌려가면 어떻게 되나 직접 경험해보기로 했다. 가스펠이라 부르기 민망한 콘서트를 감상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도시락 대신 신약성경을 손에 들고 집에 왔다. 맛있겠네.

마치 숨은 그림 찾기라도 하는 것 같은 자세한 묘사 속에는 큭큭 거리게 만드는 유쾌함이 숨어 있다. 소토보리의 강을 묘사한 이 그림 속 '소설적 상상력'을 주시하라. 낚시하는 풍경을 그리면서 이런 걸 그려 넣다니 그의 유쾌한 성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평범한 일상도 그의 그림 속에서는 마치 시트콤 한편 처럼 재미있게 흘러간다.

 

신주쿠 비즈니스 지역 빌딩 대리석에서 만난 길을 잃은 사마귀, 도쿄 정부청사 건물 앞에 있는 거대한 무당벌레, 귀신이 나올 것 같은 텅 빈 거리의 뷰티살롱, 오다이바 해변에서 만난 잘생긴(?) 타히티 청년, 그러다 경찰서 취조실에서 조사를 받게 된 경험까지.. 그의 일상은 말 그대로 다이나믹하다. 특히 경찰서에서의 상황을 묘사하는 그림은 정말 만화 컷이라도 보는 듯하게 흥미진진했다.

 

프랑스인이 바라본 일본의 풍경이 어떠한지, 내가 경험해봤던 도쿄와는 어떻게 다른지 읽어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게다가 일러스트 스케치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사진인 것처럼, 혹은 사진보다 더 정밀하게 그려진 사물 하나하나는 일본에 갔던 기억을 고스란히 떠올리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여행소개 책자나 여행 에세이는 많이 읽어왔지만, 이런 독특한 여행 풍경 스케치는 처음이라 책장은 쓱쓱 쉽게 넘어가는데, 여러 번 다시 읽고 싶어지는 책이기도 했다.

색연필 그림과 깨알 같은 손 글씨로 그려낸 도쿄의 풍경은 정말 여행가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일본도 좋고, 다른 나라도 좋고, 어디든 떠나서 나만의 여행지도를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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