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스머신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박재현 옮김 / 반니 / 2014년 12월
평점 :
품절


 

언젠가 파일로 밴스가 등장하는 책을 읽다가 S.S. 밴 다인의 작가 이력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는 건강 악화로 의사에 지시에 따라 2년간 장기 요양을 하게 되었는데, 그 기간 동안 담당 의사는 독서를 금지시켰다. 지나치게 많은 집필 활동으로 인한 건강 악화였기에 내려진 특단의 조치였는데, 밴다인은 의사에게 미스터리 소설만은 읽을 수 있도록 요청했고 의사의 허락을 받아냈다. 그는 요양하는 기간 동안 엄청난 양의 미스터리 소설들을 읽어댔다. 그는 에드거 앨런 포부터 연대순으로 현대 작품까지 읽기 시작했고, 자신이 읽은 것들을 정리하고 체계화했다. 결점이 분명하게 드러난 미스터리 작품들이 쇄를 거듭하여 팔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경험과 연구가 월등한 자신이 더 훌륭한 작품을 쓸 수 있다고 여겼다. 거기서 새로운 탐정 캐릭터를 구상하고 풍부한 교양과 현학적인 묘사가 흘러 넘치는 입담의 파일로 밴스라는 탐정이 탄생한다. 그는 탐정 소설을 쓸 경우에는 매우 명확한 법칙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글쓰기 원칙들을 간결하게 정리해 '탐정 소설을 쓰기 위한 스무 가지 규칙'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먼저 <녹스의 십계>의 각 항목을 수식으로 기술해 10차원의 매트릭스를 구성한 뒤 이것을 '녹스장'이라고 이름 붙인다. 이 녹스장에 저자와 독자의 대결 방식에 기반한 '2-제로섬-유한[확정[완전정보형 게임'의 알고리즘을 채우고 쿠머와 후마얀의 스토리 생성 방정식을 거꾸로 돌려 해의 분포를 그림으로 그린다.

유안의 짐작이 옳다면, 이렇게 만들어진 해의 분포는 황금기의 탐정소설 작가들이 점점 더 똑똑해지는 독자와 거리를 벌리기 위해 지혜를 짜내 고안해낸 정교한 속임수나 플롯의 이노베이션 곡선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탐정 소설을 쓰기 위한 작법 그 자체보다 수많은 미스터리물을 읽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화해서 이론화한 그의 능력에 감탄했는데, 사실 이것은 장르 소설만의 특징이자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밴 다인의 규칙은 관점에 따라, 혹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는 부분이 물론 있으나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요소들을 분석해서 추려낼 수 있다는 것 자체에 있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만약 현대의 범죄, 미스터리, 추리 소설들도 그 수많은 작품들을 전부 다 분석하고, 규칙을 파악할 수 있다면, 만약 그것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넣고 돌릴 수 있다면, 그걸 토대로 완전히 다른 작품을 '오로지 그 규칙들을 통해서' 만들어 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 그대로 사람의 손이 아닌 기계의 손으로 이야기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언젠가는 정말 뛰어난 컴퓨터 프로그램이 기존에 출간된 작품들의 장점을 추려 모으고, 단점을 정리해서 보완할 수 있다면 새로운 작품을 써낼 수도 있지 않을까 했는데, 그 공상이 현실이 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노리즈키 린타로의 신작 <녹스머신>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감탄과 공감과 부러움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이런 소재로 이렇게나 멋진 작품을 만들어내다니! 하면서 말이다. 물론 이 책은 일반 적인 미스터리와는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다소 머리가 아플 수 있고, 혹은 이해가 잘 되지 않아 헤맬 수도 있음을 미리 말해주고 싶다. 그러나 정말 획기적으로 새롭고,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만큼 행복한 재미를 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야기는 2058년의 어느 날, 상하이 대학의 유안 친루가 국가과학기술국으로부터 소환장을 받는 걸로 시작한다. 소환장에는 유안의 박사논문에 관해 몇 가지 확인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고 적혀 있었다. 유안 친루는 문학수리해석을 전공한 문학 연구자이다. 배경은 컴퓨터로 제작하는 오토포메틱스 문학이 노벨 문학상까지 받는 그야말로 상상이 현실이 되는 시대이다. 누군가에 의해 이야기 생성 방정식이 발표되자, 인간의 뇌와 손이 창작해내는 문학은 내용 면에서나 비용 대비 효율 면에서 '오토포에틱스'를 대적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완전히 자동화된 이야기를 창작하겠다는 꿈이 현실화된 세상인 것이다. 주인공 유안의 전공인 문학수리해석은 시나 소설 작품에 사용되는 단어나 관용구의 빈도를 정밀 분석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학문으로 이것을 통해 어구의 수준부터 문장의 결합, 작품 구조 해석에까지 연구 범위가 확대되고, 작가 고유의 문체를 통계학 기법으로 완벽히 되살려낼 수 있게 된다. 분명 이것은 소설 상의 설정일 뿐인데, 나는 어쩐지 이것이 미래의 언젠가 실제로 현실로 이루어질 것만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런 세상이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사람 냄새 나지 않는 문학이 삭막할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유안이 발표했던 논문은 로널드 녹스가 발표한 탐정소설의 규칙 '녹스의 십계'에 관한 것이었다. 선배 연구자들 대부분은 밴 다인의 '잠정소설 작법의 20법칙'을 해석 모델로 사용했으나, 자신이 보기에 그것은 융통성이 없고, 엄밀성이 결여된 기술도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과학기술국 장관은 바로 그 논문에 양방향 시간여행의 난제를 해결할 결정적인 실마리가 있다며, 유안에게 녹스가 이 책을 집필하던 130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한다. 그들의 가설이 옳다면 역사상 최초의 양방향 시간여행을 실현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용기를 내어 밝히겠다. 솔직히 크리스티 여사가 나를 명탐정 에르큘 포와로의 하나뿐인 친구이자 그의 전기작가 지위에서 물러나게 만들면 어쩌나 두려웠다.

들러리의 전통이라거나 탐정소설의 공정한 플레이라는 식의 그런 거창한 얘기가 아니다. 크리스티 여사의 심경 변화로 포와로와 쌓아온 오랜 우정이 깨지는 것은 아닐까? 두 번 다시 포와로의 모험에 함께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닐가? 오직 그 점만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이라는 작품이 셰퍼드 의사의 수기로 발표된 탓에 나만 따돌림을 당했다고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총 네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표제작인 <녹스머신>의 이야기는 마지막에 수록된 〈논리증발 - 녹스 머신 2〉에서 기묘하게 완성된다. 〈들러리클럽의 음모〉는 불멸의 고전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존 왓슨 박사, 헤이스팅스 대위 등 들러리들이 모여 애거서 크리스티와 벌이는 색다른 두뇌싸움이 주요 스토리인데, 정말 유쾌하고 기발하고 매력적이다. 〈바벨의 감옥〉은 기존의 그 어떤 탈옥소설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색다른 스토리를 자랑한다. 특히 이 작품은 일본어 세로쓰기에 맞춘 트릭으로 구성된 작품이라, 중간중간 경상인경이 주고 받는 메세지가 세로쓰기로 구성되어 있어 더 흥미롭게 읽히는 작품이다. 이 리뷰를 쓰면서 정작 작품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보다 작품의 배경에 대한 단상을 더 길게 언급한 이유는 이 작품만의 새로움을 글로 설명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아무런 정보 없이, 혹은 최소한의 정보만 가지고 이 책을 읽어야 오롯이 재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스텔라가 천만 돌파를 하는 요즘에 시간여행, 양자역학 같은 현대물리학 지식을 총동원한 미스터리라 너무도 흥미진진하고, 기발한 상상력에 정점을 찍는 이야기생성에 관한 아이디어는 너무도 매혹적이다.

그동안은 작가의 이름 '노리즈키 린타로'와 같은 이름의 탐정이 등장하는 노리즈키 린타로 시리즈만 읽다가, 이번에 출간되는 책은 무려 SF 미스터리 집이라고 해서 더욱 궁금했던 작품인데,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작품이었다. 최근에 읽었던 미스터리물 중에서 가장 색다르지만 공감되고, 복잡하지만 명확하며, 어렵지만 재미있었던 작품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재회 - 제56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요코제키 다이 지음, 이수미 옮김 / 살림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할아버지의 책장이 좋았다. 할아버지 책장은 동서고금의 미스터리로 꽉 채워져 있었다. 일본 작가는 물론 외국 작가의 미스터리까지 다양했다. 아서 코난 도일이나 애거사 크리스티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도 할아버지 책장 덕분이었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마치 걸신들린 듯 미스터리를 탐독했다. 어쩌면 이야기에 굶주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소설가라는 직업을 이즈음부터 의식하게 된 것 같다.

매년 한 편의 장편 소설을 완성하여 에도가와 란포 상에 응모한다. 그렇게 결심한 것은 지금부터 8년 전의 일이다. 생각하면 도움닫기가 참 길었던 것 같다. 그러나 멀리 돌아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작가의 수상소감 중에서

글쓰기는 정해놓은 시간에 일정한 장소에 앉아서 정해진 분량을 꾸준히 써야 하는 고단한 일이다. 더구나 그것이 아무런 보답도 주어지지 않는 일이라면, 매일같이 혼자 벽보고 앉아 있는 기분이 들 수밖에 없다. 게다가 매년 응모하는 공모전에 꾸준히, 몇 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낙방한다면 다른 길을 찾아봐야 하는 게 아닌가 자신의 재능에 대해 진지하게 숙고해보고 싶어질 것이다. 그 곳에 정말 길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무작정 돌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와중에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는 일을 하면서 글을 쓰려고 하는 것은 그저 낭만적인 취미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직장에서의 스트레스 때문에, 혹은 회식이다 약속이다 일정 때문에 꾸준히 글을 써나가기도 어려울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그 시간들을 다 이겨내고 결국 작가가 된 이가 있다. 내가 56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인 이 작품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는 바로 그런 작가의 이력 때문이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작가지망생이었던 그는 공무원이 되었지만 작가에 대한 꿈을 접을 수 없었다. 그는 란포상에 도전해보고자 마음먹고 퇴근하고 몇 시간 동안 글을 쓰는 생활을 꾸준히 지속한다. 그렇게 8년 동안 연속해서 작품을 응모해서 최종후보에 4번이나 올랐다 떨어지는 동안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게 떨어진 작품들이 일곱 편이나 되지만, 그는 그 시간을 이겨내고 결국 목적을 이루어낸다. 8년 동안이나 연속해서 응모를 해서 이루어낸 그 포기하지 않는 집념이 정말 대단하다. 일곱 편이나 낙선되면서 그럼에도 계속 글을 쓴다는 건 외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유명한 소설가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상태에서도, 꿈을 향해 전력 질주하는 그 용기가 멋지고 대단하다.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말았다. 설마 사쿠마를 죽인 흉기가 타임캡슐에 넣어둔 권총이었을 줄은...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다. 역시 그 권총을 묻은 건 너무나 경솔한 행동이었다.

후회해도 무엇 하나 바꿀 수 없는 이 상황에 초조감만이 가슴을 적실 뿐이었다.

헤어 디자이너로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는 마키코는 아들인 열두 살 마사키가 도둑질을 했다는 전화를 받고 근처 슈퍼마켓으로 달려간다. 마사키는 내년 봄부터 명문 사립중학교에 추천을 받아 입학할 예정인데, 대학까지 자동으로 진학할 수 있는 터라 그녀는 이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입학이 취소될까 고민이다. 전화로 그녀를 호출한 히데유키는 이 일을 눈감아 주는 대가로 돈을 요구하고 그녀는 전남편 게스케와 상의해 돈을 마련하지만 그의 요구는 계속 된다. 경찰에 알려지더라도 아직 열두 살이라 직접적인 벌을 받게 되지는 않지만, 중요한 것은 내년에 입학할 학교에 미칠 영향이다. 돈을 더 유구하던 히데유키는 급기야 그녀의 몸까지 요구하게 되고, 돈으로 어떻게든 무마하려던 그녀의 전남편은 약속 장소에서 그가 죽어있는 걸 발견하게 된다. 경찰에 신고하게 되면 그들이 이 장소에 온 이유에 대해서도 추궁을 받을 것이 뻔해 그들은 그대로 도망치기로 한다. 직접적인 살인을 저지른 것도 아니면서, 마치 범인이라도 된 듯이 말이다. 하지만 싱글 맘으로 살면서 아들의 미래를 가장 중요시하는 엄마였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가나가와현 작은 마을에서 발생한 이 살인사건을 계기로 초등학교 동창생 4명이 재회하게 된다. 어린 시절, 냉정한 리더 게스케, 철부지 나오토, 개구쟁이 준이치. 그리고 말괄량이 마키코. 왠지 마음이 맞았던 네 친구는 무엇을 하든 항상 함께였다. 수업 사이사이 쉬는 시간에도 함께 놀았고, 방과 후에는 검도 교실에서, 검도를 쉬는 날이면 숲이나 빈 터에서 함께 놀았었다. 이들 네 명중에 게스케와 마키코는 결혼을 했다 이혼을 한 상태이고, 나오토는 프레쉬 사쿠마의 실질적인 경영자이자 히데유키의 배다른 동생이다. 준이치는 형사로 슈퍼마켓 점장 살인사건의 담당자가 된다.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권총이 23년 전 순직 경관이 분실한 권총으로 밝혀지면서 사건은 급 물살을 탄다. 순직한 경관은 다름 아닌 게스케의 아버지로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준이치가 사건의 최초 발견자였고, 그들 4 명이 그 권총을 타임 캡슐에 묻었던 것이다. 타임 캡슐을 묻은 장소는 그들 4명만 알고 있는데, 대체 어떻게 된 걸까? 누가 어떤 이유로 타임캡슐을 열었으며, 살인사건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분명히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현재에 일어난 사건을 통해 과거의 인물들간에 숨겨진 관계를 파헤치는 스토리에다, 오랜만에 만나는 다소 촌스러운 소재 타임캡슐도 매우 흥미롭게 얽혀있다. 불필요한 수식이 많지 않고, 선정적인 사건이 없어도 물 흐르듯 흘러가는 스토리가 묘한 흡입력을 발휘하는 작품이다. 타임캡슐을 둘러싼 23년 전의 사건과 네 명의 동창생.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의심과 추측, 그리고 밝혀지는 숨겨진 사실은 잘 어우러져 작가의 탄탄한 습작기를 짐작케 할 정도로 흐트러짐이 없다. 란포상에 8번이나 도전한 끝에 당선된 작품이라는 것이 괜히 과장된 홍보문구가 아님을 이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 읽어주는 예수
고진하 지음 / 비채 / 201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근심에 가득 차, 가던 길 멈춰 서서

잠시 주위를 둘러볼 틈도 없다면,

얼마나 슬픈 인생일까?

햇빛 눈부신 한낮, 밤하늘처럼

별들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볼 틈도 없다면

                                        -윌리엄 데이비스 <가던 길 멈춰 서서> 중에서

특별한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나 같은 독자라면 '예수'가 시를 읽어준다고? 하며 반감부터 가질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이 책은 별다른 거부감 없이 술술 읽힌다. 서른여섯 편의 시와 산문들 각각에 시인의 해석이 에세이처럼 덧붙여져 있는데, 컨셉이 예수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시일 뿐이지 시 자체가 종교적인 내용을 설파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 덕분에 참으로 오랜만에 ''를 읽게 되었는데, 복잡한 플롯과 긴 서사를 사랑하기에 소설만 주구장창 읽어대다, 이렇게 만나게 되는 ''는 뭐랄까, 마음의 쉼표를 잠시 찍어주는 것 같은 여유로움을 안겨 주었다.

사실 하루 하루 너무 바쁘게 보내다 보니, 뒤를 돌아볼 여유도, 내 곁을 지나는 바람도 느낄 겨를이 없이 올해를 맞이했고, 어느새 2월도 내일이면 마지막 날이다. 새해가 시작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두 달이나 지나버리고 나니, 그저 두 달이라는 시간을 통째로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 마저 들었다. 윌리엄 데이비스의 <가던 길 멈춰 서서>라는 시에서는 '한가로이 오랫동안 바라볼 틈도 없다면' '별들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볼 틈도 없다면' '미소가 입술로 번지는 것을 기다릴 틈도 없다면' 그렇다면 그 인생은 불쌍한 인생이라고 말한다. 가던 길 멈춰서 잠시 주위를 둘러보고, 그저 바라볼 틈마저 없다면 대체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일까. 어쩐지 요즘의 내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시 같아서 뜨끔하기도 하면서, 서글퍼진다. 저자는 이 시에서 ''에 주목한다. 생명이 싹을 튀우는 곳도, 사랑이 자라나는 곳도 바로 틈이라고. 감옥의 독방에 갇혀 절망한 어느 시인이 우연히 창살 사이로 갈라진 시멘트 틈을 비집고 나온 작은 풀꽃을 보고 살아갈 이유를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고 말이다. 그의 말처럼 우주만물은 틈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건지도 모른다. 나의 일상에도 바로 이런 ''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긴 하다.

 

그대가 정말 불행할 때

세상에서 그대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믿어라

그대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한

삶은 헛되지 않으리라

행복의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그러나 흔히 우리는 닫혀진 문을 오랫동안 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열려 있는 문을 보지 못한다.

                                                 -헬렌 켈러 <행복의 문> 중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고, 단지 가슴으로만 느낄 수 있다고 말하는 헬렌 켈러의 시는 그저 읽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준다. '나는 눈과 귀와 혀를 빼앗겼지만 내 영혼을 잃지 않았기에 그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헬렌 켈러의 강인한 정신력과 긍정적인 마음을 본받고 싶다. 사실 같은 상황도 마음 먹기에 따라 천국이 될 수도, 지옥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마음'이라는 것이 생각만큼 쉽게 제어가 되지 않아서 문제이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잡을 수만 있다면 뭐든 극복하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저자는 눈도 캄캄, 귀도 캄캄, 목소리도 캄캄하게 닫힌 이의 눈물겨운 고백에 가슴이 아리고 먹먹해진다고 쓰고 있다. 고통의 뒷맛이 없으면 진정한 삶의 기쁨이나 행복은 맛볼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봐도 그렇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저자의 말처럼 몸이 아파 보지 않은 사람은 건강의 소중함을 모를 수밖에 없다. 잃어버리지 않은 사람은 그것은 소중함을 모른 체 허투루 대하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우리는 상실을 경험해봐야 그것의 중요함을 깨닫는다. 우리 모두 그저 인간이라는 나약한 존재이기에 어쩔 수가 없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그럴 수록 이런 시가 필요한 것 같다. 구구절절 설명하거나, 변명하지도 않고, 단어 몇 개 만으로도 심금을 울릴 수 있으니까.

성경을 제대로 읽어 본 적도, 예수의 가르침이 드러난 글을 읽어본 적도 없기에, 어쩌면 내가 이 책을 저자의 의도대로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책은 독자의 오독에서 자유롭지 못한 운명 아닌가. 어떻게 읽든, 어떻게 해석하든 읽고, 느끼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 아닌가 싶다. 게다가 나는 오랜만에 ''를 읽게 되어 괜히 들뜨고 설레이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더라. '시는 새로운 독자와의 만남으로 늘 완전해지려고 하는, 언제나 미완성인 작품이다'는 시인 옥타비오 파스의 말처럼 독자 여러분들이 이 글을 완성해달라는 저자의 말은 이런 나의 마음에 더욱 힘을 실어주기도 하고 말이다. 어쩌면 종교를 가지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예수는 시인이다. 은유의 천재다."라는 저자의 말에 동의하며 더욱 감탄할 지도 모르겠다. 암튼, 비종교인인 내가 읽기에도 참 좋은 책이었고, 종교인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물이 될 것 같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5-02-27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서가 멋진 은유로 이루어진 표현이 많아서 무교도 읽으면 좋은 책이에요. ^^

피오나 2015-02-27 17:37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ㅎㅎ 저도 선물받아서 한 권 가지고 있긴 한데,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
 
오키나와 홀리데이 (초대형 나하 일러스트 아트맵) - 내 생애 최고의 휴가 최고의 휴가를 위한 여행 파우치 홀리데이 시리즈 16
인페인터글로벌 지음 / 꿈의지도 / 201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오키나와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생뚱 맞게도 '야구'때문이다. 매년 야구 시즌이 끝나면 선수들이 전지훈련을 떠나는 나라가 바로 오키나와이다. 겨울에도 새로운 시즌을 맞이하여 연습을 해야 하는 선수들이다 보니 따뜻한 나라로 가는데, 가장 많은 팀들이 찾는 곳 중의 하나가 오키나와이다. 게다가 아시아의 하와이로 불리는 곳이라 아이와 함께 가족 여행으로 가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곳이기도 하다. 아이 돌에 맞춰 아이와 함께 가는 첫 해외 여행을 계획 중이다. 태교 여행으로 괌과 제주도를 다녀왔었는데, 아무래도 이렇게 따뜻한 휴양지이고, 비행 시간이 길지 않은 곳이 좋을 것 같아 오키나와가 일 순위가 되었다. 물론 아이와 함께 가려면 생각보다 조심해야 할 부분들이 많이 있겠지만, 괌에 다녀오고 보니 안 갔으면 후회했을 정도로 너무나도 멋지고 소중한 시간을 선물 받게 되니 자꾸만 해외로 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두 돌이 되기 전까지는 보통 항공료의 10%와 세금만 부담하면 비행기를 탈 수 있는데다 호텔 숙박료, 식비도 따로 들지 않으니 말이다. 물론 여행이 마냥 즐기는 시간이 아니라 육아의 연장이 되긴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고, 느끼게 해줄 수 있고, 육아에 지친 나에게도 힐링이 될 것 같아 떠나보려고 한다.

오키나와는 비행 시간이 짧아서 좋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섬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여유로움과 따뜻함이 배어 있어서 더욱 흥미로운 곳이다. 너무도 맑아서 속이 다 보이는 하늘빛 바다를 통해 태평양 여기저기를 맛볼 수 있는 것도 너무 좋고, 겨울에도 평균 기온이 18도일 정도로 따뜻한 것도 마음에 든다. 여행을 다녀온 지인의 말에 따르면 낮에는 관광지 이외의 지역에서는 사람을 마주치기 쉽지 않을 정도로 한산하다고 하는데, 그런 느긋한 풍경 또한 아이와 함께 하는 가족 여행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숲 곳곳에 캠핑 장이 잘 되어 있는 것도 구미를 당기게 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이 책에서는 오키나와 중심 도시 나하, 해안도로의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남부, 미군정의 흔적과 역사적 변화를 담고 있는 중부, 아열대 숲의 대자연을 느낄 수 있는 북부, 그리고 가장 오키나와스러운 모습을 간직한 미야코지마 섬과 야에야마 제도까지 오키나와의 모든 곳이 샅샅이 분석되고, 소개되어 있다. 구경해야 할 것들, 직접 체험해야 할 것들, 맛있는 먹거리와 잘 곳, 쇼핑할 것 등에 이르기까지 여행에 필요한 모든 리스트가 총망라되어 있는데, 정보들이 단순히 진열만 되어 있는 게 아니라 적재적소에 잘 배치가 되어 있어 한 눈에 들어오는 장점이 있다. 오키나와에 가면 꼭 해봐야 할 것들의 리스트 중에는 스쿠버다이빙과 스노쿨링, 자전거 여행, 해안선을 따라 즐기는 드라이빙, 전통거리 탐방, 트레킹, 선탠, 맛집 투어 등이 있는데 어떤 사진을 보아도 한적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이라 여행을 준비하는 마음을 더욱 설레게 만들어 준다. 꼭 먹어야 할 리스트 중에는 오키나와 흑설탕을 뿌린 팥빙수와 거품 가득한 부쿠부쿠차, 그리고 자색고구마로 만든 베니이모 타르트와 이시가키 소고기가 눈길을 끈다. 역시 여행지에 가면 소문난 먹거리는 지나치지 않아야 하는 법이다.

 

아이와 함께 떠나는 45일 가족 여행 일정도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어 나중에 여행 일정을 짤 때 참고가 될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아이 없이 45일 리조트 휴식 여행이나 알찬 일정으로 가득한 45일 싱글 여행 일정으로 떠나고 싶기도 했지만, 그런 욕심은 살짝 버려둬야 한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항공 스케줄과 오키나와 현지 교통 이용 방법, 섬 투어 프로그램까지 소개되어 있어 현지에 가서 들고 다니면서 찾아 보기도 좋을 것 같았다. 물론 컴팩트 한 크기와 어디서도 눈에 뛸 만한 상큼한 표지 디자인도 가지고 다니고 싶은 마음이 잔뜩 들게 만들기도 한다.

얼마 전에 배우 고형정씨가 오키나와로 여행을 다녀와서 오키나와 여행 에세이를 책으로 내었는데, 슬쩍 보니 사람들이 휴식이 필요할 때 왜 오키나와를 찾는지 짐작할 만 했다. 이상하게 일본임에도 일본의 정취가 가장 느껴지지 않는 곳이기도 한데, 오키나와가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곳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을 다 보고 나니 한낮의 더위 속에서 차가운 오리온 맥주와 금방 튀겨낸 감자칩을 먹으면서 해변가를 거닐고, 날이 지면 해안 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하고 싶어졌다. 당장이라도 공항으로 달려가고 싶게 만드는 여행 가이드 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브릴리언스
마커스 세이키 지음, 정대단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브라이스 박사는 1980년 이래 특수 능력을 가진 아이들이 100명 중 한 명 꼴로 태어났다고 추산했다. 이런 아이들은 모든 면에서 통계적인 정상 범위에 속했다. 영리하거나 그렇지 않기도 하고, 사교적이거나 그렇지 않기도 했다. 어떤 분야에 재능이 있거나 없기도 했다. , 경이로운 능력만 제외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이전 세대의 인류와 완벽하게 똑같았다.

가끔 드물게 초인적인 능력을 타고난 아이들은 대체로 어떤 식으로든 장애가 있었다. 서번트 증후군이라고 해서 사회성이 떨어지고 의사 소통 능력이 낮으며 반복적인 행동을 보이는 등의 장애가 있으나 암산, 퍼즐이나 음악적인 부분 등 특정한 부분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일컫는다. 그런데 '브릴리언트'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80년을 기점으로 이처럼 특별한 능력을 가진 새로운 인류 '브릴리언트'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30여 년 후, 그들이 각계에서 두각을 보이며 결국 그들로 인해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전체 인구의 1퍼센트에 조금 못 미치는 숫자가 브릴리언트로 태어난다. 대다수는 4급에서 5급의 능력으로 달려 외우기나 속독, 사진 같은 기억력, 높은 자시 숫자의 암산 등 재주이지만 문제가 될 만한 소지는 적었지만, 그러다 주식 시장의 움직임을 명백하게 볼 수 있는 1급들이 나타났고, 결국 그 한 명으로 인해 정부가 뉴욕 증권 거래소를 폐쇄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대부 업체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고, 회사들은 도산하게 되자 보통 인류인 노멀들이 브릴리언트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한때는 호기심의 대상에 불과하던 존재가 이제는 심각한 위협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당신은 미래를 막을 수 없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편을 고르는 것뿐이야."

그렇게 평범한 인간인 '노멀'과 돌연변이인 '브릴리언트'들이 공존하는 세상이 어쩌면 우리의 근 미래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만큼 마커스 세이키는 리얼하게 이야기를 구축해서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인 쿠퍼 또한 브릴리언트로 공정국의 분석대응부서, DAR에서 테러리스트들을 막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이자 악명 높은 테러리스트인 존 스미스와 일하는 알렉스 바스케즈를 쫓고 있다. 그의 능력은 보디랭귀지에 최적화되어 있는 패턴 인식이다. 아흐레 째 만에 겨우 바스케즈를 만나지만 대척 상황에서 그녀는 두 손을 주머니 깊숙이 넣은 채 옥상에서 머리부터 뛰어내린다. 잡혀가 집중 심문을 받기보다는 입을 다물겠다는 이야기이다. 시작하자마자 매우 강렬한 장면을 보여 주며 시선을 잡아 끈다. 영화로 만들어지더라도 관객들을 단 한방에 주목시킬 수 있을 만큼의 매력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그러니 혹시라도 당신이 서점에서 이 책을 집어들게 된다면, 당신은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만큼 멋진 오프닝이다.

  

 

쿠퍼와 DAR의 절대적인 목표는 악명 높은 테러리스트인 존 스미스이다. 그가 저지른 모노클 학살은 상원의원을 포함해 73명을 살해한 전무후무한 테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후에 여기저기서 발생한 폭탄 테러 역시 그의 수하들이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기에 그의 행방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지만, 공정국은 번번히 그를 놓치고, 그의 계획에 당하고 만다. "놈은 소시오 패스일지도 모르지만, 동시에 체스의 마스터야. 전략에 있어서는 아인슈타인이나 마찬가지지." 존 스미스는 1급 브릴리언트였고, 전략에 능한 리더였다. 쿠퍼의 능력은 패턴 인식이다. 상대방이 지금 어디로 펀치를 날리려고 하는지 등의 구체적인 의도를 읽어내어 개인적인 움직임과 패턴을 파악해내는 것이다. 게다가 쿠퍼는 이 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기관의 최정예 요원이었다. 막대한 가용 자원과 비밀 정보에 접근이 가능했고, 전화를 감청하거나 경찰을 동원할 수도 있었다. 일단 어떤 돌연변이가 타깃으로 지정되면, 쿠퍼는 법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사살할 권한이 있었고 실제로 열세 차례나 그렇게 했다. 한마디로 쿠퍼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막강한 힘을 휘두를 수 있었다. 문제는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인 존 스미스,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는 것.

"그래, 그 친구의 어린 시절은 끔찍했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살짜리 여자아이를 쏴도 되는 자격이 생기는 건 아니지. 내 말이 틀렸나?"

다른 브릴리언트들은 쿠퍼 또한 능력자이면서 왜 DAR을 위해 일하는지 의아해한다. DAR은 브릴리언트에 대한 실험과 관찰, 연구를 수행하는 부서로 그들 돌연변이의 절대 적이었으니 말이다. 쿠퍼는 자신의 아이들이 돌연변이와 정상인이 공존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이 작품의 진정한 매력은 바로 이런 부분에서 빛을 발한다. 캐릭터가 생생하게 살아있으며, 초인적인 능력을 가졌지만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순간 몇 년 전에 케이트가 3.1킬로그램을 갓 넘는 무력한 모습으로 태어났던 날을, 크리스마스 불빛을 보고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를 달래느라 잠 못 이루던 밤을 생각했다. 그 모든 날들. 그 모든 시간. 아버지가 된다는 일의 그 모든 고통과 기쁨.

..........결국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아이들을 위해서였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에 했던 일조차, 나탈리를 만나기도 전에 했던 일조차도. 그것은 쿠퍼가 부모가 되기 전에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고, 부모가 된 이후로는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진실이었다.

쿠퍼에게는 전처인 나탈리와 함께 살고 있는 아홉 살 난 아들 토드와 네 살인 딸 케이트가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케이트에게 이상한 징후가 발견된다. 인형을 알파벳 순으로 나란히 놓고, 동화책 표지를 스펙트럼에 따라 색깔 별로 꽂는 것이다. 쿠퍼는 딸아이가 돌연변이, 그것도 1급이라는 것을 직감한다. 아카데미에서는 능력자들이 서로 단결하게 내버려두지 않기 위해, 어릴 때부터 서로 신뢰하지 못하게 가르친다. 그러니까 케이트가 테스트를 받게 되어 1급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그래서 아카데미에 가게 되면 다시는 가족들을 만날 수 없게 된다. 게다가 쿠퍼는 아카데미가 실제로 어떤 곳인지, 개인에게 도청 장치를 심고, 불신과 두려움을 유도하는 곳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절대 케이트가 테스트를 받지 못하게 해야 했다. 그리고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된다. 부모가 아이를 위해 어떤 일까지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극단적인 선택을 말이다.

마커스 세이키의 데뷔작인 <칼날은 스스로를 상처 입힌다> <대니얼 헤이스 두 번 죽다>를 읽었을 때만 해도 SF 스릴러로 돌아올지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매우 궁금했던 작품이다. 게다가 표지 이미지가 압도적이었다. 특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인류를 암시하는, 역동적인 이미지가 굉장히 멋지다. 원서의 표지들은 다소 밋밋한데, 국내 버전 표지는 굉장하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표지가 얼마나 멋진지 한번 더 느낄 수 있었다. 이 작품은 3부작으로 구상하고 있는 시리즈의 첫 번째라고 하며, 「인터스텔라」, 「다크 나이트」를 만든 블록버스터 전문 제작사 레전더리 픽처스에서 영화로 만들 예정이라고 한다.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읽으면서 단 한 페이지도 지루할 틈이 없었고, 모든 상황마다 머릿속에서 장면들이 생생하게 재연되었으니 영화사에서 판권을 노릴 수밖에 없는 작품이기도 하다. 돌연변이라는 신 인류에 대한 설정부터 그들이 평범한 인간들과 어떻게 부딪치는지, 그 속에서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면서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들이 벌어지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쿠퍼를 비롯해 일명 벽을 통과해 걷는 여자 섀넌, 그리고 DAR의 동료 바비 퀸, 전처인 나탈리, 국장 드루 피터스, 라이벌 로저 디킨슨.. 등등 매력적인 캐릭터의 향연도 영화화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게다가 이런 캐릭터들을 가지고 시리즈라니, 벌써부터 다음 시리즈가 손꼽아 기다려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