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의 제국
이토 게이카쿠.엔조 도 지음, 김수현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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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대학 의학부 대 강의실, 의학도 존 왓슨은 친구 웨이크필드와 함께 처음으로  '죽은 자 소생' 실습을 한다. 자유 경제의 발전은 시체가 뒷받침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라, 언제나 시체가 부족하던 시대였기에, 연구를 위해 시체를 도둑질하는 것이 뉴스가 되는 그런 시기였다. 상처 하나 없는 신품 시체가 해부대에 나신으로 누워 있었다. 수어드 박스는 전류 자극으로 두개골에 박힌 바늘을 통해 뇌 조직에 거짓된 영혼을 불어 넣는다. 시체가 프랑켄화하는 순간, 죽은 자의 눈꺼풀이 번쩍 열린다. 죽은 자는 태연하게, 산 자들 눈앞에서 그렇게 되살아난다. 방금 전까지 생명을 잃고 누워 있었던 것이 갑자기 움직이는 것을 목격하는 기분이란 어떨까.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는 섬뜩함이 느껴질까. 과학이 결국 이런 일을 이루어내는 구나 감탄부터 나올까.

우리는 저마다 이야기를 가지고 자기 의사라고 믿는 것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의사를 믿는다고 느낄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과학은 확실히 '어째서'에 대해 묻지 않지만 우리는 죽은 자와 다르다. 우리는 물리적인 현상이지만, 동시에 의미를 덮어 쓰기 하면서 살고 있다. 겨우 21그램 정도의 영혼이 그런 덮어쓰기 기능을 담당한다. 이야기마다 의미를 부여하기를 거절한다면 우리는 죽은 자와 다를 바가 없어질 것이다.

사람이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할 때, 누군가는 영혼의 무게가 21그램이라는 실험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사람에게 영혼이 존재하고 죽음을 맞는 순간 영혼이 육체를 빠져나간다고 한다면, 질량보존의 법칙에 따라서 사망 전후의 체중 차이가 바로 영혼의 무게일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하여 이를 증명해 보인 것이다. , 그렇다면 사람이 죽었을 때 인위적으로 이 '영혼'이라는 것을 주입시킨다면, 그는 다시 '살아있는' 사람이 되는 것일까. 이론적으로 보자면 가능하지 못할 법도 없을 것이다. 이야기의 배경은 19세기 말, 프랑켄슈타인이 죽은 자를 살려 낸 지 100여년이 흐른 시점에서, 죽은 자의 몸에 가짜 영혼을 인스톨하여 되살려 내는 이 기술이 발달한 시대이다. 인류는 죽은 자 소생 기술을 발전시켜 노동과 군수 분야에 활용 가능한 '크리처'라고 불리는 생물을 제조했다. 그러니까 죽은 시체가 다시 되살아나 살아 있는 인간과 함께 생활하는 시대인 셈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다시 생명이 부여된 것은 아니다. 그저 이들은 스톨된 의사 영소에 따라 움직이는 시체, 즉 로봇과도 같은 존재로 재 탄생한 존재에 불과하다.

, 그렇다면 뭐가 문제일까. 최초로 무생물에 생명을 부여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던 프랑켄슈타인을 떠올려보자. 그는 시체로 만든 괴물에 생명을 불어넣지만, 결국 그 괴물은 인간 이상의 힘을 발휘하게 되고 자신을 만든 창조주에 대한 복수를 꾀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죽은 자들의 폭주 또한 그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인류는 스스로 감당 못 할 것을 만들어낸 것에 대한 인과응보를 언제나 겪게 된다. 예외는 없다.

산 자의 몸에서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영소. 우주를 향해 퍼져 나가는 영혼들. 그 전부를 남김없이 다시 모음으로써 모든 죽은 자는 되살아난다. 기억 속 존재가 아니라 실체를 가진 존재로서. 그런 일이 실현 가능하다는 사실에 의해서 인류에게 구원이 있다는 뜻이 된다. 인류에게는 구원이 있기에 그런 물리 과정은 '존재해야만 한다'. 그것이 효도로프가 내건 사상의 핵심이다. 이 세상의 모든 영혼, 예전에 태어났고 지금 태어나고 이윽고 태어날 모든 영혼, 우주 전체로 확대되는 인류의 영혼은 총체적으로 정신권을 구성하고 세계 그 자체의 구원을 가져온다.

반 헬싱 박사는 왓슨에게 국가를 위해서 봉사할 기회를 제의하고, 군의관이라는 위장 신분을 부여 받고 첩보원으로 파견된다. 봄베이의 성곽 지하, 아프가니스탄 오지 계곡, 일본 화학 공장.. 그들의 목표는 '죽은 자의 제국'이었다. 막대한 양의 죽은 자들을 빼돌려 '죽은 자의 제국'을 만들고자 하는 알렉세이 카라마조프라는 인물의 실체에 대해, 그리고 실제로 죽은 자들의 제국이 존재하는 지에 대해 말이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든 일종의 산업 비품인 죽은 자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자신만의 제국을 만든다? 프랑켄슈타인의 후예답게 당연한 결과라고? 이렇게 이 작품은 독특한 설정으로 시작하는 SF 모험극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철학적인 사유가 곳곳에 산재하고 있어 생각보다 쉽게 페이지가 넘어가진 않는다. '거짓된 영혼을 인스톨한 죽은 자는 부활의 때에 되살아나게 될까. 부활한다고 치면, 그 이전에 산 자였던 인물과 어떻게 견주어 봐야 할까.' 그리고 '인간 영혼의 감추어진 비밀이, 그 패턴이 완전히 해독되는 날이 온다면 우리는 역시 물질에 지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을까.' 등등... 인간을 인간다게 만들어주는 것이 과연 우리가 '영혼'이라 부르는 것뿐인지, 억지로 만들어 넣은 '영혼'을 통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그러나 실제로는 죽어 있는 자들은 과연 생명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인지.

이 작품은 요절한 SF작가 이토 게이카쿠가 남긴 미완의 원고를 엔조 도가 이어서 완성한 작품이다. 이토 게이카쿠가 쓴 부분은 고작 프롤로그 밖에 되지 않아, 나머지 전체 분량을 모두 엔조 도가 썼으나, 제일 중요한 플롯 구상은 이토 게이카쿠가 했다. 가끔 이렇게 미완의 원고를 다른 작가가 완성하는 경우가 있는데, 각각 작가의 특징을 파악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이어 썼든, 새로 썼든 독자 입장에서 읽을 때야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이 작품은 다 읽고 나서 프롤로그를 쓴 이토 게이카쿠가 끝까지 다 완성을 했더라면 어떤 그림일까 궁금했다. 그만큼 독특한 설정과 기발한 상상력이 넘쳐나는 작품이었기에 그렇기도 하고, 엔조 도가 풀어낸 스토리가 나에게 지나치게 철학적이어서 다소 어렵게 느껴졌던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들 두 작가는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금단의 세계를 완벽하게 구현해 내고 있다는 것이다. 양귀자의 소설 책 제목처럼 대부분의 인간들은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그러니 당신도 금지된 영역 속으로 한 발자국 내딛어 보길. 그곳을 나와서는 다시는 전과 같이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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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젤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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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센티미터짜리 악마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게 된다면, 나는 무슨 소원을 제일 먼저 들어달라고 해볼까. 악마니까 그 대가로 영혼을 팔라고 하지 않겠느냐고? 천만에, 우리의 주인공 아자젤은 영혼이 뭔지도 모른단다. 소원을 말하는 이에게 오히려 영혼이 뭐냐고 묻는 이 깜찍한 악마는 자기 세상에서는 너무나도 작은 존재라서, 우리 세상에 자신의 무게를 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성취감을 느끼기 때문에 누군가 돕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무슨 악마가 나쁜 일이 아니라 좋은 일은 하냐고 말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이작 아시모프의 이 기상천외한 단편집에서는 이 모든 게 너무도 그럴 듯해 실제로 이런 악마가 존재하는 게 아닐까 믿고 싶어질 정도이다.

그날 저녁, 저는 농구 경기를 보러 갔고 아자젤은 제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아자젤은 경기를 보려고 계속 주머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만약 누군가 그 모습을 보았다면 아주 이상한 광경이라 생각했을 겁니다. 아자젤의 피부는 밝은 빨간색이고, 이마에는 작은 뿔 두 개가 튀어나와 있으니까요. 완전히 주머니 밖으로 나오지 않은 게 다행이었습니다. 1센티미터 길이의 근육질인 꼬리가 아자젤의 몸에서 가장 눈에 띄면서도 가장 혐오스러운 부분이거든요.

이 작품의 화자인 아이작 아시모프는 가끔 아주 한정적인 능력을 가진 작은 악마를 불러낼 수 있다고 말하는 조지라는 친구가 하나 있다. 각각의 단편은 그가 조지를 만나 아자젤이 했던 선행, 그러니까 누군가의 작은 소원을 들어준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걸로 진행된다. 이상한 것은 분명 조지는 아자젤을 소환해 친구들을 도와 주려고 하는데, 항상 그 결과는 끔찍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대체 무슨 소원을 어떻게 들어줬길래 궁금해질 것이다. 이 작품은 악마가 들어준 18가지의 소원이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 집 모음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각각의 이야기가 어찌나 풍자와 독설,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는지 무릎을 탁 치며 감탄을 하게 만들고 만다.

2센티미터짜리 악마, 아자젤은 악마이지만 꽤나 상냥하다. 왜냐하면 원래 자신이 사는 곳에서 좀 무시를 당했기 때문에 자기 힘을 이용해 이곳에서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안달 중이기 때문이다. 아자젤은 자기 힘이 반드시 다른 이들을 위해 착한 일을 하는 데에만 쓰여야 한다고 말한다. 천사가 아니라 악마인데 착한 일을 한다니? 설정부터 기발하지 않은가. 조지는 자신의 친구들, 주변인들이 어떤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들을 돕기 위해 아자젤을 주로 불러낸다. 그런데 아자젤은 조지가 주문을 외워 불러낼 때마다, 매번 (거의 예외 없이) 짜증을 내며 삑삑거리는 작은 소리로 투덜대곤 한다. 거의 10만 자키니나 되는 돈을 건 운동 경기를 보고 있었는데 제가 불러내는 바람에 그 결과를 볼 수 없게 되어 살짝 골이 나 있거나, 샤워를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불려 나온 거라거나, 뭐 이유는 다양하지만 항상 기분이 무척 안 좋은 것처럼 나타나는 분홍빛으로 둘러싸여 있는 2센티미터짜리 악마라니. 나는 어쩐지 큭큭 웃음이 터질 것 같이 삑삑거리는 이 조그만 악마가 실제로 보고 싶어졌다.

"조지, 지금 하려는 이야기도 설마 자네가 그 친구를 돕겠다는 생각에 아자젤과 합심하여 엉뚱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 그 친구를 비참함과 절망의 수렁으로 밀어 넣는 내용인 건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저와 아자젤은 순수한 친절과 인류에 대한 깊은 사랑, 그리고 뷔페에 대한 다소 구체적인 사랑 때문에 그 친구가 마음속으로부터 원하는 걸 들어줬을 뿐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 이야기를 해드리지요."

그렇게 기분이 안 좋은 상태로 나타난 아자젤에게 조지는 매번 이건 꽤 긴급 상황이라고 설명을 한다. 그러면 아자젤은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방법으로 모종의 해결을 해주는데, 이상한 건 분명히 소원의 주인공이 원하는 대로 되었는데, 결국에는 그것이 비극으로 끝나고 만다는 것. 대체 어떻게 소원을 들어줬기에? 사실 악마니까 일부러 그렇게 만든 거 아니냐고 의심을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럴 수도 없는 것이, 이놈의 악마라는 놈이 악랄하기는커녕 어딘가 어수룩하고, 잘난 척 큰소리 처 놓고도 뭔가 실수를 하곤 하는 인간미(?)를 폴폴 풍기기 때문이다.

항상 아시모프에게 식사를 얻어먹으면서도 불평이고, 그를 작가로서 비난하고 깍아 내리는 것도 서슴지 않는 조지라는 캐릭터 또한 너무도 매력적이다. 친구의 소원을 대신 빌어주며 그 소원이 이루어질 경우 떨어질 콩고물을 항상 기대하는데 그의 기대는 한 번도 예상을 벗어나질 못한다. 특히나 그의 매력은 아시모프와의 식사 시간에 더욱 빛을 발하는데,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음식을 세 접시나 비우면서 요리가 아주 엉망이라고 불평하는 그에게 그러면 왜 그리 많이 먹는 거냐고 묻자, 조지는 도도하게 이렇게 말한다. " 그럼 절 대접하겠다고 한 사람의 음식을 거절해서 그 사람에게 모욕감을 안겨 주란 말입니까" 라고. 게다가 매번 아자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처음 말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시작을 하며, 아시모프가 이미 아자젤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는 척이라고 하면, 도대체 그런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는지 알 수 없다며 오히려 그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곤 한다. 그렇게 아시모프는 그에게 끊임없이 무시를 당하고, 가끔은 몇 달러 돈도 뜯기지만 그럼에도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그가 해주는 아자젤에 관한 이야기 때문이다. (아시모프는 머리말에서도 그렇게 밝힌 바 있다. '조지가 해준 이야기는 그 정도 가치가 있으며, 조지에게 준 돈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조지에게 돈을 준 건 이야기 속에서이니 더욱 문제가 안 된다'고 말이다.

아이작 아시모프야 워낙 SF, 과학 소설의 최고봉이지만, 이렇게 매력적인 판타지를 써낼 줄이야, 새삼 감탄스럽기 그지 없다. 이 책은 <파운데이션> 시리즈나 <로봇> 시리즈 같은 그의 대표적인 SF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색다른 디저트가 될 것 같고, 그의 작품을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는 아마도 그의 매력에 푹 빠지게 만드는 애피타이저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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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속의 사람들
마가렛 로렌스 지음, 차윤진 옮김 / 도서출판 삼화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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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떠오른 동요의 노랫말이 끔찍하다고 느끼며, 오래된 잠옷을 보며 투덜거리고, 거울을 보며 살을 좀 뺐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두 살배기 젠을 옆집에 맡기면서 고마운 줄도 모르고 또 투덜투덜, 시내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도시의 사람들 삶을 조롱하고, 버스에 앉아서는 아이들 걱정에, 다이어트 걱정이 이어지고, 버스에 앉아서는 교통체증과 차들의 소음에 인상을 쓴다. 그러다 차에서 내려 어린 남자 애가 다친 교통 사고 현장을 보고는 눈물을 줄줄 흘리던 서른 아홉의 네 아이 엄마 스테이시는 집에 돌아와 자신의 딸 케이시에게서 괜찮냐는 소리를 듣고서야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자신이 딸을 얼마나 망치고 있는가 하나 하나 점검해보며, 아들인 이안과 덩컨의 다툼을 말리려다 애들의 어깨를 잡아 바닥에 내동댕이 치고야 만다. 흠칫 놀라 멈추지만 '의도치 않게 간혹 어쩌다가 세게 때리는 게 좀 어때서? 그런다고 내가 괴물이야? 애 둘 덕분에 행복하기도 하지만 애들이 날 돌아버리게 만들기도 하잖아. 하나님, 방금 제 행동을 없었던 일로 되돌리는 방법은 없을까요?' 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다 자책하기에 이른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온 남편 맥과 투닥거리다가 잠이 든 그의 옆에서 '저 인간은 어쩜 저렇게 태연하게 코를 골며 자는지, 한 대 걷어차고 싶다'고 생각하는 그녀의 불만은 좀처럼 멈출 기색이 없다. 책이 시작하고 나서 40여페이지 동안 진행된 이야기라고는 투덜투덜 매사에 불평, 불만 가득한 스테이시의 속마음이 전부이다. 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저 스테이시는 정서 불안인 걸까?

통곡을 하고 싶은데 그렇게 하면 내가 정신 나간 여자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뭐지? 아슈르의 과부같이 울부짖고 싶은데 좀 그러면 안 되나? 내게는 그만한 이유가 있잖아. 이봐, 스테이시. 나이 값을 좀 하라고. 정확히 그러고 있잖아요, 하나님. , 사실 짐이 너무 무거워요. 바로 이 순간에도, 죽을 만큼 어깨가 무거워요. 제가 감당하기에 너무 너무 너무 버겁다고요. 가방에서 짐이 자꾸만 쏟아져 나와서, 플랫폼에 서 있다가 깜짝 놀라고는 당황해요.

마가렛 로렌스의 책을 처음 읽는 나로서는 읽는 내내 굉장히 당혹스럽고, 불편하기 그지 없었다. 인물들이 나오는 대화만큼이나 주인공 스테이시의 속마음, 즉 내면의 목소리가 같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도 우울하고, 부정적이고, 매사 불만투성이에 남을 헐뜯고 비방하고, 자신을 혐오하고 자책하는 것밖에 없어서 마음을 무겁게 했다. 평범한 30대 주부에게 마음의 평화라는 것은, 특별한 사건 사고 없이도 생각보다 가지기 어려운 거라는 걸 물론 나도 알고 있다. 엄마와 주부, 그리고 아내라는 역할을 제대로 해내기란 만만치가 않은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소설에서 이런 어렵고 힘든 상황을 지문이나 인물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걸로 묘사하는 반면에, 이 작품에서는 오로지 주인공의 속마음으로 토해내고 있어 감정적으로 공감하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출판사의 소개 글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지극히 인간적인 캐릭터'라고 느껴지기 보다는 '만족할 줄 모르고 세상에 불만 많은 냉소주의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나빠 보이는 사람도, 아무리 불행해 보이는 사람도 다 이유가 있게 마련이니까. 하면서 나는 책을 마저 읽어 나갔다.

책을 점점 읽어나가면서 불편했던 마음 대신에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아이들 넷을 키우는 일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지만, 끊임없이 일어나는 하찮은 일들로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는 스테이시가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오로지 남편의 아내, 그리고 아이들의 엄마일 뿐, 자기 자신으로서는 아무 곳도 갈 수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그녀가 안쓰럽고,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졌기 때문이다.

당신 죽여 버릴 수도 있어, . 지금 이 순간 칼로 심장을 찔러버릴 수도 있다고. 하지만 지난 밤 일도 있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지금 내 협상력은 가장 낮은 상태다. 나쁜 놈. 나쁜 놈. 내 아이에게서 손 떼. , 하나님, 저도 알아요, 네 저도 알아요. 맥은 하루 종일 토르의 비위를 맞춰주느라 바빴을 거예요. 그리고 저는 오늘도 어김없이 이안과 덩컨을 바닥에 내동댕이쳤고요. 그런 제가 무슨 할 말이 있겠어요? 하지만 어떻게 해요. 참을 수가 없는데.

맥과 스테이시는 아이의 양육 스타일이 전혀 다르다. 아이가 악몽을 꿔서 자다 깨어 울면 달려가서 안아주는 스테이시와 그럴 때마다 아이를 너무 오냐 오냐 키우는 건 애한테 좋지 않다고 화를 내는 맥. 사내 아이들은 강하게, 남자답게 커야 한다고 믿는 남편과 아이가 홀로 악몽 속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는 아내는 사사건건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덩컨이 못에 찔려 한쪽 손에 피범벅을 해서 우는데, 안쓰러워 토닥이는 스테이시 옆에서 당장 뚝 그치라며 소리지르는 맥을 보며 그를 죽여 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그녀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나도 같이 화가 나고 말았다. 눈물이 고인 눈을 뜨고 아빠의 눈치를 보는 어린 아들을 보며 두 주먹을 꽉 쥐는 스테이시의 마음이 너무도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앞으로 살면서 상처도 받을 것이고, 얻어 터지기도 할 것이고, 그게 다 인생이니 더 씩씩하게 아이가 자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맥의 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내가 스테이시의 상황이었어도 맥의 말에 반감이 생기고, 아이를 먼저 안아주고 토닥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발끈했던 스테이시의 내면의 목소리는 또 이렇게 자책한다. '누구 말이 맞는 것일까, 맥 아니면 나? 우리 둘 다 틀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덩컨이 무섭지 않게 안아주고 싶은 거다. 그게 뭐 잘못인가? 그런데 맥이 하는 말이 옳다면 어떻게 하지? 덩컨이 엄살을 좀 피우긴 했지, 그건 나도 인정해야 한다. 내가 아이를 망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라고. , 이 애처로운 여인을 어떻게 할 것인가.

스테이시는 맥이 그렇게 강한 척을 했지만,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는 훨씬 강한 사람이라는 걸 그녀는 안다. 사람은 누구나 그럴지도 모른다. 덩컨도, 그리고 그녀 자신도 말이다. 스테이시는 이런 저건 사건들을 겪으며 결국 사소한 일들이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런 사소한 일상들이 집중할 거리가 되어 주기도 하고, 그런 것들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니 말이다. 내일이면 마흔 살이니 미뤄뒀던 다이어트를 해야지, 지금은 아이들 걱정 말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지. 하는 그런 작은 다짐들이 내일을 살 수 있게, 미래를 견딜 수 있게 만들어주는 작은 힘이라는 것을 말이다. 아이들이 잠들고 나면 몰래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남편 몰래 바람을 피우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속으로 욕을 해대던 불량 주부 스테이시는 그렇게 또 하루를 살아낸다.

아내이자 어머니, 작가라는 1 3역의 한계를 체감하고 남편과 헤어졌다는 작가의 특이한 이력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이 작품은 그 동안 우리가 작품 속에서 만나왔던 여타의 주부 캐릭터와는 전혀 다른 인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엄마와 아내로서 살아가면서도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수많은 여성들에게 유쾌한 친구이자 따뜻한 위로가 되어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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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미국 진보 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조지 레이코프 지음, 유나영 옮김, 나익주 감수 / 와이즈베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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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1월에 있었던 조지 W. 부시의 국정연설도 보수주의적 프레임 구성의 주목할 만한 예입니다. 이 사례는 국정연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놀라운 은유였습니다. 부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미국을 방어하기 위해서 부모 동의서를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동의를 요청하지 않을 거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을 '부모 동의서'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이 대목은, 우리가 몇 살 때 마지막으로 부모 동의서를 받아와야 했는지 한번 떠올려볼 필요를 만들어준다. 부모 동의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동의서를 발행해 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둘 사이가 어떤 관계인지 말이다. 저자는 이것을 현대의 정치 담론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던져야 하는 질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치에 너무도 관심 없는 나 같은 독자가 읽기에도 매우 흥미진진한 책으로 쉽게 읽히는 것이 장점이지만, 다 읽고 나서는 새로운 프레임이 열린다고 할까. 굳이 10년 만에 개정판이 나온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10주년 기념 개정판인 이 책은 프레임을 사회적, 정치적 쟁점을 어떻게 짜고 어떻게 활성화하고, 어떻게 프레임에 넣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시민운동가들을 비롯하여 정치에 진지하게 관심을 갖는 모든 이들을 위한 실용적인 지침서라고 스스로를 일컫는 이 책은 프레임 구성에 처음 입문하는 사람들을 위한 간결하고도 쉬운 가이드북이기도 하다. 인지언어학을 창시한 세계적인 석학 조지 레이코프가 언어학을 현실 정치에 적용한 이 책은 정치인이 만들어 내는 프레임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매우 유용한 가이드를 해준다.

 

, 그럼 직접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프레임'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것은 인지과학자들이 '인지적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의 일부라고 한다. 인지적 무의식이란 우리 뇌 안에 있는 구조물로서, 의식적으로 접근할 수는 없지만 그 결과물을 통해 존재를 알 수 있는 걸 말한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어떤 단어를 들으면 우리 머릿 속에 그와 관련된 프레임이 활성화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제목인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고 누군가 말하면, 그걸 들은 사람들은 그로 인해 오히려 <코끼리를 생각하게 된다>는 뜻이다. 어떤 프레임을 부정하면 그 프레임이 더욱 활성화되고, 그렇게 활성화될수록 그 프레임은 더 강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프레임이란 정치판에서 가지는 역할은 매우 크다. 정치 담론에서 상대편의 언어를 써서 그의 의견을 반박하게 되면,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머릿속에서 상대편의 프레임이 더 활성화되고 강해진다고 하니 말이다. 그에 따라 저자는 진보는 보수의 언어가 아닌 진보의 언어를 써서 진보의 신념을 말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 보수가 사용하는 기본적인 프레임을 파악하고, 이것을 바꿀 다른 프레임을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자기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정부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이 경우에는 이렇게 프레임을 재구성하라. “정부는 납세자의 돈을 가지고 매우 현명하게 투자해왔다. 장거리 고속도로가 그 한 예다. 당신은 세금 환급 금을 가지고 고속도로를 건설할 수 없다. 그것은 정부가 건설한 것이다. 그리고 납세자가 투자한 돈으로 구축한 인터넷도 있다.”

"국가는 사람"이라는 은유가 등장하는 장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라크라는 국가를 사담 후세인이라는 한 사람으로 개념화하며 하루에도 수백 번씩 사용된다는 것을 말하며, 이 폭탄들이 은유가 은폐하는 수천 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게 될 거라는 사실 말이다. 미국인들 대부분은 이라크 전쟁이 이라크 민중을 구출하고 주변 나라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였으나, 과연 현실이 그런가 말이다. 실제로 전쟁은 이라크 민중의 안전과 복지를 위협하지 않나. 그리고 보수주의자들에게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장도 매우 흥미로웠다. 매일같이 보는 뉴스에서 보수와 진보의 다툼을 보아서인지, "상대편의 시각에서 프레임이 구성된 질문에는 절대로 대답하지 마라."는 말이 매우 그럴듯하게 생각되어서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총 16장으로 구성된 개정판에서는 절반이 새로운 자료와 분석으로 업데이트됨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고 하니, 기존에 이 책을 읽었던 이들도 다시 한번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 사회 변화를 이루기 위한 프레임의 재구성, 그러기 위해서는 공적 담론이 변화해야 하며 일정한 커뮤니케이션 체계가 필요하다는 저자의 의견은 매우 설득적이고, 이해하기 쉽게 쓰여 있다. 인지언어학이 뭔지, 프레임이 뭘 뜻하는지 전혀 몰라도 상관없을 만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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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다 - 김영하에게 듣는 삶, 문학, 글쓰기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마흔이 넘어서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친구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잘못 생각했던 거죠. 친구를 덜 만났으면 내 인생이 더 풍요로웠을 것 같아요. 쓸데없는 술자리에 시간을 너무 많이 낭비했어요. 맞출 수 없는 변덕스럽고 복잡한 여러 친구들의 성향과 각기 다른 성격, 이런 걸 맞춰주느라 시간을 너무 허비했어요.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이나 읽을걸. 잠을 자거나 음악이나 들을걸. 그냥 거리를 걷던가. 20, 젊을 때에는 그 친구들과 영원히 같이 갈 것 같고 앞으로도 함께 해나갈 일이 많이 있을 것 같아서 내가 손해 보는 게 있어도 맞춰주고 그러잖아요. 근데 아니더라고요.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은 많은 친구들과 멀어지게 되더군요.

그보다는 자기 자신의 취향에 귀 기울이고 영혼을 좀더 풍요롭게 만드는 게 더 중요한 거예요.

 

얼마 전에 힐링 캠프에 김영하 작가가 나와 강연한 것이 한참 화제가 됐었다. 거침없이, 정곡을 찌르는, 그리고 너무 솔직한 그의 입담에 당황하면서도 홀린 듯이 강연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 군부대에 강연을 갔을 때 제대를 앞둔 병장이 자기는 집안 형편도 어렵고, 스펙도, 학벌도 시원찮은데, 어떻게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요. 라는 질문을 했다고 한다.

그에 대한 김영하 작가의 대답은 ", 잘 안 될 거예요."

힘들고 어렵지만, 그래도 할 수 있다고 없는 희망을 억지로 주지 않고, 나는 작가라 여러분에게 성공하는 법 같은 것은 가르쳐줄 수 없다고 말하는 명쾌함. 작가는 실패 전문가이고, 소설이라는 게 원래 실패에 대한 것이라고. 하하. 이 한 대목만으로 김영하 작가를 몰랐던 많은 이들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탓에, 두고두고 그 강연을 말하는 이들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김영하 작가는 소위 '말 잘하는 작가'중에서도 선두주자라서 그가 했던 숱한 강연 들을 이렇게 책으로 만나게 되어 매우 기대가 많았다. <보다> <말하다> <읽다> 삼부작으로 예정된 김영하 산문 집 중 두 번째인 <말하다>는 등단 이후부터 지금까지 해온 인터뷰와 대담, 강연을 글로 옮긴 것이다. 일반적인 대담 집 형식에서 벗어나 작가가 직접 인터뷰와 강연을 해체하고 주제별로 갈무리하여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이야기로 탈바꿈시킨 것이 이 책을 더 재미있게 만들어주고 있다.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의 기분을 기억하십니까? 저에게 그것은 어떤 금지된 세계에 들어갔을 때와 비슷했습니다. 책을 읽지 않는 동안에 우리는 일상적인 시공간, 익숙한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밥을 해주고 아버지가 날마다 출퇴근을 하는 세계.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고 유용한 것을 배우는 세계. 그런데 집 책꽂이에는 어른들이 읽는 소설이라는 것들이 무심하게 꽂혀 있습니다. 이걸 뽑아 읽기 시작한 어린이는 즉각적으로 충격을 받게 됩니다.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의 기분에 대해 말하는 작가의 의견에 백 프로 동의한다. 책장을 펼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모험의 세계, 하늘을 날거나 고아가 되거나 마법을 사용하거나 무인도에 상륙하거나. 그렇게 놀라운 세계에 머물다가 아버지가 퇴근해 집에 들어오거나, 어머니가 숙제 다 했느냐고 물으면 시침을 뚝 뗀 채, 다시 현실로 돌아오곤 했던 그 기억. 나는 딸 부잣집에서 태어나 네 자매 중에 셋째로 자랐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북적북적 시끄러운 집안이었다. 덕분에 책을 은신처 삼아 도피하는 법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고 할까. 가끔 부모님이 다투시거나, 언니들이 잔소리를 하거나, 동생이 말썽을 부릴 때, 나는 책을 방패 삼아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잘 골라 펼쳐 든 책 한 권은 방패이자 방화벽이며, 투명인간의 망토'라고 했던 에리카 종의 표현처럼 나는 그렇게 책을 읽고 있는 동안 보호받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었다. 그래서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소설의 세계에 푹 빠져버렸던 것 같다. 물론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김영하 작가는 이 산문 집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해, 소설가라는 직업에 대해,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문학은 성공하는 방법을 가르쳐줄 수는 없지만 실패가 그렇게 끔찍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가르쳐준다는 것. 실패가 때로는 존엄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니 인생의 보험이라 생각하고 소설을 읽으라고 말한다.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다들 앞날이 불안하고 자신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으니, 더더욱 소설을 왜 읽어야 하는지를 말이다. 자기계발서니, 인문서는 읽으면서 소설은 '소설 나부랭이'라 치부하고 읽지 않는 이들에게 나는 김영하 작가의 강연을 들어보게 하고 싶었다. '소설'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너무도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어서, '소설 나부랭이'로 치부하던 이들도 아무 말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소설만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이렇게나 장황하고, 합리적이고, 감동적으로 이야기하는 작가를 나는 본 적이 없다.

저는 언제나 책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제 소설들은 이미 쓰인 다른 작품들에 대한 제 나름의 답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책만이 한 사람을 작가로 만든다고 말하는 그의 말이 어쩐지 가슴 뭉클하게 오래 남는다. 경험도 아니고, 주변 사람도 아니고, 온전하게 책만이 작가를 만든다고. 당연한 하게도 모든 작가는 독자에서 시작하니 말이다. 이 책을 읽고 나자 아무 책이라도 더, , 계속 읽고 싶어졌다. 한 권의 책이 다른 한 권의 책을 부른다. 어떤 책들은 질문을 던지고, 또 어떤 책들은 수많은 다른 책들을 끌어 당긴다. 그렇게 책은 또 다른 책으로 연결되고, 그렇게 쌓인 책들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누군가를 작가로 만들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그게 나의 모습일 수도, 이 글을 읽는 당신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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