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의 묘
전민식 지음 / 예담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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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 중범과 해명, 도범이 도굴을 하는 중이다. 하지만 중범은 구덩이가 깊어질수록 그곳이 대충 보기엔 명당 혈처럼 보이지만 주검이 영원히 썩지 않을 악지라는 걸 알아차린다. 그만 접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산길 초입에서 두런거리는 소리와 불빛이 보인다. 이들의 행각이 누군가에게 발각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묘 바닥에 있던 도학은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그들에게 붙잡히고, 중범과 해명만 겨우 몸을 피한다. 중범은 유명한 지관이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황창호의 아들이고, 도학은 그의 양아들이다. 중범에게 아버지는 정 붙이지 못할 정도로 싸늘한 인간으로 기억된다. 동생인 효범이 죽게 내버려두었고, 그 이후로 산에 대한 넘치는 양의 지식을 강제적으로 쏟아 부었던 황창오. 중범은 아버지를 증오했지만 당시에는 너무도 어렸기에, 그가 가르쳐주는 걸 익혀야만 했고 그가 걸었던 길을 가야만 했다.

명당이라는 말만 들으면 사람들은 미쳤다. 하기야 썩어 문드러진 시신 한 구 잘 묻어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데 마다할 사람은 없었다. 흙이 되고 말 유골 하나로 왕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는 미신으로만 치부하기에 너무 매혹적인 이야기였다. 그래서 달에 마실 드나들 듯 하는 지금도 사람들은 명당을 찾았다.

중범과 해명은 붙잡힌 도학을 걱정하며, 아내 혼자 효범의 제사를 지내게 내버려 둔 걸 생각하며 심란해하고, 얼마 전에 태어난 아이를 건사할 일을 생각하며 부담을 느낀다. 그러던 중 뉴스를 통해 지난밤 자정 무렵 대통령께서 측근에 의해 저격 당해 서거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대통령이 총에 맞아 죽고,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소식 때문인지 그는 불길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한다.

중앙 통에 탱크도 세워져 있고, 군인들도 쫙 깔려 있어 시내가 살벌한데, 도학의 소식은 여전히 알 길이 없다. 그러던 와중에 암장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고, 불길함이 그의 발목을 잡았지만 어쩔 수 없이 일을 수락한다. 자신의 의지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커다란 사건이 일어날 때 지관들은 특히 몸을 낮춰야 한다는 황창오의 가르침이 떠올랐지만, 그것보다 아내인 미란과 아이의 얼굴이 눈에 밟혔던 것이다. 하지만 중범 일행은 암장을 하다 군인들에게 발각되고 붙잡힌다. 중범과 도학, 두 형제는 힘을 가진 자들의 권력 다툼에 휘말려 덧없이 피를 흘린다. '왕의 죽음은 다수에겐 혼란의 무대가 되겠지만 소수에게는 기회가 되는' 그런 시대였던 것이다. 그 와중에 누군가는 반드시 피를 흘려야 했고, 신과 같은 군인들에 비해 풍수사들의 목숨은 하찮은 것이었으니 말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나라가 변할 때마다 지관은 그 중심에서 살든가 죽든가 그랬다.

누군가는 피를 흘려야 이 시절을 넘어갈 수 있으니까. 그게 나일 필요는 없잖아. 군인들이 요구하는 것도 나 같은 장물아비가 아니라 지관이거든. 지관은 언제나 그랬어. 정권이 바뀔 때마다, 나라가 변할 때마다 중심에서 살든가 죽든가 그래 왔지.

산의 능선과 능선이 만나 만들어지는 혈, 그 혈이 맺힌 땅의 흙 냄새와 맛, 그 주변을 맴도는 공기, 땅에서 올라오는 기운, 벌레와 짐승, 주변의 나무와 잡초 등등을 따지고 분석해야 하는 지관의 눈과 자신이 쌓아 올린 것들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할 수 있는 탐욕스런 군인들의 마음이 극명하게 대비되어 당시의 정세를 묘사해준다. 홀연히 모습을 감춘 중범의 아버지 황창오가 전직 대통령 가문의 묘 자리를 점지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의 친아들 중범과 양아들 도학 역시 붙잡힌 군인들에게 각각 휘둘리며 그들의 운명은 소용돌이 치듯 엉망이 되어 버린다.

전민식 작가의 전작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 <13>을 모두 흥미롭게 읽었던 터라 이번 작품도 기대를 했었다. 두 작품 모두 독특한 소재가 인상적이었는데, 잘나가던 컨설턴트가 한 순간의 실수로 추락해서 고급 애완견라마를 산책시키는 일을 하게 되면서 다시 비상을 꿈꾸는 이야기와 금융회사와 정부의 보안 불감증이 우리의 불안을 키우는 지금에 경종을 울리는 개인정보 유출문제, 민간인 불법 사찰에 대한 문제를 다룬 이야기였다. 전민식 작가의 작품은 무엇보다 가독성이 너무 좋았던 기억이 있다. 장면 장면마다 속도 감 있게 페이지가 넘어갈 수밖에 없는 재미가 있었다. 이번 작품 <9일의 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죽음 직후 9일동안의 장례 기간 동안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암투 와중에 군인이나 정치인이 아니라 풍수사라는 직업의 주인공을 내세워 더욱 호기심을 자아내는 작품이었다. 대통령의 암살 이후 권력을 잡으려던 인물들의 다툼과 그런 역사의 한 틈에서 평범하게 살았던 두 남자의 이야기 역시 페이지가 순식간에 넘어간다. 아마도 그가 현실을 반영하는 충분히 있을 법한 이슈를 그리면서도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읽지 않은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어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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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친구들 1
줄리언 반스 지음, 한유주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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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12, 홈스는 모리아티의 팔에 안겨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홈스도 모리아티도 저자의 성급한 손끝 아래 끝없이 추락했다. 찰스 도일의 부고를 한 줄도 싣지 않았던 런던의 신문사들은 존재하지 않는 탐정의 죽음을 실망스러워하는 항의기사를 잔뜩 실었다. 탐정의 인기는 저자 자신도 당황스럽고 역겨울 정도였다. 아서에겐 이 세계가 미쳐 돌아가는 듯 보였다. 아버지가 얼마 전 땅에 묻혔고, 아내는 죽어가고 있는데, 시티의 젊은이들은 셜록 홈스 씨의 죽음을 애도하며 모자에 상장을 달고 있었다.

그렇다. 이 작품은 셜록 홈즈라는 위대한 캐릭터를 탄생시킨 아서 코난 도일의 이야기이다. 당시에도 셜록의 인기가 얼마나 엄청났던지 작품 속에서 캐릭터가 죽은 것만으로도 신문사들이 항의기사를 쓸 정도였단다. 물론 셜록 홈즈는 여전히 지금에도 영화, 드라마 등으로 사랑 받고 있는 캐릭터이다. 그러니 그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던 코난 도일의 이야기라니, 그것도 줄리언 반스가 그려낸 작품 속에서, 기대가 되지 않을 수가 없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아서 코난 도일과 조지 에들지라는 두 인물의 이야기이다. 조지 역시 실존 인물로 인도계 혼혈 영국인 변호사이다.

작품은 전체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 시작들에서는 이들 두 인물의 어린 시절을 그리고 있다. 꼼짝 않고 앉아 있지 못하는 기운 넘치고 고집 센 아이였던 아서는 상상력이 풍부했고, 어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는 의사로 생계를 꾸려가면서 본격적으로 글도 쓰게 된다. 단편들이 장편소설로 성장했으며, 결국 셜록 홈즈라는 위대한 캐릭터를 통해 유명한 소설가가 된다. 목사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조지는 상상력이 부족했고, 어떻게 친구를 만드는지 몰랐던 어리숙한 아이였다. 인도계 혼혈이었던 탓에 어릴 때부터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고, 그들 가족은 지속적으로 협박 편지를 받으며 괴롭힘에 시달린다. 유명한 소설가와 이름없는 변호사, 게다가 성격도 너무 다른 이 두 사람이 과연 어떻게 만나고, 어떤 관계를 맺게 될지 점점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다른 젊은이들은 인생에서 일과 즐거움을 구분한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후자를 꿈꾸며 전자에 매달린다. 그러나 조지는 법에서 일과 즐거움을 동시에 찾을 수 있다. 그는 운동경기에 참여하거나, 보트를 타러 가거나, 극장에 가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럴 욕구도 없다. 그는 술이나 맛있는 음식, 경마에도 아무런 관심이 없다. 여행에도 별로 취미가 없다. 하지만 그는 철도법에서 자신만의 즐거움을 찾았다.

아서와 조지의 이야기가 번갈아 교차 진행되다가, 2부 결말을 동반한 시작에 이르러 어느 순간 조지의 이야기가 비중이 높아진다. 말과 소, 양 등 가축들이 훼손되는 사건이 주기적으로 발생하는데, 정말 희한하게도 그 사건의 범인으로 조지가 주목 받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만다. '기차 탑승객을 위한 철도법' 책을 발간하고 매우 소박하고 규칙적으로 살고 있는 사무변호사 조지. 근면, 정직, 검약, 자선, 그리고 가족에 대한 사랑만을 믿고 배워왔던 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자유인으로 태어난 영국인인 조지는 정상적인 삶을 이어가는 것이 당연한 권리이지만, 인도계 혼혈이라는 점은 그를 매 순간 발목 잡아 넘어뜨린다. 그가 이 사건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보자면, 사람들의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 흉기가 될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나 무섭기까지 하다. 조지가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아서와의 교집합은 전혀 없이 1, 2장이 모두 끝나 버렸다. 그가 교도관에게 너덜너덜한 염가판 '바스커빌의 개'를 읽고 훌륭하다고 생각했다는 것 정도의 그들의 교집합이 될까. 아뭏든 이들 두 사람이 만나려면 2권을 읽어보아야 할 것 같다. 2권에서 본격적으로 이들이 만나게 되는 사건을 그린 3장과 이후 그들의 말년을 그리고 있는 4장까지 다 읽어보아야 숨겨진 비밀을 풀 수 있을 것 같다. 1권은 전체 스케치를 위한 밑그림일 뿐이라 채색된 전부가 궁금한 나는 벌써부터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특히나 두 사람이 '그레이트 웨얼리 잔학행위'라는 사건을 계기로 영국 사법제도와 권력의 횡포에 맞서 뭉치게 되는 스토리가 너무 기대가 된다.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시리즈 첫 번째는 항상 두 번째 작품을 위한 미끼처럼 만들어서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투덜대곤 했었는데, 이 작품은 진짜 이야기는 2권에서 보여준다며 낚아도 어쩐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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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4-30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권을 알기 쉽게 소개하고, 감상을 잘 정리하셨군요. 홈즈 패러디라고 하지만, 단순한 추리소설은 아닌 것 같습니다. 2권을 받는 행운이 올 거라 믿습니다. ^^

피오나 2015-05-01 23:47   좋아요 0 | URL
ㅎㅎ 감사합니다. 처음에 생각했던 거랑 조금 다른 전개더라고요. 1권이 분량에 비해 두 인물이 전혀 만나지 않아 당황스럽기도 했고요. ㅋㅋㅋ
 
데빌스 스타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5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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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 경찰청 7층 강력반에는 두 명의 스타플레이어가 있다. 우선 톰 볼레르, 그는 다들 휴가를 떠나는 기간에 조차 늘 자리를 지키고, 경찰청 내의 모든 사정을 훤히 꿰고 있었으며 맡는 사건마다 거의 다 해결했다. 상관 입장에서도 듬직하고 탐낼 만한 부하 직원이었으며, 흠잡을 데 없는 전적을 가졌고,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게다가 반론의 여지가 없는 뛰어난 리더십까지 있었으니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아마 강력반 역사상 최연소 경정이 될 거라고 누구나 생각한다. 그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나머지 한 명은 해리 홀레, 그는 외톨이에 술고래이지만 톰 볼레르를 제외하고 강력반 최고의 형사이다.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에다, 툭하면 무단결근을 일삼는 그는 상사인 비아르네 묄레르가 병적일 정도로 자기 목을 걸지 않았더라면 진작 해고되었을 만한 문제아이기도 하다. 그가 그렇게 뛰어난 형사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그런 그의 능력을 알아봐주는 상사가 없었더라면 그는 그저 술집을 전전하며 망가져서 살았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생각이다.

 

  

 

"마침내 우리가 한 팀이 되어 기쁘기는 하지만 약간 슬프기도 해. 왠지 알아? 내가 슬픈 건 호적수를 잃었기 때문이야. 우린 비슷해. 무슨 뜻인지 알지?"

누구나 인정하는 완벽한 엘리트 형사와 모두들 혀를 내두르는 삐딱한 문제 형사가 한 팀이 되어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 요 네스뵈는 그러기 위해서 시리즈 처음으로 작품의 배경을 여름으로 설정했다. 범죄에 한해서는 비수기인 시기라 강력반 직원의 절반이 휴가 중인 7월이다. 대부분의 근무자 명단이 휴가 중, 휴가 중, 병가 중... 이라 어쩔 수 없이 남아 있는 인원들로 팀을 꾸릴 수밖에 없는 골치 아픈 휴가철. 오슬로에는 연쇄 살인이 의심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강력반에서 연쇄 살인을 수사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오로지 해리 홀레 뿐이다. 묄레르는 해리에게 도와달라 요청하고 그렇게 해리는 볼레르와 한 팀이 되어 수사를 하게 된다

해리 홀레 vs 톰 볼레르

이번 작품에서는 주인공인 해리 홀레 만큼이나 톰 볼레르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여느 작품에서 보아온 평범한 악당이 아니라 다소 복잡한 인물이다. 기존 시리즈인 레드 브레스트와 네메시스에서는 볼레르가 그저 우리의 주인공에 반대되는 악역처럼 보여졌다면, 데빌스 스타에서는 단순히 그를 악이라 치부하기에는 뭔가 아쉬울 정도로 그의 행동과 신념에 그럴듯한 이유가 있는 것이 보여진다. 덕분에 캐릭터는 더욱 풍부해졌고, 갈등은 구체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으며, 위기는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너와 내가 늘 경찰청에 일등으로 출근하는 거 알아, 해리? 이상하지? 제일 늦게 퇴근하는 것도 우리 둘인데 말이야."

해리와 볼레르는 주변 사람들의 평판도 극과 극이지만, 외모에서도 뚜렷하게 대비되는 인물이다. 볼레르는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좌우 균형이 잘 잡혀 있는 잘생긴 남자이다. 꼿꼿한 자세 덕분에 실제 키보다도 훨씬 커 보이고,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자신감과 지속적인 가라테와 근력운동으로 단련된 몸매 또한 그를 미남으로 보이게 만들고 있다. 그에 비해 해리는 190정도의 장신에 짧게 깍은 금발 머리, 나이 들어 보이는 동시에 또 어려 보이기도 하는 파란 눈, 날카로운 콧날. 부드러운 굴곡을 이루면서 남성적인 눈이나 코와 또렷한 대조를 이루는 입술에 결코 전형적인 미남이라고는 할 수 없는 얼굴이다. 특히나 충혈된 두 눈과 다크 서클, 핼쑥하게 푹 꺼진 뺨을 가지고 코는 빨갛고,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의 그는 얼핏 보면 노숙자나 마약 중독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나 다른 두 사람은 서로를 싫어하지만, 각자 속으로는 서로의 어떤 부분만은 인정한다. 해리는 볼레르가 일을 할 때 얼마나 효율적이고 자신감이 넘치는지 깨닫고,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일을 완벽히 해내는 맹수를 볼 때의 존경심 같은 기분을 느낀다. 볼레르는 해리가 목표 지향적이고 똑똑하고 창의적이며, 정신력도 강하고 도덕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며 형사로서의 그는 존중한다고 말한다. 게다가 재미있는 건 이런 다른 두 사람의 공통점도 있다는 것이다. 바로 두 사람 모두 경찰청에 항상 일등으로 출근하고, 제일 마지막에 퇴근한다는 것. 그들은 친구가 거의 없을 정도로 수사에만 헌신하며,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각자 자신이 믿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가끔은 그것이 집착처럼 느껴질 정도로 목표지향적이다.

그렇게 그들은 영웅과 악당, 선과 악이라고 명확하게 하나의 면만 가지고 있는 인물이 아니다. 번역자님이 '볼레르가 해리 내면의 그림자를 보여주는 거울이자 쌍둥이'라고 표현하신 것처럼, 이들 두 사람은 한 쪽이 있어 나머지 한 쪽이 더 강해지려고 하거나, 빛과 그림자처럼 서로의 존재가 필수불가결한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볼레르는 이 작품에서 해리 덕분에 처음으로 통제력을 상실하고 불안한 모습을 보여준다. 해리는 볼레르 덕분에 끔찍하게 싫어하는 인간에게서도 존경할만한 부분을 느끼게 된다. 해리의 평소 성격으로 미루어 짐작 컨대 이건 대단한 발전인 셈이다.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제안

해리는 음주 문제에 무단결근, 권력 남용, 상부 명령 불복종, 조직에 대한 불성실이라는 꼬리표가 달린 경력의 소유자이다. 겨울 내내 홀로 엘렌 살인사건을 재수사하면서 그는 점점 더 사건에 집착했고, 한 달 전에 갑자기 나타나 볼레르에 대한 허무맹랑한 비난을 늘어놓고는 사라져 폭음을 시작했다. 묄레르는 그의 무단 결근을 감추기 위해 그를 휴가 처리했지만, 휴가 기간도 끝났는데 해리는 여전히 나타날 기미를 안 보이고 있었다. 겨우 그와 전화 통화 후에 사건 현장에 투입시키지만 그는 취한 상태로 현장에 도착했고, 출근도 금요일마다 했으며, 상사의 지시를 어기고, 이후로 현장에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고 술이나 퍼 마시는 중이다. 묄레르는 더 이상 해리를 감싸주다가는 자신이 더 이상의 책임을 회피할 수 없겠다는 판단에 결국 해리의 해고 보고서를 작성한다. 3주 뒤에 총경님이 휴가에서 돌아와 서명만 하면 끝인 것이다. 게다가 그가 5개월동안 엘렌 사건에 매달려 고군분투하면서 결국 미치기 직전의 정신상태가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라켈과의 관계도 삐걱거리는 중이었다. 해리가 막판에 약속을 깬 것이 세 번째가 되자 라켈은 복수에 대한 욕망 때문에 다른 건 다 될 대로 되라는 거냐고 그를 비난한다. 하지만 해리에게 엘렌은 단순한 동료가 아니었으니 그는 그녀의 비난에 맞설 만한 명분이 없다.

  

 

 

"일자리를 하나 제안 받았어. 과연 거절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

그러던 와중에 함께 팀을 이루게 된 볼레르가 그에게 제안을 한다. 아마도 그것은 법에 어긋나는 일이며, 일단 그 일을 하게 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 한번 발을 담그면 다시는 그 잉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치명적인 제안인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볼레르와 해리가 나누는 대화가 꽤 여러 번 등장하는데, 볼레르의 생각은 꽤나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라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는 기존에 범인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두 번이나 총을 뽑았고, 두 상대 모두 목숨을 잃었다. 그가 자기 방어를 위해 총을 발사한 것으로 다들 알고 있지만, 해리는 알고 있다. 그가 '일부러' 총을 꺼내들었다는 것을 말이다. 볼레르는 해리에게 솔직하게 말한다. 그들에게 합당한 응징을 했을 뿐이라고. 그들과 자신이 한패라는 게 밝혀질까 두려워서 죽인 게 아니라고.

"해야 하는 게 아냐. 해야 하는 건 없어, 해리. 이건 무엇을 원하느냐의 문제야... 난 그저 더 많은 정의를 원할 뿐이야. 모든 사람을 위한 정의."

범인에게 정황 증거만 있거나, 범인이 정신병자 행세를 하거나, 그들이 빠져나갈 구석은 너무도 많고, 결국 그렇게 그들은 몇 년 후에는 석방되어 인간쓰레기들이 다시 사회로 돌아간다고. 아무도 더는 책임지고 불쾌한 일을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사회가 감히 실행하지 못하는 위생 작업을 하는 거라고 말이다. 법률 제도만으로는 안 되는 살인범들을 청소해서, 범죄자들로부터 오슬로를 지켜야 한다는 그의 말은 매우 그럴듯하다. 사실 법의 맹점은 누구나 알면서도 차마 손대지 못하는 금기의 영역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저 정의를 위해서였을 뿐이라는 그의 제안은 상당히 유혹적이다. 왜냐하면 해리에게는 현재 다른 대안이 전혀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나이는 마흔이 다 돼가는데 알코올 중독에 직업도, 가족도, 돈도 없는 처지가 되기 일보 직전이니 말이다. 볼레르와 함께 일할 바에야 그냥 자신을 자르라고 말했던 그였기에, "그 자식과 함께 일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 대신 다른 사람을 투입하세요."가 그의 성격이었기에, 해리가 그 제안에 어떻게 대처하는 지를 지켜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해리 홀레의 알몸과 마주하다

이 작품이 해리 홀레 시리즈에서 꽤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해리의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라는 점일 것이다. 데빌스 스타가 시작할 때의 해리는 점점 더 자기파괴적인 성향 속으로 파고 들어가 거의 무너지기 직전의 상태이다. 그는 꿈꾸기 싫어서 잠들지 않으려고 할 정도로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여자의 입이 뒤틀리고 벌어지며 무언의 비명을 지르는 것을 꼼짝할 수 없는 상태에서 지켜봐야 하는 악몽은 그를 계속 괴롭히던 꿈이기도 하다. 암묵적인 비난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어릴 때는 동생 쇠스였는데, 이제는 엘렌이고, 어느 날에는 엄마가, 혹은 라켈의 모습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악몽에 시달려 땀이 범벅이 된 채로 잠에서 깨는 해리의 모습은 이번 작품에서 여러 번 반복되어 보여진다. 그 악몽 속에서 우리는 해리가 왜 엘리베이터를 타기 싫어하는 지 알게 되고,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곤 하는 그의 모습을 통해서 그가 지닌 책임감의 무게와 죄책감의 부피를 느낄 수 있게 된다.

알코올 중독자에게 인생이란 취기와 그 사이사이의 맨 정신으로 이뤄져 있었다. 취했을 때와 맨 정신일 때, 둘 중에서 어느 쪽이 진짜 삶인가 하는 철학적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 답이 뭐든지 간에 어차피 그로 인해 삶이 더 나아지거나 더 나빠질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알코올 중독자의 기본적인 삶의 법칙(지독한 갈증)에 의하면 좋은 것을 포함한 모든 것은 조만간 사라진다.

그리고 또 이번 작품에서 해리는 여러 번 알몸으로 등장한다. 물론 이것이 영상화 되어진 창작물도 아닌데 알몸이 무슨 상관이냐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요 네스뵈가 굳이 여름을 배경으로 이 작품을 쓴 이유 중에 어쩌면 해리의 알몸을 보여주기 위한 것도 있을 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가 누구에게나 가장 개인적인 모습이니 말이다. 발가벗은 상태는 가장 정직한 모습이기도 하다. 뭔가를 감출 수도,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고 애쓸 수도, 자신의 모습을 꾸밀 수도 없는 상태이니 그야말로 한 사람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정..한 모습일 수밖에 없다. 해리는 카밀라 로엔의 침대 기둥 위의 펜타그램을 발견하고 집에 와서는 옷을 벗고 알몸으로 침대에 들어가거나, 나흘 째 금주를 하던 중 냉장고 앞에 서서 짐 빔을 바라볼 때, 혹은 모든 사건이 해결되고 나서 옷을 찢듯이 벗어 던지고 욕실로 가서 샤워를 하려고 할 때 독자들 앞에 알몸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누군가는 캐릭터의 매력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작품 속에 등장하는 해리의 알몸을 상상하며 므흣해할 수도 있겠지만 (당연히 그것도 나쁘지 않다;;) ,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자주 알몸으로 보여진 다는 것이 이 작품에서 그가 지금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바닥'까지 내려와있다는 걸 의미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 경찰이 아닌 해리 홀레의 모습이 상상이 되는가? 친구인 외위스테인처럼 택시 운전을 하는 모습은? 그 동안에 해왔던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완전히 다른 일을 하는 해리 홀레의 모습은 전혀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어쩌면 실제로 그런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만큼 해리는 절벽 끝까지 내몰려 있는 상태이다.

'누가' '어떻게'보다 더 중요한 ''의 영역

요 네스뵈의 작품에서 항상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동기'이다. 주도 면밀하게 계획한 살인사건에서 범인은 법의학적 증거들도 모두 없애고, 피살자의 사망 시간에 확실한 알리바이도 세우고, 살인 무기도 모두 버리지만 사실상 절대 없앨 수 없는 것 하나가 바로 동기이다.

  

 

"관객에게 한 인물을 소개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그 인물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가장 은밀한 소망과 꿈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거요. 한마디로 그의 동기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거지."

첫 번째 살인 사건, 카밀라 로엔의 눈꺼풀 안에는 별 모양의 작고 불그스름한 다이아몬드가 발견된다. 그리고 그녀의 침대 기둥 위에는 악마의 별이라 불리는 펜타그램이 그려져 있다. 두 번째 실종 사건, 리스베트 발리의 손가락에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있었다. 세 번째 다시 살인 사건, 바바라 스벤센의 한쪽 귀에 하트 모양 안에 오각형 별 모양의 붉은 다이아몬드가 있는 귀걸이가 있다. 그리고 그녀가 근무하던 법률사무소 건너편 텔레비전 가게의 먼지 쌓인 모니터 위에서 역시 펜타그램이 발견된다. 미모의 여자들이 죽어나가지만, 피해자들 간의 연관성은 전혀 발견되지 않고, 범인은 현장에 다이아몬드를 남겨 이 사건의 키가 '펜타그램'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사건에 동기가 있는지 없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동기가 있어야만 범인에게 다가갈 수 있다. 그러니 이들은 바로 동기에서 사건의 수사를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의 캐릭터를 창출할 때도 시작은 그 인물의 동기가 무엇인지 에서부터 이다. 그는 왜 그런 행동을 하고, 왜 그런 말을 했고, 그 모든 것에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니 말이다. 이 작품에서도 매순간 인물들은 동기를 찾는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왜 사람을 죽였는지, 왜 펜타그램 표식을 했는지 말이다. 작품이 시작할 무렵 해리가 근거 없이 볼레르에 대한 자신의 의심을 총경에게 이야기 했을 때, 총경은 볼레르가 엘렌을 죽인 동기가 무엇일지 생각해봤냐고 묻는다. 볼레르는 엘렌 사건의 진상에 대해 추궁하는 해리에게 자신 같은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 동기가 뭔지 궁금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피살자를 이어줄 만한 단서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 범인에게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동기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볼레르가 함께 일을 하려면 마음을 열어야 하지 않겠냐며 알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물어보라고 했을 때, 해리는 네가 어떤 행동을 하는 이유가 뭔지 알고 싶다고 묻는다. 어떤 일을 하게 만드는 것,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과 그 이유. 그러니까 어떤 행동에 대한 동기. 작품의 후반부에 해리가 또 사고를 치고 볼레르가 자신이 직접 수습하겠다고 말할 때, 총경은 미친 놈에게도 동기가 있다며 해리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된 동기에 대해 묻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리가 범인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 있었던 계기 또한 ''를 알아냈을 때 라고 말한다. 이 작품의 시작과 끝은 바로 ''의 영역이다.

다들 알다시피 데빌스 스타는 오슬로 3부작의 완결편이다. 세 작품 모두 배경이 오슬로에만 집중되어 있고, 레드브레스트에 서 시작된 엘렌 옐텐 사건이 네메시스를 거쳐, 이번 작품에 이르러 비로소 끝이 나기 때문이다. 무려 2년 동안 해리를 괴롭히던 프린스의 존재가 세상에 밝혀지는 순간과 펜타그램의 비밀과 연쇄 살인의 범인이 밝혀지는 순간의 희열이 비슷한 무게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이 작품에서 무엇을 기대하든 그 이상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해리 홀레 시리즈를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다고? 그렇다면 순서에 상관없이 이 작품부터 시작해도 된다. 과거에 이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왜 그것이 인물들을 괴롭히고 있는지 몰라도 작품을 즐기기에 충분하다. , 이 작품의 매력에 일단 빠지게 되면 출간된 시리즈들을 죄다 찾아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단점은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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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경의 아이 놀이 백과 : 0~2세 편 - 아동발달심리학자가 전하는 융복합 놀이 103 장유경의 아이 놀이 백과
장유경 지음 / 북폴리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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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하루하루가 전쟁이기도 하지만, 매 순간이 기적의 연속이기도 하다.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모습은 인체의 신비를 새삼 깨닫게 만들어주기도 하고, 아이가 커가는 모습들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까워 더 많이 기억하고 마음 속에 담아두려고 애쓰게 하기도 한다. 한쪽으로 뒤집기를 처음 하던 순간을 지켜보며 탄성을 내질렀던 순간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배밀이를 하고, 앉혀 주면 머리와 몸을 똑바로 하려 하면서 혼자 앉을 준비를 하고 있다. '엄마 해봐.'라며 엄마를 가르치던 게 언제였나 싶을 정도로 지금은 엄마 목소리도 잘 알아듣고, 엄마, 아빠뿐만 아니라 맘마, 빠빠 소리도 곧잘 하는 등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서 소리를 제대로 내기 시작하고 있다. 조리원에서 나와 집에 온 첫날, 이렇게 빽빽 울기만 하는 아기를 앞으로 어떻게 돌봐야 할지 막막했던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어느새 200일이 된 것이다. 어른 들은 그냥 놔둬도 아이들 스스로 잘 큰다고 하지만, 엄마 마음이 어디 그런가. 아무 것도 안 해도 지나가는 시간이라면, 가급적 많이 보고, 많이 느끼고, 많이 생각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요즈음은 아침에 눈떠서 젖을 물리고, 이유식까지 만들어 먹이고 나면 항상 드는 생각이 바로 이것 이다.

 

 

. 오늘은 또 뭘 하고 놀아줄까?

이제는 하루를 아이와 함께 보내는 것 중에 '놀이'에 가장 큰 비중을 두어야 하는 시기가 된 것이다. 책을 읽어주고, 노래를 불러주고, 아기 체육관에서 피아노를 치고, 장난감을 만지고, 점퍼루에서 폴짝폴짝 뛰어도 보고, 자동차도 탔다가, 범보 의자에 앉아 이리 저리 움직이기도 했다가.. 이렇게 많은 종류의 놀이를 해도 한 두 시간이면 끝난다. 유모차를 끌고 나가 공원 산책도 하고, 아이를 안고 집안 곳곳을 구경시켜주면서 물건을 설명해주고, 아이 몸 구석구석을 마사지해주고, 목욕놀이도 하고.. 하지만 그래도 에너지 넘치고, 호기심 가득한 아이의 욕구를 다 충족시켜주지는 못한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키우고 있는 친구들 얘기를 들어봐도 그렇다. 아침에 일어나면 다들 오늘은 뭐하고 놀아줘야 하는지 걱정부터 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이런 책이 필요하다.

누워만 있던 아기들에게 이제 큰 변화가 시작되었다. 몸을 뒤집고 기어 다니며 때로는 앉아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면서 외부 세계에 관심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딸랑이를 흔들어 소리를 내고 숟가락을 두들기며 즐거워한다. 이제 정확하게 손을 뻗어 물건을 잡을 수 있게 되어 혼자서 사과 조각을 집어먹을 수도 있게 되었다. 이제 아기는 자신의 움직임이 가져오는 결과들에 즐거워한다.

 

이 책에서는 5개월에서 8개월 시기를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모든 감각이 발달하는 시기'라고 정의해놓았다. 기존에 주로 반사운동에 의해 움직였다면, 이제는 자신의 의지로 몸을 조정할 수 있게 되는 시기인 것이다. 혼자서 뒤집고, 앉고, 붙잡고 서고, 기어 다니는 등 스스로 움직이게 된 아이의 모든 감각은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려 있다. 이런 시기에 그에 맞는 놀이를 통해서 소 근육을 발달시켜주고, 함께하는 사회성을 발달시킬 수 있는 것이다.

 

책만 보여주면 움켜 쥘려고 하는 통에 한동안 책을 가까이 두지 않고 있다. 책장을 넘기려고 하면 달려들어 잡고, 구기고, 찢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종이 찢기 놀이가 아기들에게 시청각적인 즐거움을 선사한다고 하니, 책 대신에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종이를 가지고 놀이를 할 수 있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투레질을 시작한지 꽤 되어서 이 놀이는 자주 해오고 있다. 아이의 배에다 입술을 대고 소리를 내면 깔깔깔 웃으면서 그렇게 재미있어 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쿵쿵 뛰는 것을 좋아하는지 겨드랑이를 잡고 세워놓기만 하면 장소불문하고 폴짝폴짝 뛰어대는 중이다. 너무 뛰는 것을 좋아하는 활발한 아이라 점퍼루를 사줬는데, 역시나 깡충깡충 뛰어대면서 재미있어 한다. 걷기를 위한 좋은 준비 운동이 된다고 하니, 더 자주 놀아줘야겠다.

스트레스 때문에, 혹은 어떻게 놀아야 할지 방법을 몰라서 아이와 적극적으로 놀아주지 못했던 부모들이라면 이 책에 있는 놀이들이 매우 도움이 될 것 같다. 단계별로 필요한 엄마 표 놀이 방법과 더불어 고민상담소라고 해서 각 시기별 질문들이 함께 실려 있는데, 이것 역시 초보 부모들에게는 유용한 팁이 된다. 갓난아기부터 24개월까지 아이들의 놀이는 두뇌 자극 경험이라고 한다. 놀이를 통해 스마트폰, TV, 태블릿 PC 등 아기가 스크린을 보는 시간을 최소화할 수도 있고, 부모와 친밀함 형성에도 좋을 것 같다. 특히나 퇴근 후에 잠깐, 주말에 잠깐 아이를 보게 되는 아빠들이 이 책에 실린 놀이를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도록 활용하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가끔 보면 아이를 가졌을 때, 처음 태어났을 때의 그 마음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꽤 있더라. 하루하루 아이 뒤치다 거리 하는 것도, 일상을 쫓기듯 살아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테니 말이다. 게다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았던 아이가 자라면서 점점 말썽부리고, 미운 짓말 골라서 하고, 부모 말도 잘 안 듣고 그럴 테니 소리지르고, 한숨내시고 하느라 매일같이 행복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록 수많은 최초의 순간, 아이가 나를 보며 빙긋이 웃어주던 순간, 내 품에서 천사처럼 잠에 빠졌을 때의 소중한 순간들을 잊어 버리지 말자.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를 달래느라 잠 못 이루던 밤들이 쌓이고, 부모가 된다는 일의 그 모든 고통과 기쁨 속에서 아이와 함께 하는 그 모든 시간, 그 모든 날들을 잊어 버리지 말자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더 많이 놀아주고, 더 많이 사랑해주고, 더 아낌없이 시간을 내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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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해도 될까요?
노하라 히로코 글.그림, 장은선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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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면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지금은 이혼해야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혼해서 행복해질 수 없었던 것처럼

이혼해서 행복해질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지난해 혼인율이 역대 최저치를 기록한 것으로 조사됐다는 기사를 보았다. 결혼을 포기한 젊은 층이 많아지면서 결혼을 안 하거나, 혹은 결혼비용에 대한 부담 때문에 못하거나, 어찌되었던 70년대 이후로 역대 최저 수치라고 한다. 결혼을 기피해 노총각, 노처녀가 넘쳐나는 '결혼 안 하는 대한민국'이 돼가고 있는 것이다. 반면 이혼율은 여전히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50대 이상의황혼 이혼이 눈에 띄게 증가했단다. 그 동안 참고 살았는데,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는 자의식이 발달한 탓도 있겠고, 그만큼 이혼을 선택하는 일이 예전보다는 '쉬워'진다는 뜻도 될 것이다. 특히나 불만과 갈등이 있었지만, 자녀 양육과 교육, 금전, 부모님 문제 등으로 참고 살다가 아이들이 자라 성인이 된 뒤에 갈라서는 황혼 이혼은 무려 30년 이상 함께 살았던 가족도 한 순간 남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니, 애초에 결혼부터 쉽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시사하기도 한다.

싫어하는 걸 좋아하게 되는 경우란 없을까? 있겠지...

하지만 좋아했던 것을 싫어하게 되면 두 번 다시 좋아지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작품 속 34살 시호는 6살과 8살짜리 두 아들을 둔 엄마이다. 그녀는 결혼 9년차에 심각하게 고민에 빠져 있다.

이런 상태로 앞으로도 이 사람과 함께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그만... 이혼해도 되지 않을까?

시호의 남편은 성실하게 일 다니고 바람도 안 피고 빚도 없고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는다. 이웃이 보기엔 좋은 남편으로 보이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는 그런 가정이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 속에 이혼 그 두 글자가 떠오르지 않는 날은 없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들도 점차 쌓이게 되면 그로 인해 엄청난 폭풍을 몰고 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전혀 가족을 배려하지 않는다. 물론 매일같이 회사에서 시달리고, 가정의 경제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부담도 있겠지만, 하지만 모든 남편들이 다 그런 건 아니다. 결혼한지 9년이나 되면 누구나 다 그렇게 되는 걸까.

시호의 남편은 일어나자마자 컴퓨터부터 켜고, 쓰레기는 꼭 쓰레기통 밖에 버리고, 세면대를 쓰면 항상 주변에 물이 튀어 있고, 양말은 항상 뭉쳐서 던져놓는다. 쓰레기는 제대로 통에 넣으라고, 양말 좀 제대로 벗어놓으라고 시호가 수백 번도 더 말했는데 왜 아무리 말해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말해봤자 소용없다고 포기도 해보지만 그녀는 결국 또 다시 말해본다. 하지만 잔소리하면 남편이 오히려 화를 더 낸다. "대체 몇 번을 말하는 거냐고. 주부니까 집에 있으면 그 정도는 니가 알아서 하라고. " 그녀는 다른 집의 경우를 들을 때마다 별것 아닌가 싶어진다. 하지만 '작은 기대가 차례차례 부서져서 따끔따끔 찌르듯이 쌓여만' 갔던 것이다.

 

시호도 결혼 전에는 말하고 싶은 건 다 말해 버리고 마음껏 싸울 수 있었다고, 그렇게 다투고 또 화해사면서 결혼하게 되면 서로를 더 이해하게 될 거라고 믿었단다. 하지만 결혼해서 9년 동안 살아본 결과, 상대를 더 이해하게 될 거라는 건 커다란 착각이었다고.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이 든 적이 있었다. 어릴 때 엄마랑 아빠가 가끔 다투실 때, 아빠가 뭐라고 하시면 엄마가 그냥 참는 것을 보며 왜 저러실까. 그냥 한마디 하시지 싶었는데 그게 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였다는 걸 이제는 알게 됐다. 아빠는 그렇게 소리쳐놓고 금방 잊어버리셨기 때문에 그 순간만 지나가면 다툼은 없었던 일처럼 되어 버린다. 하지만 그 순간에 엄마가 참지 못하고 같이 맞서 다투기라도 하셨다면, 아마 좀 더 큰 다툼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에 따라 자연스레 아이들도 눈치를 보게 됐을 테고 말이다. 그렇게 아내들은 아이를 위해서,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시호처럼 남편의 기분이 나빠지지 않게 참고, 숨을 죽이곤 한다. 그럼 겉에서 보기엔 행복한 가족이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자신의 행복을 저당 잡혀 수십 년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

기분이 좋을 때는 '착한 남편' '좋은 가장'

케이를,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남편의 기분이 나빠지지 않게 나는 숨을 죽인다.

그러면 이 집은 밖에서 보기엔 행복한 가족이 된다

 

다들 시작할 때는 이와 완전히 다를 것이다. 그 순간만큼은 서로 죽고 못살아서, 한시도 떨어져 있는 것이 못 견디겠어서, 매일 같이 있고 싶어서 결혼을 할 테니 말이다. 물론 모두 첫눈에 반하는 사람과 연애하고 결혼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적당한 나이에 조건 맞춰서, 나쁘지 않은 사람과 결혼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말이다. 나도 나이가 삼십 대 후반을 넘어서면서부터 그 동안과는 다르게 주위의 재촉에, 나이에 떠밀리듯이 결혼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결혼을 해야 하는 걸까. 결혼하지 않으면 어떨까. 지금 이 사람과 헤어지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었다. 머 결국은 사 년의 오랜 연애를 결혼과 연결시켰고, 정해진 수순처럼 아기가 태어나고, 엄마가 되었지만 말이다. 막상 결혼을 하고 보니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많은 것들이 생겨났고, 인생이 그저 짐작했던 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기도 했다. 결혼을 하지 않았을 때는 막연히 가족이라는 개념이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자연스럽게 구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수십 년을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타인과 하나의 가족을 이루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매 순간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가끔은 무조건 희생해야 하지만 대가를 바라지 않고, 같은 곳을 바라보기 위해 수많은 것들을 공유해야 하는, 사실은 엄청난 노력이 바탕이 되어 유지되는 공동체가 바로 가족이었던 것이다.

 

재미있게도 책 표지가 두 개로 되어 있다. 뒤집어서 씌우면 <이혼해도 될까요> <행복이 가득한 집>으로 바뀐다. '남편이 절대 손댈 수 없는' 핑크빛 페이크 표지란다. 제목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남편이 보지 않았으면 하는 경우, 숨겨 놓기에 딱 인 깜찍한 설정이다

 

결혼이 사랑의 문제가 아닌 책임의 영역이고, 그렇게 만들어진 아이 또한 절대적인 포기와 희생을 통해서만 견고한 믿음으로 자라나게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되면서 우리는 그렇게 어른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참아질 수 없는 부분이 어느 순간 생겨날 수도 있고, 그로 인해 내 선택이 처음부터 잘못된 건 아닐까 하는 후회를 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내 주변의 친구들, 선배, 언니들의 경우를 보면서 숱하게 들어왔던 그런 에피소드들이, 실제 결혼을 하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이제야 이해가 되는 것이다. 결혼 생활이 생각보다 더 많이 어려운 거라는 걸 이제 막 깨닫게 된 이들에게 이 책은 그 사소한 일상들을 너무도 콕, 잘 찝어 내고 있어 공감을 넘어선 위로를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결혼이라는 것이 단순히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서 한 집에서 사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너무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결혼은 하지 않는 것 보다는 하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하지만, 사실 결혼하지 않아도 다른 종류의 행복을 찾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이혼율이 높아졌어도, 극중 시호처럼 이혼이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혼이라는 중대한 문제만큼이나, 이혼이라는 것은 그 배로 더 어렵고 중요한 문제이다. 혹시 이혼을 생각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먼저 이 책을 읽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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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04-27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보고 싶네요, 피오나님.

피오나 2015-04-27 23:12   좋아요 0 | URL
결혼을 했거나, 아님 결혼 적령기이거나..모두에게 도움이 될만한 책이 될거예요. 꼭 내가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공감되고 그러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