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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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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프로그램인 12일에서 자주 등장하는 나만 아니면 돼!!' 그리고 무한도전에서 자주 등장하곤 하는 '무한이기주의'는 프로그램의 재미를 위해서 만들어진 멘트이긴 하지만 사실 실제 현실에서도 너무 자주 접하게 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다같이 행복하게 '함께' 살기보다는 '나와 내 가족만' 행복하면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너무도 익숙해진 세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길을 가다 사람이 쓰러져 있어도, 혹은 누군가 약자를 괴롭히고 있어도 관심을 기울이려고 하기 보다는 '굳이 내가 나 설 필요 있나. 누군가 나서겠지. 하면서 그냥 지나쳐버린다. 이렇게 '나 하나 쯤이야.'라는 이기적인 생각은 실제로 끔찍한 범죄를 예방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아 누군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생명의 위험을 느끼는 누군가를 도와주지 않고 방치해 안타까운 사고를 만들고 만다. 서로 간섭을 안 하는 게 예의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정의를 오지랖으로 바꾸어 버리고, 누군가 부당한 대우를 당해도 그저 남일이니 상관없다는 마음이 공감이 없는 삭막한 세상을 만들고 있다. 어떤 비극을 보더라도 그저 나에게 그런 일이 닥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 잘못된 것을 바꾸려는 노력이나 함께 아파하거나 분개하는 마음이 없는 세상은 온기라고는 없이 차갑기만 하다.

 

이렇게 예능 프로에 등장하는 '나만 아니면 돼'라는 말이 시대정신처럼 되어 버린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구병모 작가가 말을 건넨다.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이라고 생각하는 당신들의 모습이 사실 이렇다고. 내가 아닌 모든 일에 신경 끄고 서로를 외면하는 우리의 모습이 이렇게나 삶을 퍽퍽하게 만들고 있다고.

 

하이는 자기 앞에 놓인 사물이나 사람과 유지해야 할 최적의 거리를 가늠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증상은 불규칙하게 찾아와 하이가 손을 내밀어 무언가를 잡으려고 하면 어느 때는 맞았지만 대부분 틀렸으며, 조금 떨어져 있는 줄 알고 다가갔다가 아무 사람이나 전봇대하고 부딪쳐 여기저기 깨지기 일쑤였고 바로 눈앞에 있다고 생각되는 무언가를 향해 팔을 뻗어보아도 빈손을 바람으로만 채우기가 예사였으니 결국 누군가가 시야에 들어오면 지레 움츠리거나 물러나기에 이르렀는데, 이를테면 자동차 사이드 미러 하단에 적힌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라는, 거의 늘 그 상태였다.

 -'여기 말고 저기, 그래 어쩌면 거기' 중에서

 

구병모 작가의 단편은 장편만큼이나 임팩트가 강하다. 15층 엘리베이터에서 추락한 엄마의 영향인지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도 높은 데를 오르내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고야 말겠다며 건물 외벽을 맨손으로 등반하는 하이를 보는 친구들의 시선은 처음엔 호기심이었다가, 걱정이었다가 점점 무관심으로 바뀌어 간다. 하이는 본의 아니게 사람과 일정하게 거리를 두게 되면서 그들과 마음까지 거리를 둔 것 같다고 느긴다. 하이의 거리인식불능증은 사람한테 다가가야 할 때와 멀어져야 할 때를 계속 놓치고 실수하면서 자신의 몸 속에 그렇게나 많은 허허벌판이 있었다는 사실도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만든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적절한 마음의 간격을 유지하고, 적절한 타이밍으로 밀고 당기는 거라는 사실이 하이라는 독특한 인물의 장애로 인해 적나라하게 보여지는 듯한 기분이다.

사회의 틀에 맞추어 자신을 감추고, 억누르고, 타인과의 관계를 위해 조심조심 하다가 어느 날에는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질러보라. 그럼 '장난감 통에서 쏟아진 레고 블록 무더기처럼 눈앞에 의미 없이 흩어져 있던 세계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할 지도 모른다. 꿈틀하지 않으면 절대로 '여기 아닌 다른 데'로 갈 수 없는 게 인생이니 말이다. 감각 기관에는 이상이 없지만 뇌가 손상을 입어 대상물을 인식하지 못하는 병적인 증상이 인식불능증이라 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 관계인식불능증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타인과의 관계를 맺을 때, 혹은 유지하려고 할 때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 새삼 돌아보게 된다. 끊임없이 목숨을 걸고 고층건물에 도전하는 하이의 죽음 이후, 교수의 눈치를 보느라 숨막히게 일상을 보내는 나는 결국 가슴을 막고 있던 고무마개를 뽑아버린다.

 

이왕 당신들이 나더러 정신 나갔다며 가루가 되게 빻아대고 있으니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밝혀두자면, 내가 그 아이 소식을 듣고 나서 죄책감을 느낀 건 사실이다. 그게 이상한 일인가. 분명히 말하건대 내가 죄책감을 느낀 대상은 그녀가 아니라 그 아이다. 당신들은 옆집에서 오다가다 만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큰 사고를 당하건 목숨을 잃었을 것 같으면, 그 재난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음에도 마음 한구석에 구름이 끼지 않겠는가. 타인의 불행에 어떤 식으로든 공모자가 되었거나 최소한 엮여 있는 것만 같은 불편한 감정을 조금도 느끼지 않을 수 있는가.

                                                                                      -'이창' 중에서

 

이창의 주인공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당신들이 나를 희대의 오지라퍼라고 불러도 좋다'며 이는 우리말인 오지랖에다 그 일을 하는 사람 내지 직업을 뜻하는 영어의 어미 -er을 붙인 신조어라고. 도시화와 핵가족화가 진행되면서 출현은 이 낱말은 '만인이 만인이 일에 신경 끌 것'을 지향하는 세계관을 반영한다. '타인의 분노에 공감하고 그의 광기를 제어하려 해 보았자 개입한 사람만이 터진 새우등처럼 만신창이가 되며 보상은커녕 피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인 요즘, 누군가에 대한 동정은 시간과 비용 낭비에 불과하고 정의라곤 깨금발로 서 있을 자리조차 잃은 때' 나는 보기 드문 오지라퍼일지 모른다고. 하핫. 나는 이 작품의 서두부터 그냥 이 인물에게 호감을 느껴버리고 말았다.

 

어느 날 그녀는 맞은 편 동의 아파트에서 한 여자가 거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아이를 발로 걷어차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녀는 긴급 신고 번호를 눌러 어떤 여자가 자기 자식인 듯한 어린애한테 과도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으니 빨리 와달라며 바로 신고를 한다. 하지만 경찰의 단 몇 분간 조사에서 알아낼 수 있는 사실은 거의 없다. 이웃집 여자는 거실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그녀의 눈빛을 쏘아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이후 대형 마트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고, 여자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가보기도 하지만, 아동 학대에 대한 심증만 굳어질 뿐 물증이 시원찮다. 그녀의 남편과 딸 조차 괜히 우리와 상관없는 일에 끼어들지 말라며 면박을 주고, 그러다 결국 그 집 아이는 사망하고 만다. 그녀는 숙제가 많아서 싫다는 딸의 손목을 끌고 장례식장에 간다. 하지만 영정 속의 아이를 차마 바라보지도 못한 채 나온다. 진실을 아는 이는 이제 무덤에 있지만, 과연 그녀가 괜한 트집을 잡아 오해를 한 것일까.

그녀는 정의사회를 구현하고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지향하는 시민단체의 모임에서 활동하며, 유조선 침몰 등 각종 불상사가 생기면 어디든지 달려가 무보수 노동을 자처한다. 교회 봉사며, 빈곤층 자녀의 학습 도우미, 어린이 환자들을 위한 재단 봉사 등등 자신이 하는 모든 사소한 일들과 일상에서의 작은 실천들이 사회 정의를 이루는 근간이 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말이다. 누군가는 이를 오지랖이라고 하겠지만, 나는 이 사회의 희미하게 남아 있는 양심과 정의가 아닐까 생각한다. '선의와 관심이 돌팔매와 비난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더라도 나는 이 역할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그녀의 성격 탓도 있겠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가. 누군가 조금만 더 조치를 빨리 취했더라면,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남편을 만나보고 상의했더라면, 어쩌면 그 아이는 무사했을지도 모른다.

이 책에는 친구의 부고를 듣거나, 아동학대를 우연히 목격하거나, 홀로 육아를 하며 가난에 시달리고, 콜 센터 상담원이 전화를 받느라 감정적으로 피폐해지는 등 일상에서 숱하게 목격하고 겪을 수 있는 일도 있고, 모든 것을 녹아 내리게 만드는 산성비가 내리거나, 갑작스러운 해고 통보를 받고 점거 농성을 하던 남자가 덩굴식물로 변해버리는 전염병이 도는 것처럼 영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비현실적인 일들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모든 불행한 일들은, 그러니까 그 재난들은 모두 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우리가 지난해 겪었던 그 엄청난 재난들처럼. 일상이 곧 재난인 세상, 환상보다 참혹한 현실을 그려내고 있는 이 작품은 그래서 세상을 반영하는 리얼한 거울과도 같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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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19 15: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피오나 2015-05-19 17:26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현실보다 사실같고, 상상보다 검은 순간.. 의외로 자주 맞닥뜨리게 되는 것 같아요.누군가에게 나 이런 일이 있었어. 라고 말하면 참 비현실적인데 말입니다. 구병모 작가님의 책은 항상 현실을 반영하기에 더 많은 생각을 갖게 해주는 것 같아요. ㅎㅎ
 
벚꽃, 다시 벚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2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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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여사님의 팬으로 기존 에도시대물도 모두 가지고 있지만, 이건 에도를 배경으로 한 독립적인 작품이다. 게다가 판권이 공개 입찰되어 합법적으로 계약을 한건데, 왜 북스피어가 내야 하는 것을 비채가 뺏어서 출간한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가 잘 안된다. 그저 작품 자체로만 보는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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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브야 키친을 부탁해
주부의 벗사 지음, 황세정 옮김, 이이즈카 게이코 감수 / 니들북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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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요리할 때 허브를 자주 활용하는 편이다. 타임, 오레가노, 바질, 파슬리, 로즈마리, 월계수 잎 등등 이런 저런 요리에 아주 소량만 넣어도 맛의 풍미, 향이 전혀 달라진다. 한동안 프랑스 요리와 이탈리아 요리에 빠져 있어서 관련 레시피를 공부하고 요리를 했었는데, 허브는 알다시피 서양 요리에서는 우리 나라의 마늘, 생각만큼이나 빼놓을 수 없는 식재료다 보니 자주 사용하게 되었다.

나는 주로 마트에서 구입한 말린 허브를 주로 이용했는데, 어느 날 요리 프로그램을 보다가 파슬리를 직접 썰어서 바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이탈리안 파슬리라고 마트에서 우리가 쉽게 구할 수 있는 파슬리와는 조금 다른 것이었는데, 그거 하나로 요리가 완전히 달라지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아니 그런데, 저 이탈리안 파슬리라는 것을 어디서 구한단 말이야. 싶었다. 근데 요리 프로그램을 자주 보다 보니, 조그만 화분에 허브를 키워서 바로 잎을 따서 요리에 바로 사용하는 걸 종종 보게 되었다. 그때부터였다. 허브를 키워볼까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 말이다. 물론 화초 하나 제대로 키워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 조그만 화분 조차 부담스러워 마음만 먹고 아직 시도는 못했지만 말이다.

이 책에는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허브를 소개하고, 모종심기에 적합한 장소부터 재배 방법, 요리에 사용하는 방법까지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이어 실제 그 허브를 사용해서 만들 수 있는 요리의 레시피까지 서너 개씩 소개되어 있어 그 허브를 바로 요리에 활용해 볼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예를 들어 파슬리 같은 경우 요리에는 말리지 않은 싱싱한 줄기와 잎을 사용하고, 말린 잎은 주로 차로 사용한다는 것. 파슬리 차는 소화를 촉진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임신 중에는 사용을 자제하는 편이 좋다는 팁까지 소개되어 있다.

 

타임도 자주 사용했던 허브 중의 하나인데, 종류가 향이 나는 여러 가지가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무려 350종에 달할 만큼 잎과 꽃, 향기가 무척 다양하다고 한다. 강한 레몬 향이 풍기는 레몬타임, 분홍색 예쁜 꽃을 피우는 실버 타임, 그리고 허브라기 보다 일반 꽃처럼 보이는 크리핑 타임 등등이 있다고 한다. 레시피에도 소개되어 있지만 튀김 요리, 볶음 요리, 그리고 칵테일 주스까지 다양하게 사용이 가능하다.

 

예전에 프랑스 요리에 한참 빠져 있을 때 진행하던 정재형씨가 자주 사용하던 허브 다발 '부케가르니'가 한참 궁금했던 적이 있다. 블랑캣 드 포나 부야베스, 뵈프 부르기뇽, 코코뱅 등 다양한 요리에 사용되던 허브 다발인데 실제 방송에서는 잠깐 설명되고 지나가서 대체 저 다발에 들어가는 허브는 다 어디서 구하는 걸까 궁금했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말린 허브 가루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여러 종류의 허브를 섞어서 사용하면 한 가지를 사용했을 때보다 요리의 맛을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고 한다. 이 책에는 대표적으로 사용되는 허브의 세 가지 조합과 이를 활용한 레시피가 소개되어 있어 반가웠다.

우선 내가 궁금했던 '부케가르니'는 보통 월계수 잎, 타임, 파슬리, 셀러리 줄기 등을 조합하고, 취향에 따라 세이지나 로즈메리, 펜넬 등을 추가하기도 한다고 한다. 이렇게 허브 몇 가지를 실로 묶은 후 수프나 국물 요리 등을 할때 재료와 함께 넣고, 국물이나 재료에 향이 충분히 배면 건져내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몰랐던 허브 다발 두 가지, '핀제르브'라고 처빌, 차이브, 파슬리, 타라곤을 섞은 것으로 허브의 부드러운 잎과 줄기를 잘게 다져 소스나 드레싱 등에 섞어서 사용한고 한다. '에르브 드 프로방스'는 타임, 월계수, 로즈메리, 펜넬, 라벤더 등을 잘 말려서 잘게 부순 후 섞은 것으로 국물 요리에 사용하며, 고기나 생선의 비린내를 제거하고 풍미를 더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싱싱한 허브를 씻는 방법, 보관하는 방법, 말리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고, 허브 오일과 허브 식초를 만드는 방법도 있어 흥미로웠다. 이렇게 약 60여 가지의 다양한 허브를 공부하고, 이탈리안, 프렌치, 에스닉, 일식 등 여러 가지 레시피에 적용할 수 있는 것도 알게 되었느니, 남은 건 한가지 실제 허브를 심어서 재배해보는 것이다. 모종을 선택하는 방법, 심는 방법, 모아 심기 등등이 단계별로 쉽게 설명되어 있어 우선 제일 마음에 드는 이탈리안 파슬리부터 시작해보려고 한다. 마트에서 구입한 건조 허브가 아니라 싱싱한 허브를 직접 재배하고, 따서 요리에 사용해 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신이 난다. 이 책은 요리 레시피 북으로서도 손색이 없고, 그에 더해 다양한 허브의 종류와 활용 방법을 알 수 있어서 참 좋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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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에게 - 정호승 시선집
정호승 지음, 박항률 그림 / 비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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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을 때는 산을 바라보고 나이가 들면 사막을 바라보라

더 이상 슬픈 눈으로 과거를 바라보지 말고

과거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웃으면서 걸어가라

인생은 언제 어느 순간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오늘을 어머니를 땅에 묻은 날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첫아기에게 첫 젖을 물린 날이라고 생각하라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분노하지 말고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아침밥을 준비하라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로 너무도 유명하신 정호승 시인의 시집을 읽었다. 이 책에 실린 시들 거의 대부분이 절절한 사랑을 그리고 있는데, 이제 내가 나이를 조금 더 먹어서 인지 사랑보다는 인생을 말하는 시에 더 마음이 움직인다. <개에게 인생을 이야기하다>라는 시를 읽는데 뭐랄까, 괜시리 마음이 짠해진다고 할까. '과거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웃을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고난과 역경이 찾아오더라도 '첫아기에게 첫 젖을 물린 날'을 떠올린다면 견디지 못할 일이란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가 아니라 '나에게도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고 마음 먹는다면, 그 긍정으로 현명하게 현실을 직시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꽃의 향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듯

바람이 나와 함께 잠들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일에 감사하는 일일뿐

내가 누구의 손을 잡기 위해서는 내 손이 빈손이 되어야 한다.

'산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을 내려와야 하고 사막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먼저 깊은 우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래로 내려갈 수 있고, 시선을 낮출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상대보다 우위에만 있으려고 하거나, 어떤 일이 생겼을 때 그 속에서 허우적대기만 하면 빠져나올 수가 없는 법이니 말이다. 마음을 낮추고,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면 세상이 마음에 안 드는 것 투성이라는 생각은 안 들 것이다. 하지만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랴. 마음을 비우고, 겸손해지는 것은 나이를 한 살 더 먹어도 점점 더 어렵게만 느껴진다.

이 책은 정호승 시인이 지난 42년간 발표한 작품 중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 받은 시들을 모았다. 그의 대표작 101편에 명상성을 모티브로 박항률 화백의 그림 50점이 더해져 시를 읽는 기분만큼이나 보는 마음도 차분하게 만들어준다. 지난 2005년 출간된 시선집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의 개정판이지만, 그 후 출간된 그의 신작 시 32편이 새롭게 실려 있으므로 기존 시집을 읽었던 이들이라도 다시 읽어볼 만한 책이다.

내가 좀더 어릴 때, 그러니까 한참 사랑에 빠져 있을 때나 혹은 실연으로 우울할 때 정호승 시인의 시를 참 많이 읽었었다. 워낙 사랑에 관해서는 독보적인 시인이라, 평소에 시를 즐겨 읽는 사람이 아니라도 그럴 때는 일부러 찾아 보게 되곤 한다고 다들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재미있는 건 몇 년 전에 즐겨 읽었던 시도 있고, 이번에 처음 만나는 시도 있는데 사랑에 관한 격정적이고, 절절한 그 언어들이 지금에 와서 보니 당시의 그 감동보다는 한 걸음 떨어져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 내가 사랑에 눈이 멀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때, 마음이 이랬었구나. 싶을 만큼 이해가 가기도 하고, 과거의 나를 현재의 나가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고 할까.

마음에 집이 없으면

마당도 없고 꽃밭도 없지

꽃밭이 없으니 마음속에 그 언제 무슨 꽃이 피었겠니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마음에 집이 없으면> 이라는 시를 읽는데 그냥 뭉클한 마음이 들었다. 살면서 느끼는 것 중에 바로 '마음에 집을 짓는 것'이 너무도 어려운 일이라는 걸 이제는 너무 잘 알기 때문 일 것이다. 마음에 집이 있어야 사랑하는 사람의 부족함도 포옹해줄 수 있고, 마음에 집이 있어야 외로울 때 덜 추울 것이고, 마음에 집이 있어야 힘을 때 쉴 수 있는데, 그걸 알면서도 참 어려운 것이 바로 마음 속에 집을 짓는 일이다.

나도 이제는 혼자 밥 먹지 않아도 되고, 혼자 울지 않아도 되며, 이제는 사랑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호승 시인의 시들은 여전히 가슴을 울린다. 언어로 빚어내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이렇게도 아름답고, 먹먹하구나 새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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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행동 심리 백과 - 1~3세 말로 잘 표현하지 못하는 우리 아이 행동 이해하기
앤지 보스 지음, 신선해 옮김 / 지식너머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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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되고 나서 가장 큰 걱정은 바로 '아직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의 행동과 의사표현을 어떻게 알아듣지? '였다. 밤바다 울어대는데, 기저기도 갈아주고, 수유도 하고, 덥지 않게 온도, 습도 체크해주고 이것저것 확인할 건 다 했는데 대체 왜 이렇게 자지러지게 울까. 그럴 때마다 초보 엄마들은 공황 상태에 빠진다. 아이가 혹시 어디가 아픈 건지, 아님 자신이 아이가 표현하는 것을 캐치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엄마인 건 아닌지,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아이의 울음은 그칠 줄 모르고 그렇게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나면, 다시 시작되는 하루의 여정을 견디어 낼 생각에 한숨부터 나오고, 그렇게 최소 반년은 지나야 어느 정도 아이를 다룰 줄 알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정도 되어도 여전히 아이는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이므로 가끔 정말 아이가 원하는 것이 뭔지 궁금할 때가 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초보 엄마들을 위한 멋진 가이드 북이다. 미국의 유명 소아 작업 치료사이자 아이 행동 전문가인 앤지 보스가 아이들이 다양한 상황에서 나타낼 수 있는 행동과 그것에 숨은 의미들을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있다. 물론 아이마다 다른 기질을 타고 났고, 자라고 있는 환경도 다르므로 백 퍼센트 맞는 답변이 될 수는 없겠지만, 아이의 행동과 성장 발달에 필요한 팁들을 가지고 추측할 수만 있다고 해도 그게 어딘가. 한밤중에 이유 없이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 때문에 쩔쩔 맸던 기억이 있는 엄마들이라면, 무조건 이 책을 읽어보아야 한다.

세수할 때마다 괴로워 해요

씻을 때 얼굴에 가해지는 압박의 양이나 수건의 촉감에 따라 세수가 불쾌하거나 고통스러운 경험이 될 수가 있다고 한다. 이럴 때는 세수하기 전에 얼굴을 마사지해주고, 다양한 질감의 물건들을 놀이를 통해 만져 볼 수 있게 해주고, 직접 아이가 세수를 하게 하는 것도 좋다고 한다. 우리 아이는 세수를 싫어하는 것은 아닌데, 특이하게도 세수를 시키거나 얼굴에 로션을 발라주는 등 얼굴에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할 때 잠깐씩 숨이 막힌다는 제스춰를 취하곤 한다. 그러니까 마치 물 속에 들어갔을 때 잠깐 숨을 못 쉬는 것처럼 말이다. 괜찮아. 숨 쉬어도 돼. 라고 편하게 해주면서 세수를 시키곤 하는데, 이 글을 보고 나니 세수하는 것을 놀이처럼 해주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을 재우기가 힘들고 아침에 깨우기도 힘들어요

 

백일이 지날 때 즈음부터 밤에 자는 시간이 늦어지고, 잠이 들어도 여러 번 잠에서 깨어나 우는 통에 벌써 세달 가까이 밤에 제대로 자 본 적이 없다. 지금은 그래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초반에는 한번만이라도 밤에 잠 좀 푹 잘 수 있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싶을 만큼 힘이 들었다. 잠을 못 자게 하는 고문이 가장 힘든 거라더니, 졸려 죽겠는데 아이가 자꾸 깨니 안고 달래야 하고, 재워야 하고 보통 일이 아니었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가진 친구나 지인들을 보아도 '수면 교육'을 가장 어렵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잠을 잘 재울 수 있는 여러 가지 팁들을 한 번씩 실천해 봐야 할 것 같다. 무게담요나 묵직한 이불을 덮어주거나, 몸에 꼭 맞는 옷을 입히고,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 온몸을 마사지해주거나, 잔잔한 연주 곡이나 백색 소음을 들려 주는 등 다양한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얼마 전부터 수면 인형을 사서 멜로디 음악과 함께 재우는 걸 시도하는 중인데, 부디 성공하길 바라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더 많은 시도가 가능할 것 같아 든든하다.

 

그 외에도 자주 딸꾹질을 한다거나, 습관적으로 팔을 흔든다거나, 야외의 소음에 정신이 팔리거나 겁을 먹는다거나, 움직이는 것을 보면 어지러워하거나, 슈퍼마켓이나 마트에 가면 안절부절못한다거나.. 너무도 다양한 행동들에 대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다양한 상황에서 나타낼 수 잇는 205가지 감각 신호들에 숨어 있는 의미들을 읽어보고 있자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은 것부터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들까지 있어 매우 도움이 되었다. 특히나 아이 행동에 숨겨진 의미뿐만 아니라 그 속에 성장의 비밀까지 함께 있다고 하니, 앞으로 더욱 아이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고 거기에 반응을 해주도록 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엄마가 되고 난 후의 나 자신을 보면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스스로 해내고 있는 걸 깨닫고 놀라게 될 때가 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와 가족을 향해 무조건적으로 모든 것을 희생하고, 에너지를 소진시켜야 하지만 말이다. 가끔은 나란 존재가 없어져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늘 급하게 대충 식사를 해서 소화불량에 시달리고, 편하게 누워 잘 수 없어 항상 허리가 아프고, 수면부족으로 다크 서클이 떠날 때가 없고, 푸석푸석한 피부에, 지저분해진 헤어 스타일에, 늘어진 티셔츠 차림이 너무도 익숙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된다는 건 살아가면서 최고로 멋진 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 과정을 즐기고, 매 순간 소중히 여기면서 감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이 책을 통해 아이들의 알 수 없는 행동 뒤에 숨겨진 의미들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어쩌면 내일부터는 육아 전쟁이 조금 수월해 질지도 모르겠다는 다소 긍정적인(?) 생각도 들고 말이다. 어찌되었든 그렇게 나는 점점 더 엄마가 되어 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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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5-05-04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가 혹은 아빠가 된다는 건 분명 생애 최고 멋진 일 중 하나임에 틀림없죠^^
저는 그걸 예전엔 미처 몰랐는데, 뭐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죠^^

피오나 2015-05-04 12:05   좋아요 0 | URL
저도 예전에는 몰랐어요ㅎㅎ 경험해보니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겠더라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