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스토어 밀리언셀러 클럽 138
벤틀리 리틀 지음, 송경아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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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은 상점들이 사라지고, 점점 거대 체인점들로 도배되는 거리를 보면서 언젠가는 저러다 동네 전체가 거대 기업의 자본에 먹혀 좌지우지 되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적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지역 사회에 파고드는 무시무시한 자본의 힘은 실제 현실에서도 너무 자주 겪고 보아오던 거라 어느 정도 짐작이 될 것도 같지만, 이 작품에서 그려지는 풍경은 입이 떡 벌어지는, 그러니까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이럴 수도 있겠구나, 설마 이렇게까지? 말도 안돼.에 이르는 그것은 진짜 공포란 바로 현실에 바탕을 둔 리얼리즘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니 이 작품은 벤틀리 리틀이 브람스토커 상을 두 차례나 수상한 이유를 짐작하고도 남을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겨준다.

그 사슴은 불길한 징조였고, 앞으로 올 일의 전조였다. 그때도 그는 그것이 이상하다, 심지어 섬뜩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사슴의 죽음이 완전히 사악해 보였다. 마치 표지판을 세운 결과 그 사슴이 죽은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 땅이 밀리면서 다른 동물들도 이렇게 죽은 것이다.

그들은 건설의 대가로 죽은 것 같았다.

여느 때처럼 집에서 나와 아침 조깅을 하던 빌은 초원에서 새 표지판을 보게 된다.

2

더 스토어가 옵니다.

그는 초원 한가운데 들어서는 거대한 새 건물을 상상하는 것도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표지판 기둥 사이에서 죽은 사슴의 시체 때문에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집에 돌아온 그는 업무를 위해 컴퓨터를 켜고 뉴스 헤드라인들을 훑어보다, '한 달 동안 세 번째 더 스토어 대학살'이라는 기사를 보게 된다. 여러 지점의 더 스토어 판매원이 동료 직원들을 무차별로 쏘아 사람들을 죽이고, 부상시킨 사건이었다. 그는 자신이 보았던 죽은 사슴을 떠올리며 오싹한 한기를 느낀다. 하지만 그의 딸들을 포함해 대부분의 주니퍼 읍내 주민들은 더 스토어가 들어온다는 사실에 모두들 흥분해있다. 할인 체인이 아니라 마치 고급 백화점이라도 들어오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더 스토어는 예정대로 오픈을 하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쇼핑을 하면서 필요한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는 더 스토어가 천국 같다고 느낀다. 필요한 물건을 살 때마다 시내에 나가야 했던 그들에게 그곳은 온갖 최고 상점의 온갖 최고 물건들을 모두 가져다가 한 상점에 모아놓은 백화점과도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적이고 최신식인 소매점안, 최신 물건들이 가득한 곳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거나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가득한 그곳은, 외견만 봐서는 동물의 이유 없는 죽음이나 수수께끼 같은 사건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인다.

더 스토어의 모든 부서, 모든 복도, 모든 구석에는 비디오카메라가 숨겨져 있어. 카메라는 하루 24시간 켜진 채 우리 상점 경계 안의 모든 활동을 기록하지.

할인 마트에 CCTV가 설치된 것이 뭐가 이상하겠는가. 문제는 탈의실 안에서 옷을 갈아입는 사람의 모습과 특정 부위를 클로즈업까지 하면서 훔쳐 볼 수 있는 비디오카메라까지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우리는 빌의 딸인 서맨시가 대학 등록금을 위해 파트타임 업무를 지원하면서 말도 안 되는 면접 방식을 목격하게 된다. 거짓말 탐지기를 통과하기 위해 블라우스와 브래지어를 벗으라고 하질 않나, 테스트 과정에서 남자와 오럴 섹스를 해본 적이 있냐고 묻질 않나, 약물 시험을 위해 소변 샘플이 필요하니 당장 그 자리에서 치마를 벗고 유리병에 소변을 채우라고 하지를 않나.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면접이 있고, 그에 응하는 이 사람들은 뭔가 싶은 그런 상황을 말이다. 물론 면접 중에 아무도 그녀의 머리에 총을 대고 억지로 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심리적인 압력인지 감정적인 무능력인지 그녀는 수치스럽고, 무서웠지만 그 과정을 참아내고 더 스토어의 직원이 된다. 마지막으로 업무에 투입되기 전 과정은 비밀 유지 서약과 '집중 공격'을 견뎌내야 하는 것인데, 그 실체는 직접 작품 속에서 만나보라. 당황스럽고, 어이없지만 내가 그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하면 소름 끼치도록 무섭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든 충격적인 상황들은 모두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 이보다 더 무시무시한 상황들이 계속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더 스토어라는 거대한 체인 마트가 조그만 지역 사회를 말 그대로 '장악'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은 너무도 현실적이고, 그럴 법하기도 한 풍경이라 더욱 오싹하기만 하다. 그들이 지역 상권을 어떻게 붕괴시키는지, 그들이 고객을 어떻게 노예로 만들어가는지, 그리고 그들이 경쟁자들을 어떻게 제거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점점 피라미드처럼 쌓여가 말도 안 되는 공포가 완성되어 간다.

이곳에 이상한 것이라곤 없었다. 이건 정상적인 할인 소매점이었다. 몇 가지 불운이나 부정적인 사고가 우연히 겹쳐 일어났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어디서나, 내내 일어난다.

우리나라에서도 불리는 기업형 슈퍼마켓이 가속화되면서 골목상권과 재래시장들이 거의 다 전멸해가고 있는 것은 벌써 몇 년이나 된 뉴스 거리이다. 작가인 벤틀리 리틀은 실제 월마트 등 미국의 마트 체인들에서 모티브를 얻어 이 작품을 구상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단순히 공포 소설이라고만 치부하기에는 부족할 만큼 리얼해서 무섭고, 비현실적으로 보일 만큼 무시무시해서 섬뜩하다.

예전에 SSM 규제에 대해서 홈플러스 회장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질 좋은 상품을 값싸게 파는데 이 사람들은 질이 나쁠 수도 있는 것을 비싸게 판다"면서 대형마트 규제는 서민들이 싼 것을 사 먹지 못하게 하는 반 서민 정책이라고 말이다. 물론 누가 봐도 적반하장이나 다름 없는 어처구니 없는 발언이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나름 그들만의 논리가 있다는 것이고, 약자의 편이 아니라 강자의 편에서 보자면 사실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더라도 누군가에게 그럴 듯하게 포장하고, 납득시킬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영화 '카트'나 현대 차 노조 등 노동자들의 부당한 대우에 대해 분개하는 근로자들의 현실 따위 나는 관심 없다, 혹은 안 그래도 팍팍팍 노동계 현실을 굳이 소설 속에서까지 머리 아프게 만나야 하겠냐 싶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걱정은 전혀 마시길. 이 작품은 진지하고 현실적인 배경이라는 재료에 치명적인 스토리를 얹어, 공포로 양념을 치고, 디저트로 충격적인 반전까지 더해 놓은 제대로 물 만난 완벽한 엔터테인먼트 작품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저 이 무시 무시한 공포 소설을 오롯이 즐겨라. 그 뒤에 따라오는 여운과 현실에 대한 경각심은 그저 보너스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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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배운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6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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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의 세례식이 한창이다. 아기를 들고 있던 어린 소녀는 생각한다. '얘가 죽어버리면 좋겠어.' 세례식의 엄숙한 음성이 들렸지만, 소녀는 동생을 내려다 보며 '내가 팔을 벌려 이 돌 바닥에 떨어뜨리면 죽을까?' 고민한다. 머뭇거리다 그 짧은 순간은 그저 지나가버리지만 소녀의 내면에선 분노와 고통이 점점 더 사납게 솟구친다. 순수하기 때문에 더 섬뜩하게 느껴지는 이 소녀의 마음은 결국 어떻게 될까. 놀랍게도 애거사 크리스티는 질투와 미움을 격렬한 애정으로 갑작스럽게 바꿔 버린다. 부모의 관심이 한쪽 자식에게 편중되거나, 새로운 아이가 태어났을 때 종종 이런 일이 생기곤 한다. 아이는 동생에게 빼앗긴 자신의 사랑을 되찾아오고 싶어서 괜히 심술을 부리고, 부모에게 떼를 쓰고, 동생이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 미움이 충동적인 애정으로 바뀌어 버리고 나니, 당황스러우면서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 바로 사랑이니 말이다.

잘생기고 매력적이고, 명랑한 오빠 찰스는 부모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사랑 받는 아이였다.맏이에 이어 터울 없이 태어난 환영 받지 못하는 둘째인 로라는 언제나 말없이 뚱하고 따분한 소녀였다. 아빠와 엄마는 찰스만 애지중지했지만, 소아마비로 죽고 만다. 오빠가 죽고 없어지자 로라는 이제 부모의 사랑이 자신에게 집중될 거라고 기대해보지만, 그러기는커녕 동생이 태어난 것이다. 실망한 로라는 동생도 오빠처럼 빨리 죽기를 바라며 기도를 하고, 우연처럼 그날 집에 화재가 일어난다. 죄책감에 가까스로 동생을 구한 로라는 그 순간 자신의 인생을 바꿔버릴 만한 격렬한 감정을 깨닫고 만다. 동생에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사랑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 이후 로라의 삶은 오로지 동생 셜리를 위해서만 존재하게 된다. 하지만 뭐든 지나치면 모자라는 것만 못하듯이, 맹목적인 로라의 사랑은 동생 셜리의 삶도, 로라 자신의 삶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만일 네가 불행해진다면 어떻겠어 넌 견딜 수 있니?"

"그런 생각해본 적 없는데요."

", 왜 생각해보지 않았지? 자신에 대해서도 조금은 생각해야지. 여자에게 이기심이 없는 건 파이 만드는 솜씨가 없는 것만큼이나 재앙이야. 넌 인생에서 뭘 원하지? 스물여덟 살이니 결혼할 때도 됐잖니. 남자 만날 생각은 안 하는 거냐?"

특히나 인상적인 캐릭터는 바로 로라의 유일한 친구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인 존 교수였다. 그는 로라에게도, 셜리에게도 일종의 멘토 같은 역할을 해주는데, 항상 입바른 말이 아닌 진심이 담긴 직설적인 충고를 해준다. 물론 모든 바른 말들은 지나고 나서야 그 의미를 깨닫게 되지만 말이다. 셜리가 인생에 실패해서 불행해지기라도 하면 견딜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하는 로라에게 존은 그게 무슨 대수냐며, 많은 사람들이 불행을 견디는 용기와 마음으로 세상을 헤치고 살아간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왜 너 자신은 생각하지 않느냐고,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 로라를 안타까워 한다. 부모님이 비행기 추락 사고로 돌아가시고 나자, 열네 살이던 로라는 세 살이던 셜리를 보살 피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동생만을 바라보며 살았던 것이다.

"제가 셜리를 지나치게 사랑한다고 생각하세요? 지나친 소유욕이라고요?"

어쩌면 존을 비롯해서 당사자인 셜리 조차 로라의 사랑이 지나친 집착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사랑이 아니라 그저 소유욕일지도 모르겠다. 스물여덟이 되도록 남자를 만날 생각조차 하지 않고, 동생을 지켜주는 부모의 역할만 하며 노심초사하는 로라의 맹목적인 사랑은 셜리가 결혼할 남자를 데려오면서 그 정점을 찍는다. 셜리가 사랑한다는 헨리가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어딘가 불안했던 것이다. 그러니 조금 더 확신이 들 때까지 결혼을 미루고 좀 더 만나보길 바랬지만, 셜리는 단칼에 언니는 헨리를 질투하고 있지 않느냐고 말해버린다. 내가 언니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게 싫은 거 아니냐고.

"널 아주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 이러는 거야. 난 네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길 바라니까."

"그럼 날 아주 많이 사랑하지는 말아줘. 한없이 사랑만 받는 건 원하지 않아!"

결국 로라는 그들의 결혼을 허락하지만, 셜리는 결혼한 지 이 년 만에 헨리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한다. 한 직장에 진득하게 붙어 있지도 못하고, 돈도 물 쓰듯 쓰고, 뭐든 꾸준히 하는 법이 없고, 빚지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는 대책 없는 사람이라는 걸. 그녀는 쌓여가는 청구서와 분별없이 여자 문제를 일으키는 헨리 덕분에 결혼 생활 삼년  반 만에 지쳐버린다. 셜리는 자신이 처음 헨리에게 반했던 이유가 지금은 자신을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는 걸 깨닫는다. 첫 만남때 그의 무심함에 끌렸었는데, 지금 그들의 경제상황이 파탄이 나도 그는 여전히 무심하다.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로라와 끈질기게 이야기하던 그가 지금은 다른 여자를 필사적으로 쫓아다니고 있다. 그저 언제나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남을 배려하지 않고 사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이유가 상황에 따라 이렇게 다른 의미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 사랑을 지속시키는 열정이 언니 로라의 맹목적인 사랑처럼 누군가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사랑의 복잡하고도 어려운 점이 아닐까 싶다.

동생을 질투하고 미워하다 생사의 순간을 통해 강렬한 애착을 느끼게 되는 로라의 외로운 삶도,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남자가 겉보기와는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되는 셜리의 불행한 삶도 너무도 공감할 수밖에 없는 여자들의 이야기라 이 오래된 소설이 마치 현대물처럼 읽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애거사 크리스티가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쓴 작품이라 기존 그녀의 추리 소설 분위기와는 참 다르지만, 인간을 읽어내는 예리한 시선만은 변하지 않아 특유의 재미는 여전히 독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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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에 대한 고집
다니카와 슌타로 지음, 요시카와 나기 옮김, 신경림 감수 / 비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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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에 집에 갔더니

현관에 아버지가 죽어 있었다.

별일이 다 있네, 하고

아버지를 넘어 안으로 들어가봤더니

부엌에 어머니가 죽어 있었다.

이 시는 다니카와 슌타로의 <해질녘>이라는 시의 일부이다. 충격적인 도입부는 점입가경으로 치달아 '이런 식이면 형도 죽었을 거야. 아니나 다를까 욕실에 형이 죽어 있었다'로 이어진다. 집안 풍경은 이리 처참한테 평상시와 다름없는 해질녘이라고 마무리되는 이 시의 방점은 '내일이 아무 소용 없는 것 같은'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 가스레인지에 불이 켜져 있길래 불을 끄고 스튜의 맛을 보고, 국수 배달 오토바이의 브레이크 소리도 일상처럼 들리고, 이웃집 아이가 거짓으로 울고 있는 소리도 다 들리는. 그래서 너무도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는 화자는 그 충격을 내일이 소용없는 오늘이라고 말한다.

<탄생>이라는 시 역시 굉장히 노골적이고, 현실적인 어법으로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머리가 막 나오기 시작했을 때 아기가 묻는다.

"아버지, 생명보험은 얼마짜리 들었어?"

나는 황급히 대답한다 "사망 시 삼천만 엔인데"

그랬더니 아기가 말한다

"역시 태어나지 말아야겠다."

출산하는 과정은 보통 성스럽다거나, 아름답게 묘사되기 마련인데, 이 시에서는 아기가 부모와 일종의 거래를 하며 세상에 나올지 말지 결정을 하려고 한다. 아내는 네 방에 텔레비전도 있다고 구슬리고, 남편은 디즈니랜드에 데려가 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먹히지 않자 급기야 아내는 입덧은 이제 질색이라며 소리지르고, 남편은 안 나오면 엉덩이를 때려주겠다며 위협해서 겨우 아기가 세상 바깥으로 나오게 된다. 이 무슨 황당한 상황 전개냐 하겠지만,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한 현대에 부모, 자식 간의 도리라는 게 잊혀진 지 한참인 요즘에 너무도 그럴 듯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너무도 씁쓸하고, 처참한 광경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 책은 일본의 국민시인이라는 일본 현대시의 거목 다니카와 슌타로가 시력 63년을 맞아 출간한 기념 선집이다. 시인 신경림의 추천사처럼 "순진무구한 생각에서 나온 듯 느껴지는 시가 있는가 하면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는 깊은 시가 있고, 말의 재미에 흠뻑 빠진 시가 있으며 조금은 장난스러운 시도 있다. 또한 유연하고 독자에게 강요하는 것이 없으며, 잘난 체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장난도 너무나 진지하고, 친근한 어투에 술술 읽히는 내용은 매우 적나라하기도 하다. 일상에서 리듬을 만들어내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광활하고 깊다.

솔직히 말해서

책은 흰 종이로 있는 게 좋았다

더 솔직히 말하면

푸른 잎이 우거진 나무로 있고 싶었다

<>이라는 시에서 자신이 책이 된 것보다는 흰 종이, 그 이전에 나무로 있고 싶었던 책은 이미 벌어진 결과에 대해 원망하지 않고 책으로 된 자신을 읽어본다. 검은색 활자로 쓰여진 글자들을 읽으며 책은 '나쁘지 않다고 책은 생각'한다. 내 마음을 모두가 읽어준다는 것 때문에 책은 책으로 있다는 게 조금 기뻐진다.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일단 받아들이고 수긍하면, 주어진 상황을 조금 여유 있게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도 생기게 마련이다. 잔혹 동화처럼 무시무시한 시만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귀여운 시도 있으니 시인의 시 세계는 그야말로 너무 다양하고 폭이 넓었다.

'벌서 반세기 이상 명사 동사 조사 형용사 물음표 등 말들에 시달리면서 살았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는 그의 시는 기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종횡무진 글을 펼쳐낸다. 시인의 나이는 차치하고 시력으로만 따져도 환갑이 넘었는데, 나이가 무색하도록 신선하고, 기발한 모습으로 빛을 발한다. 무엇보다 언어에서 리듬이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만큼 감각적인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시가 존재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사람, 시를 단 한번도 읽지 않고 인생을 보내는 사람, 그런 사람도 많이 있겠지만, 그런 이들에게 조차 권하고 싶은 시집이다. '시를 읽는 즐거움의 하나는 삶을 일상과는 다른 관점으로 돌이켜보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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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_Hebuterne 2015-05-29 0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 솔직히 말하면`이 찍는 방점에 놀랐어요. 조르바였다면 `아니 그걸 이제 알았단 말이오, 두목? 어서 술이나 한 잔 하러 갑시다.`라고 말하고 금새 술집을 향했을 것 같아요. `짧게 할 수도 있는 말을 왜 저렇게 길게 할까?` 하고 술자리에서 슬그머니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들려요.

피오나 2015-06-02 07:43   좋아요 0 | URL
이런..답글이 늦었네요^^;; 말씀들으니 정말 조르바라면 그런 대사를 했을 것 같아요. 하핫. 어려운 시도 있고, 쉬운 시도 있었는데.. 시인처럼 나이가 들어서 한번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블루베일의 시간 - 삶의 끝자락에서 전하는 인생수업
KBS 블루베일의 시간 제작팀 지음, 윤이경 엮음 / 북폴리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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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다큐멘터리 '블루베일의 시간'이라는 프로그램은 아주 우연히 티비 채널을 돌리다가 봤던 걸로 기억한다.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의 곁에서 그들의 죽음을 지켜봐 주는 수녀들의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감사하게도 아직까지 내 주변 누구도 아직 죽음을 맞이한 적이 없었던 터라, 실제 임종의 순간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다큐멘터리에서는 실제 임종의 순간까지 고스란히 담아 내어 무심코 티비를 보던 나를 숙연하게 만들어 주었다. 50년 전 한국에 진출해 국내 최초이자 동양 최초 의 호스피스 시설인 갈바리 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수녀들은 평생을 그렇게 생과 사의 순간에서 헌신하며 살아왔다. 사랑하는 이들을 두고 떠나야 하는 이들의 마지막 심정, 그리고 그런 순간들을 함께 하면서 겪게 되는 수도자들의 깨달음이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적나라한 모습이었다.

"엄마, 엄마, 방금 전에도 숨을 쉬었는데... 왜 숨을 안 쉬어...."

중년의 남자가 어린아이처럼 울먹였다. 그는 죽은 어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태어나고, 자라고, 아이를 낳고, 늙어 가고, 마침내 빈껍데기로 죽는 그 모든 시간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이다. 생의 비밀이 한꺼번에 그의 머리 위로 쿵 내려앉아 납작 깔린 모습이다. 남자 뒤에 있던 딸이 허둥지둥 앞으로 나와 어미의 얼굴을 감쌌다.

"아직도 따듯한데... 이렇게 따뜻한데...."

임종을 지키는 가족들의 황망함과 어떻게든 죽음을 붙들고 싶어 하는 심정이 고스란히 그려져 있다. 그 가족들 뒤에 지난밤 할머니의 병실에서 오랫동안 기도했던 막달레나 수녀가 서 있다. 그녀는 조용히 이 모든 것을 바라본다. '그들의 삶의 뿌리가 뚝 끊어지는 것을. 무릎이 꺾이고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것을.' 말이다. 아직 내가 겪어보지 못한 죽음의 생생한 현장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가슴이 먹먹해지고 말았다.

지난 2013 12월 방송되어 큰 반향을 일으킨 갈바리 의원의 100일간의 기록, <KBS다큐멘터리 블루베일의 시간>이 이번에 책으로 출간되었다. 강릉 호스피스 병원 갈바리 의원 100일간의 기록은 영상에서 미쳐 다 보여지지 않는 모습까지 그려져 있어 다큐멘터리를 봤던 이들에게도, 보지 못했던 이들에게도 특별한 경험이 되어 줄 것 같다.

몸이 죽어 가는 것을 인간인 우리가 막을 도리는 없다. 그저 닥친 것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마음의 준비를 하는 수밖에 말이다. 죽어가는 이는 세상의 끝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매 순간 느낀다. 죽음을 앞두고 남은 나날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남은 이들에게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야 하는지, 정답은 없다. 누구나 단 한 번뿐인 삶, 죽음 또한 처음 겪는 것이니 말이다.

“갈바리에서 한 달 넘게 지낼 때사랑한다, 고맙다교육을 많이 받았어요. 그 말을 진작 했더라면……. 임종이 가까워서 하는 말이 아니라 평소에 사랑하는 사람들한테 많이 하고 사는 게 좋구나, 엄마가 그런 귀한 깨달음을 주고 가신 것 같아요.”

누구나 곁에 있을 때는 그 소중함을 모르고, 떠나버린 후에야 깨닫게 되는 게 어리석은 인간이라 하지 않던가. 평소에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나와 가까운 이들에게 자주 말해주고, 마음을 표현하며 사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새로운 삶을 경험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언젠가는 찾아오게 마련인 죽음을 간접적으로 겪고 나면 내게 남은 나머지 시간이 소중해 질테니 말이다. 매 순간을 감사하고, 충분히 행복하게, 뒤돌아봐도 후회 없도록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끝에 다다라서야 시작부터 잘못됐구나. 여기게 되는 삶도 있겠지만, 자기가 원하는 대로 충만하게, 하고 싶은 대로 멋지게 살아온 삶도 있을 것이다. 살아 생전 어떤 삶을 살았던지 그에게 주어지는 죽음의 시간이란 사실 공평하게 찾아온다. 감동적이었던 다큐멘터리만큼이나 책 또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죽음을 겪고 나서야 삶을 배우지만, 그럼에도 아직 늦지 않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선물처럼 감사하게 생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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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셰프 -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셰프의 24시간
마이클 기브니 지음, 이화란 옮김 / 처음북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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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대세는 요리하는 남자이다. 한참 '먹방'에 관한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더니, 이제는 '쿡방' 모든 방송사를 휘어 잡고 있다. 바라만 보는 먹방보다는 직접 참여해볼 수 있는 쿡방이 더 즐거운 오락이 된 것이다. 요리와 일상을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이런 방송들은 집밥 열풍으로 고스란히 이어져 건강한 라이프 스타일의 추구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거기다 젊고 실력있는데다 재미있기 까지 한 인기 쉐프들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숲처럼 푸른 빛을 띠는 시실리안 피스타치오를 만져보니 부들부들하다. 깨물어보자 입 안 가득 즙이 퍼진다. 맛이 풍부하고 달콤하다. 처음 경험하는 맛이다. 아르간 오일 뚜껑을 열자 오일 향이 공기를 가득 채운다. 오일이 병목을 타고 방울져 내려와 손을 타고 흘러내린다. 이것을 낭비한다는 건 죄악이다. 얼른 혀로 훔쳐낸다. 감칠맛이 있고, 풍부하며, 고소하다. 이번엔 PX(페드로 히메네스) 식초를 맛보자 강렬한 달콤함이 좀 전의 진한 오일과 강한 대조를 이룬다. 다른 식초들과 다르게 향긋함을 풍기는 이 넥타는 농도가 짙고 여러가지 맛이 켜켜이 쌓여 있다.

이 책은 실제 셰프이자 작가인 마이클 기브니가 셰프의 그늘에 가려 주목 받지 못하지만 실질적으로 주방에서 가장 많은 일을 하는 셰프의 오른팔, '수셰프(Sous Chef)'를 주인공으로 그려낸 소설이다. 그가 특급 레스토랑 주방에서 겪는 24시간, 하루 동안의 모든 일들을 통해 그들의 삶 전체를 직접 느껴볼 수 있다. 수셰프라는 낯선 직책은 한 주에 70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셰프 옆에 딱 붙어 셰프의 바람을 실행하는 수행자이다. 그는 주방의 견습생처럼 요리를 어떻게 하고 레스토랑을 어떻게 구성하는지를 배우려고 그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이미 그런 기술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진정한 셰프가 되기 위한 마지막 단계에 있는 것이다.

몇 해전 드라마 <파스타>에서 등장했던 매력적인 셰프. 주방에서는 까칠하지만 여자친구에게는 너그러운 멋진 남자 이선균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드라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 바로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 쉐프." 아마도 그때부터 였을 지도 모른다. 요리하는 남자에 대한 환상이 사람들에게 생기기 시작한 것이 말이다. 연예인을 능가하는 외모와 입담의 셰프들이 방송을 통해서 캐릭터화되면서부터 그것은 구체화되고 있다. 하지만 실제 그들이 일하는 주방이 전쟁터라는 것은 우리 일반인들이 실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주방은 완전히 딴 세상이기 때문에. 나는 워낙 요리에 관심이 많기도 했거니와, 그들 쉐프들의 생활도 너무 궁금했기에, 실제 그들이 매일같이 전투를 치르는 그곳, 전쟁터를 한번쯤은 구경해보고 싶었다.

오후 시간은 드디어 서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혼돈의 시간을 잘 헤쳐 나와 모든 것을 내 통제 아래 두었다. 사실 너무 잘 해내서 셰프가 하나부터 열까지 하기로 했던 테린에 들어갈 가니쉬도 대신 구워줄 수 있는 시간도 남았다. 그것까지 해주면 셰프가 고마워하겠지 하는 기대를 한다. 눈은 긴장감에 여전히 여기저기 두리번거리지만 이번에는 밖에 한번 나갔다 와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안정감이 찾아온다.

그런데 갑자기 셰프의 살찐 손이 내 어깨를 때린다. 안정감은 산산조각 나고 만다. 손에 쥐고 있던 칼을 놓쳐 새끼손가락 끝을 거의 베일 뻔했다.

", 이제 말해보게." 셰프가 말한다. "잘 되어가고 있나?"

"그런 것 같습니다, 셰프."

"4시 반까지 가능한가?"

"(Oui), 셰프." 나는 대답했다. "언제나 가능합니다."

요리가 멋진 일이라는 것 중에 하나는 바로 여러 가지 감각을 활용하는 거라는데 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요리는 운동신경, 효율적인 움직임, 예민한 감각을 활용할 수 있는 장'이라고. 소스가 타면 냄새로 알 수 있고, 생선이 다 구워지면 소리로 알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요리가 매일 똑같은 일의 반복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매 순간 새로운 경험'이라는 사실이다. 이미 알고 있는 레시피가 있더라도, 이미 많은 경험을 했더라도, 지금 당장 사용할 수 있는 감각을 이용해 재료에 따른 다양한 독특함에 대처하고, 기존에 가지고 있는 정보를 모두 활용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주방 체험 24시간을 겪고 나니 요리사들이 일생 전체를 통해 겪게 되는 수많은 경험, 그 히로애락을 한꺼번에 보게 된 듯한 기분이 든다. 물론 일생을 하루 안에 담아놓은 거라 전부는 아니겠지만, 주방이 전쟁터라는 것만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게다가 저자인 마이클 기브니는 분명 요리사인데, 웬만한 소설가 뺨치게 묘사가 너무나도 멋지다. 덕분에 재료의 맛을 보는 것도, 요리를 하는 과정에 대한 것도 매우 리얼하다. 실제로 요리하는 현장을 지켜보는 것 같고, 요리의 향이 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말이다. 지금 요리하는 남자들에게 푹 빠져 있다면, 그래서 '쉐프'라는 직업에 마구 관심이 생겼다면, 이 책이 가장 핫한 아이템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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