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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 1
장미셸 게나시아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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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내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고전들을 탐독했다. 나는 한 소설가의 책들이 아니라 한 인간의 작품들을 읽고 있었다. 어느 작가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본 결과 그의 인간 됨됨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작품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 인간이 작품보다 더 중요했다. 작가의 삶이 영웅적이거나 명예로우면 소설들이 한결 재미있었다. 반면에 사람의 됨됨이가 혐오스럽거나 시시껄렁하면 읽어내기가 어려웠다.

시간을 허비하는 게 싫었던 미셸이 보기에 정말 쓸모 있는 일은 책을 읽는 것밖에 없었다고. 아침에 일어나 불을 켜면 책부터 집어 들었고, 다 읽을 때까지 그것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탓에 어머니는 책에 코를 쳐 박고 있는 그의 모습에 짜증을 내기 일쑤였다. 어머니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저녁 먹으라고 불러도 소용이 없자, 방의 전기를 아예 끊어버리는 사태에 이르기까지. 결국 하는 수 없이 주방에로 내려와 식사를 하면서 책을 읽다가 이제는 아버지의 역정을 사고 만다. 그는 이를 닦거나 용변을 보면서도 책을 읽고, 걸어가면서도 책을 읽다 종종 지각을 하고, 수업시간에도 종종 책을 넓적다리에 올려놓은 채 독서를 계속한다. 강박에 쫓기듯 책을 탐하는 독서가의 모습이 어느 시절의 내 모습 같아서 뭉클했다. 물론 작품에는 작가의 삶을 넘어서는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할아버지의 말처럼, 작가를 선택할 때 작품을 봐야지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따지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말이다.

그는 밤에 몰래 빠져나갔다 어머니에게 흠씬 두들겨 맡지만, 그 와중에도 피에르에게 받은 <화씨 451>이라는 책이 손상되지 않았을까 걱정한다. 그리고 침대 머리맡의 스탠드를 켜고 소설을 읽어간다. 그는 브래드버리의 그 책을 읽으며 저항할 줄 알아야 하고, 타협하거나 양보해서는 안 되며 힘의 지배를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는 것을 배운다. 물론 자신을 괴롭힌 사람들을 벌하는 나름의 방식이 고작 가족들에게 침묵으로 보호막을 치는 거였지만. 책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고, 그걸 몸소 실천하려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수염이 헙수룩한 남자가 커튼 뒤로 사라졌다. 천이 해어지고 여기저기 얼룩이 묻은 레인코트 차림의 남자였다. 이런 계절에 저런 차림으로 뭘 하러 들어가는 거지? 몇 주째 비가 내리지 않던 때였다. 나는 호기심에 이끌려 커튼을 젖혔다. 문에 서툰 솜씨로 써놓은 글귀가 보였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 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내 평생 그토록 크게 놀라보기는 처음이었다.

중학생이던 미셸은 그곳 체스 클럽에서 장폴 사르트르와 조제프 케셀을 보며 무엇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든다. 그는 프랑크와 세실에게 자신이 본 놀라운 소식을 전하지만, 세실은 카뮈를 더 좋아했고, 사르트르를 떠받드는 프랑크는 카뮈를 싫어했다. 그들이 카뮈냐, 사르트르냐에 대해 논쟁한 덕분에 미셸은 하루에 케셀과 사르트르와 카뮈를 동시에 알게 된다. 미셸은 다시 클럽에 갔고, 차츰차츰 클럽의 회원들을 알아나간다. 그렇게 그는 테이블 풋볼을 함께 즐기던 친구들을 버리고, 클럽의 최연소 회원이 된다. 이 클럽은 소년과 동유럽과 그리스에서 넘어온 망명자들의 체스 클럽이다. 국적도 다르고 망명 이유도 제각각인 그들 중에는 여전히 사회주의를 믿지만 해결책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는 이들도 있고, 고국을 그리워하며 사회주의와 절연한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모두 무국적자였고, 누구나 역경에 빠져 있다는 공통점도 있다.

이 책은 미셸이라는 소년이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차츰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의 삶을 그리고 있다. 배경이 프랑스의 1959년에서 1964년까지의 시기인 만큼 역사의 큰 사건들과 개인의 삶이 교집합을 이루는 부분들이 그려져 있다. 외부의 사건이 개인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런 시대적 변화를 겪으면서 그 와중에 낙천주의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한 번 쯤 생각해 보게 만들어준다.

"아름다운 것은 기억밖에 없어. 나머지는 먼지고 바람이야."

체스 클럽 망명자들의 이야기와 미셸 가족들의 이야기가 교차되어 들려지는데, 소소하게 펼쳐지는 미셸의 풋사랑, 부모에 대한 반항, 로큰롤, 테이블 풋볼 그리고 책에 대한 엄청난 열망들과 가족과 사랑을 두고, 이념을 버려야 했던 망명자들의 에피소드는 너무도 이야기 거리들이 풍성해 두툼한 책 두 권을 읽는 내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된다. 미셸이 동경하던 피에르가 군데에서 불의의 죽음을 맞고, 복무 중이던 미셸의 형 프랑크는 살인 사건에 휘말려 종적을 감추고, 그 일로 의견 충돌이 있던 어머니와 아버지는 결국 이혼에 이르고. 주변에서 안 좋은 일들이 벌어질 때마다 미셸은 체크 클럽의 친구들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어수선한 시대에 휘말려 평범하지 않은 사춘기를 보내는 미셸의 삶은 소설 첫 머리에 실린 문구 "나는 비관주의자로 살면서 언제나 똑똑하게 굴기보다 실수를 저지르며 낙천주의자로 살고 싶다"로 고스란히 연결된다. 사실 지금 우리의 시대도 그렇지 않은가. 매일같이 뉴스에서 들려오는 사회에 대한 불신들을 치솟게 하는 소식들은 삶을 낙관하기 어렵게 만들어주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우울한 시대에도 우리는 꿋꿋하게 살아나가야 한다. 어차피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면, 살아남아야 한다면 비관하고 우울해하기 보다는 낙관하고 희망의 끊을 놓치지 않는 게 스스로에게 더 좋지 않느냔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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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을 지배하라 - 끝판대장 오승환의 포기하지 않는 열정
오승환.이성훈.안준철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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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지금은 남편이 된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할 때, 가장 자주 가던 곳이 영화관과 야구장이었다. 둘 다 영화 광에 야구 마니아였는데, 야구장은 단순히 우리가 응원하는 팀의 홈구장 뿐만 아니라 전국의 모든 야구장을 다니며 여행을 다녔다. 왜냐하면 우리는 특정 팀만 좋아했던 게 아니라, '야구'라는 스포츠 자체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서울에 있는 잠실, 목동은 물론이고, 부산, 인천, 대구, 광주, 대전, 창원까지... 전국을 다니면서 야구장 순례를 했다. 그러니 올해의 신생 팀인 KT의 구장을 빼고는 모든 팀의 홈구장을 전부 다녔었는데, 그 중에서도 여러 번 가본 곳이 바로 삼성의 홈구장인 대구이다. 이유는 대구 구장이 작은 편이라 관중석에서 필드가 너무 가까워서 좋고, 가격도 너무 저렴하기 때문이었다. 서울에서 홈플레이트 뒤편의 테이블 석에 앉으려면 티켓을 구하는 것도 어렵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아서 십만 원을 훌쩍 넘는데, 대구 구장에서는 그런 좌석이 단 돈 몇 만원으로 앉을 수 있었다. 그래서 다른 지역들은 한 두번 가본 게 다 인데, 대구에는 서너 번 이상은 가본 것 같다.

나는 넥센 히어로즈의 팬인데, 이상하게도 우리가 대구에 갈 때마다 경기에 지곤 했다. 그 말인즉, 당시 삼성의 마무리 투수인 오승환 선수가 우리가 관람을 갈 때마다 나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건 만약 점수가 한 두 점 차라면 9회말이 되어도 경기가 어떻게 될지 모르므로 우리 팀을 끝까지 응원하게 마련인데, 오승환 선수가 일단 등장하면 우리 팀이 이길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거의 제로가 된다는 것. 물론 오승환 선수도 사람이기에 가끔 블론 세이브를 하지만, 관람하는 입장에서 그저 심리적으로 그의 등장만으로도 아 이제 경기 끝났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그는 압도적인 선수였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이 처음 대구에 갔을 때 오승환 선수가 등장하던 순간인데, 전광판에 '끝판대장'이라는 문구가 뜨고 관중들이 엄청난 환호성을 질러대면 야구장이 막 떠나갈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이다. 나는 그가 상대편 선수임에도 그저 그의 플레이가 놀라웠고, 멋있었다는 기억이 있다.

지금도 친구들이 나를 놀리는 단골 메뉴가 있다.

"넌 정말 야구하기 잘 했다. 다른 종목 했으면 망했을 거야. 운동 선수가 어쩌면 그렇게 운동 감각이 없냐?"

오승환 선수는 축구, 농구, 족구 등 어떤 종목을 해도 공 다루는 게 어설프다고 한다. 자신이 잘하는 건, 그냥 항상 전력으로 미련하게 열심히 뛰어다니는 것이라고. 어쩐지 우직하게 직구로만 승부하는 그의 근성이 바로 이런 데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오승환 선수가 대단한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투수한테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인 '포커 페이스'가 아닐까 싶다. 정말 말도 안 되게 절체 절명의 순간에 등장하는데, 어떤 순간에도 흔들려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마무리 투수이기 때문이다. 야구 경기를 볼 때마다 우스갯 소리로 마무리 투수는 항상 심장이 쫄깃한 순간에 등장해서 피 말리는 싸움을 해야 하니, 수명이 몇 년을 줄 거 같다고 한 적도 있으니 그들의 단단한 심장이야말로 정말 대단한 것 같다.

지금이야 너무도 대단한 선수라 처음부터 탄탄대로를 걸었을 것 같지만, 그에게도 실패를 겪어야 했던 순간들이 있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 프로지명을 앞두고 척추 분리증이라는 진단을 받아 프로 입성에 실패하고 대학생이 되었고, 대학에 가서도 팔꿈치 인대 손상으로 재활 운동에 매달려야 했다.

"야구선수 한 명 키우는 데 학교 예산 5천만 원이 드는데 승환이는 2년 동안 보여준 게 없습니다. 신입생을 받으려면 승환이가 야구부를 그만둬야 할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펑펑 울면서 코치님의 손을 잡고 빌었다.

이 책에 실린 많은 일화들은 그가 정상에 오른 것이 그저 쉽게 된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도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주어서 좋았다. 돌부처라는 별명처럼 어떤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그가 가끔은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터진 아이돌과의 열애 소식도 처음 듣고는 의아했을 정도로, 그가 너무도 야구에만 최적화되어 있어 감정이 전혀 없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인간 오승환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 수 있게 된 것도 같고, 그가 왜 어여쁜 아이돌 가수와 연애를 할 수 있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순간은 내가 지배한다."

이닝, 점수차, 상대타자가 누구인지와 같은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부분은 중요하지 않다. 승부는 내가 공을 던져야 시작된다. 내 공만 마음먹은 대로 던지면 결과는 하나뿐이다. 누구도 제대로 던진 내 공을 칠 수 없다. 그래서 다음 공을 던지는 데에만 모든 걸 집중했다.

자신이 최고의 마무리 투수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한 타자 한 타자를 승부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단지 타자와 승부하는 그 순간을 지배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하는 오승환. 순간을 지배한다는 말이 너무도 멋지게 들린다. 야구에서든, 일상에서든, 회사 업무 중에든, 연애 중에든.. 그 순간을 자신이 컨트롤하고, 지배한다는 건 대단히 멋진 일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일본으로 건너가 한신 타이거즈에서 마무리투수로 활약하고 있는 오승환 선수가 언젠가는 메이저 리그로 갈 수도 있고, 수 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다시 삼성으로 돌아와 은퇴 전까지 활동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어느 자리에서, 어떤 모습을 하든 지금처럼 최고의 모습으로 남아 있길 야구 팬의 한 사람으로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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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5-06-15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국의 야구장을 순례하셨다니 엄청난 야구팬이시군요. 저는 넥센팬아니고 엘지팬인데 목동야구장이 멀지 않아서 가끔 엘지 원정겜 보러 갈 때가 있어요. 문제는 엘지가 넥센한테 워낙 약해서 보러 갈때마다 자주 진다는 점이기는 한데...하기는 엘지는 다른 팀들한테도 다 약해서..ㅠㅠ

피오나 2015-06-16 21:01   좋아요 0 | URL
하핫..제 주변에도 엘지 팬들이 잔뜩 있는데, 맥거핀님도 역시ㅋㅋ 넥센도 엔씨만 만나면 정신을 못차리곤 해요. 다들 그런 팀이 하나씩 있나봅니다. ^^;; 그나저나 맥거핀님도 야구장 나들이를 가실 정도로 야구를 좋아하신다니 괜히 막 반갑네요. 호호호
 
서점의 다이아나
유즈키 아사코 지음, 김난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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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멀리 벤쿠버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아이를 낳았단다. 카톡으로 보내온 사진 속의 아기 얼굴에서 친구의 모습을 발견하고,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이 친구는 중학교 1학년 때 나의 짝꿍이었던 친구이자, 내 인생에서 손꼽으면 다섯 손가락 안에 꼭 들어가는 베스트 프렌드이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넘어가던 그 시기에는 누구나 그랬겠지만, 어쩐지 내가 아이에서 조금은 어른이 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시절이었다. 초등학교 때 친한 친구들은 모두 뿔뿔히 흩어져버렸고, 중학교에 반을 배정받아 가고 보니 여러 초등학교에서 온 모르는 애들 투성이라 어딘지 의기소침해 있었던 것 같다. 낯가림이 심해서 먼저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편도 아니었기에, 나는 평소처럼 소설 책을 꺼내 들고 읽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나에게 먼저 말을 건네준 친구가 바로 이 친구이다. 조용하고 내성적이었지만 가까워지면 털털해지는 나와 달리, 밝고 리더십있고, 아기자기하고 여성스러운 면이 강했던 그 친구 주변에는 항상 친구들이 모여 있었고, 그녀는 결국 반장을 맡았었다. 중학교 3년 중에 겨우 일년 같은 반이었고, 고등학교도 다른 곳으로 배정되었고, 대학도 전혀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지만, 그 친구와의 우정은 우리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재미있게도 이 친구를 비롯해서 나와 가깝게 지낸 이들은 모두 나와 성격이나 외모가 정반대인 친구들이 많다. 아무래도 자신이 가지지 못한 다른 면을 친구에게서 발견하고 나도 모르게 끌리거나, 동경을 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 <빨간 머리 앤>아니? 앤의 친구 이름이 다이아나야."

. 다이아나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빨간 머리 앤>은 거의 베스트 원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좋아하는 책이다. 줄줄 외울 정도로 볓 번이나 읽었다. 앤이라는 수다쟁이에 공상을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좋아 미칠 것 같았다. 딸리 물과 퍼프소매, 하트모양 캔디 등 귀엽고 맛난 것들로 가득한 책이다. 다이아나는 앤이 자랑하는 예쁜 친구이고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이 통하는 사이로 등장한다. 읽으면서 내내 둘의 관계가 너무 부러웠다. 이렇게 남과 책 얘기를 할 수 있다니.

나 역시 어린 시절의 소중한 추억을 함께한 친구들이 있었기에, 이 책 <서점의 다이아나>를 읽는 내내 가슴이 쿵닥쿵닥거리며, 마치 연애를 하는 것처럼 마음이 설레였다. 앤과 다이아나 처럼, 혹은 다이아나와 아야코처럼 그렇게 학창 시절 내내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했던 그런 단짝 친구가 있었던 그 누구라도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너무도 매혹적이다.

우리의 주인공 다이아나는 새 학기가 시작되어 자기 소개를 하는 시간이 오는 것이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다. 바로 너무도 싫어하는 자신의 이름 때문이다. 외국인도 아닌데 '다이아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거기다 한자로 쓰면 뜻이 '큰 구멍'이기 때문에 항상 친구들의 놀림을 받아왔다. 아빠는 다이아나가 태어나자마자 어디론가 떠나버렸고, 카바레 클럽에 다니는 엄마인 티아라가 자신처럼 다이아나의 머리도 노랗게 물들여 놓아 가만히 있어도 튀는 소녀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 앞에 '다이아나는 이상한 이름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예쁜 소녀가 나타난다. 눈매가 곱고, 피부가 도자기 인형처럼 매끄러운, 다른 아이들과는 뭔가가 분명하게 다른 그 소녀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책을 언급하며 다이아나라는 이름이 정말 부럽다고 말한다. 좋은 환경에서 곱게 자란 것이 고스란히 보여지는, 누구라도 친구가 되고 싶어할 그런 미소를 가진 소녀가 말이다.

가나자키 아야코의 집에 놀러갔던 4월 중순의 일요일을 다이아나는 평생 잊지 못하리라.

그 날을 경계로 인생이 바뀌었다. 자신이 편하게 숨 쉴 수 있는 장소가 어떤 곳인지 선명하게 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야코의 집에는 다이아나가 원하는 모든 것이 있었다. 이랬으면 좋겠다고 꿈꾸던 풍경이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요리 연구가인 너그러운 엄마와 출판사 편집자인 차분한 아빠를 가진 아야코가 부러웠다. 엄마 앞에서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응석을 부리고 조잘대는 아야코의 모습이 정말 부러웠고, 자신도 그렇게 너그러운 엄마의 품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어리광을 피우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도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주고, 지켜줄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아야코는 다이아나가 살고 있는 이 집의 반짝거리는 마력에 푹 빠져 있다. 조그만 방은 마치 소꿉놀이하는 인형의 집 같다. 여기저기에 알록달록한 병이 조르륵 놓여 있고 온 벽에는 공주늠 드레스 같은 옷이 걸려 있다.....냉장고, 전기 밭솥에 이르기까지 반짝거리는 스티커와 비즈로 장식되어 있어 한없이 바라보고 싶어진다.

아야코는 다이아나가 복잡한 가정에서 동화 속 주인공처럼 자란 여자아이일 거라고 상상한다. 헐렁한 티셔츠에 더러운 실내화차림이지만, 사실은 소공녀 세라처럼 좋은 집안의 자녀일 것 같다고. 그리고 다이아나의 이야기 하나하나에 가슴이 설렌다. 열다섯 살, 자기 이름을 스스로 짓고, 아빠를 찾아 여행을 떠나고. 어쩌면 이렇게 드라마틱할 수 있을까.

아야코와 다이아나는 서로가 가지지 못한 것을 경험하고, 상대를 부러워한다. 아야코는 다이아나가 순식간에 만들어준 인스턴트 음식의 강렬한 맛에 감동하고, 다이아나는 아야코의 엄마가 직접 만들어준 젤리의 맛에 황홀감을 느낀다. 수수하면서 멋진 아야코를 동경하는 다이아나와 반짝반짝 화려한 다이아나를 부러워하는 아야코는 그렇게 세상에서 둘도 없는 단짝이 된다. 이유는 둘다 책을 너무 좋아했고, 그 책을 매개체로 하여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교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외모와 완전히 상반된 가정 환경에도 불구하고, 책 읽기를 좋아한다는 이유 만으로 친구가 되는 건 이렇게 어린 시절에만 가능한 일이다. 어른이 되고 나면 마음을 터놓는 친구를 만들기가 하늘에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되니 말이다. 아야코와 다이아나는 중학교 입시를 앞두고 사소한 오해로 멀어지고, 결국 그녀들이 다시 말을 하게 되는 건 그로부터 무려 10년 뒤가 된다. 쉽게 가까워지는 것만큼의 순수함이 반대로 이렇게나 긴 시간 동안의 단절을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십여 년의 시간을 각기 다르게 겪어가는 두 소녀의 이야기와 비밀이 많은 호스티스 티아라, 다이아나가 찾아내는 자신의 아버지, 그리고 아야코의 두 부모들을 통해서 가족에 관해, 여자들의 삶에 관해 아기자기하고 따스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리고 순수했던 소녀들은 나이를 먹으면서 인생이 내 마음 같지 않다는 거. 소설처럼 삶도 모든 게 멋지게 돌아가지는 않다는 걸 배워간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가는 게 아닐까. 어떤 상황이라도 책을 펼치면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는 것처럼 안심이 되는 당신이라면, 분명 이 책은 풋풋한 첫사랑의 기억처럼 설레이는 모습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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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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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내 집인가.

나는 생각했다. 저 여자가 내 아내인가. 저 아이들은? 아내는 미소 짓는 얼굴로 내 옆에 바싹 붙어 앉아 있었는데, 살진 턱과 화장으로 간신히 감춘 기미와, 화장으로도 감추지 못한 눈가의 잔주름이 주는 전체적인 이미지는 우울했다......

내가, 내 아내가 아니야. 저건, 내 아이들이 아니야. 마치 낯선 집에 잘못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견고한 구조라고 여겼던 것들은 깨어지고 없었다. 오래 전부터 이미 깨져 있던 걸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어린 동생들과 병든 부모를 뒷바라지 하기 위해 점심과 저녁, 2개의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며 하루 열 몇 시간씩 일했던 남자. 결혼 후에도 수당이 있든 없든 밤늦게까지 일했고, 상사에겐 무조건 복종했으며, 경우에 따라선 몸종처럼 봉사하길 자청했던 남자. 일이 그의 취미였고 사랑이었으며, 아내와 아이들이 일밖에 모른다고 불평해도 자신의 삶의 방식이 틀렸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뛰쳐 나간다.

그 동안 나는 뭐하고 살아온 거야.

나는 도대체 여태껏 뭘 해왔던가.

스스로에 대한 자각은 자신이 형편없이 초라하게 느껴지게 만들었고, 급기야 '난 실패한 인생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이르러 시도 때도 없이 멍해지고, 밥맛도 없어지고, 이제까지의 삶이 수치스럽기도 하고 억울해지기도 한 것이다. 전에 없던 건망증, 마음 속의 분노 들은 어떤 울분으로 이어져 결국 아내와의 말다툼 끝에 평생 처음으로 아내의 뺨을 때리게 만들고 만다.

평온하고 안정된 삶을 살던 평범한 남편이자 아빠였던 남자의 삶은 어느 날 문득, 그렇게 금이 가버리기 시작한다. 회사에서 자금 담당 이사로 근무 중인 50대 중반의 남자는 그리고 시인이자 화가인 천예린이라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 그녀를 예전에 만났더라면 그저 스쳐 지나갔을 지도 모르지만, 하필이면 자신의 생에 대한 후회와 자각을 하게 된 그 시점에 만났기에, 뻔한 일상에 사로잡힌 평범한 아줌마인 자신의 부인과 너무도 달라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동안은 미처 자각하지 못했지만 너무도 뻔한, 기계로 찍어낸 싸구려 공산품 같았던, 황폐하고 부식된 삶을 그제야 깨닫게 되면서 말이다. 그러니 아무런 긴장과 감흥이 없는 무난한 부부 관계는 도발적이고, 퇴폐적이면서도 진취적이고, 자신보다 무려 네 살이나 위였지만 어느 순간에는 30대 초반처럼 보이기도 하는 매력적인 여자 천예린에 의해 산산이 조각나버리고 만다.

 

그것은 사멸한 줄 알았던 내 옛 꿈의 작은 단서였다. 네 회화적 직관이 놀랍구나, 라고 하던 선생님의 말소리도 선연했다. 천예린, 그녀를 만나기 전까진 완전히 잊었던 삽화들이었다.

 

아내와 아이를 버리고, 회사의 공금을 횡령해서 도주한 남자 김진영은 천예린과 단어 그대로 '미친' 사랑을 한다. 생애 한 번쯤은 이렇게나 난폭하고, 모든 걸 다 버리고, 바닥까지 가보는 사랑을 해보고 싶다는 욕망을 가질 수도 있다. 그리하여 부도덕한 남편이자 무책임한 아빠가 된 그 남자의 사랑의 여정은 그렇고 그런 수순대로 이어진다. 섹스는 했으나 사랑은 하지 않았던 천예린에게 버림받고, 그녀를 쫓아서 케냐로, 모로코로, 카사블랑카로, 스코틀랜드로, 그리고 시베리아로 무작정 여정을 시작한다.

이 작품이 그저 부도덕한 러브 스토리나, 막장 불륜 스토리가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행을 통해서 그는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불치의 병을 앓고 있어 죽음 가까이 다가서고 있는 천예린은, 그녀의 성격대로 앉아서 죽음에게 유린당하지는 않겠다고 말하고, 그렇게 행동한다. 김진영도 물론 알고 있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벌거벗고 함께 시시덕거리며 밥 먹고 똥 싸고 살 때조차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떠날 때까지 그녀를 지독하게 사랑한다. 작품 속의 화자는 대부분 김진영 자신이지만, 부분 부분 남겨진 그의 아들의 목소리로 말한다. 아버지가 회사 공금을 챙겨서 여자를 쫓아 떠나가고, 온 나라에 IMF 한파가 몰아닥치고, 아파트가 압류되고, 어머니가 쓰러져 뇌 수술을 받고, 아버지 대신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해야 했던 그의 아들. 그래서인지 아버지의 불편한 여정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이지만, 남겨진 가족들의 모습에서 현실적인 그림도 함께 엿볼 수 있었다. 아버지 자신에겐 목숨마저 걸 정도로 절박한 사랑이, 남겨진 가족에겐 어떤 상처가 되는지 말이다.

제목만큼이나 이력이 독특한 책이다. 이 작품은 1999 '침묵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고, 2600여 매나 되는 긴 분량이었기에 두 권으로 간행되었다. 박범신 작가는 자신이 지나치게 말이 많았거나 참을성 없이 비명을 질러댄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그 책을 잘 보이지 않는 뒷줄 책장에 처박아두고 그것으로부터 떠나려고 애썼지만, 무려 7년이 지나서 그 책을 다시 꺼내 든다. 어차피 떠날 수 없다면 정면으로 마주치는 게 낫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 긴 소설을 1500여 매 이하로 아프게 깎아냈고, '주름'이라는 이름으로 2006년 다시 출간한다. 그리고 다시 9년여 시간이 지나, 다시 300여 매쯤 깎아내고 결정적인 장면의 서술을 일부 바꾸어 다시 출간된 것이 바로 이번에 출간된 버전이다. 이후에 다시 7~8년이 지난 뒤에 또 깎아내는 짓을 할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는 작가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것은, 한 권의 책을 통해 시간의 주름을 켜켜이 쌓아가는 대단한 감성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마침내 단 한 줄로 삶의 유한성이 주는 주름의 실체를 그려낼 수 있게 된다면' 작가로서 성숙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될 거라는 박범신 작가의 겸손함은 글쓰기에 대한 그의 깊은 내공을 짐작하게 한다. 나는 기존에 출간되었던 다소 긴 버전의 이 작품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어쩐지 지금 출간된 버전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많은 것을 상상하고, 추측하게 만들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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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다시 벚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2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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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쇼노스케는 서책을 베끼는 일을 한다. 인쇄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서책은 지은이가 직접 쓴 단 한 권이었으므로, 그것을 널리 읽히게 하기 위해선 필사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이 책을 읽다 보니 이렇게 필사본으로 책을 읽어야 했던 이런 시대가 어쩐지 부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지금의 책들은 모두 활자가 인쇄되어 나오므로, 저자의 필체를 느낄 수 있는 책은 없는데 필사본은 글을 쓴 사람의 맨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날 테니 말이다. 나의 초, 중등 시절에는 책 대여점이 한참 인기였는데, 학생이라 용돈이 빠듯했던 나 역시 읽고 싶었던 책들을 전부 사볼 수 없었으므로 주로 대여점에서 빌려서 보았다. 보통 책을 한 권 빌리면 하루 만에 다 읽고는, 나머지 대여 기간 동안 나는 노트에다 필사를 하곤 했다. 왜냐하면 책을 반납하고 나면 두 번 다시 이 책을 읽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같은 책을 여러 번 빌려 볼 만큼의 여유도 없었고, 그렇다고 마음을 움직였던 문구들을 모조리 외울 수도 없었기에, 노트에 부지런히 옮겨 적었던 그 시절에 나를 떠올려보니 쇼노스케가 하는 일이 눈 앞에 그대로 보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글자가 웃고 있습니다".

"글자가 웃나요?"

"웃기도 하고, 화도 내고, 새침한 표정도 짓죠."

글씨에서 사람됨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사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 <사라시나 일기 표주>도 국문학자가 만든 사본을 읽을 때와 와카 씨의 사본을 읽을 때 조금 다르게 이해될 겁니다. 물론 글 뜻이 다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글씨체가 다르면 감정이 전달되는 방식도 달라지니까요."

똑같은 사람이 장소에 따라, 또 상대방에 따라 약간은 다른 얼굴을 보이는 것과 비슷하다.

와카의 얼굴이 환해졌다. "서책은 살아 있다는 말씀이네요."

사람들이 성격과 체질이 각기 다른 것처럼, 그들이 쓰는 글씨체도 다를 수밖에 없다. 필적이 다른 것은 본래 저마다 눈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사람은 자기가 본 것을 그리게 마련이오. 글씨든, 그림이든 마찬가지지. 보는 것, 보이는 것이 다르면 그것을 베껴 쓰고 그리는 것도 다른 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 아니겠소"

글자를 쓸 때는 마음을 담아 써야 한다고, 마음을 담으면 못 써도 예쁘게 보인다고 말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별 의미 없이 하는 수많은 일 들 중에 글씨를 쓰는 것조차 마음을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학창 시절 처음 친구를 사귈 때나, 새로운 선생님을 만날 때 글씨체에 따라 그들의 성격과 얼굴까지 그대로 보이는 것 같았었는데, 그게 아마도 글씨에 마음이 어느 정도 깃들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음악을 연주하는 피리를 뜻하는 한자를 쓰다니 무사의 자식답지 않게 연약한 이름이라고 어머니는 무척 싫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억지로 지어주신 겁니다.

이 아이가 생황의 음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인간으로 자라도록.

 쇼노스케에게 이렇게 멋진 뜻을 담은 이름을 지어주신 그의 아버지 소자에몬은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고 할복 자살을 하고 만다. 검소하게만 살았던 그는 뇌물 혐의에 대해서 전혀 금시초문이었지만, 그를 고발한 이에 따르면 확고한 문서로 증거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문서의 필적은 당사자인 소자에몬이 보기에도 자신의 것으로 보였으니,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일이냐 하겠다. 그 와중에 부인인 사토에가 아들의 관직을 위해 뒤에서 로비를 한 일까지 불거져, 그녀와 아들을 지키기 위해 소자에몬은 죄를 뒤집어 쓰고 만 것이다. 그렇다고 부부 사이가 각별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세 번째 혼인을 한 사토에는 애초에 남편에게 애정이라고는 없었던 데다, 그녀는 두 아들 중에 아비와 정 반대인 첫째 가쓰노스케에게만 기대를 걸고, 남편과 닮아 얌전한 쇼노스케에게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다.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바랐던 쇼노스케는 에도로 와서 필사 일을 하면서, 문서를 위조했던 이를 찾는데 그를 둘러싼 수많은 인물들의 삶도 평범한 가족이 그리 많지 않다. 큰 아들과 의절하고 작은아들에게 대를 잇게 한다는 유언의 시비를 가리기 위해 가짜 유언장을 만들고, 수십 년 키워준 정을 무시하고 자신의 부모에게 가서 키워준 부모의 돈을 가로채려 하고, 심약하고 기골이 없는 아비가 마음에 들지 않아 아비의 뒤를 이어 평범하게 살 바에야 천륜을 꺾어서라도 자신의 앞길을 위해 아무렇지도 않다는 자식이 있는 가 하면, 맨날 싸움만 하는 모녀 사이도 있고 말이다. 현실에서도 숱하게 만날 수 있는 그런 가족의 여러 형태들이 미야베 미유키의 시선을 통해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나는 왜 후루하시 가에 태어난 거지? 내가 원해서, 선택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야."

그 누구도 부모를 선택해서 이 세상에 태어날 수는 없건만, 어찌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천륜이라 함은 부모, 자녀간이나 형제간에 맺어진 관계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하늘의 도리로서 그렇게 된 것이기 때문에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부모와 자식의 인연은 천륜이기에, 부모가 자식을 버리지 못하듯 자식도 부모를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채널만 돌리면 나오는 티비 연속극에서도,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사건 사고 뉴스 기사 속에서도, 우리는 천륜을 끊겠다는 이들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보곤 한다.

쇼노스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와카의 눈가에 웃음이 어렸다. 미소 띤 눈이 쇼노스케의 가슴을 환히 비쳐주었다. 갑자기 속에서 뭔가가 불끈불끈 치솟았다.

오늘은 자주 불끈거리는 쇼노스케이지만, 결코 발칙한 '불끈불끈'이 아니다. 학생들 때와 마찬가지다. 친밀한 분위기를 공유하는 즐거움이 자아내는 기쁜 설렘이다.

 

미야베 미유키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부모를 사랑할 수 없는 상황이거나 부모에게 사랑 받지 못하더라도 단지 그것만으로 사람으로서 소중한 걸 잃은 건 아니라고. 그것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가족의 소중함은 잘 알고 있지만, 가족이 만능은 아니라는 것, 피를 나누었다는 속박으로 오히려 불행해지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의 다양한 인물들의 가족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쇼노스케가 수취증서를 쓴 필사의 달인을 찾는 미스터리와 그가 와카라는 독특한 처자와 함께 만들어가는 알콩 달콩 로맨스, 그리고 쇼노스케가 필사 일을 하면서 만나는 수많은 인물들의 드라마까지. 이 작품에 실린 네 편의 이야기는 단편 처럼 읽기에도 손색이 없고, 연작으로 읽으면 그 재미가 더욱 배가 되는 재미있는 장편 소설이다. 특히나 나는 미야베 미유키가 사람을 그려내는 그 시선을 참 좋아하는데, 그녀의 작품 속에서는 악인이든 선인이든 각각의 처해진 상황과 입장이 그려져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태어나면서부터 나쁜 놈, 착한 놈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쓰다 보니 리뷰가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듯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그만큼 이 책에 여러 가지 재미있는 부분들이 많다고 해두자. 감동적인 드라마도, 퍼즐을 풀어가는 재미도, 귀여운 연애 이야기도, 가슴이 철렁해지는 숨겨진 진실도, 모두 한데 뒤섞여 큰일을 낸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니 말이다. 작품의 원제인 벚꽃박죽 처럼 이런 일 저런 일 온갖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 바로 우리네 인생사이기도 하니 그저 이야기가 흘러가는 대로 한번 따라가보는 것도 괜찮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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