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죽음
제임스 에이지 지음, 문희경 옮김 / 테오리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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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아버지의 등은 너무도 크고 넓어 밖에서 어떤 일이 있었어도 아버지에게만 달려가면 모든 일이 문제없이 해결될 것만 같았다. 그만큼 든든했고, 믿음직스러웠고, 때로는 무섭기도 했으며, 가끔은 어려웠지만, 대부분은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내는 모습이 멋있어 보이기만 했었다. 하지만 이제 내가 누군가의 부모가 될 만큼 나이를 먹고 보니 작고 굽어진 아버지의 등을 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져 가끔 서글퍼진다. 누구나 나이를 먹게 마련이니까. 세월을 당하는 장사는 없으니까 말이다. 가끔 얼굴을 볼 때마다 어깨며, 팔이며 조금씩 수척해지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언젠가는 이별을 해야 할 시간도 오겠구나 싶은 마음에 울컥해지기도 하고, 언제나 아버지의 그늘 아래 보호 받았던 내가 이제는 반대로 아버지를 보살펴야 하는 나이가 된 것에 책임감 같은 걸 느끼기도 한다. 무엇보다 지금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은 아직까지 가족 중 그 누구와도 완전한 이별을 해본 적이 없기에, 언젠가는 겪게 될 아버지와의 이별이 두렵기만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임스 에이지가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소설로 쓴 자전적 추도사인 이 책을 읽는 내내 조금 두렵고, 긴장이 되기도 했고, 무섭기도 했다. 나도 언젠가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인정하고, 익숙해져야 할 거라는 걸 알기에 말이다

아빠는 집으로 가는 길을 서두르고 싶지 않은 것 같았고, 분명 아들과 같이 있는 이 잠시의 여유를 즐기는 것 같았다. 요즘 들어 루퍼스는 구름다리를 다 내려올 무렵이면 이곳에 들를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빠와 함께 바위에 앉아 있는 일이십 분 정도가 어찌나 행복한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말로든 생각으로든 그 정체가 무엇인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내기는 어려웠다. 그저 그래 보이고 그런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아빠도 여기서는 다른 어느 곳과 달리 유독 만족스러워 보였다. 둘이 느끼는 만족감이 아주 비슷하고 서로에게 의지한다는 생가기 들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위급하다는 전화를 받고 제이는 아버지의 첫 모습을 떠올려 본다. 매부리코에 잘 생긴 얼굴, 당당하고 위압적이던 검은색의 멋진 콧수염. 천성이 워낙 낙천적이고 심성이 따뜻했지만, 어머니에게 무거운 짐을 떠넘겼던, 그래서 어린 나이에도 제이가 분개하게 만들었던 그 아버지. 창문 넘어 칠흑 같은 어둠을 응시하면서 그는 벌써 슬픔을 느낀다. 하지만 제이는 생각한다. , 누구나 언젠가는 가야 하는 거잖아. 그렇게 다시 삶의 초점이 돌아오자 그는 외출 준비를 한다. 옷을 차려 입고 방을 나서려다 구겨진 침대를 보고는 아내의 자리에 남아 있는 따뜻한 온기가 사라지지 않도록 이불을 위로 당겨 덮어둔다. 그리고 방문이 살짝 열린 아이들 방 앞을 지날 때는 깨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한다. 메리와 제이는 가벼운 아침 식사를 하고, 메리는 아빠가 인사도 없이 가면 아이들이 실망할 까봐 깨우고 싶은 걸 참았다고 말한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최악의 상황이 되면 생각보다 그가 더 오래 가족을 떠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날 저녁, 메리는 바깥양반께서 사고를 당했다는 전화를 한 통 받는다.

"무슨 일이 닥치든 그걸 감당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메리의 눈빛이 빛났다.

"감당하려고 너무 애쓰지 마라.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마. 그저 최선을 다해 견디면서 감당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저절로 풀리게 놔두렴. 그거면 충분해."

"전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아요. 준비할 시간이 너무 적어요."

"준비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닌 것 같구나. 그냥 겪어 내야 할 일이지."

결국 그들은 사고 현장에 다녀온 오빠를 통해 제이가 현장에서 즉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살다 보면 누구나 이런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마음의 준비를 전혀 할 새 없이 그저 맞닥뜨리게 되는 일들, 이해하고 감당할 수 없어 그저 견뎌내야 하게 되는 일들 말이다. 이제 남겨진 가족들은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극복해야만 한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메리는 종교에 의지하려 하지만, 믿음으로 충만한 자신에게 왜 이런 아픔이 왔는지 감당하기 어렵다. 죽음이 뭔지 아직 모르는 네 살 캐서린은 그저 아빠가 집에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여섯 살 루퍼스는 자신의 우상과도 같았던 아빠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뿐이다. 특히나 아빠와의 소중한 시간, 그들만의 비밀을 가지고 있었던 소년 루퍼스의 아빠에 대한 그리움은 가슴이 먹먹하기만 하다.

"저희 아이들에게 은총을 내려 주세요." 엄마가 나직이 읊조렸다.

"은총을 내려 주시고 저희 모두를 지켜 주세요."

"아멘." 루퍼스가 예의 바르게 속삭였다. 불편한 마음을 떨쳐 내기 위해 엄마를 더 꼭 끌어안은 루퍼스는 엄마도 자기를 더 힘껏 끌어안는 느낌을 받았다. 그사이 서글프고 외로워진 캐서린은 돌처럼 딱딱하게 서있었다.

거짓의 아들과 거짓에 속은 엄마, 그리고 깊은 상처를 받은 딸이 그렇게 정물처럼 그 자리에 조용히 있었다.

이 책은 제임스 에이지가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소설로 쓴 자전적 추도사라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고, 그 경험으로 그는 한 가족에게 찾아온 죽음을 어떻게 견뎌내는 지에 대해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소설가 겸 시인으로서, 영화 비평가 겸 시나리오라이터로서, 르포라이터 겸 저널리스트로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었던 그의 유작이기도 하다. 오랜 기간 이 책을 쓰기 위해 많은 것을 쏟아 부었는데, 심장마비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 하게 되고 만 탓이다. 죽음은 이렇게 예고 없이 찾아와 남겨진 이들에게 그저 견뎌내라고 말한다.

최고의 문장가로 명성을 쌓은 작가답게 이 책들의 문장은 매우 공들여 읽고 싶을 만큼 단단하다. 사건이 일어나기 하루 전부터 그날 저녁,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단 며칠 만에 이들 가족에게 벌어지는 상황과 심리들은 고스란히 감정을 따라가느라 몰입하게끔 매우 밀도가 높다.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꽤 많이 등장하지만 비 종교인에게도 거부감이 없을 만큼 스토리에 잘 녹아져 있고, 담담하고 정확한 문장들로 표현된 이들의 마음은 마치 내가 그들 가족의 일원이라고 된 것 같은 기분마저 들게 한다. 게다가 이런 상황이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밖에 없는, 언젠가는 나도 맞이해야만 하는 상황이라 생각하니 마음 한 켠이 더욱 차분해지고, 정돈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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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닝 걸스
로렌 뷰키스 지음, 문은실 옮김 / 단숨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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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이렇다. 누군가 아주 우연히,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집을 발견하게 된다. , 미래로, 과거로 원하는 대로 시간 여행을 하는 대가는 '더 하우스'가 지정하는 여자들을 죽여야만 한다. 그래서 그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 빛나는 소녀들을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하는데, 자유롭게 시간대를 넘나드는 그이기에 절대 발각될 염려는 없기에 그는 점점 더 살인 행각에 중독이 된다. 그 와중에 그가 살해했다고 생각했던 한 소녀가 극적으로 살아남게 된다. 그녀는 몇 년 뒤 자신의 사건을 취재했던 신문사의 기자가 되어 그를 쫓기 시작하고, 우연히 그녀가 죽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 그의 반격이 시작된다. 정말 너무도 기발한 아이디어가 타임 리프라는 장르를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으로 만들어 준다. 그러나 빛나는 독창성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깨달음. 마치 어떤 문이 속에서 열리는 듯했다. 열이 최고조에 달했고, 무언가가 목 놓아 울부짖으며 그를 통과해갔다. 그 소리는 경멸과 진노와 불로 가득했다. 그는 빛나는 소녀들의 얼굴을 보았고, 그들이 어떻게 죽어야만 하는지 알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녀를 죽여. 그녀를 막아.

타임리프 스릴러라는 읽기도 전부터 구미가 확 당길만한 소재로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이 작품은 읽는 내내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당황스럽기 그지 없었다. 책 날개 뒤쪽에 소개된 정보가 미리 없었다면, 아마도 그 여정은 더 어려웠을 것이다. 시간대가 너무 뒤죽박죽 섞여 있는데다, 짧은 이야기로 자꾸만 화자가 바뀌는 이 스토리의 흐름을 파악하기란 너무 복잡했으니 말이다. 100여 페이지가 지나서야 주인공 하퍼가 가지게 된 정확한 능력(?)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다. '더 하우스'는 머릿속에 어느 시간만 생각하면 문이 그때로 열리는 시간의 블랙홀 과도 같은 장소였다. , 그는 이곳 '더 하우스'를 통해서 미래로,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마룻바닥이 피로 젖어 있고, 시체가 복도에 널부러져 있는 걸 보다가 문지방 너머로 몸을 다시 빼고, 손을 넣어 문을 닫은 다음 다른 시간대의 날짜에 집중하고 나서 다시 문을 열면 시체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 그런 식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가 왜 다른 시간대로 가서 소녀들을 죽여야 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상태였다.

74년의 하퍼는 여섯 살이던 커비를 만나 모든 것을 한데 연결해주는 '그 물건들' 중 하나인 조랑말을 선물로 준다. 언젠가 너에게 돌아올 테니 그때 다시 만나자고. 나중에 조랑말을 가지러 오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89년에 커비의 개와 그녀를 무참하게 살해한다. 우리는 이 장면이 올 때까지 하퍼가 왜 빛나는(?) 소녀들을 찾아가 죽여야 하는 건지 알 수 없다. 그저 시간대를 넘나들며 벌이는 살인의 배경에 '더 하우스'가 어떤 힘을 작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뿐이다. 92년의 카비는 신문사에 들어가 자신이 겪은 사건을 추적해 살인자를 찾으려고 하는 중이다. 스토리는 막판에 가서야 긴장감을 부여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를 더 하우스로 이끌었던 것과 똑같은 인력이었다. 그가 있어야 할 곳으로 향해 갈 때의 그 날이 퍼렇게 선 인식, 그러고서는 '그 방'의 부적들 중 하나를 알아보면 그만이었다. 그것은 게임이었다. 다른 시대와 다른 장소를 거치며 여자들을 찾아내는 일은 게임이었다. 그들은 그가 그들을 위해 써 내려가고 있는 운명을 기다리며, 준비를 갖추고 그의 장단에 맞추어주었다.

 

시간을 여행하는 살인마라는 매력적인 소재는 어쩌면 영상으로 재 탄생했을 때 더 빛을 발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제작으로 미국에서 TV 드라마로 방영될 예정이라고 한다. 좀 더 정돈된 형태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면 훨씬 더 몰입도가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컸는데, 아무래도 영상으로 보여진다면 뒤죽박죽 스토리를 정리하기가 더 쉬울 테니 말이다.

그리고 사실, 이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은 연쇄살인마가 되어 버린 하퍼도, 끔찍한 공격에서 살아남은 소녀 카비도 아니고 바로 '더 하우스'라는 장소 자체이다. 시간 여행을 하는 다양한 시대 별로 다양한 소녀들이 죽어야만 하는 이유를 아는 것은 바로 그것을 지시하는 '더 하우스' 뿐이니까. 빛나는 소녀들이 죽기를 바라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더 하우스'라는 사실은 이 작품을 스릴러라기 보다 공포로 느껴지게 만들기도 한다. 얼핏 예전에 한참 유명했던 미드 '로스트 룸'이 떠오르기도 한다. 모텔의 열쇠를 통해서 세계 어느 곳으로든 이동할 수 있었던 그 드라마의 주인공 또한 초능력이 깃들어 있었던 '물건'들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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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심판 모중석 스릴러 클럽 38
프레드 바르가스 지음, 권윤진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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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떤 작품은 결말이 너무 궁금해서 미칠 듯이 페이지를 넘기며 숨가쁘게 읽을 수밖에 없고, 또 어떤 작품에선 천천히 배경을 둘러보면서 캐릭터들과 인사를 나누고 구석구석 꼭꼭 씹으면서 책을 읽는 그 순간을 오롯하게 즐기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프레드 바르가스의 <죽은 자의 심판>은 명백히 후자이다. 그 말은 즉, 이 작품이 플롯 중심이 아니라 캐릭터 중심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동안 수많은 스릴러, 범죄 추리 소설들을 읽어왔지만, 나는 그 어디서도 만나지 못했던 정말 이상하기 그지 없는 캐릭터를 이 작품에서 만났다. 바로 주인공인 아담스베르그 서장이다.

"내 형사들 중에는 말입니다, 대위님. 갑자기 픽 쓰러져 잠드는 수면 과다 환자도 있고, 어류 특히 민물어류에 빠삭한 동물학자도 있습니다. 비상식량을 사러 슬그머니 사라지는 허기증 환자가 있는가 하면, 동화와 전설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늙은 왜가리를 닮은 친구도 있고, 백포도주를 입에 달고 사는 천재도 있어요. 다들 그런 식입니다. 그러니 서로 격식을 차리기가 힘들죠."

"그런데도 일이 됩니까?"

"아주 열심히들 합니다."

명백한 사실에 입각한 증거와 논리로 무장해 범인을 찾아야 할 강력계 형사인 그는 무엇보다 본인의 감을 명백한 사실처럼 받아들이는 형사이다. 사건을 해결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건 상관없이 느긋한 성격을 가지고 있고, 까무잡잡한 얼굴에 땅딸막하고 수수한 외모의 소유자이다. 자신이 결백하다고 믿는 용의자를 빼돌려 숨기고 진짜 범인을 찾으려 하기도 하고, 풍만한 가슴을 가진 사건 관계자를 만나러 가서 그녀와 잠자리를 하고 싶은 욕구를 가져 보기도 하는 등... 아무리 보아도 전혀 주인공 스럽지 않은 인물이다. 가끔은 당황스러울 만큼 적나라하게 인간적이고, 강력계 형사라고 하기엔 심각한 결함마저 가진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게다가 그의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당글라르는 그의 애매모호하고 막연한 사고와 일관성 없고 총괄적이지 못한 얼토당토않은 논리를 견딜 수 없어 했고, 형사들은 세월아 네월아 마냥 여유를 부리는 서장에게 보조를 맞추기가 어려워한다. 청장은 그의 수사 방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대놓고 말하며, 수사 방향을 제시하는 데 필요한 구체적인 정보도 없는 그의 방식이 윗사람한테나 아랫사람한테나 감을 잡기 어려운 추상적인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를 처음 만난 에므리는 그가 유명한 이름과 걸맞지 않은 어딘가 조화롭지 못한 모습을 하고 있는 표준을 벗어나는 사람 같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멈춘 듯한 시간 속에 세상에서 가장 귀한 진주가 숨어 있다고 믿는, 세상에서 가장 느긋하고 여유로운 형사.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것도, 천재적인 수사 감각을 가진 것도, 그렇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칭송 받는 멋진 인물도 아닌 우리의 주인공.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나의 이성적인 머리는 주어진 정보로 그를 객관적으로 이렇게 평가하고 있는데, 내 감성적인 머리에서는 어느 순간 마치 홀린 듯 그에게 점점 사로잡히고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를 좋지 않게 평가하는 또 다른 등장 인물이 등장할 때는 남들의 눈에 그렇게 비치는 그에게 연민마저 느낄 정도로 말이다.

"에르비에의 죽음은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리나의 꿈이 현실에서 폭발한 겁니다. 꿈이 배고픈 늑대를 숲 속에서 나오게 한 거랄까요."

"엘르켕 두령이 희생자들을 지목하면, 누군가가 자신에게 희생자들을 죽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보시는 겁니까? 리나가 본 환영이 살인자를 만들어낸 거라고?"

"단순히 환영만은 아닙니다. 천 년에 걸쳐 오르드벡 구석구석에 스며든 전설이죠. 제가 장담하는데, 마을 사람들 중 4분의 3 이상은 죽은 기마병들의 출현을 두려워하고 있을 겁니다."

이상한 캐릭터만큼이나 이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사건 또한 매우 기묘하다. 21세기에 나타난 중세의 유령 기마부대라니, 어쩐지 믿는 사람들이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죄를 짓고도 벌을 받지 않은 자들, 사기꾼, 영혼이 썩은 사람, 착취자, 부패한 재판관, 살인자들을 성남 군대가 직접 나서서 심판한다는 것이다. 분명 이야기의 배경은 현대의 파리인데, 중세의 유령부대가 사람들을 죽일 거라고 예고를 하고, 그들을 강력계 형사들이 수사한다는 발상 자체부터 낯설기만 했다. 아담스베르그가 처음 '성난 군대'에 관해 제보를 받았을 때 "단체 이름입니까? 사냥 동호회 같은?"이라고 반응한 것처럼 말이다. 성난 군대에 관한 전설을 전혀 몰랐던 그는 그걸 알아보기 위해 사람들에게 물을 때 "별난 군대라고 들어봤니?"라고 할 정도니 뭐. 1777년의 중세 유령부대가 출몰한다는 21세기 노르망디의 본느발 숲. 아담스베르그는 자신의 관할 구역이 아닌 데도, 당장 코앞에 닥친 다른 살인사건에만 집중해도 부족할 시간에 그곳으로 직접 가본다. 이유 또한 어이없을 만큼 단순하다. 그가 그곳에 간 건 성난 군대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도전 의지 때문이라니 말이다.

중세의 유령 기마부대가 등장하니 고딕 소설처럼 흘러가지 않을까 싶기도 했는데, 재미있게도 너무도 현실적인 현재의 사건들과 적절하게 병행이 되어 잠시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과학 수사와 초자연적인 범행이라는 어려운 조합은 중세 시대 동물 유해 전문 고고학자라는 이력을 지닌 바르가스이기 때문에 허무맹랑하게 흘러가지 않고, 그럴 듯한 이야기로 탄생한다. 그리고 성난 군대와 별개로 벌어지는 사건 들도 매우 흥미롭다. 잔소리가 심한 아내의 목에 빵 속살을 처넣어 질식사를 시킨 노인이 있는가 하면, 주스 병으로 종조부의 머리를 때리고 달아난 여덟 살 여자아이도 있고, 비둘기 다리를 묶어놓아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죽게 만드는 놀이를 하는 이들도 있다. 재력가가 자동차에서 불에 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평소에도 방화를 일삼는 용의자에게 혐의가 집중되지만, 그의 결백을 믿는 아담스베르그는 진범을 잡기 전까지 그를 자신의 집에 숨겨주기까지 한다.

나는 명성으로만 듣던 프레드 바르가스의 작품을 이번에 처음 만났는데, 내가 이 작품에서 가장 좋아했던 점은 그녀가 인물을 묘사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니까 단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친근감을 불러 일으키는, 그래서 꼭 내가 그 인물을 잘 알고 있고 어디선가 만난 것 같다는 기분이 들게 만드는 것이다. 너무도 이상한 아담스베르그 서장 외에도 강력반 식구들 또한 그 못지 않게 개성이 넘친다. 동물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는 거구의 여장부, 모르는 게 없는 만물박사, 음식을 잔뜩 쌓아두어야만 안심이 되는 이도 있고, 수면과다 환자에 말끝마다 고전 시를 읊어대는 경위까지... 하나같이 독특하고, 색깔이 뚜렷하다. 그러니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어느 순간 거리 어디선가 걸어 다니는 그들을 알아볼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존에 국내에 출간되었던 그녀의 작품들이 모두 절판에 품절 상태라는 건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모중석 스릴러 클럽을 통해 그녀의 다른 작품들을 더 빨리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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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의 제자들 밀리언셀러 클럽 140
이노우에 유메히토 지음, 김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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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특정 장르의 책을 많이 읽다 보면 어느 정도는 내용의 전개가 짐작이 되는 경우가 많다. 소재와 간단한 플롯 정도만 알아도, 혹은 첫 문장을 읽거나, 첫 단락만 지나가도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은 전..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는 이야기를 따라 잡느라 두툼한 두께의 페이지가 언제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후다닥 읽어버린 것 같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내용을 전혀 짐작할 수 없는 독특한 제목과 바이러스라는 소재 덕분에 과학 소설처럼 이야기가 풀어지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웬걸 스릴러였다가, SF였다가, 호러 처럼 느껴지는 장면도 있고, 막판에는 액션 스릴러처럼 보이기도 했다. 신종 바이러스, 전염병으로 인한 공포 등은 기존에 다른 작품에서도 만날 수 있었던 장치이다. 그런데 이노우에 유메히토는 이것을 가지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말 그대로 기발한 상상력, 그리고 넘치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너무도 매력적인 작품이

애당초 교스케는 초자연 현상이니 초능력 따위와는 관련 없이 살아왔다. 불가사의한 일은 이 세상에 엄청 많다. 평범하게 생각하면 당장 믿을 수 없는 일이 때론 벌어지곤 한다.

하지만 그런 불가사의한 일을 단순히 ''라든가 ''이라는 단어를 붙여 결론짓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저 그래서야 사태를 피하기만 하는 게 아닌가. 설명이 안 되는 걸 전부 한 상자 속에 던져 넣는 셈이었다....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걸 직면하면 자신들을 넘어선 존재나 힘을 탓한다. 그건 결국 회피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여기에 오고 나서 그런 불가해한 일이 자기 몸에서 벌어져 버렸다.

주간지 기자인 나카야 교스케는 대학병원에서 원내감염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취재를 하려 하지만, 시설 내 통행허가증이 있어야만 출입할 수 있다며 길은 막혀 있고, 병원은 완전히 봉쇄된 상태이다. 주변에 몰린 보도차량의 수도 엄청났고, 노란색 가드펜스가 도로를 가로 질러 세워져 있고, 흰 방호복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병원 사이를 오가고 있는 등 마치 SF 영화의 한 장면이라도 보고 있는 듯 현실감이 없는 모습에 당황한다. 현재 격리된 류오 대학병원에는 환자, 방문객, 의사, 간호사 등 약 450명이 있고,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16명으로 늘어난 상황이다. 그는 병원에 들어갈 수 없으니 뭐라도 기삿거리를 찾기 위해 시청으로 향하는데 그곳에서 의대생 약혼자와 연락이 두절되어 걱정하던 메구미라는 여성을 알게 되고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런데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쪽으로 급변한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던 병원으로, 본의 아니게 들어가게 된 것이다. 바이러스 연구소의 연구생이던 약혼자 고바타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메구미에게서 열이 나고, 빨갛게 부풀어 오른 발진, 기침 등의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응급차를 호출하고, 카페에 다른 손님이 없었기에 카페 주인과 교스케, 메구미 세 명은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중 카페 주인은 이틀 후에 사망해버린다. 이후 교스케는 열흘 동안 의식불명상태가 된다. 그로부터 두 달 동안 감염으로 인한 사망자는 372명에 달했고, 어느 정도 유효한 백신이 만들어져 사망률을 조금 낮추고, 세간에서는 이 신종 전염병을 '용뇌염'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그 근저에는 자신이 믿어 온 상식이 뒤집히는 것에 대한 공포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초능력 같은 건 거짓말, 우화일 뿐이라는 상식 말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초능력에 대해서는 저희도 상식파였죠. 절대로 믿을 수 없다고.... 아니, 그런 바보 같은 얘기엔 관여하고 싶지도 않았죠.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나카야 씨와 연결이 되면서 어쩔 수 없이 저도 초능력과 관계되는 게 생기고 말았습니다.

신종 바이러스의 출현, 그로 인한 전염병 사태는 금방 진정이 되지만, 진짜 문제는 그 이후였다. 초기 감염자 중에 의식이 돌아온 것은 교스케와 메구미, 그리고 메구미와 고바타가 병문안을 했던 노인 오키쓰, 이렇게 세 사람이었는데 문제는 이후 그들에게 나타나는 말도 안 되는 증상들이었다. 우선 93세의 오키쓰는 의사소통도 잘 안 되던 노망난 노인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이가 실감 나지 않는 활기찬 할아버지로, 게다가 외모가 하루가 다르게 점점 젊어지고 있었다. 교스케는 갑자기 환각을 보기 시작했고, 메구미는 물체를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회춘, 예지력, 염력이라는 초능력을 가지게 된 이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세상과 소통하려 매스컴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지만 예상치 못한 사고는 비극으로 이어지고 이야기는 점점 엄청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간다.

바이러스라는 소재와 '마법사의 제자들'이라는 제목이 잘 매칭되지 않아 읽기 전부터 더욱 궁금했었는데, 책을 다 읽고 나서 제목이 만들어진 계기를 들으니 꽤나 그럴 듯하고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프랑스 작곡가 폴 뒤카의 교향시 '마법사의 제자들'에서 따온 제목이라고 하는데, 마법사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의 제자가 어설픈 마법으로 물바다 소동을 일으키고 만다는 내용이 바이러스로 인한 전염병이 세상을 초토화시키고, 이후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초능력이 등장해 더욱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책의 내용과 기묘하게 부합되어 제목의 특별함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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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드런 액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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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법원 가사부 판사 피오나 메이는 35년 동안 한눈 한번 판 적 없던 남편에게 충격적인 말을 듣는다. 여전히 피오나를 사랑하지만, 일에만 신경 쓰느라 성생활 없는 그녀와의 관계에 지쳤다며 죽기 전에 흥분으로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연애를 해보겠다고 말이다. 그들에게 아이는 없지만 그래도 서로 믿고 살아왔다고 생각했었기에 그녀는 충격이 크다. 피오나의 나이 59, 수많은 부부간의 갈등을 재판해왔지만, 그녀 자신이 그런 갈등을 겪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오나는 동료 판사들 사이에서 찬탄의 대상일 정도로 업무적으로는 완벽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남편과의 관계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오죽 하면 남편이 "피오나, 우리가 마지막으로 잠자리를 한 게 언제지?"라고 물었을까. 그녀는 생각한다. 언제였을까? 그제야 기억난다. 남편은 이전에도 같은 질문을 했었다는 걸. 처량하게 묻기도 했고 따지듯 묻기도 했었다. 오랜 시간 타인의 가정사를 들여다보고 조언하고, 판단하고, 결정했던 그녀가 그들과 하나 다를 것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자 그녀는 당혹스럽기만 하다. 그렇게 그녀가 수십 년 동안 지탱해온 결혼생활의 위기를 맞을 그 즈음, 한 소년의 생사가 걸린 재판을 맡게 된다.

"난 우리가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아. 안 그래?"

"떠나는 사람은 당신이야."

"우리 결혼을 깨트리려는 건 내가 아니야."

"그건 당신 말이지."

18세가 되기까지 3개월이 채 남지 않은, 17세 소년이 백혈병에 걸려 긴급 수혈을 해야 하는데 아이와 부모가 동의를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유는 아이와 그의 부모가 여호와의 증인이고, 혈액제제를 몸 안으로 받아 들이는 것은 그들의 신앙에 위배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 상황은 수혈을 할 경우 생존 가능성이 아주 높아지고, 수혈을 하지 않으면 죽을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 문제는 죽음의 방식이다. 내출혈이 일어날 수도 있고, 신부전의 가능성도 있고, 시력을 잃거나 뇌졸중을 일으키거나 합병증으로 무수한 신경질환을 앓을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끔찍한 죽음이 되리라는 사실뿐. 당연히 병원에서는 왜 수혈을 하지 않아 환자를 잃을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병원 측은 본인과 가족의 의사에 반해 적법한 절차로 수혈할 수 있도록 법원명령을 신청하게 된 것이다.

의료 선택의 자유는 성인의 기본적 인권이지만, 문제는 애덤이 아직 법률상 성인이 아니라는 데 있다. 물론 3개월만 지나면 18세로 법률상 성인이 되지만, 아이의 견해가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부모의 견해가 아닌지, 사이비 종교집단의 교리를 근거로 수혈에 반대하는 것이 자신의 견해가 맞는지 사람들은 의심할 수밖에 없다. 내일까지 수혈을 못 하면 매우 위험한 상태로 접어들 수밖에 없고, 피오나는 양측의 공방과 부모의 입장 만으로는 이 특별한 상황에 대해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해 직접 애덤을 만나보기로 결정한다. 자신의 상황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병원의 청구를 기각하는 판결을 내릴 경우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기로 말이다. 피오나는 애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마땅히 존중 받아야 할 신앙과, 치료를 거부할 권리에 내포된 개인의 존엄성보다 더 소중한 것이 생명이라고 판단하고, 그를 살릴 수 있도록 수혈을 통해 치료하는 것이 적법하다는 판결을 내린다. 극중 피오나가 읽어내는 판결문은 너무도 정확하면서 아름다워 페이지를 읽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케이크를 먹고도 계속 가지고 있을 수는 없다. 이 속담을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알겠어요. 우리 경우에는 케이크를 먹어버렸는데도 아직도 손에 케이크가 있는 거예요. 부모님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랐고, 장로님들 말에도 순종했고, 옳은 일은 모두 했으니까 지상낙원에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게다가 동시에 아들도 살렸잖아요. 가족 누구도 회중에서 이탈하지 않았고 말이에요. 수혈을 받긴 했는데 우리 잘못은 아닌 거죠! 판사를 비난하고, 하느님을 믿지 않는 체제를 비난하고, 우리가 가끔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을 비난하라는 거죠. 이런 구제방법이 있었다니! 아들이 죽어야 한다고 말했는데도 아들을 살릴 수 있었던 거예요. 그 아들이 바로 케이크인 거고요!

, 이 작품이 정말 흥미로운 건 여기까지가 작품의 중반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피오나의 판결로 애덤이 수혈을 받게 되어 건강을 회복하고, 가족들이 의외로 아들이 회복되는 모습에 기뻐하게 되는 것까지 말이다. 중요한 이야기는 이미 다 나와 버렸고, 그에 대한 판결까지 내려졌다. 그런데 피오나가 애덤을 살리는 판결을 하고 난 뒤, 상황은 전.. 예상 밖의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이어지는 작품의 후반부에 진짜 이야기가 들어 있다.

누구에게나 삶이 낯설어지는 순간이 오게 마련이다. 때로는 우리가 믿고 살아왔던 것들의 기준이 무너져 내리기도 하고,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기도 한다. 내가 모조리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어느 순간 타인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내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라고 자신했던 바로 그곳에서 함정에 빠져버리기도 하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전반부의 보여지는 종교의 법의 충돌, 개인의 가치관과 생명의 무게, 그리고 법의 테두리 안에서 판단하기 어려웠던 실제 사례들에 대한 스토리 만으로도 너무 훌륭한 작품이지만, 이언 매큐언의 진정한 장기는 후반부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법이라는 너무도 정..한 테두리 안에서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믿으며 살아온 한 여인이 어떻게 낯선 삶 속으로 던져 지게 되는지, 삶이란 매 순간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인지 보여주는 글은 담담하지만 묵직한 울림을 안겨준다.

몇 해전에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자신의 부인이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을 때 종교적인 이유로 수혈을 거부해 결국 아내를 죽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이후 남편은 교통사고로 사망했으니 보험사에 보험금을 요구했고, 보험사측은 살 수 있는 환자를 그렇게 죽게 만든 것은 남편의 책임이니 보험금을 줄 수 없다고 하고, 결국 재판까지 갔으나 보험사가 보험금을 줄 필요가 없다고 판결이 났었다. 여러 종교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를 내세우는 이 종교에서는 수혈이 꼭 필요한 경우에도 거부하다 죽는 경우도, 군입대를 거부하다 감옥에 가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종교적 신념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더 엄청난 거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이언 매큐언은 "아동의 양육과 관련한 사안을 판결할 때 (…) 법정은 아동의 복지를 무엇보다 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영국의 아동법과 개인의 자유인 종교적 신념에 관해 매우 치밀하게 잘 짜인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역시 이언 매큐언의 작품은 한 번도 실망 시킨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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