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유경의 아이 놀이 백과 : 3~4세 편 - 아동발달심리학자가 전하는 융복합 놀이 100 장유경의 아이 놀이 백과
장유경 지음 / 북폴리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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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발달심리학자 장유경 박사의 아이 놀이 백과 그 두 번째 이야기가 나왔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0세부터 2세까지 아이들의 월령 별 발달 단계에 맞춘 놀이들이 소개되어 있어, 나 같은 초보 맘들에게는 너무도 유용한 팁이 되어 주었었다. 어떻게 놀아줘야 할지 방법을 몰라서 아이와 적극적으로 놀아주지 못했던 나에게 다양한 놀이 목록들은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나 갓난아기부터 24개월까지 아이들의 놀이는 두뇌 자극 경험이라고 하니, 놀이를 통해서 부모와 친밀성 형성뿐만 아니라 시기 별로 아이에게 꼭 필요한 행동들이 포함되어 있어 더욱 유용했던 것 같다.

 

 

이번에 그 두 번째 이야기는 만3세에서 4세 아이들의 발달 영역별 놀이를 소개하고 있다. 아직우리 아이에게는 먼 그림 같지만, 사실 아이들이 자라는 건 눈깜짝할 사이라 미리 읽어두고 머릿속에 집어 넣어 두면 그 시기가 되었을 때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았다. 사실 24개월 이전의 아이들은 아직 움직임과 의사소통이 자유롭지 못하고, 5세가 넘어가는 아이들은 유치원, 초등학교 등 취학 준비로 벌써 바빠질 테니 말이다. 그 사이의 아이들에게 놀이가 가장 중요하고, 또 필요한 것이다.

 

 

이제 곧 돌이 되는 우리 아기는 엄마의 그림자처럼 어딜 가든 엄마 뒤만 졸졸 따라다닌다. 하지만 이 아이도 이삼 년만 지나도 슬슬 자기 또래와 어울리려고 하고, 고집을 부리기도 하고, 자시 스스로 하는 것에 더 관심을 둘 것이다. 미운 세 살, 네 살..이라는 말이 괜히 생겼겠는가. 지금도 가끔 떼를 쓰면서 울기 시작하면, 아이가 지르는 소리에 정신이 나갈 정도인데 말이다. 물론 그만큼 그 시기의 아이가 마음도, 몸도 성장하느라 그런 걸 테니, 그것을 마냥 억누르려고 하는 것은 당연히 좋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와 '함께' 하는 '놀이'가 정말 중요한 게 아닌가 싶다.

 

책은 네 가지 챕터로 나뉘어져 있는데, 구분되어 있는 챕터의 제목 자체가 아이의 발달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만 같다. 오감과 신체 발달을 위해 체험 놀이를 해야 하고, 소통을 위한 말문이 트이므로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활용하고, 관찰하고 탐색하며 논리적 사고가 발달하는 시기이므로 그 생각을 발달시켜 탐구하는 능력을 키워주고,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고 말로 표현할 수 있게 되므로 감성을 사회적으로 발달시켜 정서에 각인시키는 놀이가 필요하다.

 

 

2세만 되어도 구르고, 기고, 걷고, 뛰고, 점프하는 등의 다양한 이동 동작이 가능해진다고 한다. 그리고 만 3세경이 되면 그 움직임이 훨씬 더 자연스러워져 달리기나 기어오르기 등의 대 근육 활동이 가능해지고, 4세가 되면 더 긴 시간 동안 활동적인 놀이와 운동을 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그러니 이 시기의 아이들은 기본적인 움직임부터 스포츠 기술의 기초까지 다양한 신체 활동을 하기에 딱 좋은 시기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부분은 그림책 읽기 발달의 범주를 단계별로 나누어 놓은 부분이었다.

1단계:명명하기와 그림 설명하기

2단계:그림이 표현하고 있는 행동 말하기

3단계:대화체로 이야기 말하기

4단계:독백 형식으로 이야기 말하기

5단계:읽기와 이야기 말하기가 혼합된 읽기

6단계:책의 내용과 비슷하게 읽기

7단계:단어나 구절을 암기하며 읽기

 

태교를 할 때도 그랬고,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도 그랬고, 가장 큰 관심사가 아이와 함께 책보기이다 보니 단계별 그림책 읽기에 관한 이 대목은 매우 관심을 끌었다. 아이가 책을 참 좋아하는 편인데, 문제는 아직까지 책을 넘겨서 볼 수 있는 단계가 아니라 책만 보면 찢어서 입으로 가져가는 시기라 좀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말이다.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어른들이 그만큼 공부하고, 노력해야 하는 부분도 커진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있겠냐만은 아이를 키우는 것은 한 사람의 일생의 결정 지을 수도 있는 중요한 일이라는 걸 자각하고 있는 요즘이다. 그래서 이렇게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함께 할 수 있는 놀이에 대한 책은 언제 읽어도 반가운 것 같다. 아이와 공유할 수 있는 경험이 쌓이고, 함께 하는 시간이 있다는 건 매우 소중하고, 행복한 일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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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니문 인 파리
조조 모예스 지음, 이정임 옮김 / 살림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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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내 그림을 그리고, 또 아무도 나를 당신처럼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나는 당신 사람이었어요. 당신은 나의 가장 좋은 면만을 보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내가 아는 나보다 더 근사한 사람이 된 것 같았어요."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를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 아닐까. 당신으로 인해, 내가 이전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가는 것 같다는 그 느낌. 나밖에 모르던 내가 당신 덕분에 부모님을 챙기게 되고, 집에서는 설거지 한번 하지 않던 내가 당신을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요리를 하게 되고, 맨날 비슷한 옷차림에 유니폼이냐는 우스갯소리를 듣던 내가 난생 처음 하늘하늘한 원피스도 입어보고, 무뚝뚝한 전화 목소리 덕에 화난 거냐는 오해를 받던 내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평소에는 꿈도 꾸지 않던 상냥한 목소리로 통화를 하고 있고 말이다. 사랑은 이렇게 내 안에 숨겨져 있던 또 다른 나를 찾을 수 있게 해주는 감정이다. 얼마나 근사한가. 누군가로 인해 내가 미처 몰랐던 나 자신을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이. 그래서 우리는 사랑에 빠지는 순간 그것이 영원 불멸할 거라고 생각한다. 나의 그 어떤 단점도 모두 사랑하고 포옹해줄 것만 같은 이 사람이 영원히 내 곁에서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위대한 사랑의 완성이라고 생각하는 '결혼'이 사실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결혼 후 많은 사람들이 상대방에게 실망을 하기도 하고, 사랑은 변하는 거였다며 자조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랑과 결혼은 너무도 다른 세계이다. 물론 나도 직접 겪어 보기 전에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조조 모예스 2015년 신작 <허니문 인 파리> 2002년의 파리와 1912년의 파리에서 각각 허니문을 보내고 있는, 이제 갓 결혼한 신혼 부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매우 담백하게, 어쩌면 평범하게, 그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를.

"아무 이유 없이 파리의 작은 술집들을 어슬렁거리다가 자리를 잡고 앉아서 와인을 마시고 싶었어요. 당신이 내 손을 잡아주었으면 했어요. 우리가 만나기 전에 당신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당신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었는지 듣고 싶었어요. 내가 세운, 우리가 함께 지내게 될 인생 계획을 당신에게 다 얘기해주고 싶었어요. 섹스도 많이 하고 싶었어요. 많이요. 혼자서 갤러리를 돌아다니고 싶지 않았고, 모르는 남자들과 커피를 마시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저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말이에요."

2002년의 파리, 신혼여행 둘째 날, 건축가 데이비드는 일 관계로 잠깐 만날 사람이 있다며 한 시간만 혼자 다녀오겠다고 리브에게 양해를 구한다. 중요한 일이라고. 그러나 신혼 부부에게 신혼여행이란 일생에 단 한 번밖에 없는 특별한 순간이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니, 리브는 남편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혼자 파리를 돌아다니며 리브는 생각한다. 친구들이 그녀에게 서둘러 결혼했다가는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다고 농담 삼아 했던 그 말을. 왜냐하면 리브는 데이비드와 알고 지낸 지 석 달하고 열 하루 만에 결혼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녀는 데이비드가 일주일간의 파리여행을 제안한 순간부터 로맨틱한 신혼여행을 꿈꿨었지만, 그의 업무 미팅 때문에 일주일은 5일이 되고, 5일은 이틀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남편에게 서운하고, 외로워 마음이 점점 멀어져만 간다.

1912년의 파리, 부부가 된 지 이제 3주가 된 에두아르와 소피는 따끈따끈한 신혼 분위기로 알콩달콩해야 하지만, 당장 돈 걱정 없이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없는 형편이다. 돈보다 우정이 더 중요하다는 에두아르는 자신의 그림들을 쉽게 팔았지만, 소위 친구라는 이들이 그에게 돈을 주겠다고 약속만 하고 주지 않았기에 그들은 늘 경제 상태가 좋지 못했다. 신혼 기간은 한 달간 계속돼야 한다고, 한 달간 오직 사랑만 해야 한다는 그에게 소피는 자신이 남편의 친구들을 찾아가서 우리에게 빚진 돈을 달라고 잘 말해보겠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친구들은 그녀를 촌뜨기 점원 아가씨 아니냐며 먹고 사는 문제에만 관심을 갖는 것을 무시한다. 그것보다 더 문제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예술가 남편 주위에 있는 수많은 여인들이다.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해도 작품의 모델이 되어 주는 멋진 여인들과 초라한 자신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참을 수 없는 건 당신과 결혼한 거예요. 당신이 도대체 왜 신경이 쓰였는지 모르겠네요."

"이런, 소피, 어쨌든 당신은 혼자가 아니야."

2000년대와 1900년대 파리에서 허니문을 보내고 있는 두 부부의 일상을 통해 이제 막 결혼한 여자들의 심리 변화를 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인 백 년 전이든, 언제든 결혼이라는 것을 통과한 사람들의 모습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공감하게 될 것이다. 특히나 전작에 비해서 마치 단편처럼 느껴질 정도로 짧은 분량의 이 작품이 국내에서는 한국어판 스페셜 에디션으로 본문에 100컷이 넘는 파리 스냅 사진이 편집되어 있는 것이 멋지다. 실제 파리에서 허니문을 보낸 부부들의 추억들이 담긴 사진들은 데이비드와 리브, 에두아르와 소피의 이야기가 묘하게 잘 어우러져 로맨틱한 분위기를 한층 돋궈 주고 있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기 전이라면 자신의 '이상'을 확인할 수도, 결혼을 한 후라면 자신의 '현실'을 공감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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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스파이 폴리팩스 부인 스토리콜렉터 34
도로시 길먼 지음, 송섬별 옮김 / 북로드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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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지 않는 다는 건 매년 조사하는 연간 독서량만 봐도 알 수 있다. 성인 1인당 연간 독서량이 9.2, 0.76권이라고 하니 뭐, 점차 책을 읽을 만한 삶의 여유가 없다는 것도 있겠지만 스마트 폰을 비롯해 다른 즐길 거리가 많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출판업계가 불황이라고 하는 말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 이상할 정도로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 틈에서 베스트셀러는 항상 나오는데, 작년 한해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 요나스 요나손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고, 올 여름은 그 자리를 프레드릭 배크만의 <오베라는 남자>가 차지했다. 노년의 주인공들이 소설 분야에서 갑자기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는 재미있는 시점에, 이번에는 더 대단한 할머니가 등장했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노년들은 지하철에서 자리에 앉겠다고 임산부에게 비키라고 하거나, 공공장소에서 주위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 만큼 큰소리로 떠들거나, 관공서에서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는 사람들을 앞질러 먼저 하게 해달라고 사정하는 모습들이라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부분들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백세의 알란, 쉰 아홉의 오베, 그리고 육십 대 초반의 폴리팩스 부인에 이르기까지 이들 캐릭터들은 매우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걸로 그려진다. 그래서 심각한 상황에서도 여유와 유머를 잃지 않는 걸로 말이다. 그래서 더욱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들이 히트를 치고 있는 이 상황이 반가운 것 같다. 이들 책을 읽다 보면 현실에서도 이렇게 멋진 노년의 캐릭터를 만나볼 수 있게 될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어쩐지 서글퍼진 부인은 일어서서 복도에 걸린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아담한 체구에, 여성스럽고, 몸매는 포동포동하고, 머리카락은 거의 하얗게 셌고, 눈은 새파란, 작고 귀엽기는 해도 무슨 쓸모가 있을 것 같지는 않은 여자였다.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하나도 없는 걸까? 내가 뜻밖의 존재가 될 수 있는 분야는 없을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 불가능한 일이야.

"그래도 일단 한번 해보는 건 어떨까?" 폴리팩스 부인은 소심하게 내뱉었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얻을 수 있는 건 없지. 게다가 난 세금도 꼬박꼬박 내고 있는걸."

60대 중반이 된 평범한 할머니, 폴리팩스 부인은 어느 날 의사로부터 신체적인 건강은 나무랄 데가 없는데 약간의 우울증 징후가 있어 걱정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갈수록 찾아오는 자식들도 드물고, 봉사활동을 많이 하지만 그것도 즐겁지 않고 말이다. 남편이 먼저 죽은 뒤로 혼자 몸으로 아이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살아온 그녀는, 그저 오래 살기만 하는 것에 별다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의사는 말한다. 오래전부터 꼭 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못 하신 일은 없느냐고.

"어렸을 때는 스파이가 되는 게 꿈이었지."

폴리팩스 부인의 대답은 60대 할머니가 꿈이라고 내뱉기엔, 누구에게나 푹.하고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는 허황되어 보이는 그것이었다. 하지만 스파이가 되고 싶었던 폴리팩스 부인의 꿈은 농담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미뤄왔던 그 꿈을 직접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한다. 왜냐하면, 난간 끝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한 걸음 허공을 내디뎌서는 안 되는 이유가 단 한 가지도 떠오르지 않았고,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 뾰족한 이유를 알 수 없었기에. 어차피 살아야 하는 남은 인생이라면 뭐라도 변화가 필요했기에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상상이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실행한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기차를 타고 워싱턴으로 가 지역구 의원을 만나고, 이후 버스에 올라 CIA 신청사가 있는 곳으로 향한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가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혹시 스파이 필요 없으신가?"

담당자는 황당함에 입을 쩍 벌리고, 설마 진심이냐고 멍하니 중얼거린다. 너무도 진지하게, 진심어린 마음으로 말을 하는 할머니를 보고 그는 너무나 충격을 받아 스파이는 이렇게 무작정 찾아온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말을 하고, 다른 용건이 생기자 급하게 자리를 피해 버린다. 그리고 담당자의 착오로, 어쩌다 보니 그곳에서 임무를 맡게 된다. 활동하지 않은,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 중에 전형적인 미국인 관광객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특정 날짜에, 특정 장소에서 물건을 받아오기만 하면 되는, 전혀 요구 조건이 까다롭지 않은 비밀요원이라 생김새가 딱 들어맞아야 했는데, 마침 너무도 우연히 폴리팩스 부인이 담당자의 눈에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특별한 능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어느 동네에서나 만날 수 있을 법한 '평범한' 폴리팩스 부인은 그녀의 오랜 소원대로 스파이가 되어 멕시코로 떠나게 된다.

세뇌시킬 작정인 거야. 이런 생각이 들자 모욕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전혀 두렵지 않았다. 살아오면서 애도 낳고, 남편을 잃고, 병치레도 하는 등 갖가지 고생을 하면서도 존엄성을 잃어본 적이 없었다. 이제 부인은 가치 있는 일에는 많은 시간과 외로움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거의 죽을 정도로 말이다. 부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지만, 고작 날 죽이겠다는 것 말고는 들이댈 무기도 없는 사람에게 겁을 먹고 싶지는 않아. 어쨌든 난 숨길 게 없거든. 차라리 있었으면 좋겠어. 난 스파이도 아니야. 스파이 임무에 거의 성공할 뻔했는데 이 끔찍한 자가 나타나는 바람에 다 망쳐버리고 말았잖아.

특정한 날짜에 서점을 찾아가서 해야 하는 대사, 행동에 대해 숙지하고, 나머지 날짜에는 진짜 미국인 관광객처럼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도 된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 너무도 간단해 보이는 임무를 폴리팩스 부인이 제대로 완수할 수 있을까. 하지만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날, 비밀 요원인 서점 주인이 자리에 있지 않고, 다른 사람이 대신 있는가 하면, 어떻게든 임무를 완수해보려고 하던 폴리팩스 부인은 그곳에서 그가 준 차를 마시고는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지고 만다. 임무 완수는커녕 함정에 빠져 버리고 만 것이다 다시 깨어 났을 때 그녀는 알바니아의 감옥에 또 다른 비밀 요원과 함께 잡혀 있는 상황이다. 물론 스파이의 업무라는 것은 실패할 수도 있는 위험성이 언제나 뒤따르게 마련이다. 문제는 폴리 팩스 부인이 너무도 갑작스럽게 임무에 채용되다 보니 위급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도 듣지 못했고, 그에 대응할 수 있는 그 어떤 훈련도 받은 적이 없다는 거였다. 아무리 생기발랄하고, 스파이 일의 위험성을 자각하지 못하는 폴리팩스 부인이라 할 지라도 어쨌든 체력도 떨어지고, 약한 노부인이 아닌가.

이후 벌어지는 이야기는 황당무계하다고 느껴질 만큼 유쾌 발랄하다. 그녀는 공포에 굴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는다. 가만히 앉아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은 그녀의 성격에 맞지도 않았거니와, 쉽게 굴복하는 성격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스파이 일을 하고 싶다며 자신은 애를 둘이나 키웠고, 운전도 잘하고, 응급처지도 할 줄 알며, 피를 봐도 겁 안 내고, 응급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도 뛰어난 편이라고 무대포로 천진난만하게 이 일에 뛰어 들 때부터 알아봤지만 말이다.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저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폴리팩스 부인은 어느 순간 정말 '어른'처럼 보인다. 너무도 순진해서 어수룩해 보이다가도,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어른이 젊은 사람 앞에서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일로 불안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지'라고 세월만큼의 현명함과 노련함을 보이니 말이다. 너무도 명랑 발랄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불가의 엉뚱한 그녀라서 전형적인 모습의 스파이와는 한참 동떨어져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사랑스러워 보이는 스파이의 모습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나는 그녀가 남들이 비웃을 수도 있는 자신의 오랜 꿈을 위해 거침없이 돌진하는 그 모습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녀 앞에선, ‘나이가 많아 난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없어라는 말은 절대 안 통할테니 말이다. 그렇게 나도 언젠가 나이를 먹어 그 나이 즈음이 되었을 때, 그녀처럼 멋진 할머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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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다섯 번째 아내 블랙 로맨스 클럽
제인 니커선 지음, 이윤진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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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에서 가장 자주 거론되는 작가 중 하나가 바로 샤를 페로와 그림 형제이다. 샤를 페로의 <신데렐라>, <푸른 수염>, <빨간 모자>, <장화 신은 고양이>, <푸른 수염> 등과 그림 형제의 <개구리 왕자>, <백설공주>, <라푼첼>, <헨젤과 그레텔> 등등.. 재미있는 건 곰팡이가 피어 있을 것만 같은 낡은 이야기일 것 같은 이들 작품들이 동화와 호러 스릴러가 꽤나 어울린다는 걸 보여준다는 것이다. 게다가 동화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작품들은 소녀들부터 중장 년 여성들까지 매혹시키기에 충분하다는 것. 로맨틱하며 위험한 남자 주인공과 아름답고 순진한 여자 주인공의 조합은 소녀 풍 동화들이 성인용 드라마로 진화했을 때도 크게 어색하지 않으니 말이다.

이렇게 이상한 기분이 들다니, .... 기이한 일이다. 그 머리카락을 발견하고 이렇게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이 바보 같다. 따지고 보면, 윈드리벤 애비가 존재해 온 다양한 시기별로 여러 세대의 여성들이 이곳에서 살고 죽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당연히 인지하고 있는 바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내 후견인의 부인들이 모두 너무나 최근에 이곳에 살았다는 점과..... 그들의 머리가 모두 붉은 빛깔을 띠고 있었다는 점이다.

...... 모든 것이 과하게 느껴졌다. 마치 어떤 동화 속에서처럼 이 세계 전체가 화려함으로 뒤덮여 있지만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를 페로의 잔혹 동화 <푸른 수염>은 영화로 만들어 진 적도 있고, 아멜리 노통브를 비롯해 여러 작가들에 의해 소설로 변주되기도 했다. 그만큼 잔인하지만 매혹적이라 할만큼의 무언가가 담겨져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사실 플롯 자체가 치정극에 가깝기 때문에 현대물로 풀기에도 변주할 거리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어떻게 바꾸어도 변하지 않는 플롯은 이거다. 엄청나게 화려한 저택에 살고 있는 남자, 그리고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여자가 등장한다. 여자는 어떤 이유로 남자의 집에 가서 살게 되고, 남자는 외출하면서 대저택의 열쇠를 맡기면서 특정한 장소에는 가지 말라고 당부하지만, 호기심 가득한 여자는 금기 따위는 무시해버린다. 그곳에서 발견하게 된 것은 그 남자의 아내였던 여자들의 시체들이다. 그리고 위기에 처한 그녀를 구하는 것은 그녀의 가족들로, 다양하게 변주가 되어도 이 틀은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제인 니커선의 이 작품은 노예 제도가 살아 있던 19세기 미국으로 가져와 부유한 대부이자 후견인의 초청으로 그의 대저택을 방문하게 된 17살의 아름다운 소녀와 매력적이지만 다혈질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40대 남자 사이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소피아가 대여섯 살 때 변호사인 아버지의 고객이자 친구였던 버나드는 그녀가 미성년일 때 아버지가 죽게 된다면 자신이 법적인 보호자가 되겠다고 나선다. 아버지는 그렇게 되면 최소한 소피아라도 부족함 없이 살 거라고 그걸 허락했고 말이다. 몇 달 전, 소피아의 아버지가 죽었고 그녀의 가족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태였다. 그 때 버나드 씨가 자신의 저택으로 그녀를 초대한다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물론 그녀는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그가 홀아비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소피아가 그를 처음 본 인상은 이랬다. <내 속의 모든 것이 소용돌이치는 기분이었다. 내 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은 여태껏 본 중에 가장 잘생긴 남자였다> 라고. 그 동안 상상으로 부풀어진 이미지에, 직접 와서 보게 된 어마어마한 저택에 압도된 어린 소녀는 마치 사랑에 빠진 것처럼 그렇게 그를 만나게 된다.

나는 버나드씨가 내 손을 쓰다듬거나 그의 입술이나 뺨으로 내 손을 가져가는 행동을 허락했다. 그런 애정표현이 그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없는 "프랑스식" 행위이리라고 치부했다. 게다가 나는 그에게 홀딱 반했을 뿐 아니라 그를 진정 사람으로서 좋아했다. 물론 때때로 그의 눈빛에 뭔가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있기는 했다. 그는 어쩌면...... 위험한 사람일 수도 있겠다. , 왜 그런 표현이 머릿속을 스쳤을까? 어쩌면 그 표현이 어울리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버나드 씨는 호랑이를 연상시켰다.... 늘씬하고 벨벳처럼 부드러운 존재였으며 미소를 짓지만 위험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매우 매력적이었다.

소피아는 그곳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지려고 애쓰며 일상을 가족들에게 자주 편지로 보냈지만, 가족들로부터 답장은 전혀 오지 않는다. 저택의 주인인 버나드씨와는 함께 식사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얼굴 보기도 힘들고, 그곳에서 그녀가 할 일이라고는 산책을 하거나 승마하기, 바느질, 피아노 연주, 독서 등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매일의 시간을 채워 보내기 위해 은밀히 이곳 저곳 다니면서 저택을 둘러보고 시작한다. 너무도 커다란 저택이라 활용되고 있지 않은 층들도 있고, 사용되지 않고 있는 통로도 있고, 여기저기 과거 수도원의 유물들도 많아 호기심 많은 그녀의 시간을 가득 채워준다. 그러면서 그녀는 버나드씨의 전 아내들에 대한 흔적을 하나 둘 씩 찾아내어 그들의 정체에 대해 이런 저런 상상을 해본다. 네 명의 전 아내들이 모두 자신처럼 빨갛다고 묘사될 수 있는 머리를 갖고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리고 점점 버나드씨의 다혈질적인 성격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갑자기 분노를 드러내거나, 어느 순간 화를 내거나 급변하는 그의 눈치를 보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로맨틱한 긴장감은 매우 천천히 진행되고, 별다른 사건도 없이 매일매일이 흘러간다. 책을 읽는 우리는 홀아비인 그가 왜 어리고 예쁜 소피아에게 잘해주는지, 왜 그녀를 이곳에 와서 살게 했는지 모두 알지만, 우리의 순진무구한 주인공은 그것을 깨닫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린다. 버나드씨 또한 전혀 서두르지 않고, 그가 마침내 속내를 드러내어 소피아에세 자신의 아내가 되어 달라고 말하는 순간은 무려 이야기가 70프로 이상 진행된 시점이다. 그제야 이곳에서 정말로 도망가고 싶다고 깨닫는 소피아의 자각 덕분에 그 이후에 진행되는 스토리는 나름 긴장감이 부여되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스토리가 너무 천천히 진행되어 이 작품이 로맨스인지, 미스터리인지 감을 잡기가 어렵다.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풍경 묘사와 집주인의 비밀스런 전 부인들에 대한 상상은 매혹적이지만, 샤를 페로의 원작이 동화 치고 꽤나 잔혹했던 충격에 비하면 이 작품의 스토리는 부드러운 편이다. 아무래도 작가는 원작의 소름 끼치는 잔혹성보다는 고풍스럽고 우아한 동화를 그리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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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블 이야기
헬렌 맥도널드 지음, 공경희 옮김 / 판미동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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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었던 제임스 에이지의 <가족의 죽음> 또한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버지가 죽고 나서 남겨진 가족들이 슬픔을 견디는 방식에 대해 그리고 있는 작품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너무도 다른 색깔로 그린 두 작품을 비슷한 시기에 만나게 되어 비교하면서 읽는 맛도 있었던 것 같다. 이 작품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자연을 누비며 매잡이가 되려는 꿈을 키웠던 저자가 아버지가 갑자기 죽고 나서 그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야생 참매 메이블을 길들이며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견뎌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아빠는 반은 언짢고 반은 재미있어 하는 심정으로 날 내려다보며인내심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가장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하면서. 뭔가 아주 간절히 보고 싶어서 때로 가만히 있어야 할 때는, 같은 자리에 있어야 할 때는, 그것이 얼마나 보고 싶은지를 기억하고 참아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신문에 실어야 할 사진을 촬영할 때면, 가끔 내가 원하는 장면을 찍기 위해 몇 시간씩 차 안에 앉아 있어야 하는 때가 있단다. 차를 마시러 가거나 심지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날 수도 없지. 그냥 인내해야 되는 거야. 매를 보고 싶으면 너도 참아야 해.”

가족이 죽는 경험은 살면서 누구나 겪게 되는 상실의 슬픔이기도 하다. 물론 그것을 견디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고 말이다. 제임스 에이지가 아버지의 죽음 이후 며칠 동안 가족들의 심리 묘사에 치중했다면, 헬렌 맥도널드는 야생 참매를 길들이는 모든 과정을 세세하게 기록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논픽션계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새뮤얼존슨상을 수상한 것만 보아도, 이 작품이 진행되는 방식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표지 조차 참매가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고, 제목 또한 헬렌이 매에게 붙여준 이름인 '메이블'이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허구화된 '픽션'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을 그리고 있는 '논픽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이 '소설'을 읽는 것처럼 흥미진진했고, 감동적이었다. 매를 통해 상실의 아픔을 치유해 가는 과정은 담담하면서도 묵직한 무언가를 남겨 주었기 때문이다.

영어 단어 중에 '사별'과 관련된 단어는 모두 '없다, 빼앗다, 훔치다, 강탈하다'라는 뜻의 고대 영어에서 나온 거라고 한다. 죽음을 통한 이별은 마치 무언가를 강탈당한 것처럼, 혹은 빼앗긴 것 같은 감정이라는 말이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그러나 남들과 공유하거나 나눌 수는 없는, 오로지 개인적인 감정이고 말이다. 헬렌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세상이 여전히 전과 같이 돌아간다는 것이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다. <몇 주간 나는 둔하게 달궈진 쇳덩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꼭 그런 느낌이었다. 달군 쇳덩이 같아서, 오히려 몸은 차디찬데도 침대나 의자에 몸을 눕히면 온몸이 곧바로 활활 타 버릴 것만 같았다.>라는 표현은 그녀의 상태를 마치 눈으로 보는 것만큼 체감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 가족을 잃어 버린다는 것은 이런 느낌이구나. 이렇게 세상 자체가 슬픔에 젖어 버리고, 나라는 존재가 그 속에 빠져서 정상이 아닌 상태가 되는 거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나에게도 언젠가 닥쳐올 그 순간이 두려워지기 까지 했다.

나는 엄마가 아기에게 밥을 먹이듯 나도 모르게 팔을 뻗어 매와 함께 꿩의 털을 뽑기 시작한다. 매를 위해서. 메이블이 먹기 시작하자, 나는 쭈그리고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본다. 찬찬히 살핀다. 깃털이 날려 산울타리 밑으로 떠다니다가 거미집과 가시 돋은 가지에 걸린다. 발톱의 붉은 피가 마르고 굳는다. 시간이 흐른다. 햇빛의 축복. 바람이 엉겅퀴 줄기를 흔들다 잦아든다. 그리고 나는 울기 시작한다. 소리 죽여서.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린다. 꿩 때문에, 매 때문에, 아버지와 그의 인내심 때문에, 울타리 옆에 서서 매들이 오기를 기다리던 그 어린 여자애 때문에 운다.

어릴 때부터 사진 저널리스트인 아버지와 함께 자연을 누비며 매잡이가 되려는 꿈을 키워온 헬렌은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참매를 분양 받고, 그 매에게 '메이블'이란 이름을 지어준다. 그녀는 참매를 훈련시키면서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을 치유하고, 절망감에서 벗어나 서서히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간다. 참매는 개나 말처럼 사교적인 동물이 아니어서 강압이나 체벌을 이해 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니 매를 길들이는 유일한 방법은 먹이를 선물하는 긍정적인 강화를 통하는 길뿐이라고. 야생의 두 눈, 줄에 매인 매가 분노와 공포로 인해 거칠게 몸부림 치는 몸짓, 어린 매가 그녀의 손에 앉아 원색적이고 방어적인 공포 속에서 먹이를 발치에 두고 있는 그 순간, 매를 길들이려는 주인은 그 순간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의 상태여야 한다. 움직이는 앉는 매는 최대한 잡아당긴 새총처럼 긴장하고 흥분한 상태, 공포와 먹이 사이의 공간, 마비되고 꼼짝 못하는 둘의 마음을 어떻게든 끈으로 이으려고 하는 순간은 너무도 생생하고, 긴장감 넘치고, 어느 순간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저자인 헬렌 맥도널드는 역사학자이자 동물학자이기도 하고, 전문적인 매 조련사로 유라시아 전역에서 펼쳐진 맹금류 연구와 보존 활동에도 참여했다. 독특한 이력만큼이나 이 책은 야생 참매를 길들이는 과정을 상세하게 그리고 재미있게 그리고 있다. 야생 참매 따위 전혀 관심도 없었는데, 이 책을 읽는 동안 우와. 싶은 순간이 꽤 많이 있었으니 말이다. 동물과 인간의 교감, 자연 속의 어우러짐, 죽음과 애도, 그리고 상실과 치유... 어떻게 야생 참매를 길들이는 순간을 슬픔을 다스리는 과정으로 그려낼 생각을 했을까 싶을 정도로 탁월한 은유와 상징이 넘쳐난다. 누구에게나 아버지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각별히 가깝고, 누군가는 남처럼 무관심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애틋하게 가슴에 돌처럼 박혀 있기도 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를 가진 이들에게, 이 작품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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