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계획
발렝탕 뮈소 지음, 전미연 옮김 / 느낌이있는책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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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뮈알... 테오가 그간 자신의 삶에서 완전히 밀어내고 지워 버린, 무의식 깊숙이 묻어 두었던 사람이다. 인생의 한 토막을 싹둑 잘라낼 수 있는 그의 놀라운 능력이 여기서도 어김없이 발휘된 덕이다. 그는 여태껏 과거나 감정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미래지향주의자라고 스스로 자부해왔다. 그런 그가 여기에 와 있는 것이다. 그 빌어먹을 과거, 그것과 맞서겠다면서.

어딘가 익숙한 설정이다. 결코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고, 친하다고는 볼 수 없는 친구들이 모여 산행을 하게 되고, 산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의외의 상황들은 그들 중 누군가에게 다른 속셈이 있다는 이야기. 현재 산행을 하게 되는 친구들의 상황에 이어 과거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일의 실체가 밝혀지는 것이 교차 구성되어 있고, 서로를 믿지 못하는 친구 아닌 친구들의 관계는 점차 금이 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익숙한 설정이라고 해서 이야기까지 뻔할 필요는 없다. 발렝탕 뮈소는 누가 기욤 뮈소 동생 아니라고 할까 봐 페이지 터너 다운 면모를 선보인다. 책장이 빨리 넘어간다는 건, 그만큼 독자들에게 몰입할 거리를 준다는 말이고 지루할 틈이 별로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과거에 벌어진 어떤 사건이 결국 현재 이들의 일생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인과응보처럼 느껴질 수도 있으나, 사실 그것은 오로지 신만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그 역할을 인간이 하고 있다는 것. 그것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완벽하게 설정된 계획을 통해서 말이다.

테오와 도로테는 2년 동안 커플로 함께 살고 있다. 돈과 사치를 좋아하는 도로테와 사람을 대놓고 무시하는 것이 습관이 된 테오는 로뮈알의 초대로 한적한 산 속의 산장에 도착한다. 로뮈알은 한 때 테오와 절친한 친구였으나 연락이 끊겼다가 십여년 만에 우연히 카페에서 마주치게 됐다. 그의 갑작스런 산행 제안으로 테오와 도로테 커플, 그리고 테오의 친구 다비드와 쥘리에트 커플이 함께 주말 산행을 하기로 한다. 악명 높은 피레네 산맥에 모인 이들 중에 유일하게 산에 대해 아는 것은 로뮈알 뿐, 나머지 멤버들은 완전히 산행엔 초보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관계가 어딘지 처음부터 삐걱거린다. 로뮈알을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라 반가워하는 것 같지도 않은 테오는 대체 왜 그의 초대에 응한 것이며, 그와 도로테의 관계도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고, 신경성 거식증 환자인 쥘리에트는 험한 산행을 견뎌낼 체력이 되는 것인지, 다비드와 테오의 사이는 가까워 보이면서도 서로 배려하지 않는 이상한 친구 사이로 보인다.

의식이 뿌연 세계 속을 유영하자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실타래처럼 엉키기 시작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의식을 뒤덮은 뿌연 안개가 세상에 대한 그의 지각을 왜곡시키는 순간, 이상하게도 서서히 다른 영역이 열리기 시작했다. 집요한 의문들이 고개를 들었다. 명징한 의식과 이성에 가려 그 동안 분명하게 표현되지 못하고 있던 의문들.

이상한 디테일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간 단순한 의구심에 머물렀던 것들이 끈질긴 의혹으로 바뀌었다. 딱 봐도 알 수 있는 로뮈알의 아마추어리즘..... 길을 잘못 들질 않나, 지도를 두고 오질 않나, 하네스를 준비하지 않은 건 또 어떻고...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니까, 이들의 산행은 시작부터 이상한 조짐들이 여기저기 복선처럼 깔려 있었던 셈이다. 게다가 산행 시작부터 테오는 갑자기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쥘리에트는 예상했던 대로 위태로워 보인다. 그녀가 다칠 뻔한 것을 구한 계기로 테오는 상처를 입고, 다비드와 다툼이 일어나고, 갑작스런 기상악화로 엄청난 소나기를 만난 그들은 원래 일정대로 가지 못하고 동굴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긴박감 넘치게 진행되는 현재의 스토리 중간중간 과거 테오와 로뮈알이 처음 만나던 학창 시절의 에피소드가 교차되어 보여진다. 홀어머니와 함께 어렵게 자라온 로뮈알은 우연한 계기로 평소 꿈도 꾸지 못하던 명문 고등학교의 학생이 되고, 그곳에서 부유한 집안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아온 테오를 만나고 그와 가까워진다.

테오와 로뮈알, 그들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어떻게 해서 세상 무서울 것 없었던 테오가 과거의 발목에 잡히게 된 건지, 과연 로뮈알이 산행을 계획한 진짜 목적은 무엇인지, 그리고 십 여년 이나 연락을 끊고 살아왔던 로뮈알의 초대를 선뜻 받아들인 테오의 속마음은 뭔지는 직접 이야기를 읽어보아야 한다. 아마도 앉은 자리에서 첫 페이지부터 끝 페이지까지 자신도 모르게 달려가게 될 테니 말이다. 그만큼 몰입감이 좋고, 긴장감 넘치는 군더더기 없는 전개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물론 반전을 위한 추리소설이 아니기에 어느 정도 예상된 결말에 이르기는 하지만, 그것에까지 다다르는 솜씨는 매우 뛰어나서 발렝탕 뮈소의 다른 작품을 기대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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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 없는 한밤에 밀리언셀러 클럽 142
스티븐 킹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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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근본이 대개는 착하다고 믿는` 스티븐 킹의 소설 속에서 언제나 무시무시한 등장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지만, 때로는 이렇게 피도 눈물도 없이 밀어 붙이는 이야기가 재미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언제나 스티븐 킹은 `역시`라는 감탄사를 끌어내는 멋진 작가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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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감 - 샤오미가 직접 공개하는 창의성과 혁신의 원천
리완창 지음, 박주은 옮김 / 와이즈베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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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오미의 '대륙의 실수 '시리즈는 휴대용 보조배터리, 이어폰, 스마트 밴드, 휴대용 스피커 등 IT액세서리로부터 스마트 체중계, 액션캠, 프로젝터, 미니드론, 공기청정기, 스마트 정수기, TV, 스마트폰에 이른다. 홈쇼핑TV와 인터넷 쇼핑사이트에서도 완판 행진을 이어가고 있고 자주 품절이 되어 구매하려면 한참 기다려야 하는 제품도 있다고 한다. '대륙의 실수' '혹시 가격담당 직원의 실수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격은 낮고, 성능과 디자인은 탁월한 중국제품. 속칭 가성비(가격대비 성능비)가 높은 중국제품을 일컫는 말인데, 재미있는 용어만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안 될 정도로 국내에서 열풍이 불고 있으니 아이러니한 상황이기도 하다.

샤오미는 창업 첫해에 두 가지 사실을 증명했다. 사용자의 참여로 더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과, 좋은 제품은 입소문을 통해 더욱 널리 퍼진다는 것. 이 두 가지는 그대로 샤오미의 핵심 이념이 되었다. 사용자와의 상호교류로 더 좋은 제품을 만들고, 입소문을 통해 마케팅의 파급력을 높이는 것. 우리는 사용자의 참여감을 통해 제품의 연구개발, 마케팅, 보급, 고객서비스를 완성하고, 샤오미를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멋진 브랜드로 만들고자 한다. 샤오민의 발전 과정을 이끌어온 이념은 "사용자를 친구로".

이들이 말하는 참여감 3·3법칙이란, ‘폭발적 인기상품이란 제품전략, ‘직원들이 먼저 팬이 되는사용자전략, ‘스스로 미디어가 되는콘텐츠전략이다. 기업과 사용자가 윈윈할 수 있는참여의 마디를 개방하고, 서로가소통하는 범위와 깊이를 디자인하며, 결정적으론입소문 사건을 확산한다는 것인데, 이건 분명 삼성이나 애플과 분명히 구분되는 전략이 아닌가 싶다. 고사양의 제품을 저렴하게 만들어서 팔기는 하지만, 분명한 자신들만의 생각을 밀고 나간다는 것이다. 한 가지 요소에 집중하여 업계 최고가 되면 놀라운 속도로 사용자 규모가 늘어날 것이다. 직원들이 먼저 팬이 되면 사용자 관계에서 신뢰가 쌓일 수 있다. 사용자들이 직접 콘텐츠를 생산하도록 유도하면 콘텐츠가 전파되는 속도에 깊이가 생긴다. 이렇게 3가지 전략이 기업과 사용자 쌍방이 이익을 얻도록 개방하고, 상호교류 방식을 지속적으로 개선시키고, 핵심 사용자 집단을 확보하는 3개의 전술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당연히 '짝퉁애플'이라고 불렸다고 한다(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었나 보다)

“우린 짝퉁애플이 아니야. 구글·애플·아마존을 결합한 트랜스포머라고.”

‘기업중심형 혁신은 끝났다는 것이 샤오미의이즘이다. 이들이 말하는 참여감은 기능을 재고 브랜드를 보고 체험하던 단계에서 사용자가 직·간접적으로 제품에 관여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뜻이기도 하다.

『경쟁의 미래』를 쓴 프라할라드는기업중심형 혁신은 이제 끝났다고 말한다. 소비자들은 유일무이한 개인이 가치를 창조하는 과정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더욱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기업도 새로운 조직구조로 개편되어야 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참여감이다. 참여감은 이제 소비자의 수요가 크게 달라졌다는 것과, 소비자의 수요가 제품의 물적 속성에 갇히지 않고 사회적 속성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물건을 구매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것이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내가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즉 그 제품을 통해 내가 어떤 새로운 체험에 참여할 수 있는가를 의미한다.

우리 집에도 샤오미 체중계가 있다. 아마 다들 샤오미 제품 한 두 개쯤은 가지고 있지 않을 까 싶을 정도로 요즘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사실 처음에는 너무도 심플한 디자인을 보고 짝퉁애플이 아닌가 싶었는데, 직접 제품을 써보니 그게 아니었다. 매력적인 디자인과 말도 안 되게 합리적인 가격인데도, 성능이 너무 좋았던 것이다. 중국산은 싸구려 아니면 금방 고장이 나는 형편없는 제품이라는 고정관념을 깬 샤오미의 성공법칙을 창립자인 리완창이 직접 밝히고 있는 이 책은 대체 어떻게 샤오미라는 브랜드가 국내 소비자들을 점령하게 됐는지에 대한 답을 들려준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샤오미, 대륙의 '실수'인지 '실력'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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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하드보일드를 읽는다 김봉석의 하드보일드 소설 탐험 2
김봉석 지음 / 예담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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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다른 사람의 리뷰를 굳이 찾아서 읽지 않게 되었다. 너무 줄거리 요약만 하는 글은 지루하고, 그렇다고 자기 감상에 빠져 작품과 관계없는 내용만 이어지는 글은 재미가 없고, 지나치게 분석적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들을 늘어놓는 글은 목적이 리뷰가 아니라 잘난 체 같아서 볼 필요성을 못 느낀다. 뭐 그렇다고 내가 쓴 리뷰를 다시 읽어보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책을 열심히 읽고 리뷰를 쓰는 것은 아직 그 책을 읽지 않은 미지의 독자에게 책을 소개하는 목적이기도 하지만, 스스로에게 책을 기억하기 위한 메모를 남기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리뷰를 읽게 되는 건 아주 최소한이다. 그렇지만, 가끔 전혀 관심이 없던 책인데 우연히 보게 된 리뷰 때문에 구매하게 되고, 결국 그 작가의 팬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몇몇 리뷰는 꾸준히 챙겨보게 되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김봉석 평론가의 글이다. 그의 글이 매번 감탄을 자아내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몇몇 글들은 기어코 책을 구매하게 만드니 말이다.

책을 볼 때, 제일 먼저 표지를 본다. 다음은 뒤 표지를 보고 작가 소개와 차례 순으로 넘어간다. 존 하트의 <아이언 하우스>를 봤을 때, 표지에 적힌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지옥이라도 가겠다"라는 문구에 혹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 중 하나는 연인이나 가족 등 무엇인가를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이야기다. 절망적인 상황이라면 더욱 좋다. 영화 <맨 온 파이어> <킬 빌>처럼.

    -'누구도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도망칠 수 없다' 존 하트의 <아이언 하우스> 서평 중에서

이 책은 영화평론가이자 대중문화평론가 김봉석의 하드보일드 소설 서평 집으로, 2012년 출간된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을 잇는 두 번째 권이다. 이 책을 위해 새로 쓰여진 건 아니고, 기존에 그가 범죄소설 서평을 연재하는 분량의 모음집 정도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그는 하드보일드가 일종의 애티튜드, 태도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세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 내가 진리를 알고 있다며 마구 판결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일단 물러나서 지켜보는 것... 그리고 결국은 '태도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사실 그의 글보다, 이런 그의 생각과 태도가 더 마음에 든다.

언젠가 오프라인에서 그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생각보다 참 말을 두서 없게 하셔서 살짝 놀란 적이 있다. 하긴 글을 잘 쓰는 사람이 꼭 언변까지 좋다는 법은 없으니까. 알고 계신 사실은 많은데, 그걸 조리 있게 전달하는 건 좀 서툴어 보여 오히려 인간적으로 보였달까. 그가 가지고 있는 이름값이 있으니 같이 갔던 친구는 기대했던 강연이 지루하다며 투덜거렸지만, 나는 뭐 나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여성 탐정을 상상해보자. 경찰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가 묻는 말에 답할 의무는 없다. 심증이 있다 해도 용의자나 참고자로 강제 소환할 수도 없다. 물리력으로 굴복시키지 않는 이상은. 그러니 탐정이라면 자신만의 장점과 무기가 있어야 한다. 뛰어난 증거 수집력과 두뇌, 웬만한 상대와는 싸워 이길 수 있는 물리력도 갖춰야 한다. 새러 패러츠키가 쓴 <제한 보상>의 주인공 V.I. 워쇼스키 역시 그렇다. 얼 스마이슨이라는 깡패 두목이 똘마니 둘을 보냈을 때, 워쇼스키는 그들을 꽤 고생시킨다. 갈비뼈도 부러뜨리고 최대한 저항을 한다.

               -'현실을 직시하고 정면으로 맞서라' 새러 패러츠키의 <제한 보상> 서평 중에서

이 책에 실린 서평 도서 중에 읽지 않은 책 한 두 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미 읽은 책이라 글을 읽는 재미가 있었다. 내가 바라보는 시각과 그의 시각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보는 맛도 있었고, 색다른 견해로 흥미로울 때도 있었고 말이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책들이라 서평의 글 내용 자체보다는 멋진 제목들이 더 눈에 들어왔다. 몇 가지 골라보자면 이런 식이다.

허술한 사회가 괴물을 키워낸다(지우, 혼다 테쓰야)

잔인한 세상, 그러나 어딘가에 인정이 있다(귀동냥, 나가오카 히로키)

때로는 직관이 증거보다 낫다(데드 조커, 안네 홀트)

지옥 속에서도 알고 싶은 것은 진실(IN,기리노 나쓰오)

책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기도 하고, 분위기를 읽어내기도 하고, 호기심을 자아내기도 하는 멋진 제목들이다. 책을 홍보할 때도 카피가 중요하듯이, 사실 서평도 제목이 꽤나 중요하다. 쏟아지는 무수한 글들 속에서 누군가에게 읽힐 운명의 글이 되려면 눈에 띌 만큼 인상적이어야 하니 말이다.

하드보일드가 무엇인지 궁금하신 분들, 하드보일드 소설을 읽어보고 싶은데 어떤 작품을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는 분들, 그리고 이미 너무 많은 하드보일드 소설들을 만나봤기에 다른 사람의 견해가 궁금한 분들에게 이 책이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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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다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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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에 <어둠의 저편>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이 책은 내게 굉장히 모호한 이미지로 남겨져 있다. 마치 등장 인물의 행동이 지문으로 설명되어 있는 연극 대본 같기도 했고, 영화 시나리오 분위기며, 카메라 같은 시점 또한 난해하고 어렵기만 했다. 그래서 다른 하루키의 책들과 달리 대충 읽고 어딘가 던져 놓았던 기억이 난다. 당시의 나는 직장 초년생으로 매일매일이 전쟁 같이 바빴고, 퇴근 후에는 또 연애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와중에도 틈틈이 책을 읽기는 했지만 스토리가 뚜렷하고, 캐릭터가 명확한 이야기만 즐겨 읽었다. 왜냐하면 그래야 두서 없는 내 일상이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분명해지는 것 같았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이 책은 감각적인 일러스트와 세련된 제목을 달고 개정판으로 다시 출간되었고, 마냥 스스로에게 집중하며 살던 직딩에서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다. 그만큼의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이 작품은 내게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다가왔다. 그건 어쩌면 내가 나이를 그만큼 먹어가면서 달라진 시선의 깊이 차이일 수도 있고, 그 동안 쌓아온 독서 이력으로 보는 눈이 달라진 걸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이렇게 다시 출간되지 않았더라면, 내게 이 책은 평생 모호한 이미지로만 기억됐을 거라는 점이다. 당시에 대충 읽고 던져둔 이후로, 벌써 몇 번의 이사와 책 정리 시간을 거쳐왔던 탓에 책을 다시 찾을 수는 없었지만, 새로운 옷을 입은 이 책만 산뜻하게 기억해도 좋을 것 같다. 다시 만난 이 책 속의 무라카미 하루키는 여전히 근사했다.

방 안은 어둡다. 하지만 우리 눈은 차츰 어둠에 익숙해진다. 여자가 침대에서 자고 있다. 아름다운 젊은 여자, 마리의 언니 에리다. 아사이 에리.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어째선지 알겠다. 어두운 물이 흘러 넘친 양 검은 머리가 베개 위에 펼쳐져 있다.

우리는 하나의 시점이 되어 그녀를 보고 있다. 어쩌면 훔쳐보고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시점은 공중에 뜬 카메라가 되어 방 안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작품은 이렇게 누군가를 관찰하는 우리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소설의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니라 마치 영화의 카메라처럼 말이다. 이야기는 밤 11 56분에 시작해서 아침 6 52분에 끝이 난다. 어두운 한밤중부터 새벽이 밝아오기까지의 그 몇 시간 동안 우리는 마리와 에리, 두 자매를 관찰한다. 심야 레스토랑 데니스에서 책을 읽고 있는 소녀 마리는 언니 에리의 고등학교 동창인 다카하시를 만난다. 형제가 없는 그는 형제라는 것이 어디까지 비슷하고 어디서부터 달라지는 건지 궁금해한다. 한 자매라도 인생을 사는 자세가 꽤 다를 수 있고, 외모며 성격이며 판이하게 다를 수 있으니 말이다. 똑똑하지만 언니에게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동생 마리와 너무도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는 언니 에리는 언젠가부터 사이가 멀어진 상태이다. 게다가 에리는 한동안 계속 '잠들어'있는 상태이다. 뭐랄까. 마치 죽은 것처럼 말이다. 얼굴 근육 하나,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는, 그저 순수한 ''의 형태로 완결되어 있다.

어두운 방, 죽은 듯이 침대에 누워있는 아름다운 소녀, 전원 플러그가 꽂혀 있지 않은 텔레비전 화면. 차갑게 한밤중의 침묵을 지키고 있어야 할 텔레비전은 죽지 않았고, 특정한 영상을 내보이기 시작한다. 화면 에는 어느 방의 내부가 비춰져 있고,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다. 선명하지 않은 화면에서 보여지는 이상한 기운.

그 방에서 분명히 무슨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다. 십중팔구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뭔가가.

동생 마리가 러브호텔 알파빌에서 만나게 되는 중국인 매춘부, 왕년의 레슬러, 중국인 조직, 기묘한 이름의 종업원들을 겪는 모험보다 언니 에리를 둘러싼 주변의 변화가 더욱 기묘하다. 하룻밤 동안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대화를 하고, 거리를 방황하는 마리의 이야기가 더 생동감 넘치고 궁금증을 자아내는데, 두 달째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에리의 상황이 더 수수께끼 같은 것이다. 예전에 이 작품을 만났을 때는 특히 에리가 등장하는 장면들이 너무 모호하고 몽환적이라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고 느꼈는데,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는 반대로 에리의 장면들이 너무도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신기했다. 제목인 애프터 다크의 뜻처럼 긴 어둠의 시간이 지나가고 나서 다가오는 새벽의 분위기가 에리라는 인물이 겪는 '세계를 넘나드는' 기분과 묘하게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어두운 방에 누워 있는 소녀의 세계와 그 방 안에 홀로 켜져 있는 텔레비전 속 세계가 어느 순간 뒤바뀌는 것조차 이상하다거나, 어색하지 않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전에는 이 책을 읽으며 참 하루키스럽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담백한 어투가 너무도 하루키스럽다고 느껴지니 그것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요.” 마리는 말한다. “왜 호텔 이름이알파빌이죠?”

“글쎄, 왜려나. 아마 우리 사장이 지었을 텐데. 러브호텔 이름이야 하나같이 대충 붙인다고. 결국은 남녀가 그걸 하러 오는 데니까, 침대하고 욕실만 있으면 오케이고 이름 같은 건 아무도 신경 안 써. 비스름한 것 하나만 있으면 돼. 왜 그런 걸 묻는 거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거든요, <알파빌>. 장 뤽 고다르의.”

“못 들어본 제목인데.”

“꽤 오래된 프랑스 영화예요. 1960년대.”

한때 프랑스 영화에 미쳐서 문화원이며 영상회를 찾아 다닌 적이 있는데 (무려 이십여 년 전이라 요즘처럼 파일 공유나 디비디 구매를 할 수 없던 시절이다), 당시에 가장 많이 보았던 영화가 바로 장 뤽 고다르의 작품들이었다. 영화에서 가장 잘 보이지 않는 것은 바로 카메라인데, 우리는 종종 영화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화면이 아니라 카메라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카메라로 찍어낸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 진짜 세상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 영화의 목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고다르의 영화에서는 카메라라는 것이 두드러지게 읽힌다. 영화라는 것이 이야기와 주인공의 감정이 전부가 아니라, 카메라로 찍는 그 무엇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한참 빠져 있었던 고다르의 작품 이름으로 호텔 이름을 지은 걸 보니, 무라카미 하루키의 <애프터 다크>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가 왜 이 작품에서 이런 방식으로 (그러니까 카메라의 시선으로) 글을 쓰려고 했는지. 그의 데뷔 25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이라고 하는데, 기존 작품들과의 차별성, 그리고 그의 작품 세계에서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고 하니 말이다. 특히나 '알파빌'이라는 영화는 미래라고 설정되어 있지만, 실제 보여지는 모습은 영화가 만들어진 당시 1965년의 현실을 그리고 있어 현실과 미래가 모호하게 뒤섞이고, 연결되어 있는 듯한 작품이다. 하루키의 이 작품에서 어둠과 빛, 밤과 새벽, 그리고 이쪽과 저쪽의 세계가 교묘하게 섞이는 것처럼 말이다.

하루키의 작품을 읽을 때 마다 종종 생각한다. 이건 마치 '아무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이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 아무것도 아닌데 어떻게 모든 것이냐고 할 수도 있겠다. 궁금한 사람들은 이 작품을 읽어보라. 하루키의 작품 중에서도 두께가 얇은 편에 속하지만, 숨겨져 있는 이야기는 가장 많은 작품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분명 당신도 나처럼 이 작품을 읽으면서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렇다면 조금 시간을 두고 다시 만나보길 바란다. 아마도 당신이 놓친 어떤 것이 시간이 지난 뒤에 새록새록 눈에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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