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팅 2
조엘 샤보노 지음, 임지은 옮김 / 북폴리오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전편에서 시아는 마지막 4차 시험을 통과하면서 기쁘다기 보다는 분노를 느꼈다. 오랜 여정으로 피로하고, 무섭고, 부상으로 인해 너무도 아팠지만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감정은 분노였던 것이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고 학살당한 뮤턴트들, 그리고 테스팅 과정에서 죽어간 친구들, 가까운 곳에서 그들이 죽어가는 것을 관전하고 있는 저들에게 아주 뜨겁고 강력한 분노를 말이다.

반즈 박사와 그 휘하의 사람들은 미래의 지도자로 누구를 선택할지 뿐만 아니라, 누가 살고 누가 죽을지도 결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겐 그럴 권리가 없다.

그 사람들 모두, 그렇게 할 권리는 없다. 아니, 그 누구라 해도.

100년도 더 전에 각국을 이끌던 수장들은 자신에게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 대가를 우리는 지금도 치르고 있다. 아주 혹독하게. 왜 과거의 잘못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것일까.

최종 합격자로 선발된 스무 명의 응시자들이 대학에 입학했고, 오리엔테이션 파티도 모두 끝나고 혼자만의 시간이 되어 가족들로부터 온 선물과 카드를 읽다가 테스팅 때 사용했던 진 오빠의 통신기를 꺼내어 본다. 그리고, 숨겨진 녹음 기능을 우연히 찾게 되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그대로 얼어붙고 만다. '절대로 믿을 수 없고, 믿고 싶지도 않은 사실들을 이야기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서 말이다. 테스팅 때의 잔혹하고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이 모두 삭제되었지만, 자신의 기지로 남겨놓았던 녹음이 그녀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계기를 만들어주게 된 것이다.

나는 대학 캠퍼스를 바라보았다. 대학은 여기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것이라는 희망과 약속 위에 지어졌다. 그 약속은 내가 믿어 온 것이며 내가 싸워서 이기려는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월요일이 시작되면, 미하우와 비밀리에 일하고 있는 그의 동료들이 원하는, 반즈 박사와 테스팅을 파멸시킬 수 있는 정보를 얻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말이다.

대학에만 가면 모든 게 끝날 것처럼 느껴졌던 전작에서의 염원을 비웃기라도 하듯, 대학에서는 더 큰 시련과 역경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입생 환영회는 4차에 걸친 테스팅 과정 못지 않게 무시무시한 테스트이고, 게다가 시아는 그 미션을 이끄는 리더로 선발되기 까지 한다. 전편에 비해 더 분노에 찬 표정을 하고 있는 표지 이미지에서도 느껴질 수 있듯이 상황은 점점 그녀를 '생각하게' 만들고, '분노하게' 만들고, 그리하여 '변화하게' 만들어준다.

'너는 똑똑해, 시아. 너는 강해. 네가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믿는 나 같은 사람들이 네 편에 서 있단다. , 이제 그걸 증명해 봐라.'

시아는 4차 테스팅이 시작하기 전에 미하우가 했던 말들이 떠오른다. 자신이 잘 해낼 수 있을지 어떨지 확신 조차 서지 않지만, 그러나 상황은 그녀가 무엇이든 해야만 하도록 진행되고 있었다. 그녀 스스로도 그것에 대해 자각하고 있었기에, 앞으로 벌어질 일이 그대로 일어나게 두지 않겠다고 마음 먹게 된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 여기까지 오면 마지막 시리즈인 3편은 무조건 읽을 수밖에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테스팅 1
조엘 샤보노 지음, 임지은 옮김 / 북폴리오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99년 전, 인류는 무려 7차에 걸친 전쟁을 벌였고, 그렇게 전쟁에서 살아남았다는 증거로 토수시티를 건설한다. 처음 4차 동안 인류는 서로 싸우며 파괴를 일삼았고, 그 다음 3차는 지구가 인간에게 복수할 차례였다. 오염과 지진, 토네이도, 홍수 등등 말이다. 각각의 식민주에서 선발된 졸업생들이 토수시티의 테스팅 센터에 모여, 4주가 소요되는 테스팅 과정을 거쳐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테스팅이 종료되면 테스팅 과정에 대한 기억은 기밀 엄수를 위해 시험 종료 후에 전부 지워지고 말이다. 다섯 호수 마을에 사는 시아는 올해 마을의 졸업생이다. 학교 생활을 마감하고 이제 곧 현실 세계로 뛰어들게 되는 열여섯 시아는, 자신이 테스팅 응시자로 선발되기를 꿈꾼다. 그래서 아버지처럼 대학에 입학하고 싶다.

아빠는 내가 아무리 캐물어도 테스팅이나 대학에 다닐 때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다. 이제 같은 경험을 공유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아빠와 더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 찰나의 뿌듯함은 곧 산산이 부서졌다.

"넌 응시자로 뽑히지 말았어야 했어."

그 말에 얼굴을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아빠는 놔 주지 않았다. 아빠는 어둠 속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실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아빠의 얼굴에서 번득이는 공포가 내가 느낀 아픔마저 잊게 만들었다. 그리고 시선이 나와 만났을 때는 걱정이 샘솟기 시작했다.

테스팅에 선발되는 건 대부분 아이들과 부모의 꿈이다. 테스팅에 선발되면 자식을 떠나 보내느 대가로 가족들에게 보상금이 지급되기도 하고, 대학에서의 생활도 매력적이고 말이다. 그런데 왜 시아의 아빠는 자신의 자식들이 응시자로 선발되지 않기를 바랬을까. 그것은 지워진 테스팅의 기억, 그리고 이후에 남겨진 그의 악몽으로 인한 불안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아의 아빠는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속삭인다.

"시아, 아무도 믿지 마라."

테스팅은 총 4차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지식과 논리력, 문제해결능력을 측정하기 위한 과정으로 이틀간에 걸친 필기시험이다. 두 번째는 지식을 실제 상황에 적용하는 능력을 보여주어야 하는 실기시험이다. 세 번 째는 다른 사람과 팀을 이루었을 때의 능력을 보는 팀 과제이고, 마지막 네 번 째는 의사결정능력과 리더십을 평가하는 실무능력시험으로 테스팅 중에서 가장 긴 여정이 된다.

테스팅은 여러 해 전에 반즈 박사의 아버지가 고안한 거라고 했다. 7차에 걸친 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각국 지도자들의 자질이 부족해서라고 그는 믿었다. 지성과 압박감 속에서 버텨낼 수 있는 능력, 리더십이 적절하게 배합되지 못한 사람들이 수장이 되어 나라를 이끈 게 치명적이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때문에 통일연방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유일한 길은 미래의 지도자 후보를 철저히 선별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진행된 테스팅의 결과에 따라 위원회와의 일대일 면접을 거쳐 최종적으로 대학에 진학할 사람을 선발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국토를 복원하고 예전의 영광을 되찾는 데 기여할 인재를 뽑기 위한 과정이다. 대학이란 미래의 통일연방 지도자를 양성하는 곳으로 결국 국가의 지도층을 선발하기 위함이니 말이다. 1편은 4차에 걸친 테스팅 과정이 주를 이루고, 그것을 겪어낸 시아와 그녀의 친구들이 도달하게 되는 여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너무 재미있지만, 사실 2편이 더 기다려지는 전편이기도 했다. 스토리적인 설정 때문에 이 작품이 '헝거 게임'의 아류라 생각했다면, 분명한 착각이다. 훨씬 더 매력 넘치는 캐릭터와 흥미로운 테스팅 과정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슬로터치 한상차림 - 내 마음을 채워 주는 컬러링 푸드
문영인 지음 / 마음지기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컬러링 북을 가끔 보는 편인데, 확실히 스트레스가 쌓이거나 피곤할 때 힐링 되는 효과를 톡톡히 본다. 다양한 컬러링 북 중에서도 내가 선택하는 건 복잡하지 않은 그림이다. 초반에 컬러링 북이 한참 유행일 때 00동물원 시리즈 같은 컬러링 북은 도안이 굉장히 세밀하고 복잡하기로 유명했었는데, 그걸 색칠하다가는 더 머리가 아파질 것 같아서 말이다. 단순한 도안으로 되어 있지만, 내가 관심있는 분야의 컬러링 북을 찾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평소에 워낙 요리, 음식에 관심이 많았기에 맛있는 그림은 식욕까지 자극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근사한 한상 차림에 대한 설레임과 함께 컬러링을 시작했다.

 

 

이 책에는 다양한 음식들이 소개되어 있다. 양은 도시락, 삼계탕, 수육, 녹두전, 구절판, 갈비, 신선로, 잡채 등등 한국적인 색채가 강한 음식들을 비롯해서 무지개떡, 송편, 약식, 화전, 경단 등등 역시나 한국의 떡과 간식들이 시선을 끈다.

그리고  팥죽, 양갱, 수정과, 팥빙수 등의 디저트와 순대, 떡볶이, 어묵, 핫도그, 핫바, 계란빵, 달고나 등등의 주전부리들도 반가웠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잡아끈건 바로 밀전병에 여러가지 음식을 넣어 싸먹는 구절판이다. 결혼 전 남자친구에세 솜씨를 뽐내보려고 도전했던 음식이기도 하고, 아기 백일상을 차리며 어른들에게 선보였던 음식이기도 해서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숫자 구를 좋은 것으로 여겼다고 하는데, 이 음식도 아마 그것때문에 9개의 재료들로 만들어졌다고 들은 것 같다. 여덟까지 속재료와 밀전병까지 아홉가지 음식으로 싸먹는 일종의 밀쌈이다.

하나씩 채색을 하면서 내가 만들었던 그 시간들을 하나씩 떠올려보았다.

 

 

화과자와 양갱 역시 선물용으로 이미 만들어 본 적이 있길래 시선이 갔다. 음식은 이렇게 시간과 추억을 함께 떠오르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내가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이 책 속에 있는 전통적인 우리 먹거리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슬로푸드들은 전통적인 한국의 한상차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새삼 우리 음식들에는 시간과 노력, 그리고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책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예쁜 컬러 엽서가 실려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종이달 - 제25회 시바타 렌자부로상 수상작 사건 3부작
가쿠타 미츠요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교외에 있는 와카바 은행 지점에서 마흔한 살의 계약 사원이 약 1억 엔을 횡령했다. 오래 근무한 정직원도 아니고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계약 사원이, 그것도 1억 엔이나 되는 큰 돈을 어떻게 횡령했을까. 여타의 작품이었다면 이럴 경우 '어떻게'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가 진행되었겠지만, 이 작품에서는 대체 '' 그런 일을 벌였을까에 맞추어 이야기가 진행된다. 사실 저녁 뉴스의 헤드라인 감인 어마어마한 범죄 사건이라, 범죄를 모의하고,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는 과정만 그려도 책 한 권은 나왔을 텐데 말이다. 대신 가쿠다 미쓰요는 평범한 주부가 그런 엄청난 사건을 벌이게 된 계기, 그리고 별것 아닌 것에서 시작된 그 심리 상태에 주목한다. 따라서 문장은 담담하고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아도, 치밀한 심리 묘사들이 쌓여 저절로 클라이막스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죄를 저지르지 않고 사는 것이 마치 다행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라는 일본 평론가의 말처럼,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지점들은 무서울 정도이다. 그렇다. 나도, 당신도, 그녀와 다를 바 없다.

 

사람 하나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쯤 간단하지 않을까.

태국 치앙마이에 도착하고 며칠 지나니, 우메자와 리카는 막현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라진다고 해서 죽는다는 건 아니고 완벽하게 행방을 감춘다는 뜻이다. 그런 일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생각하면서 이곳까지 왔다.

 

리카의 여고 시절 친구인 오카자키 유코는 그녀를 이렇게 기억한다. 화려하게 아름답진 않지만, 갓 쓰기 시작한 비누 같은 아름다움을 가진 아이라고. 그만큼 십 대의 리카는 사람들의 시선을 확 끄는 데가 있었던 것이다. 성적은 우수하지만 우등생은 아니고, 어디 하나 수선하지도 않았는데 그녀의 교복은 세련되어 보였고, 누군가와 벽을 두는 법도 없이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던 어른스러웠던 아이였다고 말이다. 리카의 학생 시절 남자친구였던 야마다 가즈키는 그녀를 욕심 없고, 조심스럽고, 꼼꼼하고, 자신을 둘러싼 울타리에서 절대 밖으로 나오지 않는 타입의 사람으로 기억한다. 리카가 전업 주부이었을 때 요리 교실을 함께 다녔던 주조 아키는 예쁘고, 얌전하고 성실했던, 계산적이지 않고 따뜻했던 사람으로 그녀를 기억한다.

 

이렇게 그들은 뉴스에 등장한 그녀가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사람이라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어 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 지명수배자라면 누군들 그러지 않겠는가. 내가 아는 그 사람이라면 저런 일을 벌일 리 없는데, 내가 알던 그 시절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상황인데.. 하면서 말이다.

 

스물다섯에 결혼한 리카는 결혼을 계기로 카드회사를 관두고 전업 주부가 되지만, 아이는 생기지 않고 요리 교실을 다니고, 집안 일을 하며 사는 것에 금새 지루함을 느낀다. 3년 만에 결혼 초에는 아무런 의문도 없이 하던 일이 점점 색이 바래지고, 주부인 자신의 삶이 무미건조하게만 느껴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아르바이트로 은행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게 된다. 물론, 여기까지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물론 죄책감은 있었다. 부정을 저지르고 있다는 자각도 있었다. 그러나 리카에게 그것이 범죄라는 의식은 없었다. 왜냐하면 고조는 고타의 가족이고, 고타의 말대로 그 예금 총액에서 보면 고타가 빌린 액수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주 잠깐만 빌려서 이자를 붙여 돌려놓으면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만약 고타가 반년 이내에 갚지 못하면 자신이 대신 갚아주면 된다고 조차 생각했다.

 

시작은 아주 사소했다. 화장품 가게에서 계산을 하려다 수중에 있는 돈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했다가, 고객에게 맡은 현금 봉투에 있는 돈을 떠올린 것이다. 잠깐 빌려 쓰고 돌아가는 길에 돈을 찾아 원래대로 돌려놓으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고가의 화장품을 산 자신을 사치라고 생각하지 않고, 조금 비쌌지만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제대로 된 것을 써야 한다는 식으로 합리화시키면서 말이다. 하지만 훗날 그녀는 자신이 이 순간을 오래도록 떠올리게 될 거 라는 사실을 알 수 없다. 돈을 다시 벌기 시작하면서 점점 그녀는 돈이 주는 힘을 누리기 시작하고, 그러던 중 남편의 전근이 결정되어 출장이 잦아지고, 그가 없는 주말 동안 그녀는 무려 열두살 이나 연하인 고객의 손자와 시간을 자주 보내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청년과 몸을 섞게 되고, 오랜 시간 동안 남편의 손길을 받은 적 없던 그녀는 새삼 누군가 자신을 만져주는 손길에 울컥하게 된다. 그렇게 가난한 고학생 고타를 만나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삶이 바뀌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일본의 버블경제, 신용사회에 대한 고발을 그린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와도 비교할 만한데, <화차>가 미스터리 플롯, 사건 위주로 크게 이야기를 그려나갔다면 <종이달>은 주인공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평범했던 한 여성의 삶과 일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그 틈에 대해 그리고 있다. <화차>의 쇼코도, <종이달>의 리카도 그저 '행복하고 싶었을 뿐'이었다는 것이 슬프다. 어쩌다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인지 그녀들은 사실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자신들은 그저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말이다. 리카는 도피 중에 이런 생각을 한다. 무서운 것도 두려운 것도 무엇 하나 없다고 느끼면서, 자신이 무언가를 얻어서 이런 기분이 된 건지, 무언가를 잃어서 이런 기분이 된 건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어쩔 수 없이 돈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돈을 펑펑 쓰면서 행복해하는 이도 있을 테고, 돈을 아껴가며 모으는 것으로 행복을 느끼는 이도 있을 것이다. 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돈타령만 하며 빚을 지고 돈에 이끌려 사는 이도 있을 것이고, 계획대로 돈을 모으고 자신의 처지 만큼 아껴 쓰며 돈에 휘둘리지 않는 이도 있을 것이다. 여기엔 내 모습도, 당신의 모습도, 또 다른 누군가의 모습도 겹쳐져 보일 수 있다. 이 작품의 정말 무시무시한 점은 나도, 당신도, 그녀와 다를 바 없다는 것. 그래서 무섭고, 그래서 슬프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엔더스 블랙 로맨스 클럽
리사 프라이스 지음, 박효정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내가 알고 있는 건 당신이 괴물이고 살인자라는 거야. 그리고 난 당신이 하는 그 어떤 말도 신뢰할 수 없어."

<진실을 하나 말해 줄게. 언제까지나 진실일 얘기란다. 듣고 있니?>

나는 그와 그의 금속성 목소리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래."

그가 하는 말이 서서히 들려왔다. <자신 외에는 아무도 믿지 마.> 한참 침묵 후에, 그가 덧붙였다. <그리고 의문을 가져라>

이 작품은 <스타터스>의 완결편이기 때문에 전작의 내용을 살짝 정리해둘 필요가 있겠다. 하지만 물론 전작을 읽지 않더라도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무리가 있는 건 아니다. 시작부터 전작에서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배경은 생물학 폭탄이 강타한 근미래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폭탄이 떨어진 뒤 중장년층 대부분이 사망하고, '엔더'라고 불리는 7~80세 이상의 노인들과 '스타터'라고 불리는 10대 이하의 청소년들만 남게 된다. 기득권층이자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엔더들이 자신들의 일거리 보존을 위해 연장자 고용 보호법을 만들자 미성년자들의 취업은 불법이 되고, 보호자가 없는 미성년자들은 길거리로 내몰리게 된다. 열여섯 주인공 캘리는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자, 아픈 동생을 위해 불법적인 노동을 하게 되고, 그것은 바로 '신체 대여'이다. 돈은 많고 젊음이 필요한 엔더들이 스타터들의 몸을 렌트해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신체대여라는 아이디어 자체가 신선한 것은 아니었다. 꽤 많은 SF영화에서 지구를 침공하는 외계인들이 인간의 신체를 강탈하는 설정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얼마 전에 개봉했던 영화 <셀프/리스>에서도 기억이식수술을 통해 70세 할아버지가 30세의 신체 건장한 남자로 다시 태어나기도 했다. 최고의 부동산 재벌이지만 몸에 종양이 퍼져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남의 몸에 자신의 기억을 이식하고, 몸을 바꿔서 젊음을 누릴 수 있다는 설정이었다. 원하는 신체에 자신의 정신을 이식해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나, 이 작품의 젊은 신체를 빌려서 잠깐 살 수 있다는 것이나 실제로 가까운 미래에 벌어진다면 끔찍하기 짝이 없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 애는 자기 원래 몸으로 있었다.

그는 나를 등지고 있었지만, 그의 근육질 어깨, 곱슬머리도 직모도 아닌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모든 것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그 애는 거기에 있었지만, 그 애는 사라졌다. 마땅히 존재해야 할 방식대로였다. 그 애는 자기가 속한 곳으로 돌아왔다. 그 애 자신의 몸 안으로.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은 그 애를 만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동생을 구하기 위해서 신체 대여에 자원했던 탓으로 캘리의 머리 속에는 칩이 박혀 있고, 그것은 곧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올드맨의 목소리를 자신이 원하지 않을 때도 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 작품은 시작부터 머릿속에 칩을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스타터의 몸이 폭발하는 것으로 서문을 여는데, 캘리는 그제야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칩의 위험성을 자각하게 된다. 자신의 머릿속에 잠재적인 폭탄이 있는 한 절대로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는 또 한번 생존을 위한 게임에 뛰어 들게 된다. 전작에서 바디뱅크가 괴멸되면서 엔더들에게 자신의 몸을 렌트해 주지 않아도 되게 되었지만, 그 일로 뇌에 칩을 이식한 그들을 추적하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다. 특히나 이번 작품에서 밝혀지는 올드맨의 실제 정체는 엄청난 반전으로 충격을 주어, 전작보다 더 흥미진진하게 스토리를 이끌고 가는 원동력이 된다.

꽤 많은 디스토피아 소설을 읽어 왔지만, 이 작품에서 불법 신체 대여 회사를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음모는 그 어떤 작품 못지 않게 탄탄한 구성으로 그다지 길지 않은 분량에도 묵직한 무언가를 전달해주었다. 리사 프라이스의 데뷔작이 바로 <스타터스>였는데, 어쩜 첫 작품부터 이런 강렬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는지 감탄 스러울 만큼 말이다. 미국에서는 이 책이 청소년 소설로 분류되어 있었다는데, 어른들이 만든 거대 시스템과 맞서 싸우며 고군분투하는 십대 주인공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책은 청소년 소설로만 분류하기엔 너무 매력적인 요소들이 많은 작품이다. 그래서 국내에 출간될 때는 그저 디스토피아 로맨틱 스릴러 장르로 나온 거겠지만 말이다.

"결국 스타터는 미들이 될 것이고 엔더가 될 것이며, 새로운 세대에는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커다란 구멍이 남지 않게 될 것이다."

남의 몸을 빌려서라도 불멸의 삶을 꿈꾸는 인간들의 욕심,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늙을 수밖에 없다. 영원히 시간을 거스를 수 있는 방법은 없으니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