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록 : 크로니클 셜록 시리즈
스티브 트라이브 엮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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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1년 가까이 손꼽아 기다린 <셜록:유령신부>가 곧 개봉을 앞두고 있다. 특히나 이번 크리스마스 특별판(실제로는 크리스마스가 지나서 개봉하는 바람에 신년 특별판이 되었지만;;;;)이 기대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극장에서 개봉을 한다는 것과 현대물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던 셜록이 원작의 빅토리아 시대로 돌아간 버전이라는 데 있다. 애초에 원작을 재해석해서 스마트폰을 하는 셜록과 블로그를 하는 존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감각적인 인물로 재해석한 것이 BBC의 셜록이었기에, 이번 스폐셜 에피소드는 그야말로 셜록 시리즈의 팬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과도 같은 것이다. 그동안 숱하게 변주되어 왔던, 그러니까 우리가 익히 알던 셜록 홈즈의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것을 보면,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창조한 현대의 셜록이 그만큼 매력적이고 임팩트가 강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셜록 크로니클 원서를, BBC에서 출간하고 바로 구입을 했었기에 작년 12월에 이 책을 볼 수 있었는데, 영어를 줄줄 읽어대지 못하더라도 하드커버 전체 올 컬러에 묵직한 무게감의 화보로서도 엄청난 퀄리티였기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방대한 분량의 읽을 거리 또한 가득이었기에, 어서 한국판이 나오길 기다렸었고, 그렇게 만난 셜록 크로니클 한국판은 완벽한 퀄리티로 기다림을 보상해주었다. 원서와 거의 한치의 오차도 없을 만큼 멋진 퀄리티를 고스란히 뽑아내어 책장에 나란히 두면 어떤 것이 원서이고, 어떤 것이 번역본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잘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셜록 케이스북 때도 그랬지만, 비채의 빵빵한 사진 퀄리티는 정말 대단한 것 같다.

 

이 책은 촬영 현장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장면들과 가감없는 배우들의 모습과 제작 전후의 스토리, 그리고 대본 전개, 캐스팅, 세트, 의상, 소품 등에 이르는 전반적인 모든 것까지 마치 셜록 종합 선물 세트 같은 책이다. 물론 기존에 출간되었던 셜록 케이스북도 소소한 볼거리들과 깨알같은 정보들이 가득했지만, 케이스북에 비해서 크로니클은 두 배 이상의 엄청난 분량과 커다란 판형의 폼나는 하드 커버와 그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시크릿 화보들까지 풍성해 그야말로 셜록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스티븐이 덧붙여 말한다. "이 병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약간 자폐증이 있는 사이코 패스와 비현실적으로 착실하고 근면한 군인이, 극단적으로 대조적이어서 평생 만날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이 만나, 서로 존경하며 플랫을 함께 사용하는 것으로 끝이 나는 장면을 찍게 된 겁니다..."

첫 번째 페이지를 펼치면 셜록의 대사가 두 페이지 가득 채워져 있는 대본부터 만날 수 있는데, 정말 대사량이 어마어마하다. 새삼 배우란 대단하다는 생각,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셜록이 왜 그렇게 중독성 있는 마성을 뿜어냈는지 납득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말이다. 게다가 셜록 시리즈를 한 번이라도 봤다면 알겠지만, 대사의 속도도 엄청나게 빠르지 않다. 마치 속사포 랩이라도 하듯이. 이 책에는 그 엄청난 양의 (게다가 논리적인!) 대사가 가득한 대본이 꽤 많이 실려 있으니, 그 또한 이 책을 읽는 깨알 같은 재미를 준다. 이 대본들 덕분에 단순한 화보집이 아니라 마치 스토리가 있는 소설처럼 읽히기도 한다는 말이다.

 

작가를 위한 바이블은 매우 흥미롭다. 이것은 파일럿 에피소드를 만들고, 이것을 90분짜리 세 편의 시리즈로 만든다는 결정이 내려지기 전에, 캐릭터 성격을 요약해놓은 것인데, 실제로 이렇게 배우들이 캐릭터를 탄생시켰으니 말이다.

셜록은 원작대로 오만하고, 자신이 원할 때는 얼음처럼 냉담하지만 까불고, 현대적이고, 재미있게 표현할 것. 이라고 되어 있다. 무엇보다 빅토리아 시대에서 동면에 들었다가 2009년에 깨어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명심할 것. 이라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여기는 존에 대한 설명이 훨씬 더 긴데, 그도그럴 것이 기존에는 존의 역할이 매우 약소해서 마치 책 여백에 끄적거린 낙서 신세로 전락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를 훨씬 중요한 3차원적인 인물로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존은 딱 부러지게 이해하긴 더 힘들지만 하나하나가 다 중요한 인물.이라는 설명으로 시작하는데, 방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작가 여러분은 존을 통해서 모험을 살릴 필요가 있고, 역시 존을 통해서 셜록을 알 필요가 있다. 최대한 셜록과 존을 묶어두어야 하고, 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할 것! 이라는 부분 말이다

 

 

"대단원의 일부는." 베네딕트의 말이다. "누가 자신을 구해줬는지, 그게 무슨 의미인지, 그리고 그게 자신들의 관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셜록이 깨달은 것이죠. 셜록은 이 침착한 사격에 대한, 도덕성으로 똘똘 뭉친 군대 경력이 있는 사내에 대한, 자존심과 원칙의 사내에 대한 윤곽을 그리기 시작하고, 존이라는 사내가 파트너이자 사건기록자이자 친구가 되리라는 걸 깨닫는 순간, 뺨을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이는 매우 중요한 순간이고, 자신을 구해준 사내가 유죄판결을 받도록 할 뻔하기도 한 것이고요."

캐스팅에 관한 비하인드도 흥미로운데, 사실 처음에 베네딕트의 어머니는 아들의 코가 셜록과 아주 달라서 셜록이 될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어톤먼트>에 출연한 그를 보고는, 보자마자 감이 잡힌 듯 완벽해 보인다고 생각한다. 베네딕트는 셜록 홈스 소설을 읽으며 성장하지도 않았고 스토리를 다 알지도 못하지만, 등장인물과 장르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고, 대본을 읽어보자 정말이지 셜록 홈스 숭배자들이 썼다는 것이 바로 느껴졌습니다. 라고 말한다. 이걸 보면 그가 얼마나 영리한 배우인지 짐작이 될 것이다. 그 동안 수많은 배우들이 셜록 홈즈를 연기해왔었기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개성을 가진 21세기의 괴짜 셜록을 탄생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마틴에 관한 일화도 재미있다. 마틴은 평범한 것도 한 편의 시로 만드는 사람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는 평범하게 보이는 사람이고, 매우 평범한 사람인 척하는 데에 전문가이고, 실제로 존 왓슨은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는 거다. 게다가 마틴이 연기하는 방식이 베네딕트의 연기 방향을 바꾸기 시작하기까지 했다고 이들은 말한다. 셜록 시즌이 처음 시작할 때만해도 마틴 역시 베네딕트처럼 엄청난 스타는 아니었지만, 영화 호빗 시리즈를 통해 시리즈 중간에 더욱 부각이 되면서 숨겨졌던 그만의 매력이 셜록에서도 더 빛을 발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 책에는 이렇게 캐스팅 뒷 이야기뿐만 아니라, 베네딕트와 마틴이 각자의 캐릭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서로의 파트너 쉽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까지 실려 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만들어준다

 

스티븐은 이게 두 사람의 관계의 핵심이라고 보고 있다....."처음에는 셜록이 존을 일종의 습득물로, 일종의 애완동물쯤으로 여겼어요. 두 사람의 관계에 그런 요소가 어느 정도는 있죠. 존은 셜록이 영원히 살 수 없는 존재이고, 스스로 위험에 빠진다는 걸 상기시켜줍니다."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죠." 마크의 말이다. "하지만 존은 셜록을 인간답게 만들어 불쾌해 보이지 않도록 하죠. 셜록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멍청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친한 친구조차도 말입니다. 하지만 셜록의 친구는 셜록의 탁월한 정신에 대한 시금석이 되고, '굿모닝'이라는 인사조차 건넬 줄 몰랐던 사람에게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이렇게 배우들의 생생한 목소리로 듣는 비하인드 스토리는 오직 크로니클에서만 만날 수 있는 정보들이라 더욱 소중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제작자와 감독, 존의 블로그를 맡아 쓴 작가, 특수효과 전문가, 의상 디자이너, 메이크업 아티스트 들의 뒷이야기와 BBC <셜록> 제작팀의 은밀한 기록보관소는 물론, 대본과 삭제 컷, 콘셉트아트, 스토리보드까지 엄청난 볼거리와 읽을 거리들이 잔뜩 무장하고 있으니 셜로키언들에겐 최고의 선물과도 같은 책이다

 

 

셜록 시즌1(Sherlock) |2010.07.25~2010.08.08|

1화 분홍색 연구

2화 눈 먼 은행가

3화 잔혹한 게임

 

셜록 시즌2(Sherlock) |2012.01.01~2012.01.15|

1화 벨그레이비어 스캔들

2화 배스커빌의 사냥개들

3화 라이헨바흐 폭포

 

셜록 시즌3(Sherlock) |2014.01.01.~2014.01.12.

1화 빈 영구차

2화 세 사람

3화 마지막 서약

 

, 그리고 1 2일에 스폐셜 버전이 극장판으로 공개되고,

대망의 셜록 시즌4 2016 4월 촬영 예정이라고 한다

 

 언젠가 셜록 홈즈에 관한 흥미로운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실제 법과학자, 과학 수사 요원들의 인터뷰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셜록 홈즈가 없었다면 오늘날 법과학도 없었을 것이다. 홈스는 최초의 과학 수사 요원이다. 그가 썼던 방식을 지금도 활용한다. 그는 백 이십 년이나 앞선 과학 수사의 선구자였다. 범죄 수사를 새로운 경지에 올려놓았다. 그는 현대적인 법과학자이다."라고 말이다. 여기서 다들 눈치채셨는가. 이들은 모두 셜록 홈스가 소설 속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실존 인물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작가보다 캐릭터가 더 많이 언급되고, 더 유명한 경우가 가끔 있긴 한데, 셜록 홈즈가 아마도 그 중 최고가 아닐까. 사실 실제로 셜록 홈즈가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경찰들의 수사 방식은 주먹 구구식이라 현장을 보존하고, 증거를 찾는 다는 생각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목격자를 찾는 데만 집중했고, 현장은 경찰과 구경꾼들로 훼손되어 증거를 찾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코넌 도일의 목표는 과학 수사 방식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법과학자들은 셜록 홈즈가 처음 등장했던 주홍색 글씨를 두고 지금의 수사 방식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라고 말할 정도이니 말이다.

 

그렇게 대단한 인물을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빅토리아 시대에서 21세기 현대로 완벽하게 옮겨놓았다. 그랬던 그가, 빅토리아 시대로 갔을 때는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혹시, 그동 안 셜록 시리즈를 한 번도 보지 못했더라도 걱정할 것 없다. 셜록 크로니클 한 권이면 시즌마다 90분 분량의 세 편씩, 9편의 시리즈를 모두 본 것처럼 완벽하게 마스터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셜록의 팬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고, 대체 왜 잘생기지도 않은 베네딕트 컴버배치라는 배우가 인기가 있는지 궁금한 분들에게도, 오로지 영화 매니아라 셜록:유령신부를 기다리고 있을 분들에게도, 이 책은 꼭 필요한 필수 아이템이다.

가격이 비싸다고? 노노. 책을 직접 본다면 절대 비싸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책 값의 값어치를 하고도 남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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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럼 붉다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1
살라 시무카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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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용 문신을 한 천재 해커, 비밀정보 조사원이자 깡마른 펑크족, 작고 단단한 몸으로 사적 복수를 가하던 여전사.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바로 여주인공 리스베트 살란데르였다. 너무 많은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나이에 비해 조숙하지만, 내면적으로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부분도 있어 순진한 면도 가지고 있는, 굉장히 이율배반적인, 겉모습과는 정반대의 상반된 부분을 가지고 있는 두 모습의 전무후무한 여성 캐릭터. 바로 그 스티그 라르손이 창조한 히로인 리스베트 살란데르에게 오마주를 바치는 작가, 살라 시무카의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시리즈를 만났다. 추리, 스릴러 소설은 크게 두 부류이다. 플롯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가, 캐릭터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가. 이 작품은 명백하게 후자이다. 따라서 플롯은 매우 단순하다. 트릭이나 반전이랄 것도 없고, 인물 관계도가 복잡하지도 않으며, 배배 꼬인 구성도 없어 매우 수월하게 읽힌다. 그러니 다층적인 의미가 숨겨져 있고, 복잡한 플롯에 익숙한 추리 소설 독자라면, 이야기 구조가 너무 쉽고 단순한 거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명확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 매혹적인 캐릭터는 이 작품의 기술적인 아쉬움을 뛰어 넘고도 남는다.

이 작품이 완벽하게 잘 쓰인 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모두가 공감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는 말이다. 바로 여주인공 루미키를 자세히 관찰하면, 그 누구라도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을 거라는 거다.

그녀의 부모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름을 딸에게 붙여주었다. 그녀의 머리는 검은색이 아니었고, 피부는 갓 내린 눈처럼 빛나지 않았으며, 입술도 도드라지게 빨갛지 않았다. 세상에 어떤 부모가 딸에게 백설공주란 이름을 붙여준단 말인가? 핀란드어로는 그리 나쁘지 않은 이름, '루미키'이지만 설령 그녀가 그림 동화 속 캐릭터라 해도 이건 옳지 않았다. 그냥 친가 쪽의 이름을 따서 스웨덴식으로 붙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론 이름에 걸맞은 외모를 갖추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염색약과 화장품만 있으면 가능하니까. 하지만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에 충분히 만족했다. 남들의 의견 따윈 상관없었다.

스티그 라르손의 리스베트 살란데르는 스물넷이었고, 그에 반해 살라 시무카의 루미키 안데르손은 열일곱이다. 모든 문제에 대해 신중히 고찰하는 그녀는 물리학과 철학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급우들의 장난에도 가담하지 않고, 학교 파티에도 참석하지 않는 그녀는 늘 혼자 식사를 하면서도 전혀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남들과 확실히 달랐다. 그런데 마음만 먹으면 남들과 완전히 똑같기도 했다. 그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으려 애쓰며, 항상 모든 일에 방관적 입장을 유지했던 것이다. 그저 무난하게 살고 싶으면 어떤 일에도 참견하지 말고, 어떤 상황에도 휘말리지 않고, 그저 투명인간처럼 있는 듯 없는 살기로 결심한 그녀의 이름은 루미키로, 핀란드어로 백설공주를 뜻한다. 하지만 동화 속 주인공과 비슷한 외모를 가지지는 않았고 그녀는 그저 평범한 자신의 모습에 만족했다. 눈에 띄지 않는 것이 그녀 인생 최대의 목표였으니 말이다.

평소와 다를 것 없던 어느 날, 루미키는 자신의 은신처이기도 했던 암실에서 기가 막힌 상황과 맞닥뜨린다. 암실 천장에 무수히 많은 5백 유로 지폐가 걸려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암실 바닥은 불그스름한 갈색 얼룩들로 뒤덮여 있었고, 지폐 모서리에는 적갈색 얼룩이 가득하고, 말라붙은 피 냄새가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피 묻은 돈 3만 유로를 발견한 그 날 이후, 그녀의 평화롭고 조용했던 생활은 산산이 깨지고 만다.

", 이제 보니 우리 슈퍼 탐정님께서 컴퓨터 천재셨군그래."

투카가 조롱하듯 말했다.

"그래, 사실 난 에르큘 푸아로와 리스베트 살란데르의 사생아야." 루미키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카스페르가 과장된 동작으로 비워준 의자에 앉았다.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진행되는, 열일곱 소녀가 주인공인 작품이지만, 일반적인 학원 액션물과는 차원이 다르다. 터프하고 총명한 루미키는 순진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약한 십대 소녀가 아니었던 것이다. 오랜 격투기 훈련으로 날렵하고 강한 육체를 지녔고, 자신의 의지대로 마치 다른 사람처럼 연기할 수도 있었으며,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더없이 건조하기만 해 너무도 시크하고, 독립적인 캐릭터였다. 과거의 어떤 상처로 인해 마음을 완전히 닫아버리고, 그 누구에게도 마을 열지 않고,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가려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여러 모로 리스베트의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그래서 더 매력적이고, 그래서 더 그녀의 과거가 궁금해질 정도로 말이다. 앞으로 이어질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시리즈의 다음 이야기 <눈처럼 희다> <흑단처럼 검다>가 손꼽아 기다려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녀가 마음을 닫아버릴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그 일, 그리고 가족과의 비밀과 옛 남자친구의 정체까지 숨겨진 이야기들이 어떻게 펼쳐질지 벌써 부터 궁금해진다.

옛날 아주 먼 옛날, 공포를 알게 된 소녀가 살았답니다.

특히나 이 작품에서 매력적인 장면 중의 하나는, 그녀가 피 묻은 돈 3만 유로를 발견한 이후, 어쩌다 보니 국제적인 범죄에 말려들어 조직의 보스가 여는 수상한 파티에 참석하게 되는데, 그곳에 참석하기 위해 변신을 하게 되는 장면이다.

눈처럼 흰 피부.

파운데이션, 파우더, 그녀의 피부색과 일치된 화장품이 잡티를 완벽히 감춰주고, 도자기 인형처럼 매끄러워진 얼굴.

피처럼 붉은 입술.

립 라이너, 립스틱 한 겹. 살짝 닦아내고 또 한 겹. 그리고 붉은 립글로스.

흑단처럼 검은 머리.

단발로 자른 그녀의 앞머리와 한껏 부풀린 뒷머리, 검정색 염색.

그녀의 이름처럼, 완벽하게 백설공주처럼 변신한 그녀가 벌이는 활약은 여느 액션 영화 못지 않게 전개되지만, 이 장면 전에 전개되던 그녀의 너무도 시크하고, 터프한 면들을 보아 왔기에 이 순간은 마치 마법처럼 매혹적이었다. 한때 잔혹동화가 성인들에게 유행처럼 읽혔었는데, 사실 백설공주 이야기도 매우 잔혹한 면을 가지고 있다. 왕비가 손가락을 찔려이 피처럼 붉고 눈처럼 희고 흑단처럼 검은 아이를 원했고, 공주를 죽이고 심장을 가져올 것을 요구하는 새로운 왕비의 스토리까지 말이다. 그러니 북유럽에서 시작되어 전세계인들에게 친숙한 구전동화백설공주이야기를 교묘히 변주한 이 작품이 스릴러의 모습을 띤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백설공주는 그 눈부신 아름다움만큼이나 잔혹한 부분을 가지고 있는 비극이기도 하니 말이다.

누구나 어른이 되는 순간을 마주하게 마련이다. 누군가는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기분을 맛보기도 하고, 이제 더 이상 스스로가 어리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하고, 그 동안의 자신과는 완전히 달라진 또 다른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 알아버리기도 한다.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지만, 누구든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는 순간이기에, 신비롭고, 매혹적인 순간이기도 하다. 살라 시무카는 바로 우리의 주인공 루미키에게 그런 비밀을 감추어 두고 있다.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하겠다며, 아무리 상황이 암담해도 포기를 떠올려본 적이 지금껏 단 한번도 없었던 루미키였기에, 그녀의 숨겨진 과거가 조바심이 나도록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살라 시무카는 매우 영리한 작가이다. 이 작품이 그녀가 처음으로 쓴 장편소설인데도 불구하고, 출간 1년여 만에 48개국에 판권이 팔렸다는 점이 이를 증명하기도 하고 말이다. 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다음 시리즈를 어서 빨리 만나보고 싶다. 이 작품은 이 계절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매혹적인 스릴러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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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욱정 PD의 요리인류 키친
KBS 요리인류 키친 이욱정 지음 / 예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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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를 통해 여행을 한다'는 것은 굉장히 매혹적인 경험이다. 해외 여행을 할 때 우리가 대부분 제일 먼저 찾아보는 것은 바로 현지의 맛집이다. 그 나라에서만 먹어볼 수 있는 음식, 오직 그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식재료와 조리법, 바로 그런 것들이 여행이 아니면 절대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여행을 다녀온 뒤에도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것 또한 음식의 경험이다. 그러니 요리와 여행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요리를 통해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낯선 세계로 다가가고, 완전히 다른 곳에 사는 이들과 소통하고 공감하려는 노력을 보여준 요리인류는 참 멋진 프로그램이었다. 

 

 

여행도 좋아하고, 요리도 사랑하는 나에게 <누들로드> <요리인류>를 만들어낸 이욱정 PD는 정말 부러운 대상이다. 2년여에 걸쳐 10개국을 누비며 제작한 <누들로드>, 그리고 요리학교르 코르동 블뢰(Le Cordon bleu)’ 2년 가까이 요리 유학을 다녀온 뒤, 만든 것이 바로 <요리인류>이다. 그리고 두 다큐멘터리를 통해 30여개국의 60여개 레시피가 방송을 통해 선보여졌고, 이 책은 그 중 31개의 레시피를 엄선해 만들어졌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밥상은 작은 우주와 같다. 이 놀라운 발견을 여러분도 '요리'를 통해 체험해봤으면 한다. 사실 이렇게 거창하게 말할 것도 없다. 음식만큼 일상에서 손쉽게 누릴 수 있는 행복이 또 있을까. 요리는 눈으로 보는 것보다 직접 하는 것이 더욱 즐거운 일이다. 요리하는 단순한 행복을, 많은 이들이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의 레피시가 매일 10분씩 방송되었기에 나도 부담 없이 즐겨보았던 프로그램이기도 한데, 그 방송을 볼 때마다 새삼 이욱정 PD에 대해서 궁금증이 일곤 했었다. 요리 프로그램의 연출이 되기 위해서 2년이나 요리 유학을 다녀온 이력하며, 그러다 PD가 결국 직접 앞치마를 두르고 레시피를 설명하며 요리를 하고 있는데, 그 모습이 너무도 순수하게 행복해 보였으니 말이다. 특히나 방송을 보면서 단순히 요리 과정을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직접 세계의 요리 인류들이 보여주는 과정이 있었기에 마치 여행 프로그램처럼 설레이는 기분 마저 들곤 했었다. 그렇게 짧아서 너무 아쉬운 방송들이 모여 한 권의 두툼한 책으로 탄생했다고 하니, 소장 가치는 물론 방송을 보지 못한 이들과도 함께 나눌 수 있을 것 같아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

 

이 책에 소개된 여러 레시피들이 인상적이었지만, 그 중 프랑스 동부에서 자유롭게 키우는 닭들의 에피소드도 그렇고, 7년 동안 미슐랭 가이드의 2스타 평가를 받아온 요리사 디디에 괴퐁의 요리도 참 좋았다. 닭 요리가 도대체 어떤 맛이기에 10만원이 넘는 돈을 주고 사먹는 다는 건지 놀라는 이욱정 PD의 감탄을 시작으로, 코코뱅이라는 요리를 만드는 과정 또한 어렵지 않았지만 특별했다.

"우리는 항상 누군가와 함께, 또는 누군가를 위해서 요리합니다. 그 관계 속에서 얻어지는 기쁨이 제 요리에 담긴 정신이에요. 그래서 저는 늘 요리하는 것이 지구상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행동이라고 생각해요."

,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요리사가 만드는 음식은 어떤 맛일까. 행복한 마음으로 만드는 요리에는 그만큼의 행복도 담겨 져 있을 것이다. 요리는 만든 사람과 먹는 사람 사이의 교감이기도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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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골동품 상점
찰스 디킨스 지음, 김미란 옮김 / B612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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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쏟아지는 신간의 홍수 속에서 고전을 '굳이' 찾아 읽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매일같이 부지런히 읽어도, 정말 읽고 싶은 책들을 다 볼 수는 없는 것이 짧은 인생이니 말이다. 그래서 내 기억 속에 고전이란 학창 시절에 읽었던 것이 거의 대부분인데, 이상하게도 사회에 나와서도 가끔 찾아보게 되는 고전들이 있다. 바로 영화나 드라마, 혹은 뮤지컬 등의 다른 매체로 만나게 되는 경우이다. 그만큼 시대를 넘어서서 변주될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라는 말인데, 백 여년 전에 쓰인 작품이 지금 만나도 전혀 낡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게 대중들에게 친숙한 고전 작가 중에 손꼽히는 작가가 바로 찰스 디킨스이다. <두 도시 이야기>, <위대한 유산>, <크리스마스 캐럴>, <올리버 트위스트> 등 너무도 유명한 작품들을 써낸 거장 찰스 디킨스의 새로운 작품이라니, 지금이라도 국내최초완역으로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정말 궁금하고 반가웠다.

넬의 심장이 희망과 확신으로 요동쳤다. 배고픔이나 추위, 갈증, 아픔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넬은 그저 예전에 누렸던 소박한 즐거움의 회복과 골동품 상점의 우울한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안도감, 타인의 시련에 무관심한 비정한 사람들로부터의 해방감, 할아버지의 건강 회복과 마음의 평온, 그리고 고요하고 행복한 삶만을 떠올렸다. 햇살, 시냇물, 들판, 여름날의 정경이 눈앞에 펼쳐지며 그 찬란한 그림에 어두운 색조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특히나 이 작품에 대한 당시의 일화가 너무도 유명해서, 무려 '19세기의 해리포터라고 불릴 만큼이었다고 하니 작품의 인기를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 작품은 1840년에 집필되었는데, 당시 신생잡지에 연재되어 당시 사람들이 주인공인 넬을 실존인물로 착각할 정도였다고 한다. 마치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를 대하는 당시의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다시 바꾸어 살려놓았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불쌍한 우리의 주인공 넬을 불행하게 만들지 말라는 편지가 쇄도했고, 그녀가 죽는 분량이 배포되었을 때는 전 영국이 울음바다가 됐다고 한다. 이 작품 역시 영화, 오페라, 연극, 뮤지컬은 물론 TV드라마 등으로 제작됐었고, 올 크리스마스엔 BBC에서 새롭게 제작한 드라마를 선보인다고 하니 정말 시간의 틈을 뚫고 살아있는 작품이라는 생각도 든다.

넬은 '지켜보는 사람도 어떤 보살핌도 없이 혼자인 아이이다. 어머니는 가난하게 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그녀는 오래되고 진기한 물건들이 가득한 작고 낡은 골동품 상점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고 있다. 하지만 노인과 소녀는, 거의 쫓겨나다시피 골동품 상점을 떠나게 되고, 이어지는 그들의 여정은 험난하기만 하다. 무려 칠백 페이지가 넘는데, 그들이 골동품 상점을 떠나는 것이 겨우 백여 페이지 정도의 지점이다. 그러니 그 뒤 수많은 페이지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란, 사실 어찌 보면 뻔하다. 결코 해피 엔딩이 될 수 없다는 의혹이 점점 짙어질 수밖에 없는, 촘촘히 짜여진 이야기의 모자이크는 페이지를 넘어갈 수록 묵직해진다. 끝이 어떻게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러니까 이 스토리에 반전 따위가 숨겨져 있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읽는 걸 멈출 수 없다는 건 이 작품 만의 강력한 힘이다. 사실 요즘 대부분의 신간들은 초반 삼, 사십 페이지에서 결판이 나지 않다. 사실 나는 그 정도 읽었는데도 나를 매혹시키는 점이 없는 작품은 끝까지 읽지 않는다. 시간을 더 투자하는 게 낭비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디킨스의 이 작품은 웬만한 작품 두 권 분량인데도 읽는 걸 미루거나 멈출 수가 없었다.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모든 일은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대부분 상대적이다. 만약 지금 넬이 이 소박한 장소의 평화에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인상을 받았다면 그건 지친 발로 여행하며 겪었던 어둡고 힘들었던 과정 때문일 것이고, 그것은 엄숙한 곳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깊은 울림과도 같은 것이리라.

......이곳에는 희미한 빛줄기, 돔형 지붕의 침하, 조금씩 허물어지는 벽, 낮게 내려앉은 바닥, 비문의 글이 닳아 없어진 장엄한 무덤, 대리석, , , 나무, 먼지와 같은 폐허의 공통된 상징물들이 모두 존재했다.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소박하게 살았던 사람과 부자로 살았던 사람, 위풍당당한 사람과 볼품없는 사람 이 모든 사람이 이곳에서는 평등했다.

누구 하나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사람도 없는 현실을 오롯하게 몸으로 부딪쳐 겪어 내야 하는 어린 소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탓하거나, 자신의 운명을 비관하거나 불행해하지 않는다. '이익이나 손해는 따지지 말고, 운도 시험하지 말고, 그저 할아버지와 함께하려 했던 미래만 떠올려보자'는 넬의 말은 그녀가 어른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먹먹하다. 그리고 그녀의 삶에 대한 그런 태도와 결단력은 매우 생경하게 느껴지면서도 대견스럽기만 하다. 자신의 앞가림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나이에, 할아버지까지 보살펴야 하는데도, '타인의 조언이나 도움의 손길을 전혀 기대하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 말이다. 자신과 할아버지, 두 사람의 생을 떠안고 책임감을 가지려는 넬의 모습은 애처롭고, 마음이 아프기만 하다. 아프다고 말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며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고, 점점 몸 상태가 나빠와서 자신이 서서히 죽어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두려움이나 걱정 따위는 하지 않는 모습은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감정 이입해서 제발 좀 영악해지라고 한마디 해주고 싶어질 정도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 오래된 작품 속 사람들의 모습과 현대의 우리네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지도 모른다. 타인의 슬픔에 무관심하고,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모습들 말이다.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세상에 기댈 것 하나 없는 사람이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나 갑자기 부자가 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말이다. 무려 175년 전의 작품인데, 이렇게나 리얼하게 현실을 투영하고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자신의 앞에 닥친 어려움에 쉽게 주저 앉고 마는 나약한 사람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숨거나 피하고만 싶어하는 무력한 사람들에게도 이 작품 속 넬이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 같다. 디킨스가이 책은 당신의 폐를 열어 주고, 당신의 얼굴을 씻어 주고, 당신의 안구를 정화하고, 당신의 치밀어 오르는 화를 잠재울 것이다. 그러니 마음껏 울어도 좋다라고 말한 이유를 알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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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를 부탁해 - 베스트 레시피북
JTBC <냉장고를 부탁해> 제작팀 엮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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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은 스타 셰프들이 많아서인지 공중파, 케이블 할 것 없이 요리 프로그램이 우후죽순 생겨나 선택할 수 있는 폭도 넓어졌고, 전문 쉐프들이나 할 법한 레시피를 쉽게 집에서도 따라 할 수 있게 되었다. 한참 '먹방'에 관한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더니, 이제는 '쿡방' 모든 방송사를 휘어 잡고 있다. 바라만 보는 먹방보다는 직접 참여해볼 수 있는 쿡방이 더 즐거운 오락이 된 것이다. 요리와 일상을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이런 방송들은 집밥 열풍으로 고스란히 이어져 건강한 라이프 스타일의 추구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거기다 젊고 실력있는 데다 재미있기 까지 한 인기 셰프들도 한 몫을 하고 있다. 바야흐로 대세는 요리하는 남자인 것이다. 오죽하면 '요섹남'이라는 단어까지 생겼겠는가.

 

 

바로 그런 셰프들을 대세로 만든 것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아마도 <냉장고를 부탁해>라는 프로그램이 아닐까 싶다. 나는 이 프로그램이 인기를 이렇게나 끌게 될지 몰랐을 때부터, 어쩌다보니 첫 회부터 오십 회가 넘어선 현재까지 꾸준히 지켜보고 있는 시청자이다. 물론 이 프로그램 외에도 스타 셰프들이 등장하는 요리 프로그램들이 꽤나 많지만, 나는 지금도 여전히 이 프로그램이 최고가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이 프로그램은 다른 방송과 달리 '요리를 먹는 대상'이 매우 중요한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내가 요리를 좋아하는 이유 또한 단 한가지이다. 내가 해준 음식을 먹고 기분 좋아할 사람을 떠올리며 요리를 하는 순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레시피를 줄줄 외워서 자동적으로, 혹은 단순히 끼니를 때워야 해서, 아니면 자신의 화려한 요리 실력을 뽐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요리를 먹어줄 단 한 사람의 만족감을 위해서 존재하는 셰프라니, 이건 정말 앞으로도 전무후무한 방송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것을 경쟁 구도를 만들어 게임처럼 풀어가고는 있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으니 말이다.

바로 그 <냉장고를 부탁해>의 주옥 같은 레시피를 모은 레시피 북이 출간된다고 해서 손꼽아 기다렸었다. 실제로 방송을 보다 보면 전문 셰프가 하는 어려운 레시피처럼 보이지 않고, 누구나 재료만 있으면 따라 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순간이 종종 있다. 그래서 나도 몇몇 요리들은 실제로 만들어서 먹어 본 적이 있고, 가족들의 좋은 호응도 얻고는 했다. 물론 셰프님들이 한 요리만큼의 멋진 비주얼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에 먹는 흔한 요리가 아니라서 그런지 먹는 즐거움을 잔뜩 주었던 시간이었다. 그 중에서 정말 쉽기도 하고, 평범한 주부인 내가 만들어도 맛있어서 여러 번 해 본 요리는 정창욱 셰프의 '괜찮아 목심이야'와 김풍 작가의 '자투리타타'이다.

 

정창욱 셰프의 요리에서보다는 고기 위의 사과, 야채가 너무 듬뿍이어서 비주얼은 좀 그렇지만, 맛은 정말 훌륭했다. 김풍 작가의 자투리타타는 기존에 먹던 프리타타나 오믈렛과 비슷한 듯 하면서도 다른, 정말 중독성있는 맛이었다. 프라이팬에서 천천히 익히는 것이 번거로워 오븐에 구웠더니 비주얼이 상당히 달라지긴 했지만 말이다. 다음에 도전해보고 싶은 레시피는 박준우 기자의 '라벤더 숲'과 미카엘 셰프의 '백 투 더 치킨'이다. 특히 미카엘 셰프의 요리들은 내가 사랑하는 닭을 재료로 독특한 레시피들이 많아 방송을 볼 때마다 도전 욕구를 마구 불러일으키곤 했었다. 그동안 방송을 보면서 이렇게나 멋진 레시피들을 한꺼번에 정리해두면 좋겠다 싶은 순간들이 많았는데, 이렇게 레시피 북이 나오니 소장용으로도 가치가 있을 것 같다. 인기 메뉴 92개의 레시피들이 상세하게 실려 있고, 정확한 조리 분량이라던가, 셰프들의 쿠킹 팁에 방송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읽을 거리들도 풍부하다.

 

티비 요리쇼를 보다 보면 엄마가 해준 따뜻한 밥을 먹는 것처럼 마음이 따뜻해졌고, 하루 동안 나를 스트레스 받게 했던 그 모든 순간들이 모조리 사라져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나를 괴롭히던 문제들은 내일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은 여유로움이 생긴다고 할까. 세상에 먹는 일만큼 중요한 게 또 뭐가 있겠냐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 어떤 문제도 더 이상 껴안고 있겠다는 마음이 사라지게 되니 말이다. 요리는 우리를 잠시나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데려가 주곤 한다. 지금 내 상황이 어떤지, 나를 기다리고 있는 문제 거리들이 얼마나 쌓여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일이 또 오늘 같이 반복될 거라는 거라는 걸 생각하면 얼마나 지루한가. 거기다 오늘도, 내일도 늘 비슷한 반찬에 끼니를 때우기 위한 식사가 된다면 식사 시간이 즐거울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 당신을 위한 따뜻한 책이 바로 이 책이 아닐까 싶다. 깨끗한 재료들과 정확한 레시피, 그리고 발과 프라이팬과 양념들로 정직한 노동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항상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요리이다. 그리고 그렇게 뱃속을 따뜻하게 데워줄 요리들은 우리의 허전하고, 외로운 마음마저 만져주곤 한다. 지금 요리하는 남자들에게 푹 빠져 있다면, 당장 내일 뭐 해먹을지 걱정이라면, 매일 똑같은 끼니 때우기에 지쳤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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