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스톰
매튜 매서 지음, 공보경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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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등 정보통신망은 국가와 사회의 기본 틀이다. 세계는 이와 같은 기본 틀을 흔드는 총성 없는 사이버 전쟁 중이며,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한컴 오피스 업데이트 파일로 위장한 악성코드가 대량 유포되고, 청와대 사칭 해킹메일부터 삼성그룹 메신저 위장 악성코드까지 북한발 사이버 테러 주의보를 내린 것이 바로 최근의 일이다. 사이버 테러 관련해서 가장 많이 뉴스에서 언급된 것이 바로 북한인데, 그들은 과거에도 디도스 공격으로 주요 정부기관·포털·은행사이트·외국기관 등을 일거에 무력화시킨 적이 있으니 말이다. 청와대 홈페이지, 언론사 서버, 은행 전산망, 서울메트로 및 코레일 전산망들이 죄다 해킹 공격을 받았으니 사이버 공격으로 인한 테러는 생각보다 더 심각한 문제이다. 실제로 나도 전 직장에 근무할 때, 회사가 사이버 공격을 받아 난리가 났던 일을 직접 경험했기에 사태의 심각성을 체감한 적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뉴스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자신이 직접 피부에 체감하는 일을 겪지 않는 이상 이런 일들로 인해 세상이 파괴될 수도 있다는 걸 믿지 못한다.

그저 마우스 클릭 한 번만으로 세상이 얼마나 끔찍해질 수 있는지 말이다.

"사람들은 사이버 전쟁에 대해 나름의 이미지를 갖고 있어. 사이버 전쟁이라고 하면 비디오게임이나 떠올려. 아주 깨끗한 전쟁이라고 여기면서 말이야. 실상은 그렇지도 않은데."

....."대량 살상이 가능한 새로운 사이버 무기를 개발 중이고 아무도 테스트를 하지 않은 것뿐이야. 핵무기라고 하면 일단은 너부터도 겁을 내지. 히로시마나 비키니 섬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사건은 잘 알려져 있으니까. 그런데 사이버 무기라고 하면 파괴력이 얼마나 되는지 아무도 몰라. 그러니까 양국의 정부 기관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서로의 사회기반시설을 사이버 무기로 공격할 수 있는 거라고. 크리스마스트리에 지팡이 모양 사탕을 매달 듯이 가볍게 최후의 심판 일을 도래시키는 거야."

여느 때와 같았던 추수 감사절, 뉴스에서는 미국 정부의 웹사이트가 해킹됐고, 항공모함을 두고 중국해군과 미 해군이 대치중인 상황에서 양국의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는 뉴스가 들려온다. 크리스마스 이틀 전, 마트의 바코드 스캔 장치가 작동을 멈춰 한 시간이 계산대에서 기다리던 성난 사람들은 돈도 내지 않고 물건을 들고 나가버린다. 이어서 보도되는 뉴스는 중국 전투기의 추락, 바이러스로 인해 모든 물류 시스템이 멈춰버리고, 조류 독감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는 소식들이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내리기 시작한 작은 눈송이들마저 사람들을 불길한 기분에 휩싸이게 만들고 있었다. 휴대폰 네트워크며 인터넷이 다운되고, 전국의 응급 의료 서비스가 엉망이 되고, 눈보라를 시작으로 폭풍우가 몰려온다는 소식까지 들려온다. 사람들은 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정확히 알 수 조차 없는 상황이다. 테러리스트들의 짓인지, 중국인들의 공격인지, 그냥 지나가 버릴 사소한 문제들인지 말이다.

크리스마스 이브, 아침에 일어났더니 전기가 끊어져있고, 창 밖으로는 눈이 휘날리고, 눈 섞인 돌풍이 창문을 두드리고 있다. 미국의 비상사태통제 시스템의 90퍼센트를 한 회사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사실 회사 하나만 해킹하면 이렇게 전 세계를 혼란에 빠뜨릴 수도 있는 것이다. '정부가 하는 일을 교란시키고, 보급선을 끊고, 대중교통을 마비시키고, 통신을 두절시키고, 민간인들을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겁을 주고, 산업 기지를 박살내고, 전기 공급이 차단되고, 사이버 공격은 이렇게 무시무시한 형태를 띠고 사람들의 삶을 서서히 파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무려 두 달 가까이 지속된다. 과연 혹독한 겨울 추위와 눈 폭풍 속에 고립되어, 전기, 난방, 수도가 끊기고 통신도 모두 두절된 상태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버텨낼 수 있을까.

복도에 앉아 있는데 이상한 기시감이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았다. 기시감이라고는 하지만 내 인생에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이레나가 70년 전 레닌그라드 포위전 때 겪었다고 한 일을 내가 여기서 다시금 겪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사이버 전쟁은 미래와는 무관하게 이미 과거의 일부인 듯했다. 마치 병에 걸린 벌레처럼, 서로에게 끝없이 고통을 가해온 인류의 본질 속으로 파고 들었다.

미래를 알고 싶으면 과거를 돌아보면 된다.

결혼 전 원룸에 살 때, 가끔 두꺼비 집 차단기가 내려가 정전이 되곤 했었다. 요즘 시대에 웬 정전이냐 싶겠지만, 어이없게도 강남 한복판에서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곤 했다. 건물 자체가 워낙 낡기도 했거니와, 오래 거주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터라 종종 일어났던 상황이었는데, 그럴 때마다 굉장히 난감했던 기억이 난다. 전기가 차단되거나, 인터넷이 끊기거나, 해킹으로 인해 개인정보가 털리거나 다들 한번쯤은 겪어 봤을 것이다. 사소해 보이지만 우리를 너무도 불편하게 만드는 그것들은, 현재의 사회 기반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가 그런 세상에 어떻게 익숙해져 있는지 여실하게 깨닫게 만들어 주곤 한다. 하물며, 이렇게 사소한 일들도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죄다 마비가 된다면 얼마나 무시무시할까.

매튜 매서의 <사이버 스톰>은 그렇게나 현실적으로 리얼한 지옥의 풍경도를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을 '극사실주의 종말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구분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여타의 종말소설, SF소설과는 다르게 실제 사이버 보안 및 컴퓨터 나노 기술 등 IT 전문가인 저자의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되어 정말 '있을 법한' 일들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이 더욱 무시무시한 재미를 선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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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 램의 선택
제인 로저스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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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곳곳에서 모체사망증후군 MDS(Maternal Death Syndrome)라는 바이러스가 나타난다. 여성이 임신을 하게 되면 감염되는 이 바이러스는 임산부와 태아 모두를 죽게 하는 무시무시한 병이다. 따라서 여성들은 임신하지 않기 위해 피아 이식형 피임제인 임플라논 시술을 받는다. 임신하고도 살아 있는 여자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은 MDS가 돌기 전에 임신한 것이라, 그들이 출산하고 나면 다시는 아기가 태어날 수 없다.  이게 무슨 끔찍한 소리일까. 결국 이 얘기는 현재 살아 있는 가장 어린 사람이 나이가 들면 그 사람이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사람이 될 거라는 거다. 더 이상 세상에 아이들은 없을 테고, 언젠가는 죄다 노인밖에 남지 않게 되고, 그들 마저 죽고 나면 인류는 멸종할 거라는 말이다. 무시무시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게 바로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MDS는 하나의 균열로 시작되었지만 이제 온 세상을 산산조각 내고 있었다.

냉동 배아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어미를 죽이며 태어나야 하는 그 아기들만이 희망이었다.

제인 로저스의 이 작품을 단순히 허구의 공상 과학 SF물이라고만 치부하기엔 조금 섬뜩한 것이, 바로 요즘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지카 바이러스 때문일 것이다. 중남미를 중심으로 확산되던 지카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퍼지고 있다는 뉴스가 연일 보도 되고 있으니 말이다. 지카 바이러스는 면역력에 문제가 없으면 감기처럼 살짝 앓다가 지나가거나, 아예 증상이 없는 경우도 다반사인데, 문제는 임산부라고 한다. 임산부가 감염이 돼서 태아에게 바이러스가 전이되면 신경계 세포를 공격해 소두증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소두증 태아는 임신 중이나 출생 직후 사망하거나 생존하더라도 뇌성마비, 시각 또는 청각 장애 등을 겪을 수 있다고 한다. 게다가 우리는 작년 한해 메르스 사태를 겪어봤지 않나. 해외에서 감염된 사람이 걸러지지 않고 입국하고, 그 대응에 실패하게 되면 확산하는 것은 시간 문제일 테니 말이다.

그래서 임산부를 공격하는 바이러스 때문에 인류가 결국 멸망하게 될 거라는 세기말적 설정이 너무도 현실적으로 다가와서 더욱 두렵게 느껴졌다. 특히나 이 작품이 독특한 것은 배경은 분명 '공상과학' 어딘가에 있는데, 진행되는 스토리는 '청소년성장' 드라마라는 점이었는데, 그 덕분에 더욱 공감대 형성이 쉽다는 장점도 있다. 열여섯 소녀 제시 램의 목소리를 통해서 이야기가 진행되어 세계가 직면한 문제를 굉장히 단순하게 판단하고 받아들이는데, 사실 정치적인 여러 부분들을 걸러낸 그것이 바로 일반 시민들의 피부에 와 닿는 진짜 이니 말이다.

제가 원하는 게 뭔지 아는 것뿐이에요."

"아니, 넌 몰라. 환상에 사로잡혀서 영웅이 되고 싶은 거야."

"제가 선택한 일을 할 거예요."

"세상을 구하겠다, 그거구나."

"그러면 안 돼요?"

아빠가 과장스럽게 한숨을 쉬었다. "넌 아직 어려서 이해 못 해.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가게 마련이야."

"대충 살고 싶지 않아요. 제 삶이 쓸모 있기를 바라요."

제시 램의 아빠가 인공수정 전문 병원에 있는 배아 연구소에서 일하는 덕분에, 그들 가족은 누구보다 발 빠르게 현재 진행되는 상황과 대응책에 대한 소식을 접하게 된다. 과학자들이 MDS에 대처하는 해결책으로 만들어낸 것은 일명 '잠자는 숲 속의 미녀'라는 방법이었다. 임신 초기에 MDS 증상을 약화시키고 마취제를 투여하게 되면 아기가 살 수 있다는 것이다. , 약으로 산모는 혼수상태에 빠지고, MDS는 임신중인 임산부의 두뇌를 파괴한다. 그렇게 임신 막바지에 의사들이 죽은 산모로부터 제왕절개수술로 아기를 꺼낸다는 것이다. MDS가 아기가 아니라 엄마를 공격하므로, 아기는 엄마 몸에서 필요한 것을 계속 얻을 수 있다는 논리인데, 사실 누군가 태어나게 하기 위해 죽어야 한다는 논리는 끔찍하기 그지 없다. 이어서 마련된 두 번째 대책은 MDS 백신인데, MDS가 나오기 전에 시험관아기 시술을 위해 냉동실에 보관된 깨끗하고 건강한 배아에게 예방접종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MDS가 전세계 모든 사람에게 퍼진 상태라 이 방법을 시도하려는 여자들 역시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만 한다. 어미를 죽이며 태어나야 하는 아기들만이 유일한 희망인 세상이라니. 소름이 끼친다.

그렇게 미래가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세계를 살아내고 있는 열여섯 소녀 제시 램은, 인류의 역사를 바꿀 수 있는 결정을 하게 된다. 그녀의 생각은 단순했고, 순수했다.

"세상이 나아지기를 바란다면, 남한테 이래라저래라 해봐야 소용이 없어요. 아빠가 말한 것처럼 누군가는 첫 시위를 당겨야 해요."

왜냐하면 이것 말고 세상을 다시 정상으로 되돌릴 방법이 없었기에. 어린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바로 대리모가 되어 아기를 탄생시키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떠들기만 하고, 걱정만 하는 것은 사실 아무 소용도 없다. 그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으니까. 유일한 해결책은 바로 '새롭게 시작하는 것'뿐이다. 실제로 일어나게 '행동'하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이다. 제시 램의 부모와 친구들은 그녀의 선택을 말리지만, 그녀는 스스로의 결정에 대해 이건 절대 미친 짓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라며 자신의 소신을 꿋꿋하게 밀어 붙인다. 그 결과 아버지에 의해 감금 당하기까지 하지만 말이다.

'나만 아니면 돼'가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 '나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이 어린 소녀의 결연한 의지는 무모해 보이지만, 그만큼 묵직한 감동을 준다. 나라면 그럴 수 있을까. 당신이라면 그럴 수 있을까. , 이렇게 여운이 길게 남는 SF 문학은 처음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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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바 1 - 제152회 나오키상 수상작 오늘의 일본문학 14
니시 카나코 지음, 송태욱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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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일생을 쭈욱 나열한 것만큼 지루하면서도, 재미있는 것이 없다. 너무도 뻔해서 굳이 궁금하지 않으면서도, 나와 닮은 점과 다른 점을 비교해보고 싶은 마음에 호기심이 슬며시 생기니 말이다. 우리가 SNS를 하는 것도 그와 유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자신의 일상을 공개해서 공감을 받거나, 혹은 남의 일상을 훔쳐보면서 대리만족을 받거나 위로를 받거나. 니시 가나코의 <사라바>는 한 인물이 태어나면서부터 삼십 대인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여과 없이, 낱낱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매우 담담한 어조로, 특별한 클라이막스 없이 담백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는 1권이 끝이 날 때까지 주인공의 현재가 등장하지 않을 정도로 자세하게 어린 시절부터의 시간을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어느 순간은 그런 기분마저 든다. 꼭 누군가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고 있는 것 같은, 그런 기분 말이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칭찬하고 때로는 안아주었다. 그래서 나는 점점 더 고분고분하고 착한 아이가 되었다. 왜냐하면 '고분고분하고 착한 아이로 있자'라고 강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누나의 폭거는 손해였다. 고분고분하고 착한 아이로 있으면 있을수록 어머니나 주변 어른들은 내가 바라는 애정을 쏟아주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아직 손해나 이익이라는 말을 모르는 어린아이였지만 그 감정은 이미 경험했다. 그리고 네 살이 되어 유치원에 들어갈 무렵에는 완전히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 왼발부터 등장했다' 며 이야기는 주인공이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순간에서 시작한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느 정도는 아이의 성격이 결정된다는 얘길 들었던 터라, 그가 스스로 자신다운 등장이라고 생각한다는 부분이 재미있으면서도 공감되었다. 전혀 모르는 세계에 곧바로 뛰어들지 않고 공포부터 느껴 우선 멈췄다가 어쩔 수 없다는 체념으로 그 세계에 발을 내딛는 성격을 가진 아유무와 달리 태어날 때부터 요란했던 누나의 성격을 비교해보면 더욱 그렇다. 2주나 먼저 나오려고 했다가, 정작 출산 순간에는 산도에 내려와서는 밖으로 나오지 않아 엄마가 빨리 나오라며 분노에 휩싸여 소리를 쳤던 누나의 탄생은 커가면서 어딘지 세상에 시비조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애초에 탄생시의 분노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니 말이다.

미남미녀 아버지 어머니를 닮아 준수한 외모의 아유무에 비해 얼굴과 몸매에 문제가 있었던 누나는 매사 어머니와 대립했고, 누나와 어머니 사이에서 허둥거리던 아버지의 역할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아유무는 그들의 대립에는 철저하게 객관적인 자세로, 그리고 되도록 얌전히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아왔다. 외모 덕분에 살짝 만 붙임성을 보여도 순식간에 사랑을 받는 캐릭터라 너무도 특이한 행동만을 일삼고 문제를 일으키는 누나를 대신해 모두에게 사랑 받으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그들 네 가족은 행복했다.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자랐고, 세상은 유독 그에게 관대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한 통의 편지가 모든 걸 바꿔 놓게 된다.

"내가 믿을 것은 내가 정해."

내 발 밑을 개미가 기어갔다. 검은 몸은 밟으면 바로 찌그러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아유무."

나는 개미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너도 네가 믿을 것을 찾아. 너만이 믿을 것을.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면 안 돼. 물론 나하고도, 가족하고도, 친구하고도. 그냥 너는 너인 거야. 너는 너일 수밖에 없는 거란 말이야."

 

해외 부임 중인 아버지 덕분에 이란에서 태어나 유치원 때 일본에 왔다가, 다시 이집트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일본으로 돌아와 생활했던 그들 가족은 부모의 이혼과 엄마의 요란한 연애, 아빠의 출가에다 누나는 이상한 종교에 빠져 있고 점점 더 단란했던 가족의 모습에서 멀어져 간다. 그러다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유무는 서른 살이 되어 있었다. 여린 마스크와 훤칠한 몸은 여전했으나, 최근 들어 머리가 빠지기 시작한다. 어릴 때부터 엄마를 닮은 용모 덕을 톡톡히 봤던 탓에, 그런 용모에 비뚤어진 열등감을 가졌던 그가 머리가 빠지기 시작하면서 숱이 적어지자 오히려 여린 마스크에 방해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발모 클리닉에 가고, 온갖 종류의 모자를 쓰고, 그러다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아 모든 생활을 인터넷에 의존하게 된다. 그렇게 열등감을 가지게 되자 등이 구부러지고, 말이 입안에서 웅얼거리게 되며, 상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게 되어 그의 인상조차 바꿔버리고 만다.

네가 믿을 걸 누군가한테 결정하게 해서는 안 돼.

아이러니하게도, 온갖 이상한 행동만 일삼으며 온 생을 세상에 분노를 표출하는 것으로 살았던 그의 누나가 절망 속에 남겨진 그에게 중요한 말을 건넨다. 무슨 일이든, 어떤 상황에서든 자기 스스로를 믿으라고. 지금까지 내가 믿어온 것은 내가 있었으니까 믿었던 거라고. 내가 나인 한은 믿음이 내 안에 있는 것이고, 스스로를 믿어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아유무는 누나에게서, 집에서 도망치고 만다. 누나는 어디선가 실컷 인생을 보내고 와서 우쭐해있는 거라고, 가족들로부터 도망간 아버지도, 누나를 간단히 용서한 어머니도, 자신을 배신한 친구와 애인도, 더 이상 일을 주지 않는 출판사 사람들도 모두 나쁘다고. 그들만이 나쁘고 자신만 나쁘지 않다고 세상에 귀를 막아야 버틸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머리가 벗겨지고, 무직이 된 서른네 살의 그는 자신이 혼자라는 걸 깨닫고, 초등학교 시절에 친했던 친구를 찾아 이집트로 간다. 그리고 제대로 말이 통하지 않았던 그들이 만나 대화를 나누는 그 순간, 그 동안 이 작품이 지루하게 쌓아왔던 수많은 이야기의 댐이 폭발한다. 이 장면을 위해서 무려 두 권이나 되는 분량 동안의 소소하고, 일상적이고, 사소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필요했던 거구나 싶어 한 순간 페이지를 멈추고 시간의 결을 느껴 보았다. 나는 나, 내가 나일 수 있을 때야 비로소 세상이 존재한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던 것 같다. 우선 스스로를 믿어야 뭐든 제대로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 작품 덕분에 살아만 있다면, 누구에게나 결정적인 그 순간이 찾아올 거라는 걸 믿고 싶어졌다면 과장일까. 극강의 한파 속에 움츠려든 마음 한 구석이 조금은 따뜻해지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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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 제21회 전격 소설대상 수상작
기타가와 에미 지음, 추지나 옮김 / 놀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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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생활을 십여 년 정도 하고 있는 내 동생은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간수치 검사를 하고, 약을 타온다. 잦은 야근과 휴일 근무로 인한 스트레스에다, 불규칙적인 식사 습관까지 더해 간수치가 높아져 한 동안 병원에 입원도 했었지만, 의사는 스트레스 받지 말고 좀 쉬어야 한다지만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운가. 결국 몸 상태가 극도로 나빠져 회사를 그만두고 6개월 정도 휴식을 취했지만, 마냥 놀 수 만은 없어 다시 일을 시작했고, 현재는 여전히 주6일 근무, 가끔은 7일 근무도 하면서 휴일 없이 일을 하고 있다. 문제는 이 회사가 야근에 휴일 근무를 해도 별도 수당이 없는데다, 직원들을 복지 정책도 현저히 낮다는 것. 그러니 능률도 떨어질뿐더러 성취감도 생길 수가 없고, 스트레스는 갈수록 늘어만 가고 있다. 하지만 사실, 어디 내 동생만 그렇겠는가. 이 땅의 수많은 직장인들이 내용만 다를 뿐, 거의 비슷한 강도의 스트레스로 자신의 건강까지 해쳐가면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을 것이다.

나도 한때는 매일같이 회사를 때려 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했던 직장인이었다. 물론 지금은 육아에 치여 직장 생활보다 더한, 24시간 풀 타임 근무(?)를 하고 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그래서 한 동안 잊고 있었던 직장 생활의 악몽을 이 책 속의 아오야마를 보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언제부터 웃지 않게 되었을까. 비디오를 되감은 듯한 시간을 그저 소화해 나갈 뿐인 하루하루.

아무리 열심히 해도 월급은 제자리걸음. 실적을 올리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상사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직원에게는 조금의 서비스도 없으면서 서비스라는 이름의 잔업만이 늘어간다.

토요일 출근은 당연지사. 일요일에 죽은 듯이 자고 있다가 요란한 휴대전화 소리에 억지로 눈을 뜬다. 수화기 너머로 부장이 거래처에서 클레임이 들어왔다고, 내 담당이라고 미친 사람처럼 외친다.

뭐야, 원래는 선배 담당이었잖아. 까다로운 거래처만 떠넘기지 말라고. 내가 입사하기 전 일을 이야기하면 어쩌라는 거야. 애초에 선배가 그만둔 것도 네놈 탓이잖아. 망할 상사.

매일 같이 6시에 기상해서, 8 35분에 회사에 도착하고, 19 35분에 상사가 퇴근하고 나면 나머지 일을 마무리하고 21 15분이 되어서야 마침내 퇴근, 늦은 전철을 타고 22 53분에 집에 도착하면 25시에 잠자리에 든다. 이것이 바로 아오야마가 일주일 중에 무려 엿새를 보내는 규칙적인 스케줄이 되겠다. 새벽에 출근해서 점심 시간에 잠깐 숨 돌리고 야근까지 하고 집에 돌아오면, 이미 녹초가 되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쓰러지듯 잠에 빠져 들고 나면 어느덧 새벽, 다시 좀비처럼 일어나 회사에 가고 반복적인 생활은 마치 기계처럼 아무 생각 없이 출퇴근만 반복하다 보면 연애를 할 시간도, 친구들을 만날 시간도 사라져 인간 관계까지 나도 모르게 정리가 되고 만다. 그렇게 나이를 먹다 보면 어느 순간 불쑥, 그런 생각이 들 것이다.

'대체 내가 이 일을 무엇을 위해 하고 있는 거지?'

아오야마가 입사하고 석 달 동안 생각했던 '사람은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처럼 말이다.

<미생>에서 장그래는 김 대리에게 직장을 다니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김 대리는 김 대리는 딱히 다른 게 없다면 결국 돈과 승진 아니겠느냐고 답했다. 과연 그럴까. 어쩌면 돈과 승진만 바라보며 직장 생활을 하기에, 우리의 매일매일이 지옥 같았던 건 아닐까. 당신들은 무엇을 위해 일을 하고 있나.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에게 정직해 볼 필요가 있다. 이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 인생이니 말이다.

"나는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다들 잠시 숨을 멈추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꾸기는커녕 이 사회 하나, 이 부서 하나, 마주한 사람 한 명의 마음조차 바꿀 수 없는, 이토록 보잘것없고 장점 하나 없는 인간이 나예요."

어느새 눈물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이런 나라도 한 가지만은 바꿀 수 있어요. 바로 내 인생입니다."

아오야마는 여느 때처럼 늦은 퇴근 길 지하철 승강장에서 상사의 전화 연락을 받고는 한숨을 푹 내 쉰다. 어차피 내일도 출근할 텐데 왜 이리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고, 그는 끈질기게 울리는 진동을 무시하고 휴대전화 전원을 꺼버린다. 집에 돌아가서도 항상 다음날 출근에 대한 부담으로 늦게까지 잠이 들지 못했기에 차라리 여기서 자버릴까 싶은 생뚱 맞은 생각을 하며 천천히 눈을 감는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선로에 떨어질 뻔한 순간, 누군가 자신의 팔을 꽉 잡고는 그를 구해준다. 떨어진다고 각오한 순간, 갑작스런 힘에 이끌러 다시 현실로 돌아와 멍해 있는 아오야마에게 자신이 초등학교 동창이라며 오랜만이라고 반갑게 떠든다. 정작 아오야마는 그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엄청난 기세로 말을 이어가며 반가워하는 그의 모습에 얼떨결에 자신도 그의 동창이라고 믿어 버린다. 그렇게 만난 그들은 자주 연락을 하고, 만나서 술도 마시고, 쇼핑도 함께, 좋아하는 영화도 보면서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커플처럼 지낸다.

야마모토는 아오야마에게 이런 저런 조언을 하면서 그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고, 어느 순간 아오야마는 직장에서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소리도 듣게 되고, 영업 성적도 조금씩 올라가며, 일에도 점차 자신감이 붙게 된다. 하지만 그러다 야마모토가 자신의 동창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에 대해 찾아보다 그가 3년 전 자살했다는 뉴스 기사를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여태 자신의 곁에 있었던 야마모토는 누구인가? 유령이란 말인가? 이야기는 가벼운 에피소드로 직장인들의 공감을 얻어내기 시작하자, 미스터리 적인 요소를 도입해 페이지 넘기는 속도를 더욱 빠르게 만들어준다. 그렇게 궁금증을 증폭시킨 상태에서, 아오야마는 대형 사고를 치게 되고 자신이 거의 체결해놓았던 큰 계약 건에서 밀려나게 된다.

역시 나는 뭘 해도 안 되는 건가.

아오야마는 한계에 다다르게 된 것이다. 자신은 쓸모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은,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는 생각에 이르고, 회사 옥상에서 높은 펜스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이 열려 있는 그 순간만을 기다리게 된다. 그는 결국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그리고 대체 야마모토의 정체는 무엇일까. 제목만 보고 별 생각 없이 가볍게 읽기 시작했던 이 책은 미스터리한 긴장감과 유쾌한 재미와 따뜻한 감동까지 안겨주었다. 세상 살기 참 힘들지만, 그래도 한번뿐인 내 인생 내 맘대로, 멋지게 한번 살아보자 싶은 의욕까지 불러일으키며 말이다. 오늘도 희망 없이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는 이 땅의 수많은 직장인들에게, 밥벌이의 고단함에만 치여 있지 말고, 언젠가는 웃으며 회사를 나가는 그 날이 오기를 바래본다. 인생이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는 걸 잊지 말라고, 살아만 있다면 인생이란 의외로 어떻게든 되게 되어 있다고 말이다. 그러니 자신을 믿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을 기억하고, 내일을 위해 다시 한번 발걸음을 내딛어 보자. 당신은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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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각의 여왕 - 제2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이유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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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지금 당장이든, 혹은 내일이든, 아니면 수십 년 후라도. 시기만 다를 뿐이지 태어난 이는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니 말이다. 바쁜 일상에 치여 정신 없이 하루를 보내느라, 우리가 잠시 잊어 버리고 살 뿐, 죽음은 그렇게 우리 곁에 함께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여태 가까운 이의 죽음을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장례 지도사 혹은 유품 정리사 등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참 낯설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언젠가는 겪게 될 죽음인데, 뭐 하러 나와 상관없는 타인들의 수많은 죽음을 곁에서 목격하는 직업을 선택했을까 싶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를 수도 있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파지에 빠져 들다 보면 작가가 직접 그녀 귀에 대고 말해줄 때가 있다.

'왜 태어났는지 왜 사는지 왜 죽는지 아니?'

열심히 책을 읽는 것에 대한 보상이었다.

'아니 몰라.'

'모르는 게 당연해. 태어나고 죽는 데는 이유가 없거든.'

해미는 냉소적 비웃음이라고 생각했다. 작가가 세상에 보내는 냉소와 조롱과 야유. 그것이 실은 위로의 말이라는 걸 해미는 그 순간 깨달았다. 죽고 사는 데 아무런 이유가 없다...... 해미는 손에서 힘을 빼고 물러섰다. 이유가 없다잖아.

해미는 재수학원을 다닌 지 석 달 만에, 고물상을 운영하는 아빠의 일을 돕기 시작한다. 할머니도, 엄마도 병을 앓다가 떠나 버린 뒤 그들에게 남은 거라고는 고물상 밖에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아빠가 몰래 하던 유품정리 일을 시작하게 되고, 본격적으로 유품 정리사로 살아가게 된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던 첫 번째 그녀의 작업 현장에서는 오래도록 앓아 누워있던 흔적이 남는 방에는 유황 타는 냄새도 심하게 났고, 분뇨 냄새에, 생선 썩는 내도 났다. 그녀는 방독면을 쓰고, 위생복도 입고, 모자도 쓰고는 악취 제거 제부터 꺼내 들었다. 쓰레기를 모두 처리한 뒤 쓸만한 유품을 정리해서 박스에 담고, 냄새의 진원지를 하나씩 처리하고, 덩치 큰 가구들을 해체하고, 분해하며 죽음의 흔적들을 차례로 지워나갔다. 마지막으로 폐기물 처리장에서 유품들을 소각하고는 아파트로 돌아와 샤워를 여러 번 하고 구석구석 몸을 씻었지만,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몸이 푹 꺼지는 듯한 기분으로 그녀는 아빠의 손에서 바통을 이어 받게 된 것이다.

해미라는 캐릭터가 워낙 밝고, 엉뚱하기에 그렇겠지만, 그녀는 죽음을 꽤나 무심하게, 덤덤하게 여기며 말한다. "자연사를 했든, 자살이든 살인이든, 죄다 똑같아. 부패가 되고 가스로 복부가 부풀어오르고 복부에 든 가스가 새어나오면서 부패액이 흘러나와. 인간이라는 형태가 무너져 내리는 거지...." 유품 정리사 업무를 장에게 설명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인간도, 죽음도 모두 그저 티비 속에 나오는 만져지지 않는 형태의 무엇인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짐작하던 '죽음'과 실제의 '죽음'은 이렇게 다르구나 싶어, 서글퍼지기도 했고 말이다

"있는 줄도 몰랐네."

"일이 끝나니까 따뜻하게 데운 보리차를 가져다 주더라는데?"

"그게 그애가 준 거였구나."

해미는 소파에 몸을 더 깊숙이 묻으며 말했다. 전혀,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 기억할 필요도 없었다. 해미는 종종 작업장에 나타난 의뢰인이나 집주인을 보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데도 몰랐다. 안과에 가봤지만 눈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정씨는 안과가 아니라 정신과에 가보라고 했지만 그녀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보고 싶지 않으니까 보이지 않는 것 아니겠냐고 했다.

스스로의 죽음을 부탁하려는 자살 시도자가 있는가 하면, 동거 남이 자살한 방을 정리해달라고 요청한 여자는 며칠 뒤 뱃속 태아를 버려두고 도망가 버리기도 한다. 이렇게 죽음을 함부로 취급하는 사람들의 에피소드들 또한 죽음이 누군가를 파괴해도 삶은 계속된다는 작가의 덤덤한 목소리를 묵직하게 전달한다. 어릴 때부터 작가가 될 거라고 믿었던 작가는 어머니가 서른 후반에 병으로 돌아가신 뒤, 책을 인공호흡기처럼 끌어안고 살았다고 한다. 자신의 생이 중학생이었던 그 나이에서 끝난 거라고 느껴졌기에, 이후의 삶이 일종의 덤 같다고 생각하면서. 너무 어린 나이에 겪은 죽음은 이렇게 한 사람의 삶의 행로를 완전히 바꾸어 놓기도 한다. 그녀는죽음에 지배된 삶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말하는데, 이 작품은 그런 그녀의 생과 이어져 죽음을 독특한 형식으로 풀어놓고 있다.

갈수록 유품 정리사가 필요한 일이 많아진다고 한다. 고령화도 그렇고, 생활고로 인한 5-60대의 자살률이 높아서란다. 매년 증가하고 있는 독거노인들의 홀로사도 그렇고, 50대 중 장년들의 고독사도 그렇고, 쓸쓸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에게는 연락할 가족도 없고, 특별한 지인도 없기에, 죽는 순간까지 외롭고, 죽은 이후에도 아무도 그들을 수습하지 않기에 더욱 고독하다. 엄마의 죽음에 방관 혹은 기여했을지 모른다는 트라우마 속에서 죽은 자들의 유품을 처리하며 살아가는 해미의 이야기는 끔찍한 일에 무심하고, 무거운 일엔 활기차게 진행되다 어느 순간 스스로 소멸하게 된다. 이 험난하고 서글픈 세상 살면서 그저 그런대로 괜찮다면, 그것이 오히려 비정상인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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