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세상에서 커글린 가문 3부작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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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스터 작품으로는 최고라 칭해지는 마리오 푸조의 소설 <대부>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영화 <대부> 역시 액션 보다는 가족드라마를 통해서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했었다. 아버지와 아들, 남자와 여자,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을 도모하는 가족이라는 보편적인 테마를 갱들의 권위로 그려내며 가족의 질서를 패밀리의 질서로 확장한 것이다. 살인과 폭력이 난무하고 배신과 밀고는 덤인 갱스터 작품에서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이 '가족'이라는 것은 사실 참 아이러니하다. 하긴 뭐 세상에서 평생 정직하게 돈을 벌어본 적은 없고, 가장 나쁜 짓만 골라서 하며,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라도 자신의 가족만큼은 끔찍하게 챙길 테니 그리 이상한 게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누군한테 무릎을 꿇을 필요도 없고 줄을 설 필요도 없으며, 직접 규칙을 만들고 삶을 만들면서, 매일 아침 일어나 시스템에 엿 먹일 방법을 궁리하는 것'이 바로 갱이라지만, 사실 집에서는 누구보다 다정한 남편과 자상한 아버지가 되는 것 또한 그들이다.

데니스 루헤인의 이 작품 역시 '가족' 드라마를 놓치지 않고 읽어야 한다. 그래야 이 작품의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했을 때, 더욱 애처롭고 쓸쓸한 여운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올해 만났던 책 중에서 가장 애잔하고 마음이 아픈 결말이 아니었나 싶다

악명 높은 은퇴한 갱, 조 커글린을 만난 얘기는 거의 아무한테도 하지 않았다. 아내한테 말해 볼까도 했지만 그저 버벅거리기만 했다. 도저히 번잡해서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만남은 짧았으나, 전후를 막론하고 그렇게 슬픔과 애정과 권력과 카리스마는 물론, 악행의 가능성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아내한테 조 커글린을 한마디로 설명하고자 했을 때 나온 단어는 '무한한 능력'이었다.

은퇴했지만 아직도 여전히 영향력이 대단한 조 커글린은 어느 날 자신이 살인청부의 타깃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누군가 당신을 죽이려 해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특별히 누군가를 엿 먹인 적이 없었다. 게다가 합리적으로 볼 때 전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는 현재 꽤 많은 사업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으며, 그가 없다면 금전적으로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수많은 거물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갱으로 활동하던 과거에도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적이 있었으나 그때는 그래도 타당한 이유라도 있었으니까. 조 덕분에 떼돈을 벌게 된 수많은 거물들은 앞으로도 그가 잘나가기를 기대하고 있다. 대체 '왜 나지?' 하지만 이 소문이 아무리 막연하고 비현실적이고 근거가 빈약하더라도, 자신의 죽음에 대한 것이었기에 그는 아무리 해도 살인청부에 대해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혹시라도 죽게 되면 홀로 남겨질 아들 토머스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조는 자신을 죽여 이득을 볼 사람이 누구인지 따져가며 자신의 살인청부 의뢰자를 찾아 헤맨다. 그렇게 이주 동안이나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살도 빠지고, 눈 밑에 다크서클이 생기고 머리카락까지 빠질 정도로 고민하는데, 그는 살인청부 전날까지 답을 찾지 못한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그가 죽기를 원치 않는다며, 살인청부는 농간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조는 마음 속 불안을 억누를 수가 없다. 조는 누구든 살해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냉철한 전직 갱이자 사업가지만, 아들 토머스를 고아로 남겨줄 수는 없다는 아버지로서의 절박함에 미련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보자면 필요에 따라서는 누군가를 살해할 수도 있는 '나쁜 사람'이지만, 아들에게만은 그저 '특별히 좋은 사람이 아닐 뿐'이라고 자신의 일을 설명하고 싶은 평범한 아버지였으니 말이다. 

"아들을 사랑하나?"

"세상에서 제일."

"그럼 당신 생각은 때려치우고 엄마를 선물하게."

"아들은 언젠가 떠나. 늘 그래. 평생 같은 방에 앉아 있다 해도 아버지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 하니까."

"나도 아버지한테 그랬소. 당신은?"

"비슷해. 그렇게 어른이 되잖아? 아이들은 매달리고 사나이는 떠나고."

이 작품은 데니스 루헤인의 <운명의 날>, <리브 바이 나이트 : 밤에 살다>에 이은 커글린 가문 3부작의 완결편이다. <운명의 날>에선 인종, 남녀 갈등의 정점이던 1919년 미국의 최대 경찰 파업을 다루었고, <리브 바이 나이트 : 밤에 살다>에서는 술이 마약처럼 밀거래 되던 금주법 시대를 배경으로 화려한 갱들의 시대를 그렸었다. 이번 <무너진 세상에서>는 커글린 가문의 막내아들 조 커글린의 마지막 이야기가 묵직하게 펼쳐진다. 수십 년 동안 친구였던, 마치 형제와도 같았던 사람에게도 등을 돌릴 수 있는 비정함이 작품 전반에 흐르지만, 작품의 마지막 장면을 만나게 되면 너무도 인간적으로 마음이 아파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죽은 자들이 거리를 가득 채우고 인도를 메우는 그 장면,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에서 울컥하는 감정에 채 취해보기도 전에 작가는 독자들의 등을 떠민다. 매정하게도. 이게 현실이라고. 그래 나도 안다. 결국 이렇게 끝나버릴 거라는 걸. 하지만 믿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독자들이 믿고 싶어하는 환상을 매몰차게 걷어 내버리는 데니 루헤인의 솜씨는 가히 역대 급이다. 

스티븐 킹이 이 작품을 일컬어 '대부 이후 최고의 갱스터 소설'이라고 했으니, <대부>의 비토 코를레오네식으로 말해 보자면, 이 작품은 '거절할 수 없는 제안'과도 같다.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라도,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그냥 하고 잊어버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남자들만의 세계, 갱들의 세계이니 말이다. 당신은 이 책을 꼭 만나보아야 한다. 3부작이니 순서대로 읽으면 더 좋겠지만, 사실 이 작품부터 읽기 시작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 진짜 남자들의 세계가 알고 싶다면, 가족을 사회적인 의미로 읽어 보고 싶다면, 그리고 끝장나게 애잔하고 쓸쓸한 마지막 장면을 만나보고 싶다면 이 책을 놓치지 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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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스카우팅 리포트 2016 - 10개 구단에 대한 전문가 분석이 담긴 야구팬의 필수품 프로야구 스카우팅 리포트 2016
이효봉 외 지음 / 이덴슬리벨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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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한때는 일년 내내 야구 시즌만을 손꼽아 기다린 적이 있다. 야구가 3월 시범 경기를 시작으로 무려 9, 늦어지면 10월까지 대장정을 하니, 야구가 없는 계절이란 겨우 네 달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매일같이 함께 하던 야구 경기를 막상 볼 수 없게 되면, 그 짧은 네 달이 마치 사 년이라도 되는 듯, 어서 빨리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되며 다시 야구를 볼 수 있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아무래도 야구라는 경기의 특성상, 마치 뉴스처럼 거의 매일 매일 경기가 있다 보니 습관이 되고, 그것이 중독이 되고, 그렇게 되었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아뭏튼 야구는 나의 활력소이자, 친구이자, 연인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나,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과거형' 문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유는 이제 갓 16개월이 되는 아기 덕분인데, 모든 생활의 중심이 아기에게 맞추어져 있다 보니 야구는커녕, 웬만한 티비 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산지 어언, 2년 가까이 되어 가고 있으니 뭐. 하지만, 아기가 뱃속에 있을 때도 야구 태교를 했고, 벌써 아기와 함께 야구장 갈 날을 꿈꾸며 아기용 유니폼까지 맞춰 놓고 있으니, 곧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야구를 볼 수 있으리라 꿈꾸며... 곧 시작될 새로운 시즌을 이번에도 역시나 기대해본다.

나보다 더 야구 마니아에 거의 전문가 급 수치들을 줄줄 외우는 남편은, 내가 매년 챙겨보는 스카우팅 리포트에 별 관심이 없지만 (왜냐하면 여기 있는 정보들이란 그에겐 이미 새로울 것도 없는 것들이라;;;) 그럼에도 나는 꿋꿋하게 이 시리즈를 사 모으고 있는 중이다. 뭐랄까. 이 리포트가 일종의 야구 역사가 되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야구의 역사라는 것에는 나의 개인적인 시간들도 함께 담겨 있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스카우팅 리포트 2012년 버전을 펼치면 그 해에 활약을 펼친 주요 선수들과 팀의 모습 위로 당시 나와 내 남편의 추억이 함께 펼쳐지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스카우팅 리포트를 매년, 야구 시즌이 시작하려고 할 때마다 꼭 챙겨본다.

 

 

올해는 특히나, 내가 응원하는 팀에게 중요한 해인데, 이유는 주요 선수들이 죄다 해외로 떠나버렸고, 그나마 남아 있던 주요 선수들도 이적이나 트레이드다 팀을 떠나서... 정말 빈약한 라인업이 되어 버렸다는 것. 그래서 작년, 재작년까지만 해도 우승후보였던 팀의 전력이 바닥으로 치닫고 말았다는 건데, 시범경기가 시작하고 이제 겨우 일주일이 조금 지났건만... 불길한 예감은 빗나간 적이 없다던가... 비록 시범 경기 순위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우리 팀이 꼴지를 하고 있다. 마음이 아파서 시범 경기를 보러 가려던 계획도 취소 해버리고 (사실 주말 경기에 입장료를 무려 만원이나 받는 것도 이유가 되긴 했지만.. ) 방송해주는 경기도 거의 보지 않고 있다. 뭐 보고 싶다고 내가 시간 맞춰 경기를 보고 앉아 있게 놔둘 16개월짜리 우리 아기도 아니지만 말이다. 암튼... 그러다 보니 어째 시즌이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살짝 김이 빠져 버린 느낌마저 드는 2016년 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증이랄까. 그런 게 남아서 마냥 모른 척 할 수만은 없는 게 야구라 오늘도 스카우팅 리포트를 뒤적이며 과거(그래 봤자 작년, 재작년이지만)의 영광을 추억하고 있는 요즘이다.

이번 스카우팅 리포트에는 올해 달라지는 규정부터, 전문가들이 진단하는 팀의 순위와 개인 타이틀 선수들, 그리고 10개 구단 400명의 선수들을 완벽히 분석한 내용들이 알차게 수록되어 있다. 어서 야구 정규 시즌이 개막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야구 팬들에게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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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3-18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넥센 2군 팜 시스템도 삼성, 두산 못지 않게 선수 자체 육성에 중점을 두고 있으니 아마도 올 시즌에 뉴페이스가 등장할 것 같습니다.

피오나 2016-03-18 12:39   좋아요 0 | URL
하핫. 긍정적인 이야기 감사합니다!! 뉴페이스를 저도 손꼽아 기다려봅니다 ㅋㅋ
 
말벌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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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울한 미스터리나 서스펜스를 쓰는 소설가 안자이 도모야는 아내인 유메코와 함께 산장에서 신작 <어둠의 여인>의 성공을 축하하기 위해서 와인을 마시다 잠이 든다. 다음 날 아침, 그는 묵직한 두통을 느끼며 일어난다. 이상한 건 자신은 선천적으로 알콜에 강해서 지금까지는 숙취에 시달린 적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목욕가운은 아내의 것이었는데, 아내는 섬세하다 못해 강박관념에 가까운 성격의 소유자라 목욕가운을 바닥에 내던져 두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때, 그는 어디선가 곤충의 날갯소리를 듣는다. 설마 싶었지만, 소리가 들리는 창문으로 다가가 두꺼운 커튼을 열자 불쾌한 날갯소리를 내는 말벌이 보인다. 그는 의사의 경고를 떠올리며 온몸에 소름이 끼쳐 왔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모두 국어사전에 쓰여 있다. 시험적으로 식재(재앙을 막음)와 즉사라는 단어를 찾아봐라. 서로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두 단어 사이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속재와 속산이다.

안자이 도모야의 대표작 중 하나인 <사신의 날갯소리>의 한 구절이다.

단순한 말장난에 불과하고 실제로 사전을 찾아보면 그 사이에 적새라든지 족살 등 다른 단어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지금 상황에 비춰보니 기묘하리만큼 암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자이 도모야가 말벌을 보며 그렇게나 당황했던 데는 특별한 사연이 있었는데, 3년 전에 우연히 말벌에 쏘여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적이 있었던 거다. 퇴원할 때 의사는 벌침은 처음에 쏘였을 때보다 두 번째 쏘였을 때가 훨씬 위험하다며, 처치가 늦으면 최악의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시내라면 몰라도 이렇게 눈 쌓인 산 위에 아직 활동 중인 벌의 둥지가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긴 했다. 거기다 외부로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모두 차단된 상태였다. 휴대전화 충전기도 보이지 않았고, 컴퓨터의 전원 케이블도 없어졌고, 팩스기 배선 또한 이미 손을 본 상태라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누군가 그를 함정에 빠뜨린 거라는 걸 깨달으며 동시에,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바로 아내인 유메코라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느긋하게 범인을 찾을 때가 아니라, 일단 말벌로 부터 자신의 안전을 확보해야만 했다. 벌에 쏘일 경우를 대비해 준비한 간이형 주사기 에피펜마저 보이지 않았고, 그는 그야말로 말벌과의 사투를 벌여야만 한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초겨울, 해발고도 1,000미터가 넘는 곳에 있는 산장에서 혼자 말벌과의 치열한 전쟁을 벌이는 모습이란 마치 악당과 대결을 하는 것만큼의 긴장감을 유발한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쓰고 싶던 내용이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내가 예전에 생각하던 표현이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내가 구상하던 스토리가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는 그 녀석을 모델로 한 등장인물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것은 내가 쓴 작품이다. 확실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분신이 쓴 것이 아닐까?

거의 산장에서 온갖 방법으로 말벌을 피하고, 쫓고, 죽이려고 하는 인물의 모습에 대한 묘사만 백여 페이지 넘게 이어지지만, 한 페이지도 지루할 틈 없이 전개된다는 점이 기시 유스케만의 장점이 아닌가 싶다. 인간 내면의 공포에 대한 감정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이 작품은 말벌이라는 독특한 소재만으로 매우 간결하게 스토리가 진행되지만, 그럼에도 많은 것을 전달해주고 있다. 극중 미스터리 작가인 안자이 도모야와 동화 작가인 아내 유메코의 작품이 종종 인용되는데, 아마도 작가는 그런 부분들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미스터리에서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것은, 마치 서술트릭처럼 독자들을 화자가 하는 말에 완전히 감정 이입하게 만든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주인공의 생각과 행동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최근에 화제가 되었던 몇몇 미스터리 물에서처럼 '믿을 수 없는 화자'가 등장하게 되기도 하고, 서술트릭에서처럼 독자를 당황시키는 '반전'이 출현하게 되기도 한다. 이 작품 역시 별 생각 없이 이야기를 따라 가다 보면 맞닥뜨리게 되는 결말은 과연 생각지도 못한 방향이라 매우 흥미로웠다. 아무래도 기시 유스케가 공포를 바탕으로 한 심리 스릴러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작가라서 더욱 독자들이 깜박 속아넘어가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굉장히 짧은 분량의 소설이지만, 역시 기시 유스케의 작품답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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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너리스 1
엘리너 캐턴 지음, 김지원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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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균형을 상징하는 천칭자리이다. 연애나 친구관계, 금전적인 면 등 모든 면에서 밸런스를 유지하고, 무슨 일이든 극단적으로 달리는 일이 없으며, 대부분 냉정하고 객관적이고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단다. 뭐 어느 정도는 맞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누군가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을 설명해준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재미로 운세를 보거나, 별자리 점을 보는 것도 아마 비슷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12개의 별자리로 각각의 성격을 규정해서 캐릭터를 만든다면 어떨까. 엘리너 캐턴의 이 작품 <루미너리스>는 바로 그러한 매혹적인 상상을 정교하게 건물로 구축한 소설이다. 2013년 맨부커상 수상작으로 그녀는 무려 스물여덟의 나이로 47년 맨부커상 역사상 최연소 작가로 등극하게 된다. 게다가 원서 832페이지로 역대 가장 긴 작품으로도 맨부커상의 기록을 갱신한다. 국내 번역본 역시 두 권으로 나뉘어 있긴 하지만 분량이 만만치 않다. 페이지를 빠르게 주르륵 넘겨서 읽어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두꺼운 분량은 이 책을 완독하는데 굉장한 부담을 주고 있다. 자고로 재미있는 책은 기본 500페이지 이상의 두툼한 두께를 자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이지만, 그런 나에게도 이 책은 만만치가 않았으니 말이다.

활동적인 사람이 다른 사람의 수수께끼를 해결해주는 임무를 맡으면 처음에는 기꺼이 전심전력을 다해 몰두하는 법이다. 하지만 토마스 발퍼의 에너지는 자신이 맡은 프로젝트가 스스로 계획했던 것이 아닌 경우에는 오래가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의 상상력은 조급함으로 바뀌고, 낙관주의는 넘치는 게으름으로 변해버렸다. 그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가 그것이 더 이상 새롭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곧장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모든 일을 한꺼번에 시작하는 타입이었다.

1866년 뉴질랜드의 금광 호키티가 마을, 무디는 갓스피드호를 타고 금을 찾아 이곳에 도착하게 된다. 크라운 호텔에 묵게 된 그는 우연히 호텔 흡연실에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열두 명의 남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는 항해 중에 폭풍을 만나고 배 안의 화물칸에서 끔찍한 사건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그 덕에 두려움과 걱정으로 내향적으로 변했고, 그답지 않게 방 안의 분위기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다. 그러니 자신이 이곳의 은밀한 회의 같은 것을 방해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토머스 발퍼를 통해서 그는 그곳에 모인 열두 명의 남자들이 특정한 의문과 그것으로 인한 불안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누군가의 죽음,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어떤 창녀, 그리고 젊은 갑부의 행방불명, 살해된 부랑자의 집에서 발견된 어마어마한 양의 금. 무디는 자신이 타고 왔던 갓스피드호의 선장 프랜시스 카버가 의문의 사건들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열두 명의 사람들을 통해서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듣게 된다.

각양각색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열두 명의 시점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무려 500여 페이지 가깝게 들려지는데, 정리되지 않고 중구난방으로 펼쳐지고 있어 몰입을 하려면 꽤나 애를 써야만 한다. 1권의 마지막 즈음에서야 토머스 발퍼의 이야기를 끝으로 무디가 스스로 사건을 정리하는 식으로 독자들의 편의를 봐주고는 있지만, 거기까지 도달하려면 꽤나 인내심이 필요하다. 앨리너 캐턴은화자의 역할을 하는 무디가수성을 대표하며, 따라서 수성이 관찰되는 시기에 맞춰 그가 이야기에서 나타나고 사라지도록 구성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주요 인물인 12명의 남자는 각각 황도 12궁을 대표하고 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대표하는 별자리에 맞는 성격과 특성을 지니고, 나머지 인물들은 행성에 속해 이들 사이를 넘나든다. 물론 각각의 캐릭터가 모두 핵심 역할을 수행하며 천체의 흐름에 정확히 들어맞는다는 걸 체감하려면 치열한 조사와 고민을 했을 작가만큼, 독자 역시 메모를 하거나, 각각의 비유와 상징들을 구분해서 기억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필요하긴 하다.

양자리는 집단적인 관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황소자리는 주관적인 태도를 단념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쌍둥이자리의 규칙은 배타적이고, 게자리는 원인을 찾고, 사자자리는 목적을 추구하며, 처녀자리는 계획을 바란다. 하지만 이것들은 제각기 진행되는 일들일 뿐이다. 12궁의 두 번째 행동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천칭자리는 개념으로, 전갈자리는 재능으로, 궁수자리는 목소리로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염소자리에서 우리는 기억을 얻고, 물병자리에서는 통찰력을 얻는다. 그리고 12궁에서 가장 오래되고 마지막을 점하는 물고기자리에 와서야 일종의 자아를 얻어 완전해진다.

, 1권보다 조금 더 두꺼운 페이지를 자랑하는 2권에 이르면, 이야기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배경 설명이 계속 이어져 다소 장황하고 집중하기 어려웠던 1권에 비해, 2권은 본격적으로 사건이 시작되고 그에 따른 반전이 등장해 숨겨진 진실들이 드러나 시선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인물들의 관계와 그들의 행동 이면에 있는 음모들이 마치 폭죽처럼 터지기 시작한다. 각각의 장마다 구분되어 있는 별자리의 특성을 인물들과 결부시켜 보면, 이 작품의 이야기는 더욱 매혹적으로 변신한다. 크게 한몫 잡아보겠다는 생각으로 금을 찾아 모인 사람들의 모습은 어떤 점에서는 현대의 우리와 닮아 있다.

제목인루미너리스luminaries’는 점성술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두 별인 해와 달을 뜻한다고 한다. 별들이 가장 찬란하게 그 빛을 발한 뒤 소멸하는 것처럼,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 좇는 것도 결국은 그 빛을 잃어버리고 마는 허황된 꿈 혹은 찰나의 행복에 불과하다. 하지만 벼랑 끝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그 순간이나 바닥 끝까지 추락해 스스로의 삶에서 밀려나 있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사막의 신기루 같은 것일지라도 붙들고 있을 수 있는 희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 그들의 절실함은 누군가의 탐욕으로 핏빛으로 물들고 말지만 말이다. 별이 쏟아지는 것 같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그들 별자리에 숨겨져 있는 의미가 궁금해 본 적이 있다면, 그렇다면 이 책은 더할 나위 없이 당신에게 그 숨겨진 비밀을 제공할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다고 해도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은 작품이지만, 이 두터운 책을 시작하려면 어느 정도 각오는 필요할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 속에서 반드시 길을 잃어버리고 말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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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3-09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권 내용이 지루해서 한번은 이 소설을 선정한 맨부커상 심사위원들의 생각을 의심했습니다. ㅎㅎㅎ

피오나 2016-03-09 14:32   좋아요 0 | URL
하핫.저도 너무 지루해서..페이지가 안넘어가더라고요. 읽는데 한참 걸렸답니다ㅋㅋㅋ
 
캐롤 에디션 D(desire) 9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 / 그책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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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디자이너를 꿈꾸는 열아홉의 테레즈는 백화점에서 임시직으로 일하고 있는 중이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인형을 사주려는 사람들을 상대하던 어느 날,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우연히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은 그렇게 운명처럼 그녀에게 각인된다. 테레즈는 일상이 불안했고, 자신의 꿈에 대해 자신이 없었으며, 항상 갈팡질팡했고, 스스로의 삶이 처량했다. 게다가 연인인 리처드와 만난 지 열 달 정도 되었지만, 그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 그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와 사랑에 빠지는 건 영원히 불가능할 것 같다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캐롤은 남편과 불행한 결혼 생활을 이어오다 이혼을 앞두고 있었고, 딸의 양육권 관련해서 골치가 아픈 상황이었다. 그녀 역시 삶에 아무런 기쁨도 찾을 수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렇게 생에 지치고 외로웠던 두 여자가, 한 눈에 상대를 알아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맞닿았다. 테레즈는 상자를 열다가 고개를 들었고, 때마침 여인도 고개를 돌리는 순간 두 시선이 부딪쳤다. 여인은 늘씬한 몸매에 금발이었으며 넉넉한 모피 코트를 걸친 모습이 우아했다. 한 손을 허리에 대고 있어서 모피 코트 앞섶이 벌어졌다. 눈동자에 붙들린 테레즈는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앞에 있는 손님이 재차 묻는 소리가 들렸지만 테레즈는 가만히 선 채 벙어리가 되었다......테레즈는 저 여인이 분명 자기에게 올 것임을 직감했다. 여인이 서서히 카운터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테레즈의 심장은 멈춰 섰던 순간을 만회하려는 듯 쿵쾅거렸다. 여인이 점점 다가오자 테레즈의 얼굴이 붉어졌다.

보수적인 당시의 시대상에 비추어 여자와 여자의 로맨스를 그린 작품으로 보자면 상당히 파격적이지만, 사실 그저 한 존재와 다른 존재가 서로를 알아보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서로에게 다가가는 과정으로 이 작품을 보자면 여느 연애 소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무미건조하고 확신 없는 삶에 지쳐 있는 테레즈와 무기력한 결혼 생활에 지쳐 있는 캐롤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서로에게 강렬한 끌림을 느꼈고, 재고 따지고 할 것도 없이 가까워진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미국 서부를 가로지르는 여행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캐롤의 남편이 고용한 사설탐정이 그들을 쫓아오고, 그는 캐롤에게 딸과 테레즈 중 한 사람을 택하라며 위협하고 그들의 관계는 그렇게 사람들의 이해를 얻지 못한 채 위기를 맞이한다.

테레즈와 캐롤이 서로를 알아가는 초반의 분위기는, 남녀가 미묘한 떨림을 간직한 채 서로를 탐색하는 그것과 매우 비슷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한참 이 책을 읽다 보면 굳이 이걸 레즈비언 소설로 구분 지어야 하나 의문이 들만큼, 그저 사랑에 빠진 인물들의 심리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작품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이 하필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는 것만 다를 뿐, 테레즈의 사랑 또한 다른 이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것을 다르게 보는 이들의 사회적 시선을 완전히 배재할 수는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말이다.

"그럼 부끄러워할 일인가요?"

"맞아, 너도 알잖아." 캐롤은 또렷하게 말했다. "이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건 혐오스러운 일이야."

캐롤의 말에 테레즈는 차마 웃을 수도 없었다. "당신은 그걸 믿지 않는군요."

"사람들은 하지네 가족하고 비슷해."

"그들이 이 세상 전부는 아니잖아요."

"그들만으로도 차고 넘쳐. 너도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잖아. 그러니까 내 말은, 너더러 지금 당장 누굴 사랑할지 결정하라는 소리가 아니야." 캐롤은 테레즈를 쳐다보았다. 이제 캐롤의 눈동자에서 미소가 천천히 차오르며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내 말은 이 세상에서 남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 책임감이란 게 말이지, 그게 네 것이 아닐 수도 있어. 지금은 안 그래도 돼. 네가 뉴욕에서 알아야 할 나쁜 사람이 바로 나거든. 왜냐, 내가 널 마음껏 즐기고 자라지 못하게 막을 테니까."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의 집필을 막 끝내고, 돈에 쪼들리는 상황이라 몇 푼이라도 벌려고 크리스마스 시즌 동안 대형 백화점에서 판매 사원으로 일을 하기로 했다. 그녀는 시끄럽고 정신 없는 장난감 코너로 배치되어 인형 카운터에서 일을 했는데, 어느 날 아침 모피 코트를 걸친 금발 여성을 만나게 된다. 여느 때와 별 다를 것 없는 판매 과정을 거쳐 여자는 돈을 지불하고 떠났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환영을 본 듯 기분이 들떴으며, 머릿속이 이상하고 어질 해서 기절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렇게 퇴근을 한 후 혼자 사는 아파트로 돌아가 그날 저녁, 주제를 정해 플롯을 짜고 여덟 쪽 정도 되는 스토리가 느닷없이 펜 끝에서 줄줄 흘러 나오게 된다. 두 시간도 채 걸리지 않은 시간 동안 <캐롤>의 줄거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주로 서스센프 소설을 썼던 그녀는 이 작품을 통해 레즈비언 소설 작가라는 딱지가 붙을 까봐 필명으로 이 책을 내기로 했고, <소금의 값>으로 출간된 이 작품은 당시 엄청난 흥행에 성공한다. 책이 출간된 1950년대의 미국에서 당시 동성애자들은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그 대가를 치뤄야 했고, 외롭고 비참하게 단절된 삶을 살아야 했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동성애 소설 중에서 처음으로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작품이었기에 많은 이들의 호응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후 동성애 소설은 다시 쓰지 않았고, 이 작품은 범죄 소설의 대가가 쓴 자전적 소설이자 유일한 로맨스 소설로 남게 된다.

이 책이 출간된 지 7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동성애를 바라보는 일반인의 편견은 존재한다. 동성 결혼이 합법화되는 나라가 늘고, 동성애를 다룬 작품들도 늘어나고, 당당히 커밍아웃하는 사람들이 생겼지만 말이다. 토드 헤인즈 감독의 동명 영화가 온갖 영화제를 휩쓸고, 사람들의 호평을 받고 있지만,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원작 또한 영화만큼이나 아름답다. 물론 케이트 블란쳇의 캐롤과 루니 마라의 테레즈는 원작과 조금 다른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매력적이고, 영화가 그려내지 못하는 미세한 감정의 떨림들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단단한 문장들로 힘을 발한다. 인생에 단 한번, 당신의 그 사람을 만나게 된 순간을 가지고 있다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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