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평생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 그게 한 사람이든, 여러 사람이든 말이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사랑한 사람과 침대를 함께 쓰고, 그를 닮은 아이를 낳고, 평생의 동반자가 된다. 어릴 때 꿈꾸던 환상 속에 그리던 백마 탄 왕자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내 눈에는 너무도 멋진 사람을 말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혹은 우리가 나이를 먹게 되면 알게 된다. 누군가를 인생의 동반자로 선택한다는 건 생각보다 매우 어렵고도 두려운 일이라는 걸. 두 사람의 사이가 조금이라도 벌어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애를 써야만 겨우 유지되는 것이 결혼이라는 제도이니 말이다. 매 순간 더 좋아지고, 더 열정적으로 만드는 모든 일이 매우 '당연한 것'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것을 포기하고, 더 많은 것을 양보하고, 그리고도 한없이 이해해야만 하니 말이다. 그러니 누가 누군가를 평생에 걸쳐 사랑했다고 한다면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가끔 길을 걷다 손을 잡고 걷는 다정한 노부부를 보면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나도 저렇게 늙어야지. 싶어서 말이다.

 

 

박범신 작가의 <당신>을 읽으면서 두터운 시간을 통과하는 사랑의 깊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일흔여덟의 희옥은 이제 막 죽어 경직이 시작된 남편을 집 마당에 묻는다. 남편이 파킨슨병 진단을 받은 것이 벌써 일 년 전의 일이었다. 치매에 걸린 후 빠르게 예전의 모습을 잃어버렸던 남편 주호백. 파킨슨병과 당뇨와 고혈압은 평생을 아내와 딸을 위해 헌신해온 그의 삶을 전혀 다르게 바꿔 놓는다. 짜증은커녕 평생 동안 아내의 말에 토를 다는 일도 거의 없이 마치 충직한 시종처럼 살아왔던 사람이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고, 험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등 그녀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평생 동안 가슴 속에 다른 남자를 품고, 남편과는 허깨비처럼 살았던 그녀가, 남편의 치매 때문에 일흔이 넘어서야 그를 사랑하게 된다. 치매가 아니었다면, 그가 평생 감추고 억눌러왔던 자신의 본능을 차례차례 그녀에게 드러내 보여주지 않았다면, 죽기 전 절대로 도달하지 못했을 어떤 각성 같은 느낌에 도달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란 가끔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누군가를 평생 혼자 바라보고 살았던 이가 죽고 나서야, 그를 한사코 보려 하지 않던 남겨진 이가 스스로도 몰랐던, 가슴 속에 쟁여져 있던 사랑을 뒤늦게 발견하게 되기도 하는 것 말이다.

 

내가 조금 어렸을 때, 그러니까 결혼이라는 것을 하지 않았을 때는 막연히 가족이라는 개념이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주어지는 것 인줄만 알았다. 그런데 수십 년을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타인과 하나의 가족을 이루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매 순간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가끔은 무조건 희생해야 하지만 대가를 바라지 않고, 같은 곳을 바라보기 위해 수많은 것들을 공유해야 하는, 사실은 엄청난 노력이 바탕이 되어 유지되는 공동체가 바로 가족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결혼은 사랑의 문제가 아닌 책임의 영역이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아이 또한 절대적인 포기와 희생을 통해서만 견고한 믿음으로 갈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점점 깨닫게 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남편에 대한 사랑이 더 단단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사랑이란 그렇게 성숙해질 수록 더 깊어지는 모양이다. 치매에 걸린 노인의 정신이 먼 과거의 기억으로 달려나가듯이, 이 소설은 현재의 죽음에서 자꾸 과거의 생으로 달려간다. 너무 뒤늦게 사랑을 깨달은 그녀를 위한, 하고픈 말을 다 하지 못한 채 끝이 되어버린 그의 사랑을 위한 진혼곡처럼 말이다.

 

함정임 작가는 <저녁 식사가 끝난 뒤>의 마지막에 실린 작가의 말을 통해 이런 말을 했다. "어느 순간부터, 소설 쓰기란 추모의 형식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라고. 그녀의 이런 마음이 소설 전반에 흐르고 있었던 탓인지, 낯선 곳에서 위안을 받기 위해 여행을 떠나듯이, 나는 소설 속 공간을 통해서 위안을 받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쓰여지는 소설이라면, 누구라도 기꺼이 시간을 내고 싶어지지 않을까. 부부는 어느 날 존 휴스턴 감독의 <죽은 자들>이라는 영화를 보고 P선생과 인연이 있는 지인들을 초대해 저녁식사를 하기로 한다. P선생의 부음 소식을 듣던 날 공교롭게도 그들 부부는 겨울 여행 중으로 한국에 없었기에, 갑자기 날아든 비보에 망연자실했었다. 그렇게 서울에서 두 명, 일산에서 두 명, 양평에서 한 명, 부산에서 한 명, 모두 여섯 명의 손님이 저녁 식사를 위해 모여든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여자는 남편을 보며 말한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고. 아무도 그날 초대의 목적이었던 P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날 모여든 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P선생에 대한 추억은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사실 여자는 P선생이 좋아하는 장어요리를 준비했고, 누군가 부른 노래는 P선생의 애창곡이었으며, 누군가 가져온 들깨강정은 P선생이 자주 드시던 간식거리였으며, 누군가 가져온 박하차는 P선생이 정원에 심었다가 손님이 오면 따서 우려내 주시던 차였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P선생을 기억하는 정표를 하나씩 준비하는 것으로 선생을 추도했던 것이다.

 

바다 색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여섯 시로 일부러 저녁 식사 시간을 잡은 마음이나, 이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누군가를 추도하는 마음이 너무 예쁘고 뭉클했다. 누군가에게 이런 방식으로 기억되는 기분은 어떨까 싶어 부럽기도 했고, 남겨진 이들에게 이렇게 추억되는 거라면 죽음이라는 것이 따뜻한 걸 수도 있겠다 싶기도 했다. 주인공이 지켜봐야 하는 누군가의 죽음, 결혼식 삼일 전에 사라졌다, 십 년 만에 죽어서 돌아온 연인이 남긴 일정에 따라 프랑스 호텔들을 여행하는 이별의 방식, 우연히 만나 가슴에 담아둔 소녀의 죽음을 듣고 히말라야로 향하는 남자의 여행, 모두 그리움과 추억으로 향하는 기차표와도 같았다. 글을 읽는 순간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가기도 하고, 인물들의 감정에 빠지게 만들기도 하니 말이다. 부산, 서울,, 경주, LA, 뉴욕의 맨해튼과 브루클린, 프랑스 남부 지역, 그리고 멕시코.. 이 소실 집에 실린 여덟 편의 이야기들은 각기 다른 장소를 통해 독자들을 마치 여행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도 만든다. 죽음으로 비롯되는 상실감, 이별 후의 고독, 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의 아련한 기억... 머물고 떠나는 것과 기억하고 잊어버리는 것 사이의 그 어떤 순간. 이상하게도 낯선 곳에서 위안을 받을 때가 있다. 우리가 가끔 가까운 이들에게는 털어놓지 못하는 걸 낯선 이들에게는 편하게 내뱉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면서 사회생활을 접고 가족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을 어느 정도 보내게 되니, 한 해가 넘어가려는 이 시기의 무게 감이 여느 때와는 상당히 다르다는 걸 느낀다. 아직 그리 많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제 더 이상 '사회적인 이름'을 갖지 못하게 된 ''에 대한 자의식이 점점 사라지면서, 나이를 먹고, 늙어가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 것이다. 아직 사회에 남아 있는 나의 동료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어린 시절 내 친구들 중에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그들은 현재의 시간을 어떻게 만들고 있으며, 미래를 어떤 모습으로 꿈꾸고 있을까. 가정주부가 되어 인간관계가 지나치게 단순화되자, 사람들 간의 관계를 유지하고 어떻게든 마음에 드는 방향으로 선 긋기를 하느라 진땀을 뺐던 젊은 시절의 내가 그리워지기까지 한다. 그런 마음은 편혜영 작가의 <선의 법칙>을 읽으면서 더욱 깊어졌다.

 

여러 해 전 나도 극중 윤세오처럼 집밖으로 나가지 않고, 집안에서만 지냈던 시기가 있었다. 물론 그녀처럼 밖에만 나가면 나를 찾으려고 혈안이 된 사람을 만날지도 모른다거나, 사람들이 숨어서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망상에 시달린 건 아니었지만, 사람이 꼴도 보기 싫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서 일종의 은둔생활을 보냈었다. 한때 마치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도 된 듯 사람들이 내 주변으로 모여들 던 때가 있었다. 이유는 당시에 내가 하던 일 때문이었는데, 그 일로 인해 뭐라도 이득을 얻으려고 하거나, 나를 선망의 대상으로 보았던 이들이 꽤 많았었다. 물론 나도 나 자신의 아우라가 아니라, 내가 하던 일을 통해서 파급되는 것들 때문에 그들이 나에게 그렇게 달려들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선의처럼 보이는 행동들이 싫지 않았던 것 같다. 시작은 그렇게 사리사욕 때문이었을 지라도 나와 개인적인 친분을 나누게 된 이들은 그래도 결국 인간적인 교류를 하게 되지 않을까 믿고 싶었던 것도 같다. 결과적으로는 모두 나의 착각이었지만 말이다. 내가 그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게 되었을 무렵부터 서서히 그들은 마치 신기루처럼 내 주변에서 하나 둘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나를 중심으로 이어져 있던 선들은 여기 저기 끊어지고, 구부러지고, 흐려져 결국 희미한 흔적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극중 김명국의 말처럼 '사람이란 본래 그럴 리 없는 존재 아닌가' , '사람이라면 상대를 진심으로 대하고 선의를 가졌으며 다른 사람을 위해 양보할 줄 아는' 그런 존재여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 마음에 나름의 상처를 받았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흔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동안 집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두문불출 한 뒤에야, 그리하여 조건 없는 인과 관계를 믿지 않게 된 뒤에야, 결국 타인의 선의를 일단 의심부터 하게 된 뒤에야 그 시기를 겨우 견뎌낼 수 있었다.

 

우리는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시간을 경험한다. 여러 해 전의 나를 집밖에 나가지 못하게 할 정도의 상처를 주었던 당시의 그들 중 누군가는 나를 그저 잠시 스쳐 지나가는 선으로 그냥 기억에서 지워버렸을 지도 모르니 말이다. 책을 읽는 행위 역시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기에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해 전의 내 모습이 떠올라 가슴 한 켠이 먹먹해졌다. 나처럼 바보 같았고, 나처럼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믿었던 미련한 사람이 여기도 있네 싶어 마음이 짠해졌던 것이다. 누군가는 이 작품을 통해 윤세오의 모습에서 자신을 찾아볼 테고, 누군가는 신기정의 동생을 보며 자신의 가족을 떠올릴 수도 있을 테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수호를 보며 지긋지긋한 자신의 직장을 돌아볼 것이다. 이 작품의 이야기는 죽음에서 시작해 죽음으로 끝이 나는데, 그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선들의 조합이 매우 흥미롭다. 인물들의 이름과 이름을 연결하고 선으로 이었을 때,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인물이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 나오기도 하고, 가까워 보이던 이들이 실상은 그다지 관계가 없는 걸로 밝혀지기도 한다. 사실 인간 관계란 대부분 그렇다. 그저 제각각 섬처럼 홀로 존재하다가 어느 시기에 잠깐 서로 연결되었다가, 다시 흩어지기도 한다.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지만, 그 누구와도 완벽하게 연결되어 살아갈 수도 없다. 그것이 바로 삶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여러 날에 걸쳐 찾았던 노력이 무색할 만큼 그들 사이에 이어진 선은 희미하다. 결국 이들의 선긋기는 거의 완벽하게 실패한다. 생이란 이렇듯 언제나 우리의 기대를 아무렇지 않게 배반하고는 한다. 위로 아래로, 사방으로 서로 연결되어야 했던 다단계와 관련되어 있는 관계들을 제외하고, 이 작품 속에서 제대로 선을 그을 수 있는 인간 관계는 거의 없다. 현실에서의 우리네 삶도 사실 별반 다를 게 없다. 친구도, 연인도 모조리 팔아야 하는 다단계보다도 더 못한 것이 내가 속해 있는 현실이라는 것이 씁쓸하기만 하다. 그렇게 현실이 더할 나위 없이 불행하고 서글플 때, 우리는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고민하게 된다. 바로 김성중 작가의 <국경시장>에서처럼 말이다.

 

 

누구나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순간,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매 순간 자신이 너무 자랑스럽고, 빛나서 시간이 지나는 게 아까울 정도로 삶이 퍼펙트 하기만한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 말이다. 되돌아보면 내 삶에서도 그런 순간들이 분명 있었다. 뭘 해도 나쁜 결과만 봐야 했던, 이렇게 계속 좋지 않은 일만 생겨도 되는 걸까 싶었던, 왜 나한테만 이런 시련을 주는 건지 억울하기도 했던 그런 시간들. 당시에는 세상이 전부 끝장나기라도 한 것처럼 절망했었는데, 어느새 지나고 보니 나는 그 순간들을 마치 남의 일이었던 것 마냥 잊어버리고 살고 있었다. 굳이 기억을 지워버리려고 애쓰지는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는 잊어버리고 싶었던 시간들이었을 테니 말이다.

 

, 기억을 팔아서 무언가 가치 있는 걸로 바꿔주는 곳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당신은 자신의 기억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없애버리겠는가? 어차피 우리가 생의 모든 순간들을 전부다 기억하면서 살아가는 게 아니니, 그래 몇 가지 기억쯤 없어도 될 것 같긴 하다. 그런데 자신만이 가지고 있던 그 기억들이 점점 사라지고 나면, 남아있는 ''를 온전한 ''로 볼 수 있겠느냔 말이다. 기억이 없다면, 타인과 구분되는 것이 허울뿐일 터인데, 그럼 빈 껍데기처럼 살아가야 하는 건 아닐까. 기억을 팔아서 돈을 마련할 수 있다니, 극중 인물들은 별 생각 없이 자신의 기억을 판다. 보통은 첫 거래에서 출생부터 두세 살까지의 기억을 판다고 하는데, 어차피 생각나지도 않는 기억이니 없어도 별 상관 없겠거니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씩 자신의 기억을 팔아 바꾼 화폐로 시장의 갖가지 물건을 정신 없이 사들이다, 결국 기억을 모조리 팔아 버리고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기억이 모두 사라진 다면, 과연 그것을 ''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내가 ''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는 어디로 사라진 것이며, 여기 있는 나는 누구란 말인가. 이 책에 실린 많은 이야기들이 환상동화 같은 미스터리하고도 섬뜩한 이야기인데, 너무도 있을 법한 스토리라 잔혹 동화 같지만 그럼에도 어딘지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상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모두 욕망에 사로잡혀 결국 삶을 파멸로 이끄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작품의 배경이 현실 같으면서도 환상적인, 꿈인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섬뜩하다는 데 있다. 어디선가 멜로디 인형의 음악이 흘러나올 것 같은 분위기로 가다가 갑자기 잔혹동화의 결말처럼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김성중 작가의 이야기는 모두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몽환적이고 아름답게 느껴지다가도, 어느 순간 번뜩 정신이 들어보면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그런 세계 말이다. 그런데 그곳은 묘하게 자꾸만 빠져들고 싶은 세계이기도 하다. 이상하지 않은가. 이야기의 매력이란. 그러니 나는 이 순간에도 소설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내 인생에 동행하고 싶은 수많은 책들 중에, 올해는 이 네 권의 책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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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인] 나만의 작은 사치!『1인분 프렌치 요리』서평단 모집!

요리에 관심이 많은 편이기도 하지만, 특히 프랑스 요리에 지대한 관심이 있다.

블랑캣 드 포와 라따뚜이, 뵈프 부르기뇽, 코코뱅 정도는 레시피를  찾아서 만들어 본 적이 있는데..

뭐랄까.. 한식보다 더 입맛에 맞는다고 할까나. ㅎㅎ 플레이팅도 예쁘고, 조리 방법도 어렵지 않고 말이다.

이번에 출간된 1인분 프렌치 요리는 작은 냄비와 프라이팬 하나로 시작하는 프렌치 요리라고 하니, 더욱 관심이 간다.

많은 양을 시도해서 실패하는 것보다는, 1인분씩 적게 만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고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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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민음인 출판사 입니다.

신간 도서 <1인분 프렌치 요리>의 서평단을 모집합니다.

 

 

가볍게 즐기는 프렌치토스트부터

송로버섯으로 향을 낸 크림소스 닭고기까지

작은 냄비와 프라이팬 하나로 시작하는 프렌치 요리의 모든 것!

일본의 인기 요리책 저자가 20년간의 노하우를 한 권에 담았다

 

세련되고 아름답지만 직접 만들기에는 까다로울 것 같은 프랑스 요리. 하지만 이것이 프렌치의 전부는 아니다. 냉장고에 남은 재료에 대형 마트에서 쉽게 구하는 재료를 더해 심플하면서도 우아한 프렌치 요리를 만들 수 있도록 하는 1인분 프렌치 요리민음인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냄비와 프라이팬만으로도 평균 20분 이내의 짧은 시간에 프랑스 요리를 근사하게 완성하도록 하는 레시피 44가지를 소개한다. 일본의 인기 요리책 르쿠르제 시리즈의 저자 히라노 유키코는 프랑스 요리 연구가인 동시에 일본 소믈리에 협회의 인증을 받은 와인 전문가로서, 20년간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독자들을 프랑스 요리의 매력적인 세계로 안내한다.

이벤트 참여방법

 

1. 이벤트 기간  :  9월 18일 ~ 9월 25일

    당첨자 발표  :  9월 29일

    발송  :  9월 30일

 

2. 모집인원  :  5명 

 

3. 참여방법

   - 이벤트 페이지를 스크랩하세요.(필수)

    - 책을 읽고 싶은 이유와 함께 스크랩 주소를 댓글로 남겨주세요.

 

4. 당첨되신 분은 꼭 지켜주세요.

- 도서 수령 후, 7일 이내에 '개인블로그'와 '알라딘' 에 도서 리뷰를 꼭 올려주세요.

  * (미서평시 서평단 선정에서 제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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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국내에 출간되는 나카마치 신의 이 작품은 일본 최초로 서술 트릭을 사용한 작품으로 트릭소설 마니아들 사이에서 명작으로 손꼽히던 작품이다. 이미 국내에 소개된 서술 트릭 작품들 <도착의 론도>, <살육에 이르는 병>, <통곡>,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등은 모두 나카마치 신의 <모방살의>가 출간된 이후에 나온 작품들이다. 1971년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한 《그리고 죽음이 찾아온다》를 40년 만에 개고한 작품으로, 출간 후 20년이 훌쩍 지나 한 서점의 추천으로 주목 받아 삽시간에 10만 부의 판매고를 기록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작품이 쓰인 지 무려 수십 년이 지났지만, 지금 읽어도 여전히 독자들에게 멋진 한 방을 날려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쓰쿠미의 시선이 그 제목 위에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7 7일 오후7시의 죽음. 그것이 제목이었다.

77일 오후 7.

바로 이날, 이 시간에 사카이 마사오는 독을 마시고 죽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7 7일 오후 7, 사카이 마사오는 청산가리 중독으로 죽는다.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고, 유서로 추정되는 것은 발견되지 않았기에,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한 무명 작가의 신변 비관 자살로 처리된다. 그런데 그의 죽음에 이상한 점을 느낀 두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어느 신인 작가의 자살로 가십거리처럼 지나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죽기 전 남긴 원고 ‘7 7 7시의 죽음과 같은 시각에 사망했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이상한 일이다. 출판사에 근무하는 나카다 아키코는 평소에 그와 업무 관련해서 종종 부딪히던 사이다. 그러다 개인적인 관계로 발전하기도 했었고, 나름 가까운 사이라 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는 그가 얼마 전에 보냈던 원고를 떠올린다. 주간지에 살인 리포트라는 기사를 쓰는 쓰쿠미 신스케는 잡지 사의 제안으로 사카이 마사오 사건을 글로 재구성하게 된다. 추리소설 애호가들이 결성한 동인잡지 모임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던 그는 취재를 위해 그의 죽음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나카다 아키코와 쓰쿠미 신스케의 이야기가 교대로 전개되면서 점점 사카이 마사오의 죽음에 대한 수수께끼는 증폭된다.

다음 장에 펼쳐질 뜻밖의 결말을 예상해보라고 독자에게 도전장을 던지는 이 작품은 자신만만하다. 그만큼 웬만해서는 결말을 쉽게 예상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건 결말을 만나고 나서 다시 앞으로 돌아가 작품을 읽더라도 작가가 거짓을 말한 부분은 전혀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서술 트릭만의 묘미이기도 하다. 작가가 독자에게 주는 모든 정보는 '사실'이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독자들은 감쪽같이 속을 수 밖에 없으니 기가 찰 노릇이고 말이다.

서술 트릭에서 자주 사용되는 것이 남자라고 생각되던 인물이 사실은 여자라던가, A라고 아무 의심 없이 생각했던 인물이 사실은 B라던가 하는 등의 오해이다. 물론 그 외에도 시간, 장소나 상황, 물건, 행위, 동기나 심리에 관한 트릭도 있다. 나카마치 신의 이 작품에서는 이 중에 어떤 걸 트릭으로 사용했는지 책을 읽으면서 추측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을 즐기는 진짜 방법은 머리 굴리지 말고, 그저 사건의 흐름을 아무 생각 없이 쭉 따라가는 것이다. 물론 그러다 보면 작가가 설치한 오인의 함정에 빠질 수 밖에 없지만, 또 그것이 서술 트릭 만이 가지고 있는 묘미이니 작가에게 속았다고 너무 억울해하지는 말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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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삼십 대 후반을 넘어서는 나이에 떠밀리듯이 결혼하고 싶지 않았기에, '결혼을 해야 하는 걸까. 결혼하지 않으면 어떨까. 지금 이 사람과 헤어지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었다. 그래서 수짱처럼 '결혼하지 않는다면, 결국 혼자 늙어가는 건 아닐까' 나도 많이 불안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결국 사 년의 오랜 연애를 결혼과 연결시켰고, 이어 아기가 태어나고, 엄마가 되고 나니 마이짱처럼 가끔 생각한다. '혹시 다른 인생을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고. 엄마가 되고 나니 그전까지의 내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내가 가지고 있던 꿈들이 희미해지자 불안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엄마랑 함께 지내고 있는 내 동생은 사와코상처럼 자신마저 결혼해서 떠나버리면 혼자 남겨질 엄마를 걱정한다. 워낙 모녀가 친구처럼 시시콜콜 얘기도 많이 하고, 함께 여행도 다니고, 영화도 보러 다녔기에 결혼해서 행복해질 자신보다, 쓸쓸하게 지내게 될 엄마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수짱은 결혼 전 내 모습, 마이짱은 결혼 후 내 모습 같고, 사와코상은 마음 여리고 따뜻한 내 동생의 모습 같다. 어쩌면 아마도 세상의 수많은 30대들이 영화를 보며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마스다 미리의 힘이기도 하고 말이다.

 

 

"내가 한 선택들은 모두 잘못된 걸까?"

수짱은 34살 싱글, 카페에서 근무 중이다. 연애에 서툴어 함께 근무하던 남자에게 제대로 마음 한번 표현해보지 못하고 그를 유부남 대열로 보내버리고 만다. 결혼하지 않고 이대로 혼자 외롭게 늙는다면, 결국 쓸쓸하게 혼자 죽게 되는 걸까 걱정하는 중이다. 요리하는 걸 즐기고, 카페 업무도 열심히 해서 점장이 되고, 소소한 일상에 최선을 다하는 그녀이지만 삼십 대 중반이 되고 보니 연애가 꼭 필요하다기 보다, 나중에 혼자 늙어갈 노후가 걱정이 되는 것이다. 엄마도 이제 포기했는지 애인 생겼냐는 얘긴 안하고, 저축은 하고 있는지 돈 얘기부터 꺼낸다. 그녀는 때때로 불안하다. 내가 한 선택들은 모두 잘못된 걸까?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 나 잘하고 있는 건가?

"가끔은 생각해. 다른 인생을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고."

마이짱은 34살 영업사원으로 유부남과 연애 중이다. 남자보다도 영업실적과 구조조정이 훨씬 걱정되는 워커홀릭인 그녀는 직장 스트레스에 점점 지쳐간다. 거기다 유부남과 연애를 하다 보니 툭하면 그의 딸이나 가정사 때문에 자신은 뒷전으로 밀리기만 한다. 어느 날 병원에서 너무 많은 걸 쥐고 있으려 하지 말고, 한 가지는 놓아 버리라는 의사의 얘기를 듣고는, 과감히 자신의 인생을 바꿔보기로 결심한다. 유부남 애인의 연락처를 지워버리고, 조건을 따져 결혼을 하고, 지긋지긋한 회사를 그만두고, 아기를 가지고. 그런데 그녀는 가끔 생각한다. 다른 인생을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고. 퇴직도, 결혼도, 임신도 다 자신이 선택한 거지만, 이걸로 괜찮아. 하다가 결국 이렇게 된 건가. 싶기도 하는 것이다. 엄마가 되고 나면 이제까지의 자신은 없어져 버릴 것 같아서 불안해진 것이다.

"내가 결혼하면 엄마 혼자 할머니 병수발 들겠지?"

사와코상은 39살 싱글, 프리랜서 웹디자이너로 엄마와 함께 집에서 할머니를 모시고 있다. 남자친구를 만나 연애라는 걸 해본 지도 한참이나 되었는데, 어느 새 마흔 살을 앞두고 있다. 자신이 결혼해서 집을 나가면 남겨진 엄마 혼자 할머니 병수발을 하게 되는 것이 걱정이다. 그러다 우연히 음식을 배달해 주러 온 동창생을 만나게 되고, 서로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설레던 나날도 잠시, 결혼을 서둘러 하고 싶어하는 그는 임신가능 진단서를 받아 올 수 있냐고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만다. 나이를 먹고 연애를 한다는 것은 이런 수치심까지 감수해야만 하는 것일까. 연애를 너무 오랫동안 하지 않다 보면, 그저 아무도 만나지 않은 채로 나이가 들고, 두 번 다시 그 누구와도 섹스를 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늙기에는 자신이 너무 아깝고, 불쌍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연애라는 건 상대방을 존중하는 상태로 지속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수짱과 마이짱, 사와코상은 그렇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30대를 살아가지만, 누구보다 서로를 아끼는 친구들이기도 하다. 수짱의 요리 실력을 맛볼 수 있는 도시락과 함께 하는 그들의 나들이에서 현실의 그 어떤 고민도, 우울함도 보여지지 않는 것은 이들이 서로에게 그만큼의 커다란 힘이 되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수짱은 자신이 일하는 카페 앞 자그마한 칠판에 오늘의 한 마디를 마치 일기처럼 쓰곤 한다. 맛있는 요리가 소중한 사람을 떠올리게 만들고, 가끔은 목욕탕에서 심호흡을 해보기도 하라고 말이다. 이렇게 소소한 일상이 중요한 이유는 '미래는 보이지 않지만 내일은 바로 코앞에 있기' 때문이다. 미리 앞서서 오지도 않은 내일을 걱정하지 말고, 현재의 나에게 주어진 행복을 감사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짱의 선택, 마이짱의 선택, 사와코상의 선택은 누가 틀리고, 맞다는 식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온전히 자기 자신만의 것이다. 그러니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인지, 아니면 결혼을 반드시 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 그 해답은 각자 판단해야 한다.

지금의 나는 수짱이 아니라 마이짱의 상황에 놓여있으므로, 내 입장에서 한마디 하자면 결혼은 하지 않는 것 보다는 하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하지만, 사실 결혼하지 않아도 다른 종류의 행복을 찾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결혼이라는 것이 단순히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서 한 집에서 사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누군가를 인생의 동반자로 선택한다는 건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십 년을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타인과 하나의 가족을 이룬다는 것은, 매 순간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가끔은 무조건 희생해야 하지만 대가를 바라지 않고, 같은 곳을 바라보기 위해 수많은 것들을 공유해야 하는, 사실은 엄청난 노력이 바탕이 되어야 겨우 유지되는 거라는 걸 나는 이제 알고 있다. 그래서 아직 결혼 전인 내 친구들이 회사가 지옥 같다며 결혼으로 도피하고 싶어할 때는 말리고 싶어진다. 결혼 생활도 종류는 다르지만 회사 업무만큼이나 노력과 희생이 필요한 거라고, 누군가에게 기대는 것이 결혼이 아니라 내가 가진 걸 더 많이 나눠주는 것이 결혼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몇몇 친구들이 나는 결혼하지 않고 혼자 멋지게 살겠다고 할 때도 말리고 싶어진다. 혼자여서 좋은 점은 둘이 되면 두 배가 아니라 그 몇 배가 되는 거라고, 이 험난한 세상 함께 살아가는 법을 알게 되면 더 행복한 거라고 말이다. 뭐 이랬다 저랬다 어쩌란 말이냐 싶을 것이다. 그럴 때는 마스다 미리의 책이나 영화를 만나보라. 단순하지만 명쾌한 일상의 진리들이 당신을 따뜻하게 위로해 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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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사서 볼만큼 용돈이 충분하지 않던 어린 시절. 나는 동네 책방이나 도서관에 가서 주로 책을 빌려 보았다. 책은 읽어야 하는 기간이 지나면 반납을 해야 했고, 반납하고 나면 다시는 볼 수가 없었으므로 나는 가능한 많은 문장들을 머리 속에 집어넣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많은 문장들을 다 외울 수는 없었으므로, 맘에 드는 구절들을 노트에 메모하기 시작했고, 그러다 정말 매혹적인 작품을 만나면 아예 전체 책을 필사하기에 이른 것이다. 필사를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책이란 건 눈으로 읽을 때와, 한 글자 한 글자씩 직접 옮겨 적을 때 전달되는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가슴을 철렁 내려 앉게 만드는 섬세한 어휘들과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그 문장들은 나의 감수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그렇게 나는 수많은 책들과 함께 질풍노도의 시절을 흘려 보냈다. 문장과 문장을 이어 단락을 만들고, 그 단락들을 이어 하나의 글이 만들어 질 때마다, 시시해 보이는 나의 일상들이 근사해지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책을 읽다 보니 종종 길을 걷다 우연히 책 속의 인물들을 마주치곤 한다. 지상에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존재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바로 소설이다 보니, 나는 그 인물들에게서 위로를 받곤 했던 것 같다. 때로는 남자친구를 기다리는 카페에서, 때로는 쇼핑을 하던 백화점에서, 때로는 북적거리는 지하철 안에서 어떤 문장들이 복병처럼 튀어나오곤 했다.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소설 속 그 인물들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현실 속의 친구들 외에 여러 친구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직도 기억나곤 하는 친구가 바로 <새의 선물> 속의 애어른 같은 열두 살 진희이다. 너무도 조숙하고 똑부러져서 아이처럼 느껴지지 않는, 하지만 유년 시절부터 삶의 이면을 보아 냉소적인 시선을 가져 안쓰러운 그런 소녀. 진희는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면 먼저 스스로를 두 개의 나로 분리시킨다. 하나의 나는 내 안에 그대로 있고 진짜 나에게서 갈라져나간 다른 나로 하여금 내 몸 밖으로 나가 내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거리를 유지하는 긴장으로써 지탱했고, 언제나 자신의 삶을 거리 밖에서 지켜보기를 원했다. 여섯 살 때 죽은 엄마에 대한 기억을 단 하나도 가지고 있지 못하고 할머니에게서 자랐던 진희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면 자기만의 극기훈련을 했던 것이다. 실성해 목매달아 자살한 엄마와 사라진 아빠, 드러내놓고 애정표현 한번 하지 않는 외할머니와 이모, 삼촌과 함께 생활하는 열 두 살 소녀는 찬물을 조금씩 끼얹다 보면 얼마 안 가 물이 차갑다는 걸 모르게 되는 것처럼, 그러면 양동이째 끼얹어도 차갑지 않으니 슬픔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똑똑히 느끼자고 생각했다. 어린 소녀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설정 자체가 마음이 아프기도 했지만, 고등학생이던 나랑 너무도 비슷했기 때문에 친근감 같은 것이 들었던 것 같다. 삶에 냉소적인 사람만이 삶에 성실하다는 작가의 말처럼, 나도 그랬으니까. 그러니까 행복한 일이 생겼을 때는 내가 그것을 잃었을 때를 미리 걱정했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는 헤어지게 될 때의 상실감에 대비하려고 했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당시의 내가 왜 그랬나 싶긴 하지만, 뭐 그땐 나름 또래의 친구보다 많이 조숙했고, 생각도 많다 보니 나름 심각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고등학교 시절 나를 버티게 해준 건 은희경의 책이었다. 아직도 책장 구석에 손 때가 까맣게 타있는 낡은 책과 올 초에 한국문학전집으로 새로 출간된 책을 함께 보고 있자니, 1996년 겨울 고등학생이었던 나와 2014년 겨울 어느덧 아이 엄마가 되어 있는 나를 보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내 친구들이 아이돌 그룹에 열광할 때, 나의 우상은 은희경 작가였다. 그래서 나는 구할 수 있는 그녀의 모든 책을 읽었는데, 아름다운 문장들과 예리한 표현들은 매 페이지마다 밑줄 긋고 싶은 충동을 불러 일으켰었다. 소설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허구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녀의 작품 속에서만은 그 인물들이 모두 다 '진짜'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은희경 작가 특유의 생생한 묘사와 세밀한 관찰력이 인물들과 그들이 처해진 상황에 설득력을 부여해주어서, 어찌 보면 외로운 나르시스트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인물들이었지만, 내가 동화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소설은 서사의 예술이지만, 나는 소설을 읽을 때 하여튼 그 인물과 만나야만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극중 인물들을 진짜라고 믿어야 그들이 처한 상황과 배경과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은희경 작가의 그런 '진심'이 참 좋다. 그래서 은희경 작가의 책을 처음 만난 지 십 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녀의 새로운 작품을 설레이며 기다린다.

 

대학에 들어가자 마치 정해진 수순처럼 누구나 연애를 했고, 나에게도 찐한 첫사랑의 달콤함이 찾아왔지만 두 해를 넘기지 못하고 이별의 쓴맛을 봐야 했다. 사람이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는 법이 당연하거늘, 헤어짐 그 자체보다 과정에 있어서 나는 상처를 많이 받았던 것 같다. 학과 선배이던 그는 후배들에게는 일종의 모범처럼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교수들에게는 신임 받고, 동료들에게는 믿음직스러운 그런 남자였다. 거기다 스마트한 외모와 유행에 뒤쳐지지 않는 깔끔한 옷차림도 호감을 만들어주었기에, 우리 과에서 그에게 한번쯤 연정을 품어보지 않은 신입생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어찌하다 보니 나와 인연이 되어 두 해 동안 우리는 연인이었지만,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문자로 그에게 이별 통보를 받았다. 그가 과대표가 되고 나서 한달 쯤 뒤의 일이었다. 원래 나서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는데, 친구들의 호응에 얼결에 과대표가 되고 보니 그게 너무 적성에 맞았던지 학교를 바쁘게 누비고 다니던 그였다. 자연스레 나와 만날 시간은 차츰 줄어들었고, 그러다 다른 학과의 신입생 퀸카가 그에게 마음이 있어 한다는 소문이 잠깐 나기도 했지만, 나는 그를 믿었기에 의심조차 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 사랑을 하다가 마음이 변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전에 아무런 설명도, 변명도 없이 그저 일방적인 통보로 그만 만나자고 하는 건 함께한 두 해 동안의 시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나. 나는 너무 상처받아서 그에게 이유를 따져 묻는 것도, 왜 그러느냐고 애원하는 것도 하지 못한 채 며칠을 앓아 누웠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학교에 나왔을 때는 이미 그는 소문 속의 그 퀸카와 커플이 되어 캠퍼스를 활보하고 있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누군가를 순수하게 믿지 못하게 된 것이.

<내 생애 꼭 하루 뿐일 특별한 날>에서 미흔은 크리스마스 날 남편 회사 직원이라고 찾아온 젊은 여자를 만난다. 그녀는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며 아주머닌 아무것도 모른다고 집안을 한바탕 휘젓는다. 남편을 인생의 전부로 알고 살아온 미흔은 남편의 애인을 만난 뒤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 든다. 그 이후 지독한 두통에 시달렸고, 남편은 바닷가 근처 시골 마을로 이사를 하자고 한다. 그리고 거기서 만난 윗집에 사는 남자 규는 그녀에게 구름 모자 벗기 게임을 제안한다. 게임의 유효 기간은 사 개월, 그 동안 서로를 허용하고, 누군가 상대방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 게임은 끝난다고. 육체적인 탐닉에 빠져들게 된 그들의 게임은 걷잡을 수 없이 깊어져 간다. 권태에 사로잡혀 게임을 하듯이 사랑을 나누는 불륜 그 자체에 공감하기는 내가 너무 어렸지만, 미흔이 받았던 상처때문에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이해하고 싶었다. 스물한 살에 만난 남자가 그의 전 생애 동안 오직 자신만을 사랑하고, 자신 또한 단 하나의 남자만을 사랑하며 평생 하나의 생을 함께 사는 것이 꿈이었던 여자가 '순수'가 아니라 '순진'이 되어버리는 게 세상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말 행복이란 무지한 상태의 다른 말인 걸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나 행복이라는 단어가 성립되는 걸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바보 같았던 나 자신이 미워졌고, 그만큼 그런 나를 발견하게 만든 그가 원망스러웠다. 그런 감정이 쌓이다 보니 사랑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래서 사랑을 위해 언제라도 모든 것을 다 바치겠다는 열정보다는 당장 잃어버려도 상관없다는 식의 냉소가 더 익숙해졌던 것 같다. 물론 덕분에 숱한 연애를 경험했고, 나를 스쳐간 수많은 남자들 중에 소울 메이트를 찾아 지금은 결혼까지 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이후 나의 연애는 전경린 작가의 책 한 권 때문에 꽤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래서 내게는 지금도 최고의 연애소설을 쓰는 작가는 전경린 하나뿐이다. 나는 여태까지도 이렇게나 발칙하고, 매혹적이고, 슬픈 연애 소설을 만나 본 적이 없다.

 

때로 책 속 어떤 문장, 어떤 행간에서 그 시절의 내가 보이는 경험을 한다. 나에게는 그런 책이 유독 많은데, 이상하게도 책이 출간되었던 그 시간, 내가 만났던 그 시기가 나에게 모두 특별한 경험으로 이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많이 반복해서 읽었고 아직도 아무 페이지나 펼치면 문장들이 나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은 책이 있다. 바로 대학시절 방황하던 나를 잡아주었던 신경숙의 <외딴 방>이다. 나는 아빠와의 전쟁에 실패해 내가 원했던 학과가 아닌 취업률이 높은 학과에 들어갔는데, 그래서인지 학과 생활이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공부에 흥미 없이 그저 학점만 채우려고 학교를 다녔고,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집에 사고가 생겼다. 엄마가 한밤중에 갑자기 쓰러지셔서 구급차로 병원에 실려가셨고, 뇌출혈이라는 진단을 받았던 것이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 우리 가족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나는 엄마의 병실을 지키기 위해 학교에 미련없이 휴학계를 던졌고,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아르바이트를 마치면 병원으로 가서 엄마 곁의 보호자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자면서 뭐랄까, 생각이 많아졌다. 몸은 지쳐가고,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은 빨리 흐르는데 나는 친구들과 연락을 끊고 오로지 병원, 직장만 반복해 가다보니 내 삶이 방부처리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나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나와는 다른 삶을 사는 것 같았고, 나만 홀로 외딴 공간에 놓여진 것 같았던 거다. 휴학했던 학교로 나는 다시 돌아가지 못했고, 결국 자퇴 후 아르바이트로 하던 일을 직업으로 하게 되었다. 그때 지친 몸을 이끌고 일을 하러 가던 지하철에서 읽었던 책이 바로 <외딴방>이다.

이 책에서 서른 두 살의 소설가인 ''는 낮에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산업체 특별학급에서 공부하던 열여섯의 나를 떠올려본다. 구로공단 입구에 있던 직업훈련원에 들어가면서 살게 된 외딴방. 그곳에 간 것이 열여섯이었고, 거기서 뛰쳐나온 건 열아홉이었다.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는 희재 언니의 죽음 때문에 그 사 년의 삶과 좀처럼 화해하지 못했던 ''가 열여섯으로부터 십육 년이 흐른 어느 날, 과거와 마주하게 된다. 책을 읽으며 어쩌면 나도 지금 내 삶의 '외딴방'에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언젠가 세월이 아주 많이 흘러 이 시절을 떠올려보았을 때, 나도 이 시기를 그저 건너뛰고 싶은 시간으로 기억하지 않을까. 당시 나에게 주어진 상황들이 어렵다거나 고통스럽다거나 힘들다는 생각조차도 못했기에,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전부였던, 그저 매일 해결해야 할 일들을 마치면 얼른 자거나 일어나는 게 전부였던 시간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극중 ''에게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 같다. 대학은커녕 공장에서 일하며 겨우 산업체 특별학급에서 공부하던 그녀가 작가가 되겠다는, 누가 보면 말도 안 되는 꿈을 꾸었지만 결국 소설가가 되었듯이 내 삶도 좀 오래 시간이 흐르면 이것 보다는 나아지지 않을까. 결국 엄마는 건강을 되찾으셨고, 현재까지 정정하게 잘 계시지만 나는 여간 친하지 않으면 그 시절 얘기를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살아왔다. 나 자신이 스스로를 무슨 비밀을 가진 사람으로 취급하며, 천성이 낙천적이었던 나를, 내성적으로 만들어왔던 건지도 모르겠다. 글쓰기에 마음을 매고 있음으로써, , 라는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소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극중 ''처럼 나도 그렇게 이 책을 붙들고 몇 년을 보냈다. 그렇게 나의 대학 시절이 짧게 흘러가 버렸다.

 

김연수 작가는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그 순간 우리가 예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는 점에서 인생은 신비롭다'라고 말했다. 누구든 그런 순간을 최소한 한 번은 만나게 되는 것 같다. 그날 이후의 나, 그날 이전의 나로 명확하게 구분되어 완전히 색채를 달리하게 되는 그런 순간 말이다. 그것이 누군가한테는 결혼일수도, 대학합격이나 유학일수도 있고, 주식투자처럼 선택의 문제일 수도, 혹은 친구를 사귀는 순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삼십대를 앞두고 있던 2007년의 나는 그런 일생일대의 선택 앞에 망설이고 있었다. 직장생활도 어느덧 안정이 되고, 경력도 인정받아 숙련된 업무처리가 가능하던 이십 대 후반이었다. 하지만 나는 안정된 직장과 연봉을 버리고, 모험을 해보려고 하는 중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못할 것 같았기에, 어쩐지 서른이 넘어 버리면 이런 무모한 도전 같은 건 해보지 못할 것 같았기에 말이다. 결국 나는 기존 연봉의 반 토막도 안 되는 급여에, 업무시간도 두 배나 되는 새로운 일에 무작정 도전을 하게 되었다.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저 그 일을 할 수 있어 행복했다. 마치 내가 직장 생활을 처음 시작하면서 미친 듯이 열정을 퍼붓던 이십 대 초반으로 돌아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은 다들 이해가 안된다며 왜 고생을 사서 하느냐, 그 동안 쌓은 경력이 아깝지 않으냐, 벌써 서른이 다 되어가는데 앞으로 어떻하려고 그러냐 등등.. 우려 섞인 목소리를 냈지만 어차피 내 인생을 누가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었던 일은 해보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이 선택으로 인해 리스크가 많더라도, 언젠가 후회하게 되더라고 말이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의 화자인 '' '5월투쟁'이 끝난 후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던 대학생이다. 그는 방북 학생 대표 자격으로 베를린으로 건너가지만, 갑작스럽게 학생운동 지도부가 붕괴되고 교체되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북한으로 들어가게 될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지, 아니면 독일에 계속 남아 있어야 할지 말이다. 그렇게 불확실하고 불투명하고,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어쩌면 내가 당시에 겪었던 상황과 비슷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매번 의도와 다르게 벌어지는 상황, 예상을 벗어나는 사고, 계획했던 것들이 한 순간에 무너지곤 하는 어긋남들이 평탄치 않은 삶일 수도 있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삶이야말로 살아있는 진짜가 아닐까 생각했다. 극중가 베를린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들에게서 들은 온갖 사연들은 역사의 폭력에 의해 삶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였는데, 물론 지금은 개인의 삶이 시대의 역사와 운명을 같이하는 시대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공감이 갔던 이유는, 완전히 바닥을 치고 나서 남아있는 개인 각각의 삶이 보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무리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간다고 해도 결국 나는 나'이며, 우리의 삶이란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져있으니 말이다. 내가 공들여 지어온 집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내가 반석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들이 한낱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 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너의 인생을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맡기지 말라'는 것. '자기 자신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나의 그 무모한 도전은 결국 실패로 끝이 났지만 나는 여전히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며, 당시에 이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이 위로를 받았던 것을 고맙게 기억하고 있다.

 

얼마 전에 김연수 작가의 신작 <소설가의 일>을 읽는데, 이런 대목이 나왔다. 뭔가 일이 안 풀릴 때, 내가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이라는 생각을 하는 건 좋지만, 다시 태어나려면 조건이 하나 있다는 거다. 다시 태어나려면 일단 나부터 죽어야 한다는 것. . 이 얼마나 명쾌한 진리인가. 다른 사람이 되려면 제일 먼저 내가 바뀌어야만 한다는 것. 다시 태어나려면 일단 내가 죽어야만 한다는 것. 모든 건 내 쪽의 문제였다는 것. 내가 김연수 작가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이렇게 단순하지만, 언제나 삶을 꿰뚫어 보는 명쾌함 때문이다. 언젠가 토머스 H. 쿡의 글을 읽다가 문장과 단락들이 빚어내는 분위기가 너무도 매혹적이어서, 다시 태어난다면 꼭 이렇게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뭐 김연수 작가의 말대로 굳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길 기다릴 필요가 뭐 있나. 그런 글을 쓰고 싶다면, 그만큼 쓰고 공부하고 노력부터 하면 되지. 너무 너무 맘에 드는 책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태어나도 이 책들은 읽겠어! 그러나 기약 없는 다음 생을 위해 아껴두는 것보다는 현재 생에서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기억하고, 더 많이 느끼고 생각하는 게 더 좋지 않겠느냔 말이다.

지금은 생후 60일을 넘긴 아기를 키우고 있어 사실 책을 읽을 시간을 내기가 굉장히 어렵다.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줘야 하는 아기를 키운다는 건 단 일분도 나를 위한 시간이 없다는 걸 미처 알지 못했던 초보엄마라 매일매일이 전쟁이다. 하지만 나는 너무 피곤하고 졸려서 돌아버릴 것 같아도 매일 책을 읽는다. 젖을 먹이는 동안 한 손으로 책을 읽었고, 아기가 잠들었을 때 한밤중 어두운 거실 소파에서 스탠드를 켜고 책을 읽고 있다. 그러다 보니 책을 끝까지 읽으려면 시간이 한참 걸려 새로운 책을 읽기 시작하면 좀처럼 진도가 나가질 않는다. 그래서 요즘은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어 읽고 있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내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그래서 시간에 쫓겨 읽느라 진도가 나가질 않아 조바심 낼 필요가 없는 그런 책 말이다. 특히 오늘 소개한 이 네 권의 책은 요즘 나를 새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당시에 너무 여러 번 읽어서 어떤 장면이 펼쳐져도 당황하지 않고 책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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