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주 조건 : 옆집에 사는 이웃과 반드시 친하게 지내세요
네후네 하야세 지음, 민경욱 옮김 / 리드비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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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인터넷은 편리하다. 대체로 '평범함'들이 굴러다니고 있다. 그것이 내게는 일종의 이상이자 환상이며, 아무리 평범하지 않을지라도 최소한 일반적인 생활의 형태는 알 수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일은 자신이 '이상하다'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자기 세계가 틀렸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에 올라간 뒤에야 우리 집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p.92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다카히로는 고등학교 졸업 후 도망치듯 집을 나와 일을 한다. 이년 뒤 기를 쓰고 모은 돈을 전부 어머니의 빚을 갚는 데 빼앗기고 나자 사는 게 지긋지긋해졌다. 제대로 돼먹지 못한 인생에 마침표를 찍겠다고 마음먹고 투신 장소를 찾아 다니다 구인 광고를 하나 발견하게 된다. [지금 당장 인생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는 사람 모집 중! 월급 15만 엔~ ※입주 필수] 이제 뭐야? 완전 나한테 딱이잖아. 라고 다카히로는 생각한다. 지금 당장 인생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는 사람이라니, 자신에게 딱 맞는 문이 나타난 것이다. 


전화를 건 다카히로와 면담을 한 것은 삼십 대 중반의 유순한 인상을 가진 남성이었다. 그런 내용을 보고 찾아올 사람은 없을 줄 알았던 건지, 그는 오히려 다카히로를 걱정한다. 이제 스무 살인데, 인생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을 나이는 아니지 않냐고. 더 제대로 된 일을 찾아보라고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온거라 다카히로는 정말 상관이 없었다. 입주 조건은 간단했다. '옆집에 사는 이웃과 반드시 친하게 지낼 것'. 그렇게 다카히로는 10층짜리 쥐색 외관의 맨션에서 살게 된다. 그가 살고 있는 것은 7층, 자신과 이웃집 말고는 모두 빈집이다. 정체불명의 이웃은 매일 밤 괴담을 하나씩 들려 준다. "이건 친구에게 들은 얘기인데."로 시작해서 "......무서웠어?"로 끝나는 이야기. 평소에 겁이 많은 편이었지만, 그 괴담들이 전부 창작이라고 믿었기에 그다지 무섭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현실에서 이웃이 말한 것과 똑같은 존재가 나타나는데.... 과연 다카히로는 그동안 23명이나 도망쳤다는 기이한 맨션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쁜 짓을 한 만큼만 벌을 받는다. 세상에 그렇게 적당한 얘기는 없는 법이다. '그 사람'은 나를 안은 채 질질 어딘가로 걷기 시작했다. 따라가면 위험해. 바로 깨닫는다. 그 정도는 바보라도 안다. 즉 나도 안다. 그렇지만, 머리 한구석이 제멋대로 중얼거린다. 애당초 내가 그 맨션에 가지 않았더라면 이 사람도 이런 지경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내게도 일부 책임이 있을 것이다.            p.233


한 친구가 대학생 때 살던 아파트 옆방에 이상한 아주머니가 살았다고 한다. 피로에 지친 표정을 한 백발의 여성인데, 늘 땅만 보고 걸어서 종종 사람과 부딪히곤 했다. 그녀는 항상 <다쿠>라는 이름의 인형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갓난아기처럼 만들어진, 어디에서나 파는 아주 평범한 인형이었다. 아무래도 어딘가 이상해진 사람처럼 보여서 얼른 이사하고 싶었으나 애석하게도 돈이 없었다고. 그러던 어느 날 밤, 집에 돌아오니 문손잡이에 검은 비닐봉지가 걸려 있었다. 그 속에는 손발이 토막 난 인형이 있었다. 편지도 함께 있었는데, '다쿠는 사과를 좋아해요. 공부를 좋아하는 착한 아이입니다. 잘 부탁드려요.'라고 되어 있었다. 목적도, 의미도, 이유도 전혀 알 수 없었던, 불가해하고 기이한 일이었다. 이웃이 들려주는 괴담은 보통 이런 식이었다. 짧지만 임팩트가 강하고, 갑작스러운 결말 이후 길게 여운이 남아 오싹해지는 이야기들이었다. 


차세대 호러 주자로 손꼽히는 네후네 하야세의 이 작품은 일본 호러 사이트에 연재된 인터넷 괴담으로 인기를 끌어 책으로 출간되었으며, 빗발치는 요청에 속편과 동명의 코믹스까지 발매되었을 정도로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아사히신문〉은 ‘2025년 일본 호러 붐의 최전선’에 있는 한 권으로 이 책을 선정, ‘알 수 없는 찝찝함에 자꾸만 곱씹게 되는 이웃 호러’라고 호평했다. '자꾸만 곱씹게 되는' 점이 이 작품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읽는 동안에는 크게 무섭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 순간 섬뜩해지고, 읽고 나서 자꾸만 생각날 것 같은 괴담이었으니 말이다. 독특한 설정과 스산한 분위기, 현실과 허구가 교묘하게 뒤섞이며 점점 높아지는 긴장감이 백미인데, 그 동안 만나왔던 호러 작품과는 완전히 차별화된 재미를 선사한다. '서늘하면서도 따뜻한 공포 감각'이라는 문구처럼 낯설지만 어딘가 친숙한, 오싹하지만 이상하게 어둡지만은 않은 색다른 호러를 경험할 수 있었다. 이제껏 만나지 못했던 새로운 감각의 호러 소설이 궁금하다면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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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사는 대만 여자, 썸머의 게스트하우스 일기
썸머 지음, 허유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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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마카오에서 에그타르트 사 왔어요!" 세상에, 이렇게 감동적일 데가! 휴대폰과 여권을 놓고 다니는 와중에도 에그타르트 상자를 사수한 것이 아닌가. 부푼 기대감을 안고 그녀의 손에 들린 에그타르트 상자와 눈을 맞추고 있는데, 나를 향해 성큼 다가오던 그녀가 테이블 모서리에 발이 걸려 넘어졌고, 그 바람에 에그타르트 상자가 공중제비를 돌아 카펫 위로 곤두박질쳤다. "괜찮아요! 안 쏟아진 게 세 개나 있어요!" 맞는 말이었다. 삶의 시련 앞에서 저토록 낙천적일 수 있다는 건 지금껏 숱한 풍파를 온몸으로 겪어왔다는 반증일 것이다.                 p.89


대만의 뜨거운 여름에 태어나 '썸머'라는 필명을 지은 작가는 영어 교사, 마케터, 에이전트, 아티스트 매니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일을 하다가 서울 이태원에서 게스트하우스를 7년째 운영하고 있다. 지방에서 휴가때마다 올라오는 군인, 호주에서 온 화가, 노르웨이에서온 만찢남, 해녀 출신 할머니 두 분, 루이비통 트렁크를 들고 온 인도인 부부, 수수한 인상의 단발머리 마카오 여성, 노르웨이에서 온 배낭여행자 등 이렇게 다를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여러 유형의 투숙객들이 게스트하우스를 방문했다. 그만큼 웃기고, 이상하고, 황당하고, 뭉클한 에피소드들이 펼쳐진다. 


조용한 중국인 여성이 남기고 간 트렁크 안에 시체라도 들어 있으면 어쩌지 싶었던 일부터 복수극이 코미디로 장르가 바뀌고 만 치킨 배달 사건 등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사람냄새 나는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게스트하우스에 마냥 재미있고 유쾌한 일들만 벌어지는 건 아니었다. 상상을 초월할 만큼 더렵혀진 방은 흔하디흔한 일이고, 혈서가 발견되질 않나, 바닥 전체가 버터로 뒤범벅되어 있질 않나, 피 칠갑을 한 채로 기절한 여자가 있질 않나, 급기야 비닐봉지에 담긴 끔찍한 동물 사체도 있었다. 웬만큼 기괴해 가지고선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다양한 일들이 벌어지는데, 그럴 때마다 청소도우미 여사님의 쿨한 멘트도 인상적이다."이까짓 게 뭐라고." 100부작 대하드라마를 써도 모자랄 파란만장한 인생을 겪어온 여사님의 의연함은 게스트하우스의 빛이자 든든한 기둥이 되어 준다. 




마치 올림픽이라고 벌어진 듯 저마다 신기록에 도전하는 각양각색 게스트들을 만나보았다. 늘 '세상은 넓고 기괴한 일들은 많다'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왔지만, 게스트하우스를 시작한 뒤에야 진정한 '세상에 이런 일이' 체험 캠프에 입소한 기분이었다. 기상천외한 능력을 가진 온갖 엉뚱한 사람들을 상대하며 처음에는 화가 나서 경찰을 부르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저 허허로운 웃음 한 번으로 털어버리고 만다. 3,000일 가까운 시간 동안 어떤 마법이 우리의 숙소 운영 방식을 바꿔놓은 줄 알았는데, 돌이켜보니 바뀐 건 점점 해탈해가는 우리의 마음뿐이었다.              p.186


이태원은 독특한 밤 문화와 이국적인 분위기를 즐기러 찾아오는 사람들로 늘 북적인다. 그러다 보면 택시비가 아까워 아예 하룻밤 묵고 가는 사람들도 있고, 특별한 주말 밤을 기대하며 미리 방을 예약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남산타워 아래 구불구불한 언덕길에 자리한 썸머의 게스트하우스는 날마다 분주하다. 안면육관수술을 예약하고 중국 항저우에서 온 젊은 여자 손님, 무지개 배지를 단 세련된 차림의 일본 남자, 친부모를 찾으러 온 미국 남자, 열일곱 살에 탈북한 북한 청년, 생애 첫 해외여행을 온 쉰여덟 살의 중국 아주머니 등 다양한 여행자들이 게스트하우스에다 자신의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남겨두고 간다.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진 이들이 만나고, 스쳐 지나가며 만들어내는 순간들이 생각보다 훨씬 드라마틱하고 생생해서 매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저자는 섬세한 관찰력으로 삶의 모습들을 포착해낸다. 이태원의 작은 게스트하우스는 각자의 사연을 품고 서울에 머무는 사람들의 따스한 교차로가 되어준다. 저자는 이런 저런 사람들을 만나고, 황당하고 기기묘묘한 상황들을 겪으며 아무리 기상천외한 게스트를 만나더라도 낙천적인 마음과 유머는 잃지 말자고 다짐한다. 그런 마음 덕분에 우당탕탕 시끌벅적한 에피소드들이 유쾌하고도 따뜻한 추억으로 차곡차곡 쌓인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책은 게스트하우스 운영기이자 서울이라는 도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잡지에 문화, 여행 칼럼을 꾸준히 써온 대만 여성 작가의 서울살이 기록은 외국인으로서 서울에서 살아가며 겪은 일과 마주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서울의 다양한 얼굴을 보여준다. 진솔한 시선과 따뜻한 유머로 많은 공감을 얻은 이 책은 대만에서 먼저 출간되었고, 이번에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다. 각자의 사연을 품고 서울에 머무는 사람들의 따스한 교차로가 되어준 이태원의 작은 게스트하우스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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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날레 - 끝까지 강하고 자유로운 나
수전 구바 지음, 정지인 옮김 / 북하우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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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들 다수에게 노년기는 (일반적 가정과 달리) 암담해지고 축 늘어지는 쇠퇴기가 아니라, 오히려 개인적, 정치적, 영적, 미학적 열의가 점점 더 높아지는 시기였다. 젊은 시절에 진짜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던 파괴적 불안감과 자기검열이 희미해진 시기, 어쩌면 대중의 인정까지 자신감을 높여주는 시기에는 창조적 활동이 더욱 가속화된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라는 요기 베라의 진부한 말이 진실임을 증명한다.              p.59


<다락방의 미친 여자>, <여전히 미쳐 있는>으로 만났던 수전 구바의 신작이다. 그녀는 예순셋의 나이에 말기 난소암 진단을 받고 수차례 치료와 재발의 반복을 겪으며 70대 후반이 되었다. 자신에게 노년이란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기적처럼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기대하지 못했던 노년의 시간 속에서 생각한다. 노화가 창조성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노년의 여성 예술가들은 창조적 에너지를 어디로 어떻게 돌리는지... 그렇게 노년 여성의 삶과 예술을 살펴보는 이 책이 탄생하게 된다. 


<미들마치>의 조지 엘리엇,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이자크 디네센, 시력을 잃어가던 말년에도 회화 창작에 몰두했던 화가 조지아 오키프, 그리고 시인 메리앤 무어와 궨덜린 브룩스, 설치 미술가 루이즈 부르주아, 재즈 피아니스트 메리 루 윌리엄스, 무용가인 캐서린 더넘까지 삶의 마지막 단계를 생명력 넘치는 피날레로 만들었던 여성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수전 구바는 아홉 명의 예술가들을 연인들, 이단아들, 현자들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었다. 누군가의 연인이었고, 세상의 척도를 넘어서는 이단아였고, 진정한 삶의 현자였던 그들의 삶을 펼쳐 보인다. 조지 엘리엇과 콜레트, 조지아 오피크는 그들이 점점 더 높아지는 명성에서 나오는 자석 같은 매력을 발산하던 시기에 연하의 남자와 관계를 맺었다. 소설가로서, 화가로서 얻은 명성은 젊은 남자를 매혹할 만큼 충분히 매력적이었으니 말이다. 그들이 말년에 맺은 파트너 관계는 노년의 내밀함과 반려에 대한 공통된 욕망을 드러낸다. 이들 셋은 서로 방식은 다르지만 노년에도 길게 이어지는 사랑의 수명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노년은 흔히 세상의 종말처럼 여겨지지만, 당연하게도 아직 막이 내린 것은 아니다. 그 뚱뚱한 ─ 혹은 깡마른 ─ 여인이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음악을 마주하고 노래를 부를 때까지 쇼는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인공들을 닻처럼 존재의 마지막 단계에 붙잡아주었던 연결감은 우리가 잃어버린 신체 기능이나 정신적 능력 혹은 짝이 없이도 계속 살아간다는 사실을, 또한 얼마 후면 쇼가 우리 없이도 계속되리라는 사실을 매일같이 그들에게 가르쳐주었다. 우리 올드 레이디들의 피날레를 기억한다면 우리도 그들의 호방함을 유산으로 물려받을 수 있을 것이다.                p.508


이자크 디네센, 메리앤 무어, 루이즈 부르주아는 이단아답게 서로 제각기 달랐지만, 엄청난 속돌 ㅗ독특한 만년의 작품 세계를 만들어갔다. 디네센은 아버지에게, 무어는 어머니에게, 부르주아는 창조성의 모델 역할을 아버지에게서 어머니에게로 옮기려는 노력에 열중했다. 이들은 특이한 차림새로 명성을 더욱 키웠는데, 여기에는 그들의 자기신화화가 투영되어 있다. 그들은 자신을 시대와 맞지 않는 사람으로, 지난 역사적 시기의 유물로 여기기도 했다. 메리 루 울리엄스, 궨덜린 브룩스, 캐서린 더넘은 각자 상당히 다른 재능을 지닌 사람들이지만 셋 다 중년기에 중대한 변화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 변화는 그들 생애 마지막 몇십 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들 세 사람이 걸어간 이력은 창조성의 새로운 방향을 찾는 일에서는 믿음이 막강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누구나 '나이듦'을 피해 갈 수는 없다. 생물학적으로 늙는다는 것은 세월과 함께 켜켜이 쌓인 연륜이라는 장점보다 예전같지 않은 건강과 나날이 떨어지는 기력, 그리고 사회적으로 소멸되는 존재 가치라는 단점을 더 와닿게 만든다. 그래서 노년을 자신의 상태로 받아들이고 싶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노화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우리 스스로 맞이할 노년의 모습을 빚어낸다는 것을 보여준다. 노년이 오히려 자기를 재발명하는 창조와 갱신의 시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이 책 속 아홉 명의 여성 예술가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멋진 피날레를 만들어낸다. 진지하게, 화려하게, 굳건하게, 기괴하게, 재미있게, 유머러스하게도 노년의 삶을 펼쳐 보인다. 각각의 삶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뭉클하고, 눈부셨다. 그래서 어떻게 나이들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더는 장편소설을 쓸 기력이 없어졌을 때 소설가는 무엇을 만들어낼까, 이제 공연할 수 없게 된 무용가는 안무만 해야 하는 걸까. 왜 사람들은 늙은 여자의 아름다움에 눈뜨지 못하는 걸까. 수전 구바가 들려주는 창조적 여성의 노년기라는 매혹적인 이야기를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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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 플랜더스
다니엘 디포 지음, 류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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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오빠 말이 참 놀랍네." 그의 여동생이 말했다. “하지만 베티에겐 딱 한 가지 부족한 게 있는데, 그로써 모든 것이 부족한 것이나 마찬가지지. 요즘은 결혼 시장이 우리 여자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어. 말하자면 어떤 아가씨가 미모, 좋은 가문, 훌륭한 가정교육, 위트, 양식, 예의범절, 겸손함 등을 다 갖추고 있다고 해도, 아니 최대한 많이 갖추고 있다고 해도, 돈 한푼 없는 빈털터리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라는 거지. 앞에서 말한 모든 덕목이 하나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요새는 오로지 돈만이 여자의 추천장이야. 이익은 몽땅 남자가 다 차지하고.”                  p.38~39


<로빈슨 크루소>라는 고전 명작으로 알려진 대니얼 디포의 또 다른 작품이다. <로빈슨 크루소>가 1719년 작품이고, <몰 플랜더스>는 1722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28년간 홀로 무인도를 개척해 나가는 한 남자에의 이야기에 이어, 이번에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디포는 수차례 사업에 실패해 큰 빚을 지고 평생 고생했고, 채무로 인해 여러 차례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 태어난 장소이자 결국 갇히게 되는 장소인 뉴게이트 감옥이 바로 같은 장소이다. 실제로 디포가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접하게 된 갖가지 범죄자가 이 작품의 소재가 된 셈이다. 




흥미로운 건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여주인공의 일생을 몇줄의 문장으로 오약해 두었다는 점이다. 뉴게이트 감옥에서 태어나 육십여 년에 걸친 파란만장한 생애 동안 어린 시절을 제외한다면 십이 년은 매춘부로, 다섯 번은 남편의 아내로(그중 한 번은 친동생의 아내였다), 십이 년은 절도범으로, 팔 년은 버지니아의 중범죄 유형수로 살았으며, 마침내 부자가 되어 정직하게 살다 회개자로 삶을 마쳤다. 단 네 줄의 문장으로 이 캐릭터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짐작이 될 수밖에 없었다. 독자들의 관심을 끌고자 한 설명문이라면 그 의도가 적중한 셈이다. 감옥에서 태어나 하녀, 정부, 매춘부, 소매치기, 좀도둑 생활을 전전하다 유배형을 선고받는 캐릭터라니.... 이토록 드라마틱한 삶이 또 있을까. 




이 무렵 나는 정말이지 참으로 행복한 상황에 놓일 수도 있었다. 범죄생활을 그만둘 때가 되었음을 자각하기만 했다면 그리될 수 있었다는 소리다. 내 선생은 종종 내가 영국의 같은 업계 사람들 중 가장 부자라고 말하곤 했고 나도 그렇다고 믿었다. 내게는 현금만 700파운드에 그것 말고도 옷들과 반지들, 금은제 식기류, 금시계 두 개가 더 있었다. 물론 모두 훔친 것들이었다. 아아! 그때라도 회개의 은총을 입었더라면 그동안 저질러온 어리석은 짓들을 돌아다보며 다소라도 개심할 여지가 남아 있었을 텐데.                   p.381


몰 플랜더스의 어머니는 절도죄라고 이름 붙일 것도 없는 지극히 가벼운 도둑질로 중범죄 유죄판결을 받았다. 당시에는 사소한 절도죄도 사형부터 선고하는 게 관례였고, 그렇지 않을 경우 유배형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어머니는 임신을 이유로 감형을 간청했고, 칠 개월간 형 집행을 면제받았는데 그 사이에 몰 플랜더스가 태어났다. 아이를 낳고 유배형으로 감형되었는데, 덕분에 몰 플랜더스는 태어나면서부터 고아가 된 셈이다. 다행히 좋은 '보모'를 만나 여덟 살이 될 때까지 그곳에서 살다 열네 살이 되었을 때 어느 부유한 부인의 집에 하녀로 들어가게 된다. 나이는 어렸지만 해야 할 일을 민첩하게 잘했고, 훌륭한 바느질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주 예쁘기까지 했다. 


결국 아름다운 미모와 허영심이 그 집의 두 아들과 엮이게 만들고 만다. 큰아들의 정부가 되고, 막내아들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을 하게 되는데, 결혼 생활 5년 차에 남편이 죽게 된다. 플랜더스 부인이 된 이후로 여러 남편을 거치고, 아이를 낳으며 살게 되는데 그 과정 또한 한 사람의 생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파란만장하다. 여러 남자를 만나고, 헤어지고, 결국엔 딸린 아이들을 데리고 혼자 살게 되어 12년간 도둑 노릇을 하게 되는데, 그러다 잡혀 감옥에 가고, 사형 대신 유배형을 받게 된다. 감옥에서 태어나 바로 고아가 된 소녀가 일흔이 될 때까지의 삶이 오백 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에 담겨 있다. 고전은 지루하다는 편견을 깨줄만한 드라마틱한 서사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몰 플랜더스의 일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데, 마치 실존 인물의 자서전인 것처럼 회고하는 방식으로 쓰여있다. 작품이 시작되기 전에 작가의 긴 서문 또한 그런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이런 수법은 18세기 초반의 산문 픽션 작가들, 특히 대니얼 디포가 즐겨 쓰던 수법이라고 한다. 실화라고 주장하지만 등장인물, 사건, 상황 등이 모두 허구라는 뜻이다. 하지만 실존 인물의 회고록이라고 착각해도 좋을만큼 현실감 넘치는 매력적인 서사임에는 분명하다. 이 작품은 사실주의 소설의 효시로 꼽히며 디포를 '영국소설의 아버지'로 자리매김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제임스 조이스는 디포에 대해 '외국 작품을 모방하거나 각색하지 않고 문학적 모델 없이 창작활동을 벌인 최초의 영국 작가'라고 말했으며, 버지니아 울프는 이 작품에 대해 '의심할 여지 없이 위대한 영국소설이라 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라고 평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매력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주인공 캐릭터이다. 덕분에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지며 자립적인 여성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계속 만날 수 있다. 실제로 몰 플랜더스라는 캐릭터는 1718년에 교수형을 당한 악명 높은 여자 소매치기 몰 킹을 모델로 탄생했다고 한다. 가진 것도 의지할 것도 없는 밑바닥 인생에서 사회적 경제적 자립을 쟁취하고자 고군분투한 서사로서도 흥미롭고, 온갖 불리한 악조건에 내몰린 여성의 당대 현실을 보여준다는 점도 의미가 있는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두툼한 페이지를 자랑하는 고전임에도 전혀 지루하거나 어렵지 않다는 점도 이 작품을 추천해주고 싶은 이유이다. 재미있는 고전을 찾고 있다면 꼭 만나보길 권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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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 플랜더스
다니엘 디포 지음, 류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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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은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편견을 깨주는 드라마틱한 서사를 보여주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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