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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마트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 일하는 나와 글 쓰는 나 사이 꼭꼭 숨은 내 자리 찾기
하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7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유니폼은 가장 눈에 띄는 동시에 가장 희미한 옷이다. 유니폼을 입은 사람은 전경에서 물러나 배경이 되고, 그래서 거기 있어도 없는 존재가 된다. 세상의 중심은 내가 아니며 그건 결코 슬픈 일도 부끄러운 일도 아니라는 사실을 유니폼을 입고 배웠다. 자의식 과잉에서 벗어나 희미해질수록 나는 자유로워진다. 오직 일을 위해 만들어진 옷이 주는 이상한 해방감. 때로는 그걸 통해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던 나 자신으로부터 해방되기도 한다... 투명 망토 같은 유니폼을 입고 오늘도 내게서 한 걸음씩 멀어진다. p.48
책의 겉표지를 넘기면 화려한 이력이 담긴 이력서부터 보인다. 셀 수도 없을 만큼 이력서를 가득 채운 것은 전부 마트 행사 이력이다. 하현 작가는 파견직으로 냉장두유, 와인, 세탁 세제, 소형 가전제품, 초당옥수수, 파인애플, 냉동피자, 전통차 등을 팔면서 글쓰기를 해왔다. 이 책은 그렇게 14년 동안 여덟 곳의 마트에서 근무하며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준다. 현대 사회의 신분이나 다름없는 정규직 타이틀을 포기하고 마트 계약직으로,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이유는 뭘까 궁금했다.

작가는 우리에게 익숙한 드라마의 한 장면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저마다의 기구한 팔자를 자랑하며 돈도 잃고, 집도 잃고, 사랑도 잃어버린 여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마트로 향한다고. 남부러울 것 없이 살던 부잣집 사모님이 갑자기 닥친 시련으로 한순간 '마트 아줌마'로 전락하는 상황, 다들 드라마에서 한번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다음 장면은 그 사실을 알게 된 남자가 한달음에 달려와 이런 대사를 한다. "당신이 왜 여기서 이런 일을 해!"
그렇다면 '이런 일'이란 무엇일까.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 걸까.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마트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 우리 사회에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작가가 마트에서 일하기 위한 면접에서도 "나이도 어리고 스펙도 괜찮고...... 아무리 봐도 여기서 일할 사람 같지 않은데 어쩌다 마트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라는 질문을 들었다고 하니 말이다. 그것도 작정하고 던진 뾰족한 말이 아니었기에, 여기서 일할 사람 같은 건 뭘까..라고 생각하며 마트에서 돈을 벌게 된 사연을 구구절절 늘어놓았다고. 그렇다면 대학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한 작가는 어쩌다 마트 일을 시작하게 됐을까.

재희 언니의 말대로 이곳에는 미래가 없었다. 마트에서의 하루하루는 그저 현재일 뿐이었다. 오늘의 성실은 단지 오늘만을 보장했다. 버틴다고 해서 대단한 경력이 되지도, 쌓인다고 해서 내세울 만한 기술이 되지도 않는 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에 내일도 내가 이 자리에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기 어려웠다. 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마트를 떠나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걸. 그럼에도 외면했다. 그곳이 어디인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이미 너무 늦어버린 건 아닌지. 그 막막함을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순간이 두렵고 불편했다. p.145
사람들이 말하는 번듯한 직장에서 일자리를 얻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매번 마트로 돌아가야 했던 이유는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작가는 말한다. 덕분에 마트에서 근무하는 동안 일곱 권의 책을 냈으니 원하는 방향으로 잘 살고 있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노동자의 대부분이 중년 기혼 여성인 마트에서 작가는 매순간 생각한다. 파견직과 계약직이 마주하는 현실에 대해, 꿈과 현실 사이의 간극에 대해, 그리고 사회가 여성과 청년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서.
마트는 직원을 존중하는 직장이 아니었고, 마트에서 일하며 마주하는 손님들 또한 툭 치면 화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아무 이유없이 화풀이 대상으로 직원을 대하는 게 다반사였다. 그런 곳에서 버텨내봤자 미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버틴다고 해서 대단한 경력이 되지도, 쌓인다고 해서 내세울 만한 기술이 되지도 않는 일. 그럼에도 마트에서의 노동은 정직하다. 일곱 시간 반 근무, 한 시간 식사, 삼십 분 휴식. 작가는 정직한 노동의 세계로 인해 글쓰기를 통해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보장을 얻는다.

사실 퇴근과 함께 끝나는, 절대 집까지 따라오지 않는 일이란 거의 없지 않을까. 퇴근 시간을 딱 맞춰 지킬 수 있는 직장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하현작가처럼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자 한다면, 어쩌면 마트에서 일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선명한 현재와 불투명한 미래 사이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읽고 쓰고 생각할 여유가 있는 삶을 위해 기본적인 생활 정도만 가능하게 하는 월급을 받으며 살아온 방식을 존중한다. 누구나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 있게 마련이고, 그것이 자신의 꿈과 보람을 얻게 해준다면 그 선택이 옳은 거라고 생각한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찾아가라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되는 진짜 내 자리에 도달하기 위한 작가의 고민이 공감도 되고, 이해도 되는 그런 책이었다. 그리고 일상에서 쉽게 마주하게 되는 마트가 단순히 생필품을 파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갈등이 투영되는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오늘도 최선을 다해 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일과 안정적인 미래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