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겉들 - 이옥토 사진산문
이옥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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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사진의 좋은 점은, 눈으로 먹은 것들을 박제해둘 수 있다는 점입니다. 대신 무엇도 꺾지 않으면서, 누구의 것도 취하지 않는 이 상냥한 식사를 무척 좋아합니다. 새가 모이를 쪼아 먹는 것처럼 작게 찰칵거리는 소리만 가득한 시간. 그리고 나와 같은 식성을 가진 이들에게 간식처럼 나누어줄 수 있다는 것도 큰 즐거움입니다. 제가 꾸려온 모이들이 누군가가 즐겁게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식탁에 모여 앉아 먹는 따듯한 저녁처럼 다정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p.69


과일이나 꽃의 단면을 사진으로 포착해 만든 책갈피 다들 하나쯤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얇게 저민 과일과 꽃의 모습을 반투명한 사진으로 제작하고 직접 조향한 과일과 꽃의 향을 입혀 책갈피를 만들 생각을 하다니 처음 만났을 때 정말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작년 서울국제도서전에선 첫날부터 오픈런 사태가 빚어졌고, 온라인 중고 거래로 책갈피 한 장이 고가로 거래될 정도로 엄청난 사랑을 받는 이옥토 작가의 첫 책이 출간 10주년을 기념해 특별 에디션으로 나왔다. 




책의 표지, 책갈피 등으로 만나왔는데, 사진 작가의 산문은 또 어떨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고요하고 섬세한, 서늘하면서도 다정한 사진 속 느낌들이 글에도 고스란히 묻어 있어 시처럼, 노랫말처럼 리듬이 느껴지는 듯한 글들이었다. 초기 사진과 미공개 사진이 110컷 이상 수록되어 있어 사진집으로도 근사한 책이었다. 작가는 '사랑한답시고 사랑해온 것들은 전부 겉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타인의 내밀한 '안까지' 눈으로 볼 수는 없는 법이니까. '닿을 수 있는 모든 것은 겉'이기에 우리는 상대의 안까지 사랑하고 싶어서 내내 겉을 안고 있는 것이다. 기존에 알고 있던 이옥토 작가의 사진들은 주로 사물의 표면을 다루는 것이 많았던 것 같은데, 이 책에는 유독 인물들의 사진이 많이 담겨 있다. 주름진 노인의 옆모습, 수줍은 미소와 먼 곳을 응시하는 시선 등 다양한 결로 보여지는 인물들의 사진과 빛과 어우러진 풍경 사진들을 가득 만날 수 있었다.




빈 것들은 곧잘 찌그러집니다. 내 손바닥 한가득 그 이력이 손금으로 적혀 있습니다. 빈손으로 걷다 보면 이따금 그 금이 간 틈새로 내가 새어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내내 나를 흘리며 걸어왔는데, 이때 만난 또 다른 당신은 손이 무척 커서 내가 넘치지 않고 그 안에 맺히도록 도와줬습니다. 틈이자 깨진 금이라고 생각했던 자국이, 종이접기 자국처럼 느껴졌습니다. 무언가를 붙잡을 수 있는 형태로 접히기 위해 그어진 선처럼. 사랑은 어째서 단번에 슬픔을 뒤집을까요, 그 슬픔을 버리기보다 내부로 감싸안는 형태로.                  p.172


작가는 '삶의 대부분은 망설임, 머뭇거림, 주저함, 지지부진함, 서성거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효율을 따져 물을 수 없는 제자리걸음과 뒷걸음질이 잦'은 거라고. 그렇게 완벽하지 않은 존재이기에 우리는 실수하고, 후회하고, 어리석고, 미련한 선택을 하면서 살아간다. 삶이 완벽하게 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는 이유는 그렇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부서지기 쉬운 존재지만, 일상 속 소중한 것들이 작지만 빛나기에, 매일을 살아갈 수 있다. 이옥토 작가는 바로 그런 순간들을 포착해낸다. 사물이든, 인간이든, 풍경이든 그 존재가 지닌 아름다움을 과장하거나, 바꾸지않고 있는 그대로 동결건조시킨다. 순간은 영원할 수 없지만, 이옥토 작가의 순간들은 그렇게 영원히 된다. 




이 책은 이옥토 작가가 오랜 시간 채집해온 아름답고도 불완전한 사랑의 순간들을 담고 있다. 20대에서 30대로 시간을 거쳐오면서 개인적인 이야기들도 있고, 마음속에 오래 품고 있던 장면들에 대한 글도 있다. 이옥토 작가의 글과 사진은 과거와 현재를 잇고, 곳곳에서 마주하는 빛나는 순간들을 박제하고, 지금의 자신을 만든 생각과 오래도록 애정해온 대상들을 선연하게 담아냈다. 독보적인 창의력을 보여주는 밀도 높은 사진들 못지않게 산문으로 풀어내는 이야기도 단어 하나, 쉼 하나까지 모두 특유의 감성과 색깔이 묻어나서 좋았다. 혹시 처음 나온 버전을 소장하고 있더라도, 이번에 나온 특별 에디션은 무선에서 양장이 되었고, 사진 40여 컷을 새롭게 선별해 담았으니 꼭 다시 만나보기를 권해주고 싶다. 


'쓸모는 이름처럼 붙여지는 것이기에 보잘것없음의 가치는 누군가 보아줌으로 인해 소거된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러한 것들을 향한 작가의 애정어린 시선을 통해 겉으로 보여지는 것 이면에 담긴 진실까지 마주하게 만들어 준다. 지금의 이옥토 작가를 만들어 준 출발점이기도 한, 이 근사한 책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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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번역 일기
김정아 지음 / 샘터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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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러시아어는 단어 하나하나가 강세를 가진 언어다. 동시에 읽을 때는 분명한 리듬과 높낮이가 있다. 그런데 도스토옙스키, 특히 그의 4대 장편은 그 리듬을 일부러 비틀어 놓는다. 읽는 사람이 편하지 않게, 숨이 턱 막히게, 문장을 곧장 삼키지 못하게 만들어 놓는다.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하는 독자조차 읽다 말고 돌아서게 만든다. 그래야 문장을 씹고, 다시 씹고, 결국 생각하게 된다는 계산이 깔려 있는 게 아닌가 짐작해 본다.             p.22


몇 달 전에 SNS를 휩쓸며 독서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책이 있다. 바로 도스토옙스키의 4대 장편을 한 권에 담은 책인데, 책의 3면에는 금장을 입혔고 표지에도 24K 금박 문양을 찍어 넣은 2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고급스러운 책이었다. 게다가 한 사람이 10년간 4대 장편을 모두 번역한 사례는 세계적으로 드물고 국내에서는 유일무이하다고 해서 더욱 궁금했다. 이번에 만난 책은 바로 그 주인공 도스토옙스키 전문 연구자 김정아 번역가의 10년에 걸친 완역 기록을 담은 에세이이다. 


지난 10년간 러시아 문학과 마주하며 고민해 온 번역가의 고백이자, 한 인간이 도스토옙스키라는 산을 넘으며 겪은 기록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에 뭉클한 기분으로 읽었다. 김정아 번역가는 낮에는 패션 회사 CEO로 일하고, 새벽 시간을 쪼개서 번역을 해왔는데... 출장과 미팅, 그리고 세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라는 현실도 있었기에, 4대 장편을 완역으로 해보자는 제의를 처음 받았을 때는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평소에도 에너지를 아껴 쓰는 법을 몰라 작은 일에도 온 마음을 다 쏟는 성격이라고 하는데, 결국 4대 장편을 모두 번역하게 된 것은 그러한 성격 덕분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회의, 숫자, 계약, 일정, 판단과 결정이 쉼 없이 이어지는 CEO로서의 삶과 고요해진 집에서 세 아이의 숨소리만 희미하게 들리는 새벽, 도스토옙스키와, 쿤데라와, 카프카와 나란히 앉아 숨을 쉬는 시간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죄와 벌>에서 시작된 죄와 구원의 질문이, <백치>에서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지의 문제로, <악령>에서 사상의 광기로, 그리고 마지막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총체적인 고백으로 이어지는 그 감정선과 철학적 발달의 결을 그대로 따라가고 싶었다. 도 선생님의 내면의 흐름과 사유의 발달, 개인적이면서도 시대적인 격랑의 결을 그대로 따라가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게 순서대로 차근차근 걸어가다 보니, 가랑비에 온몸이 젖듯 어느 순간 나는 도 선생님의 영혼과 합성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p.296~297


저자는 10년 동안 도 선생님과 매일 새벽을 보내며 그의 문장 안에서 울고, 싸우고, 기도하고,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조금 더 단단한 마음, 조금 덜 쉽게 판단하는 눈, 인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습관, 그리고 인간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배웠다. 물론 매일 새벽, 같은 의자에 앉아 몇 시간씩 움직이지 않는 생활은 허리에 조용히 경고를 보냈고, 결국 복대를 두르고 일을 지속해야 했다. 손이 아파 실리콘으로 된 손가락 관절 지지대를 주문해 사용해야 했고, 손목 보호대, 팔꿈치 쿠션 등 점점 장비가 늘어났다. 장편 번역이란 단순히 언어를 옮기는 일이 아니라, 허리와 손가락과 수면과 체력을 조금씩 떼어 바치는 일이기도 했던 것이다. 머리로 시작하지만 결국엔 몸으로 써 내려가야 하는 작업으로서의 번역의 실체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된 시간이었다. 


이 책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을 본격적으로 읽어 보지 못한 독자들을 위한 입문서로서도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줄 것 같다.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문장부터 배경, 서사, 캐릭터들을 하나씩 짚어 가며 그 이면에 담긴 숨은 의미까지 살필 수 있어 굉장히 밀도 높은 시간이었다. 각각의 작품을 상징하는 컬러로 풀어낸 장들도 매우 흥미로웠는데, 왜 <죄와 벌>은 초록색이고, <백치>는 흰색, <악령>은 검붉은색,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검정색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은 이 책을 직접 읽어 보길 권해주고 싶다. 저자는 번역가의 작은 바람으로 "만약 이 책을 통해 단 한 사람이라도 ‘아, 도스토옙스키를 한번 읽어 볼까?’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면, 나는 성공한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아마도 꽤 많은 이들이 이 책을 통해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들 것 같다. 나 역시 그러했고 말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문학 세계를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면, 번역 작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 과정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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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을 지닌 채 우리는
이주영 지음 / 교유서가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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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서늘한 밤바람이 발등을 훑고 지나갔다. 열린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여름 나무의 냄새를 맡으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귀뚜라미가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는 곽을, 바스켓에 얼음을 채우는 안 교수의 조카를, 잔뜩 부은 눈으로 누군가와 잔을 부딪치는 깊은숲 사장을 바라보았다. 초록을 몸에 하나씩 지닌 채 손을 잡고 등을 두드리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을 보았다. 어둠이 짙어진 지 오래되었지만 아무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 '이터널 선샤인' 중에서, p.85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로부터 함께 병문안을 가자는 이야기를 듣는다. 외가 쪽 친척 어르신이 화성의 한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거였다. 별로 가깝지도 않은 친척을 문병하느라 휴일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평소답지 않게 강경했기에 어쩔 수 없이 함께 가기로 한다. 그리고 그가 '나'의 생부이며 50여 년 전 북한에 끌려갔다 돌아온 어부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난데없이 출생의 비밀을 듣게 된 것이다. 속초 출신인 생부는 납북 어부라는 낙인에 더해 반공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2년 가까이 복역했고, 자식의 미래를 걱정해 지금의 '내 부모'에게 아이를 맡긴 거였다. 그날 이후 '나'는 매주 토요일마다 요양병원을 찾아갔는데, 친아버지에 대한 본능적인 끌림이나 애정 같은 건 아니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 생부와 '나'의 만남은 어떤 시간을 만들어 가게 될까. 


이 책은 주중에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주말에는 소설을 쓰는 이주영 작가의 첫번째 소설집이다. 싱그러운 제목과 표지 때문에 선택한 책인데, 겉표지를 벗겨보면 만날 수 있는 속표지도 초록을 한가득 머금고 있어 너무 예쁘다. 이 책에 수록된 여덟 편의 이야기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식물이 내뿜는 청량한 향기와 비 온 뒤의 흙냄새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식물이 서사의 주요 서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히려 식물의 생명력과는 정반대인 '죽음'을 다루고 있는 이야기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슬픔조차 다정하게 느껴질 만큼 선명한 반짝거림을 품고 있었다. 




코바늘로 매듭을 솜씨 좋게 처리한 덕에 어디가 시작 지점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없는 대로 둘 수 있다면, 불쑥 치솟는 물음들을 고요히 가라앉힐 수 있다면 여원의 삶도 언젠가 단단히 매듭지어질 수 있을 것이다. 매매, 이사, 구직, 출근...... 이런 단어들을 하루하루 쌓아가다보면, 그리하여 우연히 다시 만난 안녕한 하루가 한 달이 되고 1년이 된다면 더는 이음매를 발견할 수 없는 날이 찾아오기도 할 것이다.                 - '안녕한 라루' 중에서, p.170~171


라디오 문화프로그램 진행자인 ‘나’는 평소 친분이 있던 안향숙 교수의 메일을 받는다. “저의 장례식에 초대합니다." 그녀가 담낭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는다는 소식을 듣긴 했지만 장례식이라니. 하지만 대부분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1년에 서너 번은 열렸던 안교수의 홈파티를 떠올리며, 그저 콘센트가 '장례식'일거라고 생각한다. 안 교수의 집에 그녀는 없었다. 영상 속에서 그녀는 항암 치료의 고통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대신 죽음에게 먼저 선수를 치기로 했다며, 스위스의 안락사 지원단체로 떠나며 파티를 미리 준비했던 거였다. 그렇게 당사자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채로, 세상에서 본 적 없는 아주 특별한 장례식 파티가 진행된다. 스스로 원해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자신의 죽음만큼은 원하는 대로 선택해도 되지 않을까. 이 책에는 이렇게 죽음을 다루고 있는 작품들이 많았는데, 무겁지 않게 흘러가는 서사가 긴 여운을 남겨주어 더 좋았던 것 같다. 


괴팍하게만 보였던 할머니의 행동을 이해하게 된 순간, 어느 날 난데없이 알게된 출생의 비밀, 죽은 연인의 유골함이 있는 추모공원에서의 캠프닉, 자신의 불행을 책으로 만들어 팔며 세상 안에서 버티기....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든 불행과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고개를 돌리면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당신과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세상의 기준으로 본다면 아무 소득도 없는, 그런 무용한 흔적과 기척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반짝임과 온기가 있고, 그것이 결국 우리를 살게 한다고 믿는다'는 작가의 말에 밑줄을 그으며, 이주영 작가의 다음 작품을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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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하세요 교유서가 시집 7
김박은경 지음 / 교유서가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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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느리게 당신을 반복해, 잘 알고 싶기 때문이야 더 연습하면 될까 모르겠어 어려워 그만두고 싶다고 말하면 계단식으로 점진적으로 조금씩 좋아질 거라고 구분조차 사라질 거라고 꼭대기에 오르면 이국의 말로 꿈까지 구게 될 거라고 하지 공부에는 명확한 목적이 필요하다는데 그게 뭐지 당신을 정확히 알게 되면 무엇이 달라질까 그때쯤이면 오직 나의 오직 나만의, 아름다운 소유격이 완성될까              - '소유격' 중에서, p.31


'교유서가 시집' 시리즈가 벌써 일곱 번째 작품이 나왔다. 김박은경 시인의 시집은 문학동네 시집 시리즈로 <못 속에는 못 속이는 이야기>를 만났던 기억이 있다.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시인의 시집이라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이번 시집은 '의심하세요'라는 제목부터 호기심이 들었는데, 시인은 "의심과 믿음은 어쩌면 같은 종족"이라고 말한다. 자기 확신같은 나에 대한 믿음도, 널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타인에 대한 믿음도 사실 견고해질 수 없는 감정들이다. 믿음과 의심 사이의 그 조그만 간격은 사실 종이의 앞뒷면과 같으니 말이다. 




그거 아니면 죽을 것 같고, 그것을 위해 죽일 수도 있다고 믿었던 마음도 사소한 오해로 깨어질 수 있다. 믿는다고 정말이라고 하면서도 의심이 거미줄 치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한번 시작된 의심은 절대 돌이킬 수가 없고, 다시는 그 사실을 알았던 순간으로부터 되돌아갈 수가 없다. 연인들의 헤어짐도, 친구들과의 다툼도, 부부 간의 신뢰가 깨어지는 것도 모두 단 한순간이다. 의심은 오랜 세월 쌓아온 신뢰와 구축된 관계들을 차례차례 부식시켜 바닥에 이르게 만들고 만다. 그래서 아무런 의심 없이 선택한 믿음은 빛으로 지어진 누각처럼 투명하게 아름답지만, 언제든 추락할 수 있다. 하지만 가끔은 흔들림없이 확신하고 싶다. 어떤 일이 있어도 믿겠다고 선택한 나의 마음을 말이다. 시인은 '의심'이라는 방법으로 세상을 들여다보고, 죽음의 언어를 통해 삶을 바라본다.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말과/싫어하지는 않는다는 말은 다른가//

한 발은 집어넣고 한 발은 내놓은 사람처럼/끝이라면서 몇 번이고 비틀대는 인간처럼/엉킨 혀는 같은 자리를 헤매고 있어//

당신도 다르지 않다니/다르지 않다는 말은/같다는 말이니//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뭐라고 설명해야 할지/뭐라고 다짐해야 할지/뭐라고 고백해야 할지/뭐라고 사과해야 할지//                - '목숨 같은 거' 중에서, p.82


교유서가 시집 시리즈는 소후에 시인의 <우주는 푸른 사과처럼 무사해>를 시작으로 원성은 시인의 <비극의 재료>, 리사 시인의 <우리의 슬픔은 전문적이고 아름다워>, 기혁 시인의 <소설책>에 이어 송하얀 시인의 <그 책은 내 빈 심장에 끼워둘게>, 송하얀 시인의 <그 책은 내 빈 심장에 끼워둘게>, 추성은 시인의 <접시 위에는 잘 차려진 비밀이> 꾸준히 새로운 시들을 선보여왔다. 표지 빛깔에 맞는 컬러로 내지에 그라데이션을 줘서 더 아름다운 시집인데, 심플한 이미지의 표지를 펼치면 만날 수 있는 내지의 은은한 색감이 정말 예뻐서 차곡차곡 모으고 있다.  




시집을 읽는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어떤 시집은 서사로, 어떤 시집은 분위기로, 또 어떤 시집은 문장으로 읽게 된다. 이번 시집은 유독 밑줄 긋고 싶은 문장들이 많았다. '기울어진 세계를 지탱하는 것은 가장 약해진 부분 그것은 가장 찬란했던 것', '조심할수록 이상해지는데 조심해도 다칠 수 있다', '되풀이되는 불운이야말로 돌을 바로 놓고 싶어하는 악착같은 숨 아닐까', '믿음엔 의심이 있어야 하는데 의심은 왼손잡이 같은 것', '다들 제 속의 것으로 버틴다', '게임이니까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 목숨 같은 거 걸지 마 알잖아', '털실이 심장에 온기를 주듯 애쓰는 다정이 다정을 부추기고 절뚝이는 무엇이 마침내 도착했을까' 등 좋은 문장들이 많아 음미하며 천천히 읽었다. 어둡지만 다정하고, 서늘하지만 달콤한 문장들이 페이지를 덮어도 사라지지 않는 감각으로 남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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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양자 책 - 양자 컴퓨터와 초전도체 너머 양자역학의 미래
짐 알칼릴리 지음, 김성훈 옮김 / 윌북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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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양자역학은 얼핏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두 가지 이유로 놀랍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세계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는 데에 아주 근본적인 역할을 하여 지난 반세기 동안 이루어진 대부분의 기술 발전이 양자역학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역학의 의미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양자의 세계가 따분하다니요! 그 세계가 얼마나 큰 좌절과 경이로움을 동시에 안겨주는지, 익숙하고 단단해 보이는 우리의 실재가 사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유령 같은 토대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는 사실을 알면 그런 소리는 나오지 않을 겁니다!             p.15~16


<어떻게 물리학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과학의 기쁨>으로 만났던 짐 알칼릴리의 신작이다. <어떻게 물리학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에서 아름다운 문장으로 물리학의 매력을 보여주었고, <과학의 기쁨>에서는 과학자의 생각법으로 세계를 바라보며 우리가 모두 과학자처럼 생각할 때 얻을 수 있는 ‘과학하기’의 기쁨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이번 신작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양자 책>에서는 양자의 의미와 철학부터 미래 기술의 가능성까지 양자역학의 모든 것을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우리는 양자역학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시 세계의 법칙이 우리가 만지고 사용하는 모든 전자기기를 가능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양자역학이 없었다면 텔레비전, 컴퓨터, 전자레인지, 레이저, 휴대폰 등 기술시대에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도구들을 발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주 유명한 물리학자도 '양자역학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어려운 걸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우리 주변에 보이는 세상의 꽤 많은 부분들을 이루고 있으며 세상의 수많은 원리와 이유를 설명하는 데에 성공한 과학 이론이 왜 지금까지도 이해 못할 존재로 남게 된 걸까. 


30년 넘게 양자역학을 탐구해온 물리학자이자 BBC 과학 커뮤니케이터인 짐 알칼릴리는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진짜 양자역학에 대해 들려준다. 철학, 아원자물리학, 고차원 이론에서 레이저, 마이크로칩 등 오늘의 하이테크, 그리고 미래에 펼쳐질 놀라운 양자 마술의 세계에 이르기까지의 긴 여정은 우리가 양자역학에 대해 오해했던 부분들을 조금은 달라지게 만들어 준다. 물론 그럼에도 결코 수월한 책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오늘날의 컴퓨터는 그 놀라운 능력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찰스 배비지가 꿈꾸었고 나중에 앨런 튜링이 공식화한 기계식 장치와 동일한 근본 원리를 바탕으로 작동합니다. 즉 기계의 한 가지 안정적인 상태가 하나의 수를 나타내죠. 심지어는 DNA를 바탕으로 나온 모형처럼 겉으로는 표준이 아닌 계산 모형인 듯 보이는 컴퓨터도 사실 알고 보면 이런 기본 원리를 공유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자연계를 기술하는 법칙들은 감지하기 힘든 양자물리학의 법칙이기 때문에 컴퓨팅에 대해 다르게 생각해볼 것을 우리에게 촉구합니다.                p.351


고양이가 상자 안에서 살아 있는 동시에 죽은 상태로 존재한다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이야기를 다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는 양자역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이고 가장 인기 있는 개념이기도 한 '중첩'과 '간섭'에 대해 설명해주는 사고실험이다. 짐 알칼릴리는 바로 그 "슈뢰딩거의 고양이 상자에 인간을 넣으면 어떻게 될까?" 라는 매우 파격적인 질문을 제시한다. 기본적으로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례에서는 상자 뚜껑을 열어 고양이의 상태를 확인하기 전에는 고양이가 죽었다, 살아 있다 말할 수 없고, 동시에 양쪽 상태로 있다는 개념이다. 그런데 상자 안에 고양이 대신 인간 참가자를 집어넣는다니... 생각지도 못했다.


일단 안전을 위해 치명적인 독이 아니라 그냥 참가자가 의식을 잃게 만드는 독을 넣고, 잠시 후 상자를 열었을 때 그 참가자에게 "우리가 꺼내주기 전에는 당신이 의식이 있는 상태와 없는 상태로 동시에 존재했습니다." 라고 설득해야 하는 것이다. 이 사고실험의 모순은, 이 논증의 결함은 어디에 있을까. 죽었으면서 살아 있는 고양이를 왜 우리는 실제로 볼 수 없을까. 의식이 있는 상태와 무의식 상태가 동시에 공존한다는 게 말이 되는 걸까. 



양자역학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다양한 책들이 쏟아져 나온 덕분에 다양한 종류의 과학책들을 흥미롭게 읽어 왔다. 양자역학이 난해하고 직관에 반하는 학문이지만, 저자들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대중들을 위해 설명해주고 있어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은 기분이 든다. 이 책은 복잡한 방정식 대신 자유로운 설명과 한눈에 들어오는 아기자기한 그림들로 양자의 세계를 풀어내고 있다. 양자역학의 의미뿐만 아니라 양자역학의 성공도 다루고 있다. 수많은 현상을 설명하는 데서 거둔 성공, 우리의 일상생활 속 과거, 현재, 미래의 수많은 적용 분야에서 지금까지 거뒀고 앞으로도 거둘 성공들이다. 물론 이 책만으로 양자역학에 대해 충분히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양자역학이 얼마나 매력적인 학문인지에 대해서는 다들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즈음 '어떻게 양자역학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라고 말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양자역학을 조금 쉽게 이해해보고 싶다면, 복잡한 방정식과 코드대신 친절한 설명과 다양한 사례를 통해 재미있게 양자 세계를 경험해보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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