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 하다 앤솔러지 5
김경욱 외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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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부모의 부모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낯선 시간대에 던져져 갱생의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등뒤로 닫힌 시간의 감옥 문이 눈앞에서 열리는 그날까지. 원하면 사랑을 할 수 있고 아이도 기를 수 있다. 그래도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 유형지의 삶이 얼마나 고독하든 어떻게 다복하든 그들이 과거로 수감되는 미래는 어김없이 도래하리니. 과거가 현재를 결정하는 게 아니다. 현재를 결정하는 것은 미래. 우리는 지나간 미래가 남긴 죄와 기쁨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 김경욱,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거나 사라질' 중에서, p.34~35


다섯 명의 소설가가 하나의 주제로 함께 글을 쓰는 열린 책들의 '하다 앤솔러지' 다섯 번째 책이자 마지막 책이다. 이 시리즈는 우리가 평소 하는 다섯 가지 행동 즉 걷다, 묻다, 보다, 듣다, 안다, 라는 동사를 테마로 진행되고 있다. 자신만의 색깔이 뚜렷한 다섯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앤솔러지만의 매력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떤 작품은 잘 읽히고, 어떤 작품은 잘 와닿지 않고, 또 어떤 작품은 공감되고, 어떤 작품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 들어 읽게 되니 그야말로 종합선물세트같은 책이 아닐까 싶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은 외관이 매우 아름답다는 것이다. 반투명한 트레싱지로 된 표지가 아름다운 이 시리즈는 책배와 위, 아래에 프린트가 함께 되어 있어 책의 물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래서 시리즈가 완간되고 한꺼번에 모아 두니 정말 예쁘다. 


'하다 앤솔러지' 그 다섯 번째 책 <안다>에는 김경욱, 심윤경, 전성태, 조경란, 정이현 작가가 참여했다. 김경욱 작가의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거나 사라질>에서는 SF 소설을 쓰는 작가가 어머니가 사라진 뒤 과거와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고, 심윤경 작가의 <가짜 생일 파티>에서는 21년 차 직장인이지만 여전히 타인과의 회사 생활이 어려운 중견 간부의 하루를 담았고, 전성태 작가의 <히치하이킹>에서는 우연히 낯선 남자의 차를 얻어 타게 된 대학생 커플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정이현 작가의 <다시 한번>은 20년 전 함께 여행을 떠났던 두 친구가, 20년 후 다시 여행을 가게 되는 이야기를, 조경란 작가의 <그녀들>에선 지금은 소원해진 사이가 된 세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담아내고 있다. 




검은색이라면 가릴 수 있는 얼룩을 흰색은 가리지 못한다. 아주 작은 얼룩도. 누구와의 관계가 검은색에서 흰색으로 넘어가는 그 단계 어디쯤의 찰나에서 이전까지와는 다른 감정이 생겨나 어떤 것은 우정으로 신뢰로 혹은 안쓰러움으로 각인되곤 했다. 윤 선배가 처음 자식 이야기를 했을 때 영서는 선배에게서 우정을 느꼈다고 기억한다.                  - 조경란, '그녀들' 중에서, p.171


이 책의 주제인 '안다'는 HUG의 의미이지만, 책을 읽으며 KNOW의 의미로서 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내가 누군가에 대해 '안다'고 믿는 것은 과연 진실일까.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은, 때로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으니까. 이는 내가 상대에게서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기대하는 바가 상대를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할 때에도 대부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에 의한 것이다. 믿음과 의심 사이의 그 조그만 간격은 사실 종이의 앞뒷면과 같다. 연인들의 헤어짐도, 친구들과의 다툼도, 부부 간의 신뢰가 깨어지는 것도 모두 단 한순간이다. 사소한 행동, 말투들이 쌓여 오해를 만들고, 견고하게 쌓인 세월을 넘어 믿음을 깨트린다. 오랜 세월 쌓아온 신뢰와 구축된 관계들을 차례차례 부식시켜 바닥에 이르게 만드는 것이 사실 별 것 아닌 사소한 지점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인생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자신을 안아 준 낯선 품이 갑자기 떠오르게 된 어느 소설가, 지금은 멀어진 상대에 대해 한 번 안아 줄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아쉬운 마음이 드는 순간, 어떤 이례적인 사건 따위 없이도 우정의 농도가 서서히 옅어지는 상황, 가벼운 포옹으로 느꼈던 온기와 향기와 기억, 폭소와 당황과 눈물까지 폭넓게 오갔던 감정의 진폭... 우리는 타인을 얼마나 품에 안아줄 수 있을까, 또한 우리는 상대를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을까,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 책에 수록된 다섯 편의 작품들은 '안다'라는 행위를 통해 우리가 타인을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는지, 두 팔을 벌려 가슴 쪽으로 끌어당기거나 그렇게 하여 품 안에 있게 한다는 뜻으로서 타인을 얼마나 안아줄 수 있는지에 대해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나 이번에 참여한 작가들은 한국 문학의 대가들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관록있는 작가들이기에 그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사유의 깊이를 느낄 수 있게 해주어 더 좋았다. 젊은 작가들이 보여줄 수 있는 신선한 반짝거림도 좋지만,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내는 묵직한 밀도는 꼭 그만큼의 시간을 쌓아와야만 가능한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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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픽사 베스트 컬렉션 : 소울 Soul Disney·Pixar Best Collection 시리즈
라이언 박 해설 / 길벗이지톡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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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디즈니와 픽사 애니메이션 중 최고의 작품만을 선별하여 전체 대본을 제공하는 '디즈니, 픽사 베스트 컬렉션 시리즈' 신작은 영화 <소울>이다. 국내 유일 <소울>의 전체 대본을 담은 스크립트북으로 영어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해서 매우 기대하며 읽었다. <소울> 영화를 매우 재미있게 보았기에, 영화의 감동을 고스란히 되새기면서 영어 표현들도 익힐 수 있을테니 말이다. 


스크립트북은 왼쪽에 영어 대사와 지문이, 오른쪽에는 한글 해석이 수록되어 있다. 마치 영화의 자막을 보는 것처럼 수월하게 내용을 따라갈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중간 중간 영화 속 장면을 담은 스크린 샷도 수록되어 있어서 영화를 보는 것처럼 몰입해서 영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영화 <소울>은 음악 선생님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며 언젠가 자신만의 연주를 하겠다는 꿈을 꾸는 조가 주인공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꿈에 그리던 최고의 밴드와 재즈 클럽에서 연주를 하게 된 거다. 오디션에 합격하고 신이 난 발걸음으로 저녁 때 자신이 하게 될 연주를 생각하며 걸어 가다가, 그만 예기치 못한 사고로 영혼이 되고 만다. 일생일대의 기회를 얻은 날에 죽게 되다니, 그날 밤에 공연이 있어서 지금 죽을 수는 없다고 외쳐 보지만 상황을 바꿀 수는 없다.


그리고 다시 조가 깨어난 곳은 '태어나기 전 세상'이다. 영혼이 된 조의 모습은 정말 귀여운데, 그곳에서 조는 여러 영혼들을 만난다. 그곳에선 탄생 전의 영혼들이 멘토와 함께 자신의 관심사를 발견하면 지구 통행증을 발급받아 지구로 떠나는 곳이다. 조가 담당하게 된 것은 유일하게 지구에 가고 싶어하지 않는 시니컬한 영혼 '22'였다. 조가 꿈의 무대에 서려면 22의 지구 통행증이 필요했다. 과연 조는 다시 지구로 돌아갈 수 있을까? 





길벗 홈페이지에서 전체 스크립트를 녹음한 오디오북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그래서 스크립트북을 보면서 오디오북을 함께 활용했는데, 영화를 보는 것처럼 리얼하게 녹음된 오디오북이라 매우 활용하기 좋은 음원이었다. 디즈니 추천 성우가 영어 초보자도 들을 수 있도록 정확한 발음으로, 제대로 된 연기 표현으로 녹음했기 때문에 실제 영화 음원만큼이나 훌륭하다. 


이 책의 후반부에는 워크북이 별도로 수록되어 있다. 스크립트북에서 중요한 표현 100개를 뽑아, 그 표현들이 어떤 상황에서 쓰이는지 알려주고 해당 표현을 활용한 추가 예시문도 두 개씩 수록되어 있다. 역시나 음원을 별도로 제공하고 있어 문장들을 들어 보며 익힐 수 있다. 실생활에서 자주 쓰이는 문장들만 골랐기에, 제대로 익히면 누구나 영화 속 주인공처럼 해당 영어를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영어 학습을 위해 가장 좋은 영화 장르가 애니메이션이 아닌가 싶다. <소울>은 확실히 감동적으로 보았던 영화라서 그런지 전체 내용을 다 알고 있기에 영어로 다시 만나도 익숙했고, 영화의 내용을 다시 짚어 가며 표현을 익히는 과정도 흥미진진했다. 특히나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경우 슬랭이나 욕설 등의 거친 표현들이 거의 없고, 특정 분야의 어려운 표현들도 들어 있지 않다. 아이들도 볼 수 있는 등급의 영화이기에 표현도 비교적 쉬운 편이고, 실생활에서 자주 사용되는 내용으로 전개되기에 초보자들이 영어 공부를 하기에 최적의 텍스트인 것 같다. 


영한대역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영어 대본만 보고 싶다면 오른쪽 페이지를 살짝 접어 해석이 보이지 않게 학습할 수도 있다. 그리고 하단에 주요 단어의 뜻도 정리해두었기 때문에 모르는 단어를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되는 점도 좋다. 영어 공부에 원서를 읽는 것이 좋다는 건 누구나 알지만, 사실 제대로 영어책 한 권을 끝까지 완독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낯설고 어려운 텍스트로 공부를 하자니, 진도도 잘 안 나가고, 읽으면서 재미가 없으니 더 어렵게만 느껴지고 말이다. 이 책은 매번 실패하는 '원서 읽기'를 이번에는 제대로 끝까지 완독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영화의 감동과 영어 학습의 효과를 한번에 느낄 수 있다는 점도 이 시리즈의 장점이다. 자, 한 해가 마무리되는 이 시기에 영화 <소울>과 함께 영어 공부를 시작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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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없는 작가로 살아남기 - 재능 없이도 글밥 먹는 사람의 생존기
홍지운 지음 / 아작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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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저는 재능 없는 작가입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주목하셔야 하는 지점은 제가 '재능이 없다'는 부분이 아니라 제가 '작가'라는 점입니다. 네. 저는 재능이 있건 없건 작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저의 조언이 재능으로 가득한 작가들의 조언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유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재능으로 가득한 사람보다 재능 없는 사람이 더 많지요. 그렇다면 재능으로 가득한 사람보다 재능 없는 사람의 조언이 더욱더 많은 사람에게 통용되는 조언이지 않을까요?             p.11


이 책은 재능 없는 작가인 동시에,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장르문학 창작을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한 저자의 '재능 없이도 글밥 먹는 사람의 생존기'를 담고 있다. 홍지운 작가의 작품은 <일곱 번째 달 일곱 번째 밤>과 <펄프픽션>, <절망과 열정의 시대>라는 앤솔러지로 만난 적이 있다. 그 외에도 <시나리오 레시피>, <창작자를 위한 마블 스토리텔링> 등 작법서도 있었는데, 이번에 나온 신간은 작법론이라기보다는 '작업론'이다. 


한때 소설 꽤나 읽었다 싶은 이들 중에 직접 써보겠다고 마음먹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많이 읽을 수록, 쓰고 싶어지는 게 당연지사이니 말이다. 나 역시 그래서 온갖 작법서며 글쓰기 관련 책들을 섭렵했던 시기가 있었다. 물론 현실적인 문제들에 부딪혀 여전히 그냥 '독자'인 채로 남아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 이 책 <재능 없는 작가로 살아남기>를 읽으면서 묻어 두었던 쓰기를 향한 애정이 다시 몽글몽글 피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소설은 타고난 재능이 없이도, 천부적인 능력이 있지 않아도 쓸 수 있는 거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홍지운 작가는 이 책의 서두에 스스로를 '재능 없는 작가'라고 단언하며 시작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재능이 없다'는 부분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작가'라는 점이라고 말이다. 이보다 더 작가 지망생들을 혹하게 하는 문장이 있을까. 시대를 초월하는 희대의 명작을 쓰거나, 백만부 이상을 판매하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스스로에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여부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야구팀의 모든 선수가 4번 타자일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선수가 에이스 선발 투수일 필요도 없습니다. 발이 빠른 타자가 1번에 서서 출루율을 높여 투수를 위협하면 홈런타자보다 더 승리에 기여할 수도 있습니다. 위기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중간계투가 승부의 향방을 가르기도 합니다. 저는 작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서점에 깔린 모든 책이 노벨상 후보가 될 걸작일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p.156


이 책은 재능 없는 작가로 출발해 500명이 넘는 작가 지망생과 상담을 진행하고 1,000편에 가까운 기획서의 피드백을 진행한 교육자이자 15권이 넘는 단독저서를 출간한 저자의 생존법을 담고 있다. 11년 차 작가이자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웹소설창작전공 교수인 그는 학생들이 자신의 수업을 들으면서 글을 좋아하는 마음, 이 하나만 건져도 대단히 성공적인 수업이라 생각한다고 한다. 창작의 노하우나 필수적인 레퍼런스는 어차피 작업을 계속해서 해나가다 보면 어떻게든 생기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글을 계속해서 써 나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글쓰기를 향한 기대와 애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글쓰기를 향한 애정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최대한 피하고 극복하도록 노력하라고 그는 이 책에서 독자들에게 당부한다. 


작법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그 어떤 작법서보다 더 실전에 바로 써먹을 수 있는 노하우들로 가득하다. 제목을 잘 짓는게 중요한 이유, 작품을 계획적으로 쓰기 위해 간단한 기획서를 작성하는 방법, 고전 명작을 베껴쓰고, 재해석해야 하는 이유, 개연성을 만드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기세라는 사실, 따분한 소재만 생각나더라도 어떻게든 원고를 완성하는 방법, 마감 직전에 원고 분량을 채우지 못했을 때 분량을 부풀려주는 꼼수, 창작자를 위한 합평 가이드, 일일 작업량 계산법 등 그 어떤 책에서도 만날 수 없는 팁들이 담겨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재능 없는 작가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핵심적인 이유, 즉 '생존의 비결'도 수록되어 있다. 그 생존의 비결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직접 읽어 보길 권해주고 싶다. 작가로서의 목표가 '장기적인 생존'이라는 저자는 계속해서 작업을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기왕 태어난 거, 가능한 한 오래 또 재밌게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비장하지도, 재능이 있지도 않지만, 어떻게든 작가로 살아남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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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이란 말 따위 - 딸을 빼앗긴 엄마의 마약 카르텔 추적기
아잠 아흐메드 지음, 정해영 옮김 / 동아시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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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트럭을 몰고 시내를 지나는 동안 그들에게 기묘한 느낌이 엄습했다. 마치 유령처럼 초현실적인 빛으로 둘러싸인 산페르난도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집이 불타고 남은 잔해를 보는 것처럼, 부서지고 훼손된 익숙했던 건축물을 보는 것처럼.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거지?” 미리암이 계속해서 질문했다. “도대체 정부는 뭘 하고 있는 거야? 왜 이런 일을 막지 않는 거지?”               p.36


2014년 1월, 멕시코 산페르난도 지역을 장악한 마약 카르텔 세타스 일당이 카렌을 납치했다. 미리암 가족은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몸값을 비롯해 세타스의 모든 지시에 따랐지만, 카렌은 돌아오지 않았다. 정부는 탄원을 무시하고, 무관심하고 형식적인 대응으로 일관했다. 그래서 평범한 중년 여성이었던 미리암은 딸을 납치하는 데 연루된 놈들을 전부 찾아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렇게 2년, 아마추어 수사관으로서 두려움을 모르는 데다 집요했던 미리암은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둔다. 4명은 교도소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고, 6명은 멕시코 해병대에 습격당해 죽었다. 그런데 영화나 소설도 아니고, 이게 현실에서 가능한 일이냐고? 


그럼에도 이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쓰인 논픽션이다. 어떻게 56세의 평범한 멕시코 여성이 이런 일을 가능하게 했던 것일까. 엄마가 딸을 납치한 범인들을 직접 추적하는 동안 국가는 뭘 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야기는 멕시코와 미국 텍사스주를 잇는 국경 다리에서 미리암이 납치 용의자 가운데 한 명인 ‘플로리스트’를 뒤쫓는 긴장감 넘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머리카락을 빨갛게 염색하고 야구 모자를 눌러 쓴 미리암은 38구경 권총을 장전한 채 범인 가운데 한 명을 쫓고 있었다. 사실 세타스는 지하경제를 장악할 목적으로 마약 밀수, 밀입국, 몸값을 노린 납치 등의 범죄를 자행하며 멕시코 10여 개 주에 폭력의 상흔을 남겼다. 미리암이 나서게 된 것도 딸인 카렌을 위해서, 그리고 다른 실종자들의 가족을 위해 반드시 직접 복수하고 정의를 구현하겠다고 마음먹은 거였다. 당시 멕시코 정부는 마약과의 전쟁이 촉발한 혼란에 제대로 맞서지도, 상황을 해결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정부가 손놓고 있는 동안, 힘없는 시민들만 유린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리암은 절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세상에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만큼 슬픈 이야기가 넘쳐났다. 충격적인 사건조차 사회적으로 익숙해지고 무감각해질 지경이었다. 일이 돌아가도록 하려면 절망에서 목적으로 나아갈 방향을 찾아야 했다. 절망을 무기로 제도에 맞설 방법을 찾고, 슬픔 속에서도 수완을 발휘해야 했다... 미리암은 슬픔에 빠진 채 자기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을 그만두고 답을 구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자신의 투쟁을 정부에서 개입할 문제로 만듦으로써 무관심이라는 지옥에서 빠져나왔다.             p.201


퓰리처상 수상자이자 뉴욕타임스의 국제 탐사보도 특파원인 저자는 4년간 관련 인물들을 수백 시간에 걸쳐 인터뷰하고, 사건 기록을 수집하고, 마약 카르텔의 계보를 되짚으며 미리암의 영웅적 삶과 폭력으로 얼룩진 멕시코의 현대사가 교차하는 “장대하고 치밀한 르포르타주”를 완성시켰다. 범인을 직접 추적하는 엄마의 일대기이자 마약 카르텔에 의해 멕시코 지역사회가 붕괴되는 과정을 묘사한 범죄 르포르타주인 이 작품은 멕시코 사회의 여러 모순을 상징하는 초상화로 그려낸다. 힘없는 여성이, 피해자 가족이 악명 높은 마약 카르텔 조직원과 스스로 맞서는 과정은 놀라웠고, 박수를 보내고 싶을 만큼 멋지기도 했지만, 지역사회와 공권력은 뭘하고 있었던 건지 책을 읽는 내내 화가 나기도 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공권력과 조직범죄의 오랜 유착관계를 파헤치고, 정부가 조직범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할 경우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권력이 된 폭력 앞에서 끝내 굴하지 않은 용기는 비현실적이지만, 단순히 사적인 복수가 아니라 사회적 연대로 가는 전환점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미리암은 모두가 목소리를 높여 관심을 촉구해야 한다고 했다. 더는 두려워할 필요도, 자신에게 일어난 일로부터 도망칠 필요도 없다고 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무시당하기 십상이지만 단체를 조직하면 상황이 달라진다고 사람들을 설득했다. 피해자 가족 단체의 회원수가 늘면 개인적 비극은 사회적 위기가 되고, 위기감을 키우는 것만이 정부의 행동을 촉구할 유일한 길이라고 강변했다. 그녀는 그렇게 불의에 맞섰고, 정부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유도했고, 패러다임을 바꾸기 위해 온몸을 바쳤다. 자, 웬만한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한 엄마의 비범한 이야기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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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뜬구름
찬쉐 지음, 김태성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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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웃집의 컴컴한 창문에서 가벼운 숨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는 얼굴이 뜨거워지면서 고개를 숙인 채 비틀비틀 걸어 나가며 걸음마다 떨어진 그 꽃들을 전부 밟아 버렸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도둑처럼 도망쳐 왔다. 쥐 한 마리가 그의 앞에서 죽을힘을 다해 하수구 안으로 도망쳤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거리로 내달렸다. 주의 두 눈이 여전히 그의 좁은 등 위에 멈춰 있었다. 「감시자였어.......」 그는 화를 내면서 욕을 퍼부었다.            p.11~12


향기를 가득 품은 닥나무의 새하얀 꽃이 빗물을 잔뜩 머금어 투둑 하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떨어진다. 겅산우는 밤비를 맞아 떨어진 꽃들이 여전히 탐욕스럽고 생기가 넘치는 모습을 보고는 화가 나서 그 꽃들을 전부 짓밟아 버린다. 그때 깜짝 놀란 여자의 비쩍 마른 얼굴이 이웃집 창살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진다. 이웃집 여자 쉬루화이다. 그녀는 밤새 남편의 코 고는 소리와 옆집 침대의 뒤척이는 삐걱소리를 듣는다. 아침에 땅바닥에 흩어진 하얀꽃들을 보다 옆집 남자를 발견한 그날 저녁, 남의 사생활을 엿보지 말라는 작은 종이 쪽지를 받는다. 이 작품 속 인물들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며, 누군가 자신을 지켜본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스스로를 방어하고, 주위를 경계하며, 끊임없이 서로를 감시하는 기묘한 이들의 관계는 삶의 부조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문에 〈쇠꼬챙이를 박〉아 자신을 방어하고 〈나무에 거울을 매달아〉 옆집을 감시하는 모습이 결코 정상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데, 이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신경쇠약 직전의 불안한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그들의 의심과 방어가 그럴듯 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자고 일어나서도 뭔가 개운하지 않은 악몽같은 느낌과 좋은 향기도 너무 강하면 머리가 아픈 것처럼 꽃이 풍기는 향기에 취할 것 같은 분위기도 이 작품에 몰입하게 만드는 장치가 되어 준다. 찬쉐의 문장들은 특히 이미지 묘사가 매우 섬세하고 리얼하다. 감각들을 일깨워주고, 오감을 자극하는 듯한 문장들을 따라 가다보면 소설이 그려내고 있는 풍경이 손에 만져질 듯한 생생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아름다운 것을 추하게 그리는 동시에 추한 것을 미적 대상으로 삼는 특유의 시선이 공감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읽어 보길 권해주고 싶다. 찬쉐의 실험적 글쓰기가 이끌어 가는 대로 몸을 맡긴 채 이 이야기가 도달하는 그 곳까지 가보자. 




그녀는 실 담요를 몸에 걸치고 집 안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실 담요가 허공에 날리면서 휙휙 분노의 소리를 냈다. 천장에 달라붙어 있던 나방이 놀라서 날다가 또 담요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져서는 서서히 죽어 가며 몸부림을 쳤다. 숨을 헐떡거리며 멈춰 선 그녀는 옷장 거울에 비친 잔뜩 짓무른 무수한 혀를 보았다. 그녀는 창문 유리에 비친 희미한 석양빛이 두려웠다. 그 누르스름한 빛 한 줄기가 그녀의 눈을 너무나 아프게 찔러 댔다. 그녀는 짙은색 담요로 유리를 덮었지만 여전히 별처럼 흩어진 광점들을 다 막지는 못했다.            p.138~139


매년 노벨 문학상 유력 후보로 거론되고, 해외에서 가장 많이 번역된 중국 여성 작가인 찬쉐의 초기작인 이 작품은 200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이지만 결코 수월하게 읽히지 않는다. 주로 〈그〉와 〈그녀〉로 지칭되는 인물 간 구별이 어렵고, 벌어지는 일들 또한 시간과 순서가 모호하며, 사람과 사람, 진실과 허상의 경계가 흐릿하기 때문이다. 뜬구름처럼 분명히 실체가 보이지만 막상 손을 내밀어 보면 흩어져 버려 붙잡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찬쉐의 작품은 <신세기 사랑 이야기>와 <격정세계>만 읽어 보았다. <신세기 사랑 이야기>는 언뜻 남녀의 욕망을 표면화시켜 보여주는 듯하지만 내면 깊숙한 곳으로 점점 들어가 심연에 도달하는 깊이 있는 전개를 선보이며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의 매력이 있었다. <격정세계>는 책과 독서를 중심 소재로 하는 만큼 좀 더 현실적이고, 서사가 분명해 조금 수월하게 읽었다. 


<오래된 뜬구름>은 읽었던 작품 중에 분량이 작은데도 불구하고 읽기엔 가장 독특한 독서 경험을 선사하는 작품인 것 같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실험적이고 강렬한 작품이라는 말처럼 낯선 감각을 일깨워주는 몽환적이고 그로테스크한 풍경이 시적인 언어로 펼쳐지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찬쉐 고유의 개성과 독보적인 색채가 아주 짙게 밴, 찬쉐 문학 세계의 초석이 된 작품이므로 꼭 한번 읽어 보길 권해주고 싶다. 찬쉐의 작품들은 철학적 사유와 난해하면서도 섬세한 묘사, 거침없고 호방하게 뻗어나가는 상상력, 찬쉐의 대체불가능한 스타일, 음란하고 기이한 이야기의 세계, 마술 같은 세계로 빨려드는 환상 스토리 등으로 설명된다. 가독성과는 별개로 대체불가능한 스타일로 독보적인 세계를 구현하는 작가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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