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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 플랜더스
다니엘 디포 지음, 류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4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오빠 말이 참 놀랍네." 그의 여동생이 말했다. “하지만 베티에겐 딱 한 가지 부족한 게 있는데, 그로써 모든 것이 부족한 것이나 마찬가지지. 요즘은 결혼 시장이 우리 여자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어. 말하자면 어떤 아가씨가 미모, 좋은 가문, 훌륭한 가정교육, 위트, 양식, 예의범절, 겸손함 등을 다 갖추고 있다고 해도, 아니 최대한 많이 갖추고 있다고 해도, 돈 한푼 없는 빈털터리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라는 거지. 앞에서 말한 모든 덕목이 하나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요새는 오로지 돈만이 여자의 추천장이야. 이익은 몽땅 남자가 다 차지하고.” p.38~39
<로빈슨 크루소>라는 고전 명작으로 알려진 대니얼 디포의 또 다른 작품이다. <로빈슨 크루소>가 1719년 작품이고, <몰 플랜더스>는 1722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28년간 홀로 무인도를 개척해 나가는 한 남자에의 이야기에 이어, 이번에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디포는 수차례 사업에 실패해 큰 빚을 지고 평생 고생했고, 채무로 인해 여러 차례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 태어난 장소이자 결국 갇히게 되는 장소인 뉴게이트 감옥이 바로 같은 장소이다. 실제로 디포가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접하게 된 갖가지 범죄자가 이 작품의 소재가 된 셈이다.

흥미로운 건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여주인공의 일생을 몇줄의 문장으로 오약해 두었다는 점이다. 뉴게이트 감옥에서 태어나 육십여 년에 걸친 파란만장한 생애 동안 어린 시절을 제외한다면 십이 년은 매춘부로, 다섯 번은 남편의 아내로(그중 한 번은 친동생의 아내였다), 십이 년은 절도범으로, 팔 년은 버지니아의 중범죄 유형수로 살았으며, 마침내 부자가 되어 정직하게 살다 회개자로 삶을 마쳤다. 단 네 줄의 문장으로 이 캐릭터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짐작이 될 수밖에 없었다. 독자들의 관심을 끌고자 한 설명문이라면 그 의도가 적중한 셈이다. 감옥에서 태어나 하녀, 정부, 매춘부, 소매치기, 좀도둑 생활을 전전하다 유배형을 선고받는 캐릭터라니.... 이토록 드라마틱한 삶이 또 있을까.

이 무렵 나는 정말이지 참으로 행복한 상황에 놓일 수도 있었다. 범죄생활을 그만둘 때가 되었음을 자각하기만 했다면 그리될 수 있었다는 소리다. 내 선생은 종종 내가 영국의 같은 업계 사람들 중 가장 부자라고 말하곤 했고 나도 그렇다고 믿었다. 내게는 현금만 700파운드에 그것 말고도 옷들과 반지들, 금은제 식기류, 금시계 두 개가 더 있었다. 물론 모두 훔친 것들이었다. 아아! 그때라도 회개의 은총을 입었더라면 그동안 저질러온 어리석은 짓들을 돌아다보며 다소라도 개심할 여지가 남아 있었을 텐데. p.381
몰 플랜더스의 어머니는 절도죄라고 이름 붙일 것도 없는 지극히 가벼운 도둑질로 중범죄 유죄판결을 받았다. 당시에는 사소한 절도죄도 사형부터 선고하는 게 관례였고, 그렇지 않을 경우 유배형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어머니는 임신을 이유로 감형을 간청했고, 칠 개월간 형 집행을 면제받았는데 그 사이에 몰 플랜더스가 태어났다. 아이를 낳고 유배형으로 감형되었는데, 덕분에 몰 플랜더스는 태어나면서부터 고아가 된 셈이다. 다행히 좋은 '보모'를 만나 여덟 살이 될 때까지 그곳에서 살다 열네 살이 되었을 때 어느 부유한 부인의 집에 하녀로 들어가게 된다. 나이는 어렸지만 해야 할 일을 민첩하게 잘했고, 훌륭한 바느질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주 예쁘기까지 했다.
결국 아름다운 미모와 허영심이 그 집의 두 아들과 엮이게 만들고 만다. 큰아들의 정부가 되고, 막내아들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을 하게 되는데, 결혼 생활 5년 차에 남편이 죽게 된다. 플랜더스 부인이 된 이후로 여러 남편을 거치고, 아이를 낳으며 살게 되는데 그 과정 또한 한 사람의 생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파란만장하다. 여러 남자를 만나고, 헤어지고, 결국엔 딸린 아이들을 데리고 혼자 살게 되어 12년간 도둑 노릇을 하게 되는데, 그러다 잡혀 감옥에 가고, 사형 대신 유배형을 받게 된다. 감옥에서 태어나 바로 고아가 된 소녀가 일흔이 될 때까지의 삶이 오백 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에 담겨 있다. 고전은 지루하다는 편견을 깨줄만한 드라마틱한 서사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몰 플랜더스의 일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데, 마치 실존 인물의 자서전인 것처럼 회고하는 방식으로 쓰여있다. 작품이 시작되기 전에 작가의 긴 서문 또한 그런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이런 수법은 18세기 초반의 산문 픽션 작가들, 특히 대니얼 디포가 즐겨 쓰던 수법이라고 한다. 실화라고 주장하지만 등장인물, 사건, 상황 등이 모두 허구라는 뜻이다. 하지만 실존 인물의 회고록이라고 착각해도 좋을만큼 현실감 넘치는 매력적인 서사임에는 분명하다. 이 작품은 사실주의 소설의 효시로 꼽히며 디포를 '영국소설의 아버지'로 자리매김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제임스 조이스는 디포에 대해 '외국 작품을 모방하거나 각색하지 않고 문학적 모델 없이 창작활동을 벌인 최초의 영국 작가'라고 말했으며, 버지니아 울프는 이 작품에 대해 '의심할 여지 없이 위대한 영국소설이라 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라고 평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매력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주인공 캐릭터이다. 덕분에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지며 자립적인 여성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계속 만날 수 있다. 실제로 몰 플랜더스라는 캐릭터는 1718년에 교수형을 당한 악명 높은 여자 소매치기 몰 킹을 모델로 탄생했다고 한다. 가진 것도 의지할 것도 없는 밑바닥 인생에서 사회적 경제적 자립을 쟁취하고자 고군분투한 서사로서도 흥미롭고, 온갖 불리한 악조건에 내몰린 여성의 당대 현실을 보여준다는 점도 의미가 있는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두툼한 페이지를 자랑하는 고전임에도 전혀 지루하거나 어렵지 않다는 점도 이 작품을 추천해주고 싶은 이유이다. 재미있는 고전을 찾고 있다면 꼭 만나보길 권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