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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 ㅣ 하다 앤솔러지 5
김경욱 외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11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부모의 부모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낯선 시간대에 던져져 갱생의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등뒤로 닫힌 시간의 감옥 문이 눈앞에서 열리는 그날까지. 원하면 사랑을 할 수 있고 아이도 기를 수 있다. 그래도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 유형지의 삶이 얼마나 고독하든 어떻게 다복하든 그들이 과거로 수감되는 미래는 어김없이 도래하리니. 과거가 현재를 결정하는 게 아니다. 현재를 결정하는 것은 미래. 우리는 지나간 미래가 남긴 죄와 기쁨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 김경욱,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거나 사라질' 중에서, p.34~35
다섯 명의 소설가가 하나의 주제로 함께 글을 쓰는 열린 책들의 '하다 앤솔러지' 다섯 번째 책이자 마지막 책이다. 이 시리즈는 우리가 평소 하는 다섯 가지 행동 즉 걷다, 묻다, 보다, 듣다, 안다, 라는 동사를 테마로 진행되고 있다. 자신만의 색깔이 뚜렷한 다섯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앤솔러지만의 매력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떤 작품은 잘 읽히고, 어떤 작품은 잘 와닿지 않고, 또 어떤 작품은 공감되고, 어떤 작품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 들어 읽게 되니 그야말로 종합선물세트같은 책이 아닐까 싶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은 외관이 매우 아름답다는 것이다. 반투명한 트레싱지로 된 표지가 아름다운 이 시리즈는 책배와 위, 아래에 프린트가 함께 되어 있어 책의 물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래서 시리즈가 완간되고 한꺼번에 모아 두니 정말 예쁘다.
'하다 앤솔러지' 그 다섯 번째 책 <안다>에는 김경욱, 심윤경, 전성태, 조경란, 정이현 작가가 참여했다. 김경욱 작가의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거나 사라질>에서는 SF 소설을 쓰는 작가가 어머니가 사라진 뒤 과거와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고, 심윤경 작가의 <가짜 생일 파티>에서는 21년 차 직장인이지만 여전히 타인과의 회사 생활이 어려운 중견 간부의 하루를 담았고, 전성태 작가의 <히치하이킹>에서는 우연히 낯선 남자의 차를 얻어 타게 된 대학생 커플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정이현 작가의 <다시 한번>은 20년 전 함께 여행을 떠났던 두 친구가, 20년 후 다시 여행을 가게 되는 이야기를, 조경란 작가의 <그녀들>에선 지금은 소원해진 사이가 된 세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담아내고 있다.

검은색이라면 가릴 수 있는 얼룩을 흰색은 가리지 못한다. 아주 작은 얼룩도. 누구와의 관계가 검은색에서 흰색으로 넘어가는 그 단계 어디쯤의 찰나에서 이전까지와는 다른 감정이 생겨나 어떤 것은 우정으로 신뢰로 혹은 안쓰러움으로 각인되곤 했다. 윤 선배가 처음 자식 이야기를 했을 때 영서는 선배에게서 우정을 느꼈다고 기억한다. - 조경란, '그녀들' 중에서, p.171
이 책의 주제인 '안다'는 HUG의 의미이지만, 책을 읽으며 KNOW의 의미로서 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내가 누군가에 대해 '안다'고 믿는 것은 과연 진실일까.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은, 때로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으니까. 이는 내가 상대에게서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기대하는 바가 상대를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할 때에도 대부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에 의한 것이다. 믿음과 의심 사이의 그 조그만 간격은 사실 종이의 앞뒷면과 같다. 연인들의 헤어짐도, 친구들과의 다툼도, 부부 간의 신뢰가 깨어지는 것도 모두 단 한순간이다. 사소한 행동, 말투들이 쌓여 오해를 만들고, 견고하게 쌓인 세월을 넘어 믿음을 깨트린다. 오랜 세월 쌓아온 신뢰와 구축된 관계들을 차례차례 부식시켜 바닥에 이르게 만드는 것이 사실 별 것 아닌 사소한 지점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인생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자신을 안아 준 낯선 품이 갑자기 떠오르게 된 어느 소설가, 지금은 멀어진 상대에 대해 한 번 안아 줄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아쉬운 마음이 드는 순간, 어떤 이례적인 사건 따위 없이도 우정의 농도가 서서히 옅어지는 상황, 가벼운 포옹으로 느꼈던 온기와 향기와 기억, 폭소와 당황과 눈물까지 폭넓게 오갔던 감정의 진폭... 우리는 타인을 얼마나 품에 안아줄 수 있을까, 또한 우리는 상대를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을까,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 책에 수록된 다섯 편의 작품들은 '안다'라는 행위를 통해 우리가 타인을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는지, 두 팔을 벌려 가슴 쪽으로 끌어당기거나 그렇게 하여 품 안에 있게 한다는 뜻으로서 타인을 얼마나 안아줄 수 있는지에 대해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나 이번에 참여한 작가들은 한국 문학의 대가들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관록있는 작가들이기에 그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사유의 깊이를 느낄 수 있게 해주어 더 좋았다. 젊은 작가들이 보여줄 수 있는 신선한 반짝거림도 좋지만,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내는 묵직한 밀도는 꼭 그만큼의 시간을 쌓아와야만 가능한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