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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드펠 수사 시리즈 11~21 세트 - 전11권 ㅣ 캐드펠 수사 시리즈
엘리스 피터스 지음, 손성경 외 옮김 / 북하우스 / 2025년 6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캐드펠이 인사를 건넸으나 상대는 듣지 못한 듯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밤의 고요 속에 유일한 동요를 일으키던 에일노스 신부는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 모습이 마치 복수심에 불타는 분노의 신 같았다고, 나중에 캐드펠은 생각할 것이었다. 수도원 앞 대로에 내려앉아 사소한 작은 죄를 찾아내고 그 죄인들을 파멸로 몰아가는, 썩은 고기를 찾아다니는 갈까마귀 같았다고. - <12권> '어둠 속의 갈까마귀' 중에서, p.93
1141년, 그 해의 12월은 가만가만 내딛는 발끝걸음처럼, 온화한 바람과 얇은 구름으로 덮인 하늘을 데리고 조심스레 다가오는 중이었다. 슈루즈베리 수도원 앞 홀리 크로스 교구에서 17년간 교구신부로 일해온 늙은 애덤 신부의 장례식이 끝나고, 새롭게 에일노스 교구신부가 부임한다. 그는 체격 좋고 키도 큰 서른 여섯의 젊은 교구신부였지만, 모든 면에서 유능하고 박식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원리원칙에 철저했고, 완벽하게 규율에 따르느라 사람들을 대할 때 지나치게 엄격했고, 냉혹했다. 그럴 필요가 없을 사소한 일에조차 폭력을 휘두르는 그의 체벌을 교구민들은 두려워했고, 점차 그에 대한 원성이 높아만 간다. 그러다 성탄절 아침, 에일노스 교구신부가 물방앗간 저수지에서 주검으로 발견된다. 그를 미워하고 증오했던 사람이 너무 많았기에 사건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데, 이 작품은 캐드펠 수사 시리즈 중 가장 철학적이고 인간적인 미스터리를 보여준다.

"이곳 수도원에서 보면 이 모든 일들이 이상하게도 멀고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져. 속세와 군대에서 보낸 40여 년의 세월이 없었다면 내가 이처럼 뒤숭숭한 꿈 같은 세상에 산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을 걸세."
역사와 미스터리, 인간적 고뇌가 어우러진 역사추리소설의 고전, 캐드펠 수사 시리즈가 드디어 완간되었다. 먼저 나왔던 1~10권이 ‘클래식 블랙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출간되었다면, 이번에 나온 11~21권은 ‘로열 골드 컴플리트 에디션’이다. ‘블랙’이 사건의 미궁, 시대의 어둠, 수도원의 고요함을 상징했다면, ‘골드’는 진실의 종결, 정의의 완성, 빛나는 통찰 등을 상징한다. ‘클래식 블랙 에디션’과 ‘로열 골드 에디션’은 어둠 속에서 사건의 진상을 좇아, 마침내 빛의 지혜에 도달한 캐드펠 수사의 여정을 컬러로 구현한 한정판 세트이다. 게다가 세트로 구매시 정상가보다 20% 이상 저렴(181,000->140,000)하니 놓치지 말자. 특히나 이번에 국내 초역 단편소설집인 <특이한 베네딕토회>가 추가로 포함되었는데, 캐드펠이 어떻게 가톨릭 수사가 되었는지, 그 의문을 풀어주는 선물과도 같은 프리퀄이라 더욱 의미가 있다. 엘리스 피터스가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살인이 발생하는 추리소설을 써보자는 발상으로 사건의 중심에 설 중세 시대의 탐정이자 관찰자인 정의의 대리인으로 세운 캐릭터가 탄생하게 된 그 뒷이야기를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캐드펠은 왕의 정원 한구석을 홀로 걸으며 인간의 허영심이라는 어리석음이 얼마나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지 생각했다. 그러나 또한 불운한 일을 겪은 왕에게 정의를 갈구해야 하는 평범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슈루즈베리의 부수도원장이 숲에서 무법자들에게 납치되어 실종되지 않았는가. 사흘 뒤 법정이 다시 열려 심리가 재개될 때까지 그를 찾지 못한다면, 그러니까 어느 곳을 뒤져야 그를 찾을 수 있을지 아는 사람이 없다면 수도원은 소송에서 패할 터였다. - <21권> '특이한 베네딕토회 : 캐드펠 수사의 등장' 중에서, p.39
엘리스 피터스는 움베르트 에코가 큰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 작가로 '캐드펠 수사 시리즈'가 12세기 수도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라 <장미의 이름>에 비견되기도 한다. 직접 만나보니 움베르트 에코보다는 루이즈 페니의 중세 버전같은 느낌이 더 들었지만 말이다. 시리즈의 주인공인 캐드펠 수사는 십자군으로 전쟁에 출정했었고, 바다에 나가서도 10년 동안이나 해적선을 격파했던 거친 과거를 가지고 있다. 지금은 수도원에 귀의해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중이고, 관심사는 오로지 식물의 탄생과 성장과 번식에 관한 것뿐이었다. 허브밭을 가꾸며 신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의 주변에 사건이 일어나고, 그가 '탐정'이 되어 사건을 풀어나가는 것이 이 시리즈의 주요 서사이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치열한 전쟁터에서 보냈지만, 지금은 허브밭을 가꾸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캐드펠 수사. 그는 베네딕토회의 계율과 아무런 마찰도 빚어내지 않되 자신의 욕구에도 멋지게 들어맞는 일상의 규율을 마련해 충실히 지켜오고 있었다. 늘 아침기도가 시작되기 전 허브밭에서 두어 시간 밭일을 하고 대회의실에 가면 가장 어두컴컴한 구석의 기둥 뒤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것이 일종의 루틴인데, 이렇게 인간적인 면모가 가득한 캐릭터라 더욱 공감되고 매력적이다. 캐드펠은 참전 군인으로 살았던 거친 과거를 묻어둔 채 수도원에 귀의해 평화롭게 살아가는 친절한 노수사로 등장하는데, 시리즈가 거듭되면서 그의 과거 속 인물이 등장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조금씩 비밀이 드러나면서 재미를 더해준다. 원작의 시리즈 완간 30년을 기념해 전면 개정된 버전으로 새롭게 옷을 갈아 입고 출간되지 않았더라면, 미처 만나지 못하고 지나갔을 텐데 리커버 버전이 나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정말 시공간을 뛰어 넘어 여전히 심금을 울리는 보물 같은 작품들이니 말이다.

이 시리즈에는 매번 끔찍한 살인사건이 등장하지만, 엘리스 피터스는 살인을 단순히 자극적인 소재로 사용하지 않고, 삶에 대한 아이러니를 보여줄 수 있는 통찰력으로 보여준다. 대부분의 시리즈물이 그러하듯이 이 작품 역시 이야기가 거듭되면서 캐릭터의 매력이 더해지면서 깊이 있는 서사를 보여주고, 중세 영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역사추리소설이라는 점이 줄 수 있는 차별화된 매력 또한 다음 작품에 대한 호기심을 더해주는 마성의 시리즈로 완성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매 작품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대단히 생동감있고, 매력적이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페이지를 넘기게 만들어 준다. 여러 인물들이 등장해 각자의 의무감과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데, 덕분에 살인 사건은 한층 더 복잡하게 뒤얽히며 미스터리와 긴장감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작가가 살아온 세월만큼의 깊은 통찰력과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쌓아온 연륜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야기에 애정을 느끼게 된다. 총 21권이나 되는 긴 시리즈라서 좋은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아직도 내가 읽지 않은 작품들이 많이 남았다는 것, 그래서 설레이는 마음으로 아껴가며 충분히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18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완성된 엘리스 피터스의 역사추리소설 '캐드펠 수사 시리즈'는 순서대로 읽어도, 원하는 이야기만 골라서 읽어도 훌륭하다. 드라마틱한 서사를 담백하게 풀어내는 방식, 군더더기 없는 분량, 다양한 인물 군상에 대한 애정과 이해를 바탕으로 쓰인 통찰력있는 문장까지 어느 곳 하나 부족한 부분이 없다. 휴가 기간에 잔뜩 쌓아놓고 읽기 딱 좋은 책이다. 자, 중세 역사 미스터리 속으로 당신을 초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