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 곁에 머물기 - 지구 끝에서 찾은 내일
신진화 지음 / 글항아리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매일 아침은 냉동고에서 샘플을 자르는 일로 열었다. 자르기 전 빙하 시료를 매만지면 타임머신을 타고 우리가 살아보지 못한 과거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들고 있던 샘플이 지금으로부터 19만 년 전에 만들어졌구나, 14만 년 전에 만들어진 빙하였구나 하면서 우리가 갈 수 없는 지구를 상상하며 과거를 여행했다. 찰나의 시간 여행을 마친 후 냉동고에서 샘플의 모든 표면을 1센티미터 정도로 잘라 오염된 부분을 제거했다. 그러면서 혹시나 과거 대기를 맡을 수 있을까 싶어 샘플을 자르고 재빨리 코를 가져다 대기도 했다.                p.72~73


지구과학의 여러 분야가 있겠지만, 빙하로 과거 기후를 연구하는 '빙하학'이라는 건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이 책은 국내에서 유일한 여성 빙하학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빙하는 눈이 내리는 당시의 기후와 환경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일종의 기후 유언장 같은 존재이다. 만들어진 당시의 대기가 보관되어 있는 빙하에 대해 빙하학자들은 '냉동 타임캡슐'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빙하를 이용하면 대기의 상태, 화산활동과 같은 과거 기후와 환경 자료를 복원할 수 있다. 




극지역 빙하를 활용하면 약 46억 년이라는 지구의 긴 역사 중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과 가장 유사한 지난 80만 년의 연속적인 기후 데이터를 복원할 수 있어 지구를 진단하고 미래 기후를 예측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된다. 


빙하학자들은 남극대륙, 그린란드 등 두툼한 빙하가 뒤덮고 있는 극한의 환경에 가서 오염되지 않은 시료를 채취한다. 인간의 접근이 제한된 곳까지 들어가볼 수 있다는 점은 커다란 매력이지만,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남겨둔 빙하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빙하학자들은 지질학자가 지층에 새겨진 역사를 읽듯이 수십만 년 전에 생성된 빙하의 층서를 읽는다. 그렇게 누적된 단서들을 조합해 당대 기후 사건을 해석하고 지구 역사를 파헤친다. 그리고 이는 미래 기후를 예측하는 데에도 주요한 기초 자료로 쓰인다. 저자는 녹아서 층서가 뒤죽박죽 섞인 빙하를 연구하다가 심전도 모니터의 일직선이 그어지는 듯한 위기를 감지하기도 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현장에서 제외되거나 아시아인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모욕적인 일을 겪기도 하며 쉽지 않은 여성 빙하학자의 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현장 경험 없이는 탁상공론에 그치기 쉬워 악착같이 현장을 자청한다. 그렇게 2012년부터 지금까지 빙하만 연구했고 2023년 6월에는 그린란드 국제 심부 빙하 시추 프로젝트에 국가대표로 참여했다.




나는 그린란드 빙하의 중심으로 들어가기 전 생을 마감하는 빙하를 직접 보고야 말았다. 만약 우리가 지금처럼 이산화탄소를 많이 배출한다면 그린란드 빙하는 더 빠르게 후퇴할 것이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빙하가 얼마나 급속도로 녹고 있는지 알 수 있을까? 빙상을 감상하고 있는 참여자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모두 조용히 깨진 빙상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빙상의 후퇴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는 신기함과 기후변화의 흔적을 직접 목격했다는 공포감이 동시에 몰려오기 시작했다. 수많은 감정에 사로잡힌 채 우리는 다시 임시 캠프로 돌아갔다.                  p.142


지구 온난화로 인해 빙하가 점점 녹아서 북극곰들이 먹이를 구할 데가 없어지고 있다. 작은 빙하 위에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는 북극곰의 모습은 환경 다큐멘터리, 동화책 등으로 자주 보았을 것이다. 지구의 온도가 점점 높아지면 생태계 환경이 변하게 되고, 그로 인해 많은 생물들이 멸종하게 된다. 지구 온난화를 일으킨 것은 사람들이고, 결국 그 영향은 고스란히 우리에게로 올 수밖에 없다. 




이 책이 지구과학 영역에서 여성 과학자로서의 삶을 보여주는 것도 매우 흥미로웠지만, 기후위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들려준다는 점에 있어서 더욱 의미있는 책이었다. 이미 전 세계의 많은 빙하가 녹기 시작했고, 기후변화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생각지 못한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위협해오고 있으니 말이다. 


지난 80만 년을 기억하는 남극 빙하 코어는 기후위기 시대의 책임자로 빙하는 인류를 지목했다. 우리가 그동안 살아온 방식을 고수하면 언젠가 지구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지금의 인류처럼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를 급격한 속도로 배출했던 존재는 없었다. 이대로라면 2100년의 이산화탄소 농도는 800피피엠을 웃돌 것이고 그 수치는 3390만 년 전 그린란드에 빙하가 없었던 때와 맞먹는다. 그야말로 지구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물론 기후 회의론자들은 지구의 수십억 년 역사를 들먹이며 지구란 원래 뜨거워지기도 차가워지기도 했다며 지금은 다섯 번째 빙하기를 지나는 중이라고 말한다. 현재의 기후휘기란 별거 아니라는 소리다. 하지만 우리가 매년 체감하는 기록적인 폭염과 이상기후에 따른 징조, 재난의 풍경은 그들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현실을 보여준다. 우리가 빙하학자의 시선으로, 더 치밀하고 적확한 분석과 현장에서 밝혀낸 사실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과거를 통해서 미래를 여행할 수 있도록 해주는 '빙하학'을 통해 우리의 지구를 조금 더 다정하게, 그리고 현실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좋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록이라는 세계
리니 지음 / 더퀘스트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만의 루틴을 만든다는 것은 나의 일상을 지키겠다는 다짐과도 같아요. 사소한 일에 고민하지 않겠다는, 시간을 더욱 충만하게 누리겠다는, 아침과 저녁 시간만큼은 나를 지탱해주는 것들에 시간을 쏟아보겠다는 그런 다짐이요. 때론 느슨하게, 때론 단단하게 엮여가는 나만의 루틴이 훗날 나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어떤 새로운 가치를 더해줄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보려 합니다. 여러분도 아주 작은 루틴들이 연결되고 이어져 만들어내는 의미 있는 변화를 꼭 누릴 수 있기를 바라요.             p.48



새해가 시작될 때마다 예쁜 다이어리와 노트들을 준비해두고 이번에는 제대로 기록을 좀 해봐야지, 마음 먹지만 그 다이어리를 끝까지 써 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늘 중간에 멈춰버리고, 그 다음해에는 또 새로운 다이어리로 시작하기를 반복해왔다. 기록하는 습관은 왜 이렇게도 꾸준히, 계속 지속하기가 어려운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매번 기록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드는 걸까, 늘 그게 궁금했었다. 


sns에 기록을 남기는 것도 하나씩 모이면 나만의 서사가 된다.  좋은 문장을 베껴 쓰는 필사 노트도 조금씩 쌓이면 나만의 문장 수집 데이터베이스가 되어 주고, 세상과 로그아웃하고 나 자신에게 로그인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 준다. 그렇기 때문에 기록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것 어닐까. 늘 실패하면서도, 늘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그럼에도 올해는 좀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바로 이번에 만난 <기록이라는 세계> 덕분이다. 





이 책은 17만 기록친구들에게 기록하며 사는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리니의 첫 책이다. 손글씨, 필사, 노트 정리 등을 다루고 있는 책은 기존에도 많이 있어 왔지만, 이 책처럼 기록 방법들을 체계적으로 잘 정리했던 책은 없었던 것 같다. 이 책에는 25가지 기록 방법들이 아주 구체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짧은 메모와 일기부터, 루틴 트래커, 포토로그, 만다라트, 관찰 일지, 여행 기록, 문장 수집, 음악 노트, 영어 필사, 실패 노트 등 기록의 거의 모든 종류가 망라되어 있다. 게다가 각각의 기록마다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방법이 제시되어 있고, 사진 이미지로 저자의 실제 기록 노트가 담겨 있어 직관적으로 와 닿게 보여지는 실용성이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일기를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이 된다면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딱 한 문장만 써보라는 것, 짧은 시간에 힘들이지 않고 연력의 빈칸을 채울 수 있는 방법, 목표 설정과 아이디어 정리를 위한 만다라트 기록법, 감정 어휘를 매일 일기로 쓰면서 내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하는 법 등등 책을 덮고 바로 실천해 볼 수 있는 팁들로 가득하다. 




우리는 종종 극적인 변화나 거대한 성과만을 '기적'이라고 생각하곤 해요. 하지만 100일 동안 해보니 알겠더라고요. 진정한 기적은 갑자기 한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과정이 모여 만들어진 결과라는 것을요. 저는 100일 동안 영어 필사를 해보면서 꾸준히 무언가를 해본 경험치를 쌓았고, 100일 동안 좋은 습관을 지속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얻었고 작은 진전을 경험하며 제 안에 긍정적인 마인드셋이 자리 잡는 걸 느꼈고요. 이렇게 여러 가지 경험과 깨달음의 레이어를 켜켜이 쌓아 더 나은 버전의 나로 성장한 것, 이게 진정한 의미의 기적 아닐까요?               p.186


'필사'가 유행하면서 각종 필사 책들이 꽤 많이 출간되었는데, 리니의 기록 노트 중에도 '필사'와 관련된 부분이 있어 살펴보았다. 리니는 주로 도트 노트에 필사를 한다고 한다. 글씨를 가득 채웠을 때 줄 노트나 모눈 노트보다 가독성이 좋다는 이유에서다. 대부분의 필사 노트가 줄 노트로 되어 있는데, 도트 노트가 가독성이 좋다고 하니 한번 시도해봐야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책을 읽는 과정에서 공감이 되거나 기억하고 싶은 부분, 인용해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문장이 있는 페이지에 인덱스를 붙여두고, 완독한 뒤에 책 한 권당 노트의 양면 페이지를 넘기지 않는 것으로 분량을 정한다. 모든 문장을 옮겨 쓸 수는 없을테니, 분량을 정해두고 문장을 추려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영어 필사에 관련된 부분도 있었다. 새해를 앞두고 딱 100일 남은 시점에, 100일 동안 영어 필사를 해보기로 했다는 거다. 100일 동안 영어 필사로 노트 한 권을 빼곡하게 채운 뒤, 갑자기 영어 실력이 늘어나는 기적이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 시간 동안 깨달은 게 있었다는 거다. 100일 동안 한 가지를 꾸준히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 말이다. 영어 문장은 시중에 나와 있는 필사 교재를 참고하거나 인터넷에서 '영어 명언', '팝송' 등을 검색하면 많은 문장이 나오니 참고해서 시도해보면 좋을 것 같다. 리니가 100일의 영어 필사 후 알게 된 깨달음과 기적이 뭔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직접 읽어 보길 바란다. 


우선 취향에 맞는 노트를 준비하고, 영어 문장은 시중에 나와 있는 필사 교재를 구매해서 따라 써봐도 좋고, 인터넷에서 영어 명언, 팝송 등을 검색해서 문장을 찾아도 좋다. 해외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가 마음에 드는 대사를 적어보는 것도 좋다. 요즘에는 대본도 쉽게 구할 수 있어 필사 교재로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기억하고 싶은 단어나 구절은 형광펜으로 표시한 뒤 나중에 다시 한 번 보면 기억에 훨씬 오래 남는다. 모르는 단어나 문법을 따로 정리해두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100일 영어 필사는 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건데, 리니의 팁을 통해 나도 이번에 드디어 한번 해보려고 한다. 




기록을 대하는 태도는 삶의 태도와 많이 닮아 있다,는 저자의 말에 아주 많이 공감이 되었다. 대부분 계획만 많이 세우느라, 혹은 걱정만 하느라 시작의 허들을 넘지 못하는 일들이 많을 것이다. 사실 방법은 딱 한 가지 뿐이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불안하고 걱정이 되더라도, 실패할까 두렵더라도, 일단 시작해 보는 것이다. 이 책을 구매하면서 포스터 크기의 달력인 '연력'을 받았다. 1년 치의 일정을 적어둘 수 있는 페이지라 수시로 체크하고, 한 눈에 한 해를 볼 수 있어서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우선 연력부터 시작해보려고 한다. 어떤 시기에는 안 좋은 감정들로 가득하고, 또 어떤 시기에는 즐거운 일들로 꽉 채우기도 하면서... 차곡차곡 쌓여갈 나의 2025년 한 해를 기대해 본다. 하루에 1분씩, 365분 투자해서 얻을 수 있는 나의 1년이라니... 가성비 정말 훌륭하지 않을까. 

 

매일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고, 지루할 수도 있고,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가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 연초에 세웠던 목표를 돌아보면 제대로 이룬 것도 없고 말이다. 그래서 '기록'이 필요한 것 아닐까 싶다. 매일의 하루를 기록하고, 그 시간들을 돌아보며 내 안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되기도 하고,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되기도 하고 말이다.  뭔가 기록을 해보고 싶지만 글씨가 안 예뻐서, 꾸준히 하는 게 어려워서 등등의 이유로 중간에 포기하거나,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면, 올해는 이 책과 함께 기록의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고군분투하는 시간이 결국 대실패로 끝나는 시기가 많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나름대로 정한 루틴을 시도해보면서 방향을 잡아가보자. 아주 사소한 것부터 시작하는 거다. 나만의 루틴을 만든다는 것은 나의 일상을 지키겠다는 다짐과도 같은 거니까. 때론 느슨하게, 때론 단단하게 엮여가는 나만의 루틴이 시간이 흘렀을 때 내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지켜보는 것도 설레이는 일이다. 그러니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각자의 방식대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다 보면 더 넓어진 나의 세계를 마주하게 될테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뾰족한 전나무의 땅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7
세라 온 주잇 지음, 임슬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사교술이란 결국 일종의 독심술이며, 나를 맞아준 부인에게는 그 귀한 재능이 있었다. 공감은 마음뿐만 아니라 정신의 산물이기도 하고, 블래킷 부인과 내 세계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하나였다. 게다가 부인에게는 궁극의 재능, 천상이 허락하는 가장 고매한 재능이 있었으니 바로 완전한 이타였다. 때때로 부인의 다정하고 열심인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면 어찌 된 사연으로 이토록 빛나는 인물이 북쪽 바다의 외딴섬에 자리 잡게 되었을까 의아해졌다. 어쩌면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것일지도, 각자 흩어져 살지만 서로가 절실한 이웃들에게 부족한 것들을 보충해주기 위해서 일지도 몰랐다.                    p.75



'나'는 짧은 첫 방문과 뱃놀이 길에 둘렸던 두세 해 여름을 뒤로하고 다시 더닛 랜딩을 찾았다. 여름 한 계절을 지낼 숙소로 거리 끝에 위치한데다 녹음이 우거진 정원이 있어 번잡한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채로 아늑해 보이는 앨미라 토드 부인의 아담한 집을 선택한다. 하지만 조용히 은둔하며 글쓰기를 할 생각이었던 '나'는 그곳에서 결코 은둔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약초 애호가인 하숙집 주인 토드 부인의 세심한 환대 덕분이다. 토드 부인은 정원에 있는 약초밭에서 제배하는 풀들을 끓여 몸이 아픈 이웃들에게 나눠주었고, 마을 의사와도 사이가 아주 좋았다. 약초 채집이 제철을 맞은 6월 말에 도착했기에, 토드 부인이 화창한 날마다 숙박인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 당연지사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토드 부인과 산책하며 지혜를 전수받고, 그녀의 일을 도와주느라 7월이 훌쩍 지났는데, 그러다 보니 마감이 지나버렸으나 꼭 써야만 하는 긴 글을 떠올리게 된다. 


어쩔 수 없이 토드 부인에게 당분간은 방에 틀어박혀 일에 전념해야겠다며 아쉬운 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웃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늙은 선장의 과거 이야기를 들어주고, 만 건너편에 있는 토드 부인의 엄마를 함께 만나러 가기도 한다. 그렇게 더닛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마을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며 그들의 삶을 함께 경험하는 동안 여름 한철이 천천히 지나간다. 토드 부인은 그 이웃들과 함께 같이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저마다 고생을 잔뜩 하고 그 고생의 명암을 전부 깨우칠 때까지' 함께 해왔다. '나'는 이곳에서 여름을 보내며 서로에게 한 시절을 온전히 내어주는 이들의 삶을 함께 체험한다. "주어진 삶을 최대한 즐기며 한껏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게 누구든 마음이 좋아지는 것 같아."라는 극중 토드 부인의 말처럼,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삶들이 그런 느낌이었다. 유쾌하고, 용감하고, 애틋하고, 따스하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평범한 일상의 세계 말이다. 




그곳에 속세가 있었고, 이곳에 능히 시작된 영원을 사는 조애나가 있었다. 우리 모두의 생에는 외따로이 고립된 장소가 있다고, 끝없는 후회와 비밀스러운 행복에 바쳐진 장소가 있다고, 우리 모두가 한 시간이나 하루쯤은 동행 없는 은둔자이며 외톨이라고 나는 스스로에게 이야기했다. 그들이 역사의 어느 시대에 속했든 우리는 이 똑같은 감옥의 수감자들을 이해하고 만다고도. 산들산들 바닷바람이 부는 셸히프 아일랜드에 홀로 서 있는데, 문득 저 멀리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바다 쪽으로 향하는 유람선을 가득 채운 젊은 남녀의 쾌활한 말소리와 웃음소리였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p.126~127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이 지났지만, 강추위는 여전한 요즘이다. 한파가 몰아치고 있는 추운 계절에 너무 잘 어울리는 책을 만났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세라 온 주잇의 <뾰족한 전나무의 땅>이다. 주잇은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가까운 여성들과 동반자적 관계를 맺으며 살았는데, 특히 보스턴에서 문학 살롱을 개최하던 애니 필즈와 각별했다. 두 사람은 헨리 제임스의 <보스턴 사람들> 집필에 영감을 준 것으로도 알려졌다. “자기 공간을 향한 나의 애착은 야옹, 하고 운 적 있는 그 어떤 고양이보다도 강하답니다”라고 스스로 묘사한 것처럼 주잇은 미국 지방주의 문학의 선구자라는 세간의 평가에 걸맞게 자신의 공간에 깊이 속한 존재였다. 이 작품 속 바닷가 풍경은 첫 장편인 <디프헤이븐>과 마찬가지로, 북동부 메인주의 바닷가 마을 사우스버윅에 기반한 것이라고 한다. 그곳은 그가 평생 발붙이고 사랑한 땅이었다. 공간에 대한 애착 덕분인지, 작품 속 공간에 대한 묘사도 굉장히 뛰어나다. 마을과 사람, 자연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묘사력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고 말이다. 


1896년 처음 출간된 이 작품은 '여성이 여성에 대해 말하는, 여성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매력적이다. 당시의 시대상에 맞는 종속적인 여성 대신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여성 캐릭터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간 다 잡아먹을 남자들'과 함께할 생각은 없지만, 사랑이 필요한 모든 것을 한껏 사랑해온 마음을 가진 여자들의 이야기는 따뜻한 즐거움과 포근한 사랑스러움으로 가득하다. 6월에 시작되어 8월의 늦여름까지 이어지는 시기가 작품의 배경이라 페이지마다 여름의 빛과 공기가 흠뻑 느껴지는 것도 너무 좋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바깥은 겨울이었지만, 나는 바닷가 마을 더닛 랜딩의 초록빛 풍경 속에 있었다. 이른 아침의 산들바람, 따사롭고 청량한 공기, 햇살 아래 나무 향기를 느끼며 단호한 마음으로 꽃송이와 명랑함을 심은 아담한 정원 안에서 마을 사람들의 삶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잔잔하게 밀려오고 나가는 파도처럼 섬세하고, 사려 깊게 그려지고 있는 이야기가 마음의 온도를 조금씩 데워주었다. '세라 온 주잇'이라는 반짝이는 작가를 발견하게 해주어 너무도 고마운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창의성을 지휘하라 - 지속 가능한 창조와 혁신을 이끄는 힘, 확장판
에드 캣멀.에이미 월러스 지음, 윤태경.조기준 옮김 / 와이즈베리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훌륭한 애니메이션을 보면 화면에 나오는 모든 캐릭터가 스스로 생각해서 움직이는 생물처럼 느껴진다. 화면 속의 캐릭터가 공룡이든 개든 램프 스탠드든 스스로 의도(혹은 감정)를 품고 움직인다는 느낌이 들어야 애니메이터가 제대로 작업했다고 할 수 있다. 애니메이터가 종이 위에 그리는 것은 단순한 선이 아니다. 살아 있고 감정을 느끼는 개체다. 이것이 이날 저녁에 내가 애니메이터의 연필 스케치를 통해 종이 위에 나타난 도널드덕을 보면서 생애 최초로 깨달은 사실이다. 정적인 선이 살아 움직이는 입체적인 이미지로 바뀌는 과정은 당시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요술 같았다.             p.34~35



<토이 스토리>, <인사이드 아웃>, <업>, <라따뚜이>, <니모를 찾아서> 등 수많은 명작을 탄생시킨 픽사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성공 신화에 숨겨진 모든 것을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창의적 기업의 대표적 롤모델인 픽사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부활 신화를 진두지휘해온 공동설립자이자 사장이었던 에드 캣멀이 30여 년간의 경영 경험과 통찰을 집약한 이 책은 이번에 10주년 기념으로 전면 확장판이 새롭게 나왔다. 경영 일선에서 은퇴한 후 저자가 쌓아온 기념비적인 헤리티지를 되짚어보고, 더욱 업그레이드된 혁신과 창조의 스토리를 150여 쪽 증보한 버전이다. 확장판 서문과 4개의 포스트스크립트, 2개의 챕터가 더 늘어났으니, 기존에 나온 버전을 읽었더라도 다시 읽을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월트 디즈니와 앨버트 아인슈타인이 우상이었던 에드 캣멀의 어린시절부터 시작해 대학을 졸업하고 컴퓨터로 이미지를 구현하는 컴퓨터그래픽 기술을 개발해 디지털 애니메이션을 만들게 된 스토리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또한 픽사의 기업 문화부터 처음 상업적 성공을 거둔 <토이 스토리>의 제작 과정, 창의적 기업문화를 만들고자 채택한 다양한 경영 전략과 창작 원칙, 그리고 디즈니의 픽사 인수 이후 문화가 확연히 다른 두 기업을 어떻게 업계 최고로 성공시켰는지 그 스토리도 모두 담겨 있다. 대중적으로 성공한 작품들의 비밀도 낱낱이 공개하고 있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다양한 작품들에 참여한 제작진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들려주고 있기 때문에 디즈니와 픽사의 작품들을 좋아한다면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픽사의 신화, 디즈니의 부활을 이끈 혁명적 경영 스토리가 이 책 한 권에 모두 담겨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처음부터 여러분에게 아무리 관찰력이 뛰어나고 관심을 기울이는 리더라도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인간은 자신의 관점이 아닌 타인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상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자신이 본 것이 현실이라 생각한다. 더불어 종종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이해할 수 있는지도 인지하지 못한다. 픽사에서 나는 우리가 종종 보이지 않는 것에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명확한 시선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분위기를 형성하려고 항상 노력했다. 1장에서 '나는 평생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분하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고민해 왔다'라고 적었다. 하지만 이 문장을 쓸 때만 해도 사람들이 타인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각화한다는 것을 몰랐다.               p.503



적극적인 경청은 머리로는 이해하기 쉽지만 실천하기에는 매우 어렵다. 픽사에서 가장 경험이 많은 제작자조차도 건설적인 비판을 듣고, 받아들이고, 적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럴 때 그들은 '투 데이 오프사이트'라고 불리는 또 다른 접근법을 시도했다고 한다. 이것은 제작 작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제작팀이 더 깊이 파고들 필요가 있다는 공감대를 이룬 상황에서 디즈니와 픽사 모두에서 큰 효과를 발휘했다고 한다. 참석자들이 모여 이틀간의 집중 세션을 통해 몇 가지 장애물을 돌파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제안을 내놓는 과정을 통해 작품의 문제점을 인지하고, 진화의 기회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저자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로 <겨울왕국>을 제작 중이던 당시에 진행했던 투 데이 오프사이트에 대해서 들려준다. <눈의 여왕>에서 영감을 받은 이 작품의 스토리와 캐릭터가 크게 와 닿지 않는다는 것이 당시의 문제점이었는데, 이 과정을 통해 엘사와 안나가 서로의 차이점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랑스러운 자매가 되었다고 한다.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관대하고 개방적인 자세로 모든 역량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자존심은 문 앞에 두고 들어올 것, 그로 인해 그들에게 영감을 주는 놀라운 협업의 시간이 만들어졌다. 


저자는 '성공해야 할 필요성과 무지의 결합만큼 신속한 학습 비결은 없다'고 말한다. 자신이 1986년 신생기업 픽사의 사장이 되었을 때 유일한 문제가 바로 '픽사 사장으로서 해야 할 일에 완전히 무지했다는 점'이었다고 말이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낯선 신규 사업을 이끌어 가며 핵심 인재를 채용하고, 제품 가격을 책정하고, 픽사를 흑자 기업으로 키우기 위한 비즈니스 모델을 끊임없이 고심했는지 그 과정 또한 매우 흥미진진했다. 새로운 기술 도구들을 개발하고, 기업을 설립하고, 그 기업이 제대로 돌아가도록 경영하는데 수십 년의 시간을 바쳤기에 얻을 수 있는 팁들을 그저 책을 읽는 것만으로 얻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직원은 건전지처럼 쓰고 버리는 부품이 아니라고, 기업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싶은 경영자라면 직원들이 인간적으로 살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부분이었다. 경영자가 이런 마음가짐이라면, 직원들도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각자의 삶을 영위하면서 업무 능력도 최고로 올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많은 경영자들이 이 책을 통해 배우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스티브 잡스의 최측근으로서 약 25년간 함께해오며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세세하게 풀어낸 책 속 부록 또한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창의적 조직 문화를 만드는 법을 알고 싶다면, <인사이드 아웃>, <주토피아> 등의 성공스토리가 궁금하다면, 지속 가능한 창조와 혁신을 이끄는 힘을 가진 픽사의 이야기를 만나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선 - 뱃님 오시는 날
요시무라 아키라 지음, 송영경 옮김 / 북로드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긴 머리를 풀어헤친 선원들이 무릎을 꿇은 채, 마을 사람들에게 두 손 모아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정 같은 것에 이끌려서는 안 된다. 그들을 한 명이라도 살려두었다가는 마을에 재앙이 닥칠 것이야. 우리 선조들은 이들을 때려죽이기로 결정하셨고, 마을은 지금까지도 선조들의 결정을 따르고 있어. 마을의 관례는 반드시 지켜야 해."

어머니의 눈에 험악한 빛이 떠올랐다.

이사쿠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p.125



곧 열한 살이 되는 이사쿠가 사는 마을은 지형 특성상 고립되어 있는 위치에 있었다. 열일곱 가구가 모여 사는 작은 어촌 마을에는 변변찮은 일거리가 없어 사람들은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다른 마을로 가려면 북쪽에 있는 바위가 많고 험준한 산을 넘어 가야 했고, 사람들은 그 길을 따라 생선 따위를 농작물과 맞바꾸어왔지만, 가족들의 배고픔을 달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대부분 가족 중 한 사람이 산 너머 마을의 고용 하인으로 가곤 했는데, 계약의 대가로 목돈을 받게 되면 그걸로 가족들이 먹을 곡식을 샀다. 이사쿠의 아버지도 3년 계약으로 은 60돈을 받았는데, 마을에서도 눈에 띄게 건장한 데다 배를 모는 데도 능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많은 은을 받은 편이었다. 


이 마을에는 단풍이 물들 무렵 마을 사람 전체가 참여하는 의식이 거행된다. 바로 뱃님을 위한 의식이다.  뱃님이란 마을 앞 암초가 많은 바다에서 좌초한 배를 말한다. 뱃님에는 보통 음식, 집기, 기호품, 천 등이 잔뜩 실려 있고, 이 물건들은 마을 사람들의 생활을 충분히 윤택하게 해준다. 또한 파선의 목재는 집을 수리하거나 가구를 만드는 데 사용한다. 그래서 겨울을 앞두고 열리는 마을 의식은 항해하는 배가 암초에 좌초되어 부서지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게다가 바다를 항해하는 배를 해변으로 유인하기 위해 야간에만 소금을 굽는다. 거친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는 배의 경우 소금 굽는 불을 보고 마을이 있는 해변이라고 생각하고 배를 해안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큰 배가 마을 앞바다를 지나가면 배 밑바닥이 암초에 걸려 금세 부서져버리고 만다. 난파된 배를 기원하는 의식을 넘어 배의 난파를 유도하는 방법까지 써야 할 정도로 이 마을 사람들은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뱃님'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어촌 마을의 기괴한 풍습은 결국 잔혹한 재앙을 불러오게 되는데... 과연 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마을 남자들 대부분이 배를 타고 바다에 나오기는 했으나 예년과는 조금 달랐다. 고기를 잡으려면 새벽에 나가는 게 보통인데 바다에 햇살이 가득한 시간이 되어서야 나오는 이도 있었다. 고기잡이를 마치는 시간도 빨라져서 해가 기울 무렵에 뭍으로 향하는 배가 많았다. 몸이 아프다며 아예 바다에 나오지 않는 남자도 있었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가장 무서운 일은 마음이 해이해지는 것이야."

어머니는 화롯불에 장작을 넣으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게을러진 사람들은 뱃님이 가져다준 식량 덕에 마음이 느긋해져 고기를 잡으려는 열망이 시든 것이 분명했다.               p.156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 요시무라 아키라는 일본 기록문학의 대가라 불린다. 일본에서 조선인 6,000여 명이 일본 자경단에게 집단으로 살해당한 조선인 대학살을 다루는가 하면, 소설임에도 철저한 취재와 고증을 바탕으로, 감출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이번에 나온 <파선>은 1982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팬데믹으로 인한 감염병에 대한 관심과 두려움이 커지면서 일본 독자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소위 ‘역주행’으로 일본 아마존 베스트셀러에 진입한 작품이다. 


독특하게도 이 작품은 프랑스에서 <어둠 속의 불>이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개봉되었는데,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을 했을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고 한다. 읽는 내내 영상화하면 정말 흡입력 있는 호러물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영화 버전도 상당히 궁금해진다. 주도 면밀한 취재와 현장 증언 사료를 기반으로 치밀하게 구성하며 쓰는 작가의 스타일 덕분인지, 실제로 어느 시대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은 생생한 현실감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고립된 마을과 그 속의 기괴한 풍습, 소금을 굽는 불로 항해하는 배의 난파를 유도한다는 사실은 타인을 불행이 누군가에게는 행복이 된다는 아이러니하면서도 끔찍한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자신들이 배의 물품을 약탈한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목숨을 구걸하는 선원들을 한 명도 남김없이 때려죽이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선 오싹한 공포심마저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의 관례가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기에, 그 누구도 그것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종의 광기와도 같은 분위기가 시종일관 서늘하게 시선을 사로잡는 작품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