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씨, 긍정은 어떤 힘이 있나요? 처음 읽는 청소년 인문학 시리즈 2
이남석 지음 / 탐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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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만일 네가 영혼의 평화와 행복을 원한다면, 믿어라. 하지만 네가 진리의 사도가 되고 싶다면, 질문해라.(19)
천국이란 마음의 한 상태이다. 그것은 이승을 넘어서 있는, 혹은 죽음 뒤에 오는 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속에서 하는 하나의 경험이다. 그것은 곳곳에 있으면서 또한 아무 곳에도 없다.(179)
니체는 복음을 지키고자 하는 실천만이 신에게 이르는 길이며, 실천 자체가 신이라고 했다. 중요한 것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었다. 세계가 때때로 지옥 같은, 상태일 때조차 자신이 있는 지금 여기가 천국이라고 느끼는 것, 현재가 마치 영원처럼 느껴지는 복의 상태가 바로 기적의 핵심이었다.(184)
이제 나는 너희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 자신을 찾으라. 너희가 나를 완전히 부정하였을 때 나는 너희에게 다시 돌아가리니.(221)

저는 입문서나 해설서 같은 책들을 좋아합니다. 입문서나 해설서가 해석의 대상으로 삼는 원전을 바로 읽는 것보다는. 원전이라는 책들이 읽기 어렵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를 많이 경험했거든요. 원전을 바로 읽다보면 원전에 대한 마음이 사그라드는 경우가 많았고요. 아마도 제가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원전 읽기로 시작했다면, 지금과 같은 독서를 할 확률은 낮았을 겁니다. 원전에 겁먹고 독서를 멀리 했을지도 모르죠. 제가 운이 좋았던 것은 원전을 쉽고 접근하기 좋게 말해주는 입문서나 해설서를 먼저 읽었다는 점입니다. 그런 책들을 읽다보니 원전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어느 정도는 파악이 가능하고(정확하게 파악하지는 못하고 대략적인 윤곽만 잡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원전 읽기의 부담도 줄고, 원전을 읽고 싶다는 욕망도 불타오르더군요. 쓸데없는 소리 같겠지만(^^;;) 이 자리를 빌어 제 독서 초창기에 원전 읽기의 욕망을 불러일으킨 입문서와 해설서 저자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합니다.

<니체씨, 긍정은 어떤 힘이 있나요?>도 입문서입니다. 그것도 청소년에게 니체의 사상을 알려주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입문서죠. 저는 이 책이 청소년용 입문서라는 사실을 알고 기뻤습니다. 청소년 대상이기 때문에 최대한 쉽게 쓰여졌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책을 읽으며 예상대로 쉬워서 좋았습니다. 사실 니체의 원전을 보면 평범한 청소년이 읽기에는 어려운 느낌이 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쉽게 니체의 사상을 이야기해주면 청소년이라도 읽을 수 있고, 읽다보면 니체의 원전을 읽겠다는 자신감이 생길수도 있습니다. 예전의 저처럼요.

책은 처음에 니체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일단 니체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려주며 기본 지식을 독자가 품속에 쌓게 만들죠. 그 뒤에 책은 주요한 저서들을 나온 순서대로 챕터별로 구분하고 그 챕터별로 각각의 책의 내용을 알려주면서 전개됩니다. 이 방식의 특징은, 각각의 책들에 적혀 있는 니체 사상의 얼개들을 알기 쉽게 알려주는 것과 동시에 니체 사상이 전체적으로 어떻게 변화해갔는지를 알려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독자는 이 책을 읽으며 처음에는 니체의 전체적인 삶을 알면서 전체적인 사상의 틀을 잡고, 각각의 챕터들을 읽으며 사상이 세밀하게 어떻게 전개되어나갔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죠. 전체와 부분의 조화로서 구성되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죠. 따라서 청소년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읽으면서 니체의 사상을 아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은 저처럼요.^^;;

여기까지 적다보니 책에 대한 얘기만 잔뜩한 것 같습니다. 니체에 대한 얘기는 없이. 니체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하니 저같이 지식도 얕고 아는 것도 없는 인물이 뭐라고 떠드는 게 옳은 일인가 하는 의문이 드네요. 그래도 이왕 서평을 썼으니 어쩔 수 없이 니체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겠습니다. 이 책을 따라가면 결국 니체는 '너 자신이 되어라'(219)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너 자신이 되어라'라고? '아니, 이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 아닌가요?'라는 질문이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네요. 네, 맞습니다. 맞긴 한데 니체의 말에 따르자면 '너 자신이 되는 게', 한 개인이 자기자신의 삶을 사는 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우선 우리가 태어나면서 익혀온 무수한 문화적 관습,가치관, 사회와 공동체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풍습, 주류적인 사고, 고정관념등이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좋은 학교에 가라, 좋은 직장을 가져라, 돈이 제일 중요하다, 외모가 중요하다 같이 사회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것들은 한 개인이 자기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니체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좋다고 여기는 인문학적 지식이나 철학, 사상 중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사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니체가 특히 집중하는 게 바로 이 부분입니다. 독실한 기독교 목사 집안에서 자라나 목사가 되리라는 가족의 기대 속에 신학 공부를 하다 목사의 길에서 벗어난 니체에게 기독교적인 사고나 가치관은 억압의 대명사입니다. 니체뿐만 아닐 겁니다. 니체와 같이 나고 자란 동시대 독일인들에게, 더 나아가 서양인들에게 기독교적인 사고나 풍습은 자기 자신이 되는 걸 가로막는 억압의 기제일 확률이 높습니다. 특히 니체는 기독교적인 사고가 현실보다는 내세, 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가치에 중점을 두는 것을 비판합니다. 니체는 삶이 뿌리박고 서 있는 현실이 아니라, 죽은 뒤에서야 갈 수 있는 내세나 절대적이고 확고부동한 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가치에 중점을 두는 기독교적인 사고는 현실을 긍정하기보다는 부정하기 쉽게 만들고, 우리가 살아가는 육체보다는 영혼을 더 중요시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플라톤의 영향을 받아 형이상학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에 집착하는 철학자들도 니체는 기독교적인 사교와 마찬가지로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현실을 부정하기 쉽게 만든다고 하죠. 비판하고 있는 부분을 보면,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내세나 초월적이고 절대직인 진리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나 삶입니다. 니체는 삶을 부정하거나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이나 사상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을 위한, 현실을 긍정하고 살아가게 만드는 철학이나 사상을 추구합니다. 책 제목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니체는 삶을 긍정하는 긍정의 철학자인 것이죠. 그런데 삶을 긍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제가 대답하는 것보다는 이 책을 읽는 게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이 책에서 니체가 주장한 삶을 긍정하는 방법이 잘 제시되고 있으니까요.(휴, 어찌어찌 잘 넘어갔네요. ㅎㅎㅎ)

니체가 어떻게 삶을 긍정했는지 따라가다 보면 독서의 시간이 끝날 겁니다. 저 자신의 경우는, 책을 덮고나니 니체가 느낀 쓸쓸함이 밀려드는 것 같습니다. 글을 쓰면서 논증을 통한 서술이 아니라 문학적인 아포리즘으로 다의적이고 다층적인 해석이 가능하게 만들었고, 당대의 주류적 가치관을 지독하리만큼 과격하게 비판한 니체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웠을 것이 분명한데, 그렇다면 그는 누구에게도 쉽게 인정받지 못하고 크나큰 외로움 속에서 살아갔을 것이 분명하니까요. 말을 끌어안고 광기의 발작을 일으킨 것도, 어쩌면 켜켜이 쌓인 외로움과 불만족이 갑자기 폭발한 것이 아닌가 쉽기도 하네요. 하지만 이제 그는 외롭지 않을 겁니다. 그의 사후에 그의 책을 읽고 그에게 영향을 받은 무수한 이들이 있으니까요. 니체 사상의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사상을 전개하고 예술을 만들고 삶을 살아간, 무수한 후대의 '니체'들이 니체의 사상을 새롭게 전개시켜나가고 있으니가요. 그러니 니체식 삶의 긍정은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니체의 사상이 전해지는 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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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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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생의 드라마는 항상 무거움의 은유로 표현될 수 있다. 사람들은 우리 어깨에 짐이 얹혔다고 말한다. 이 짐을 지고 견디거나, 또는 견디지 못하고 이것과 더불어 싸우다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201)
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337)
한 번은 중요하지 않다. 한 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유럽 역사와 마찬가지로 보헤미아 역사도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보헤미아 역사와 유럽 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체험 부재가 그려 낸 두 밑그림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358)

(생략)
한 인간의 삶을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태어나고 살았고 죽었다. 하지만 이 한 문장이 삶을 제대로 표현한 것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삶에는 무수하게 많은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삶을 표현하려면 이 문장에 많은 것들을 덧붙여야 할 것입니다. 성장과정, 살아가면서 한 경험, 살아가면서 한 생각, 살아가면서 느낀 감정들, 살아가면서 만난 사람들... 덧붙이고 덧붙이다 보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언어로 삶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언어는 삶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없습니다. 삶의 무수한 요소들을 다 알 수도 없거니와 삶의 모든 것들을 표현하는 언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죠. 따라서 삶을 그리는 언어, 삶을 표현하는 언어들은 기본적으로 이미 실패를 품에 안고 있습니다. 언어로 삶을 표현한다는 것은 예정된 실패를 향한 발걸음입니다. 다만, 이 실패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불가능하지만, 실패가 예정되어 있지만, 삶을 표현하기 위해 몸부림치기에 이 실패는 의미가 있습니다.

삶을 표현하는 언어의 대표적인 예가 문학일 것입니다. 문학은 실패가 예정된 장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왜냐고요? 삶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학의 실패는 의미가 있습니다. 제한적이지만 삶을 표현하려고 몸부림치며 '삶의 의미'를 언어로서 구현해내기 때문이죠. 동시에 문학의 실패는 아름답습니다. 왜 아름다울까요? 예정된 실패를 향해 발길을 내딛으며 만들어지는 문학이 우리에게 정서적 울림을 주고, 놀라운 공감의 경험을 하게 만들고, 문학을 읽은 인간을 내적으로 풍요롭게 만들고, 예술작품으로서의 미적인 충족을 우리에게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문학을 아름다운 실패라고 부릅니다.

아름다운 실패로서의 문학은,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표현하려고 노력합니다. 모순덩어리 삶을, 다양하기 그지없는 삶을, 하나의 문장이자 당위의 명제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덩어리 그 자체로, 다양성 그 자체로서 나타내려 한다는 말이죠. 삶을 단순한 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인 것처럼, 문학은 삶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좋은 문학 작품은 삶이 말해질 수 없고,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되지 않는다고 독자에게 속삭입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 작품입니다.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왔다갔다하며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군상을 펼쳐 보이는 이 작품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무엇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삶이란 모순투성이고 다양하기 그지없다는 것을 밀란 쿤데라는 특유의 에세이와 소설의 경계를 넘나드는 스타일과 잘 짜여진 구성으로 넌지시 보여줄 뿐입니다. 스타일만큼이나 소설은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왔다갔다하며 책을 읽는 이에게 다층적 삶의 진실을 알려줍니다. 다 읽고나면 깨닫게 되겠죠. 우리 모두가 삶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왔다갔다한다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가벼움과 무거움 모두를 포함하는 게 우리네 삶이라는 진실을. 삶의 이 진실을 알려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만으로도 저는 이 책이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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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5-23 15: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명예나 경제적 성공에 눈이 먼 작가는 ‘문학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아요. 그래서 보기 좋은 문장을 만드는 데 지나치게 집착해서 표절을 하죠.

짜라투스트라 2018-05-24 14:36   좋아요 0 | URL
네, 자신의 욕망에 눈이 멀면 종종 그런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향수 밀란 쿤데라 전집 10
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 민음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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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잃어버린 발자국들이 새겨져 있는 다시 별견된 오솔길, 몇 년간의 방랑 끝에 그의 섬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 귀환, 귀환, 귀환의 위대한 마술.(9)
향수는 무지의 상태에서 비롯된 고통으로 나타난다. 너는 멀리 떨어져 있고 나는 네가 어찌 되었는가를 알지 못하는 데서 생겨난 고통, 내 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고 나는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는 고통 말이다.(11)
오래 기간 떠나 있다가 자기 나라로 돌아오고서야 사람들은 서로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건 당연한 거라는 명백한 사실에 놀라지.(171)
그들은 우리가 무얼 생각하는지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의 살아 있는 증거로서 우리에게 관심을 보였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에게 관대했고 그 점에 자부심을 느꼈지. 언젠가 공산주의가 무너졌을 때 그들은 나를 심문하는 듯한 눈초리로 쳐다보았지. 그때 사태가 악화됐던 거야. 나는 그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행동하지 않았거든.(171~172)

가끔씩 엉뚱한 생각을 해봤습니다. 신데렐라가 왕자와 결혼해서 어떤 생활을 했을까 같은. 둘은 행복하기만 했을까? 부부싸움도 하고 그렇지 않았을까? 왕자가 바람도 피고 신데렐라가 분노하는 일은 없었을까? 아니면 작은 문제들이 있어도 잘 참고 살아갔을까? 여러질문을 던지다 보면 신데렐라의 결말이 반드시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디세우스의 결말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해본적이 있습니다. 이십 년의 방황 끝에 돌아온 오디세우스가 행복하기만 했을까? 페넬로페와 오디세우스의 삶은 문제가 없었을까? 이십 년 만에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고향의 삶을 잘 견뎌낼 수 있었을까? 그에게 고향의 삶은 낯선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고향의 삶을 못 견디고 다시 또 떠난 건 아닐까? 답이 있을 수 없는 쓸데없는 질문을 던지고 내 나름대로 상상하니 흥미롭더군요. 내 상상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재해석과 재창조가.

<향수>를 읽고나니 밀란 쿤데라도 저와 비슷한 상상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향수>가 밀란 쿤데라식 '오디세우스'의 '재해석' 혹은 '재창조' 같아 보이거든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귀향과 향수의 이야기인 오디세우스를, 밀란 쿤데라는 자기 자신의 망명의 경험을 바탕으로 체코에서 망명했다 다시 돌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재창조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상식에서 벗어난 이야기로서.

처음부터 소설은 상식적인 궤를 벗어납니다. 책속의 주인공 중 한명인 체코에서 프랑스로 건너온 망명객 이레나는, 공산주의가 무너진 상황에서 프랑스인 친구 실비의 권유로 고향인 체코로 떠밀리듯 가게 됩니다. 평범하게 생각하면 고향에서 떠난 사람은 고향에 돌아갈 기회가 생기면 당연히 가고 싶어 할 것 같은데, <향수>의 이레나는 자신은 갈 생각이 없는데 다른 평범한 이들의 일반적인 통념에 떠밀려 고향에 가게 됩니다. 고향에 돌아온 이레나가 겪은 일들이 일반적인 통념과 다를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네, 소설은 그야말로 쿤데라 특유의 스타일로 이레나를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귀향과 향수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다시 돌아온 고향은 이레나에게 너무나 낯섭니다. 사람들은 과거의 기억 따위는 잊으려고 합니다. 도시의 풍경도 공산주의의 과거 따위는 없었다는 듯이 공산주의 시절의 흔적을 지우려고 합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도 이레나가 떠나있던 시절은 없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다시 만난 어머니도 이레나에게 별관심은 없고 자기자신의 삶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이레나는 과거의 연인이자 이레나처럼 망명했다 귀향한 조지프와 만나서 그가 자신을 알고 있다고 여겨 기뻐하며 성관계를 맺지만, 성관계 후 그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이레나는 절망합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고, 자기 자신이 알던 과거의 흔적들은 별로 보이지 않는 고향. 이레나에게 거기가 고향이 맞을까요? 다시 돌아온 자기 마음의 안식처이자 태어난 모태로서의 고향은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닐까요? 그녀에게 체코는 단순히 태어나고 자란 장소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하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한다면 이제 그녀에게 체코는 고향이 아닐 겁니다. 어쩌면 그녀에게 고향은, 체코를 떠나서 자신의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삶의 안식처가 되어준 프랑스가 아닐까요? 태어나고 자란 장소 그 이상의 의미 는 가지지 못하는 체코보다는 삶의 기반이자 삶의 안식처가 되어주는 프랑스가 이제는 더 고향에 맞는 장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단언할 수 없지만, 저는 이레나가 프랑스를 더 고향처럼 여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지프는 어떤가요? 이레나보다 그가 상황은 더 나아 보인 것은 맞습니다. 고향에는 형도 있고, 과거에 자신을 도와준 친구 N도 건재합니다. 하지만 고향에 가니 다시 형을 만난 그에게 형수는 과거처럼 적의를 드러냅니다. 자기 스스로 포기했기에 부모님의 물건이나 집은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니고요. 고향의 가족은 그가 필요하지 않다고, 그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과거의 일기를 읽은 그는 과거의 자신이 너무 낮설어서 당황합니다. 고향에서 나고 자란 과거의 자기 자신이 자신이 아닌 것 같은. 친구 N은 친절하지만 그가 떠나고 나서의 얘기는 일체 하지 않습니다. 그도 조지프가 그동안 없었던 것처럼 대하는 것이죠. 낯설고 낯설어서 당황하는 그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같은 망명객 신세로 귀향한 이레나입니다. 둘은 서로를 위로하며 사랑을 느끼다 성관계를 맺죠. 그런데 문제는 조지프가 이레나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그저 그녀와 낯선 고향에 대한 정서를 공유하다 호감을 느껴 거기까지 간 것에 불과합니다. 실망하는 이레나를 두고 그는 '낯선' 고향을 떠나 익숙한 '타향' 덴마크로 돌아갑니다. 이레나처럼 그도 체코라는 고향을 잃어버린 셈입니다. 대신 익숙한 타향 덴마크를 자신의 새로운 고향으로 얻은 것이고요.

자, 여기까지 얘기하면 이 책은 오직 귀향과 향수의 얘기만 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밀란 쿤데라가 그렇게 단순하게 책을 쓰는 작가는 아닙니다. <향수>는 단순히 귀향과 향수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야기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체코가 고향이 아님에도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 와서 굉장한 매력을 느끼는 이레나의 애인 구스타프, 굉장한 생명력으로 구스타프를 유혹하다 성관계까지 맺는 이레나의 어머니, 조지프의 과거 애인으로 그에게 버림받고 자살하려다 실패하고 그 시점에 삶이 머무르는 것처럼 보이는 이레나의 친구 말라다 같은 다양한 인물들이 빚어내는 다양한 이야기들은 <향수>를 다양한 관점과 이야기들이 어울려지며 빚어내는 소설로 만듭니다. 밀란 쿤데라 특유의 한 마디 말로 표현할 없 수 없는 소설이 만들어진 것이죠. 하지만 저는 그중에서도 귀향과 향수에 대한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어 글을 쓴 것에 불과합니다. 책의 앞부분과 뒷부분에 나오는 <오디세우스>를 보고 <오디세우스>가 이 책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자, 다시 오디세우스 얘기로 돌아갑시다. 오디세우스는 돌아온 고향에서 이레나나 조지프처럼 고향이 낯설다고 느낄까요? 아니면 이레나나 조지프와는 달리 고향을 익숙하게 느낄까요? 제가 명확하게 알 수는 없겠죠. 다만 <향수>를 보면 밀란 쿤데라는 오디세우스가 고향을 낯설게 느낄 것이라고 암시하는 대목을 써놨습니다. 아마도 밀란 쿤데라는 오디세우스가 귀향해서 고향을 낯설게 느낄 것이가고 생각하는 것이겠죠. 고향이 고향이 아니게 되고, 자신이 방황했던 곳들이 오히려 익숙해지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면 오디세우스는 어떻게 할까요? 자신이 느꼈던 향수가 현실이 아닌 이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오디세우스의 행동이 어떻게 이어질까요? 저는 다시 떠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낯선 고향이 아니라 자신이 익숙했던 곳으로. 어쩌면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과 자신이 익숙해진 장소로서의 고향을 계속해서 맴도는 방랑자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방랑자는 오디세우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포함될지도 모릅니다. 고향이 언제라도 낯설어질지 모르는 게 인생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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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정 - 20세기의 스무 가지 교훈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조행복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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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서는 속았다는 것이 핑계가 되지 않는다.(5)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지만, 가르침을 준다.(13)
우리는 민주주의의 유산이 자동적으로 우리를 그러한 위협으로부터 지켜 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잘못된 생각이다. 오랜 전통에 따라, 우리는 역사를 연구하여 폭정의 뿌리 깊은 근원을 이해한 다음 여기에 적절하게 대처할 방법을 심사숙고해야 한다. 우리는 20세기에 민주주의가 파시즘과 나치즘, 공산주의에 굴복하는 것을 보았던 유럽인들보다 결코 더 현명하지 않다.(16)
역사는 우리에게 자유를 모색할 수 있는 구조를 보여 준다. 역사는 여러 순간을 드러내는데, 각각이 다 다르지만 어느 것도 유일무이하지는 않다. 어느 순간을 이해하는 것은 다른 순간의 공동 창조자가 될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역사는 우리를 책임지는 존재로 만든다. 모든 것을 책임질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책임질 수 있다. 폴란드 시인 체스와프 미워시는 그러한 책임 의식이 고립과 무관심을 깨뜨린다고 보았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그렇게 고립과 무관심을 깨뜨린, 우리보다 고초를 더 많이 겪은 동지들을 찾을 수 있다.(162~163)

위에 적은 문장을 보니, 책의 저자인 티머시 스나이더에게는 미안하지만(^^;;) 저는 역사가 반복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똑같이 반복되지는 않죠.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변주되어 반복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역사를 왜 공부하냐?' 혹은 '역사책을 왜 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도 이어집니다. 단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폭정>을 읽고나니 개인적으로 저는 반복되는 역사를 살피고 바라보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무엇인가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게 되네요.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교훈.

그런데 역사에서 교훈을 얻은 것만큼이나 잘못된 역사의 반복을 들여다보는 것 자체도 중요한 일인 건 틀림없습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게 변주되긴 하지만, 왜 인간들은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는가 하는 문제를 파고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죠. '왜 일어나느냐'와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이어져 있기 때문일 겁니다. 원인을 파악해야 그에 대한 대응을 할 수 있으니까요. <폭정>을 읽은 분들은 알지만, 책의 저자인 미국의 역사학자 티머시 스타이더가 꽂혀 있는 부분도 여기입니다. 특히 티머시 스나이더는 1930년대에 대공황을 맞아 유럽의 민주주의가 위기를 겪고 그에 대한 대응으로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전성기를 맞은 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자 자신이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당선된 것에 충격을 받고 이 책을 쓰게 되었는데, 저자는 1930년대 유럽의 상황이 일맥상통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저자처럼 1930년대 유럽의 상황과 최근 미국의 상황이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국가 내부의 문제를 외부 요인으로 돌리는 선동정치의 성공도 그렇고, 합리적인 이성,대화,토론,존중,공존,이해 같은 민주주의 사회의 덕목을 무시하며 생존과 이득에만 집중하는 모습에서도 그렇습니다. 도널드 트럼프의 정치적 성공 자체가 그것을 나타내고 있죠. 아마도 나름대로 미국에서 성실하게 살며 미국 민주주의의 가치를 존중한 채 지내고 있는 이라면 화날만도 하겠죠. 민주주의의 덕목이나 가치를 존중한 인물이 아니라 오직 수단방법 안 가리고 당선에만 매달린 이가 대통령이 됐으니까요. <폭정>의 저자인 티머시 스나이더도 분노한 이들 중에 하나로 보입니다. 분노가 한 권의 책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티머시 스나이더의 분노는 생산적이네요. 자기 자신의 분노를 생산적으로 승화시켜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를 역사의 힘을 빌려 얘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저자는 20세기에서 배운 20가지로(20-20 라임이 딱 맞네요.^^;;) 폭정을 이겨내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미리 복종하지 말라, 제도를 보호하라, 직업 윤리를 명심하라, 앞장서라, 직접 조사하라, 시선을 마주하고 작은 대화를 나누어라, 어법에 공을 들여라, 다른 나라의 동료들로부터 배우라, 위험한 낱말을 경계하라,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더라도 침착하라, 최대한 용기를 내라  같은. 저자의 제안이 특별한 건, 기본적으로 명령형의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는 실천적인 제안이라는 점입니다. 자기 계발서 느낌의 이 제안들을 뒷받침하는 건 자기계발서류의 성공 사례 나열이 아니라 철저하게 엄선된 역사적 사례들과 사회과학적 이론들입니다. 흡사 자기계발서류의 성공을 위한 방법들을 인문학적 지식이 뒷받침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물론 이 책도 성공을 바라는 건 맞습니다. 경제적 성공이 아닌 현 시대의 폭정에서 벗어나는 정치적 성공.

저자가 정치적 성공을 바라는 만큼이나 저도 미국 시민들이 정치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의 강대국인 미국이 자신들만 생각하며 이기적이고 이득만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며 전 세계의 모범이 되고 있지 못하는 건 세계적인 비극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다른 나라들에게 도움도 안 되구요. 저자의 바람이 어떻게 될지는 저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점입니다. 미국인들도 상황을 심각하게 보고 정치적으로 다른 무언가를 바라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더 분발해주기 바랍니다. 아직 폭정에서 벗어나는 변화를 이루기에는 모자라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더 배우고 더 노력해서 부디 티머시 스나이더의 바람대로 정치적 변화를 이루어내기를. 한국에 사는 우리들도 <폭정>을 읽고 변화할 테니. 다 쓰고보니 희망사항만 잔득 적어놓은 주술적 느낌의 글이 됐네요. ㅎㅎㅎ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알 수 없지만, 세상이라는 망망대해의 바다에 나 자신의 바람을 적은 '병 속에 든 편지'를 띄우는 기분으로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폭정>의 저자 티머시 스타이더가 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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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공감필법 공부의 시대
유시민 지음 / 창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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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때는 글쓴이기 텍스트에 담아둔 생각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껴야 한다. 그래야 독서가 풍부한 간접 체험이 될 수 있다. 간접 체험을 제대로 해야 책 읽기가 공부가 된다. 그리고 남이 쓴 글에 깊게 감정을 이입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가상의 독자에게 감정을 이입하면서 글을 쓸 수 있다. 자기 생각과 감정 가운데 타인의 공감을 받을 수 있는 것을 골라낼 수 있고, 그것을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방식으로 쓰게 된다.(8)
공부가 뭘까요? '인간과 사회와 생명과 우주를 이해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는 작업'입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공부의 개념이에요.(17)
문자 텍스트를 읽을 때는 글쓴이가 독자에게 전달하려고 한 지식, 정보, 생각,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읽어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게 되지 않으면 공감도 교감도 비판도 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렇게 해야 책에서 얻은 것이 세상과 타인과 자기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형성하는 토대가 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죠?
그러면 이제 공부의 다른 측면인 글쓰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글쓰기는 뭐냐? 내가 가치있다고 여기는 정보, 옳다고 믿는 생각,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을 문자로 표현하는 일입니다. 글쓰기는 공부한 것을 표현하는 행위인 동시에 공부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문자 텍스트로 표현하기 전까지는 어떤 생각과 감정도 내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지요. 그 모든 것은 문자로 명확하게 표현해야 비로소 내 것이 된다는 겁니다.(75~76)

예전에 영화비평서를 한창 열심히 읽었을 때, 저만의 '비평론'을 한 번 만들어보았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개똥철학에 가까웠던 저만의 비평론을 저는 '공감비평'이라고 명명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이야기인데 이왕 썼으니 자세하게 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생각한 공감비평이란, 일단 비평을 하는 텍스트에 깊이 공감하는 첫단계가 있어야 합니다. 텍스트에 깊이 공감하여 텍스트를 만든 이의 생각과 감정을 받아들여 공감하거나 이해하는 공감의 단계를 거치고 나서 두번째 단계로 비평을 한다는 거죠. 공감도 하지 않고 무턱대고 비평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공감하고 나서야 제대로 된 비평이 가능하다는 생각도 깔려 있었구요.

<유시민의 공감필법>을 읽으며 과거에 만들어두었던 저만의 비평론인 '공감비평'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더군요. 책의 저자인 유시민 씨는 공부와 글쓰기에 관한 강연을 하면서 공감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강조했습니다. 유시민 씨에게 공부란 책을 읽고 그때의 감정이나 생각을 글로 쓰는 것인데, 이 때 공감이 없으면 안 된다는 거죠. 깊이 공감하는 독서의 경험을 해야 자기자신에게 무언가가 깊이 남고, 또 그것이 글쓰기에도 안정적인 토대가 된다는 말로 느껴졌습니다. 저도 유시민의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공감이라는 말을 너무 많이 쓰는 것같지만(^^;;) 공감 없이는 제대로 된 독서의 경험도 없고, 독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 글쓰기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독서를 하며 제가 뭐 엄청나게 깊은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수준 높은 글을 쓰는 것도 아니지만 제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봐도 정말 맞는 말이거든요.

무엇보다도 제가 유시민 씨의 말에 깊이 공감하는 이유는 공감을 해서 책을 읽을 때 독서가 가장 기쁘고 즐겁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책에 아로새긴 생각과 감정과 삶의 흔적들을 깊이 공감하여 내것으로 받아들일 때 느끼는 기쁨과 즐거움, 감동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감정을 느끼는 독서의 경험. 제가 이 맛을 알기 때문에 독서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유시민 씨는 공감해서 읽는 게 가장 좋은 독서의 방법이자 공부의 방법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저도 거기에 동의합니다. 조금 다르게 이야기해보면 저는 독서의 즐거움과 공부는 붙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독서야, 이건 공부야, 이건 즐거움이야 라고 명확하게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공감하여 즐겁게 읽다보면 제대로 된 독서의 경험을 할 수 있고, 내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공부가 되는 것이죠. 독서와 즐거움과 공부가 하나로 되는 경험. 그것이 저는 공감독서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경험한 적은 없지만, 유시민 씨의 말에 따른다면 공감독서를 하다보면 좋은 글쓰기로도 이어지겠죠.

적다보니 의욕이 솟구칩니다. 공감해서 잘 읽고 즐거워하며 공부도 하고 글쓰기도 해야겠다는. 이 경험에 지름길은 없을 겁니다. 꾸준히 공감해서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글쓰기를 하는 수밖에 없겠죠.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저는 유시민 씨의 말대로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끈기있게 밀어붙여 보겠습니다. 그런데 벌써 글 한 개를 썼네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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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5-23 16: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짧은 글을 선호하는 시대가 될수록 남이 쓴 글에 감정을 이입하고 제대로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 것입니다. 반대로 글 쓰는 사람들은 더 많아질 거예요. 짧은 글을 쓸 수 있는 SNS는 자기표현의 수단이 되고, 공감(인정)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최적의 글쓰기 공간이죠. 사람들이 인정하는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많으면 자신의 글에 향한 타인의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해요. 페이스북에 그런 사람들이 많아요. 페이스북에 글을 정말 잘 쓰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글 잘 쓰는 사람치고는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본 적이 별로 없어요. 타인에게 비판을 받으면 어떻게든 자신의 글이 틀리지 않았다는 식으로 답변을 해요. 대화 분위기가 꼬이면 감정싸움으로 번집니다. 그런 모습이 너무 보기 싫어서 페이스북 계정이 있는데도 안 써요.. ^^;;

짜라투스트라 2018-05-24 14:38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그런 일이 종종 있죠. 그래서 저는 페이스북은 그냥 아는 사람들하고만 소통하는 걸로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