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에서 극우로 - 공화당의 추락과 미국 정치의 위기
김평호 지음 / 삼인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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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언론 기사에서 '싸움꾼'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어울릴 것 같다는 김평호 전 단국대 커뮤니케이션 학부 교수는 현재 저술 활동과 활발한 언론 기고를 통해 대중을 만나고 있는 늦깎이 학자입니다. 그는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바로 MBC PD로 10년 넘게 재직했는데요. 특히나 김평호 교수는 언론 노조의 산 증인이기도 합니다. 이후 1994년, 영국 사우스햄턴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1996년 8월에 미국 인디애나 대학에서 '정보통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는 4년 반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되는데요. 김평호 교수를 뭔가 만학도라고 언급하기는 그렇지만 언론계에 있다가 늦은 학업을 시작하여 끝내 대학 교단에서 학자로 자리매김한 이력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엄연히 언론계에 몸담았던 인물이니 만큼 앞으로도 우리 언론에 대한 쓴소리들을 가감 없이 해줬으면 합니다. 그의 이 책은 같은 제목으로 2022년 8월 출간되었습니다.

2021년 1월 6일에 있었던 '무장한 괴한들의 의회 난입 사건'은 도널드 트럼프의 묵인과 지원하에 그의 지지자들이 불법적으로 의사당에 난입한 사실상의 친위 쿠데타였습니다. 이들의 명분은 '미국 대선의 부정 선거'였는데요. 만약 부통령인 마이크 펜스가 이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면 아마도 미국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미국 연방 정부가 직접적인 테러에 노출되어 양자 사이에 총격전을 비롯, 막대한 인명 피해가 났을 겁니다. 이처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많은 미국 백인 남성들 내면의 저열한 본성을 자극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익으로 삼은 극단주의자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에 대해 저자는 "미국인들이 품고 있는 심성의 가장 사악한 면"에 호소했다는 식으로 인용하고 있었습니다. 문득 이 문구를 보자니 전에 서평을 썼던 벤저민 카터 헷의 '히틀러를 선택한 나라'의 한 인용문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나치의 선동은 인간 내면의 저열한 부분에 끊임없이 호소한다"는 문장이었습니다. 실로 극단주의자들의 선동은 이처럼 인간의 추악한 면을 자극해 어떠한 정치적 양심 없이 다수 시민들의 폭력적인 본성에 기반한 자신들의 권력 탈취에 이용한다는 점에서 극히 파멸적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인간의 극단주의적 본성이 원래 타고 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끝없이 자극하여 사회를 분단시키고 시민들이 진실과 더욱 멀어지는 이런 상황이 정치적으로 어떠한 의미도 없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래서 김평호 교수의 이 글은 도널드 트럼프로 대표되는 미국의 극단주의 정치가 단순히 공화당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이와 같은 정치인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이미 1980년대부터 왜곡된 싹이 미국 정치 무대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약간의 개론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실 조금이라도 미국 정치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저자가 논증하는 내용들 자체가 크게 새로울 것이 없겠는데요. 다만 신자유주의와 관련해, 기존의 판에 박힌 주장인 "신자유주의는 실체도 없는 음모론에 불과하다"는 점을 비판없이 수용하고 있는 분들께는 이 책의 내용이 어쩌면 불편할 수도 있을 겁니다. 특히, 미국의 정치, 그러니까 미국의 민주주의가 그 역사와 토대로 봤을 때, 그러한 정치적 건전성이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일종의 보고 싶은 면만 보고 있는 분들께도 적잖이 반감을 살 수 있는 내용들일 텐데요. 그럼에도 저에게는 사회에 역행했던 신자유주의적 이행과 관련해, (어쩌면 당연한 내용이지만)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다행스런 일이었습니다. 물론 이걸로 마음의 위안을 삼아야 하는 현실 자체도 다소 웃기는 일이긴 합니다만.

저자는 오늘날 미국 정치 경제적 사회 담론을 아우르며, 주도적으로 이행되어 소위 권력을 갖고 있는 체제를 "신보수-신자유주의 체제"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신보수-신자유주의 체제의 맥락이 글의 주된 출간 목적이라 여겨집니다. 더불어, 섣부른 제 추측일수도 있겠지만 현재의 미국 정치를 통해 우리의 보수 정치를 가늠해 보려는 시도로도 읽혔는데요. 그런 측면에서 저자의 이 글은 우리에게 충분히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레이건 행정부 이후로 미국의 국익과 세계 패권을 위해 좀 더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규정했던 신보수와 "신자유주의적 탈규제가 초래한 미국 사회의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이 결국은 기존 기득권들에게 이익으로 돌아갔으며, 과거에도 지금에도 제대로 된 정치적 진보 세력을 가져본 적이 없는 미국 정치가 어떻게 평범한 시민들의 삶과 다인종 사회 상황에서 극단적인 인종주의를 강화시켜 왔는지 저자는 낱낱이 보여주고 있는데요. 단순히 아메리칸 드림을 떠나서, 종래의 이민 정책에 대한 저학력의 백인 남성들의 극단적인 인종적 혐오는 현재 삶의 어려움을 그 주범인 신자유주의 때문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백인이 아닌 다른 인종 탓으로 돌리며 사실상 사회를 분열 시키게 됩니다. 이것을 아주 극적으로 조장하고 자신의 이익으로 삼은 정치인은 다름 아닌 도널드 트럼프였습니다.

과거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만들어 놓은 정부와 사회의 협력 체제인 소위 '뉴 딜 체제'는 오랜 세월에 걸쳐 공화당과 그들을 추종하는 인사들에 의해 무력화 되었습니다. 정부가 시민들 삶의 안전망을 위해 각종 제안을 숙고하는 것이 미국인들이 스스로 자랑스러워 하는 '자유'라는 가치에 어떠한 불법적인 양태가 존재하는 지는 모르겠으나, 신보수와 신자유주자들의 결합 자체는 '작은 정부론'에 입각해, 중요한 사회 부조를 사회악으로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여기에 데이빗 코츠의 요약에 의하면, "신자유주의자들의 가장 큰 모순은 작은 정부를 표방하며 정부의 지출을 저어하면서도 군사비 지출에 있어서는 방산 업체를 위해 지속적인 정부 지출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가증스런) 논리를 강화한 것인데요. 여전히 정부의 보호가 필요한 적지 않은 시민들에게서 정부 지원을 끊어내고, 이와는 반대로 방산 업체에게는 막대한 정부 자금을 투입하게 하는 이런 모순적인 입장에 대해 후에 자신들은 잘 모른다는 식으로 치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1980년대 이후 도정된 이런 신보수-신자유주의의 양대 체제가 결국에는 미국인들의 민주주의에는 하등 이득이 되지 않았는데요. 작금의 공화당을 비롯한 미국 정치가 극우에 경도 되었고 이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 만큼에 비례해 다수 시민들의 삶에 사실상 '자유 지상주의'를 강요하여 경제적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켜 나갔습니다. 아주 단적으로 말해서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유란, 모두에게 균등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회적 자원을 보유한 기득권과 엘리트 계층의 더 많은 자유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미국 정치 자체는 현재의 유럽 정치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 여기에는 많은 로비스트들을 고용하여 교육계에 '기독교적 창조론'에 막대한 로비자금을 투하하고 있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도 지금의 사태에 적지 않은 책임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도 저자는 전혀 시들지 않고 있는 '티파티 운동'을 적잖이 소급해서 이해하고 있었는데요. 티파티 운동 자체가 기독교 근본주의에서 비롯된 점을 감안한다면 미국과 같은 정교 분리 사회에서 기독교가 정치권에 끊임없이 손을 흔들고 더 나아가 정치 자체에 편입하려고 애쓰는 것 자체를 백번 양보해서 이들의 양심이나 선명성으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본질상 사회 매커니즘에는 좋은 영향이 될 수 없을 겁니다. 신앙의 자유 자체는 어느 국가에서든 스스로의 양심에 맡겨야 하며, 이를 사회적 영향력을 재고하고자 코크 형제와 같은 막대한 부를 가진 자본가들과 결합해서 직접적인 영향력 확대를 꾀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만약 이것이 미국과 같은 대규모 로비국가와 만났을 때, 건전한 공론장이 아니라 사회적 쟁점이 되는 부분에서 여론 몰이를 위해 막대한 자금을 투하하는 것은 그것이 어찌됐든 종교의 견실한 역할은 아닐 겁니다. 더욱이 종교가 평범한 시민들의 삶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기는 커녕 연방 정부와 사법부에 영향력을 마련하기 위해 각종 로비를 벌이고 있는 것도 실로 금권 정치의 어두운 면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결국에는 앞선 신보수-신자유주의 체제에 기독교 근본주의가 아무런 성찰 없이 결합하게 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민주주의를 서서히 말라 죽이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를 아주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신보수-신자유주의-기독교 근본주의'로 그려지는 소위 삼각 체제는 미국에 있어 지금보다 더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일전에 코리 로빈의 글에서도 현재 미국 사회에 있어 중요한 단초를 얻기도 했는데요. 2008년 이후 미국 중산층들 대부분이 기성 정치에 눈과 귀를 닫았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크리스 헤지스의 미국 정치의 정치 경제적 양극화라는 측면의 언급은 미국 정치가 더 이상 건전하지 않다는 증거일 텐데요. 그런 측면에서 오래된 공리주의적 전통이 미국 정치에서는 사실상 실종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물론 미국의 연방주의는 표면적일지라도 견고하고 동시에 얼마간의 분권주의적 관념 역시 많은 계층에서 인정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부터 미국에 의한 '자유주의적 패권'이 전세계에 불협화음을 일으킨 것은 분명하고, 현재 중국의 대두로 미국의 패권이 위협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 자유주의적 개입이 과연 전쟁을 방지할 수 있을지는 대체로 불명확해 보입니다. 앞선 부분에서 저자가 약간 의구심을 갖고 있던 신보수-신자유주의의 결합은 이미 미국 정치가 리버럴을 포함한 우파 대부분이 신자유주의를 거부할 수 없는 상황임을 감안해 보면 양자 간의 결합은 의심할 바가 없어 보입니다. 2008년 이후에도 미국에서 신자유주의의 기세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시장의 자유가 자유로운 사회의 핵심이다." 혹은 "인간들 사이에 천부적으로 존재하는 차이를 국가가 간여해서 평등하게 만듦련 안된다."는 식의 자유 지상주의가 미국 사회에서 불식되기란 아마도 어려울 것 같아 보입니다.


-1933년에 시도되었다고 알려진 '월가의 반란'에 대해 이 책에서 상세히 서술된 점은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뉴 딜 체제에 대한 전반적인 해석 또한 크게 나무랄 데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약간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저자는 '신자유주의의 화신'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를 자유 지상주의자로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더 줄여 말하면 극우 행동대원들은 현장에서 소란을 벌이고, 부통령과 의원들은 그사이 2020년 선거를 뒤집어 트럼프의 집권 연장을 꾀했던 것이다.

전체 271명의 공화당 상하 의원 중 과반이 넘는 무려 145명이 2020 대선은 부정 선거라며 추인을 거부했다는 점이다.

쿠데타의 주범임에도 전혀 부끄럼 없이 여전히 선거 부정을 외치는 트럼프, 그를 따라 ‘도둑맞은 선거‘라는 거짓말을 소리 높여 합창하는 공화당 의원들과 지지자들의 행태는 미국의 정치, 미국이 상징하는 민주주의 제도가 얼마나 추락했는지를 만천하에 드러낸다.

그러나 트럼프가 중요한 이유는 무자격자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백인들의 분노가 상징하는 정치적, 사회적 변화의 흐름 때문이다.

그(트럼프)는 주류 보수주의가 감추고 싶어 했던 권위주의적이고 여성 혐오적인 태도 그리고 백인종주의를 오히려 공개적이고 공격적인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아들 중 활동의 성격이나 내용, 조직의 규모, 실질적 영향력 등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단체들은 흔히 ‘우익 삼두마차 (Right Troika)‘라고 불리는 ‘미국 입법연대(ALEN : American Lesgislative Exchange Network)‘,‘주청책연대(SPN : State Policy Network)‘그리고 ‘미국번영재단(APF : American For Prosperity)‘이다.

안보 강경론의 핵심은, 미국이 제국적 지위를 갖는 것이 자신은 물론 세계 질서에도 긍정적이기 때문에 미국의 헤게모니는 유지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 강경한 대외 노선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수주의 이데올로기는 모순의 집약체이고, 따라서 미국 보수주의는 수미일관한 이론적 틀을 갖춘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보수를 표방하는 여러 사회,정치 운동의 모자이크라고 설명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들은 ‘시장의 자유가 자유로운 사회의 핵심이다‘,‘인간들 사이에 천부적으로 존재하는 차이를 국가가 간여해서 평등하게 만들면 안 된다‘,‘뉴딜은 사회주의 정책이다‘,‘공산 제국을 확대하려는 소련을 절대 용인해서는 안 된다‘등등의 주장을 내세웠다.

베트남 전쟁의 진실은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전쟁의 명분도 거짓이었고, 참혹한 전쟁의 실상과 추악한 미군의 행태가 드러나면서 미국이 취해 온 반공주의의 정당성, 나아가 미국이라는 국가의 도덕적 정당성도 훼손되었다.

골드워터는 이후 미국 보수의 정책 노선이자 공화당이 취한 선거 전략의 첫선을 보였다. 그는 흑백 차별 문제는 각 주에서 알아서 할 일이지 연방 정부가 개입할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민주당이 추진한 1964년 흑인 민권 법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본래 공화당은 북부의 개신교, 노동자, 화이트칼라 전문가, 기업, 농민, 흑인들까지 폭넓은 지지 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나 2차 산업혁명 이후 점차 상층부 지배 엘리트와 자본가들의 정당으로 변하게 된다.

이들이 보기에 여성 운동, 동성애자, 낙태, 포르노 등은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거의 신성 모독에 해당하는 죄악으로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다.

극우 미디어, 백인종주의, 기독교 국가주의, 극우 테러 등은 차별과 배제를 기본으로 하는 매우 폭력적이며 비민주적인 이데올로기이다.

즉, 자유는 상호 지향적이며 개인의 차원을 넘는 공동의 가치인 것이다. 그러나 차별과 경제적 불평등 구조 속에서 자유는 강자의 것이 되고 사회는 억압의 틀로 기능한다. 개인과 공동체 모두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국가의 개입이 요구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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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 (새 번역) - 불평등과 능력주의를 극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알렉스 캘리니코스 지음, 이수현 옮김 / 책갈피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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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 로디지아(짐바브웨) 남부 솔즈베리 출신의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영국 내의 저명한 정치 이론가이자 신자유주의적 시장주의에 비판적 입장을 보이고 있는 정치 경제학자이기도 합니다. 또한 불평등으로 심화된 현재의 자본주의에 있어, 경제학에 대한 그의 철학적 접근도 큰 설득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는 짐바브웨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포드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이후에는 크리스토퍼 히친스를 통해 본격적으로 현재 자본주의 체제를 비롯, 그것의 산파가 되어버린 민주주의 전반의 사회비판적인 논저들을 왕성하게 출판합니다. 참고로 그는 영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아주 드문 사회 참여적인 지식인으로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Equaility"로 지난 200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초도 번역이 2006년에 있었으나 최근에 새로운 번역으로 재출간이 이뤄지게 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조차 '자유'와 '평등'이 서로 대립하고 상충하는 가치로만 인식하고 있는 것이 두 가치에 대한 표면적이 이해일 것입니다. 하지만 좀 더 진실에 근접한 설명이라면 자유 못지 않게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가치가 평등이며, 현재로서는 평등의 실현이 매우 요원한 것은 다름 아닌 자본주의 체제의 절대적인 내면화에 원인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와 관련해, 노엄 촘스키는 "경제의 합리주의가 체계화되어 강요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할 필요가 있다"가 있다고 강조했고, 버틀란드 러셀 역시, "시민들이 자본주의를 영속적인 체제로 여기는 것을 다소간 지양해야 한다"고 언급했는데요. 이 부분과는 약간 상이할 수 있지만 캘리니코스의 이 '평등'이라는 소책자는 정의와 밀접히 관련된 평등에 대한 질문으로, 3장에서 존 롤스, 로널드 드워킨, 아르마티아 센, G. A. 코헨, 데이비드 밀러 등의 이론과 주장들을 비판적으로 살펴보면서 이를 통해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 길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글은 마무리도 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글의 초도 번역인 2006 번역판을 애타게 찾고 있었는데요. 그래서 이번에 새로 번역해 출간한 책을 구해 읽어보니, 새삼 역자의 노력을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특히 존 롤스의 '정의론'과 관련된 캘리니코스의 날카로운 분석이 담긴 3장 전체는 저같이 평범한 독자가 보기에도 일독이 대체로 수월했는데요. 아마도 이점은 역자의 온전한 노고라고 여겨집니다.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의 상황의 원인은 앞서 언급했지만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노골적인 내면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적 시장 논리가 단순히 물건을 사고 파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사회 체제 전반을 그러한 (모든) 거래에 아주 딱 들어맞게끔 소위 사회 개조가 진행되었다는 점이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인데요. 여기에는 사회에까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막대한 자본가들에 의해 현재의 착취와 다름없는 시민의 파편화를 오랫동안 유인해 왔습니다. 이는 2장 후반부에서 저자는 "자유와 평등에 대한 요구는 그 요구를 체계적으로 부정하는 사회, 정말이지 사회적, 정치적 투쟁들로 분열된 사회에서 제기된다"고 강조하는 데서 오늘날의 현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결국 오랫동안 사회를 좀먹었던 18세기 이전의 계급사회를 타파하기 위해 등장한 자유주의가 '돈과 권력, 사회적 지위'등으로 계급화 되어 현재의 자본주의적 계급주의 시대로 왜 변질될 수밖에 없는지, 그에 대한 추론도 이 논저가 제공하고 있기도 한데요. 그런 연유로 더이상 시민들의 진정한 자유에 화답하지 않는 소위 분절된 신자유주의는 오로지 시장 자유만을 강조하며, 그것을 통한 일종의 거의 근거 없는 유토피아를 시민들에게 세뇌시켜 왔습니다. 즉, 심각한 불평등의 문제를 오로지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시장에서의 개인과 개인간의 상품 거래가 서로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만든다는 그들만의 사회경제적 맥락을 끊임없이 사회에 주입해 왔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 부분과 관련해, 4장에서도 전 영국 총리인 고든 브라운과 같은 자유주의 좌파들이 "신자유주의와 평등주의를 서로 화해시키고 통합시킬 수 있다"는 불가능한 문제를 놓고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 자체는 당면한 문제 해결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점을 여실히 증명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시민들에게 있어 자신의 삶을 안정적으로 영위하기 위한 경제적 수입의 문제는 어느 정도 사활적인 측면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더욱이 단순한 소득 향상을 통한 부의 축적 뿐만 아니라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사회에서 남들과 구별되는 부의 존재는 사회적 지위의 향상과도 밀접히 관련되어 있습니다. 즉, 많은 부를 보유한 사람을 그저 돈이 많다는 이유 만으로 숭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터무니 없게도) 인격적으로 혹은 내면적으로 갖춰진 인물로 사회는 그리 이해한다는 것인데요. 결국 이러한 사회 인식적 메커니즘은 더욱더 개인과 개인을 경쟁하게 만들고 최후의 승자가 더 많은 돈을 따게 만드는 일종의 약육강식과 같은 체제의 견고화로 이어진다는 부분입니다. 이는 무덤에 있는 허버트 스펜서가 이와 같은 현실을 '과학의 치밀한 입증' 정도로 인식하는 것에 그치지는 않겠지요. 바로 이러한 현실 가운데 전반적인 평등에 대한 시민들의 요구가 전방위적으로 중요해졌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본질적으로 인식하고 있어야 되는 부분은 버틀란드 러셀의 언급대로 많은 시민들은 보다 정의로운 사회에서 삶을 영위하고 싶어하고, 그런 측면에서 캘리니코스가 인용한 리처드 헨리 토니의 "중요한 점은 모든 사람의 금전적 소득이 똑같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잉여 자원을 아껴 써서, 사람들의 소득 차이가 하찮은 문제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상의 사회 변혁과 맞닿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평소에 평등을 전혀 언급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을 좌파라고 말하는 자들의 모순과 오로지 시장이 전부라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이해는 양자가 민주주의를 시녀로 거느리는 것에 동의하거나 혹은 민주주의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양보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회적 이행을 비롯해, 평등에 이데올로기적 색깔을 입혀, 사회에서 마땅히 터부시 하게 만드는 것으로 몰아 세웠습니다. 이는 결국 "정의 따위는 필요 없다"는 밀턴 프리드먼과 난잡하면서도 매우 순진한 생각을 가졌던 존 롤스와 같은 낭만적인 이론가가 서로 공존하게 된 연유이기도 할 텐데요. 뿐만 아니라 샹탈 무페가 비판했던 1980년대 이후, 진보주의 좌파가 몰락할 수밖에 없던 이유와 그로인한 파급이 시민들에게 어떠한 파국을 초래했는지 이젠 모두가 잘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찰스 프리드의 언급대로 (신자유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완벽한 시장 관념에 비해, 인간은 너무나 비합리적인 측면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시장에 참여하는 개인의 합리성이라는 것이 사회학적으로 거의 증명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큰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인데요. 과거 공리주의를 포함한 많은 학설들은 "개인은 합리적 선택을 하는 사람으로 여겨진다"는 전제를 거의 의구심없이 맹신하기에 이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능력주의 meritocracy 역시 이러한 맥락 가운데에 있는 것인데요. 앞서 언급한대로 평등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배격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캘리니코스가 분석하는 롤스의 근본적인 사상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보다 '기회의 평등"이 실질적으로 보장되고 더불어 사회적 복리에 대한 보다 철저한 이행이 선결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3장에서 기여와 시장의 보상이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경우인 기업 실적이 악화되는 경우에도 오히려 경영인의 봉급과 스톡 옵션이 올라가는 상황은 단순히 '시장의 배신'이라기 보다는 최소한의 사회적 정의와 실질적 평등에 대한 자본주의의 거부를 넘어, 이것은 체제 전반을 흔드는 사례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개인의 욕망이 그저 선하고 순수하다는 앵무새 같은 발언을 이제는 무슨 사조처럼 받아들이지 말고, 시장 전반을 포함한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자들 전반이 무엇보다 시민의 감시하에 있어야 한다는 점은 민주주의의 대의와도 연결됩니다. 이는 확실히 2008의 대위기를 초래한 수많은 경제 엘리트들이 공적 자금으로 은퇴 자금 잔치를 벌였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체제에서 시장이 더욱 규제를 받아야만 하는 근본적인 이유라고 생각하는데요. 초반 캘리니코스의 논증대로 많은 자유주의 이론가들도 이러한 부분에 동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혁에 대한 담론을 그저 단순한 구호로 여겨서는 안되는 이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진정한 평등을 위한 사회적 담론과 그에 따른 여러 실천 방안들이 종래의 신자유주의의 광범위한 양보를 이끌어내야 하고, 신자유주의가 더이상 민주주의를 좌지우지 하지 않는 방향으로 사회와 시민들이 그러한 공감대를 도출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평등에 대해 온건하고 점진적인 사고를 보이고 있는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의 약점이 자본주의 시정경제 틀 안에서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과신하는 점일 겁니다. 바로 이 문제와 관련해, 캘리니코스가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비판적으로 다룬 것은 많은 사회가 시민의 실질적인 평등을 위해 좀 더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현 시점에서 노동자들의 잉여 노동을 통한 이익 전반을 손에 쥐고 있는 자본가들에 대한 자본주의 체제 전반의 정상화로서, 이들에게 정당한 세금을 부여하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들의 헌법적 정당성을 더욱 강화하는 방편도 민주주의가 스스로 평등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겁니다. 저는 여기에서 분석되고 있는 캘리니코스의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의 비판과 역간 별개로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자신들이 신봉하는 이념에 밑에 두고 그저 민주주의를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그저 '베드'로 여기는 등의 오랫동안 수단으로만 삼아온 점에 더 많은 비판을 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콜린 크라우치나 데이빗 코츠를 통해 접해온 자유주의(엄밀히 말하자면 신자유주의겠지만)에 의한 민주주의를 옭아맨 종속적 이행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자유와 평등을 함께 공유하고 강조하는 민주주의를 좀 더 시장 자유주의로부터 독립시키고, 더 나아가 시장이 민주주의적 통제에 놓이게 하여, 이것이 더 이상 구호에 그치지 않게 하는 데 있겠습니다. 그래서 지지 파파차리시가 자신의 논저를 통해 도출한 "모두가 평등한 자유"라는 개념이 이처럼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오로지 자유 만을 위한 기울어진 운동장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바로 잡을 수 있는가에 있어 앞으로 그러한 이행 과정이 다음 세대, 그리고 더 다음 세대의 삶의 안정과 직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최근에 접한 자칭 보수 우파 이론가인 변희재씨가 유튜브 모 정치 대담 영상에서 이언주 전 의원을 사실상 '자유주의 우파'로 통칭한 것에 대한 일정 부분의 맥락을 캘리니코스의 이 책을 통해 다소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변씨의 본래의 여러 주장들을 다 같이 수용할 수는 없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의 보수주의에 대한 통찰력 있는 분석은 귀담아 들을 만 했는데요. 전통적인 자유주의가 본래 의미에서 상당히 왜곡된 점은 아마도 사회에 내면화 된 자본주의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토마스 네이글은 다음과 같이 썼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가난한 사람이 더는 다수가 아닌 곳에서 민주주의는 포괄적 평등의 적이다."

즉, 부유층의 소득이 빈곤층보다 훨씬 빨리 증가한 나라에서는 다수의 상대적 가치가 반드시 향상되지 않더라도 평균 소득은 증가할 수 있는 것이다.

규제받지 않는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은 적어도 선진국에서 발견되는 불평등은 대체로 개인들이 자신의 재능과 자원을 시장경제에서 어떻게 사용할지를 자유롭게 선택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보비오는 근본적으로 옳다. 만약 좌파가 평등에 헌신하지 않는다면 어떤 의미에서도 좌파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들도 사회정의를 위해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고 시장을 규제하는 것을 지지한다(그러나 시장을 폐지하는 것은 지지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자유와 평등에 대한 요구는 그 요구를 체계적으로 부정하는 사회, 정말이지 사회적, 정치적 투쟁들로 분열된 사회에서 제기된다.

즉 도덕적 담론은 지배적 생산양식의 필요조건을 반영할 뿐이라는 견해를 수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함의는 모든 사회형태에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윤리 원칙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20세기 중반 영국에서 계급 분열이 초래한 주된 해악은 부와 소득에 따라 개인을 평가하는 경향을 낳은 것이다.

즉, 모든 사회적 [기본] 가치(자유, 기회, 소득, 재산, 자존감의 기반)는 이 가치들의 전부나 일부의 불평등한 분배가 최소 수혜자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한 평등하게 분배돼야 한다.

불평등과 빈곤이 극심한 상황에서 최소 수혜자들의 선호를 못 보고 지나치는 것은 특히 위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성황이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완전히 포기해 버렸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들의 요구는 저마다 소유한 자원이나 기본적 재화를 기준으로 평가될 수 없고, 자신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삶을 실제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기준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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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불길, 신냉전이 온다 - 일대일로 정책에서 타이완해협의 위기까지 더 은밀하고 거대해진 중국의 위협
이언 윌리엄스 지음, 김정아 옮김 / 반니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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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보안 산업의 정치 경제와 중국의 사이버 파워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이언 윌리엄스는 선데이타임스 기자로 영국 언론계의 경력을 쌓기 시작해, 채널4 뉴스의 해외특파원을 거쳐, 미국 NBC 뉴스에서도 근무했습니다. 특히 그는 영국 언론인들 가운데에서도 중국의 정치 상황과 중국 사회를 가장 세심하게 분석하고 있는 중국 전문가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요. 이와 관련해, 2021년에 펴낸 책인 "숨소리 하나까지 : 중국의 새로운 전제정치"는 많은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런던 킹스 칼리지 전쟁학과에서 사이버 문제와 관련한 박사 과정을 준비하고 있고, 동시에 영국 내의 대표적 보수 잡지인 더 스펙테이터 The Spectator에서 중국과 관련하여 중국 공산당과 시진핑 정권에 대한 통찰력 있는 분석 기사를 활발히 기고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책은 원제, "The Fire of The Dragon"으로 2022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3년 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언 윌리엄스의 이 책은 오늘날 정치적으로 거칠게 대두하고 있는 시진핑의 중국과 중국 공산당의 비타협적인 국제 외교와 이러한 노골적인 국익 추구가 어떠한 식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이를 매우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될 점은 저자인 윌리엄스가 단순히 학문적인 접근에서 단편적인 정보만을 갖고 중국과 중국 정치를 분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베이징에서의 특파원 생활을 비롯, 동아시아 지역의 적지 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부분입니다. 특히 1949년 이후의 타이완의 정치, 사회, 역사를 아우르는 통찰력 있는 분석은 꽤 훌륭하다고 볼 수 있었는데요. 다만, 일본의 역사 문제에 있어 다소 편협한 이해는 타이완과 일본의 정치적 관계만을 포함해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와 관련해, 12장에서의 "중국 학생들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저지른 잔학 행위와 그에 따른 혐오를 끊임없이 주입받았다."는 중국의 소위 '애국주의 교육'의 진실에 거의 반 정도만 언급하는 한계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를 서구 유럽인의 입장으로 치환해 본다면 과거를 전혀 반성하지 않는 독일이 운이 좋아 경제적으로 번영을 이룩하여, 과거 역사 문제에 민감한 프랑스가 독일의 후안무치한 역사 문제를 어린 세대들에게 정밀하게 교육하는 현장 자체를 그저 냉소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보여집니다. 이는 역사적 가정이긴 합니다. 결국 세계 경제에서 여러 선진국의 한 축이라 볼 수 있는 일본의 국가적 위치에 주목하고, 국제 정치적 입장에서 서구 자유진영에 속하는 일본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야 십분 이해하지만, 중국 정부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 아무리 악마화 한다 하더라도 이 시점까지 일본이 여실히 왜곡하고 있는 역사 수정주의와 극우 및 극단주의에 몰빵해, 역사를 제대로 대면하지 않는 태도를 거의 언급하지 않은 부분은 저로서는 대체로 유감이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현재 비타협적으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중국의 노골적인 굴기는 저자에 의해 여러 사례로 지세히 규명되고 있는데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인도와 벌이고 있는 국경 분쟁과 그런 인도의 적대국인 파키스탄을 지렛대로 삼아 벌이고 있는 지역 내의 사실상 안보 위협 행위와 이어지는 남중국해에서의 중국 인민 해방군이 벌이고 있는 군사기지화를 통한 배타적 영유권 주장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2025년경 타이완의 비극적 운명을 초래할 지도 모르는 시진핑의 침략 야욕에 대해서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었는데요. 이처럼 글의 2장과 3장의 분량은 중국이 남중국해를 향한 야욕과 이러한 침탈 행위에 대해, 국제 사회가 거의 무능력으로 대응했고, 해당 지역 국가인 필리핀과 베트남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외교적 무능에 따른 참사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 자세히 서술되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이들 국가들 가운데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오락가락 하며, 결국 국익도 제대로 못 지켜낸 필리핀의 두테르테 정부의 패착은 지금의 우리 정부가 이 막장 외교를 반면교사 삼아 분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사실상 중국의 정치적 개입과 영향력에 몸이 굳어 꿈틀거리지도 못하는 작금의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외교적 행태는 어쩌면 '경제는 중국, 안보는 미국'이라는 편의적인 이분법을 극복하지 못한 이들의 극명한 현실을 보여주는 결과라고 여겨집니다. 여기에 약간의 논외지만 캄보디아 정부에 대한 중국의 노골적인 접근은 다른 한편으로 미국이 콜롬비아에 향한 정치적 태도와 그에 따른 개입과 본질적으로 유사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콜롬비아 역시 캄보디아와 마찬가지로 지정학적으로 미국의 앞마당임을 감안해 본다면 패권 국가에 준하는 혹은 압도적인 힘을 가진 국가가 자신의 영향권에 있는 국가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현실적으로 아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언급되는 미얀마와 파키스탄에 대한 중국의 개입도 이런 맥락에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래서 양 사례는 어쩌면 냉엄한 국제정치의 단편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계속 미국을 따로 언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현재 미얀마 사태와 관련하여 미얀마 군부에 중국이 정치적으로 매우 가깝다는 분석도 과거 미국이 권위주의적인 정권에 자신들의 안보와 국익을 바탕으로 대응했던 역사를 저절로 떠올리게 합니다. 이는 코로나19로 말미암아 미국 내에 흑인과 백인들에 의한 아시아 인종을 향한 무분별한 '테러 행위'와 인종 혐오에 있어, 중국이 드러내 놓고 냉소하는 상황을 그저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이유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사회를 구성하는 동일한 시민들을 인종으로 구별하여 이를 냉소와 혐오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분명 자유주의의 특권은 아닐겁니다. 물론 신장에 대한 중국 정부의 탄압은 명백히 인권 문제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비난 받을 일임은 분명한데요. 그럼에도 미국을 비롯한 서구 유럽이 중국에 강조하고 있는 자유와 인권에 대한 목소리가 자신들 내부의 인종 혐오로 인해 다소 퇴색될 수밖에 없다는 부분은 민주주의의 일원인 우리 시민들이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단순히 명분론으로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지만 휴 화이트의 언급대로 중국이 자국 내 비밀리에 정치범 수용소를 운영하고, 최근 신장 지구에 있던 무슬림인들에 대한 불법적인 '사회적 개조'에 대해 우리가 중국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것은 거의 자명합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우세적인 명분론이 중국과의 교역과 경제 협력에 매몰되어 동남아시아 그룹인 아세안 국가들이 중국에 정치적으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거나, 교묘한 균형 외교의 달인이라 볼 수 있는 인도조차 중국에 의한 경제적 영향력에 대해 고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이런 인식의 복잡한 양상이 가볍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여겨지는데요. 따라서, 중국을 제대로 견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국 경제에 대한 의존을 점차 줄여나가는 것이 현실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장에 대한 다변화와 중국에 수출 의존도를 줄이는 것이 아시아 국가들에게 있어 결국은 사활적인 문제로 귀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미얀마와 스리랑카를 비롯한 여러 권위주의 정부가 중국의 숨은 의도를 간파하지 못하고 일대일로 사업에 무분별하게 협력한 사례는 앞으로도 주의해야만 하는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타이완에 대한 시진핑의 실질적 야욕은 온전하고 실효가능한 군의 수송 전력과 상륙 전단이 갖춰지는 2025년 이후에 본격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최근에 미 국제전력문제연구소 CSIS 의 중국 인민 해방군에 의한 타이완 침공 시나리오는 우려스럽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중국이 타이완 침공으로 자신들의 해군 전력 대부분을 미국에 의해 궤멸되는 결과를 초래하더라도 인민 해방군 자체가 민간의 통제력 하에 있는 군사 집단이 아니라, 중국 공산당에 의해 창설되어 거의 공산당의 전위 조직이라는 부분은 근본적인 위험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국가 주석의 손아귀에 있는 인민 해방군은 거의 사적 권력하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물론 타이완에 대한 수많은 중국인들의 민족주의적 태도도 심각한 문제라고 판단됩니다. 여기에는 최근 중국 당국의 홍콩에 대한 정치적 탄압이 많은 대만인들로 하여금 '하나의 중국'에 의문을 갖게 되었는데요. 더욱이 중국이 그토록 강조하던 '일국양제'의 허울 뿐인 정체를 많은 대만인들이 간파하는데 이릅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자인 윌리엄스가 타이완에 대해 논하는 것들 가운데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여겨진 부분은 1989년 이래로 민주주의를 쟁취한 타이완이 '노골적인 권위주의 정권 아래 결코 수용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로 미국이 타이완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마땅히 막대한 군사력을 투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명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미국의 동맹국들에 대한 안보 공약을 감안한다면 이는 마찬가지로 중요한 문제인데요. 물론 시진핑과 중국에게 보다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되는 TSMC의 소유는 인민 해방군의 군사적 현대화에 시급하지만 이보다 중국 내부의 거칠 것 없는 "민족주의의 대두'가 시진핑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초월하여 정권 자체를 파국으로 이끄는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중국의 통제할 수 없는 민족주의를 비판하고, 반대로 일본의 역사 문제를 여기에 묻어버린 것 일 수도 있겠는데요. 정치적 혹은 지정학적인 연유로 영국과 일본이 가까울 수밖에 없다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12장의 일본에 대한 다소 후한 평가는 우리로서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반적으로 타이완과 일본에 대한 분석은 이런 '인지적 동류'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끝으로 저는 이 책을 일독하고 난 후, 아시아에 대한 광범위한 이해를 갖고 있는 유럽 언론인의 큰 통찰력이라는 부분에서 '하나의 중국'에 대한 본질적인 분석이 인상 깊었습니다. 즉, 중국이 국제사회에 타이완이라는 중국의 일부이라는 정치적 관념을 강하게 내세웠던 이 '하나의 중국'은 다른 국가들에게는 중국과 다른 이해를 보일 수밖에 없다는 본질이었습니다. 이는 글의 초입이라고 볼 수 있는 1장에서 도출된 "하나의 중국은 정책이라기 보다는 서로 다르게 해석한 협정에 가까웠다."는 해석이기도 합니다. 이 점은 미국이 타이완 방위에 대해 그토록 모호한 태도를 보이는 근본적인 이유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래서 중국 외교부와 공산당이 워싱턴에 대해 가히 '음험하다'는 표현을 서슴없이 하는 근본적인 이유일 겁니다. 중국 당국이 그저 타이완을 전세계에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게 하고 자신들의 일개 지방이라고 강요하는 것에 자신들의 주된 이익이 달려 있는 것이라면, 단순히 표면적으로 '그렇다'고 취급되는 분위기가 아예 전무하다고 볼 수 없겠습니다. 더 엄밀히 말하자면 타이완에 대한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의 태도가 이를 반증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결국 국내의 일들을 자신의 의도대로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시진핑과 푸틴이 국제 사회에서 만큼은 자신들의 (권위주의적) 정부에 대한 존경이 전혀 따르지 않는 서구 민주주의 진영에 매우 강한 피해 의식과 적의를 느낀다는 저자의 통찰은 바로 이러한 본질적인 차이에 기반한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제가 앞서 언급한 몇 가지 문제를 제외한다면 서구 '현장 지식인'의 중국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동아시아의 정세와 정치, 그리고 정밀한 사회 분석으로 요즘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뒤숭숭한 분위기에서 우리 지역의 앞날을 조금이나마 예비할 수 있는 글이라 여겨졌습니다. 매번 중국 관련 글들을 볼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타국의 입장을 거의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은 대국이고 너희들은 그저 소국이기 때문에 이유를 따지지 말고 중국의 이익을 경시하지 않아야 한다는 중국 당국의 편협한 태도는 지역 안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글에서 몇번이나 언급되는 중국 공산당의 '주권'과 '불간섭'은 누구보다 자신들이 되새겨야 하는 의미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여기에도 언급되고 있지만 중국 정부가 과거 아시아 각 지역과 맺은 조공 관계를 명백히 그리워하고 있다는 점은 진정 상당히 우려스러운 부분이고 동시에 한국을 비롯한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민주주의 체제를 지속 발전해 나가고 있는 점은 여전히 변형된 유교적 권위주의에 기대 공산당 독재로 인민들을 다스리는 중국과 매우 극명한 차별점이라 볼 수 있습니다. 과거 중국과 교린한 역사를 제외한다면 현재 동아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이 거대한 권위주의 정부와 어느 정도는 이질적인 존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원초적으로 이런 권위주의적 체제와 민주주의 체제는 서로 양립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극명한데요. 최근에 비롯된 중국의 경제적 번영은 결국 내부에 정치적 자유를 가져다 주는데 실패했고, 이러한 귀결이 중국 공산당의 배타적 이익에 동원 되었기에 이점은 참으로 21세기의 뼈아픈 부분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의 번역과 관련해,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무슬림과 관련하여 이상하게도 '모슬렘'이라는 번역을 역자가 사용하고 있었는데요. 구글링이나 여러 검색을 통해서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겠지만 이 모슬렘이라는 단어는 이슬람인들에 대한 사실상 '멸칭'으로 이 단어의 사용을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번째는 '남한'에 대한 너무 무분별한 사용에 있는데요. 한국전쟁과 해방 이후 한국(남북을 포함한 온전한 한국)을 위해 우리의 국명을 한국이라 하지 않고 남한이라고 번역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후반부에 북한 핵문제가 등장한다 하더라도 무분별하게 (많은 분량에서) "남한의 삼성"과 같은 번역은 정말 눈살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권‘과 ‘불간섭‘은 중국 공산당이 오랫동안 선전 활동의 간판으로 내세운 원칙이었다. 푸틴은 두 원칙을 보란 듯이 위반했다. 그런데도 시진핑은 러시아의 침범을 침공이라, 푸틴의 만행을 전쟁이라 일컬으려 하지 않았다.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두 국면이 ‘하나의 중국 정책‘을 거의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하나는 타이완에서 민주주의가 꽃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진핑이 중국에서 부채질한 민족주의가 맹목적 애국주의로 흘러 타이완 ‘수복‘을 중국을 정의하는 원칙으로 본 것이다.

두테르테는 베이징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그야말로 간절히 애써, 2016년 필리핀 정부가 상설중재재판소에서 승소해 중국의 광범위한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을 무효로 만든 판결에서도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따라서 자국의 해양 지배력이 커질수록 주변국이 겁을 집어먹고 개별적으로 있으나 마나 한 동남아시아국가연합을 통해서든 중국의 영유권 주장을 조용히 묵인하리라고 본다.

당시 중국의 선전기관은 자국의 실책에서 관심을 돌릴 셈으로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기원과 관련한 음모론을 정신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앞서 봤듯이 시진핑의 세계관에 따르면 어디에 살든, 언제 조국을 떠났든 중화민족이 가장 충성해야 할 대상은 중국공산당이다.

텐진 회담 뒤 2주 반이 지난 8월 15일, 탈레반이 카불을 함락했다. 중국공산당은 미국의 무질서한 철수를 지켜보며 후련한 환희와 떨리는 공포를 느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민간인을 공격하는 만행을 저지른다는 의혹이 일자, 서방 지도자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시진핑에게 영향력을 발휘해 푸틴을 제하라고, 그동안 ‘주권‘과 ‘불간섭‘의 신성함을 믿는다고 큰소리쳤던 호언장담에 걸맞게 행동하라고 촉구했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시진핑이 우크라이나 침공과 서방의 대응을 유심히 지켜보며 타이완을 겨냥한 계획을 조정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 타이완은 일본제국에 통합되었던 일본 통치가 대부분을 적어도 다른 아시아 지역, 특히 중국에 견줘 꽤 괜찮게 기억한다.

중국은 관광업부터 연예 산업까지 다양한 산업에서 보복 조처에 나서 남한에 75억 달러에 이르는 경제 손실을 안겼고, 국영 언론은 반한 정서를 부추켜 중국 내 남한 기업을 향한 폭력과 파괴 행위를 조장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자, 타이완 사람들은 답을 기다릴 여유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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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kim92 2023-02-23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용의 불길>을 옮긴 김정아입니다.
꼼꼼한 비평 고맙습니다. 번역과 관련해 지적하신 부분을 설명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적어요.
먼저, moslem을 모즐럼으로 발음하면 아랍인에게 다른 뜻이 된다는 것은 몰랐던 부분입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모슬렘을 표준어로 지정하고 있어 무슬림을 무심코 모슬렘으로 고쳤는데, 앞으로 조심해야야겠네요. 덕분에 하나 배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한국‘이 우리 국호인 것은 맞지만, 저자는 국호를 사용하지 않고 남한, 북한으로만 표기했습니다. 또 South Korea를 대한민국, 한국으로 옮기려면, North Korea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옮겨야 하고요. 그래서 본문에서는 남한으로, 역주에서는 대한민국으로 표기했습니다.
고쳐야 할 부분이 있으면 또 지적해주세요.

베터라이프 2023-02-23 01:09   좋아요 3 | URL
우선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나라의 국호와 관련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국호의 영문 표기 Republic of Korea나 korea Republic이라고 나와야 한국 또는 대한민국이라고 쓰실 건지 궁금합니다. 저는 South Korea가 어쩔 수 없는 우리 영문 표기라면 북한과는 상관없이 한국이라고 해야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비록 한반도 이남의 분단된 국가라고 할지라도 국체에 대한 얼마간의 기본 개념이 있으니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한국이라 말하는 것처럼 사용하는 것이 맞지 않나 싶습니다. 사실 대만쪽이나 일본에서 어느 정도 멸칭으로 남한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요. 특히 일본 극우들이 계속 끈질기게 남한이라고 쓰는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의 정확한 국호를 쓰는 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

블루블루냥 2023-05-23 0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른 사회학 지정학 책에서는 대한민국/북한으로 표기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 책은 계속 ˝남한˝으로 표기하여 저도 좀 거북하였습니다. ˝무슬림˝이라고 하지 않고 ˝모슬렘˝이라고 한 것도 서구적관점에서 나온 단어같네요. 무엇보다도 경악했던 것이 페이지 291쪽에서˝두 나라는 일본해에 있는 섬들을 놓고 영토분쟁도 벌이는데 남한이 점거한 이곳에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저자가 ˝일본해˝라고 표기했더라도 마땅히 ˝동해˝라고 하는 것이 맞지 않나요? 보고 진짜 경악했습니다

베터라이프 2023-05-23 09:09   좋아요 1 | URL
원래 일반적인 역자라면 어느 정도는 기본적인 양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책에는 꽤 민감한 명칭들이 등장하는 관계로 최소한 국내 정서에 맞는 번역이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이건 국수주의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내용입니다. 더욱이 모슬렘이라는 단어는 각종 서구 SNS에서 이슬람인들에 대한 멸칭으로 쓰이고 있는데 이걸 사전에 검색도 안 해보고 그냥 썼다는 건 뭔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저는 번역이 그 사회와 요구하는 사회적 지식에 맞게끔 원서를 재탄생시키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에서 최소한의 기준을 맞추는 분이 번역 작업을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저의 허접한 공간에 오셔서 손수 댓글 남겨 주신거 감사합니다 ^^

블루블루냥 2023-05-23 1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야말로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미 보셨을 것 같지만 책 한 권 추천합니다. ‘러시아 지정학 아틀라스‘라는 책인데 양안전쟁의 러우전쟁판이라고 봐도 괜찮습니다. 주제 특성상 지도가 많이 나오는데 당연히! 대한민국/북한/동해로 번역(원저자는 프랑스인) 되어 있습니다. 러시아 중국 푸틴 시진핑은 정말...

베터라이프 2023-05-25 16:47   좋아요 0 | URL
추천해주신 책은 조만간 구해보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지식인의 책무
노암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 황소걸음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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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살아있는 양심이라 불리는 노엄 촘스키는 언어학, 철학, 인지 과학, 역사학, 사회정치학 등의 지속적인 관심을 통해, 오늘날 대표적인 공공 지식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1928년 유대인 이민자 부모의 아들로 태어나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학부는 물론 석,박사를 취득하게 됩니다. 이후 MIT에서의 대부분의 연구 활동을 비롯, 컬럼비아 대학,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 등에서 자신의 연구를 지속합니다. 촘스키가 단순히 해당 학문의 연구에 매진하는 평범한 학자였다면 그를 향한 '세계의 양심'이라는 수식어는 아마도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는 1962년에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에 반대하는 시위에 직접 참여했고, 1967년에 나온 소책자 '지식인의 책임'를 통해 대표적인 반체제 인사로 자리매김합니다. 특히 과거 그에 대한 네오콘들의 증오는 정말 상당한 것이었는데요. 그는 냉전 시기에 콜롬비아, 니카라과, 파나마 등지에서 있었던 CIA에 의한 '더러운 개입'을 폭로하고, 그러한 왜곡된 미국 정치와 자신들의 패권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열한 정치적 술수를 스스로의 목숨을 걸고 미국 사회에 가감 없이 알리기도 했습니다. 저는 쥘리앵 방다가 외쳤던 '지식인의 책임'과 관련해 이것의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례가 노엄 촘스키의 양심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촘스키는 현재 매우 고령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데요. 모쪼록 그가 오랫동안 우리 곁에 남아 있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Writers and Intellectual Responsibility"로 지난 1996년 출간 되었고, 국내에는 2005년 7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번역은 강주헌씨가 맡았습니다.

이 글의 도입부를 차지하고 있는 "지식인의 책무"와 관련해, 촘스키는 "도덕적 행위자로서 지식인이 갖는 책무는 '인간사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 문제'에 대한 진실을 '그 문제에 대해 뭔가를 해낼 수 있는 대중'에게 알리려고 노력하는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과거 17~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지식인이라는 함의를 기억한다면 소위 배운자들의 도덕적 의무는 엄중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뒤에 나오는 '뭔가를 해낼 수 있는 대중'이라는 수식어는 아마도 토크빌과 존 듀이가 강조한 실천적 시민에 대한 의미로도 읽히는데요. 과거 존 듀이가 귀스타브 르봉을 일독했는지 모르겠지만 듀이가 지속적으로 탐구한 '시민'과 '교육'에 대한 정체성은 실로 스스로에게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전자의 르 봉처럼 대중 다수에 대한 반쯤은 추정할 수밖에 없는 '가혹한 인식'을 뒤이어 등장하는 권력자들에게 좋지 않은 영감을 제공하고 말았다는 역사적 사실은 듀이와 비교될 만한 일화라고 여겨집니다. 이러한 논증 가운데, 촘스키는 지식인이 양심 뿐만 아니라 목숨을 걸고 알려야 하는 도덕의 사투와 관련되어 있는 사건으로 캄보디아와 동티모르에서 있었던 '민간인 학살'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크메르 루주의 잔혹한 학살이야 이미 밝혀진 일이지만 당시 클린턴 행정부에 의해 방조되어 인도네시아 군이 자행한 동티모르에서의 무고한 학살은 실로 국제 윤리와 최소한의 도덕성을 저버린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후에 코소보에서의 살육과 최소한의 도덕적 양심조차 구축된 처리 과정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미국과 인도네시아와의 중요한 정치 외교적 관계를 국익의 관점을 무시하고 일개 지식인이 이 학살 과정을 폭로하는 것이 온당한 일이냐에 대해 아마도 의심을 갖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그래서 그의 주장대로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실천하는 지식인에게는 무조건 이를 전할만한 '가치 있는 대중'이 중간의 매개로 필수 불가결한 요소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뒤이어 진술되는 2장은 흔히 애덤 스미스의 오독으로 비롯해, 더욱 체제 전반에 낱낱이 적용된 시장 자유주의에 대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 뿐만 아니라 도덕감정론의 저자임을 망각하고 지냅니다. 오히려 애덤 스미스를 시장 자유의 화신으로 꾸며 배타적 자본주의의 이익을 위해 오랫동안 그를 왜곡해 온 것은 거의 기정사실인데요. 더욱이 촘스키가 멜서스를 인용하며 입증하고자 하는 바는 경제적 합리주의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간접적으로 파괴하는지 밝히는 것에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과 돈을 향한 탐욕이 우리 공동체 의식을 파괴하고 있다"는 인식마저도 이러한 현실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인데요. 사실 지그문트 바우만과 마찬가지로 촘스키도 역시, 이런 시장주의가 우선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이익에 수렴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는 '참된 자유주의'라는 의미와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자유주의 혹은 신자유주의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재단되어 과거 전통적인 의미를 상실했다는 점도 분명합니다. 지배계급으로터 자유로울 권리, 권력의 종속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는 그만큼 현 시대에서 중요한 문제이며, 기존의 신자유주의가 일반적인 정치학 수준에서의 교리를 뛰어넘는 반론을 허용하지 않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는 점을 우리가 자각하고 있다면 모두의 이익을 위해, 원래의 자유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촘스키가 말하는 버틀란드 러셀과 존 듀이의 사상적 행적은 그만큼 많은 시민들이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겠죠. 이들이 전통적인 자유주의의 시대의 선구자임을 감안해 본다면 촘스키의 설득력은 그만큼 충분하다고 여겨집니다. 


3장은 로버트 커트너와 대니 로드릭의 민주주의에 관한 종래의 논증들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습니다. 그간의 미국 정부의 중요한 국제 무대에서의 원칙, 시장 자유와 민주주의를 전세계 각지에 이식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정치적 명분이자 세계 패권의 정당성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규모 기업과 은행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이익을 취하면서도 공공의 감시를 제대로 받지 않는 그림은 자본주의의 이행이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만했습니다. 이는 촘스키도 진술하듯, 시장에서의 광범위한 영리 활동을 지속해 나가는 기업들이 내부의 의사 결정이 민주적인 부분과는 동떨어진 채로, 거의 전체주의식의 상명하달의 위계는 마치 기본적인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적 이익 앞에서 충분히 제한될 수 있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 같기도 한데요.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가치가 평등과 모두의 이익이라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승자독식의 자본주의적 논리나 더 나아가 금융 자본주의의 이행으로 인한 더욱더 강화된 자본의 축적은 그야말로 배타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칠레의 피노체트의 사례를 고려해 봤을 때, 미국 정부가 과거 냉전 시기나 작금의 시기까지 신자유주의의 개혁을 남아메리카를 비롯, 여러 국가들에 밀어붙인 정치경제적 행위는 과거 영국이 자국의 시장을 위해 인도의 산업 전반을 항복시킨 것과 유사하다고 여겨지는데요. 또한 실상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권위주의 정부를 미국이 CIA를 동원하면서까지 지원한 역사적 과오는 그들이 말하는 '새로운 질서'와 매우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국부들 가운데 한 사람인 위대한 제임스 매디슨은 새로운 국가가 사적 재산권을 철저히 보호하고 지주들을 비롯한 부자들의 권리가 다수에 의해 침해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인 인물입니다. 재산권에 대한 위협이라는 매디슨의 사회에 대한 우려는 그동안 미국의 헌법을 통해 면밀히 계산되어 적용되어 왔습니다. 아마도 미국 시민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자유에 대한 함의는 이와 같은 맥락을 깔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사실상 기득권 보수주의에서 무엇보다 강조하는 '자유'는 그것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철저하게 계산되었다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부자들과 권력을 가진자들의 더 많은 자유는 아마도 '과두제'로 나아가는 여러 갈래길 중 하나가 될 겁니다. 이와 관련해 촘스키는 사법제도를 떠받들고 있는 판사들이 시장의 자율권을 위해 사법적 조치를 공공연하게 한 점을 끄집어 내고, 기존의 연방이 갖고 있는 권력이 각 주로 이행되는 과정에는 권력을 가진 기업이 연방 정부보다 주정부를 좀 더 수월히 다룰 수 있는 배경이 된다고 일침했습니다. 즉 이와 같은 진술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일견 보이는 대로 제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강박한 필요에 의해, 특히 기업 이익이라는 미명하에 정치 전반이 시장과 경제에 부역할 수밖에 없는 일종의 전례가 되었다고 판단됩니다. 이처럼 촘스키가 우려하고 있는 것은 결국 모두의 이익에 수렴하지 못하는 일종의 원리원칙과도 같은 견고한 시장주의와 그러한 철저하고 조직적인 이행이 전세계 민주주의에 있어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될지 경고하는 것으로 글은 사살상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시민 대다수가 스스로 삶을 견실하게 영위하지 못한 채, 경제적 삶이 위협 받고, 본래의 공익에 기반한 사회 체제가 승자독식의 침해할 수 없는 원리에 잠식당하여, 그 자체로 민주주의의 위기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직면해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3장의 마지막 논증인 '자유시장 보수주의'는 오늘날에도 충분히 읽힐만한 내용이었는데요. 촘스키 스스로의 주장에 대한 선명성은 이처럼 명료한 주제 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실망스러운 부분은 3장 후반부의 "일본은 점령군으로서 야만적 권력을 휘둘렀지만 서유럽국들과 달리 식민지들을 산업화시키고 발전시켰다."는 문장이었습니다. 본래 원문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촘스키의 저런 문장은 일본 내의 극우와 역사 수정주의자들에게 다분히 이용 당할 수도 있다고 여겨집니다.  


도덕적 행위자로 지식인이 갖는 책무는 ‘인간사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 문제‘에 대한 진실을 ‘그 문제에 대해 뭔가를 해낼 수 있는 대중‘에게 알리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존 퀸시 애덤스도 대통령에서 퇴임한 후 정직한 삶을 살면서 "우리가 불운한 아메리카 원주민을 무자비하고 잔혹하게 씨를 말려 버렸다"고 식민지 개척 과정을 설명했다.

반세기 전, 조지 오웰은 ‘동물농장‘의 서문을 자유롭고 민주적인 영국에 헌정하면서, 결과에 도달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결과는 자유로운 국가에서나 전체주의 국가에서 다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토머스 제퍼슨이 억누르지 않으면 전체주의적 형태를 띠어 미래의 민주주의혁명을 파괴할 것이라 예언하며 말년에 그 위험성을 경고했던 ‘은행ㅇ과 돈 많은 기업들‘은 그후 목표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은행과 기업들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민중의 간섭과 공공의 감시에서 벗어나 세계 질서를 지배하는 힘을 확대해나갔다.

국가 권력은 민주 사회에서 더 심각한 공격을 받고 있지만 국가 권력이 자유주의적 비전과 충돌하기 때문은 아니다.

하지만 권력에의 종속이 강요되지 않는 사회, 즉 자유의지에 따라 권력에 순종하는 자유로운 사회에서 ‘반미‘와 같은 개념들이 사용된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넘길 현상이 아니다.

독자적으로 보유한 재산도 없고 노동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사람은 ‘한 줌의 음식도 요구할 권리가 없고, 현재 몸담은 곳에 있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고 멜서스는 주장했다.

경제의 합리주의가 체계화되어 강요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중적인 면을 띠었다. 약한 사람들에게는 시장법칙이 가차없이 적용 되었고, 필요할 때마다 부자와 특권계급을 보호하려는 정부의 개입이 있었다.

과거에 항상 그랬듯이 우리는 제퍼슨적 의미에서 민주주의자의 길을 택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귀족정치주의자의 길을 택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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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02-03 22: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지난번 지그문트 바우만의 책을 찾아 읽고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쉽게도 몇 군데 글에 인용만 하고 독후감은 쓰지 못했는데 확실히 저에게는
소장할 책이더군요. 이 책도 얼마전에 뜨길래 궁금했는데 역시 읽어야겠습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을 사는 사람으로서 ‘지식인의 책무‘에 대해 늘 아쉬움과 의문 투성이었는데
(한국사회에서 그 목소리가 부재한 것 같아)‘가치 있는 대중‘이 필수적이라니 그도 그럴법 하네요.
앎이 짧은, 그러나 어렴풋이 알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 분야를 베터라이프님 이렇듯 글로 잘 풀어내 주시니 길잡이가 되어주시는 것 같아 감사합니다^^*

베터라이프 2023-02-03 23:21   좋아요 2 | URL
촘스키의 비판적 화두인 ‘승자독식‘과 그에 따른 공익의 쇠퇴는 바우만도 오랫동안 동의했던 부분이죠. 그리고 바우만 역시 다독을 바탕으로 주장에 대한 많은 인용이 특징인 학자이죠. 아마 자본주의의 본질을 그만큼 꿰뚫어 본 사람은 드물지 않나 싶습니다.

도덕적 책무에 따라 진실을 말하는 지식인에게는 그것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대중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촘스키의 대략적인 주장입니다. 이 대중을 시민으로 치환하더도 민주주의에서 얼마나 스스로를 위한 교육과 깊은 사색이 바탕이 된 겸허한 사람들이 정치의 바탕이 되어야 함은 자명한데요. 물론 이 부분도 매우 어려운 현실입니다.

사실 시장의 자유라든지 그러한 맥락의 자본주의가 우리 사회를 좌지우지 하면서 정치가 불신의 단계에 이르게 되었는데요. 이러한 시스템이 1980년대 이후 꾸준히 악화되어 왔고 이제는 극단주의 정치를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서평에 다 담지 못한 부분 중에 촘스키가 기득권을 쥔 권력에 대한 본질을 논하면서 지배 권력 자체가 좌와 우를 논하는 것이 거의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밝히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정부의 본질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역시 미미님의 여러 글을 보면서 좋은 자극이 되기도 합니다. 새삼 북플에는 내공이 상당한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모두가 이렇게 책으로 엮이고 말았으니 아마도 쉽게 헤어나기란 어려울 것 같습니다 ^^; 끝으로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댈러웨이 부인 - 기획 29주년 기념 특별 한정판 버지니아 울프 전집 5
버지니어 울프 지음, 정명희 옮김 / 솔출판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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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는 1882년 런던 사우스 켄싱턴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지원에 힘입어 1900년 경에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9살 경에 성추행을 당한 경험이 있던 울프에게 많은 여성들과 낭만적인 관계를 맺으며 교류하고, 또한 사회에서 여성들이 처한 상황에 관심을 갖기도 했는데요. 그녀는 작금의 많은 여성주의 운동가들로부터 '여성주의 작가'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연유에, 어느 정도는 수긍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당대 명망있는 사람들을 모아 만든 블룸스버리 그룹이 당시 영국 문학에 끼친 영향이 결코 적지 않은 부분이 울프의 문학적 기여와 더불어, 이 점이 오늘날 그녀가 크게 존중 받는 이유이기도 할 텐데요. 그런 울프와 유사하게 손수 자유주의 (혹은 자유지상주의) 그룹을 만든 에인 랜드가 오늘날 네오콘을 비롯한 보수주의 정치가들에게 숭배를 받는 것은 어떻게 보면 시대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성계를 선도한 소수의 여성이 있었다는 산증거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제가 에인 랜드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습니다만.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울프는 우리에게 너무나 유명한 '의식의 흐름'이라는 서사적 기법으로 명성을 쌓았습니다. 현재의 이 의식의 흐름은 간혹 난삽한 서술로 이해되기도 합니다만 사실 이 댈러웨이라는 작품도 그렇지만, 서술 상의 논리나 근거가 뒷받침되고 극 전반을 일관되게 끌고 나가는 것이 먼저 전제 되어야 하는 게 기본적인 법칙입니다. 이는 마구잡이식 서사가 부여된 글쓰기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로 이런 큰 명성에도 불구하고 생애 말에 심각한 정신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는 점은 버지니아 울프라는 개인에게 있어서 매우 불행한 일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그 와중에 직접 경험한 세계 제2차 대전의 아비규환과 지인들의 불행은 그녀를 삶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럼에도 20세기가 낳은 가장 중요한 작가들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울프의 여러 작품들은 시대를 관통하는 아픔의 주제와 그런 맥락들이 우리 사회를 좀 더 나아가게끔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1925년 처음 출간되었고, 뒤에 역자가 밝히는 대로 1965년판의 원서를 기반으로 1992년의 Macmillan 판의 주석을 참조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번역본의 출간은 2019년 5월에 이루어졌습니다.


이미 모두가 책 제목으로 인지하고 있다시피 이 소설의 주된 인물이자 주인공은 댈러웨이 부인 즉, 클러리서 댈러웨이입니다. 댈러웨이 부인을 중심으로 그녀와 관계된 인물들의 풍부한 서사와 관계 전반의 관련성을 답보하면서 극의 중요 축인 참전 용사인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의 죽음이 연관되어 진행됩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역자의 주를 통해 알게 된 영국 귀족 부유층의 파티가 안주인의 전유물이 될 수밖에 없고, 반대로 중요한 바깥 일을 남자들이 주도하는 사회에서 여성들의 활동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 극 전반에서 강조되고 있었습니다. 물론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클러리서가 간여한 댈러웨이 가家의 파티에서 영국 수상을 맞이하는 장면을 보노라면 자신의 신분에 대한 만족감과 이들 소수의 계급이 서로를 충족시켜 주는 속물적 욕구가 거의 극대화 되고 있었는데요. 약간 미심쩍었지만 이 델러웨이 부인에 대한 이 속물적 근성이 극 후반부에서야 드러나는 부분은 서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졌습니다. 더불어, 극의 전환점으로 '돌아온 탕아'라고 볼 수 있는 피터 월쉬와 그녀와의 지난 관계를 약간 애매하게 묘사하는 가운데, 그녀가 남편인 리처드 댈러웨이와의 결혼 생활에 대체로 만족하고 행복해 하고 있다는 서술은 그것이 비록 서사에서 약간의 반전이라 할지라도 '여성의 제한적인 활동'과 이어지는 시대의 한계에 잘 맞물려 인식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울프가 언급하고 있는 영국 제국주의로서의 셰익스피어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 역시 그러한 모순에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한 손의 칼과 다른 한 손에 셰익스피어의 책을 들고 제국주의적 침략을 실현한 이런 영국의 이중적인 태도는 버지니아 울프도 피해가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1900년대의 영국 런던의 곳곳을 사진으로 생생히 보여주는 듯한 작가의 세심한 묘사는 인물의 서사와 맞닿아, 독자들이 당시 시대상을 충분히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 또한 문화적 금기라든지 영국 특유의 귀족 문화에 대해 마치 궁정 소설처럼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었는데요. 그리고 당시 영국 제국주의적 영향을 받은 소수 부유층의 문화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고, 이들과 같은 부유층의 문화가 대체로 각각의 '교양'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점은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컸습니다. 이는 극 초반에 사람에 대한 통찰력을 갖고 있다고 읽히는 댈러웨이 부인이 나이 오십이 넘어서도 스스로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는 부분은 뭔가 역설적이게 느껴졌는데요. 평범하지만 솔직한 남편 리처드와의 결혼 생활이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뿌연 안개에 있는 것처럼 모호하게 그려지고, 그녀와 피터 월쉬와의 과거 얽혔던 감정들이 현재 리처드와의 결혼 생활과 상반된 관점으로 보이기도 하는데요. 더욱이 남편인 리처드와 피터가 절친이라는 점에서 후반부에 어떤 반전이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측해 보기도 했는데요. 무엇보다 여성들과 관계를 맺는 걸 좋아하는 월쉬에게 일반적인 교양과는 아주 거리가 있어 보이는'주머니 칼'을 장난감처럼 만지작 거리는 버릇은 마치 댈러웨이 부인 스스로가 '성性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자신의 결혼 생활과 동시에 부부간의 열정이 전무한 이들 부부의 상황과 묘하게 배치되기까지 합니다. 이처럼 다소간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피터 월쉬에와 과거 댈러웨이 부인이 (이에 대한 서사가 다소 부족함에도) 젊은 날의 열정으로 얽힌 기억은 그녀의 절친한 친구이자 중요한 인물로 그려지는 샐리 시튼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샐리는 클러리서의 잘 드러나지 않는 속물적 면모를 일찍이 간파하고, 월쉬와 클러리서의 관계가 진정으로 귀결되지는 않을 것임을 예측한 바가 있는데요. 또한 지금 언급한 샐리 시튼과 뒤이어 등장하는 도리스 킬먼은 그 시대에 소수의 여자들만 갖고 있었다는 학위 소유자로서, 킬먼이 클러리서의 딸 엘리자베스와 얽히면서 단순히 그녀에 대한 댈러웨이 부인의 못마땅한 심정을 넘어, 귀부인인 댈러웨이 부인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요소로 깊이 작용하게 됩니다.

또 다른 서사의 주인공인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는 치열한 전쟁터에서 자신과 밀접하게 가까웠던 에반스가 이탈리아에서 희생을 당하자 삶의 의미를 거의 상실하고, 거의 충동적으로 자신의 아내인 루크레이지아에게 청혼을 하게 됩니다. 그의 아내인 레지아는 자신의 남편을 전쟁 영웅으로 이해하고 있고 무엇보다 좋은 사람임을 의심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심각한 전쟁 후유증을 보이고 있는 셉티머스에게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현재의 삶이 스스로에게 전혀 의미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불행한 일이리고 볼 수 있을 텐데요. 어쩌면 반쯤 도피처로 택한 이 결혼 생활과 자신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등장하여 괴롭히는 상사인 에반스의 환영은 당시의 의사들조차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온전한 삶을 위한 투쟁은 그가 싸웠던 치열한 전쟁에서 만큼이나 중요한 과업이라고 볼 수 있지만, 여실히 그러한 투쟁심을 그 전쟁 한 가운데서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점에서 비극으로 치닫는 극적인 캐릭터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것이 영국 제국주의를 위해 전장에서 싸웠던 간에 아니면 개인의 사명감을 위해 싸웠던 간에 예나 지금이나 희생된 젊은이들에 대한 저만치 떨어져 있는 사람들의 감상은 크게 의미가 없어 보였는데요. 영국의 성세를 포장하는 듯한 퍼레이드만이 댈러웨이 부인을 비롯한 많은 영국인들에게 얄팍한 의미로 자리매김하는 모습은 그것 자체로 모순으로 읽힙니다. 이처럼 임박한 그의 죽음과 부유층의 안사람이 주도하는 파티가 극단적인 삶과 죽음이라는 매개로 연결되고, 더 나아가 파티에서 극적으로 극화되기에 이릅니다. 울프의 이 작품이 보여주는 씁쓸한 뒷맛은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데요. 여기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과 댈러웨이 부인을 포함해, 각자가 자신의 삶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은 부수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이는 앞서 언급한 도리스 킬먼을 통해 현실의 문제가 제대로 드러난다고 여겨지는데요. 도리스 킬먼의 억눌린 자의식은 어쩌면 그 시대를 살아가는 깊은 감수성의 여성들을 대변하면서 노골적인 계급주의에 대한 폭로일지도 모른다고 여겨졌습니다.

끝으로 댈러웨이 부인이 오십 줄이 넘어서 느끼는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이 죽음의 실체라는 공포에 직면하여 진정으로 어떤 깨달음의 체화가 되었는지는 불명확합니다. 그럼에도 당시 상류층이 주도하는 영국 사회의 일면과 이들이 사회 전반에서 괴리 되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데요. 물론 개인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필요한 신중한 결혼이 주인공인 클러리서와 피터의 '한때의 얽힘'을 통해 극명하게 대비되기도 합니다만 높은 교육을 통해 시대를 극복하고자 하는 여성이 현실의 가혹한 경제적 궁핍에서 좌절 당하고, 오히려 사랑과 열정이 크게 작용하지 않은 결혼을 선택한 주인공을 극의 중심으로 삼아, 이러한 경제적 선택이 여성의 삶을 어떻게 좌우하는지 울프는 이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문화적 금기에 별로 개의치 않고 진정한 탕아 기질을 갖고 있는 월쉬와 대체로 상반된 지점에 놓여 있는 리처드 댈러웨이와의 극명한 대비는 '얄팍한 교양의 부유층 부인'의 악어 눈물 만큼의 회한을 중심으로 맞물려, 그 서사는 꽤 치밀하여 어느 정도는 논리적 설득력과 소설적 과장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각 인물 간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묘사는 꽤 흥미진진하기도 했는데요. 전체적으로 왜 이 작품이 울프의 대표적 소설로 자리매김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왜 우리가 삶을 그렇게 사랑하는지, 왜 삶을 그렇게 보는지, 구성하고, 하나를 중심으로 쌓아 올리고, 무너뜨리고 그리고 매순간 새롭게 삶을 창조하는지 말이야.

만약에 늙은 아일랜드 여인의 충성심을 위축시키는 순경의 눈을 보지만 않았더라면, 맥주 한 단지 값어치의 장미 다발을 세인트 제임스 거리로 던졌으리라.

바로 그날 밤 파티를 여는 여인의 가냘퍼 보이는 핑크빛 도는 얼굴이 보였다. 클러리서 댈러웨이, 그녀 자신의 모습이었다.

지금 그들은 육체적 쾌락이나 나날의 삶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핀즈베리 보도에서 텅 빈 무덤에 이르기까지 들고 가는 화환 때문에 엄숙한 모습이었다.

위안, 구원을 향한 열망, 이 불행한 난쟁이 같은 존재 밖에 어떤 것, 이 연약하고 추하고, 비겁한 남자 여자들 밖 너머에 무엇인가에 대한 열망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클러리서의 친구들, 친분이 오래된 모든 패거리들 -휘트브레드, 킨덜리, 컨닝햄, 킨로크존스 가족들 - 중 아마도 샐리가 최고였다.

이제 그녀는 지배와 권세를 누리려 그렇게 번득이는 남편의 눈에 켜진 열망을 재빨리 만족시키느라 속박하고, 강압하고,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고, 도려냈으며, 주춤거리다, 몰래 엿보곤 했다.

그것들이 무엇보다도 좋은 혈통을 갖지 못해ㅐ 생긴 이런 비사회적인 충동들을 저 아래 서레이에서 억제하는 것을 맡으리라고 그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브래드쇼 부부가 그녀의 파티에 와서 죽음에 대해서 얘기하는 이유가 뭐람? 한 젊은 청년이 자살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녀의 파티에 와서 그 얘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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