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투표한다, 그러므로 사고한다 1881 함께 읽는 교양 12
장 폴 주아리 지음, 이보경 옮김 / 함께읽는책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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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프랑스의 대선을 앞두고 출간된 책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필가인 장 폴 주아리의 작품입니다. 저자인 주아리는 현재 고등학교 입시반의 교사로 재직중이면서 국립 상업 학교의 교수 직함을 갖고 있는 조금 색다른 이력의 소유자입니다.

이 책에서는 민주주의의 간략한 역사와 기원에 대한 정치적, 철학적 해석을 담았습니다. 글은 전체적으로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주장과 서술이 비교적 평이하게 되어있더군요. 추측하기로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이 민주주의의 원리에 대해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쓴 글 같습니다만, 한국에 번역 출간된 2012년에 한국어판 서문에 학생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도움이 될만한 글이 되었으면 하는 저자의 바람이 담겨져 있는 만큼 시민이라면 누구나 읽어볼만한 꽤 스펙트럼이 넓은 글이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서문에서 저의 눈길을 절로 끄는 문장이 있습니다. ‘투표를 하는 나라에서 시민 개인은 사유하고, 토론하고, 읽고, 분석할 의무가 있다.‘는 주장입니다. 참으로 적극적인 공감이 들었습니다. 저자가 뒤에서도 언급하지만 대의 민주주의 하에서 국민이 투표로 당선된 자에게 절대 권력을 주었느냐는 물음과 더불어 그리고 정치의 유일한 진리는 시민이라는 명제에도 중요하게 받아들여질만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보다 더 격하게 공감하는 것은 투표로 끝나서는 안되며 일상 생활에서 충분히 사고와 성찰하고 책을 놓지 않고, 토론하고 비판하고 분석하는 태도를 유지해야 그런 국민들이 모여 정치를 비판하고 정치가를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일겁니다.

이 책에서 인용된 한나 아렌트의 ˝개인은 자신의 일상 속에서 공동을 위한 것을 강력하게 요구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 누구도 그에 대해 조금의 관심을 갖지 않는다.˝ 는 주장을 바탕으로 민주주의 하에 정치를 좀 더 개선시키는데에 개인 즉, 시민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정치 불신과 정치 혐오는 수많은 정치 철학자들이 말한대로 민주주의를 병들게 하고 그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삶 또한 똑같이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정치의 본디 목적은 개인의 자유와 행복추구이며, 고도화된 생산 수단과 더불어 복잡해진 사회적 양태성으로 말미암아 인간과 인간의 불평등은 심화 되었지만 본디 그것은 인간이 만든 인공적 결과물이라는 판단을 저자는 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해석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부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임마누엘 칸트, 장 자크 루소, 데이비드 흄, 한나 아렌트 등의 사상을 인용하면서 본래의 민주주의적 가치로부터 개개인에게 본질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즉, 고래의 역사로부터 같은 인간을 지배해왔던 계급주의적 속성의 권력관으로 이어지는 민주주의 제도하의 정치적 통치 행위에 대한 물음과 정치적 지배, 경제적 지배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 등에도 깊이 생각할 만한 것들을 도리어 던지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플라톤의 국민이 이성에 따라 교육을 받는 이러한 모델이 현실화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국민이 정치적, 시민적 권리와 의무를 가진 의식있는 지식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고대 이론의 낡은 방식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때와는 달리 현재의 우리가 영유하고 있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는 일종의 자본과 기술의 발달 혜택으로 각종 지식과 정보가 손쉬운 형태로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고, 꼭 시민 개개인이 고도화되고 고차원적인 지식 습득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자신 개인의 삶을 통해서 충분히 지식을 내면화하고 성찰해 이를 통해 각자가 건강한 민주주의에 보탬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러한 확장된 결론을 내린것과 같이 주아리의 이 글은 한명 한명의 독자가 좀 더 민주주의의 원리에 가까이 다가서고 여기에 인용된 많은 철학과 정치를 해석해 나름의 민주주의적 정치에 대한 결론을 내리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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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편이들의 상식 - 오늘의 중국을 이해하는 75개의 단상
량원다오 지음, 김태성 옮김 / 에버리치홀딩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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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명문인 중문대학을 졸업하고 홍콩의 이름난 신문인 신보와 명보에 칼럼을 쓰기 시작하며 젊은 나이에 홍콩 평론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량원다오는 소위 대륙인들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중국과 중국문화, 중국인들에 대해 ‘상식 추구‘를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 이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는 취지로 서문에 이를 밝히고 있습니다. 원제는 Common Sense로 토마스 페인의 명저 ‘상식‘에서 빗대어 온 것으로 보입니다. 글을 다 읽고 나서 생각해보니 근래 중국에서 벌어진 현상에 상식적인 접근과 해석을 하고 더불어 그것을 바탕으로 중국인 독자들에게 일종의 의식의 전환을 촉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저와 같은 중국인이 아닌 외국인에게도 읽어볼 만한 주제가 적지 않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책 전체는 여러 소주제가 각기 하나의 큰 주제를 형성하는 칼럼집의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서구의 중국 침탈이라 정의 되는 아편전쟁의 극복 문제라든지 멜라민 우유 파동과 같은 중국산 제품에 대한 문제, 서구 사회가 제기하는 중국 내의 인권 문제, 쓰촨성 지진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재해 대책, 중국인들의 민주주의적 여론에 대한 정부의 통제 등에 관한 것들인데요. 이런 주제들은 불행하게도 중국 내에서 활동하는 지식인이 다루기가 상당히 어려운 것들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홍콩과 대만에 적지 않은 연고를 갖고 있는 저자가 이렇듯 자신의 생각을 글로 출판한 배경이 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저자의 여러 글 중에 꽤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는데요. 과거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두고 일본 내의 극우 세력의 발현은 일본 국민들에게 2차대전 전후 체제에 대한 왜곡된 역사인식을 심어줄 수 있고, 일본의 평화헌법 개정을 위한 선례 조치로 그동안 고이즈미 총리가 매번 참배를 빼놓지 않았다는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인과 일본인, 그리고 전세계 주류 매체들이 일본의 군국주의를 나치 독일과 같은 반인류적 죄악으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에 욱일승천기와 같은 일본 군국주의의 잔재가 요 근래에도 나타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에서 일본 군대의 만행은 전쟁 기간에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폭력이 확대된 정도로 평가하고 있다고 바라보고 있는데요. 이것은 얼마간은 수긍할 만하지만 저자의 이 주장이 전부 옳다고는 받아들일 수는 없었습니다. 뒤이어 미국의 조치로 일본 천황제를 유지하고 얼마간의 전쟁 범죄자들을 단죄하는 것으로 끝나 당시에 일본 제국주의에 몸담었던 수많은 일본인들에게 면죄권을 준 것과 다름없다는 해설도 있기는 합니다. 다만, 유럽 곳곳의 학계나 언론들이 난징 대학살과 같은 것을 다루고 있고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연구도 많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일본 군대의 폭력 정도로 해석한다는 식의 판단은 너무 범위를 좁힌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자의 애매한 이 부분의 해석을 제외하면 대체로 중국의 현실에 대한 비판이 잘 나와 있습니다. 중국 내부에 출현하고 있는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도 가감없이 하고 있고요. 베이징 올림픽과 관련된 프랑스에서의 성화 봉송 불능 사태에 관련해서도 전체 프랑스인을 매도했던 상황에 비판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 우리 나라에서 벌인 중국 유학생들의 폭력 시위에 대한 해석에 한국이 당시의 중국 유학생들이 벌인 행동을 간혹 중국인들 전체의 양식이라고 해석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요. 한국이나 일본도 그렇게 확대해석을 한다는 식으로 언급하는 것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습니다.

저자가 말한대로 현대 민족주의의 가장 큰 특징이 국가 범위의 능력을 무한대로 확장하는 것이라면 지금 현재의 중국 내부의 민족주의적 발현은 그만큼 위험하다는 것을 저자 스스로도 인식하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책 서두에서 동남아 국가들이 이 중국위협론에 대해 우려 섞인 시선을 갖고 있는 상황에 중국인들 스스로 이것을 오해로만 치부하지 말고 그에 상응하는 실질적인 제스처가 있어야만 하겠죠. 더욱이 동남아의 여러 국가들이 그로 인해 안보를 미국에 더 의지하는 것을 무작정 비난하는 것은 자신들이 얼마나 무지한지 증명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요즘들어 계속 접하게 되는 중국내 지식인들의 주장은 제법 우려될 만합니다. 전세계에서 미국 다음의 경제력을 보유했으니 그것에 걸맞는 대접을 받고 싶은 것을 대놓고 드러내는 것이 세계적 안정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는 판단하기 힘듭니다. 더욱이 저자가 ‘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춰야 할 심리적 준비는 남들이 자신을 두려워하게 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 이라고 했듯이 이처럼 주변 국가들이 불안하고 두려운 시선을 중국에게 보내고 있다면 그것에 대한 적당한 대처가 필요한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고 있죠. 미국과 유럽이 내비치고 있는 중국위협론은 단순히 미국과 유럽이 만든 세계 체제에 대한 중국의 불만이 아니라 근래 중국이 주변에서 벌이고 있는 남중국해의 불법적인 진출과 인도와의 국경 갈등, 전세계에서 가장 우발적 충돌 가능성이 높다는 댜오위다오/센카쿠 문제 등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이 이렇게 다분히 벌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통해 이웃의 가까운 나라인 중국에 대한 여러 문화적 정치적 상황에 대한 객관적 묘사는 충분히 중국에 대한 인식에 도움이 될 만하다 생각합니다. 단기간에 경제가 발전하고 세계에 주목을 받을만한 산업 국가로 발돋움하면서 그로인해 겪게 되는 사회 경제적 문제에 대한 지식인으로서의 비판은 참고할 만합니다. 끝으로 상식이 통하는 시민사회를 꿈꾼다는 저자의 주장은 현재 우리 나라에도 시급히 요청될 만한 주제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의 비판은 바로 중국 사회와 정치가 상식적인 수준의 건강한 사회를 이루고 싶은 바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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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과 중국을 움직이는 브레인
샹장위 지음, 박영인 옮김, 지해범 감수 / 린(LINN)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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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미국과 유럽의 ‘중국위협론‘에 대한 글들을 접하면서 문득 시진핑 주석에 대한 좀 더 깊은 독해가 필요하다고 스스로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마땅한 글을 물색하던 중에 중국의 제법 유명한 언론인인 샹장위가 쓴 이 책을 먼저 잡게 되었네요.

아시다시피 시진팡 주석에 대한 글은 많이 출판이 되었는데요. 저는 그의 개인사적 측면 뿐만 아니라 중국 내부의 정치 문제에 관한 다각적인 부분에서 따로 나뉘지 않은 시진핑의 개인사와 그의 정치 이력 및 그에 바탕을 둔 전체적인 중국 정치의 분석을 다룬 글을 찾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샹장위의 이 책은 제 마음에 들었는데요. 전체 분량은 480페이지가 넘지만 번역도 나름 잘 되어 있어서 정말 시간 가는줄도 모르고 읽었던 것 같습니다.

후진타오 주석의 다음 주자로 확정되어 중국 공산당과 중국 정부의 정점에 오른 시진핑의 그러한 승계 과정은 익히 알려진 바대로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전략적 거래로 이뤄진 일종의 합의적 성격이 컸습니다. 후진타오는 리커창을 그 자리에 올리고 싶었지만 태자당과 상하이방의 치열한 권력투쟁이 내포할 문제를 수면 아래로 정리하기 위해 이 노회한 두 과거 정치가들이 합의를 했다고 봐야겠죠. 물론 시진핑 개인이 아버지 시중쉰의 후광에도 불구하고 젊은 시절의 시련과 시험을 잘 견뎌내어 현재의 외유내강의 정치적 자산을 바탕으로 중국 공산당과 고위층의 인사들에게 높은 점수를 받은 것이 이러한 성공의 요인일 것입니다.

그러한 시진핑의 중국과 관련해 저자인 샹장위는 중국 내부의 빈부격차, 도농격차, 지도층의 부패 문제는 매우 심각해서 중국의 당국은 그것을 무마시키려고 경제발전에 올인해 왔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부 분위기의 독기를 빼내기 위해 민족주의적 발현을 당국이 조장하며 미국과 일본과의 산발적 분쟁을 이용하기도 하였으나 이러한 내부 갈등이 중국의 정치 안정에 크나큰 장애로 대두될 것임을 예측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를 ‘중국 사회는 이미 갈가리 찢어졌다.‘ 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시진핑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그가 앞으로 민족주의 노선을 걸을이 아니면 세계 모든 민족을 평등하게 대하는 보편주의적 가치관을 내새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 책의 뒷부분에서 논의한 시진핑과 중국 군부의 관계 뿐만 아니라 당과 군의 이해 관계들을 놓고 봤을 때 간혹 군부와 당의 강경파의 목소리에 중국의 노선이 크게 흔들릴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지난 2009년 시진핑은 멕시코에서 화교들을 만난 자리에서 중국은 혁명을 수출하지도 않고 기아와 가난을 수출하지도 않으며 국제 사회를 괴롭히지도 않는데 배부른 소수의 외국인들이 중국 내부의 일에 간섭하는 것은 문제라고 발언하자 중국과 해외에서 큰 반응이 일어 났습니다. 이제 세계는 경제 성장과 인권이 반비례하는 소위 베이징 모델이 세계 평화와 민주주의 발전에 저해 요인이라고 평가하며 한동안 건드리지 않았던 중국의 인권 문제에 다시금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더불어 세계2위의 경제를 바탕으로 주변국과의 영토 분쟁과 군사력 투사를 거리낌없이 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 시진핑이 이끄는 중국이 어떤 식의 노선을 걸을지 주의깊게 지켜봐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앞으로 중국과의 대외 관계에서는 대만이 포함된 양안관계에서 과연 미국이 중국의 강제적 무력 통일 기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는 문제와 센카쿠/댜오위다오에서의 중일간 충돌 가능성이 이 지역 뿐만 아니라 전세계 평화와 관련하여 주시해야 될 부분으로 남았습니다. 과거 재차 중국은 평화로운 부상을 원한다고 했던 시진핑의 호언장담이 중국 내부의 문제와 군내의 강경파들을 관리하는 과정에 달려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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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지성의 정치경제 (반양장) - 네트워크 사회를 움직이는 힘
조화순 외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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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대중의 집단지성에 대해 약간의 의문과 궁금증을 갖고 있는 저로서는 이 책을 접하게 된 것에 대해 뭔가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일련의 학자들의 공동 연구인 이 글에 약간의 흥분된 기분으로 천천히 일독을 했습니다.

˝어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며, 모든 사람이 어떤 한 가지는 알고 있다˝는 문구는 요즘 인터넷으로 연결된 네트워크 상에 서 크게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위키 백과 류의 공개되고 비차별적이고 실시간 피드백이 이뤄지는 정보 바다에 대한 아주 적합한 표현이라고 여겨집니다. 과거의 지식의 생산과 공유가 대학을 비롯한 소위 전문가 집단에 의해 이뤄졌다면 요즘의 지식 정보의 생산 및 소비 체계는 손쉽고 이해하기 쉬운 방법의 이러한 온라인 상의 가벼운 지식들이 어느새 무시못할 주류가 되었죠.

일개 개인의 지식이나 지성 수준을 뛰어넘어 이처럼 만인이 모여서 지식을 모아 데이터화 하는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어떤 평가나 어떤 예측을 하는지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된 인류의 지식의 역사에서 그것을 창출하고 생산하는 주체는 거의 공인된 학자들과 전문가들 계층 내지는 소수의 독점 지식 계층이었죠. 이제 인터넷이 만들어 놓은 숨가쁜 변화에 패러다임이 완전 바뀌어 차별적이고 비접근적인 지식들의 시대에서 이제는 누구나 손쉽게 접하는 가벼운 지식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봐야겠죠.

여기에 모인 저자들의 의견은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막을 수 없는 것으로 보는 듯 했습니다. 기업 문화 마저도 과거의 폐쇄된 연구 개발 및 독점적 연구 지식의 추구였다면 이제는 오픈 소스와 같은 체계에서 바깥 범주에 있는 사람들에게세 아이디어를 제공 받고 그것을 바탕으로 제품과 컨텐츠를 생산하는 획기적 시기입니다. 획기적이라는 것은 이제 좀 더 나은 기업 발전과 생산력 개선을 위해 여기저기의 기발한 생각들을 차용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겠죠. 여기에 제기된 글들도 이러한 변화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창의적인 측면에서 편협하지 않은 환경에의 추구는 바람직할 만합니다. 많은 기업들에서 조차 궁극적인 가치 목표는 반대급부의 재화가 아니라 창의력을 확장할 수 있는 그러한 가치 확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요. 바로 이러한 것들의 근본에는 집단 지성이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저는 이런 집단 지성에 대해 생각하는 바를 밝히고 싶은데요. 기존의 상아탑이나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소수 계층에서 생산했던 지식들이 현재 도래하고 있는 집단 지성 시대에서도 충분히 그 전문성을 인정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여기의 저자들도 주장했듯이 인문과학을 전공한 학자들의 그 폐쇄성으로 말미암아 권위적인 측면에서 반대에 있는 집단 지성의 존재를 인정하기란 그들에게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외교학이라든지 법학이라든지 전문적인 지식의 생산이 인간 사회와 국가에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기에 이것들을 완전히 도태시켜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집단 지성의 시대에는 우려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이는 과거의 역사를 통해 인지할 수 있는 부분인데요. 특히 세계 2차대전 당시에 나치즘과 파시즘으로 비롯되는 전체주의의 파도의 바탕에는 무분별하고 무책임한 대중들과 그 사고방식이 히틀러나 무솔리니 만큼 유럽에 해악을 끼친 점입니다. 오도된 대중은 다른 죄없는 사람들을 아무런 이유없이 희생시키는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을 이루는 개개인들이 진지하고 명확한 자기 성찰이 없이는 앞으로 집단 지성의 시대에 어두운 면을 막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일종의 선택적 노출과 비슷한 부분일텐데요. 우리가 원하는대로 믿어 의심치 않는 일데 반대하는 사람들을 눈에 거슬리고 불쾌하게 느끼기 마련인데, 이것을 더 확장시켜 누군가가 이러한 범주를 재설정하고 그 범주의 바깥에 있는 대상을 공격하기 위해 집단내의 구성원을 집결시킨 경우, 집단 지성은 반지성으로 돌별한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자체적인 정화 수단이 전무하다면 이렇게 권력화한 집단 지성은 반지성으로 왜곡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시민들이 바탕이 된 집단 지성은 한 국가의 민주주의 건실한 발전에 이바지 할 가능성은 클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떠한 국가 권력이라도 그것을 주제로 삼고 토론하고 평가하고 비판하는 시대에는 오도된 권력을 견제하고 책임을 묻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을것입니다. 더욱이 우리 한국인들을 그러한 경험을 이미 해보지 않았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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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의 희생양 - 테러와의 전쟁에서 증오범죄와 국가범죄 카이로스총서 22
마이클 웰치 지음, 박진우 옮김 / 갈무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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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마이클 웰치는 비판범죄학자이자 사회학자이며, 과거 런던대학 경제학부의 인권 연구소 연구 교수를 역임한 미국내에 유명한 사회학자이자 형사법연구 교정법 연구 분야의 권위자입니다. 더욱이 최근에는 미 행정부와 테러리즘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9.11 테러 이후 미국 정부가 받아들이고 해석한 테러리즘에 대한 연구로 보입니다. 이 책도 이 점과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고, 그동안 미국의 건전한 토양이었던 시민권과 시민의식 등 발전된 민주주의의 가치가 무차별적인 테러리즘을 방비하겠다는 명목으로 제한되고 희생된 상태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자세가 미국의 현재를 살고 있는 지식인이라면 응당 해야되는 부분이겠죠.

2001년 9월 11일 뉴욕에 자행된 테러로 인해 당시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에는 탈레반이 알 카에다와 면밀히 협력했다는 이유와 이라크에는 생화확 무기와 핵무기 개발 의혹을 잣대 삼아 전면적인 개입 전쟁을 시작하게 됩니다. 지금에서야 이라크에 대한 주장은 대부분 허위로 드러났지만 부시 대통령과 그의 내각의 목표는 이라크의 석유와 중동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한 목적임이 드러났습니다. 부시 개인의 종교적이고 직관적인 태도에 이라크를 악으로 규정해 그것을 제거하기 위한 성스럽고 의미심장한 미국의 성전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속내는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짐작할 만한 어두운 측면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저자인 웰치도 저와 같은 측면에서 이 책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내용을 요약하면 몇 가지로 함축할 수 있는데요. 즉, 테러 직후 합법적인 미국 시민권자들이면서 중동 출신, 남아시아 출신의 (주로) 남성들에 대한 폭력행위와 이를 바탕으로 미국 정부, 특히 법무부와 그 장관인 애쉬크로포트가 수행한 전반적이고 무제한적인 이들에 대한 구금 및 억류 작전이 있습니다. 8만 2천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미국 법무부의 적법한 기준 없이 무차별적으로 인신 구속되어 벌어진 행위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사실상 공포를 정치에 이용하는 것은 거의 무제한에 가깝습니다. 특히나 정치권의 행위는 이러한 국가 비상 사태에 중동인들과 종교는 엄연히 다르지만 서남아시아인들까지 포함한 결과였습니다. 바로 인도인이 중동인으로 오인받아 다른 시민에게 공격당한 것은 정말 충격적이기까지 했습니다. 울리히 벡이 언급한대로 현대 사회가 그 구조로서 다층적으로 복잡해질수록 그만큼 사회는 여러가지 변수로 인해 개인들에게는 위험해질 수 있는데 이에 대해 정치는 그것을 개선하고 조정하는데 노력해야하지만 당시 미국의 정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조장했지요.

그런 분위기에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을 거치면서 반인륜적인 포로 고문 사태에 대해서 많은 사례를 언급하며 웰치는 강도높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정설로 알려진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관타나모 수용소를 비롯한 해당 포로들에 대한 고문을 행정 명령으로서 용인했다는 점은 지금도 그 수많은 고문들과 관련된 보고서나 정보가 아직도 은폐되어 있다는 것에서 얼마나 심각한지 알게 되더군요. 특히 제네바 협약내에 ‘고문행위금지에 대한 유엔 협약은 죄수들에게 가혹행위를 하는 것은 범죄로 규정해 금지하고 있는데 웰치는 이에 대해 더 나아가 미국이 제네바 협정을 무력화 시키기 위해 이것을 의도적으로 무시한게 아닌지 조심스럽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전세계 자유 민주주의의 큰형이라 불리우는 미국이 그런 상태의 파탄까지 이르렀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다만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전쟁 포로에 대한 고문이 어떤식으로든 정리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점과 관련해서 차기 행정부였던 오바마 행정부가 이 부분을 해결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미국내 환경 변화로 애국자법으로 인한 미국 연방 수정헌법 제1조가 보장하는 자유, 특히 발언과 집회의 자유가 이러한 시기에도 위축될 수 없음에도 지금까지 미국 내 상황을 견지해봐도 시민권에 대한 헌법의 보장이 아직도 위축된 상황인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미 정보당국이 미국 시민들에 관한 개인정보를 수집하는 자시들의 능력을 활성화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으며, 심지어 도서관 이용자들의 도서 대출 내역까지 손에 넣으려는 시도까지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엄혹한 미소 냉전을 치루면서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자유진영은 소련의 무차별적이고 폭압적인 개인에 대한 폭력을 목도하고 간접적으로 경험했습니다. 이른바 정치범 수용소라든지 KGB에 의한 은폐된 행위에 대해서 말입니다. 물론 지금은 이념이 아닌 종교적 폭력으로 인해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전세계에서 희생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국가 안보에 몰빵해 자국의 시민들을 헌법과 자연권이 보장하는 개인의 권리를 제한해도 된다는 막장에 이르지 않기를 바랄뿐입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악의 숨결이 얼굴앞에 이른다 하더라도 이성과 인간성은 절대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끝으로 여기에 언급된 많은 가해자들의 실명과 피해자들의 실명을 몇 번이고 입으로 불러보면서 이런 불행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에 대해 가슴 깊이 아픔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대중은 너무나 연약하고 이렇게 세뇌되기 쉬운 존재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위선의 탈을 쓴 정부를 견제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인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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