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 - 착한 그림, 선한 화가
공주형 지음 / 예경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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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공주형의 ‘착한 그림, 선한 화가 박수근’은 박수근이 아내가 된 김복순씨에게 한 청혼을 착한 청혼이라고 표현하는 대목으로부터 시작된다. 공주형은 박수근론으로 박사가 되었고 일간지 신춘문예 미술평론 당선자로 미술평론을 하고 출강하고 있다.

 

박수근 화백은 1965년 52세로 “천국이 가까운 줄 알았는대 멀어, 멀어..”란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박수근은 경기도 포천 교회 묘지에 묻혔다가 고향 양구로 옮겨졌다. 박수근은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리고 싶어 한 화가였다. 박수근은 미군들에게 초상화를 그려주고 모은 돈으로 어렵게 창신동 집을 마련했다.

 

타계할 때까지 박수근의 그림에서 가장 중요하게 등장한 색은 흰색이었다. 박수근은 미국인 후원자였던 마거릿 밀러(Margaret Miller; 주한 미 대사관 문정관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흰색을 자주 언급했다. 박수근의 그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나무다. 석가에게 보리수가 있었고 뉴턴에게 사과나무가 있었듯 박수근에게는 느릅나무가 있었다.

 

화가를 꿈꾸었지만 어린 수근에게는 마땅한 화구가 없었다. 그래서 수근은 뽕나무 가지를 태워 직접 목탄을 만들기도 했다. 양구 보통학교 언덕에 있던 느릅나무를 보고 박수근은 훌륭한 화가를 꿈꾸었다. 초등학교가 학력의 전부인 박수근은 상심의 나날을 보냈다. 그런 박수근의 상심을 달래준 사람들이 해외의 인물들이었다.

 

밀러 부인은 박수근에게 “서울 화단에서 작가들과 경쟁하는 일이 힘들다는 사정은 알고 있지만 당신이 결국 앞서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낙심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언젠가 유명한 인물이 되리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썼다.

 

박수근은 후에 국전 심사위원이 되어 자신이 국전에서 정실(情實) 인사 때문에 떨어졌음을 알았다. 박수근은 국전 심사를 맡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생존의 전쟁이 시작된 그해 수근은 혜화동에서 화방을 운영하던 이상우의 주선으로 미군 범죄수사대에서 일을 시작했다.

 

수근은 페인트칠하는 노무자 대우를 받고 일했다. 178cm의 키에 건장한 체구를 가진 수근은 부두 노동을 하기도 했다. 이후 수근은 신세계 백화점의 미군 피엑스로 일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 수근은 미군들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렸다. 아내는 박수근에게는 흰쌀로 정성껏 지은 밥을 내놓았지만 나머지 가족들에게는 피난민에게 배급되는 옥수수와 보리쌀로 지은 밥을 내놓았다.

 

박수근이 태어난 1914년은 최초의 근대식 미술교육을 받은 이들이 외국 유학에서 돌아와 서양화를 처음 소개하고 한국 최초의 미술단체인 서화협회가 발족하는 등 서양화가 이 땅에 뿌리 내리던 때였다. 12살 소년 박수근은 밀레(장프랑수아 밀레; 1814 - 1875)의 '만종(1857 - 1859년 사이 그림)'을 본 뒤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했다고 한다.

 

그런데 살바도르 달리(1904 - 1969)는 평화롭고 경건한 분위기의 그림 '만종'이 실은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농민 부부가 눈물의 기도를 올리는 슬프고도 무서운 그림이라고 주장했다. 1932년 만종을 관람하던 한 정신이상자가 갑자기 칼로 그림을 찢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후 미술관에서는 그림 복원작업을 계획하고 그림의 훼손 전 상태를 알기 위해 X선 촬영을 시도했다.

 

그 결과 감자 바구니 아래 관으로 추정되는 작은 나무상자가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밀레 생존 당시 프랑스는 1840년대의 대기근, 1857년에서 1858년까지 이어진 경제공황 탓에 도심 노동자와 농민들의 삶이 매우 어려웠다.)

 

사람들은 사회주의자로 오해받으면서까지 피폐한 농촌의 모습을 그대로 담으려 했던 밀레가 장례식 장면을 그리려 했지만 사회적 반향을 고려해 감자바구니로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추측했다. 나무관 하나만으로는 그림 전체에 대한 해석을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해석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다.

 

1940년대 박수근은 평양에 있었다. 춘천 시절부터 인연을 맺은 미요시(三吉)가 평남도청 사회과장으로 이직하면서 마련해준 일자리 때문이었다. 그즈음 박수근은 흠모하던 이중섭도 만났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대한 관심이 촉발된 것도 그때였다.

 

박수근은 받을 돈을 재촉하지 못하고 남에게 받은 것은 버스표 한 장이라도 꼭 갚았다. 가난한 화가 박수근의 그림 속 주인공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박수근은 생전에 인정받지 못한 화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타계 직전까지 그림을 단 한 점도 팔지 못한 것은 아니다.

 

박수근 그림에 관심을 가진 이들은 외국인들이었다. 마거릿 밀러, 마리아 핸더슨, 실리아 짐머맨 등이 박수근의 후원인들이었다. 박수근 그림은 생전에 이해받지 못했다. 박수근은 “나더러 똑같은 소재만 그린다고 평하는 사람이 있지만 우리의 생활이 그런데 왜 그걸 모두 외면하려 하는가“라고 말했다. 박수근은 소도 그렸다.

 

1957년 박수근은 국전 낙선을 계기로 시작된 음주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반복은 세상과 타협할 줄 몰랐던 수근이 세상의 이해를 구하기 위한 가장 떳떳한 수단이었고 수근이 그리고자 했던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에 다가가기 위한 가장 그다운 방법이었다.

 

수근은 이렇게 청혼했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고는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박수근의 아내는 춘천여고를 졸업한 후 철원무진공사의 직원과 금화군의 수의사에게서 청혼이 들어왔지만 가난한 화가를 택했다. 수근은 종종 예술적 한계에 부딪혔다. 두 살 아래의 이중섭을 존경의 의미를 담아 형이라 불렀다. 수근은 바탕칠도 대충 하지 않았다. 수근이 처음부터 그림에 특유의 마티에르를 표현한 것은 아니었다. 박수근의 바위 질감을 느끼게 하는 화강암의 효과를 나타내는 두꺼운 마티에르는 거칠지만 소박하다.

 

이 화풍의 시작은 박수근이 경주 남산의 자연풍경에 심취되어 화강암 속 마애불과 석탑에서 본인만의 작품 기법을 연구한 후 완성한 일명 ‘화강암 표면 같은 우툴두툴한 질감’의 마티에르'였다.(이코노미톡 뉴스 수록 기사 ‘박수근의 우툴두툴한 마티에르, 알고 보니 경주 마애불과 석탑이 원천’) 고향 양구의 화강암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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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재생 - 공간을 넘어 삶을 바꾸는 도시 재생 이야기
정석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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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생명체다. 도시가 생명체라면 도시 재생은 생명을 다시 살리는 일이다.“.. 도시설계자/ 도시학자 정석의 진단이다. 도시 재생은 크게는 국토 재생이고 작게는 지역과 마을 재생이다. 어쩌면 내 몸 재생까지 포함되는 개념이 도시 재생이다.

 

도시 재생이란 말에 나는 풍수의 비보(裨補)를 생각한다. 정동(貞洞) 해설을 할 때 ‘한 조각 꽃잎이 떨어져도 봄빛은 줄어드는 것을‘이란 두보(杜甫)의 구절을 인용한 기억이 난다. 정동을 현대적 의미의 명당으로 정의하며 그곳의 건축물들이 그곳을 명당으로 만들기 위해 모인 것인지 명당이기 때문에 모인 것인지 모르지만 이 가운데 하나만 없어도 정동을 이루는 아우라가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정체(整體) 관념이란 것이 있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개념으로 하나로 이어진 우리 몸의 원리를 말하는 개념이다. 정(整)은 완전성을 의미하는 integrity와 뜻이 통하는 말이다. 저자는 도시를 살리는 일에서도 정(整)과 integrity가 핵심이라 말한다.

 

1970년대 브라질 쿠리지바 시장을 역임한 자이메 레르네르(Jaime Lerner)는 큰돈을 들이는 대규모 프로젝트 대신 작은 비용으로 침을 놓듯 작은 변화를 주어 영향을 확산시키는 방식을 도시 침술(urban acupuncture)이라 표현했다.

 

수많은 사람이 각자 자신의 집을 지을 때에도 마음대로 짓지 않고 주변을 살피고 역사와 문화를 존중하며 짓기에 여러 사람이 오랜 세월에 걸쳐 집을 짓고 길을 내고 다리를 놓아 만든 도시가 마치 한 사람이 만든 것처럼 조화롭게 보인다.

 

재개발이 도시를 물건이나 상품처럼 대하는 것이라면 도시재생은 생명 다루듯 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저자는 도시재생이란 말보다 삶터 재생이란 말이 적절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블랙홀처럼 사람을 빼앗아가는 수도권, 대도시, 신도심보다 사람이 빠져나가는 지방, 시골, 구도심을 먼저 되살려야 한다고 말한다.

 

외연 확장보다 중요한 것은 내부 재구축이다. 삶터 되살림의 속도는 "천천히"다. 현시대는 인구가 줄고 있다. 이런 상황에 재개발은 맞지 않다. 도시재생 시대의 개발은 개발 단위를 단지에서 필지로 줄이고 새로 만드는 대신 고쳐 써야 한다. 이렇게 작은 단위로 도시를 살리면 작은 설계사무소와 동네 자영업자도 참여할 수 있다.

 

일본 영화 ’인생 후르츠‘에 나오는 메시지가 있다.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과일이 익는다. 차근차근 천천히.“ 차근차근 천천히와 정반대인 빨리빨리 한꺼번에는 많은 부작용이 따른다. 지금은 개발시대가 아니다. 빨리빨리 한꺼번에는 개발시대에 맞는 말이다.

 

재개발에는 철거형만 있지 않다. 남길 곳을 최대한 남기면서 재개발 하는 수복형도 있고 오랜 역사적 장소를 보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보존형 등이 있다. 그간 우리나라는 철거형이 지상 목표였다.

 

1965년 재개발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했다. 세운상가가 첫 재개발 대상이었다. 주택재개발이 시작된 배경에는 무허가 주택 확산이 있다. 현저동, 홍제동, 아현동, 공덕동, 후암동, 한남동, 숭인동, 창신동, 흑석동, 노량진, 청계천, 중랑천, 정릉천 주변 등 판잣집에 무허가 건축물이 들어섰다.

 

1961년 당시 무허가 주택은 4만채가 넘었다. 이에 서울시는 무허가 주택을 철거한 뒤 주민들을 서울 외곽의 새로운 주거지로 이주시켰다. 도봉동, 구로동, 상계동, 사당동, 봉천동, 신림동, 마천동, 거여동, 신정동, 창동, 쌍문동, 가락동 등 외곽 공유지역에 재정착촌이 마련되었고 이주자들은 10 ~ 20평 규모의 작은 대지에 약간의 건축자재를 지원받아 스스로 집을 짓고 살았다.

 

1960년대 말에는 교외 지역 국공유지가 고갈되자 재정착지로 이주시키는 대신 무허가 주택지에 공공아파트를 건립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바뀌었다. 1970년에 와우아파트가 붕괴되어 서른 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왔고 1971년에는 광주(廣州; 현 성남시) 단지로 강제 이주당한 주민들이 정부의 무계획적 도시 정책과 졸속 행정에 반발하여 광주대단지 사건을 일으켰다.

 

서울시는 다른 대안을 찾아야 했다. 도심재개발에 대한 관심과 필요성이 제기된 계기는 어디에 있을까? 1966년 미국 존슨 대통령의 방한이 주요 계기가 되었다. 시청 앞에서 존슨 대통령 환영행사가 열렸는데 맞은 편인 북창동과 남산 자락의 무허가 주택의 적나라한 모습이 텔레비전 보도를 통해 미국까지 전해지자 재미 교민사회에서 대통령에게 도심 환경 개발을 요구했고 이에 따라 서울시가 도심재개발을 서울시정의 핵심과제로 삼았다.

 

그 이후 22층의 더플라자호텔이 지어졌는데 이는 당시 서울광장 뒤편의 낙후한 화교 집단거주지였던 지금의 북창동을 시각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가로가 길고 세로는 짧은 병풍 모양으로 지은 건축물이다. 1970년대 말 북한과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에 북한의 포격 사정 거리 안에 있는 서울에 과도하게 인구가 집중되는 것은 불리하다는 주장에 제기되었다.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도심재개발 활성화 정책이 마련되었다. 1983년 서울시는 670%였던 도심재개발 용적률을 1,000%로 늘렸다.

 

산보다 더 많이, 더 높이, 더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로 인해 서울은 아파트 공화국이 되었다. 서울의 아름다운 산, 언덕과 강변 풍경이 아파트로 인해 훼손되었다면 서울 도심부의 역사문화유산들은 재개발로 인해 지워졌다. 2000~2010년대는 개발 역풍 속에 맞이한 재생시대다.

 

역풍이란 선거로 인해 빚어진 현상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2006년 선거 때 뉴타운 공약을 내걸어 당선된 단체장들이 2010년 민선 5기 지방선거에서는 바로 그 뉴타운 때문에 우수수 떨어졌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단체장들은 뉴타운과 재개발의 대안으로 도시재생을 들고 나왔다.

 

새 길이란 큰 회사들만 참여할 수 있는 대규모 개발프로젝트가 아닌 스몰 프로젝트, 건물을 헐고 짓는 하드웨어보다 사람을 불러모으는 소프트웨어와 휴먼웨어에 돈을 쓰는 것을 말한다. 외연 확장을 그만두고 도시 안의 빈 곳을 채우고 혁신하는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도시를 살리려는 도시재생이 도시를 파괴하거나 죽여서는 안 된다. 일본의 경우 재생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인구 감소 우려 때문이다. 사람이 없어 소멸 위기에 처한 지방으로 사람을 보내는 제도는 지역부흥협력대이고, 세수 격차로 재원 고갈의 위기를 맞고 있는 지방에 돈을 보내는 제도는 고향납세제도다.(100 페이지) 모두 일본이 시행하고 있는 제도다.

 

”일본은 꽤 오래전부터 사람과 돈을 지방에 보내는 사업을 지속해왔다. 우리는 이제 막 시작 단계에 있다. 시작이 늦었다고 서두르기보다 차근차근, 천천히 제대로 하면 좋겠다.“(103 페이지) 문제는 일자리다. 마을(지방, 고향)을 떠나는 젊은이들을 붙잡아두려면 그곳에만 있는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자생하지 않으면 재생이 아니다. 마을 만들기 지원 사업, 주거환경관리사업 등을 시행하면서 주어진 예산으로 주민공동이용시설을 신축해도 사업 종료 후 운영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해법은 자생력을 키우는 것이다.(156 페이지)

 

도시재생에서 젠트리피케이션도 문제이지만 듀플리케이션(복제)도 문제다.(179 페이지) 저마다 자기 지역에 맞는 재생이어야 하는데 성공 사례를 따라하는 것이 문제라는 의미다. 지방에서 나고 자란 뒤 학업과 취업 때문에 떠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U 턴이라 한다. 고향 가까운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J 턴이라 한다. 고향이 아닌 시골로 가는 것을 I 턴이라 한다.(214 페이지)

 

대한민국은 행복하지 않은 선진국이다. 헬조선이란 말이 있다. 20대와 30대의 90% 이상이 헬조선론에 동의한다. 금수저와 흙수저로 표현되는 빈부격차와 부의 불균형, 높은 실업률, 낮은 취업 기회, 고용 불안정, 고물가, 일상화된 경쟁구도, 저녁이 없는 삶 등이 이유다.

 

소득 향상이 행복을 담보한다는 믿음은 깨진 지 오래다. 성장 중심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성장 중심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은 우리의 심층구조와 기본골격을 바꾸는 문제이기도 하다. 아픈 도시는 우리의 책임이다.(243 페이지) 저자는 지금처럼 인구가 줄어드는 시대의 도시계획은 수요에 맞게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잉여와 결핍을 이어주는 도시계획이어야 한다고 말한다.(268 페이지)

 

‘딱 적당한 만큼의 초록just green enough’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윈프레드 커란Winifred Curran과 트리아나 해밀턴Trina Hamilton이 처음 쓴 말이다. 대규모 사업은 아무리 녹색 사업이라고 해도 결국 젠트리피케이션의 제물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를 담은 말이다. 새길 말이 아닐 수 없다. 수도권에 전 인구의 반 이상이 몰려 사는 극단의 경쟁 국가 한국의 숨통이 도시재생과 함께 조금씩 트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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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효상, 조용헌, 로버트 파우저, 이현군 등이 쓴 ’서울의 재발견’과 정석이 쓴 ‘천천히 재생’, 박진빈 교수의 '도시로 보는 미국사'에서 공히 추천받은 도서가 제인 제이콥스의 ‘미국 대도시의 삶과 죽음’이다. 도시, 미국 등을 키워드로 한 책 가운데 내가 읽은 것이 박진빈 교수의 ‘도시로 보는 미국사’ 한 권이다. 이 책에 미국도시사학회 회장을 역임한 마이클 카츠Michael B. Katz가 ‘왜 미국 도시들은 불타지 않는가Why American Cities Don‘t Burn’(2013년)란 책을 썼다는 내용이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분노를 담은 책이다. 책의 의미를 원래 불타야 했다는 주장을 담은 책이라고 설명한 저자는 사실 미국의 도시는 민권 운동기 이전에도 불탔었다고 말한다. 젠트리피케이은 1964년 독일 출신의 영국 사회학자 루스 글라스(Ruth Glass; 1912 - 1990)가 런던 시내에서 노동자 계급의 거주지에 중산층이 유입하면서 기존 거주자들인 노동자들이 밀려나는 현상을 보고 붙인 용어다. 박진빈 교수의 책에는 ‘딱 적당한 만큼의 초록just green enough’이라는 말도 나온다.

 

Winifred Curran과 Trina Hamilton이 처음 쓴 말이다. 대규모 사업은 아무리 녹색 사업이라고 해도 결국 젠트리피케이션의 제물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를 담은 말이다. 1. 젠트리피케이션. 2. just green enough. 3. 에리카 체노웨스(Erica Chenoweth)의 3. 5% 룰(최소 3.5%의 사람들이 평화적으로 운동에 참여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내용의 법칙). 4. 도시재생이 최근 내가 생각하는 개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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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의 영화 ’자산어보‘를 보았다. 서양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고도 천주님을 믿고 나는 성리학을 통해 기하학과 수리학을 받아들였다는 정약전의 말이 기억 남는 영화다. 정약용이 주인공이었다면 감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약전에게 물고기에 대해 가르쳐준 스승인 ’장창대’의 아내가 나는 흑산이 좋소라는 말을 한다. 이 말에 남편 장창대는 “흑산이 아니라 자산(玆山)이지, 이(this) 산이지.”라는 말을 한다. 이 부분이 영화의 끝 부분이다. 알다시피 정약전은 흑산이란 말을 두려워 했다. 흥미로운 점은 자(玆)란 글자가 이것(this)을 뜻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산 즉 우리가 사는 산이지란 말이 나왔을 것이다.

 

홍어(洪魚)의 영어 단어가 skate라는 사실도 알았다.(우리 영화이지만 영어 자막을 넣은 것은 해외 팬들을 위해서이겠다.) 어떻든 지금은 영화에 대해 이 정도 말만을 할 수 있다.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어제 ‘자산어보’를 본 곳은 광화문 씨네큐브였다. 이 선생님을 통해 알게 된 곳이다. 미국 영화 ‘매기스 플랜‘(2017년 2월 2일)과 레바논 영화 ’가버나움‘(2019년 2월 19일), 프랑스/ 일본 영화 '파비엔느에 관한 진실'(2019년 12월 19일) 등의 영화를 감상한 곳이고, 일본 영화 ’인생 후르츠‘의 포스터를 본 곳이기도 하다.

 

'인생 후르츠‘는 이선생님의 추천작이기도 하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떨어진다. 나뭇잎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과일이 익는다. 차근차근 천천히.“란 대사가 인상적인 영화다. 이 대사를 만난 것은 영화가 아닌 도시설계자/ 도시학자 정석의 ’천천히 재생‘이란 책에서다. 창신동 도시재생을 주제로 해설하기 위해 읽는 책이다.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지고, 그러면 땅이 비옥해진다는 말은 ”한 조각 꽃잎이 떨어져도 봄빛은 줄어드는 것을”이란 두보의 시와 정서가 다르다. 나는 이 말을 지난 2017년 정동(貞洞) 해설에서 활용했다.

 

정동을 현대적 명당으로 정의하며 그곳의 건축물들이 정동을 명당으로 만들기 위해 모이게 된 것인지 정동이 명당이기 때문에 모이게 된 것인지 모르지만 그 건축물들 가운데 하나만 지금과 달랐어도 정동의 아우라는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의 영화로 인해 이런 다채로운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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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江湖) 제현(諸賢)의 ('질정; 叱正'이 아닌) 질정(質正)을 바란다는 저자의 책을 읽고 있다. 질정(叱正)은 꾸짖어 바로잡는다는 의미고 질정(質正)은 묻고 따져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흔히 꾸짖어 바로잡는다는 뜻의 叱正을 많이 쓰니 약간 기이하다고 해야 하나? 그럼에도 質正이 훨씬 뜻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강호라는 말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중국의 유명 선사인 마조의 활동무대인 강서(江西)의 강과 석두의 활동무대인 호남(湖南)의 호를 딴 것이라고 한다. 물론 강호라는 말 자체가 강과 호수 즉 자연을 의미하기도 한다. 처음 강호제현이란 말을 들었을 때 혹시 무슨 상징이라도 있는 건가 싶었다.

 

생각나는 것은 우리나라와 중국은 산을 앞에 두어 산하, 산천, 산수화, 요산요수 등으로 부르지 물을 앞에 두는 경우는 없다는 말이다.(2019년12월 30일 아주경제 수록 강효백 교수 글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 첫 소절부터 일본식 표현' 참고) 어떻든 앞서 말한 저자의 책으로 돌아가면 이야기로서의 역사는 사랑받고 있지만 학문으로서의 역사는 사랑받고 있지 못하다는 말이 눈에 띈다.

 

꾸짖음이든 물음과 비판이든 받을 사람은 저자가 아니라 독자 또는 사회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우리는 질정 앞에 겸허해야 한다. 단재가 조선상고사에서 지적한 것처럼 궁예의 성씨가 궁씨냐 김씨냐 같은 사소한 문제를 두고 따질 것이 아니라 궁예의 실패한 불교개혁의 의미처럼 무게감 있는 것들을 묻는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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