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도덕의 계보 읽기 세창명저산책 45
강용수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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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니체가 도덕의 계보서문에 쓴 말이다. 이 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니체의 의도란 우리 자신을 알고자 하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도덕적 편견에 대한 기원을 해명하는 것이 도덕의 계보의 핵심 주제이다. 니체는 좋음과 나쁨이라는 가치판단이 사라진 후에 선과 악이라는 노예적인 판단이 등장했다고 보았다.

니체는 선한 것 자체는 없다고 보았다. 선과 악의 판단은 그 자체가 아닌 인간 자신의 계급적 차이에서 유래했다는 의미이다. 본래 이기적이었던 동기가 이익을 얻는 입장에서 긍정되다가 그것이 망각되면서 그 자체가 선한 것으로 착각되는 것이다.

그 자체로 선한 동기(動機)는 없다는 니체의 사상은 칸트의 동기주의에 반대된다. 니체는 전사(戰士) 계급과 귀족 계급을 옹호한다. 반면 성직자 계급은 옹호하지 않는다. 니체에 의하면 성직자 계급은 전사와 전쟁을 치를 수 없기에 정신적인 것으로 보복해 이기려 한다.

유대인들은 강력한 것, 고귀한 것, 아름다운 것이 좋은 것이라는 등식을 비참한 자만이 오직 착한 자라는 생각, 가난하고 무력한 자, 비천한 자만이 착하고 신에 귀의한 자라는 등식으로 바꾸는 역전(逆轉) 또는 가치 전환을 이루어냈다. 유대인과 더불어 도덕에서 노예 반란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약자와 노예가 승리한 서구 2천년의 역사이다.

고귀한 도덕은 자기 자신의 긍정에서 생겨나지만 노예 도덕은 처음부터 밖에 있는 것, 다른 것, 자기가 아닌 것을 부정하는 데서 생겨난다.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은 반작용에서 비롯된 르상티망(ressentiment: 원한, 증오, 질투 등의 감정이 반복되어 마음 속에 쌓인 것)에 근거한다.

노예의 덕목은 침묵, 기억, 기다림, 왜소, 굴종, 영리함이다. 원한을 지닌 인간은 정직하지도 순박하지도 않으며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진지하지도 솔직하지도 않다. 그의 영혼은 곁눈질을 한다. 원한을 가진 사람은 나쁜 적, 악한 사람을 생각해내고 그것의 잔상(殘像) 또는 대립물로 자기 자신이라는 선한 인간을 만들어낸다.

고귀한 인간은 자기의 좋음에서 나쁨을 만들어내지만 노예는 증오에서 타자의 악함을 만들어낸다. 니체는 좋음의 두 가지 기원을 말한다. 독수리에서 유래한 것과 양()에서 기원한 것이다. 포식자인 독수리는 고기 맛을 좋다 나쁘다로 판단한다. 양은 선함과 악함으로 판단한다.

독수리는 양고기가 맛있기 때문에 양을 좋아한다. 양은 독수리가 사악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은 반대로 선하다고 생각한다. 니체는 번개 치는 현상을 주체와 활동으로 구분하여, (섬광)을 원인으로 설정하고 뒤(번쩍임)를 결과로 보는 활동의 활동 곧 활동을 중복시키는 오류를 지적한다. 니체에 의하면 활동이 모든 것이며 활동하는 자(주체)는 활동에 덧붙여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니체는 보복하지 않는 무력감을 선()과 겸허와 순결로, 비겁함을 덕으로, 인내와 가련함을 신의 선택으로 보는 것을 비유적으로 화폐 위조로 정의한다. 약자의 화폐위조, 자기기만의 목적은 약자인 자신이 선하다고 말함으로써 강자인 타자를 악으로 낙인찍음으로써 지배자가 되려는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기억을 가지게 되었고 더 나아가 양심을 가지게 되었는가? 기억을 통해 만들어진 양심이란 인간의 타고난 본질이 아니라 사회적인 강제성에 바탕을 둔 잔인한 고통의 흔적을 담고 있다. 니체는 도덕계보학자의 입장에 따라 죄라는 도덕적 개념이 부채(負債)라는 경제적 개념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채무법에서 죄, 양심, 의무 등의 도덕적 개념이 발생했다.

정언명법(定言命法)을 통해 처음으로 죄와 고통이라는 무서운 관념의 결합이 고정되었다. 잔인함 없는 축제는 없다. 형벌에서도 축제적인 것이 있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고통 자제가 아니라 의미 없는 고통이다. 니체는 과학적 공정성도 원한 정신 자체에서 유래했다고 보았다. 능동적 인간은 편파적이지 않고 악의도 없이 훌륭한 양심으로 판단한다. 반동적 인간은 양심의 가책인 원한으로 판단한다.

양심의 가책을 발명한 사람은 원한의 인간이다. 채권자 스스로 채무자의 빚을 대신 갚는다는 대속(代贖)자의 개념이 신으로 등장한다. 신 스스로가 인간의 죄 때문에 자기를 희생한다. 채권자로서 신이 인간이라는 채무자의 빚을 대신 갚아 줌으로써 절대 상환될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의 부채()는 영원한 벌이다.

신에 대한 죄책감, 이는 인간에게는 고문의 도구가 된다. 니체에게 대지는 너무 오랫동안 이미 정신병원이었다. 신성한 신의 기원이 바로 양심의 가책이기 때문이다. 반면 그리스인들은 양심의 가책에서 자신을 떼어놓고 영혼의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죄가 아닌 어리석음을 인정했다. 그리스인들은 신을 악의 원인으로 이용했지만 신들은 벌주는 것을 맡은 것이 아니라 더 고귀한 것 즉 죄를 맡았다.

니체는 미()에 대한 칸트의 무관심과 스탕달의 행복의 약속이라는 상반된 정의를 비교한다. 니체는 칸트의 무관심의 미학에 반대해 다음과 같이 묻는다. 여성의 관능미를 무관심하게 바라볼 수 있는가. 무관심성이란 칸트 미학에서 다루어진 개념으로 인간이 대상을 사사로운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관조할 때 진정한 미적 쾌락을 얻는다는 것이다.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철학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좋은 의미에서 금욕주의는 긍정이다.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생존의 부정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만을 긍정하는 것이며 무관심이 아니라 관심이다.(92 페이지) 철학자는 세 가지의 현란하고 요란한 것을 싫어한다. 명예, 제후, 여성이다. 너무 밝은 빛, 대낮, 자신의 시대를 싫어한다. 그 빛 안에 그림자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기독교 사제의 금욕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철학자의 이상적인 금욕주의를 진리추구의 생산적 조건으로 긍정한다. 철학적 금욕주의의 이상은 세계 부정, 삶의 적대시, 감각 불신, 관능에서의 해방, 초탈의 태도이다. 마지막 죽음의 고통 속에서의 승리, 이 최상의 기호 아래 옛날부터 금욕주의적 이상은 싸워왔다.

하나의 눈만이 있다면 하나의 방향만 인정하게 되어 능동적이고 해석적인 힘은 저지된다. 오직 관점주의적 인식만이 존재한다.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다른 곳에 존재하고 싶은 체화된 최고의 소망, 열정, 정열을 가진다. 금욕주의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니체에 의하면 인간은 병든 동물이다.

부끄러운 감정의 유약화, 병자가 건강한 사람을 병들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지상 최고의 관점이 되어야 한다.(111 페이지) 병든 양()은 자신이 느끼는 고통의 감정의 원인이 타인에게 있다고 본다.(타인 책임 전가) 반대로 성직자의 말에 따르면 고통은 자기 책임이다.(원죄) 죄라는 것은 생리적 장애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다. 정신적 고통은 영혼의 탓이 아니라 배()의 탓일 것이다.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진정한 구원자가 아니다. 의사로서 고통 자체, 불쾌와 싸우고 있지만 그 원인인 진정한 병과 싸우고 있지 않다.(118 페이지) 주인본능을 옹호하는 니체는 무리본능을 비판한다. 금욕주의 성직자는 불쾌와 싸우기 위해 죄를 고안해냈다.(124 페이지) 지옥은 영원한 고통으로 발명된 것이다.(126 페이지)

현대과학도 금욕주의의 양식이다. 유용한 것 때문에 과학에 대한 만족을 말하지만 그 반대로 과학은 양심의 가책 등 이상의 상실에 대한 불안, 사랑의 결여, 고통과 불만의 반영이다.(128 페이지) 과학은 오늘날 모든 종류의 불만, 불신, 설치류 벌레, 자기 멸시, 양심의 가책 등이 숨는 은신처이다.

과학은 해석(정서)을 제거하고 사실만을 다루려는 점에서 금욕주의적이다.(130 페이지) 과학이란 방법적으로 신앙을 먼저 전제한다. 과학은 신앙을 통해 삶의 세계, 자연의 세계, 역사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긍정하기 위해 이 세계, 우리 세계를 부정한다. 과학은 금욕주의, 생명의 빈곤화에 근거하며 예술은 생명의 넘침에 근거하면서 금욕주의에 호소한다. 플라톤이 저편 세계의 인간으로 삶의 비방자라면 호메로스는 아무 의도가 없는 삶의 숭배자이다.(132 페이지)

과학의 승리는 인간의 자기 왜소화를 의미한다. 비록 오역을 했지만 기독교는 고통을 죄로 해석함으로써 인간을 무의미의 늪에서 구해냈다.(139 페이지) 인간은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 오히려 허무를 의욕하고자 한다. 인간은 해석학적 존재이다. 물음을 통해 해답에서 의미를 찾는 존재이다.(140 페이지)

도덕의 계보학은 도덕의 이질적인 가치의 복합성, 복잡성, 비일관성을 밝혀낸 책이다. 도덕의 계보학은 들뢰즈, 푸코 등에 큰 영향을 미친 책이다. 니체가 유일한 논문 형식으로 쓴 이 책을 통해 얻고자 한 것은 삶 자체에 대한 무한 긍정이다. 문제는 원전(번역본)을 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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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흔드는 글쓰기란 책에서 독문학 박사 프리츠 게징은 플로베르가 뷔퐁이라는 인물의 입을 통해 천재란 인내의 대가란 말을 했음을 전한다. 처음 나는 이 글을 읽고 뷔퐁이란 인물이 플로베르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이라 생각하고 여기 저기를 뒤지고 찾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박물학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토마스 만이 토니오 크뢰거란 작품에서 동명의 주인공을 통해 우리에게 인식만 있고 표현이 주는 즐거움이 없다면 영원히 우울해질 뿐이라는 말을 한 것처럼 플로베르도 그의 작품 어딘가에서 등장 인물을 통해 그런 명언을 한 것이겠거니 생각했지만 뷔퐁은 플로베르 작품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 존재했던 박물학자였다.

 

천재는 인내의 대가라는 말은 인디언들의 기우제를 생각나게 한다. 그들은 비가 내릴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니 실패하지 않는 것으로 기록되는 것이다. 인디언들이 성공할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에 실패가 없는 것과 작가가 인내하고 인내해서 성공해야 천재로 인정받는 것은 비교의 대상이 충분히 된다.

 

정시몬은 세계문학 브런치에서 플로베르를 문장에 결벽증을 보인 작가이자 작품의 완성에 완벽을 기한 수도승 또는 구도자 같은 사람이라고 소개한다.(267, 275 페이지) 이 말을 따르면 플로베르야말로 인내하고 인내해 천재가 된 작가란 말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천재란 인내의 대가란 말은 자신을 염두에 두고 인용한 글이 된다. 플로베르에게 모호한 문장이나 부적절한 어휘가 포함된 문장을 쓰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유사한 발음을 가진 단어를 쓰지 않기 위해서도 병적으로 집착했다.(‘세계 문학 브런치‘ 268 페이지)

 

이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단어 하나 하나, 문장 하나 하나에 치열한 정성을 기울여야 명백하고 적확한 작품이 나오겠지만 그것은 걸작 탄생의 필요 조건이지 충분 조건은 아니란 말이다. 플로베르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고 명확한 단어와 문장보다 작가의 바람직한 안목과 가치관에 근거를 둔 치밀한 구성력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지? 물론 두 요소가 다 갖추어지면 얼마나 좋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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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에세이를 잡문(雜文)이라 부르는 것일까? 형식이 자유롭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정형시인 시조(時調)보다 자유로운 장르인 시(詩)를 더 선호하고 인정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선호 여부가 자유로운 글인가 정형적인 글인가에 의해서만 갈리는 것은 아니겠지만 의아하다.

잡문을 사랑한다는 이명원 평론가의 글을 오랜만에 다시 펴본다. 그가 뛰어난 잡문의 미덕으로 든 것은 인식의 아름다움과 개성적인 스타일이다.(‘해독’ 15 페이지)

동의한다. 일정한 틀이 없어 자유로운데 인식의 치열함이나 깊이마저 없다면 읽힐 가치가 있겠는가.

사유를 일정한 형식에 맞출 필요가 없는 만큼 치열하고 아름다운 사유를 펼칠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스타일이 없으면 진정으로 스승과 결별할 수조차 없다(‘공부론’ 11 페이지)고 말한 철학자 김영민 교수가 생각난다.

나는 김정란 시인의 ‘거품 아래로 깊이’를 아름답고 치열한 에세이집으로 추천한다. ‘비평 정신의 실종’이란 글에서 시인은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 생을 거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다고 말한다.(225 페이지)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 생을 거는 사람들이 치열하고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김정란 시인께서 정상화된 상지대의 “대학원장 보직”을 받았다는 소식을 페북에 알렸다. “은퇴“를 불과 육 개월 남긴 시점이라고 한다.

”시인의 언어가 예언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후기 산업 사회에서도 여전히 진실”(265 페이지)이라는 시인의 다른 말을 음미하게 된다.

시인은 예언적 능력이란 말이 어색하다면 단순히 징후 포착 능력이라고 말해두자는 말을 했다.

징후 포착의 방식을 배우기 위해 여러 시(詩)와 시론(詩論)과 시론(時論)을 읽어야겠다. 그 타자의 목소리들을 듣고 내 길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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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인사동의 한 갤러리를 찾아 그림 감상도 하고 시인도 뵙고 저녁 무렵 거리로 나와 내가 좋아하는 정독 도서관 가는 길을 걸었다.


도서관 가는 길은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한다는 느낌을 갖게 해서 좋다. 이 길에 명문당이란 출판사가 있고 이웃한 곳에 이학사라는 출판사가 있다.

이학사가 현수막에 철학자 메를로 퐁티의 ‘눈과 정신’ 강해집을 소개할 때는 교토 금각사의 철학자의 길을 걷는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도 걸려 있는 명문당 벽의 ‘쌍계사 가는 길‘ 선전 현수막을 보면서는 쌍계사 길을 걷는다는 느낌을 갖기도 했다.

'쌍계사 가는 길'은 부제가 있다. ’젊은 날의 퇴계 이황이 시 읊으며 녀던 길‘이란 것이다.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은 ’녀다’란 단어가 아니다. '녀다'는 ’다니다’란 뜻일 뿐이다.

나만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퇴계가 관계하면 낭만도 엄숙으로 느껴진다. 스물 여섯 살 연하의 기대승과 논리적 대대(對待)를 하며 깎듯한 예의를 갖춘 것도 나에게는 냉정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런 퇴계가 기생 두향(杜香)과 파격적 사랑을 나누었으니 묘한 부조화가 귀한 자료로 여겨질 정도이다.

동양 철학자 한형조는 유교의 도덕은 통념과 달리 윤리적이기보다 미학적 성격을 갖는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유교의 도덕은 선현들 말씀에 있지도 않고 이타적인 의도나 계산의 결과도 아니고 본능의 자연적 정감으로서 목적 없이 발현되는 어떤 것이기에 일종의 유희이며 예술이라는 것이다.(‘조선 유학의 거장들‘ 98 페이지)

물론 퇴계와 두향의 사랑은 다른 차원으로 볼 일일 테다.

그러니 대학자 퇴계가 시 읊으며 다니던 젊은 날의 길은 어떤 길이었을까?란 궁금증에 대해 말하자. 그 길은 벚꽃 우수수 지는 환희의 길이었을 것이다. 학문보다 실존을 알게 하는 퇴계의 시를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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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자 기대승 프로이트를 만나다
김용신 지음 / 예문서원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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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 박사 김용신의 '성리학자 기대승 프로이트를 만나다'는 퇴계(退溪)와 사칠리기(四七理氣) 논쟁(15991566)을 벌인 유명한 학자 고봉(高峯) 기대승의 사상과 프로이트 이론을 비교한 책이다. 퇴계와 고봉의 논쟁을 퇴고논쟁이라고도 한다. 물론 이때의 퇴고는 완성된 글을 다시 읽어 고치고 다듬는 것을 의미하는 推敲가 아니다. 하지만 退高 논쟁을 推敲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논의를 거쳐 진리에 한 발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기대승은 성리학자이다. 성리학은 세상사를 이()와 기()로 나누어 설명하는 학문이다. ()와 기()11세기 송()의 철학자 장재(張載)가 고안한 개념이다. 성리학은 주자학이라고도 한다. 주자(朱子) 즉 주희(朱熹)12세기 남송의 철학자이다. 주희가 대단한 것은 여러 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장재의 이()와 기(), 주돈이(周敦頤)의 태극, 정호의 천리(天理) 등의 개념을 하나로 통합해 자신의 철학 체계를 세웠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주희는 형이상학적인 것은 형체도 그림자도 없는 것 즉 리()라 표현했고 형이하학적인 것은 정()과 형태를 가진 것으로 기()라고 설명했다. ()가 먼저이고 기()가 나중이다.(이선기후理先氣後) ()는 만고불변의 원리이기에 다를 수 없고 기()는 형상을 위해 수없이 변할 수 있기에 같을 수 없다.(이동기이理同氣理) ()와 기()는 섞이지 않는다.(이기불상잡), 기는 이에 의해 활동한다.(이생기理生氣)

 

()는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에이도스)과 비교된다. 기는 질료(質料)와 비교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를 세계 저 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사물 자체 내에 존재하는 것 즉 이 세계의 힘을 구성하는 동적인 원리로 보았다. 이것이 형상이다.

 

사칠리기(四七理氣) 논쟁이란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의 해석을 둘러싸고 벌인 논쟁을 말한다. ()에 근거한 측은지심(惻隱之心), ()에 근거한 수오지심(羞惡之心), ()에 근거한 사양지심(辭讓之心), ()에 근거한 시비지심(是非之心)을 네 개의 실마리 즉 사단이라 한다. 7정은 희(), (), (), (), (), (), ()을 가리킨다.

 

본연지성인 4단은 인간의 선() 추구를 위한 도덕적 개념이다. 기질지성인 7정은 도덕적 개념이 아니기에 악도 존재할 수 있다. 이와 기는 현상론적인 면에서는 분리될 수 없다.(이기불상리理氣不相理), 또한 어느 것이 먼저라고 할 수 없다.(이기무선후理氣無先後), 그리고 이는 같을 수 없고 기가 서로 비슷하다.(기상근리부동氣相近理不同)

 

주자학에서 인간의 수양을 강조하는 것은 기()가 이()에 의해 생기지만 생겨나면 이는 기를 완전히 관리하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이다.(32 페이지) 플라톤이 말한 영혼(靈魂)은 성() 즉 리()에 해당한다. 성즉리란 도덕의 근원은 형이상학적 이법이라는 의미이다.(이정우 지음 인간의 얼굴’ 129 페이지)

 

육체는 감성을 포함하는 것 즉 정(: passion) 즉 기()에 해당한다. 모든 사물이 이와 기로 이루어졌듯 인간의 심은 성()과 정()으로 구성된다.(28 페이지) 본체론적인 면과 현상론적인 면으로 나누는 것은 합리(合離)의 철학 즉 합해서 보고 나누어서 보는 것이다. “그의 사유는 분리해서 보면.. 합해서 보면...이란 구조를 가진다. 분리해서 보면 이()는 기()에 선행한다. 합해서 보면 理氣는 동시적이다. 분리해서 보면 성()은 완전하다. 정과 합해서 보면 성은 불완전하다.”(이정우 지음 인간의 얼굴’ 131 페이지)

 

우리는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나 이이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 대해서는 많이 알아도 기대승의 이론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기대승은 4단은 모두 선()이며 7정에는 선악이 있다는 이황의 입장에 불만을 가졌다. 기대승은 사단이란 결국 칠정이 발현(發現)하여 도덕성에 맞아떨어진 것이지 사단이 칠정 밖에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보였다.

 

기대승의 입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연상하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은 인간의 형상이 자체적으로 있고 A라는 사람이 그것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A라는 생명체의 구성과 운동 자체가 인간이라는 형상의 표현(이정우 지음 가로지르기’ 192 페이지)이라는 말로 요약 가능하다.

 

기대승은 이황에게 성()도 이기가 있고 정()도 이기가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왜 굳이 사단과 칠정을 이와 기로 나누려고만 하는가 묻는다.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의 관계를 대설적(對說的: 좌우 관계)으로 보았고 이황은 인설적(因說的: 상하 관계)으로 보았다. 기대승과 이이의 이기묘합(理氣妙合) 이론은 기를 중시하는 특징을 드러냄으로써 이황의 이론과 함께 조선 성리학을 주리론과 주기론으로 양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나아가 그것은 기호학파와 영남학파를 구별짓는 근거를 마련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기호학파는 기대승과 이이의 설을 이어받아 기발리승설(氣發理乘說)을 따랐고 영남학파에서는 이황의 리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따랐다. 정치적으로는 영남학파는 남인(南人)의 입장이었고 기호학파는 서인 특히 노론(老論)의 입장이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58 페이지)

 

기대승을 필두로 한 주기론적 입장은 기호학파를 형성하면서 결국은 실사구시 학파들의 주장과 연결된다.(62 페이지) 마키아벨리는 인간의 심성은 덕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욕망에서 다른 하나의 욕망으로 가는 단순한 동물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다.(66 페이지)

 

마키아벨리는 덕을 강조한 고대 철학적 전통을 비판한 최초의 근대철학자이다. 홉스는 근대 철학의 시조이다. 그는 인간의 모든 사고의 근원은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가 아니라 감각일 뿐이며 인간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목적이 아닌 원인라는 이론을 도출해냈다. 이 때 원인이란 동물적 속성을 가진 인간의 심리적 메커니즘이다.

 

니체는 홉스처럼 이성을 부정하면서 인간 행동의 기본 동기를 감성에 두었다. 니체는 이 세상에는 영원한 무엇은 없으며 영원한 진리도 없고 오직 변화만이 있다고 보았다.(71 페이지) 니체에게 불변의 도덕적 현상이란 없고 오직 현상에 대한 도덕적 해석만이 있을 뿐이다.

 

니체는 무의식을 발견하였다. 니체에게 있어서 육체는 그 자체로 자아이며 이성은 인간성 내에서 아무런 작동을 하지 못한다.(72, 73 페이지) 니체는 자기 보존을 위해 설립된 문명 사회의 보이는 힘에 의해 억압받는 욕망을 지적한다.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보존이 아니라 자기 실현이다.

 

저자는 서양 철학에 있어서 인간성 이해에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한 프로이트야말로 철학적 논의에서 결코 빠뜨려서는 안 될 확실한 철학자라 강조한다.(74 페이지) 프로이트는 이데아나 원형의 개념을 부정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감성 자체이다. 프로이트 이론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때는 사랑의 본능(eros), 어떤 때는 죽음의 본능이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본능이 하나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는 곧 본능이란 것이 외부 충격과 관계가 있다는 의미이다. 정신분석학은 이를 대상(對象)이라 부른다. 물론 프로이트 이론에서는 대상이 본능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본능이 대상을 결정한다. 저자는 프로이트의 이론은 지나치게 인간의 본능을 강조한 이론이라 설명하며 외부적 조건으로서 심리 현상에 대한 문화적 영향을 강조하는 대인(interpersonal) 정신분석학을 언급한다.

 

외부의 영향이 자아에 미치는 관계를 내사(內射; introjection)라 하는데 대인 정신분석학은 이 내사적 요인을 강조한다.(86 페이지) 물론 중요한 점은 내사 뿐 아니라 본능이 환경을 향해 쏘는 투사(投射; projection)의 영향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멜라니 클라인의 대상관계이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클라인은 사랑과 미움을 본능이라 보는 대신 대상과의 감성적 관계에서 생겨나는 인간 감성의 핵심적 요소로 보았다.(89 페이지) 멜라니 클라인은 내사와 투사를 통해 한 인간의 감성이 형성된다고 보았다. 또한 자아의 형성이 꼭 외적 대상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자아 자체의 내적 요소와의 관계로부터도 영향을 받는다고 보았다.(89 페이지)

 

멜라니 클라인은 내적 이미지를 통해 자체 내에서 희열(phantasy)이나 염려(anxiety) 등의 감정을 맛보게 될 수도 있다는 주장도 했다. 클라인 이후 정신분석학은 프로이트의 본능 이론과 설리번의 외적 영향의 강조를 모두 뛰어넘어 자아의 외적 대상과 내적 대상 사이의 내사와 투사를 동시에 연구하는 쪽으로 그 비중을 옮기게 되었다.

 

현대 정신분석학의 주류적 입장은 자아가 외부를 향해 분출하는 힘과 외부의 환경이 자아로 유입되는 힘, 그리고 그 상호 관계를 연구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철학적으로 보면 자아는 외부의 영향을 받는 동시에 새로운 외부 조건을 창조해 가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즉 자아는 결정적이고 창조적인 요소를 동시에 지니는 것이다.(90 페이지)

 

이황은 사단은 순전히 선한 것이고 칠정은 선과 악이 있을 수 있다고 보았다. 기대승은 정이 발현할 때 절도에 맞으면 사단이지 사단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보였다. 기대승은 사단도 칠정도 모두 리와 기의 혼합체인 마음에서 나오는 바 이와 기를 겸하지 않은 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했다.(93 페이지) 절도는 시대의 도덕률이 아닐지?(102 페이지)

 

기대승에게 마음이란 리와 기가 함께 있는 정()의 작용이다.(97 페이지) 기대승의 마음 분석을 정 중심적 분석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프로이트와 다를 것이 없다.(97 페이지) 프로이트는 인간의 마음을 이성이 아닌 정적(情的) 교감의 원리를 찾아 규명하려 한 사람이다. 프로이트의 사랑과 죽음이라는 두 개의 본능은 기대승의 칠정을 축약한 것이다.(98 페이지)

 

물론 기대승에게 성은 순수한 선 자체이지만 프로이트에게 성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가진다. 기대승에게 무조건 선이 되는 것은 없다. 만고불변의 진리는 없다는 의미이다. 프로이트는 선과 악을 정상과 비정상, 건강과 병 등으로 대체한다. 사랑도 너무 많으면 비정상 또는 병이 되고 죽음 또는 파괴 본능도 적절히 표현되면 정상 또는 건강한 정신 상태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103 페이지)

 

프로이트가 치료를 통해 비정상이 정상으로 돌려질 수 있다고 보았듯 기대승은 수양을 통해 작성작현(作聖作賢)이 가능하다고 보았다.(107 페이지) 이황에게 있어서 정()이란 외부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선한 행위를 위해서는 환경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황은 불변의 성()으로 사단(四端)의 소종래(所從來: 지내 온 내력)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단이 외부 환경에 따라 변화무쌍해지는 칠정(七情)을 다스릴 수 있을 때에만 선()이 가능해진다는 것을 강조했다.(111 페이지)

 

기대승은 이황이 주장한 것처럼 형기(形氣)가 단순히 외물(外物)에 감응되는 것이 정이 아니라 외물이 심중에 감동을 줄 때 정()이 주도적으로 발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사이에 구별이 없다는 것이다. 멜라니 클라인은 대상과의 관계에서 대상의 객관적 실체보다는 대상에 대한 자아의 느낌(감동) 여부에 따라 수많은 정(passion)이 생성된다고 보았다. 자아가 대상을 향해 쏘아대는 투사를 정의 중요한 형성 요소로 간주하는 것이다.(115 페이지)

 

기대승이 강조하는 것은 경()이다. 인간의 마음이 외물과 접하여 발현될 때 나타나는 모든 정()이 선()만일 수 없기에 악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에는 경이라는 요소가 있어 이 경의 역할로 인해 인간은 발현된 정의 의미를 선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 이때 경이란 성선설(性善說)을 뒷받침해주는 개념으로서 본질적인 성()을 따르려는 의미는 지닌다. 경은 공경한다는 의미보다 삼가다는 의미이다.(118, 119 페이지)

 

기대승의 경()과 프로이트의 초자아는 매우 흡사하다. 이황도 기()가 강하기에 이()에서 비롯된 기가 현실의 악이 생긴다고 보았지만 사단은 그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와 기()의 관계를 초자아와 자아 이상(理想)의 관계로 보면 성리학적 해석과 정신분석학적 해석에 차이가 없음을 알게 된다.(131 페이지)

 

기대승의 칠포사(七包四: 사단과 칠정의 관계) 이론이 조선 성리학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성리학의 논리는 이 세상 만물은 이와 가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인간성을 논함에 있어서도 이와 기의 개념을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기대승은 우주를 논하는 태극설에서는 이와 기의 개념을 인간성 이해에서처럼 사용하지 않았다. 기대승은 태극에서 이는 이 자체로 존재한다고 보았다.(150 페이지)

 

많은 학자들이 프로이트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신화를 오독했다고 비판한다.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왕뿐 아니라 안티고네’, ‘콜로노스에서의 오이디푸스라는 두 개의 이야기도 썼는데 이 이야기들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내용이 있다.(165 페이지..‘오이디푸스왕에서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다.)

 

에리히 프롬은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신화를 일방적으로 해석했다고 비판했다. 프롬에 의하면 그 신화들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은 프로이트가 말한 것과 같은 어머니를 사랑하고 싶은 근친상간의 욕망과 아무 관련이 없다.(167 페이지)

 

또한 많은 학자들은 근친상간의 경우 부모가 잔에게 먼저 성적 요구를 하며(특히 아버지와 딸 사이에서) 때로는 강제성까지 띤다는 임상학적 자료를 제시하면서 어린이가 부모에게 느끼는 성적 욕망이 인간 최초의 성적 욕망이라는 프로이트의 주장을 비판한다.

 

저자는 오이디푸스왕에 대한 이야기만 가지고 보면 프로이트를 비판한 사람들이야말로 오이디푸스 신화를 잘못 이해했다고 말한다.(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것이 상식이라는 것이 프로이트를 비판한 사람들의 논리이다.) 저자는 라이오스가 아들을 죽이려 한 것은 자식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공포심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프로이트가 말한 자식이 부모에 대해 갖는 적대감이 먼저라는 말이 타당하다고 말한다.(171, 172 페이지)

 

그런데 정말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려 했을까? 라이오스가 오이디푸스를 죽이려 한 것은 예언가의 말을 듣고서이다. 예언가는 아들(오이디푸스)이 장차 아버지(라이오스)를 죽이게 될 것이라는 말을 했다. 이 예언은 말 그대로 예언이다. 맞는지 장담할 수 없는. 물론 프로이트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예시한 소포클레스의 두 신화(‘안티고네’, ‘콜로노스에서의 오이디푸스’)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것은 무의식적인 적대감이 아니다.

 

프로이트 비판(‘오이디푸스왕이야기를 잘못 읽었다는 비판) 가운데 한스 요하임 마즈의 것이 설득력이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병리적인 가정에서나 발생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들뢰즈의 오이디푸스 가족 삼각형‘(에 국한된 것이라는) 비판도 새길 만하다.

 

결론이야 어떻든 성리학자 기대승 프로이트를 만나다는 매우 적절하고 중요한 책이다. 180여 페이지의 얇은 책에 어려운 논의를 실었고 결론적으로 멜라니 클라인의 논의에 대한 관심을 더욱 촉발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대상 관계이론에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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