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정조에 대한 책을 연이어 읽고 있다. 이정우 교수의 ‘인간의 얼굴‘에서 정조와 정약용의 문답 부분을 읽은 이래 이십 년 가까이 읽자고 다짐만 해온 정조 본격 읽기를 이제 시작한 셈이다.

박상하의 장편 소설 ‘왕의 노래‘를 완독하고 서평을 작성했고 백승종의 ‘정조와 불량 선비 강이천‘을 필요한 부분만을 읽었다.

지금 읽고 있는 김준혁 교수의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와 김도환 교수의 ‘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도 반드시 서평을 쓸 것이다.

정조에 대한 책을 읽다 보면 다산 정약용을 만나게 된다.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에서 정조가 성균관 유생들을 강도 높게 교육시키며 주제를 줘 그것을 논문화하게 했음을 언급한 부분에서 정약용 이야기가 나온다.

정조가 정약용에게 내준 과제는 중용에 대해 논문을 쓰는 것으로 정조는 다른 유생들의 답변은 모두 황잡(荒雜; 거칠고 조잡)하지만 정약용이 한 답은 특이하기에 반드시 식견 있는 선비가 될 것이라 말했다.

정조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중용에 대해서는 퇴계와 율곡의 학설을 모두 공부했지만 정약용이 율곡의 학설이 더 옳다는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글을 썼기 때문이다.

남인은 대대로 퇴계의 학설을 옳다고 따르는 사람들인데 남인인 정약용이 퇴계가 아닌 율곡의 학설을 옳다고 한 것은 학문적인 자기 견해가 확실했다는 의미이다.

중용은 나도 관심이 많다. 아직 체계화하지 못했지만 신정근 교수의 논의를 따라 말하자면 중용은 어떤 원칙을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조절하는 것이다.

사뭇 비경제적이고 산만해지더라도 꼭 읽고 싶은 책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래서 힘들지만 그래서 행복하기도 하다.

인문서이면서 소설만큼 흥미로운 김준혁 교수의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를 읽고 어떤 책으로 옮겨가게 될지 모르지만 어떤 책이 되었든 즐겁게 읽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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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사의 문을 열다 - 철기문화의 시작, 춘추전국 시대 생각하는 힘 : 세계사컬렉션 4
심원섭 지음 / 살림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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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 문화의 시작, 춘추전국시대를 부제로 한 '중국 고대사의 문을 열다'에는 많은 인물이 나온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리더십을 보인 주() 文王이 주목할 만하다. 문왕은 상()의 주왕(紂王)에 의해 옥에 갇힌 뒤 갖은 시련을 이기고 풀려나 강태공을 만난다.(서울을 은으로 옮긴 이후의 상나라를 은상이라 부름)

 

문왕은 상 정벌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고 아들 무왕이 그 뒤를 이었다. 상을 무너뜨린 것의 정당성을 회의했던 무왕은 자신의 행위를 천명으로 표현했다. 무왕이 4년 후 죽자 아들 성왕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성왕이 나이가 어려 무왕의 이복동생인 주공 단()이 국정을 대신했다. ()은 상의 유민들이 세운 나라였고 주공 단은 성왕이 장성하자 권력을 순순히 넘겼다. 주나라는 친인척과 공신들을 제후로 삼는 봉건제도를 시행했다. 강태공은 신과 점술을 통해 나라를 다스린 은상과 달리 사람의 능력과 역할을 중심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봉건제의 핵심은 책봉(冊封)과 조공(朝貢)이다. 책봉은 주나라 왕이 제후에게 다스릴 땅을 내려주고 통치 권한을 인정해주는 격식이다. 제후들은 주나라를 지키는 데 나서야 했고 정기적으로 주나라 국왕에 인사를 드렸고 조공을 바쳤다.

 

제후도 친인척이나 측근들을 책봉했다. 그들을 경(), 대부(大夫)라 한다. , 대부는 사()를 책봉했다. 봉건제도는 상 정벌에 공을 세운 여러 집단을 주나라가 포상한데서 비롯되었다. 주나라는 청동기 문화에 기반을 둔 시대였다.

 

왕과 제후들이 혈연 및 군신 관계로 맺어진 봉건제도는 대를 이어갈수록 혈연관계가 멀어졌다. 주는 견융을 피해 호경에서 낙읍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전 시대를 서주(西周), 새 시대를 동주(東周)라 한다.

 

동주 이후 기원전 403년까지를 춘추시대라 한다. 이 시대에는 100개 이상의 제후국이 있었다. 동주 시대의 왕과 제후의 관계는 형식적이었다. 춘추시대의 다섯 패권국 중 하나였던 제나라에서 유래한 관포지교란 형편이나 이해 관계에 상관없이 친구를 위하는 두터운 우정을 말한다. 관중을 포숙이 일방적으로 믿고 인정한 것이다.

 

중국은 하, , 주가 생활하던 공간을 중원이라 불렀고 주변 이민족들은 오랑캐라 불렀다. () 계층의 성장은 춘추시대의 끝을 알렸다. 종법(宗法) 제도는 무너지고 관료의 부패와 무능력은 심각한 지경이었다. 제후국들은 더욱 체계적 통치를 시행할 것을 요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자의 사상이 출현했다. 공자는 처음에 신정 정치와 천명 사상에 우호적이었으나 점차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공자는 '주례(周禮)'를 중시했고 서주(西周)를 이상적인 시대로 보았다. 공자의 핵심 사상은 인()이다. 인은 왕과 경, 대부 등 귀족이 반드시 가져야 할 덕목이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서 배우기를 즐겼던 공자는 신분에 상관 없이 모든 사람이 배움 앞에서 평등하다는 생각을 갖게 했고 지식이 보편적으로 확대되는 데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춘추 시대에 주나라를 능가하는 힘을 갖게 된 제후국들이 여럿 등장했다. 가장 강한 제후국 즉 패자(霸者, ; 으뜸 패)가 주도한 질서를 회맹(會盟)이라 한다.

 

제후들은 쇠퇴한 주나라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존왕양이(尊王攘夷; 이민족의 침입에서 주 왕실을 보호함)와 계절존망(繼絶存亡; 주 왕이 책봉한 제후이니 힘이 약해도 함부로 무너뜨려 합치면 안 됨)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춘추 시대 후반에 이르러 하극상(下克上)이 나타났다. 노나라의 경우 계손(季孫), 맹손(孟孫) 숙손(叔孫)의 세 집안이 군사력 확충을 빌미로 나라 땅을 함부로 차지하기도 했고 노나라를 통치하던 제후 소공을 나라 밖으로 추방하기도 했다.

 

혼란이 극심해져 전국 7웅의 시대가 도래했다. 전국 시대는 춘추 시대와 달리 경쟁국 수가 변화했을 뿐 아니라 철기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전국 시대의 또 다른 특징으로 상공업과 화폐 경제의 발달을 들 수 있다.

 

()에서 분기(分岐)한 위()는 학문과 지식으로 무장한 사() 계층을 등용해 관료 정치를 실현했다. 전국 시대의 각 국왕들은 춘추 시대와 달리 능력에 따라 인재에게 관직을 주었다. 지식을 가진 사() 뿐 아니라 평민도 관리가 될 수 있었다.

 

전국 7웅은 기본적으로 중무장한 병사를 수십만 명 거느렸고 진()과 초()100만 동원이 가능했다. ()와 진()의 차이가 흥미롭다. 위는 일찍 뜨고 일찍 졌고, 진은 내실을 다져 떠올랐다. 진은 나머지 여섯 나라를 압도, 전국 시대를 평정했다.

 

진의 통일은 하나의 군주를 중심으로 하는 통치 체제의 서막이었다. 봉건제에 기초해 각국이 주나라를 떠받든 느슨한 체제와 기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전국 시대의 특징 중 하나는 전쟁 중에도 지식이 꽃핀 것이다. 이른바 제자백가의 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세상의 변동에 적절하게 호응하면서 사상이 나오고 이를 따르는 무리가 늘면서 학파가 형성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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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노래 - 정조의 역사 읽기, 정조의 속살 읽기, 정조의 모두 읽기
박상하 지음 / 생각출판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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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바르게 이끌었다는 뜻의 묘호를 받은 임금. 개혁 군주이자 학자 군주. 독살되었다는 논란의 주인공. 바로 조선 22대 임금 정조(正租)를 이르는 말이다. 박상하의 장편 '왕의 노래'는 화성(華城) 행차(行次; 을묘원행)에서부터 시작해 오회연교(五晦筵敎)를 거쳐 운명(殞命)에 이른 정조의 마지막 5년을 그린 장편 소설이다.

 

화성 행차는 육의전과 결탁(정경유착)하고 왕권 위에 올라서려는 등 온갖 폐단과 전횡을 일삼은 노론 지배 세상을 바꾸기 위해 감행한 정치적 결단이었다. 소설은 행차 이레 전부터 시작해 하루 단위로 벌어진 숨가쁜 대립 구도를 그린 뒤 에필로그에서 정조가 부르지 못한 왕의 노래를 지금 듣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왕의 노래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농토가 없는 백성이 마음껏 장사를 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광화문 앞 육조 마당에 나아가 백성들과 함께 넘치는 기쁨으로 부르겠다는 노래이다. 노론과 결탁한 시전 상인 외의 가난한 백성들의 시장인 난전을 금한다는 금난전권이 상징하듯 정조 재위 시절 경제권력은 정치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정조가 처음 왕의 노래에 대해 들은 것은 그의 나이 열한 살 때로 영조를 대신해 정치(대리청정)를 하던 아버지와 함께 민심을 헤아리기 위한 암행을 나가서였다. 정조는 암행 길서 나서 종루대로에서 아버지와 함께 하며 왕의 노래를 부를 것이라는 말을 들었던 희미한 기억을 떠올린다.

 

왕의 노래의 장점 중 하나는 회상(回想)에 있다. 정조는 화성 행차를 두고 빚어진 군주와 신하간의 논쟁으로 인한 안타까움을 어루만지고 달래려고 연 궁중 잔치에서 취기가 올라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창경궁 휘령전에서 비통한 죽음을 당한 사건(임오화변; 1762)을 떠올린다.

 

소설에서 서른 셋의 정약용은 정 3품 병조참지로, 42세의 홍병신은 암행어사로, 53세의 백동수는 정조의 호위무사로, 역시 53세의 이가환은 공조판서로, 75세의 채제공은 우의정으로, 77세의 홍낙성은 영의정으로 나온다. 이들이 정조의 측근들이다. 반면 병조판서 심환지, 정약용의 라이벌인 이조참지 김진탁, 정순왕후 등은 정조의 정적들이다.

 

특히 정순왕후는 정조의 미스테리한 죽음에 개입했을 것으로 믿어지는, 영조의 계비이다. 정조 사후 열한 살에 즉위한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며 나라를 노론이라는 일당 체제에서 안동 김씨 일가의 체제로 만든 세도정치의 원흉이다.

 

소설의 재미는 정조의 화성 행차를 방해하기 위해 노론이 벌인 상상할 수 없는 비열한 작전을 사전 차단 또는 무산시키려는 백탑결사 등 정조 측근들의 활약에서 찾을 수 있다.

 

소설 초반부에서 정약용은 이론과 실천 중 어느 것이 어려운가, 라는 정조의 물음에 실천이라 답한다. 정조는 이론이라 말한다. 한편 무엇이 문제냐는 물음에 정약용은 백성의 가난이라 답하고 정조는 공정하지 못한 것이 문제라고 말한다.

 

정조의 성격으로 환원할 수 없는 문제가 다음 문장에 녹아 있다. "왕의 하루는 분주하기만 했다. 왕조의 왕은 이념적으로 태양을 상징하기 때문에 태양이 뜨기 전에 벌써 침소에서 일어나야 했다....하루 동안에 왕이 처리하는 업무를 흔히 만기라 일컬었다.... 왕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진 채 조용히 내면을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이란 거의 없었다. 다른 왕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었다."(144, 145 페이지)

 

물론 정조는 개혁과 애민의 임금이었고 어릴 적부터 생명의 위협에 시달리는 등 아버지를 죽인 노론과 대치해야 했던 남다른 사정이 있었던 군주였다. 돋보이는 부분은 화성 행차에 참여한 사람들을 세밀하게 묘사한 부분이다.

 

을묘년 화성 행차(1795) 이후 5년만인 1800년 정조는 유명을 달리 한다. 정치 원칙은 시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말로 노론에 칼날을 정면으로 겨눌 것임을 선언한 오회연교(五晦筵敎: 정조 245월 그믐날에 정조가 경연자리에서 내린 하교) 직후의 일이다.

 

'왕의 노래'는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 살기 좋은 세상을 꿈꾸는 작가의 의지를 스릴과 탄식의 이중주로 만든 작품이다. 정조에 대한 논란 부분은 소설이 다룰 부분이 아니었으리라. 오랜만에 역사 소설에 진지하게 몰입하게 해준 작가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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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면 공부의 폭을 좁혀야 한다는 생각은 검증이 필요하다. 정녕 좁혀야 하는가 물어야 한다. 필요한 분야를 제대로 섭렵하지도 못하고 줄여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넓게 보되 필요한 공부와 그렇지 않은 공부를 가려내는 것이다.

자신의 좁은 영역 안에서 안주하는 것은 동어반복일 수밖에 없다. 조심하지 않고 말하면 근친상간이다. 공부가 진척되지 않을 때 필요한 것은 전공 또는 주된 관심 분야와 거리가 먼 분야의 책을 읽는 것이다.

관심 영역이 확장되기도 하고 관심 분야에 도움이 되는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서울을 주제로 한 강의를 듣고 내 단점을 실감했다. 사회경제적 관점으로 지역을 보는 능력의 태부족이다.

관심이 실존적이고 내면적이어서 그렇지만 아쉽다. 다시 예전의 그런 시각을 갖추려면 무엇을 읽어야 할지 몰라 테리 이글턴의 '유물론'을 읽으려 한다. 이 역시 잘못 짚은 것인지 모르지만 내 제한된 영역 밖을 보는데 유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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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대의 양성지가 처음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숙종대에 이르러 왕실의 종친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던 종부시(宗簿寺)에 별도의 건물로 지어진 규장각(奎章閣)이 영조대에 화재로 소실되자 창덕궁 후원에 새롭게 지으라고 명한 정조.

그는 규장각을 학술 연구기관이자 정치 개혁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만들어 갔다. 정약용, 서유구 등 초계문신 제도에 의해 선발된 젊은 학자들이 정조의 개혁정치를 학습하였는데 이들이 공부하고 연구한 곳이 바로 규장각이다.

그런데 규장각을 학문을 장려하고, 그에 바탕해 개혁 정치를 구상한 정조의 생각이 압축적으로 표출된 공간으로 본 한 사학자가 이런 글을 썼다.

˝초계문신 제도는 1781년에 시작되어 정조가 사망한 1800년까지 19년 동안 10여 차례에 걸쳐 총 138명을 뽑았다.˝

의도를 알겠지만 어색한 문장이다. 초계문신 제도에 의해 누구 누구를 비롯 138명이 선발되었다고 하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한 중문학자는 역시 규장각을 논한 글에서 ˝그래서 1776년 3월 10일 경희궁의 숭정문에 즉위한 이튿날...˝이란 글을 썼다.

사소한 것 같지만 ˝숭정문에서 즉위한...˝이라고 해야 자연스럽다.(내 사소한, 그리고 주관적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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