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여섯 시를 살짝 넘어선 쌍문동의 함석헌 기념관 인근 C 커피숍. Y 선생님과 일 관계로 만나 이야기.

Y 선생님은 집에 가 저녁 먹어야 한다며 과자를 먹지 않는 나를 생각해서 카운터에 새 과자를 포장해 달라고 부탁.

집에 돌아와 보니 과자 옆에 보이는 팸플랫 한 장. 성북구 정릉동(貞陵洞) 694번지에 위치한 모 장로 교회 전도지.

건조한 전도지 한 장에 나는 살짝 미소. 부작용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교회가 아닌 정릉(貞陵)을 생각.
언제일지 모르지만 앞으로 나는 별 감흥 없이 정릉이란 단어를 대하게 될 수도 있다. 변화(變化)는 항상적인 것이니 말이다.

오혜정 수학 교사의 ‘수학 언어로 문화재를 읽다’를 사둔 지 보름 정도가 지났지만 아직 정독(精讀)하지 못했다.

이 책을 산 것은 ‘경복궁의 품격에서 도형과 수를 만나다‘란 챕터 때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경복궁을 새롭게 보고 싶은 마음의 작용. 최근 나온 장지연 교수의 ’경복궁, 시대를 세우다‘란 책이 또 관심을 끈다.

정도전이 경복궁 근정전이란 이름을 지은 것은 ‘쓸데없이 바쁘게 굴며 자잘한 일에 시시콜콜 간섭하지 말고, 어진 사람을 찾아 임명하는 일처럼 반드시 군주가 해야 할 일에만 부지런해져라‘는 심오한 뜻을 담아서였다는 것이다.

이 책 역시 새롭게 사태를 보려는 내 마음을 잡는다. 그런데 나는 어떤 새로움으로 경복궁을 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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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선생님의 신간 ‘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 출간 기념 북토크 소식이 들려왔다.(3월 19일 19시 30분. 통의동 목련원)

‘나의 서양 음악 순례’를 읽고 윤이상 선생님과 서경식 선생님을 디아스포라로 정의한 리뷰를 쓴 지난 2011년의 기억이 스친다.

목련원은 경복궁 영추문(迎秋門) 앞에 자리한 황두진 건축가의 집이다.

이탈리아, 하면 괴테와 스탕달을 생각할 수 있다. 괴테가 이탈리아를 여행한 것은 1786년에서 1788년 사이이다.

1817년 스탕달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이런 글을 썼다. “나는 예술 작품이 주는 천상의 느낌과 격정적인 감정이 교차하는 최고의 감동을 느꼈다.”
스탕달은 ˝산타크로체 성당을 나오며 생명력이 모두 고갈된 것처럼 기진맥진해져서 마치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끼며 길을 걸었다.“고 썼다.

이로부터 스탕달 신드롬이란 말이 생겨났다. 거대한 예술관이나 자연의 아름다움 앞에서 너무 감탄한 나머지 절망과 두려움 등의 감정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서경식 선생님은 ”아아, 이탈리아. 나를 항상 지치게 만드는 이탈리아.“란 말을 했다.

스탕달 신드롬이라고 하기에는 그렇고 어떤 의미일까? 목련, 3월의 밤, 북토크, 이탈리아, 서경식, 영추문 앞..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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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 골짜기를 배경으로 한 한무숙 작가의 유수암(流水庵)‘에는 청수암(淸水庵)과 유수암이라는 두 암()이 나온다. 암이라는 같은 이름을 쓰지만 청수암은 암자이고 유수암은 고급 요정이다.

 

청수암은 구름머리 아낌없이 버려 깎고 번뇌를 끊어 오직 불제자로서 도를 닦는 이승(尼僧)이 사는 암자이며 유수암은 청수암에서 끊어버린 그 번뇌에 얽히며 오히려 그것을 극채색으로 펼쳐보이는 화류가(花柳家) 고급 요정이다.

 

저자는 대비되는 두 암을 이야기하며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말로 성()과 속()은 결국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임을 환기시킨다. 색은 결국 공허하고 공은 빈 것이기에 색도 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성모마리아 상을 반쯤 우려낸 게 아닐까 싶게 보살의/ 맵시라지만 눈매 고운 기생의 뒤태를 에두르고 어딘/ 지 성모마리아의 맘씨마저 서렸다고 표현한 유종인 시인의 입상(立像) - 길상사에서란 시가 생각난다.

 

의아한 것은 유수암에서 독경 소리가 흘러나오는 의외의 상황이 펼쳐진다는 점이다. 작가는 진경(陳慶)이라는 주인공을 노류장화의 헛꽃으로 대하지 않고 한 음영(陰影) 짙은 인격으로 쓰고자 했다고 말한다.(’수필집 열 길 물속은 알아도참고)

 

한무숙 작가를 한국의 버지니아 울프라고 말한다. 그러나 두 작가는 수렴하는 부분이 거의 없다고 해야 할 듯 하다. 울프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주로 쓴 모더니즘 작가이고 우울증과 신경쇠약 등으로 자살한 작가이다.

 

굳이 말하자면 한무숙 작가가 보인 못나고 어리석고 가여운 존재들, 특히 여성들에 대한 연민이 울프의 페미니즘에 수렴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낙화유수의 줄임말인 유수는 쇠잔영락을 상징하고 행운유수의 그 유수 즉 일정한 형태 없이 늘 변하는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

 

교묘하게 다의적인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올해가 작가 탄생 100주년이다. 이번 주 수요일 작가에 대해 알아보고 다음 주 수요일 문학관을 간다. 워밍업을 위해 읽기에는 무거운 작품, 그래도 읽어야 할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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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체질이 내 관심사로 갑자기 자리잡았다. 류마티즘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했던 도올 선생이 8체질 체계 창시자인 한의사 권도원 박사로부터 치료받고 완치된 후 ˝내가 만난 신은 단 두 사람이 있다. 그 하나가 모차르트요, 또 하나가 권도원이다.˝란 말을 했다. 이 사실이 더할 수 없이 흥미를 자극한다.

권도원 박사가 체질을 구약 창세기의 구절과 연관지어 설명한 기사를 읽었다. 오전에 8체질 전문가께 전화했더니 배울 생각은 없냐고 물으신다.

사실 나는 자신이 없는 사람이다. 3월 12일로 미팅 날짜를 잡았다. 내 관심사와 매치되는 어떤 강의를 함께 들은 후 체질 측정을 해주시겠다고 해 그러자고 했다.

무슨 강의인지 묻지 않은 것은 내 관심사와 관련이 있는데다가 모르는 채 맞이하는 시간이 흥미로울 것 같아서였다.

체질과 구약 창세기를 관련지은 기사에 이어 예수께서 천기는 읽지만 시대의 조류에 무관심한 사람들(바리새인?)을 위선자라 질타한 신약의 구절을 읽었다.

건강과 정치, 사회현실이라는 두 이슈에 대해 모두 성경에서 시사받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민중신학과 해방신학이 아닌 성경(신약)만 있는 그대로 읽어도 예수는 이미 사회비판적인 분이자 불의를 간과하지 않은 존재임을 알 수 있다.

혼돈과 도착(倒錯), 거대한 불의를 미워 하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있다. 물론 그 이후가 관건이다. 올곧은 정신으로 정의의 편에 동참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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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alee 2018-03-04 16: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8체질에 관심이 많은 일인입니다. 책 추천 부탁합니다.교육은 무슨 교육을 받으셨나요? 궁금합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8-03-04 16:27   좋아요 0 | URL
네.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정윤규 선생의 ‘8체질 건강 기적‘입니다. 교육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http://cafe.naver.com/ecmnaturopathy/회원입니다. 이 카페에 가입하시면 정통 권도원 8체질 교육울 체계적으로 받으실 수 있습니다.
 

완인상덕(玩人喪德), 완물상지(玩物喪志).. 사람을 함부로 대하면 덕을 잃고, 물건에 빠지면 뜻을 잃는다는 뜻.

글감을 찾기 위해서이지만 스마트폰에 빠져 아까운 시간을 허비할 때가 종종 있는 내가 새길 말이 아닐 수 없다.

책을 읽지 못하고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 이상으로 마음을 차분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뺏기는 것이 문제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전통 유가(儒家) 입장에서는 시 짓기는 여기(餘技)로 받아들여졌다. 깊이 빠져서 할 일은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의미이다.

그들에게 시 짓기가 여기였다면 본령은 자기수양이었다. 그런데 16세기 호남의 문인들은 그런 정신으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지나치지 않다면이란 전제하에 시 짓기는 물론 물건에 관심을 두거나 탐승(探勝)하는 것도 괜찮다고 본 것이다.

16세기 호남 문인이라면 담양 소쇄원(潚灑園)의 주인공 양산보, 역시 담양 식영정(息影亭)의 주인공 임억령 등이 생각난다.

좋은 누정의 주인들이었다. 적어도 400년 이상 전의 문인들이지만 책을 읽으면 쉽게 마음이 통할 것 같다.

‘숨은 듯 있는 별서(別墅)의 앵두나무 두 그루 사이에서 오래 서 있고 싶은 까닭을 어디에 물어야 할지‘란 말을 한 조용미 시인의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이란 시를 읽는다.

한 앵두나무는 가득, 다른 앵두나무는 듬성듬성 꽃을 피운 별서. 농막이 딸린 정원인 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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