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39) 임동확 시인의 시집 '누군가 나를 간절히 부를 때'를 두 번째로 샀다. 알라딘 중고서점 가로수길점에서였다. 직원이 "이 책 구입하셨는데 또 하시나요?"란 말을 했다

  

구입 장소(첫번 째는 종로점)가 다르지만 같은 알라딘 중고서점 내에서 이루어진 구매이기에 자료가 통합되어 남음으로써 생긴 일이다. 나는 "선물하려고 그래요."란 말을 했다. 안 해도 되는 말이었을까?

 

어떻든 설마 구입한 책을, 그것도 며칠 사이에 다시 구입하겠는가 생각하고 불편해 할 수도 있겠지만 마치 간단한 책 상담이라도 받은 듯 싶어 기분이 좋다.

 

이미 가지고 있는 책을 처음 보는 책으로 알고 또 구입하는 것은 탐서가들의 특성 중 하나이다. 지금껏 5000권이 넘는 책을 구입했지만 책벌레가 아니어서인지 나는 아직 그런 경험이 없다.

 

그런 사람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그들의 실수가 부럽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런 사람들은 순간적 영감으로 충만한 천재 유형의 인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들은 책도 술술 읽어낼 것 같다. 나처럼 구체 세목들을 기억하느라 애쓰지도 않고 재빨리 핵심과 요점을 파악한 뒤 그 내용을 잊었다가 필요할 때 무의식에서 잘 인출할 것 같다.

 

무의식이 있다는 것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자기동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최화 지음 박홍규의 철학’ 15 페이지) 자기 동일성이 있어서 나를 나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물질은 기억이 없으므로 자기동일성이 없어 매순간 타자화한다.(= 다른 존재가 된다.) 물질은 분자 차원에서 매순간 진동한다,(물론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자기동일성을 외부에 투영해 매순간 달라지는 물질(사물)을 동일한 것으로 파악한다. 무의식이 우리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입증하는 것이다.(최화 지음 박홍규의 철학’ 15 페이지)

 

인간은 태어났다가 죽는 과정으로서의 (존재가 아닌) 사건이다. 24시간마다 모든 세포가 교체되는 췌장, 열흘만에 전면 갱신되는 백혈구, 한달만에 대부분의 단백질이 교체되는 뇌 등 복잡한 사건의 집합이 인간이다.(송희식 지음 존재로부터의 해방’ 71 페이지)

 

존재로부터의 해방이란 말은 3(3: 인간, 시간, 공간)이 존재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하는 말이다. 3(3)은 존재가 아닌 사건이라는 의미이다. 상호의존, 상호연결되었다는 의미이다.

 

최화 교수는 인간은 기억이 있어 자기동일성이 있다고 말하고 송희식 변호사는 인간은 존재가 아니기에 자기동일성이 없다고 말한다. 두 저자가 사용하는 말은 같지만 맥락이 다르다. 최화 교수의 말은 인간이 물리적으로 동일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변화함에도 자신을 자신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한재훈 교수의 서당공부, 오래된 인문학의 길에 이런 말이 나온다. 자연에 대한 일반적 인식은 명사로서의 자연인 반면 서당이라는 공간적 특성에서 보는 자연은 명사가 아닌 형용사 또는 동사로서의 자연이라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우리가 자연을 명사로 인식하는 것은 자연을 인간이 정한 범주의 틀 속에서 대상화하는 것으로 이런 대상화로 인해 결국(結局: 바둑 용어에서 일반 용어로 유입된 말)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고 향유하고 보호할 대상으로 인식하는 오만함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자연을 형용사 또는 동사로 이해하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과 그것들 스스로의 법칙에 따라 전개되는 현상에 공감하고 그것을 존중하는 태도를 내포한다.(126, 127 페이지)

 

이는 신()을 명사로 이해하는 것과 형용사로 이해하는 것(신적인..)의 차이와도 연결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서당은 내게 그리움(경험하지도 못하고서!)의 대상이자 희유(稀有)의 매력을 가진 공간으로 인식된다는 점이다.(이미 소멸했지만..)

 

물론 나는 이 시대착오적 동경(憧憬)에서 잠시 머물다가 나갈 생각이다. 어쩌면 내가 주역(周易)’을 읽고 논어(論語)’를 읽는 것은 그 갈 수 없는 경지를 간접 체험하려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소광섭 교수의 물리학과 대승기신론도 인용하고 싶었지만 큰 공사(!)가 될 듯 해 생략. 다만 이 세계는 찰나생 찰나멸하는 (실체가 아닌) 사건들의 집합이라는 말은 하고 싶다. 송희식의 존재 = 소광섭의 실체. 이제 다시 과학책들 좀 읽을 때가 되었다. 이강영 교수의 스핀’, 리언 레더먼, 크리스토퍼 T. 힐의 힉스 입자 그리고 그 너머’, 사카이 쿠니요시의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상대성이론같은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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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공부, 오래된 인문학의 길
한재훈 지음 / 갈라파고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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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시인이 초등학교에 들어 가기 전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는 사실을 알고 흥미를 느끼던 차에 한재훈 교수의 서당 공부, 오래된 인문학의 길이란 책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입학 통지서를 받은 일곱 살 시골 서당으로 내려가 15년간 한학을 공부해 사서삼경을 뗀 뒤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간 저자의 특별한 이력이 반영된 책이다.

 

현재 저자는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본문에는 1904년 생인 겸산(兼山) 안병탁 선생이 아흔 살 시절 스물두 살의 저자에게 편지를 보냈을 때 노우(老友)라는 표현을 썼다는 구절이 있다.(207 페이지) 이 구절에 따르면 저자와 스승의 나이 차이는 68년이다. 그러니 저자는 1972년생이고 서당 공부를 한 시기는 1978년부터 1993년 사이이다.

 

겸산(兼山)이란 주역의 대성괘 가운데 하나이다. ()을 뜻하는 간()괘가 겹친 괘이다. 산처럼 흔들리지 않고 굳센 기질을 의미한다. 스승이 제자에게 벗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의미심장하다. 더구나 스승은 존함 뒤에 조아릴 돈()이란 글씨를 쓰기까지 했다. 퇴계(退溪)도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하지 않고 강론(講論)했다는 표현을 했다.

 

공자는 제자들이 자신을 두고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아신 분이라 칭하자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알았던 사람이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여 민첩하게 추구했던 사람이라 말했다.(176 페이지) 또한 누구보다도 배움에 목말라 했기에 열린 마음으로 누구에게라도 배우려 했다.(176 페이지) 스승의 완고한 자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유연한 행동이다.

 

스승은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가장 좋은 벗이다. 스승과 벗의 관계를 말한 사상가가 있다. 명나라 양명학자 탁오(卓吾) 이지(李贄)이다. “스승이 될수 없으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고,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스승으로 섬길수 없다.”는 말이 그의 말이다. ‘분서(焚書)‘로 유명한 사상가이다.

 

저자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를 이야기한다. ’소학(小學)‘에 나오는 이 말은 스승으로부터 받는 은혜가 부모로부터 받는 은혜만큼 크다는 의미이다.(162, 163 페이지) 스승은 선택되는 존재이다. 임금이나 부모와 달리. 어버이나 임금은 바꿀 수 없지만 스승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바꿀 수 없는 관계는 간함을 통해 개선을 위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겠지만 바꾸는 것이 허용되는 관계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166 페이지)

 

이 부분에서 나올 말이 온고지신(溫故知新)이다. ()은 지속적으로 열을 가하는 것 즉 변화 이전에 있는 어떤 것에 지속적으로 열을 가함으로써 변화할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하는 것이다.(170 페이지) 이 말에는 누구든 완벽할 수 없기에 반드시 끊임없는 배움의 열정을 가지고 늘 새롭게 하는 자기양성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스승이라는 의미가 있다.(171 페이지)

 

군사부일체를 말하며 군과 사와 부라는 주체가 아닌 그들로부터 비롯되는 은혜가 갖는 의미 또는 성격에 주의해야 한다(156 페이지)고 말한 저자는 예기(禮記)’에 나오는 교학상장(敎學相長)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을 선보인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함께 성장한다는 의미일 수 있지만 그보다 본질적으로는 가르침과 배움이 서로를 성장시킨다는 의미이다.

 

교학상장은 한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인바 이때 그 현상의 주체는 교사(敎師)이다.(187 페이지) 군과 사와 부라는 주체가 아닌 그들로부터 비롯되는 은혜 즉 추상 명사에 주의해야 하듯 교학상장에서도 스승과 제자라는 주체가 아닌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추상 명사에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논어위정편에서 온고이지신을 말한 공자는 예기(禮記)’ ‘표기(表記)’편에서 도()를 향해 가다가 중도에서 그만 두더라도 몸이 늙어가는 줄도 잊고 남은 날이 부족한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부지런히 하루 하루 애쓰다가 죽은 뒤에나 그만 둘 것이라는 말을 했다.

 

지속적으로 열을 가하는 것 즉 온()을 말한 공자의 다른 말인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은 깃털의 총체로서 날개를 뜻하고(199 페이지) 날개의 주체인 새는 특정 종류의 새가 아니라 날갯짓을 할 수 밖에 없는 존재 즉 어린 새이다.(200 페이지) 이는 공부에 끊임없이 에너지를 투입하는 것과 늘 새롭게 자기 수양의 준비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세상이란 없었던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만나지 못한 세상을 말하며 그 새로운 세상이란 세상이 변해서 우리 앞에 던져진 세상이 아니라 우리가 변화하고 성장했을 때 만나게 되는 세상이다.(203 페이지) 날마다 새로워지고 또 날마다 새로워진다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과 스스로 힘써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쉬지 않음을 의미하는 자강불식(自强不息)을 연상할 만하다.

 

저자가 서당 공부를 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의사로부터 비롯되었다. 어머니가 반대해 저자에게 선택권이 부여되었는데 저자가 형처럼 서당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말을 함으로써 전격 결정된 사안이다.(32 페이지) 물론 저자의 아버지는 삼형제를 똑같이 학교에 보내지 않고 서당에 보내 공부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자의 아버지가 너희들 가운데 한 사람 정도는 대학에 가서 현대학문을 겸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는 말을 했다. 저자는 아버지의 이 뜻에 따라 현대학문을 공부하게 되었다. 누가 새로운 공부를 할지는 형제들이 알아서 정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는데 저자가 선택된 것이다.(110 페이지)

 

검정고시와 대학 입시 준비를 거쳐 고려대 철학과에 진학한 저자는 동서양의 철학을 섭렵했다. 저자가 인상 깊게 읽은 책들 가운데 하나로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들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서당 교육과 서양식 교육의 차이를 질적으로 논할 수 있게 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서당은 계단처럼 나이가 다른 학생들이 함께 기거하며 공부하고 예절을 배우는 공동체이지만 저마다 다른 글들을 읽고(61 페이지) 스승으로부터 배우지만 공부란 결국 자율적으로 보완하고 관리해가는 것(75 페이지)이며 어떤 글들을 더 읽어야 하고 어떤 글들을 덜 읽어도 되는지는 철저하게 자신이 알아서 할 일이다.(100 페이지)

 

서당에서는 100번의 성독(聲讀: 소리내어 읽기)을 통해 문장을 암송(暗誦)을 할 것을 요구한다. 서당에서 암송을 중시하는 것은 그것이 문리(文理)가 트이게 하기 때문이고(64 페이지) 글을 장악하게 하기 위해서이다.(68 페이지) 문리에 대해 저자는 글의 결을 이야기한다. 장악에 대해 저자는 글을 충분히 소화해 전체적 이해가 가능한 상태가 되는 것이라 말한다.

 

저자의 글을 통해 전통 한학 공부를 하는 서당과 현대식 학교의 분명한 차이를 알 수 있다. 현대의 교육 체계는 너무 인위적이고 통제적이고 획일적이다. 서당은 그렇지 않다. 자율적이고 인간적이고 학문적이다.

 

저자가 공부한 서당은 초동서사(草洞書舍)란 곳이다. 스승에게 받아들여질 때 우여곡절이 있었다. 저자는 먼저 공부하고 있는 형이 스승께 동생을 제자로 받아주실 것을 말할 것이라 생각했고 형은 동생인 저자가 청할 것이라 생각해 결과적으로 아무런 말 없이 선생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결과가 빚어졌다.

 

이에 선생님이 지금 뭐하는 것이냐 물으셨고 저자는 글을 배우려 한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네가 언제 내게 글 배우겠다고 한 적이 있으며 내가 언제 너를 가르치겠다고 한 적이 있느냐 하셨다.(141 페이지) 급기야 선생님은 저자에게 책 들고 당장 나가라는 말을 했다. 사태가 결말이 난 것은 선배들이 선처(善處)를 청해서였다.

 

서당 공부, 오래된 인문학의 길은 촘촘한 인문학적 사유가 시종 흥미롭게 읽히는 책이다. 나로서는 신영복 선생님의 책들을 읽을 때 느꼈던 것과 비교할 만한 감동을 느꼈기에 상당히 고무적임을 밝힌다.

 

예에 깃든 정신이 아까워 양을 바치는 의식을 보존했다는 의미의 애례존양(愛禮存羊)의 고사를 이야기하며 이미 없어져 버린 서당을 통해 그 안에 스며있는 소중한 가치를 음미하고 그런 가치를 통해 오늘 우리가 직면한 문제 상황에 새로운 해결의 단초를 찾아보고자 한다는 말을 한 머리말에서부터 배움으로 인해 나의 삶이 변화, 성장하고 그로 인해 좋은 세상을 위한 파장이 나로부터 비롯되게 하라는 마지막 장의 마지막 말까지 저자의 책은 수미일관하고 논리적이며 따뜻한 인문학적 성찰과 사색으로 빛난다.

 

깊게, 치밀하게 사유하기의 전범(典範)을 본 느낌이다. 깊고 치밀하게 읽는다는 것은 새로움을 담보하려는 시각이 있어야 가능하고 또 그런 읽기를 통해 새로운 시각을 갖출 수 있는 것이리라.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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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가 출간되었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의 저자 조지 레이코프와 그의 제자 엘리자베스 웨흘링이 함께 쓴 책이다. 2012년 출간된 토마스 프랭크의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같은 책과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책이다.

 

레이코프와 웨홀링의 책은 정치가 환멸을 부르는 우리 현실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물론 나 뿐이 아니겠지만 적폐세력이 만들어내는 환멸을 문재인 대통령이 만들어내는 상식과 합리의 새 정치를 보며 견디는 것이 최근의 큰 흐름이리라.

 

인지언어학의 창시자이기에 충분히 예상한 바이지만 레이코프와 웨흘링의 책에서는 은유가 상당한 비중으로 다루어졌다. 은유는 시를 논할 때만 만나는 개념이 아니라 인간 사유와 언어활동에 필수불가결한 수사(修辭)이다.

 

그래서 이 책에 많은 관심이 간다. 토마스 프랭크의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는 자기편을 꾸짖는 저자의 일갈을 접할 수 있지만 이번 책에서는 어떤지 모른다.

 

단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우리와 미국의 사정이 다르다는 점이다. 미국 보수 정당은 교묘한(수준 높은?) 프레임 조작을 행하지만 우리 적폐세력은 종북 프레임과 색깔론 외에 특별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 그때 그때 다르게 아무 말이나 하는 막무가내 어법도 있다.

  

레이코프와 웨흘링은 사람들에게 정당의 정치적 프레임을 파악할 것을 주문한다. 한 철학자가 한 말을 참고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철학을 하는 한 독사(doxa)에 만족하지 말고 에피스테메(episteme)를 택하는 것은 사활(死活)의 문제”(최화 지음 박홍규의 철학’ 79 페이지)라는 말이다.

 

독사는 그릇된 견해, 에피스테메는 참된 앎을 의미한다. 나는 앞서 인용한 철학자의 말을 정치적 선택을 하는 한 프레임의 실상을 파악해 바르게 판단하는 것은 사활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말로 바꾸어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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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삶의 재발명 마이크로 인문학 9
임지연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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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임지연의 사랑 삶의 재발명격렬한 이십대를 보내고 마음의 평화를 고대하면서 어서 빨리 늙어가기를 바랐던 저자가 몇 가지 사랑에 대한 질문들을 살려 기획한 책이다. 저자가 가졌던 첫 번째 질문은 폭풍의 언덕에서 보듯 서로를 파괴하는 삶의 방향으로 나아간 역설적인 사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다.

 

두 번째 질문은 사랑은 청춘의 전유물인가, 이다. 세 번째 질문은 사랑은 왜 어려운가, 이다. 네 번째 질문은 사랑 이야기는 왜 여전히 매력적인가, 이다. 저자는 몇 가지 당위 차원의 말을 제시한다.

 

사랑의 고통이 어디서부터 오는가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는 것(12 페이지), 사랑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랑의 매력적인 이야기가 행복한 삶의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13 페이지), 사랑의 주체들은 사랑의 역설적 구조를 이해하고 성찰하면서 사랑이 작동하는 법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44 페이지), 나의 모순적 정체성과 상대의 타자적 성격을 이해할 때 사랑은 가능하기에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인가, 사랑하는 상대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것(70 페이지) 등이다.

 

저자는 재난과 위험이 일상화된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 사랑하는 이들과 영원히 헤어질지 모른다면 오늘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물은 뒤 사람들은 사랑으로부터 그 해답을 찾으려 한다고 답한다.(17 페이지)

 

저자는 사랑을 근본적으로 차이에 대한 경험으로 정의한다.(57 페이지) 또한 사랑이 타인과의 친밀감, 연대, 열정적 관계맺음이라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차이에 대한 경험이라 말한다.(64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차이가 있기에 사랑이 가능하다. 저자는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의 주인공인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을 예로 들어 사랑의 의미를 전한다.

 

저자는 히스클리프에 대해 그는 나보다 더 나 자신이라 생각한 캐서린, 캐서린을 향한 사랑을 땅 밑에 있는 영원한 바위로 인식한 히스클리프의 사랑이 파멸에 이른 것은 융합적 사랑과 영원한 사랑의 가치에 집착했기 때문이라 정의한다.(59 페이지)

 

사랑은 이중적인 것이 공존하는 역설 구조로 작동하기에 어렵다.(44 페이지) 그것은 안정감과 불안정성, 구속과 자유, 희생과 자기 보존, 만남과 이별, 쾌락의 순간성과 지속적 연대감,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부드러움과 폭력, 더 사랑하는 자와 덜 사랑하는 자의 비대칭성, 사랑의 맹세와 미래의 불확실성, 사랑의 의지와 감정의 변화 등이다.

 

저자는 존 그레이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가 지닌 문제점을 정밀 분석한다. 남성 우월주의, 그리고 여성을 비사회적 존재로 보는 것 등이다. 모든 인간은 복잡하고 변화하며 성찰하는 정체성을 형성하며 살아간다. 따라서 내가 사랑하는 상대 역시 복잡하고 다면적이며, 변화하면서 새롭게 형성되어 가는 정체성을 갖는다.

 

남자/ 여자 구분법은 시대마다 달라지며 최근에는 사회문화적으로 형성된 것이기에 해체되거나 변화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고정적 성차만으로 상대를 규정할 때 사랑의 관계는 지속되기 어렵거나 왜곡될 수밖에 없다.(52 페이지) 내가 사랑하는 상대는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사람이고 내가 소유하거나 지배할 수 없는 사람이며 나를 자기동일성의 감옥에서 벗어나 새롭게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65 페이지)

 

사랑은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65 페이지) 사랑은 나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유통되고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정의(21 페이지)를 소개한 저자는 사랑과 자본주의의 모순적 관계를 탁월하게 분석한 에바 일루즈의 견해를 전한다. 에바 일루즈는 감정 수행성 체제에서 감정 진정성 체제로의 변화를 이야기했다.

 

즉 사랑은 에티켓 매뉴얼대로 수행하는 것이었다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감정 진정성 체제로 변했다. 사랑의 규범 대신 감정의 진정성으로 중심이 이동했으며 성적 매력이 두드러지면서 섹스는 자본화하고 결혼은 노동시장처럼 경쟁의 장으로 진입했다.(85 페이지) 현대의 사랑을 진정한 사랑의 감정과 결혼 시장이라는 이중적 코드가 맞물린 복잡한 상황에 처한 것으로 보는 저자는 현대 이후의 사랑은 사회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우리 선택에 달렸다고 결론짓는다.(88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사랑은 역사적으로 변화하지만 역사의 포로가 아닌 인간(개인)은 그 역사 안에서 사랑을 만들어갈 수 있다.(88 페이지) 사랑 자체가 아니라 어떤 사랑인가를 중요한 문제로 정의(14 페이지)한 저자는 사랑의 개념을 역사적으로 성찰하면서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지가 관건이라 말한다.(88 페이지)

 

사랑의 개념은 변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현재의 사랑은 어떻게 발견하고 미래의 사랑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할까?(107 페이지) 저자는 낭만적 사랑을 비판적으로 본다. 낭만적 사랑이 원리가 될 때 사랑은 연인들의 삶에서 유리(遊離)되고 관계를 파멸로 이끌 수 있다.(109 페이지)

 

돈과 계급을 초월하는 사랑, 무결점의 순수한 사랑, 자기를 과감히 던지고 헌신하는 사랑, 언어와 국가를 뛰어넘는 사랑,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 등이 그것이다.

 

저자는 위대한 개츠비를 언급한다. 그가 위대한 것은 이미 과거가 되어 버린 사랑을 현실에서 다시 이루려 했기 때문이다.(111 페이지) 개츠비는 순수한 사랑이라는 환상을 추구하다가 총에 맞는다. 이상적 사랑에 대비되는 현실적 사랑이나 현실에 굴복한 지배적 사랑이 아니라 이상적인 것이 현실 속에서 발견되고 발명되는 사랑이 필요하다.(115 페이지)

 

낭만적 사랑은 융합적이다.(116 페이지) 저자는 일심동체를 강하게 비판한다. 기부장적 폭력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일심동체는 하나가 되는 사랑, 융합적 사랑, 하나의 기준으로서의 사랑을 추구하기에 사랑을 왜곡한다. 융합적 사랑은 상대를 나와 같은 존재로 만든다는 점에서 나르시시즘으로 변질된다.

 

나와 같은 존재를 사랑하는 것, 그것은 사랑인가? 그것은 자기에 대한 사랑이지 타인에 대한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의 왜곡이다.(120 페이지) 낭만적 사랑은 영원을 추구한다.(121 페이지) 변화하지 않는 절대를 추구하는 것이다. 낭만적 사랑이 지향하는 영원성은 감정의 불변성과 같은 말이다.(122 페이지) 사랑에 막 빠진 사람들은 사랑은 변하지 않아야 하고 죽을 때까지 사랑해야 한다고 믿는다.(124 페이지)

 

그러나 만일 사랑이 변하지 않는 것이라면 상대에게 요구하지 않아도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즉 변하기 때문에 변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주문을 걸 듯. 사랑은 변한다. 퇴색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양상이 달라지고 질적으로 변화무쌍하다는 의미이다.(125 페이지) 저자는 18세기 후반 산업자본주의와 함께 발흥한 낭만적 사랑(128 페이지)에는 발생적으로 탁월한 가치들이 내장되어 있다고 본다.(129 페이지)

 

낭만적 사랑이 열정적 사랑을 밀어내고 코드화된 것은 사랑이 계급, 계층, 나이, 권력을 초월할 수 있는 강력한 힘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알랭 바디우는 사랑을 둘이 등장하는 하나의 무대라 정의했다.(138 페이지) 바디우는 레비나스적 타자는 신적 매개를 통해 전체 타자가 된다고 비판한다. 그것은 타자를 위해 나 자신을 망각하는 경험이기에 융합적 사랑의 변형이다.(138 페이지)

 

저자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죽음, 젊은 베르테르의 자살,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죽음, 강명화의 음독 자살, 윤심덕과 김우진의 정사(情死), 개츠비의 죽음은 사랑의 고통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완성하기 위한 죽음이라 말한다.(140 페이지) 불완전한 사랑을 완전하게 보존하기 위해 선택된 죽음이라는 의미이다.

 

바디우는 사랑을 구축(構築)의 관점으로 접근한다.(147 페이지) 바디우는 사랑을 끈덕지게 이어지는 일종의 모험으로 정의한다. 진화 생물학은 인간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고정된 질서를 합리적으로 해명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이다.(148 페이지)

 

저자가 제안하는 대안은 초기 사랑의 선언과 고백을 지속적인 삶 속에서 반복하고 재선언하는 것이 사랑의 독창성이며 사랑의 재발명이라는 것이다.(158 페이지) 물론 일부일처제는 그것을 깨트리는 불륜과 혼외정사를 통해 유지되고 있다며 다양한 연애 형태와 가족 형태, 결혼 제도를 상상하고 고안할 필요가 있다는 말도 과제처럼 제시된 것이다.(150 페이지)

 

문제는 초기 사랑의 선언과 고백을 지속적인 삶 속에서 반복하고 재선언하는 것과 다양한 연애 형태와 가족 형태, 결혼 제도를 상상하고 고안하는 것이 조화롭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을 지적하고 싶다.

 

작고 얇은 책임에도 수많은 것들을 배우고 공감했다. ’사랑 삶의 재발명‘(a)은 최화 교수의 박홍규의 철학‘(b)을 읽다가 지치고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아 읽은 책이다. ba의 철학적 문제들 가령 타자, 동일성, 외부 등의 단어를 이해하는 데 단서가 되었다. 바디우의 레비나스 비판이 흥미로웠다. 섣불리 건드릴 사상가가 아니지만 시원하다. 바디우의 사랑 예찬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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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무덤 앞에 서서 다시 존재와 무를 생각한다. 너는 가고 없지만 너의 추억은 가득히 충만해 있다. 너는 무(無)가 된 것이 아니고 부재(不在)중인 것이다.

네가 사랑하던 발레리의 ‘풍부한 부재를 이즈음처럼 절감한 때는 없다. 이 비탄과 유폐의 계절 속에서도 풍부한 부재는 얼마큼의 위안을 주는 것이다.

너는 비면 위에 황홀하게 비치고 간 햇빛의 일순이었고 그 아름다움은 사라져도 아름다움의 추억은 남았다.

너 까닭에 이 괴로움, 이 아픔을 갖지만 너는 태어나야 했고 많은 추억을 남겨주어야 했고 어쩔 수 없이 슬픔과 아픔도 남겨야 했다.

그것은 섭리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도 신의 섭리에 간섭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한무숙 작가가 스물 일곱 살의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고 쓴 ‘우리 사이 모든 것이‘란 소설의 한 구절이다.

한무숙, 박경리, 박완서 세 작가의 참척을 하나의 키워드로 해 자료를 찾다가 접한 내용이다.

철학적이고 종교적이기까지 한 높은 수준의 인식이 수렴된 명문장이다.

오늘 이산하 시인의 페북에서 박경리, 박완서 두 분께서 타계 직전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는 말씀을 묵계라도 한 듯 하셨다는 글을 읽었다.

한무숙 작가는 어땠을까? 궁금하다. 자료를 찾아내는 재미를 누리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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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18-03-11 16: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완서선생님 <그 많던 싱아..>에서 고교 때
한무숙이랑 동창이었다는 얘기를 한 기억이 나 찾아보니
박선생님 동창은 한무숙이 아니라 한무숙 동생 한말숙이군요.

박선생님 참척은 알았는데 한무숙선생님,박경리선생님도 참척 겪었단 얘긴 첨 들어보네요.

벤투님 서재에서 많이 배웁니다.

이곳 동두천에도 드디어 봄이 왔어요. 연천도 마찬가지리라 생각해요.

환절기 건강 조심하세요.

벤투의스케치북 2018-03-11 21:0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박완서, 박경리, 한무숙 작가.. 다 좋아하는 작가들이지요. 이곳도 많이 봄 답습니다.. 잘 지내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