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루덴스 - 놀이하는 인간
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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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동물에게 다 같이 적용되며, 생각하는 것이나 만드는 것 만큼 중요한 것이 놀이이다. 놀이에는 뜻이 있다. 여기에서 호모 루덴스란 개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생각하는 것이란 호모 사피엔스, 만드는 것은 호모 파베르를 염두에 둔 말이다. 놀이는 본능으로도, 의지나 정신으로도 설명할 것이 아니다.

 

물론 놀이를 인정함에 따라 우리는 정신을 인정한다. 놀이는 총체성으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놀이는 어떤 것의 목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한다. 세계가 맹목적인 힘의 작용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된다고 보면 놀이는 말 그대로 하나의 과잉(過剩: superabundance)이 된다.

 

abundance(과잉)란 단어의 마지막 부분 즉 dance에 눈이 간다. 다시 말해 superabundance(놀이를 대표하는) dance냐가 관건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놀이는 비이성적인 것이다. 신화도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놀이이다. 온갖 분방한 상상 작용에도 불구하고 환상적인 정신은 진실과 농담의 경계선 위에서 놀이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진정한 의미의 순수한 놀이가 문명의 주된 기초 중 하나라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웃는 동물이란 개념이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개념보다 인간을 더 잘 묘사할 수 있다. 놀이는 지혜와 어리석음의 대립으로 설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참과 거짓, 선과 악의 대립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놀이는 자발적인 것이다.

 

명령에 의한 것은 이미 놀이가 아니다. 놀이는 언제든 연기될 수 있고 중지될 수 있는 여분의 것이다. 놀이는 문화적 기능이 있기에 사회적으로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놀이는 제한된 시간과 장소 속에서만 존재한다. 놀이는 질서를 창조하며 질서 그 자체이다. 놀이는 불완전한 세계 속으로, 혼돈된 삶 속으로 일시적이고 제한된 완벽성을 가져다준다.

 

놀이는 우리가 사물 속에서 인식하고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두 가지 성질 즉 율동과 조화로 충만해 있다. 제의(祭儀)는 좀더 신성하고 좀더 성스러운 진지함이다. 그런데 이것이 놀이가 될 수 있을까? 그렇다. 제의는 참여자들을 다른 세계로 옮겨놓는다는 점에서 놀이이다.

 

플라톤은 성스러움을 놀이라고 불렀다. 이는 물론 신성모독이 아니라 놀이의 개념을 정신의 최고 영역에까지 올린 것이다. 놀이가 제한된 공간에서 행해지듯 제의도 성스러운 영역에서 행해진다. 공동체의 종교의식이 고귀하고 진지하듯 무의식적이고 순수한 진짜 놀이도 매우 진지하다.

 

놀이는 자유분방함과 무아경의 두 극단 사이에서 움직인다. 음악은 시간과 공간의 엄격한 한계 내에서 시작되고 끝나며 반복할 수 있고 그 본질은 질서, 율동, 변화로 구성되어 있으며 청중과 연주자를 동시에 일상적인 생활을 벗어난 기쁨과 평안의 세계로 데려다주기에 청중과 연주자를 매료하고 사로잡는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음악을 놀이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완전히 납득 가능한 이야기이다. 놀이의 반대어는 진지함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두 반대어를 상호 보완적으로 결합시키는 것이다. 가령 놀이 진지함(Spiel Ernst)이란 말이 그것이다. 놀이는 문화로 변하지 않는다. 다만 문화의 초기 단계에 놀이적 성격을 갖는다.

 

하나의 문화가 진행됨에 따라 놀이와 놀이 아닌 것 사이의 본래적 관계는 정적인 상태로 남아 있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놀이 요소는 대개의 경우 종교 의식 영역으로 흡수되어 버리면서 점차 그 세력을 잃는다. 물론 어느 시대에든, 고도로 발전된 문명에서까지도 놀이의 본능은 매우 강력한 힘으로 되살아나서 개인이나 대중을 거대한 놀이의 황홀경 속에 빠져들게 할 수 있다.

 

저자는 포틀래치를 단순한 투기(鬪技) 본능으로 보며 그것에 엄격한 놀이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문화는 놀이로서 시작되는 것도 아니고 놀이로부터 시작되는 것도 아니고 다만 놀이 속에서 시작된다. 놀이는 문명보다 더 오래되고 원초적인 것이다. 라틴어에서 성스러운 경기가 놀이라는 단순한 말로 불렸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모든 문화에서 투기적 관습으로 특징지어지는 놀라운 유사성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분야는 인간 정신의 영역 즉 지식과 지혜의 분야이다. 시를 짓는 것도 놀이 기능이다. 그것은 정신의 놀이터 즉 정신이 그것을 위해 창조해주는 그 독자의 세계 속에서 진행된다.

 

이 속에서 사물은 일상생활에서 갖는 외관과는 매우 다른 외관을 갖는다. 시는 진지함 너머에 즉 어린이, 동물, 미개인, 예언자가 속하는 보다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수준, , 매혹, 엑스터시, 웃음의 영역에 속한다.

 

고대 시인의 진정한 명칭은 라틴어로 바테스(Vates) 즉 악마에 홀린 사람, 신들린 사람, 헛소리 하는 사람이다. 이런 자격은 동시에 특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 원초적 문화 창조 능력에서 볼 때 시는 놀이 속에서, 놀이로서 탄생한다. 그러나 항상 그 신성함에도 불구하고 쾌활한 탐닉, 환락, 흥겨움과 접해 있다.

 

시적 능력은 사교적 모임, 씨족과 부족, 종족 사이의 격렬한 논쟁 속에서도 개화한다. 순수한 미적 욕구의 만족과는 멀리 떨어진 시라는 형식이 공동 사회의 생활을 위해 필수적이고 중요한 것들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상태는 오늘날의 진보된 문화 속에서도 그대로 간직되어 있다.

 

세계 어디서나 시가 산문에 선행한다. 진지한 것, 성스러운 것을 표현하는 적절한 수단은 시 뿐이다. 신화는 어떤 형식을 취하든 항상 시이다. 시와 놀이의 유사성은 외형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창조적 상상력의 구조에서도 그 유사성은 나타난다. 시구의 전환, 주제의 전개, 분위기의 표현 등에는 항상 놀이 요소가 작용한다.

 

그 자체가 경쟁의 한 형식인 시는 고대의 수수께끼 기합과 거의 구별할 수 없다. 후자는 지혜를 만들고 전자는 아름다운 언어를 만든다. 시적 언어가 이미지를 다룬다는 것은 이미지를 가지고 논다는 것이다. 어떤 은유의 효과가 사물과 사건을 살아 있는 것과 움직임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묘사하는 것에 있다면 그와 동시에 우리는 의인화의 과정에 접어들게 된다.

 

형체도 생명도 없는 어떤 것을 한 인격체로서 묘사한다는 것은 모든 신화 형식의, 그리고 대부분 모든 시 짓기의 정수(精髓)이다. 기술적으로 하나의 표현 형식으로 간주되는 궤변법은 원시적 놀이와 많은 연관성을 갖는데 그런 연관성을 우리는 이미 소피스트의 전신인 바테스에게서 발견한 바 있다.

 

놀이와 음악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제의(祭儀), , 음악, 놀이의 관계는 플라톤의 에 쉽게 잘 서술되어 있다. 플라톤은 신들이 슬픔을 안고 살아 가도록 태어난 인간을 불쌍히 여긴 나머지 그들이 고통으로부터 잠시 쉴 수 있도록 추수 감사 축제를 제정하고 그들에게 뮤즈들의 우두머리인 아폴로와 디오니소스를 보내 그들의 친구가 되게 했다고 썼다.

 

음악에 관련된 모든 것이 놀이 영역에 머무는 것이라면 음악의 쌍둥이 자매라 할 무용은 더욱 그렇다. 놀이와 춤의 관계는 너무 밀접해서 거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이다. 춤이 그 자체 안에 어떤 놀이적인 것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놀이를 이루는 데에 절대 필요한 하나의 구성 요소가 춤이라는 말이다.

 

둘 사이의 관계는 직접적인 참여의 관계이며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춤은 특수한 형식의 놀이이며 특별히 완벽한 형식의 놀이이다. 조향 예술의 경우에는 놀이와의 연관성이 시, 음악, 춤의 경우처럼 명확하지 않다. 질료의 구속을 받으며 또한 그 질료가 허용해주는 형태의 한계에 매인다는 사실 때문에 조형 예술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놀이가 될 수 없으며 음악과 시에는 허용된 천상의 공간으로 날아오를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춤은 변칙적이 위치에 있다. 춤은 음악적이며 동시에 조형적이다. 리듬과 동작이 주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음악적이며 불가피하게 물질에 매이기 때문에 조형적이다. 춤은 조각과 마찬가지로 조형적 창조이지만 순간적으로만 그렇다.

 

제의, 예술, 놀이 사이의 언어적 연관성을 나타내는 말이 아갈마이다. 환희, 기쁨, 축하하다, 빛나게 하다, 자랑하다. 기뻐하다, 치장하다, 장식, 내보이는 물건, 귀한 물건, 입상(立像), 특히 신상(神像)을 의미한다. 저자는 서유럽 문명을 놀이의 아종(亞種)으로 분류한다.

 

저자는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은 어느 정도까지 놀이 형식을 유지하고 있는지 묻는다. 저자는 스포츠는 이제 점점 체계화하고 조직화되어 순수한 놀이적 특질의 어떤 부분이 상실되었음을 지적한다. 프로페셔널의 정신은 이제 진정한 놀이 정신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움과 내키는 대로 하는 태평스러움을 상실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아마추어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따라서 아마추어들은 열등 콤플렉스에 시달림으로써 스포츠를 진정한 놀이 영역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만들어 마침내 스포츠는 독립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정신과 손이 가장 자유롭게 움직이는 분야에서 특히 놀이 기능이 작용한다.

 

놀이는 도덕적 규범의 영역 바깥에 놓여 있다. 놀이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의지가 우리에게 명하는 어떤 행동이 진지한 의무인가 또는 놀이로서 적법한가를 결정해야 한다면 그때에는 우리의 도덕적 양심이 즉시 그 시금석을 제공할 것이다. 행동하려는 우리의 결심 속에 진실, 정의, 동정, 용서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 행동이 놀이인가 진지한 것인가, 하는 우리의 걱정스러운 의문은 곧 무의미해지고 만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의 저자 부르크하르트가 중세와 르네상스를 명확하게 대비시킨 데 비해 하위징아는 중세의 가을에서 르네상스를 중세의 결실로 보았다.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는 문화사 연구의 자연스런 귀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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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abundance vs dance

 

세계가 맹목적인 힘의 작용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된다고 볼 경우 놀이는 하나의 과잉(superabundance)이 된다. 요한 하위징아가 놀이하는 인간(호모 루덴스)’에서 한 말이다.

 

하위징아는 춤만이 아니라 시, 음악, 운동 등 여러 가지를 놀이로 보았다. 인간과 동물에게 다 같이 적용되며, 생각하는 것이나 만드는 것 만큼 중요한 것이 놀이이다. 놀이에는 뜻이 있다.

 

superabundance(과잉)란 단어의 뒷 부분 즉 dance에 눈이 간다. 다시 말해 superabundance(놀이를 대표하는) dance냐가 관건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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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어떤 이가 꽃차 강의를 하는 분께 차()는 선()인데 6(1, 2시간) 강의로 방대한 내용을 다 다룰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했다. 내가 질문을 받은 것이 아니어서 참견하지 않았다. 마음이 편치 않아 입장을 정리해본다.

 

질문자는 다선일미(茶禪一味)란 말을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꺼냈으리라. 나는 다선일미의 기원을 알고 싶지 않다. 하지만 다선일미라는 말은 다()의 의미를 선()으로 볼 수 있다는 의미이지 모든 다()가 선()과 같(은 원리를 갖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물론 설령 다와 선이 하나의 원리를 갖는다 해도 문제 될 것은 없다. 여러 가지 차원의 말을 할 수 있다. 가령 그 부족한 시간은 입문 과정으로 보면 될 것이다.

 

질문자는 심화 과정이 있는지 묻지 않았다. 나라면 그것부터 물었을 것이다. 만일 심화 과정이 없어 그 제한된 12시간으로 강의가 끝난다 해도 의미가 없지 않다. 글쓰기 훈련 가운데 같은 주제의 글을 분량을 달리 해 여러 번 쓰는 것이 있다..

 

어떤 강의든 글을 그렇게 여러 분량으로 쓰듯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뜬 구름 잡는 글처럼 보이지만 고도로 응축된 법문을 보며 시비 거는 사람은 없다. 그 추상성과 은유의 과잉을 질타할망정 왜 짧게 이야기하느냐 따지지는 않는 것이다.

 

박동춘 교수의 책에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차는 처음에 약으로 이용되다가 점차 정신 음료로 발전해갔다는 것이다. 차에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기능이 있음을 알고 수행에 결합시킨 것은 선종(禪宗)이었다.

 

다도(茶道) 역시 성쇠(盛衰)의 운명에서 예외가 아니다. 차 문화가 쇠퇴한 시기에 차 활용은 원시적 응용 범위를 넘지 못했다. 저자는 다산(茶山)이 차를 체기(滯氣)를 내리는 용도로 썼다고 말하며 그렇기에 그가 아무리 한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시대의 걸물이었다 해도 차에 대한 안목은 저급한 수준이었다고 결론짓는다.(‘맑은 차 적멸을 깨우네’ 182, 183 페이지)

 

그런데 나는 이 말에 수행(修行) 도구로 쓸 것이 차 밖에 없는가, 란 말을 하고 싶다. 스님도 아닌 다산이 치열한 공부에 지쳐 울체(鬱滯)된 머리를 차로 푸는 것이 문제인가?

 

학식(성리학) 높고 의례(儀禮)에 엄격하고 다() 즉 선()에 능했던 조선 선비들은 개인적으로는 훌륭한 인품을 지녔지만 정치 영역에서는 그런 고매함을 무색케 하는 아이러니를 보였다.

 

정신분석학은 개념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아 현실을 이해하고 분석하기에는 역부족이고 다양한 정신분석 이론을 모두 모아 놓아도 그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현실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다(홍준기 지음 라캉, 클라인, 자아심리학’ 119 페이지)는 글이 떠오른다. 정신분석학이란 말을 다도(茶道)(뿐이 아니지만)라는 말로 바꾸어보라.

 

덧붙여 분석가와의 둘만의 좁은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민남을 떠나 많은 경험을 쌓고 다양하게 독서하고 폭 넓게 사유하며 자신이 옳다고 믿는 분야에서 구체적으로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이 더 좋은 치료 효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같은 책 109 페이지)는 구절도 아울러 음미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 참고로 말하면 저자 홍준기 교수는 라캉, 알튀세르 연구로 박사가 된 정신분석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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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클라인, 자아심리학 - 정신분석의 역사 속에서 <에크리>, <세미나> 바로 읽기 1
홍준기 지음 / 새물결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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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들었다는 의미의 여시아문(如是我聞)이란 말을 응용해 나는 이렇게 이해했다는 의미의 여시아해(如是我解)란 말을 해야겠다. 홍준기 교수의 '라캉, 클라인, 자아심리학'을 다 읽고 하게 된 생각이다.

 

난삽하고 장황한 라캉 정신분석학을 저자가 쉽고 친절하게 설명했지만 그렇다 해도 내 이해가 온전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 잘못된 이해가 저자의 책을 퇴색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저자는 라캉과 알튀세르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저자는 라캉 강의를 하고 있다. 소개 글에 의하면 '라캉, 클라인, 자아심리학'라캉의, 라캉이라는 신화에 도전하는 도발적이고 논쟁적인 역작이다.

 

저자는 '에크리''세미나' 바로 읽기를 주제로 한 이번 책에 이어 '세미나 2;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 출간을 앞두고 있다. 궁금한 것은 라캉의 독단적 이론 체계에 의해 왜곡된 멜라니 클라인을 저자가 어떤 계기로 알게 되었는지, "라캉 이론을 진정으로 따른다면 상호 인정도, 인간관계도, 사랑도 사실상 모두 불가능하"(404 페이지)다는 입장을 가진 정신분석학자로서 저자가 라캉과 어떤 관계를 맺을지 등이다.

 

저자의 책은 라캉 비판서이지만 비판이란 기본적으로 자아심리학, 클라인학파 등 라캉주의 정신분석학파의 이론과의 관계에 따라 이루어지기에 언급한 학파들의 사상을 함께 접할 수 있다.

 

라캉의 실상에 대해 알아보자. 라캉은 자아를 상상적인 것으로 폄하했다.(15 페이지) 짧은(일방적인, 정신분석의 임의로 끝내는) 세션기법을 도입했다.(16 페이지) 라캉은 짧은 세션 외에 어떤 다른 테크닉도 이야기하지 못했다.(157 페이지)

 

라캉주의자들은 침묵하고 거리를 유지하며 냉담한 태도를 취하고 무의식을 드러낸다는 명분으로 급작스럽게 세션을 종료한다.(114 페이지) 라캉을 공부하면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라캉의 독단적이고 형식적인 개념틀에 오히려 포획되기 쉽다.(20 페이지) 라캉 이론은 개인주의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보수적인 이론이다.(24 페이지)

 

라캉은 프로이트를 수정, 확대하려는 학문적 시도를 자아심리학이라는 애매한 통칭적 표현으로 통렬하게 비판했고 많은 이들이 그러한 구호에 현혹되었다.(32 페이지) 라캉은 자신의 이론 이외의 다른 정신분석학파들은 근본적으로 프로이트로부터 이탈했다고 주장했다.(42 페이지)

 

라캉 이론은 정교한 것 같지만 철저하게 분석해보면 매우 느슨한 방식으로 엮여 있는 경우가 많다.(46 페이지) 라캉은 자아의 인식을 망상적 인식으로 보았다.(47 페이지) 라캉의 논리에 따르면 인간은 자아 없는 정신분열증 환자로 살아야 한다.(48 페이지) 라캉은 자아 자체를 상상계로 본다.

 

이에 의하면 분석도 합리적 사유도 불가능하다.(49 페이지) 라캉은 자아의 발달과 성숙, 엄마의 역할 등을 고려하지 않았다.(49 페이지) 라캉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말을 파악하기 어렵게 서술했다.(53 페이지) 라캉 이론은 복잡한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 매우 단순한, 하지만 단순함을 복잡함으로 은폐하는 모호한 이론이다.(125 페이지)

 

라캉의 말은 상황이 변화함에 따라 그때그때 종종 바뀌었다.(54 페이지) 상반되는 내용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라캉 이론은 상호 모순적인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누구든 자신이 원하는 상상적 욕망을 투사할 수 있는 빈 스크린으로 작동할 수 있다.(91 페이지)

 

라캉 이론은 근본적으로 가부장적 이론이다.(55 페이지) 라캉의 비판 방식은 비학문적이고 선동적이다.(56 페이지) 라캉 이론은 종합적 평가를 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59 페이지) 물론 라캉 임상론은 복잡한 듯 하지만 매우 단순하고 형식적이고 구조적인 틀을 제시하기에 그의 임상론을 알고 있다면 정신분석 임상에 대해 다 알고 있다는 환상에 빠지게 한다.(60 페이지)

 

라캉의 개념을 가지고 분석할수록 분석은 방해받으며 무의미한 언어유희로 끝나고 만다.(67 페이지) 라캉은 다른 사람들의 이론을 이용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버린다.(69 페이지) 라캉은 후기로 갈수록 아버지 이름이라는 기표(언어)보다 충동을 강조했다.(93 페이지) 라캉 이론에서 분석가는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사실상 유일한 창문이다.(96 페이지)

 

라캉은 자유, 인격, 감성 등 인간적 가치를 혐오했다.(97 페이지) 라캉 이론은 오직 현실과 무관하게 내면세계만 들여다보고 밑도 끝도 없이 분석 유희를 하도록 만드는, 철저하게 주관적이고 관념적인 분석 이론이다.(115 페이지) 라캉 정신분석은 현실을 상상계로만 간주하며 신뢰할 수 있는 좋은 분석가를 내사(內射)함으로써 자아가 성숙해진다는 이론을 전적으로 무가치하게 여긴다.(144 페이지)

 

라캉주의자들의 임상서적은 라캉의 것이 아닌 것들, 즉 라캉 이전에 이미 클라인학파, 자아심리학자, 대상관계이론 등에서 발전시킨 개념들을 암묵적으로 활용하거나 다른 학파의 이야기들을 과도하게 비판하거나 다른 학파들도 다 알고 있는 프로이트의 사례 또는 다른 학파들의 사례를 마치 라캉의 사례인 것처럼 제시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진행했다.(158 페이지)

 

라캉이 상상계, 상징계, 실재라는 세 범주를 언급한 것은 1953년이다.(174 페이지) 물론 이 개념틀은 정신분석 역사 속에서 암묵적으로(혹은 상당히 명시적으로), 그리고 철학사의 영역에서는 명시적으로 존재했던 개념이다.(183 페이지)

 

(언어)은 상징계다.(184 페이지) 말해지는 대상이 실재이다.(185 페이지) 상상계는 의미의 고정성을 의미한다. 상상계 또는 상상은 허구적 생각 또는 심지어 망상, 환각 등을 떠올리지만 의미의 고정성을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는 무한한 기표를 사용해 실재를 설명하려고 할 경우 현실적으로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디에선가 강제적으로(편의적으로) 기표의 흐름을 중단시킬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의미가 고정되었다라는 착각에 빠진다.(191 페이지) 우리는 또한 모순된 기표들이 아무 마찰 없이 공존한다고 쉽게 생각한다. 의미의 고정 또는 일관성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모순적인 기표들의 공존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상상계이다.(192 페이지)

 

우리는 모순을 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더 나아가 모순을 보지 않으려 한다는ᆫ 점에서, 달리 말해 모순을 알고자 하지 않는 의식적이고도 무의식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상상계에 빠져 있는 것이다.(193 페이지) 실재가 인간에게 의식되고 파악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언어 행위 속에서 기표로 등장해야 한다.

 

하지만 기표(언어, 단어)는 실재를 완벽히 표현할 수 없거나 모순적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실재는 궁극적으로 의미의 고정에 도달할 수 없는 순수 차이라 할 수 있다.(195 페이지) 임상적으로 말하자면 라캉은 정신병자가 되지 않기 위해 고정점(자아정체성)이 필요하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동일화 또는 동일화를 통해 형성된 자아를 상상계라고 배제함으로써 해결할 수 없는 모순과 딜레마에 빠졌다.(208 페이지)

 

라캉에게 현실은 상상계에 속한다.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상징계를 구성하는 차이가 은폐ᅬ되어 결국 상상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211 페이지) 라캉은 하이데거를 따라 불안이란 정서를 존재 즉 실재를 드러내는 근원적 정서로 파악한다.(198 페이지)

 

라캉은 줄곧 실재 즉 존재를 고통이라는 관점 또는 인간을 잠에서 깨우는 트라우마, 심지어 범죄적 파괴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215 페이지) 구조주의적 언어관을 취하는 라캉 이론에서 말하는 주체는 사실상 없다.(221 페이지) 라캉은 그것이 말한다고 말한다. 라캉에서 욕망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어머니와 누리던 상상적 만족을 포기하고 법과 규범, 금지의 세계로 진입함으로써 결여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228 페이지)

 

라캉은 프로이트의 남근(男根) 이론을 생물학적 접근 방식을 넘어서 기표적 관점에서 고찰해 팔루스를, 주체의 결여를 메워준다고 가정되는 권능적인 상징 즉 기표로 보았다.(232 페이지) 라캉은 팔루스를 궁극적으로는 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지만 남녀의 차이를 구분하는 특권적 기표가 남근과 관련된 기표라는 사실은 라캉이 여전히 남근중심주의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남자는 생물학적 남근을 가지고 있으므로 대개 팔루스를 상상화하지만 적어도 팔루스라는 기표라도 소유하고 있는 반면 여자는 그런 하찮은 팔루스 기표조차 가지지 못한 존재로 정의된다.(235 페이지) 라캉은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고 말했다. 이는 우선 인간은 타자의 욕망 대상이 되기를 바란다는 의미, 무엇보다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되기를 욕망한다는 의미이다.

 

타자로부터 인정받기를 욕망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243 페이지) 라캉 이론에서 욕망은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근본적 결여를 강조하는 개념이고 요구는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이 완전히 충족될 것을 요구하거나 충족되었다고 믿는 심리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욕망은 상징계에 속하고 요구는 상상계에 속한다.(252 페이지)

 

라캉 이론에서 소타자 a는 상상적 대상(나르시시즘적 대상, 엄마)이고 대타자 A는 상징적 대상(아버지)이다.(265 페이지) 라캉 이론에서 욕망과 주이상스의 차이는 중요하다. 욕망은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주체적 결여를 강조하는 개념이다. 후기에 강조되는 주이상스는 육체와 충동을 가진 인간이 체험하는, 그러나 결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동) 만족을 강조하기 위해 도입되었다.(271 페이지)

 

라캉은 욕망의 소외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환상을 통과해 그 배후에 있는 충동에 도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상징계와 상상계를 벗어나 실재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라캉이 말하는 환상의 통과 즉 분석의 끝이다. 이런 이유로 라캉은 후기로 갈수록 충동만족 즉 주이상스란 개념을 서서히 도입한다.(273 페이지)

 

주이상스는 고통 속의 쾌락이다. 중요한 점은 라캉의 주이상스란 순수한 충동만족, 상상적 만족, 상징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만족, 고통 속의 쾌락 모두를 포괄한다는 점이다. 성적 쾌락도 주이상스이다.(274 페이지)

 

인간은 공동체에서 살아가기에 만족은 결코 무제한적일 수 없고 우리의 만족이 타자의 명령 또는 금지와 무관하게 달성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쾌락은 기본적으로 고통 속의 쾌락일 수밖에 없다.(274 페이지) 저자가 말했듯 주이상스와 관련된 라캉의 논제는 너무 상식적이다.(276 페이지)

 

라캉은 엄마에 대해 긍정적 기능을 할당하지 않았다. 라캉에게는 나쁜 엄마만 존재할 뿐 좋은 엄마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듯 라캉에게 엄마는 정신분열증을 유발하는 존재이다.(310 페이지) 라캉은 엄마를 양자 관계를 이끌어가는 작은 타자로, 아버지를 이를 벗어나게 해주는 큰 타자로 불렀다. 물론 라캉은 엄마를 최초의 큰 타자로 불렀지만 이 경우는 벗어나야 할 무서운 존재이다.(311 페이지)

 

클라인에 대해 말하자. 프로이트와 라캉은 아버지를 정신분석 임상의 중심에 놓기를 원했으며 클라인은 엄마에 더 초점을 둔 임상론을 발전시키려 했다. 저자는 프로이트(라캉)와 클라인학파의 논쟁을 단순히 아버지냐 어머니냐는 대립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며 그것은 정신분석의 본질과 목표, 방향, 더 나아가 정신분석과 사회라는 큰 이야기를 포함하는 이론적 대결이었다고 설명한다.(87 페이지)

 

클라인은 좋은 엄마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이를 조기 오이디푸스 이론과 연결지은ᆫ 최초의 이론가이다.(178 페이지) 클라인은 우울적 위치에서 어머니와의 분리가 일어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어머니에 대한 신뢰와 애정, ()으로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과 양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250 페이지)

 

클라인 이론은 프로이트 이론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했다.(288 페이지) 클라인은 오이디푸스기가 생후 4 6개월에 시작되는 것으로 보았다. 오이디푸스기를 당긴 것이다. 생후 4 6개월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전() 오이디푸스기와 겹치는 시기이다. 물론 이 시기도 여전히 오이디푸스기이다.

 

전오이디푸스기에도 삼각관계가 존재한다.(302 페이지) 클라인은 아이를 망상 분열적 위치에서 우울적 위치로 이끄는 좋은 엄마에 대해 임상적 이론적으로 깊이 성찰한 선구자이다.(310, 311 페이지) 클라인은 좋은 엄마와 더불어 좋은 아버지 역할도 중시했다.(313 페이지)

 

클라인에 의하면 신경증자는 분리와 안정감을 동시에 제공하는 좋은 엄마(좋은 아버지)를 받아들인 주체이다. 클라인은 정신병적 상태(망상 분열적 위치)에서 신경증자 즉 정상적 주체로 성장하려면 분리와 안정감을 동시에 도입하는 좋은 엄마의 역할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반면 라캉은 결여와 분리만 도입하는 아버지 기표만으로 주체가 존재할 수 있다고 믿었다.(314 페이지) 클라인에게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근친상간적 소망의 좌절이 아니라 젖떼기에서 경험한 좌절 때문에 활성화해 항문적 좌절을 겪으며 강화된다.(325 페이지) 초자아는 구순적 좌절, 청결 등 배변 훈련을 통해 야기되는 항문적 좌절과 직접 관련된다.

 

아이는 그러한 좌절을 절단 및 거세로 체험한다. 여기에서 라캉이 거울단계에서 말한 조각난 몸에 관한 환상 역시 클라인에게서 유래했음을 알 수 있다.(333 페이지) 클라인에 의하면 조기 오이디푸스기는 목가적 유토피아가 아니라 엄마의 잔인한 초자아에 의해 짓눌리는 시기이다.(334 페이지)

 

클라인은 망상 분열적 위치, 우울적 위치 개념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보다 더 중요하게 만들었다.(346 페이지) 망상 분열적 위치가 우울적 위치에 앞선다. 위치라는 개념은 생애 초기 단계에 등장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에 그런 위치를 성공적으로 통과하지 못할 경우 성인이 된 후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348, 349 페이지)

 

생후 최초의 시기에 아이들은 엄마를 전체대상이 아니라 부분대상으로 여긴다. 이 시기의 아이는 엄마를 부분대상으로 지각하며 엄마의 가슴을 젖을 제공하는 좋은 대상과 젖을 주지 않는 나쁜 대상으로 분열시킨다. 이 시기는 엄마의 가슴이 사라졌을 때 아이가 멸절의 불안을 느끼는 시기이고 이는 공격성 투사(投射)와 그 반대급부로 상상 속에서 박해불안을 느끼는 시기이다.

 

정상적 주체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망상 분열적 위치에서 우울적 위치로 옮겨가는 것이다.(353 페이지) 우울적 위치는 엄마를 부분대상으로 지각하던 아이가 전체 대상, 안전감을 제공하는 인격적 대상으로 지각하게 되는 시기이다.

 

클라인에 따르면 이 시기는 생후 4 6개월에 시작된다.(353 페이지) 망상 - 분열적 위치에서 아이는 좋은 가슴과 나쁜 가슴이 같은 엄마에게 속하는 대상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반면 우울적 위치에서는 그런 분열과 투사 메커니즘이 완화된다.

 

우울적 위치를 성공적으로 통과한다는 것은 엄마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아이가 엄마로부터의 분리를 보다 철저히 받아들이는 것이다.(357 페이지) 클라인은 환상설을 중시하면서도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358, 359 페이지) 환상이란 우울적 위치에서 아이가 유기(遺棄) 불안과 분노로 인해 환상 속에서 엄마를 공격하고 파괴하며 이로 인해 아이 스스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파괴했다는 우울불안에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한다.(357 페이지)

 

정신분석학에서는 인간의 심리구조를 정신병, 도착증, 신경증으로 나누는데 클라인이 도착증과 신경증이 정신병적 불안에 대한 방어로 형성되는 심리구조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362 페이지) 클라인은 정신분석적 개인주의를 넘어 사회이론으로 확대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정신분석적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365 페이지)

 

클라인 이론은 개인의 성숙은 개인의 문제인 동시에 환경(엄마, 사회적 안전망) 문제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366 페이지) 망상 분열증 위치에서는 선과 악을 오직 공리주의적 관점 즉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구분한다.

 

우울적 위치란 죄책감, 후회, 슬픔, 점차 타인에 대한 죄의식과 사랑이 우위를 차지하는 시기이다.(369 페이지) 중요한 사실들 몇 가지. 정신분석의 각 학파는 강조점이 다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각 학파의 이론을 종합적으로 사유하는 경향이 강해진다.(89 페이지)

 

저자는 분석가와의 둘만의 좁은 공간(라캉주의자들은 이를 제삼자적 공간이라고 부르겠지만)에서 이루어지는 공간을 떠나 많은 경험을 쌓고 다양하게 독서하고 폭 넓게 사유하며 자신이 옳다고 믿는 분야에서 구체적으로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이 더 좋은 치료 효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고 말한다.(109 페이지)

 

저자는 이어 정신분석적으로 현실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정신분석 연구자들은 종종 자부심을 느끼지만 사실 정신분석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현실은 그리 많지 않다고 말한다.(119 페이지) 그리고 정신분석학 분야를 아무리 많이 연구하더라도 개념의 수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는 현실을 이해하고 분석하기에는 역부족일 뿐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정신분석적으로 곡해할 위험이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라캉의 개념들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해본 경험이 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그것들이 잘 정리되지 않으며 타인에게 설명하기에는 한층 더 어렵다는 생각을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며 임상 차원에서 또는 논리적으로 사고할 때 개념들이 앞뒤가 맞지 않고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종종 있을 것이라는 말을 하며 저자는 그것은 라캉 이론과 개념들이 생겨난 역사적, 이론적 맥락을 사상한 채 추상적으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라 답한다.(173, 174 페이지)

 

라캉의 작업이 임상보다 오히려 문학평론에 가깝다고 생각한다는 저자의 말(147 페이지)도 인상적이다. 이제 디디외 앙지외의 피부 자아를 읽을 때가 되었다 싶다. 라캉과 디디외 앙지외, 그리고 앙지외의 어머니 사이의 일화는 물론 정신분석적 차이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앙지외의 어머니는 박해 망상에 시달린 끝에 자신을 박해한다는 당사자를 살해하려다 실패하고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피해망상증 진단을 받은 뒤 입원한 파리 생트-안느(Saint-Anne) 대학병원에서 라캉을 만난다. 그런데 라캉은 그녀를 치료하기보다 그녀의 사례를 자기 논문에 이용하기 위해서 그녀로부터 정보를 수집하는 데 골몰했고 그 결과 앙지외의 어머니에게 갈등과 적대감만을 남긴 채 1년간의 치료를 마치게 된다.

 

임상심리학자로서 앙지외는 라캉과 자신의 어머니와의 관계는 전혀 모른 채 라캉의 분석 수련생이 된다. 후에 사실을 알게 되기 전부터 앙지외는 라캉의 분석에 깊은 불만을 품었다. 앙지외는 라캉과의 분석이 끝나고 나서야 자기 어머니가 라캉의 환자였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다. 그리고 1964년 또 다른 정신분석협회(프랑스정신분석협회) 창설에 참여하며 본격적인 반()라캉 운동에 몸담게 된다.

 

고집스럽게 (순수) 정신분석이라는 이념을 고집한 라캉의 환자 중에 유독 자살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105 페이지) 라캉 이론과 임상은 오직 분석을 위한 분석, 환자가 아니라 분석가만을 위한 임상 이론이며 임상 테크닉이다.(105 페이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었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는 말에 현혹되어 큰 관심을 가진 지난 시절 기억이 스친다. 이제 라캉의 좋은 점을 찾을 수 있을까? 이런 거한 읽기에도 불구하고 찾을 수 있을까? 중립적인 개념들, 사례들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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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교보 앞에서 1020번이나 7022번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목적지인 청운문학도서관이나 윤동주문학관이 아닌 안평의 집터 무계정사(武溪精舍) 인근의 무계원(武溪園)까지 가고 싶은 때가 있다.

 

잘 알려졌듯 편안함을 의미하는 안평의 평()은 게으름을 경계한다(또는 경계하라)는 뜻의 비해(匪懈)라는 호()의 발생 원인이 되었다.(는 아니다, 아름다운 광채 등을 의미.)

 

최근 심경호 교수의 안평 - 몽유도원도와 영혼의 빛이 출간되었다.(2018331) 갑자기 마음이 어수선해진다. 압도적인 스펙(1224 페이지, 70,000)의 이 책에서 저자는 안평의 생애를 청백의 순수예술 세계를 꿈꾸던 35년간의 몽유로 규정했다.

 

저자에 의하면 안평은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로 좌절을 달랬다. 저자는 수양(首陽)이 당대 천재 문사들과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며 세상사를 논했을 동생 안평을 과도하게 정치적으로 해석해 처참하게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말한다.

 

수양의 안평 살해는 열등감이 추동한 결과이기도 하다. 죽을 때까지 한시를 제대로 못 지었던 수양이 그림도 잘 그렸고 글씨도 조맹부체를 닮아 유려하고 힘이 넘쳤으며 태종, 세종 대에 거의 유일하게 한시를 자유자재로 읊은 안평을 질투했으리란 점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안평은 반역자가 아니라 희생자였다.

 

()란 말을 음미하게 된다. 잘 알듯 에()는 그림을 의미하는 일본어이다. 에도 시대의 풍속화인 우끼요에(うきよえ)의 그 에()이다. 엔도 슈사큐의 침묵에 후미에(ふみえ) 이야기가 나온다.

 

후미에는 에도 시대에 기독교인 여부를 가려내기 위해 밟게 했던 그리스도나 마리아 상 등을 새긴 널쪽을 의미한다. 내가 이렇게 후미에를 이야기하는 것은 수양의 폭거(暴擧)는 엔도 슈사쿠가 침묵을 통해 그린바 후미에를 밟게 한 것 같은 타협 또는 선택의 여지 부여(附與)와는 거리가 먼 행위였으리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이다.

 

물론 안평은 그런 선택지를 부여받았어도 수용하지 않고 죽음을 택했을 것이다. 안평의 행보는 모반(謀叛)이 아니었고 설령 그랬다 해도 목숨을 구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난 화요일 해설 때 모든 것을 정치적 의미로 해석하면 안 되지만 정치적으로 해석해야 할 것을 비정치적인 의미로 풀이하는 것도 잘못이라는 말을 했다. 폭거 자체가 수양의 죄이지만 그는 부수적으로는 비정치적 의미를 과도하게 정치적으로 해석한 우()를 범한 것이다.

 

하긴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권력 찬탈(簒奪)자의 눈에는 모든 것이 위험요소로 여겨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란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처음인 듯 진지하게 읽게 된다.

 

김수영 시인이 말한 음탕의 내용이 궁금하거니와 나는 왕들이 거의 예외 없이 가족 중의 누군가를 죽인 패륜의 나라(인류학자 김현경의 표현)’ 조선을 대표하는 수양의 폭거를 음탕(淫蕩)의 범주에 넣고 싶다.

 

음탕은 행동이 음란하고 방탕함을 의미하는바 방탕(放蕩)이란 주색잡기(酒色雜技)에 빠져 행실(行實)이 좋지 못한 것외에 마음이 들떠 걷잡을 수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과하게 끓어넘친 수양(首陽)의 추한 욕망은 음란(淫亂), 음탕으로 수식하기에 적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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