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목요일(10월 4일) 건축 전공의 문화 해설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설사시기에 역사 외에는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으신 줄로만 알았지만 대화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 분이 과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이야기했고 물리와 수학의 관계, 건축 전공자들이 한옥 지붕에 대해 필수적으로 수업을 받는지 등을 물었다. 내가 들은 답은 전체 학점 중 한옥 부분은 3학점 밖에 되지 않는.비중 낮은 부분이지만 듣게 되어 있다는 말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과학에도 관심이 많으시냐는 물음에 그 분은 수학과 과학을 잘해 건축을 전공하게 되었다는 답을 했다. 그 영향 때문에 나는 요즘 임석재 교수의 '나는 한옥에서 풍경놀이를 즐긴다'를 읽고 있다. 사놓고 꽂아만 둔 책이다.

이 책에 차경(借景)과 장경(場景)이란 말이 나온다. 들어 알고 있지만 설명이 쉽지 않은 차경과, 거기에서 더 나아간 장경이란 개념을 익히는 것은 재미 있다. 풍경요소와 관찰자 사이가 밀접하면 차경이고 그 범위를 넘어서면 장경이 된다. 장경은 관찰자가 풍경과 다른 공간 또는 다른 세계에 있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건축 용어인지 풍수 용어인지 모르겠으나 차경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의 신선함과 낯섦이 생각난다. 여기에 장경이란 개념까지...저자는 거리감을 설명하기 위해 무대와 객석을 예로 든다. 그래야 관객은 분리되었다는 느낌, 그리고 자신이 현실과 다른 곳에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느낌의 차이가 의미 있게 느껴지도록 한옥을 자주 방문해 찾고 배우고 느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청소년을 위한 주제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 실록 기사로 조선을 만나다
송영심 지음 / 팜파스 / 2016년 6월
평점 :
품절


지배층의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의 행간에 민초, 여성, 하층민들의 다양한 기록이 숨어 있다는 송영심. 그는 자신의 책('청소년을 위한 주제로 보는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고리타분한 조선사가 가슴 떨리는 조선사가 된다고 말한다.

 

'조선을 담다, 조선왕조실록'(1), '조선의 왕들을 만나다'(2), '주제로 실록 속 조선을 보다'(3) 등으로 구성된 책에서 저자는 춘추관에 속한 여덟 명의 사관으로 구성된 사관들을 한림이라 부른다는 말에서부터 실록의 원고인 사초(史草)는 국왕 옆에서 기록한 입시사초(入侍史草)와 퇴청한 사관이 집에서 내용을 정리해 생각과 사론을 정리하는 가장사초(家葬史草)로 나뉜다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식들을 열거한다.

 

세검정(洗劍亭)이 세검정이라 불리는 것은 실록 편찬에 쓰인 종이 내용을 이곳에서 씻었기 때문이다. 3장에서는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면서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사건들"이 소개된다. 저자는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죽음을 당할 때 의연하게 대처한 드라마 장면은 픽션이라 말하며 픽션과 사실을 제대로 구분할 것을 주문한다. 정도전은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안타까운 점은 단종이 복위운동을 알고 친히 큰칼까지 내리며 격려했다는 사실이다. 조광조가 중종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유는 뭘까? 조광조가 중종의 공부를 독촉하고 꾸짖었기 때문이라 생각할 만하다.(79 페이지) 조광조는 죽음 앞에서도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는 마음도 따뜻했다.

 

죽는 순간에도 자신이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집의 주인을 불러 미안해 하는 마음을 전했다. 조광조는 자신이 죽거든 관을 얇게 만들라 부탁했다. 먼 길 가기 쉽도록. 이 책의 특징은 새로운 이야기들이 많다는 점이다. 왕비 침전에 용마루가 없는 것을, 왕과 왕비가 사랑을 나누어 아기를 만들 때 용마루가 있으면 아기가 탄생하는 상서로운 기운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기 때문이라 설명한 것도 그 중 하나이다.

 

물론 저자는 왕비의 처소가 아닌데도 용마루가 없는 건물도 있어 그 설은 설득력이 없다고 말한다. 세종 이전에는 왕의 후궁이나 대군의 부인들도 옹주라 불렀다. 그러다가 세종때 공주와 옹주가 구별되었고 성종때 왕비의 딸을 공주, 후궁의 딸을 옹주라 부르기 시작했다.

 

세자빈의 딸은 군주(君主), 세자 후궁의 딸은 현주(縣主)라 했다. 동뢰(同牢)라는 말도 있다. 공주와 부마가 치르는 첫날밤이다.(147 페이지) 첫날밤이 아니라 부부가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영조의 부마)이 죽자 아내 화순옹주가 식음을 전폐하고 죽었다. 열녀문을 세워주자는 신하들의 간언을 영조가 거절했다. 정절은 지켰으나 밥을 먹으라는 아비의 청을 듣지 않아서 불효녀이기 때문이고 아비가 자식의 열녀문을 세워주는 법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54 페이지)

 

노비 출신인 장녹수는 여러 남자에게 몸을 팔아 높은 지위에 올랐다고 한다.(156 페이지) 조선에는 궁녀에서 출발해 왕비까지 된 두 여성이 있었다.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 경종의 생모 희빈 장씨이다.(170 페이지) 궁녀들은 고생이 막심했다. 왕족 외에는 궁에서 죽을 수 없다는 궁궐법도 때문에 늙고 병들면 요금문이라는 쪽문을 통해 나가 사가에서 돌보는 이 없이 생을 마쳤다.

 

저자는 조선의 궁녀는 조선 왕조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역사의 그림자이자 증인이라 말한다.(174 페이지) 세종 대에 국가 차원에서 무당들을 모아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빌었다는 사실(세종실록 참고)도 흥미롭다.(191 페이지) 유에프오 목격담이라고 해석할 수 밖에 없는 실록 내용도 있어 흥미를 끈다.

 

"강릉부에서는 825일 사시에 해가 환하고 밝았는데 갑자기 어떤 물건이 하늘에 나타나 작은 소리를 냈습니다. 형체는 큰 호리병과 같은데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컸으며 하늘 한 가운데서부터 북방을 향하면서 마치 땅에 추락할 듯 하였습니다. 아래로 떨어질 때 그 형상이 점점 커져 3, 4 장 정도였는데 그 색은 매우 붉었고 지나간 곳에는 연이어 흰 기운이 생겼다가 한참 만에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사라진 뒤에는 천둥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습니다.“(광해 20. 192353번째 기사 1609: 225 페이지)

 

흥미롭다. 유에프오 관련 실록도 그렇고 전체적 구성도 그렇다. 다만 몇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정명공주(1603-1685)를 중종반정(1506) 이후 공주로 복권될 수 있었다고 쓴 부분(150 페이지), 익종(효명세자) 비를 신원왕후로 기록한 부분(143 페이지),

 

단종의 유배지를 청룡포로 기록한 부분(39 페이지), 나쁜 일을 많이 벌인 화완옹주를 정치력이 탁월했다고 표현한 부분(152 페이지) 등은 아쉽다. 세검정(洗劍亭)이 실록 편찬에 쓰인 종이 내용을 이곳에서 씻었기 때문이란 내용은 일반론과 다른데 그 부부분에 대해 구체적 설명이 없어 의아하다.(21 페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루공 마카르 총서, 이와나미<岩波> 총서, 갈리마르 총서 등.. 두서 없이 생각나는 총서들이다. 이 가운데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를 말하고 싶다. 19번 폴 뒤 부셰의 '바흐; 천상의 선율'에서 내가 들은 것은 바흐(Bach)란 말이 동유럽 방언으로 순회음악가를 뜻한다는 말이다. 시냇물이 아니라.

 

138번 주느비에브 브레스크의 '루브르; 요새에서 박물관까지'에서는 이런 말을 들었다. "태초에 이름이 있었으니 루브르(Louvre)였다. 이 지명의 직관적 혹은 음성학적 규칙에 따른 기원은 어느 문헌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라틴어로는 루파라 혹은 루페라이고 프랑스어로 로브르 혹은 루브르라고 부른다. 색슨족 말로 성채(城砦)를 의미하는 로워의 변형일까? 혹은 나병환자 수용소를 뜻하는 레프로즈리(leproserie)의 변이형일까? 아니면 접미사 아라(ara)로 끝나는 미지의 골족 어근을 지닌 리비에르(riviere; )에서 온 걸까?

 

아니면 떡갈나무를 뜻하는 루브르(rouvre)의 첫 번째 철자 rl로 바꾼 것일까? 늑대 사냥개라는 의미의 루페리아(luperia)를 생각해볼 수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무시무시한 개과의 짐승들에게 해를 입은 곳과의 관련성이 더 커보인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괜한 것은 아니다. 19세기 고성이나 선조 샤를마뉴 대제가 거주했던 성채 혹은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에 대항하기 위해 세운 요새와 관련해 떠올려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어원과 관련해 두 책이 중요한 말을 했다고 해서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의 일반적 특성이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뭔가 있어 보인다. 나는 성채 또는 요새설()을 지지한다. 언어가 아닌 물적 토대에 기인한 언어이고 가장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자 백상현은 '라깡의 루브르'에서 루브르를 의미 있게 활용했다. 그는 루브르가 늑대가 출몰하던 곳에 있었기에 그렇게 이름 붙여진 것이라 말하며 프로이트의 주요 환자였던 늑대인간을 거론했다.

 

늑대인간이란 늑대를 무서워해 붙여진 이름이다. 요지인 즉 늑대인간이라 불린 그 소년의 기억은 조작, 편집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각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잘못된 기억도 역할을 한다는 의미이다.

 

백상현의 의도는 정신분석이 개인사 박물관(조작, 왜곡되었기에)에 메타고고학(환자의 인생이 이미 건설해놓은 개인사 박물관의 유물들을 고고학적 탐사를 통해 다시 배지하고 숨겨진 의미를 드러내기에)을 행하듯 박물관 자체의 존재 의미를 묻는 것에 있었다.

 

'정신병동으로서의 박물관'이란 부제를 가진 이 책의 목차는 강박증의 박물관, 히스테리아의 박물관, 멜랑꼴리의 박물관, 성도착(性倒錯)의 박물관 등으로 구성되었다. 물론 루브르가 늑대와 무관하다 해서 박물관에 대해 메타고고학적 작업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미술사가 캐롤 던컨은 루브르는 왕의 소장품이 공공미술관으로 바뀐 최초의 사례는 아니지만 그 변형은 정치적으로 가장 의미 있고 영향력 있는 것이었다고 말했다.('미술관이라는 환상' 60 페이지)

 

루브르를 늑대와 연관짓는 것은 루브르의 루가 늑대(낭창; 狼瘡, ; 이리 랑)를 의미하는 것이라며 루프스라는 자가면역질환을 설명하는 것과 맥락이 같다. 루브르를 성채 또는 요새와 연결짓는다면 늑대와 연결지을 수는 없다.

 

이보아처럼 '루브르는 프랑스 박물관인가'라는 책을 통해 루브르를 문화재 약탈과 반환의 역사로 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나는 왕의 소장품을 보관하던 곳이었다가 공공미술관으로 바뀐 루브르를 왕립도서관이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비교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역사 추리 조선사 -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서 사도세자의 뒤주까지, 가정과 추론으로 재구성한 조선 이야기
김종성 지음 / 인문서원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추리(推理)란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알지 못하는 것을 미루어 생각하는 것으로 어떤 판단을 근거로 다른 판단을 이끌어내는 것을 의미하는 추론(推論)과 같은 말이다.(물론 추리는 추리소설이란 장르 때문인지 추론에 비해 격이 떨어져 보인다.)

 

김종성의 '역사 추리 조선사'를 읽으며 내가 한 생각이다. 김종성의 책을 읽게 된 것은 김준혁 교수의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의 서평에 달린 댓글 때문이다. "어차피 그래봤자 조선은 이미 패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와 일본의 경제력과 외교력을 따라가기엔 조선은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칠순의 해인 1804년을 맞아 임오년 원수들을 사면하는 대화합의 정치, 그리고 상왕인 자신의 후원하에 순조가 이끌어가는 새 시대를 계획했었다. 정조가 4년만 더 살았다면 승리할 수 있었을 것이고 설령 패한다 해도 적들 역시 적잖은 피해를 입고 더 일찍 문제점을 발견해 19세기 말의 위기에 더 효과적으로 대처했을 것이란 게 저자의 진단이다.

 

사도세자는 정조 사망 99년 후인 1899년 고종에 의해 장조로 추존되었다. 그러니 앞의 말은 정조 재세시 복권되었을 것이라는 말로 정조가 4년만 더 살았다면 정순왕후와 그 추종세력들이 조선을 반개혁의 수렁에 빠지지 못하게 했으리라는 말과 이어진다.

 

일본의 경우 1868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 개혁에 착수해 열강의 대열에 합류한 뒤 청나라를 압박하는 데 성공했다. 추론대로 정조가 4년만 더 살았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앞서 말한 댓글의 문제점은 결정론적 사고라는 데 있다. 어차피라는 말을 보라.

 

'역사 추리 조선사'에는 정조에 대한 논의 외에 위화도 회군이 없었다면? - 고려가 임진왜란을 당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대비의 수렴청정이 없었다면? - 조선 왕조는 76년만에 망했을 것이다’, ‘폐비 윤씨가 사약을 마시지 않았다면? - 그래도 연산군은 폭군이 됐을 것이다’, ‘효종이 일찍 죽지 않았다면 북벌에 성공했을까? - 현실적으로 북벌 가능성은 낮았다’, ‘장희빈이 끝까지 중전 자리를 지켰다면? - 정약용 가문의 멸문지화와 엄청난 고난도 없었을 것이다’, ‘조대비가 안동 김씨를 미워하지 않았다면? - 조선은 망국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고종이 문호개방을 서두르지 않았다면? -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가 되지 았았을 것이다등 민감한 이슈들이 많다.

 

'정몽주가 살았다면? - 정도전은 조선을 세우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에서 드러난 정몽주는 오로지 한 임금을 섬긴 신하가 아니라 지극히 권력지향적인 정치인이다. 저자는 만일 정몽주가 위화도 회군, 우왕 폐위, 창왕 옹립 및 폐위, 스승인 이색(李穡) 제거, 공양왕 옹립 등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그가 진심으로 역성혁명을 반대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43 페이지) 정몽주는 군사부일체라는 유교적 가치보다 권력 획득이라는 정치적 가치를 우선시한 사람이다.

 

정도전은 이성계와의 술자리에서 한고조(유방)가 장자방(장량)을 쓴 게 아니라 장자방이 한고조를 쓴 것이란 말을 많이 했다. 조선 건국의 실질적 주역이 이성계가 아니라 자신임을 은근히 과시하는 말이었다.(53 페이지)

 

수양대군이 좋은 숙부였다면?이란 글에서 저자는 그렇다 해도 단종은 죽을 운명이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안평대군을 거론한다. 안평은 수양의 동생이고 단종의 작은 아버지이다. 저자는 안평이 수양과 다를 바 없었다고 말한다.(74 페이지) 저자는 어린 아들을 두고 세상을 떠난 문종 탓을 한다. 물론 나는 장자를 고집해 병약한 아들 문종을 왕이 되게 한 세종 탓을 하고 싶다.

 

저자는 주군 한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린 사람보다 세상을 위해 목숨을 버린 사람, 주군의 왕권 강화를 위해 희생한 사람보다 세상의 권리 보장을 위해 희생한 사람에게 후한 점수를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77 페이지) 저자는 그런 인물(후한 점수를 받아야 할 사람)로 신숙주를 든다.

 

그는 조선의 태평성대에 공헌한 사람이다. 신숙주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자 왜구가 골칫거리가 되었다. 저자는 신숙주가 변절자가 된 것이 백성들에게는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물론 (상술하지 않겠지만) 신숙주는 임진왜란 발발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83 페이지)

 

저자는 통치권의 바탕에 경제력과 군사력이 있었다며 연산군이 반정으로 물러난 것은 어머니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아서가 아니라 국고를 탕진했기 때문이라 말한다. 어머니가 사약을 받지 않았어도 물러났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물론 연산군 이전(성종)부터 국고는 악화되었다. 지주들이 납세를 기피하기 위해 흉년 피해를 과장해 보고한 까닭이다. 연산군이 일으킨 사화는 경제력이 없어 생긴 사태였다. 사림의 정치적 주장에 가진 게 없었던 연산은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중종때 조광조가 등장(1515)하지 않았다면 임진왜란때 더 힘들었을 것이라 말한다. 조광조가 사림파를 위한 개혁을 펼쳤고 사림파는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큰 몫을 한 의병의 구성원들이었다는 논리이다. 중종이 조광조를 기용한 것은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조광조는 개혁의 기틀을 마련하고 중종에 의해 제거되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였지만 사림파는 정권을 잡았다. 물론 임진왜란 극복에 국민의 힘이 결정적이었다.

 

이 책에서 자주 거론된 사건이 임진왜란이다. 임진왜란은 명나라와의 관계(무역) 복원을 위해 일본이 택한 전쟁이었다.(134 페이지) 앞에서 결정론을 비판했는데 저자도 같은 말을 한다. 세상은 필연의 법칙으로만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100 퍼센트 정해져 있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설사 어느 정도 예정되었다 해도 예정된 것과 실제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이다.(134 페이지)

 

임진왜란의 최대 수혜자는 여진족이었다. 그들은 임진왜란 후 급성장해 동아시아 패권국이 되었다.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청나라가 두 차례 호란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고 중원 정복을 시도하지도 못했을 것이다.(141 페이지) 일본은 임진왜란 패전으로 분발해 결과적으로 강력한 나라가 되었다.(151 페이지)

 

장희빈이 끝까지 중전 자리를 지켰다면 정약용 가문이 처참한 시련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195 페이지) 저자는 영조가 누군가 아들(사도세자)를 살려주기를 바랐는지 모른다고 말한다.(210 페이지)

 

이 말을 듣고 보니 영조가 세자를 곧바로 죽이지 않고 뒤주에 8일이나 가두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사도세자는 10살때부터 노론을 비판했다. 그가 집권했다면 훨씬 강도 높은 탕평정치가 펼쳐졌을 것이다. 저자는 사도세자의 탕평이 영정조의 그것에 비해 순수하고 원칙적이었다고 말한다.(212 페이지)

 

그러면 노론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을 것이다. 개혁 군주인 정조도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생각해보자. 이는 불가피한 점이었다.

 

조선은 500년간 지속된 나라이다. 지인이 이런 말을 했다. "세종은 누구나가 다 추앙하는 임금인데 정조는 그에 못미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지금 보니 세종 시대와 정조 시대의 차이 358- 보다 정조시대와 현대의 차이 242- 가 더 가깝네요. 새삼 조선이 얼마나 오랜 왕조였는지..."란 말을 했다.

 

두루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이 조선 공부이다. 조광조와 중종의 관계, 이황과 사림의 관계, 연산을 물적 토대로 분석한 시각, 안평과 수양의 관계, 정몽주에 대한 새로운 앎, 수양이 아니었어도 단종은 죽을 운명이었다는 분석, 임진왜란과 동아시아 정세, 특히 두 차례의 호란과의 연관성, 임진왜란 발발 원인 등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 정조가 4년만 더 살았다면 조선이 19세기 말의 위기에 더 효과적으로 대처했을 것이란 분석을 접하며 평소 지론을 확인해 기뻤던 한편 정조의 비극에 마음이 아픈 것을 새삼 느꼈다. 두루 공부해야 하리라. 조광조와 중종, 사림의 관계, 나아가 제자 양산보와 성수침 등의 은신 등을 함께 공부하고 싶고 김시덕 교수가 강조한 전쟁사를 공부하고 싶다. 아직도 제한적이지만 비교적 넓은 시각을 갖게 해준 저자에게 감사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상곡(夜想曲) 2018-10-03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리를 떠나서 병법적으로 주변 외세의 정치적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발상인듯 합니다 내부에서의 개혁도 중요하지만 외국의 정치적 변화에도 개혁은 쉽게 변할수 있습니다 이미 주변의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보다 열배는 더 거대한 시장과 국력 기술력을 갖고있었고 기존에 우리가 알고있는 사실처럼 러시아와 일본,청나라,프랑스의 외세에 휘둘리던 사실을 잘 알고있습니다 그리고 청나라 말기의 역사를 살펴보면 청나라 또한 영국의 화력과 서구열강의 기술력 앞에 무릎을 꿀었는데 겨우 정조때 와서 고작 몇십년 개혁한걸로 서구열강을 막는다는건 조잡하기 그지없는 농민병으로 소총부대를 상대하는거나 다를바가 없습니다
 

˝그의 기억력은 고금에 뛰어나 한 차례 눈으로 보기만 하면 죽을 때까지 잊지 않다가 우연히 자극만 받으면 한번에 수천 백 마디를 외워 마치 술통에서 술이 쏟아지듯 유탄이 퍼부어 판때기를 뒤엎듯 하였다.

구경(九經), 사서(四書), 23사(二十三史)에서 제자백가, 시, 부, 잡문총서, 패관, 상역(象驛), 산률학(算律學), 우의마무(牛醫馬巫)의 설....

모두 정밀히 연구하고 알맹이를 파내서 한결같이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 같았다. 질문한 사람마다 깜짝 놀라서 귀신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

정약용이 표현한 이가환(李家煥; 1741 - 18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