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용과 1766년 - 조선 지성계를 흔든 연행록을 읽다
강명관 지음 / 한국고전번역원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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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 - 1783)'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은 을유(乙酉; 1765)에서 병술(丙戌; 1766)까지 홍대용이 서장관인 그의 숙부 홍역을 따라 북경을 기행하고 와 쓴 산문이다. 홍대용은 원래 한문으로 된 '연기(燕記)'를 썼으나 후에 어머니 등 여성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 고쳐 써 '을병연행록'이라 하였다.

 

홍대용의 집안은 전통의 노론이었다. 벼슬보다 인격 수양에 열중했던 홍대용은 '논어'를 읽다가 공자를 비판하기도 했고 소론의 입장에서 노론을 엄중 비판하기도 했다. 강명관의 '홍대용과 1766'은 홍대용의 '연기''을병연행록'을 해설한 책이다.

 

'연기'의 내용과 '을병연행록'의 내용이 완전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담헌의 특징을 요약하는 말이 곧은 성품과 회의하는 정신이다. 담헌의 생에 전기가 된 사람이 실학자 나경적(羅景績: 1690 1762)이다. 담헌이 아버지 홍억(洪檍)의 부임지인 나주에서 만난 나경적은 중국과 일본을 거쳐 들어온 서양 자명종을 본떠 만들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담헌은 나주에서 나경적과 혼천의를 제작하며 서양 천문학과 수학을 접한 뒤 완성 3년 후인 1762년 북경으로 갈 수 있었다. 호기심을 풀기 위해서였다. 당시 조선에게 청의 수도 북경은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창이었다.

 

경화세족만이 북경에 갈 수 있었지만 벼슬을 하지 않은 담헌이 북경에 간 것은 경화세족의 자제 자격으로서였다. 북경을 유관(遊觀) 즉 돌아다니며 구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담헌은 사신단의 자제였기에 더욱 자유로웠다. 당시 조선은 화이론(華夷論)과 소중화(小中華) 의식에 입각해, ()을 무너뜨린 청()에 복수해야 한다는 북벌(北伐)을 표방하고 있었다.

 

소중화 의식이란 명이 청에 짓밟히고 오염되었기에 중화 문명은 오직 조선만이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소중화 의식은 허위의식이었고 북벌은 실현 가능성이 없었다. 청은 1백년이 넘는 동안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랑캐의 나라인 청에 가는 담헌으로서는 화이론과 소중화 의식으로 무장한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담헌은 청나라의 놀라운 물질문명에 충격을 받고 그들과 너무 대조적인 조선의 낙후한 현실을 착잡하게 떠올린다. 담헌이 중국을 방문한 것은 서양 과학 기술을 접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수준 높은 선비를 만나 대화를 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담헌은 중국 여행을 위해 체력 훈련도 하고 중국어도 익혔다.

 

17662월 담헌은 엄성과 반정균을 만났다. 조선 사신단의 비장(裨將) 이기성이 안경을 사기 위해 유리창(瑠璃厰)에 갔다가 둘을 알게 되어 담헌에게 소개한 것이다. 유리창은 서적, 서화, 골동품, 각종 문방구 등이 몰려있는 거대 상점가이다. 담헌은 엄성, 반정균 등과 필담을 나누었다. 담헌은 강력한 대명의리론자였고 성리학 근본주의자였다.

 

서양 과학에 대해서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담헌은 청에 가기 전 그 발전상에 대해 들었지만 직접 경험하며 느끼게 된 청은 충격 자체였다. 관념과 현실의 괴리로 인해 담헌은 조금씩 생각을 바꾸게 된다. 청은 중국 역사상 가장 큰 나라를 달성했다. 청의 그런 놀라운 발전상은 조선을 쓸쓸하고 가련하게 느끼게 했다.

 

결국 그 현격한 격차는 훗날 박제가와 박지원으로 하여금 북벌이 아닌 북학(北學)을 외치게 했다. 당시 조선은 청이 명을 강제로 몰락시켰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부패, 무능한 명이 스스로 반란을 초래했고 그 난을 청이 평정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중원이 청의 차지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홍대용과 1766')의 하이라이트는 홍대용이 엄성, 반정균, 육비 등과 나눈 국적을 초월한 우정을 상세히 소개한 부분이다. "담헌은 중국 여행 내내 중국 지식인과 만나 대화하는 일을 간절히 원하였다."(151 페이지) 물론 주자학 근본주의자 담헌과 양명학, 불교 등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엄성, 반정균의 사상적 기반은 판이했다.

 

그들은 수준 높은 필담을 주고 받았는데 엄격한 담헌과 달리 반정균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속내를 깊이 표현할 정도까지에 이른다. 조선의 지식인 담헌과 청의 선비이면서도 소탈한 데다가 홍대용을 변방의 조선인이라 하여 거만하게 대하지 않았던 엄성, 반정균은 곧 서로 매료되고 만다.

 

담헌은 계속 성리학의 입장에서 질문을 던졌지만 완고하지는 않았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들은 이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이가 된다. 담헌은 풍류와 기생에 관심을 보이는 반정균에게 여색을 멀리할 것을 충고한다. 담헌은 두 사람에게 진실한 공부를 해 속유(俗儒)가 되지 말 것을 충고했다.

 

담헌은 두 사람을 간절히 사랑하는 나머지 기대가 깊어 당부하는 것이라며 거칠고 졸렬한 말이지만 음미해볼 것이 있으니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말까지 버리지 말라고 당부한다. 담헌은 유가의 성인인 순임금이 동이이고 문왕이 서이이며 왕후장상의 종자가 없고 누구라고 하늘의 때를 잘 받들어 이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린다면 천하의 의로운 주인이라는 말을 듣고 사유의 변화를 일으킨다.

 

저자는 담헌으로서는 중국의 세 선비가 자신에게 설파했던 주자 학설에 대한 비판을 수긍하기 어려웠지만 그 활발한 반론의 제기야말로 조선 지식인 사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라는 말을 한다.(245 페이지) 담헌은 보수 세력을 대표하는 김종후와 논쟁을 한다.

 

이 일은 담헌으로 하여금 화이론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250 페이지) 담헌은 우주에는 중심이 없다는 주장을 했다. 이 생각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생각과 뿌리가 같다. 저자(강명관)의 결론은 인종과 국가, 언어를 넘어 인간으로서 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세계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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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외국어 학습기 - 읽기와 번역을 위한 한문, 중국어, 일본어 공부
김태완 지음 / 메멘토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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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연(經筵), 왕의 공부의 저자 김태완의 나의 외국어 학습기는 전공인 철학 공부를 위해 여러 나라 말을 공부하게 된 저자의 외국어 공부 비결과 내공을 알 수 있는 책이다. 비결이라 했지만 저자의 책을 통해서 우리는 꾸준함과 반복 학습 등을 주문하는 인문학적 소양의 중요성을 만날 수 있다.

 

저자는 중학교 시절 이전부터 축적된 외국어 학습에 관한 경험을 상세하게 들려준다. 일기를 쓰지 않았다면 전할 수 없는 구체적인 이야기들이다. 여러 인문서들을 넘나들며, 영어, 일본어, 중국어, 한문, 프랑스어, 독일어 등을 공부한 경험을 넘나들며 전하는 저자의 채게는 인문학적 지식들이 즐비(櫛比)하다.

 

'맹자'에 기록된 북학이란 말은 전국시대 남쪽 초나라 태생의 진량(陳良)이라는 사람이 주공(周公)과 공자의 도를 좋아하여 북쪽으로 올라가 유학을 배운 데서 비롯되었다는 말, 이 일로 연유하여 북쪽의 청나라에 가서 문물을 배우고 익히는 사람들을 북학파라 불렀다는 말.( 41 페이지)

 

언어로 규정되지 않은 것은 사유할 수 없으며 사유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66, 67 페이지), 에른스트 카시러는 언어를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로 보았고 이 통로를 상징형식이라 규정했다는 말, 그렇게 심볼의 어원인 희랍어 symbole는 두 조각으로 나뉜 막대기 하나를 의미하였다는 말.

 

두 친구가 저마다 둘로 나뉜 막대기 조각을 하나씩 지니고 있다가 자식에게 물려준다. 물려받은 두 자식은 조각을 서로 맞춰보고 들어맞으면 선조의 우정 관계를 인정하고 우정을 이어나간다. 낯선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이들이 선천적으로 하나로 묶인 관계임을 나타내는 제 3의 매개가 상징이라는 것이다.(72, 73 페이지)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 나라 말에 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괴테가 한 말이다.(87 페이지)

 

본문에 역()에 대한 글이 나온다. 형태로는 일()과 월()을 합한 글자이고 뜻으로는 교역(交易), 변역(變易)을 의미하고 황하(黃何)에서 그림이 나오고 낙수(洛水)에서 글이 나오는 것을 보고 성인이 본받아서 만든 것이다.

 

저자는 언어에 문법을 맞춰야지 문법에 언어를 맞추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문법을 먼저 공부하고 언어를 읽고 쓰는 것은 본말이 전도되었다고 말한다. 특히 한문에서 그렇다고 말한다. 한문에는 문법이 필요 없다고 하는 것도 만용이지만 문법에 얽매이는 것은 여행을 한다고 지도를 보며 한 발짝도 떼어놓지 않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134, 135 페이지)

 

저자는 요즘 출판계와 독서계에 가독성이라는 망령이 지배해 수사적 장치를 가능한 한 배제하고 문장을 간결하게 다듬으려고만 한다고 지적한다. 만연체, 화려체, 간결체, 우유체, 강건체......문장의 개성을 살려주던 문체가 사라지니 주어 하나에 목적어와 부사 성분을 두고 술어 하나만 달랑 남는 천변일률의 글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152, 153 페이지)

 

저자는 어떤 언어든 쉬운 것은 없다며 아주 일상적인 소통을 하는 상황이라면 굳이 외국어를 많이 배우지 않아도 가능하지만 한 나라의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해당 문화의 정수를 담은 문학작품을 읽으려면 잠심(潛心)하여 오랜 시간 공부를 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201 페이지)

 

발화자와 수용자가 메시지를 주고 받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변형이 일어난다. 이 변형에 해석이 개입한다. 번역이든 해석이든 나의 선()이해가 전제되기에 오해는 숙명적이다. 이때 말하는 오해란 틀린 이해, 잘못된 이해가 아니라 해석의 대상을 100퍼센트 그대로 거울처럼 반영하지 못하고 나의 선이해라는 프리즘으로 투과하여 반영한다는 말이다.(206, 207 페이지)

 

저자는 외국어는 최소 2년 멈추지 말고 꾸준히 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기계적 훈련의 힘을 믿으라고 말한다. 단어를 외운다고 해서 반드시 언제라도 생각나도록 외우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러 차례 반복해서 읽고 쓰는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외국어 학습도 성취한 만큼 계속 동기부여를 해야만 지속할 수 있다고 말한다.(240 페이지)

 

저자는 번역서 부분이 이해되지 않아 원문을 찾아보면 어김 없이 번역도 헤맨 부분이라는 말을 한다. 본문에는 우리말과 여러 면에서 유사한 일본어라고 특별히 다른 초특별 고속도로는 없다는 말도 있다 저자는 외국어 학습도 성취한 만큼 계속 동기부여를 해야만 지속할 수 있다고 말한다.(240 페이지)

 

저자는 아무리 쉬운 문장이라도 우리말로 옮기려면 내 언어가 얼마나 졸렬한지, 내 표현 역량이 얼마나 부족한지 바로 깨닫게 되며 번역 과정을 거치면 우리말 실력도 쑥쑥 늘게 된다고 말한다.(244 페이지)

 

부록으로 한문, 중국어, 일본어 번역의 실례를 들어 놓기까지 해 공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이 책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동기부여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소통, 그리고 외국어 공부의 가장 큰 동기는 외국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고 대표적으로 외국 소설 등을 원문으로 읽는 것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좋은 책으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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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함석헌 기념관에서 이경교 시인의 강의('근대적 자각과 시적 인간')를 듣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난학(蘭學)과 일본의 독서운동, 그리고 근대화란 챕터를 들은 한 청자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배를 거론하며 불편감을 표했습니다.

 

국가 구성원의 독서 수준의 차이가 소설 및 문화 수준의 차이를 낳았다는 견해에 정치적 반응을 할 필요는 없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든 순간이었습니다. 일본이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유럽의 강국들로부터 선진 문명과 문물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1871년 이후입니다.

 

우리의 이 시기는 세도정치로 나라가 근대화의 도약 가능성을 스스로 폐기한 이후의 시기임을 생각하면 안타까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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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인트 2018-10-21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학 덕분에 일본의 서양 의학 기술이 훨씬 앞당겨진 계기가 되었죠...그 자리에서 일본의 식민지배를 거론할 것까진 없었던듯 한데..그 점에 공감합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8-10-22 11:08   좋아요 0 | URL
네.. 저와 같은 생각을 하셨네요.. 감사합니다... 배울 것은 배워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신형철 교수의 이상 시인 강의(2018915일 김수영 문학관)에서 들은 이야기 중 플로베르에 대한 것이 있었다. 어떻게 이상 시인 강의에서 플로베르 이야기가 나왔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왜 플로베르가 현대 작가로 불리는지에 대해 들은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신형철 교수는 플로베르가 '보봐리 부인'의 불륜을 다루면서 그 행동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대 작가로 평가받는다는 말을 했다. 말하자면 도덕과 미학을 분리했기 때문이라는 의미이다.

 

산드라 스코필드의 '소설 어떻게 읽고 써야 하는가?'에 플로베르에 관한 다른 해석이 나온다. 플로베르는 사실상 완성본이나 다름없는 초고를 다 쓸 때까지 원고 한 장에 의술, 체조, 외교, 심리, 예술을 담으려 했다며 산드라 스코필드는 "플로베르는 첫 현대 소설을 씼다고 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13 페이지)

 

어떤 말이 맞을까? 확언할 수는 없고 신형철 교수의 말이 더 일리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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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만든 조선의 최강 군대 장용영 - <무예도보통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기념
김준혁 지음 / 더봄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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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71027일 아시아 역사상 최고의 무예서라는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정조가 만든 조선의 최강 군대 장용영(壯勇營)'은 바로 그 '무예도보통지'의 유네스코 등재를 즈음해 나온 김준혁 교수의 책이다.

 

무예도보통지는 선조대에 만들어진 무예제보와 영조대에 만들어진 무예신보를 잇는 무예서이다. 정조가 이용후생의 실용지학을 추구하는 이덕무, 백동수 등의 인물들에게 지시해 무예도보통지를 만든 것은 사도세자에 대한 또 다른 추숭작업이었다.

 

저자는 김체건, 김광택, 임수웅, 백동수로 이어지는 조선 후기 무예의 계보는 장용영을 만들어가는 오랜 준비이고 인연이라 말한다.(28 페이지) 임수웅은 사도세자의 호위무사, 백동수는 정조의 호위무사였다. 무예도보통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 사도세자이다.

 

15세에 처음 대리청정을 한 사도세자는 영조와 관계가 어긋남에 따라 무예서 편찬에 힘을 쏟았다. 영조를 이어 즉위한 정조가 펼친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현양(顯揚) 사업은 자신이 효의 군주임을 보여주는 일이었고 이는 자신의 정통성을 확고히 하는 것이자 왕권 강화의 수단이기도 했다.

 

중요한 점은 그것이 조선 후기 기본 군사체제를 안정화시킬 중요한 행위인 동시에 신진무반층을 양성하려는 포석이었다는 점이다. 사도세자는 북벌을 천명했던 효종을 늘 닮고자 했고 정조는 그런 사도세자를 닮고자 했다.

 

정조는 무기 제작 의도를 가졌던 사도세자를 계승해 1795년 윤 2월의 화성행차에서 매화포(埋火砲) 실험을 했고, 군복을 입고 다녔던 효종처럼 군복을 입고 다닌 사도세자를 계승하기 위해 군복을 입고 행차를 했다.

 

장용영 외영을 화성에 신설하고 강력한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1795년 윤 2월 화성행차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한 정조는 환궁 길에 병자호란의 치욕이 서린 남한산성을 방문, 승군들의 훈련을 관람하고 지뢰의 일종인 매화포를 설치하는 등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했다.(286 페이지)

 

정조는 효종이 후원에서 북벌을 위해 말타기 연습을 한 것을 좇아 본인도 청양문 앞에서 말을 타고 다녔다고 강조했다.(220 페이지) 정조는 평양 일대의 서북 지역의 무사들을 활용하려고 한 사도세자의 의도를 따라 서북 지역 무사들을 장용영에 소속시켜 활용하려 했다.(202 페이지)

 

의미 있는 점은 정조가 능허관만고(凌虛官萬稿)’를 편집해 사도세자가 영조와 정성왕후의 만수무강을 송축하며 쓴 '연상사(延祥辭)''장락사(長樂辭)'를 수록한 것은 사도세자가 부왕 영조를 모해할 뜻이 없었음을 밝힌 것이라는 글(90 페이지)이다.

 

정조가 영조대에 만들어진 무예신보가 사도세자의 주관으로 편찬된 것임을 강조한 것도 그렇다.(능허관은 사도세자의 호이다. 하늘을 높이 날다, 허공을 가르다, 승천하다, 비상하다 등의 의미를 지닌 이 호는 사도세자의 무인적 기질을 잘 드러내준다.) 즉위 과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던 정조는 기존의 군왕들에 비해 더욱더 군제개혁의 필요성을 느꼈다.(142 페이지)

 

정조에게 필요한 것은 군권 장악이었고 불필요한 군영(軍營)의 통폐합이었다. 정조는 결코 나약한 버릇에 매달려 400년 동안 전해오는 임금의 권한이 자신 때문에 허물어지게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153 페이지)

 

정조가 호위부대인 장용위를 설치하자 반대가 심했다. 왕권 강화를 위해 설치하는 부대라는 것을 안 세력들로부터 견제를 받은 것이다. 군대 육성은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것일 뿐 아니라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여 제도를 개혁하는 힘을 갖는 것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 정치사가 서인(훗날 노론) 중심으로 흘러간 것은 그들이 군사력을 가졌기 때문이다.(184 페이지)

 

정조는 성호 이익의 친위군병론을 적극 받아들여 친위군영인 장용영을 창설했다.(186 페이지) 정조는 즉위 직후 국가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노론의 사병과도 같은 오군영(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총융청, 수어청)을 혁파하고 조선 초기 병농일치를 위주로 하는 오위체제로 군제개혁을 단행하고자 했다.

 

저자는 장용영 창설 목적을 셋으로 설명한다. 1. 친위군 강화, 2. 군역법 혁파를 통한 민생안정, 3. 북벌을 위한 군사력 증강 등이다. 정조가 친위부대를 양성한 것은 봉림대군(후에 효종)이 심양에 볼모로 갔을 때 자신을 호위하여 함께 다녀온 8장사를 별군직으로 임명하여 친위부대를 양성한 것을 본받고자 한 것이다.(199 페이지)

 

정조가 장용영 깃발에 대한 정식을 세운 것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듯 장차 화성 축성을 통해 새로운 국가건설을 하겠다는 개혁 의지와 조선의 군제가 중국과 동등하다는 자주적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정조는 북벌론의 연장선상에서 오위(五衛) 체제로의 전환을 추진했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점은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등이 북벌론과 북학론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214 페이지)

 

정조가 사도세자 묘소를 굳이 수원부로 옮긴 것은 그곳이 단지 명당이어서만은 아니다. 사도세자가 묻힌 현륭원 터는 선조와 효종의 능침으로 정해졌던 곳이다.(221 페이지) 정조는 대부분 당색이 노론 벽파가 아닌 시파 내지 남인, 당색 없는 인물들을 장용대장으로 기용했다.

 

장용영은 기존의 군영과 다른 직제로 편성, 운영되었다. 정조는 국가 개혁에서 핵심을 국방개혁으로 꼽았다.(258 페이지) 정조는 자신의 친위부대인 장용영 군사들을 특별 대우하는 한편 그들의 오만한 폐단을 막고자 하였다.(266 페이지)

 

장용영이 오군영과 모든 면에서 위상이 다르다고 생각한 정조는 그에 맞게 대우가 달라야 한다고 인식했다.(275 페이지) 정조는 특별 하사금을 주는 등 장용영의 가난한 장교나 군병들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었다.(276 페이지)

 

정조는 '무예도보통지' 서문에 즐풍목우(櫛風沐雨)라고 쓰면서 장용영 군사들의 훈련을 강하게 시킬 것을 지시했다.(281 페이지) 즐풍목우는 바람으로 머리를 감고 빗물로 목욕하라는 의미이다. 장용영 기병들의 진법 훈련 수준은 조선 최고의 수준이었다.

 

정조가 선대 국왕 묘소 참배 후 돌아오는 중 실시한 군사훈련은 대체로 즉흥적이었다. 의도를 미리 알리지 않은 것이었다.(289, 290 페이지) 정조에게 수원은 군사정책 개혁 및 민생안정 개혁의 산실이었다. 그래서 수원에 장용영 외영을 만든 것이다.

 

수원을 핵심 거점으로 선택한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삼남지방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하는 군사상 요지였다는 점, 교통상 요지로 타 지역에 비해 상업이 발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 등이다.

 

정조는 화성유수부에 장용영외영을 설치하면서 화성유수로 하여금 장용외사를 겸하도록 하는 조처를 단행했다. 이는 조선 정치사에서 매우 파격적인 일로 일개 고을이 국왕의 친위도시로 거듭나는 일이기도 했다.(299 페이지)

 

장용영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정조 호위였다.(325 페이지) 정조는 화성 축조 재원을 마련할 때에도 금위영과 어영청의 번상군을 10년에 한해 매번마다 각 1초씩 감축하는 대신 포()를 부과하여 이를 화성 축조 비용으로 충당케 했다.(333 페이지)

 

정조는 이전에 한 번도 실시한 적 없는 야간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이는 장용영외영의 군사들과 백성들의 합동훈련을 통해 화성을 실질적으로 방어하게 한 것으로 장기적으로는 정조의 화성 거주를 위한 훈련의 의미를 갖는다.(347 페이지)

 

저자는 고위 신하들과 무인들에 비해 3배 이상의 적중률을 보인 역사상 최고의 신궁(神弓)인 무인 군주 정조의 군복을 입은 늠름한 모습이 조선을 지킬 믿음직한 인식을 심어주었을 것이라 말한다.(349 페이지) 저자는 백성 없는 군대는 의미가 없고 군대 없는 백성은 위태롭다고 말한다.(352 페이지)

 

장용영 군사훈련의 특징은 백성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이는 장용영이 조선 최강의 군대로 평가받은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353 페이지) 저자는 정조에 대한 비판 중 하나는 본인 재위시에는 개혁을 추진했지만 국왕주도의 것이었다는 점이라 말한다.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아 이후로 60년간의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리게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는 틀린 것도 아니고 옳은 것도 아니라 말하며 정조 탓에 세도정치가 있었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저자에 의하면 정조는 오회연교(五晦筵敎)를 통해 개혁 시스템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안타깝게 정조는 이 천명(闡明) 이후 유명을 달리했다.

 

정조는 군신공치를 실천하면서도 강력한 카리스마로 왕권을 강화해 의도대로 국정을 운영했다. 군주는 자신만이 아닌 백성들을 위해 때로는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비밀리에 편지를 보내 상대를 다독거리기도 하고 정국을 통합하기 위해 신하들과 어우러져 술을 마시고 시를 짓는다.(355 페이지) 이것이 바로 군주의 역할이다.

 

그래서 정조는 당파로 갈라져 싸우지 않고 신분으로 인하여 차별받지 않는 세상, 힘이 없어 외세에 고통 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재위 24년 내내 고군분투했다. 정조 타계 이후 반개혁 세력에 의해 정조의 개혁 프로그램은 지워졌다.

 

수렴청정을 한 정순왕후 김씨에 의해 장용영이 혁파된 것이 그 한 예이고 가장 아픈 현실이다. 이것으로 정조에 대한 왜곡된 시각은 충분히 제거될 것이라 생각한다. 많이 배우고 느꼈다. 저자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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