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공부 가이드 - 브리태니커 편집장이 완성한 평생학습 지도
모티머 J. 애들러 지음, 이재만 옮김 / 유유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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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박사, 저술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편집장을 지낸 모티머 애들러(Motimet Adlet; 1902 2001). 그의 '평생 공부 가이드'는 독특하다는 평으로는 부족한 책이다. 저자는 찰스 반 도렌과 함께 '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을 쓴 분이다.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여기까지 읽을 만큼 인내심과 끈기가 있는 일부 독자는 약간 당황했을 것이라 말한다.(161 페이지) 이 책은 어떻게 공부하는지를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 지식 분류 역사를 다룬 책이다.

 

책을 열면 인문학을 전문화라는 야만을 다스릴 치료제로 이해함으로써 아스펜 인문연구소의 설립을 격려한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에게란 말이 있다. 저자는 자신의 책을 안내서라 부른다. 종국에는 매력적인 목표이자 노력의 완성인 이해와 지혜에 도달하기를 바라며 모든 사람이 여정을 시작할 때 필요한 지도를 자신의 책이 제공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이 책은 종합 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을 추구하는 책이고 스스로 공부해 이해와 지혜에 도달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이다. 저자는 당대의 모든 지식을 알파벳순이 아닌 방법으로 백과사전처럼 포괄했던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알파벳순인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인간의 지식을 조직하는 체계적이고도 원리적인 방법을 전혀 내놓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37 페이지)

 

물론 백과사전의 항목을 알파벳순으로 하지 않고 체계적인 방법으로 구성하면 이용자에게 지식의 구조 즉 학식 세계의 지도를 제공할 수 있지만 이용자가 관심 있는 항목을 손쉽게 찾게 해주는 참고 도서로서의 기능을 갖추지 못하게 된다.(41 페이지)

 

저자는 인문학이 학문의 모든 갈래를 열거한 뒤 남는 것을 가리키고 있음을 비판적으로 본다. 저자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이야기를 한다. 기원전 1세기에 이집트를 침략한 로마군의 공격에 잿더미가 된 그 도서관의 파피루스 필사본들이 어떻게 배열되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것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리에 맞게 배열되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59 페이지)

 

아리스토텔레스가 기원전 4세기에 리케이온에서 한 강의를 일군의 정연한 논리로 편집하고 편찬한 것도 백과사전으로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저는 물리 현상과 천체의 운동에서 시작해 식물과 동물, 생명의 모든 현상을 거쳐 생물의 영혼에서 끝나며, 신학적 논의의 마지막 부분이자 편찬자가 형이상학이라는 제목을 붙인 논저에서 절정에 이른다.

 

이러한 저작 다음으로 윤리학, 정치학, 수사학, 시학을 다루는, 이론적이기보다 실천적이라 할 만한 다른 종류의 논저가 이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 전체의 서론을 이루는 것은 논리학과 학문 방법론에 관한 논저로서, 이 논저를 통칭해 오르가논이라 부른다.(33, 34 페이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론적 지식의 영역을 하위의 자연학, 중위의 수학, 상위의 형이상학의 위계질서로 조직했다.(162 페이지)

 

프랜시스 베이컨은 책을 산출하는 인간의 능력을 오름차순으로 기억력, 상상력, 이성으로 분류했다. 전기(傳記)와 역사는 기억력의 영역에 들어가고, 시와 픽션은 상상력의 영역에 들어가고, 철학은 이성의 영역에 들어간다.(60 페이지) 물론 기억력만이 아니라 이성과 상상력도 역사적 지식에, 역사적 연구와 서술에 관여하지만 기억력이 없이는 역사도 없다.

 

마찬가지로 기억력과 상상력은 모든 형식의 철학적 또는 과학적 기획에 관여하지만 이성 없이는 철학이나 과학은 존재할 수 없다. 이성과 기억력 역시 시 창작에서 일정 역할을 하지만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상상문학은 없을 것이다.(91 페이지)

 

저자는 여러 학자들을 이야기한다. 그 중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을 빼놓을 수 없다.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언어의 사용과 정신의 작용을 통제하는 훈련, 문법과 논리를 공부해 습득하는 기술을 배움의 첫 단계로 정했다. 플라톤처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도 특정 주제에 대한 공부를 개개인이 많은 경험을 쌓아 원숙해진 시기로 유보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과 정치학 공부는 젊은이의 몫이 아니라 말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론적 진리와 철학적 지혜를 추구하는 탐구의 정점 또는 가장 높은 수준과 관련이 있다. 플라톤은 변증술,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이다.(형이상학은 물리현상을 넘어설 뿐 아니라 변화, 움직임, 생성보다 존재에 관심을 두는 학문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차이점도 많다. 플라톤은 물리적 세계와 자연의 관찰 가능한 현상에 대한 지식을 주는 학문 전부를 뺐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포함시켰다.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론적 지식과 실천적 지식을 엄격하게 구분했다.(79 페이지) 플라톤은 역사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가 역사보다 철학적이라는 말을 할 때 한 번 역사를 언급했다. 시는 실행할 수 있거나 실행할 법한 행위를 묘사하고 역사는 일어난 사건만을 다룬다.

 

입증이나 반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보면 역사, 철학, 과학 등은 지식의 영역에 속하지만 시는 그렇지 않다.(92 페이지) 그런데 위의 네 영역을 더 넉넉한 의미로 진리를 받아들일 경우 모두 진리에 포함된다. 저자는 우리의 이해에 이바지하는 시와 철학의 공통점은 지성을 사용하는 것이라 말한다.(186 페이지)

 

디드로와 달랑베르는 프란시스 베이컨에게서 심대한 영향을 받았지만 베이컨과 달리 종교적 신학을 철학에 포함시킴으로써 인간의 지식과 신성한 지식의 구별을 무시했다.(102 페이지) 콩트는 인간 지식의 세 단계 발달론을 제시했다.

 

지식을 신화나 미신 등과 동일시한 신학적 단계, 형이상학 즉 사변적 단계, 실증과학으로 대표되는, 경험적으로 증명된 타당한 지식의 단계다.(114 페이지) 저자는 에피스테메와 파이데이아의 차이를 설명한다. 라틴어로 Scientia(스키엔티아)로 번역하는 그리스어 에피스테메는 특정 전문 분야에서 사용되는 전문 지식을 말한다. 라틴어로 후마니타스로 번역하는 그리스어 파이데이아는 모든 사람이 갖추어야 하는 종합적 지식이다.(173 페이지)

 

저자는 전문화를 야만이라 부른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를 언급한다. 저자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종합인이면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생 초반, 후반에는 종합인이 되어야 하고 중반에는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77 페이지) 저자는 평생 공부를 지속하는 데 특히 필요한 것은 시와 상상문학에서 얻을 수 있는 종류의 이해라 말한다.(205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종합적 교양인을 나타내는 표식은 인간 학식의 전 영역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다.(21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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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자주 들리는 말이 스포일러란 말이다. 다 아는 바이지만 반복하자면 망치는 사람이란 뜻이고 구체적으로 말해 영화를 먼저 보고 줄거리를 상세하게 말해 감상을 방해하는 사람을 이른다. 내가 이 단어의 원형(?)인 스포일이란 말을 처음 들은 것은 매를 아끼면 아이를 망친다는 의미의 Spare the rod, spoil the child란 문장에서이다.(지금도 영어 교과서에 이런 문장이 있는지 궁금하다, 아마 없어졌으리라 생각한다.)

 

어떻든 내게도 스포일러란 말이 자주 들리는 것은 전례를 딛고 영화에 관심을 두게 된 결과이기도 하고 SNS에 자주 노출된 탓이기도 하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것이 손에 꼽을 정도인 내가 이 말에 민감한 것은 최근에는 아니지만 내가 책 서평을 꽤 상세하게 해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쓴 서평을 보고 책 한 권을 다 읽은 것 같다는 말이 내게 전달되기도 한다. 처음 이 말을 듣고 나는 내가 핵심을 놓치지 않고 거론해 높이 평가받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너무 많은 정보를 담아낸 것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일 수도 있다 싶다.

 

스포일러란 말은 두 경우로 분류될 것이다. 영화에 대해서든 책에 대해서든 말로 하는 경우와 글로 하는 경우다. 말로 하는 경우는 혹시 친한 사람이라면 막을 수 없어서 스포일러란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글로 하는 경우는 아니지 않을까 싶다. 글로 하는 경우는 강제성이 없다. 스포일링이라 하기 어려운 것이다.

 

내용이 조금만 길고 지루하면 바로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사람들이 무수한 인터넷 공간에서 스포일링이라니.. 넘어가면 그만일 텐데. 혹여 글이 너무 리얼하고 재미가 있어 멈추지 못하고 끝까지 읽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도 다른 관점으로 영화를 볼 여지를 염두에 두고 그냥 넘길 수 없는가?

 

중요한 것은 줄거리가 아니다. 즉 아무리 줄거리를 상세하게 듣게 되더라도 영화를 보는 제각각의 시각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영화를 단지 이야기 거리를 얻으려고 보는 경우는 별로 없을 것이다. 자기만의 시각을 확인하고 느낌을 다듬는 것이 바람직하리라.

 

[‘광장을 읽는 일곱 가지 방법]이란 김욱동의 책이 있다. 최인훈 작가의 광장을 읽는 방법을 역사 비평, 형식주의 비평, 심리주의 비평, 사회학적 비평, 신화 비평, 구조주의 비평, 포스트구조주의 비평 등으로 제시한 책이다. 물론 책이든 영화든 이런 여러 방식으로 작품을 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기만의 시각을 갖는 것이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각에 같은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이 많이 차이나는 진술을 하는 것은 라쇼몽이란 영화에 한()하지는 않을 것이다. 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그 자체로 한계의 존재이고 시각은 불완전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단순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에 맞는 편한 영화를 보려는데 줄거리를 미리 구체적으로 말하니 김이 샌다는 식으로.. 그렇다면 할 수 없다. 다만 적어도 글로 줄거리와 의미 등을 상세히 말하는 경우에는 스포일링이라 하지 말고 그대로 넘어가면 되리라.

 

나는 감동은 작가(作家)와 수용자가 함께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리 대단한 작가의 글이나 말도 듣거나 읽는 사람이 준비가 되지 않았거나 안목이 없으면 불편하거나 평범한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혹 상대가 말이나 글 실력이 너무 뛰어나(끝까지 읽거나 들었)다면 스포일링이라 하지 말고 자신의 공감 및 수용 능력을 확인한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을 높게 보아야 할 것이라 말하고 싶다.

 

만일 그런 뛰어난 이야기꾼이나 문필가의 내공에 감동한 결과 그 영화를 반드시 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면 자신의 공감 및 수용 능력을 확인했으니 다행인 데다가 영화까지 기대를 갖고 보게 되었으니 이중으로 감사할 일이고, 그렇지 않고 듣기는 들었지만(또는 읽기는 읽었지만) 그 결과 감상욕구가 사라졌다면 자신의 공감 및 수용 능력을 확인한 것에 대해 감사하면 되지 않겠는가. 어떤 경우에든 스포일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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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에 이어 두해 째 왕릉(王陵) 연구팀에 속해 올해 첫 숙제를 했다. 융건릉(隆健陵)에 다녀오지 않아, 참가한 팀원들과 달리 소략(疏略)한 숙제를 맡게 되었다. 가지 않은 것은 지난 해 9월 동작(銅雀)에서 간 일정에 참여했었기 때문이다.

 

또 갈 수도 있었는데 내키지 않았다. 외적 요인으로 시큰둥한 것이 아니라 공부하기 위해 들어갔지만 왕릉은 궁()이나 묘()에 비해 다루기(?)가 난감하다. 신이 나지 읺는다고 해야겠다.

 

사도세자(장조)의 융릉(隆陵)과 아들 정조의 건릉(健陵) 이야기를 각각 한 편씩 하는 숙제를, 여러 편의 글을 읽고 내 생각으로 정리, 재편하는 형식으로 마무리짓지 못했다. 내켰다면 정조의 풍수 활용에 대해서도 썼을 것이다.

 

이종호의 책 역사로 여는 과학문화 답사기에서 읽은 다음의 글이 마음을 풀어주었다. “능호를 건()이라 한 것은 쉬지 않고 가는 하늘의 도를 상징한 것이다.”(362 페이지) 정조의 능에 대한 이야기이다. 굳셀 건이지만 하늘의 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일리가 있다 여겨진다.

 

하늘이니 건()이고 그것을 건()으로 바꿀 법도 하다. 지난 해 나온 박현모 교수의 정조평전의 부제가 생각난다. ‘말 안장 위의 군주라는 부제다. 이 부제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의 군주는 물론 늘 목숨을 위협 받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군주 정조를 상징하는 절묘한 중의적인 말이다.

 

나는 정조(正祖)로부터 주역(周易)의 하늘 곧 건괘(乾卦)를 연상한다. , 하면 용()이 생각난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세운 원찰 용주사(龍珠寺)를 생각하고 하는 말은 아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전면에 보이는 안산(案山)을 여의주로 인식하였고 그 중요성에 대해 굉장히 강조하는 모습을 보였다.”(박정해 지음 사찰에서 만나는 불교풍수참고) 용주사 자체가 정조의 깊은 관심 속에 입지선정이 되고 건설된 사찰이다.

 

물론 나는 풍수를 논할 실력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올해 임기봉 교수의 임금의 도시를 읽고 풍수를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되었다. 중요한 점은 풍수는 자연친화적이기에 인간에게 유리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런 일반적 차원 말고 죽은 조상이 살아 있는 후손과 감응(感應)한다는 것은 너무 막연하고 주관적이다. 표면은 발복(發福)이고 실제적으로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물론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를 위해 명당을 고른 정조의 경우를 보면 정치적 차원과 무관한 경우도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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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9 00: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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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0 04: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명창정궤(明窓淨机)는 밝은 빛이 들어오는 방의 정갈한 서안(書案)을 말한다. 일본 작가 나쓰메 소세키<なつめ そうせき: 夏目漱石>가 좋아했다고 한다. 가끔 단 한 권의 책도 없이 텅텅 비어 정결한 방, 절간 같은 방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는 불문학자 김화영 교수의 글이 생각난다.(‘바람을 담는 집수록 책이 없는 방, 절간 같은 방’ 186 페이지)

 

밝은 빛이 들어오는 방의 정갈한 서안을 의미하는 명창정궤에서 정갈하다는 의미는 김화영 교수가 말한 것처럼 책이 없는 책상이라기보다 서너 권의 책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김화영 교수는 어쩌다가 묵어가는 시골 여관방, 주전자와 물그릇과 재떨이가 전부인 금욕적인 방, 그리하여 마침내 책이 그리움이 되는 오후를 그렸지만 나는 서너 권의 책이 있는 방을 만든다면 그 책은 어떤 책들이 될까? 궁리하지 않을 수 없다.

 

아아, 상당히 어려운 과제다. 이런 구상(構想)은 모든 음악이 없어져도 바흐의 평균율만 있으면 복원이 가능하다는 말에 영감을 받은 결과다. 책의 물질성에 의미를 부여하는 나는 아무래도 알베르또 망구엘 류의 사람이리라.

 

보르헤스 이야기를 해야겠다. 시각 장애인이 된 채 국립 아르헨티나 도서관장이 된 보르헤스는 그 사건을 자축하기 위해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하느님의 기막힌 아이러니를 시로 썼다.(알베르또 망구엘 지음 밤의 도서관’ 283 페이지)

 

그런 보르헤스가 책은 읽는 순간 속에 존재하고, 그 후에는 읽은 페이지에 대한 기억으로서 존재하며, 책이라는 구체적 형태는 얼마든지 처분 가능하다고 생각한 작가인 반면 제자 망구엘은 언어의 구체적 물질성, 책의 단단한 현존, 그 형체, 크기, 질감을 원하는 사람이다.(2018827 교수신문 수록 김정규 시인 글 서재를 해체한다는 것에 대하여참고)

 

나는 사실 펴볼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하는 책들조차 과감히 정리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 나에게 금욕적인 방은 상상 이상이 될 수 없다. 그러니 깨끗하게 방을 정리하리라 마음 먹을 뿐이니 나는 바벨탑 무의식의 소유자일 수 밖에 없다. 쌓아서 구원에 이르려는 또는 이를 수 있다고 믿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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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천사의 말을 한다
허금행 지음 / 경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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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천사의 말을 한다. 수필문학, 시문학으로 등단한 허금행님의 수필집이다. 저자는 현재 뉴욕에 거주한다. 표제작은 수필집 가장 마지막에 수록되었다. 고교 2학년 때 만난 의과대학 본과 1학년의 남편 이야기이다. 그러나 저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남편은 미국 산부인과 자격시험으로 전문의가 된 후 곧바로 뉴욕신학대학에 입학해 목회학 박사가 되었다. 남편이 끝없이 공부만 할 동안 집안 건사는 아내인 저자의 몫이었다. 남편은 네 번째 수술을 받고 마취에서 깨어나 저자에게 나한테 시집와서 고생만 많이 했다는 말을 했다. 이것을 천사의 말이라 표현한 것이다.

 

저자는 일 때문에 힘들어 한 남편을 위해 운영하던 화랑도 닫았다. 저자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인 고린도전서 13장을 말한다. 자신을 지치지 않고 견디게 한 것이 사랑 장이었구나 란 말을 한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투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고 견디느니라..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란 구절들로 이루어진 장이 사랑 장이다.

 

이 사랑은 종교적 사랑이다. 계산하지 않는 사랑, 숭고한 사랑이다. 저자는 중학교 2학년에 덜 익은 정포도라는 글을 써내 문예반에 들어간 후 글쓰는 일을 줄곧 해왔다. ‘남편이 천사의 말을 한다란 글에 저자가 사랑은 흐르고 미움은 고인다는 시를 썼다는 대목이 있다. 플라톤은 말은 흐르고 글은 남는다고 하며 그렇게 흐르는 말이야말로 신성하고 빠른 것이라 했다. 이 말을 저자의 말에 대입하면 사랑은 빠르고 신성한 것이라는 말이 되는가?

 

저자는 희망의 속삭임이란 장에서 청각 장애로 평생 장애자 수혜금을 받고 있다는 말을 한다. 지금은 청각이식수술을 받고 최신형 보청기로 말 뿐 아니라 음악까지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저자는 일상을 글로 옮긴다. 시를 쓰는 것이다. 미국의 지하철에서 경험한 풍경도 적어놓았다.

 

나무 이야기, 꽃 이야기, 여행 이야기 등등 저자의 글에는 수필을 통해 만날 수 있는 많은 소재들이 있다. 인상적인 것은 이런 말들이다. ”지나온 우리의 삶이 행복한 것이었다고 나를 다독거린다.“, ”나는 이 돌층계를 끝까지 오르면 거기에 행복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스스로 만든 덫에 걸린 나를 탈출시켜야 한다.“, ”꿈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어떤가!“..

 

.‘탈출을 꿈꾸며란 시가 눈에 띈다. ”거울 면에서 멀어질수록/ 멀어져 가는 또 하나의 나는/ 오늘을 탈출하고 싶은 진정한 나이다/ 겨울비가/ 숲속에서 떠도는 어제/ 숨어버린 벌판의 바람과 그림자를 위하여/ 차갑게 흔들릴 때 나는 없어지고 싶어한다/ 시간에서 멀리 잡을 수 없는 공간으로/ 내부에서 밖으로 나와 무너지고 부서져 아무것도 아닐 때까지/ 스스로 부딪쳐 산산조각 흩어지는 나는/ 그대로 갇혀 있는 저 안의 흔적을/ 탈출시킨다/ 밤 깊은 저 너머로“(외우고 싶다.)

 

저자는 전주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전주에서 여중 1학년 때 서울로 전학 온 동기 생각이 난다. 저자는 고교를 이화여고에서 다녔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서예가이신 아버지 앞에서 먹을 갈고 붓글씨 연습을 했다. 시나리오를 써보라는 주위의 권유를 시 아니면 안 쓴다는 대책 없는 고집으로 물리쳤다. 저자는 이를 후회되는 일이라 말한다.

 

글씨가 활자보다 더 아름답다는 말을 들었다는(물론 지금도 그러리라.) 저자를 보며 나도 늦었지만 붓글씨를 연습할까, 하는 생각을 한다.(이렇게 늦은 나이에 붓글씨를 시작하는 사람이 있을까?)

 

저자는 여성운동을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여자가 이 세상에 아이를 태어나게 하는 일은 어떠한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특권이며 아무리 남자들이 무슨 말을 해도 뒤집어질 수 없는 가장 값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어떤 모임에 나가든지 좋아하는 시를 복사해 나가서 함께 읽곤 한다.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도 그 시들 중 하나다. 저자는 아직도 시를 많이 읽는 사람에게서는 향내가 난다는 생각을 깊이 새긴다. 누군가가 저자의 글에 잡글이나 쓰면서...“란 토를 달았다.(너무 무례하다.) 저자는 단정하고 네모나고 메마른 글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라 자신을 표현한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나다운 잡글을 쓸 것이라 말한다. 이어 아주 인상적인 말을 한다. ”잘라내야 할 것을 적당한 시기에 제대로 잘라내야 글도 사람도 이 세상도 풍성해지는 것이거늘, ...“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자탄으로 읽힌다. 저자에게 시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저자는 자신이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날은 많이 힘들 때라고 한다. 시를 생각하는 순간부터 두려움과 함께 심한 두통이 엄습한다. 대학 때, 시를 꺼내기 위해서는 아주 깊은 우물 속 같은 험하고 외로운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체험을 했다. 시로부터 도망쳤지만 끝내야 할 때가 있다. 차분하고 담담하게 글들을 읽었다. 기쁨과 슬픔이 묘하게 어우러진 글이고 생각이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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