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품에 돌아온 문화재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엮음 / 눌와 / 201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국외소재 문화재 재단이 펴낸 '우리 품에 돌아온 문화재'는 여러 경로로 국외로 유출되었다가 우리에게 돌아온 문화재를 유형별로 정리한 책이다. 유형은 다섯 가지다. 1) 소장자의 기증으로 돌아온 경우, 2) 정부의 협상으로 돌아온 경우, 3) 민간의 노력으로 돌아온 경우, 4) 민관협력으로 돌아온 경우, 5) 일제강점기에 돌아온 경우 등이다.

 

1)의 대표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다. 2)의 대표는 외규장각 의궤 297책이다. 3)의 대표는 겸재정선화첩이다. 4)의 대표는 오대산 사고본 조선왕조실록 47책이다. 5)의 대표는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이다.

 

환수를 위해 정부기관이 나서면 문제가 복잡해질 수 있다. 섣불리 약탈, 반출한 문화재를 원소유국에 되돌려주면 비슷한 사례가 줄을 잇기 때문이다.(41 페이지) 한일간 문화재 반환 협상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1965년 한일협상이다.

 

경제협력자금이라는 모호한 명목의 배상금을 받는 대신 역사의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한 한일협정은 일제강점기 35년간의 한일 관계의 질곡을 해소하는 데 방해가 될 뿐 아니라 일본 소재 우리 문화재의 반환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가 일본에 문화재 반환과 관련해 처음으로 공식 거론한 시기는 19584차 한일회담 때이다. 용어도 민감한 문제 중 하나다. 반환이라는 말에는 약탈과 불법 반출이라는 범죄 행위를 인정, 사과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모은 오구라 컬렉션이 있다.

 

그는 전형필 선생이 문화재 보존에 쓴 돈의 열 배를 쓴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간 협정으로 돌려 받은 국외 소재 문화재 중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1965년 한일협정에 의한 반환이다. 두고두고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남는 협정이다.

 

물론 문화재 반환에서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은 정부의 지원과 정부간 협상이다. 민간이 여론을 주도하고 정부가 지원해 성과를 내는 경우가 바람직하다. 의궤는 임금이 보는 어람용(御覽用)과 보관하기 위한 분상용(分上用)으로 나뉜다. 두 판본은 질적으로 큰 차이가 난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외규장각 의궤는 대부분 어람용 의궤다. 문화재 불법 반출을 금지한 유네스코의 문화재의 불법적인 반출입 및 소유권 양도 금지와 예방 수단에 관한 협약이 맺어진 것은 1970년이다. 그 이전 반출된 것에 대해서는 효력이 없다.

 

20101112일 사르코지 대통령은 5년 단위로 갱신되는 대여 형식으로 외규장각 의궤 전부를 한국 측에 일괄 양도한다는 발표를 한다. 교류와 대여라는 원칙을 내던진 획기적인 결단이었다. 어보와 국새는 다르다. 어보는 존호와 시호를 올리는 등의 의례용, 국새는 외교문서나 공문서에 쓰는 공무용이다.

 

국새는 정변이나 전쟁 등으로 대부분 소실되었지만 어보는 종묘에 보관했기에 대부분 보존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어보의 세계기록 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민속학자 조창수(1925 - 2009) 여사는 어보의 반환을 이끌어낸 분이다.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 1837 - 1928)가 있다. 오구라 컬렉션의 주인공인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 1870 - 1964)와 다른 인물이다. 경복궁 철거작업 중 자선당을 일본으로 반출한 사람이다.

 

자선당은 오쿠라 기하치로에 의해 반출되어 오쿠라슈코칸(大倉集古館: 사설박물관)으로 활용되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화재를 만나 기단과 주춧돌만 남은 채 방치되었고 근대 건축사를 전공한 김정동 교수의 노력에 힘입어 우리나라에 80년만에 돌아왔다.

 

책은 민관협력으로 돌아온 문화재로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 47책을 말하며 조선왕조가 5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이어진 것을 기록의 힘이라 설명한다. 역사가 자신을 어떤 인물로 판단할지 두려워 한다면 왕이든 관리든 사적 이익을 위해 함부로 판단하고 행동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원주 법천사지(法泉寺址) 지광국사탑은 조선총독부도 뒤돌려줄 수 밖에 없었다는 제목으로 다루어졌다. 이 탑은 일제강점기에 돌아온 문화재다. 남한강과 그 지류인 섬강 주변에는 불교가 융성한 고려시대에 명성을 떨친 큰절들이 있었다. 흥법사(興法寺), 고달사(高達寺), 거돈사(居頓寺) 등이다.

 

이 절들은 임진왜란 때 뱃길을 차지하려는 일본군에 의해 폐사된 뒤 다시 세워지지 못했고 이후로는 새로운 교통로로 자리 잡은 물길과 멀어지면서 지금은 궁벽한 오지 같이 한산해졌다.

 

하지만 이들 절에 있던 여러 석조 문화재들이 여전히 당당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한때 매우 큰 절이었음을 실감하게 한다.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일제가 약탈해간 유물 중에서 보기 드물게 일찌감치 국내외 여론의 힘으로 찾아온 우리 문화재다. 모범적인 사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이 든 탓일까? 근원(近園) 김용준의 '김용준 수필선집'을 읽으니 참 좋다. 간결 소박한 글이 읽는 맛을 느끼게 한다. 아무 데나 펴보아도 좋고 아무 데서나 펴보아도 좋은 글이다. 잘 알듯 김용준은 상허 이태준 선생이 지어준 노시산방이란 이름의 집에서 살았던 분이다.

 

근원은 옛 고자를 써서 고시산방이라 하는 것이 어떻냐는 말이 있었지만 노()자가 좋아 노시산방이라 이름했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들으니 자신을 오수노인(午睡老人)이라 칭한 최순우 선생 생각이 난다.

 

성북 준비를 하며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시인 이상에 더 호감을 갖게 되었다. 이상은 구인회 등 이태준과의 인연, 수향산방의 김환기, 변동림과의 인연이 있다. 평론가 김민수는 김환기 화백의 점() 그림과 이상 시인의 선에 관한 각서가 연결된다는 말을 한다.

 

이상은 제비다방을 비롯 무기(むぎ: ) 다방, 츠루(つる; ) 카페 등을 열었다. 그에게는 공간에 대한 감각, 선호가 있었다. 무엇보다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등에 조예가 깊었던 사람이고 여성을 자신처럼 거세된 존재로 보며 불쌍히 여겼지만 아파하지 않는 존경스러운 존재로 본 이상.. 매력적이다.

 

나는 상자에 갇힌 근대인을 풍자한 이상(李箱)이 마음에 든다. 그의 글들, 그에 대한 글들을 읽자. 그의 권태는 시간이 남아 한가롭게 노닥거리는 데서 온 권태가 아니라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사로서 창의성이라고는 필요하지 않은 관공서 건물 설계를 답습한 데서 비롯되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말한 윤동주 시인이 생각난다. 그러고 보니 서촌에서 너무도 다른 두 시인을 거울로 비교한 적이 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어제 독서 모임에서 전혜린(田惠麟) 선생 이야기가 나왔다. 여고 시절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나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같은 책을 통해 자살에 대해 읽었던 문지온(‘남은 자들의 길, 800km’의 저자) 선생에게 자살은 지고지순하고 순수한 사랑을 꿈꾸는 영혼들이 편협하고 경직된 현실에 부딪혔을 때 맞게 되는 비극적인 결말이었고, 그래서 슬프지만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런 저자의 환상을 산산조각 낸 것이 있었으니 바로 고교 시절 겪은 아버지의 자살이었다. 저자는 결국 800km에 이르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 걷고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말을 했다.

 

어제 한 일간지를 통해 독일에 소설가 이미륵(1899 1950: 한국명 이의경: 李儀景’)의 추모 기념동판이 세워졌다는 기사를 읽었다. 이미륵 선생은 전혜린 선생이 번역한 압록강은 흐른다를 통해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분이다. 한국 정신문화와 생활상을 서구에 알렸다는 평가를 받는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의 저자인 이미륵의 독일행은 3.1 독립운동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경성의전 3학년 때 일어난 3·1운동에 가담한 이후 일본 경찰의 수배를 피해 상하이 임시정부로 간 것이 계기가 된 것이다. 당시 이미륵은 안중근 의사의 사촌인 안봉근 선생의 권유를 받아들이고 독일 망명 길에 올랐다.

 

이미륵 선생은 독일에서도 김법린(金法麟), 이극로(李克魯) 등과 함께 항일 활동을 펼쳤고 반나치 지식인인 쿠르트 후버 교수와 교류했다. 한용운 전기를 보면 한용운 스님이 1937년 만주의 호랑이 김동삼 선생의 장례를 치를 때 찾아온 사람들 중 한 분이 이극로 선생이다.

 

이리저리 얽힌 인연과 사건의 실타래를 바로 보아야 하리라.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던 것이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 같이 선명해질 때까지 거듭 읽고 생각해야 하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어제 영릉(寧陵)과 영릉(英陵) 해설을 만족스럽게 마쳤습니다. 영릉(寧陵: 효종대왕 능)을 지나 영릉(英陵: 세종대왕 능)으로 이어지는 숲길에서 영릉(永陵) 이야기를 했습니다. 파주에 있는 진종(眞宗) 10세에 삶을 마친 효장세자(영조의 아들)와 그의 비인 효순왕후(孝純王后) 조씨가 잠든 곳입니다.

 

잘 아시듯 효장세자는 정조(正租)가 된 이산(李蒜)의 법적인 아버지로 후에 진종으로 추존(追尊)되었습니다.(효장세자가 이산의 법적인 아버지가 된 것은 이산의 생부인 사도세자가 반역죄로 죽임을 당하였기 때문에 이산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이산을 자신의 아들인 효장세자 호적에 올린 영조로 인한 결과입니다.)

 

법적인 아버지도 생소하고 더구나 열 살 나이의 법적인 아버지라는 점도 생소하다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제 해설을 마치고 돌아오니 스터디그룹 방에 문종 이야기가 올라왔습니다.

 

** 선생님께서 문종은 8세인 1421년 세자 책봉, 29세인 1442년에 섭정, 37세인 1450년에 즉위, 39세인 1452년에 승하했습니다.”란 글을 올렸습니다.

 

이에 저는 , 감사합니다. 문종은 39세에 돌아가신 거네요. 32세에 삶을 마친 '태종의 서자 이우(?)'의 시호가 희도(僖悼)랍니다. 28세에 돌아가신 사도세자는 사도(思悼)고요. 20세에 타계한 예종은 시호가 양도(襄悼)고요..한 논자는 32세에 타계한 이우를 설명하며 중년이 되어 일찍 죽은 것을 도()라고 한다고 말하네요. 옛날에는 30이 넘으면 중년이었나 봅니다.”란 글을 올렸습니다.

 

사실 저는 문종 이야기를 하는 자리에 도() 이야기를 덧붙인 것을 약간 후회했습니다. 주제를 벗어난 글이 아닌가 싶어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김** 선생님께서 꽤 괜찮은 스터디가 될 듯 합니다. 같이 공부 할 수 있는 벗들이 계셔서 감사한 삶입니다. 조선시대라면 넘치는 노년이겠지만 새로운 시작점의 우리 선생님들께서는 푸른 청춘입니다.”란 글을 올리셨습니다.

 

순간 불편하고 미안하던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해피엔딩이 아니겠는지요? 어제 왕릉 해설에서는 한 가지 사건이랄 순간도 있었습니다. 남한의 40기의 왕릉 가운데 영월의 단종능인 장릉(莊陵)이 서울, 경기 지역 외의 유일한 왕릉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고양, 구리, 김포, 양주, 남양주, 여주, 파주 등이 능이 있는 경기의 주요 도시들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잘 아시듯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의 건릉(健陵), 추존왕 장조(莊祖: 사도세자)와 추존 왕비 현경왕후 홍씨(혜경궁 홍씨)의 융릉(隆陵)이 바로 경기 화성에 있는데 그것을 빼놓은 것입니다. 정조와 사도세자는 늘 마음에 두고 있었기에 가까운 곳에 있다고 생각하고 경기도에 있는 능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얼마나 자주 서울을 드나들며 조선 중심의 삶(해설, 스터디)을 사는지 확인된 순간이라 할 것입니다. 물론 파주와 양주, 남양주는 제가 사는 곳과 같은 도인 경기 북부의 지역들이지만 심정적으로 멀게 느껴집니다.

 

앞에서 언급한 이** 선생님께서는 자신이 사는 곳이 송파(松坡)여서 한성백제에 관심을 두는 것이라며 백제에는 큰 관심이 없지만 지금 하고 있는 국외 소재 문화재 공부에는 관심이 많다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조선에 초점을 맞추어 왔기에 어렵겠지만 백제에 대해서도 공부를 하려 합니다. 조선 또는 백제가 아닌 조선 그리고 백제인 것입니다. ‘또는의 공부가 아닌 그리고의 공부가 진정한 공부가 아니겠는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요즘 독서를 거의 하지 못해 문제의식을 느낀다. 독서를 하지 않는다고 사는데 지장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무슨 걱정인가,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내가 걱정하는 것은 컨디션 저하와 집중력 부족이 부진(不振)한 독서 즉 부독서(不獨書)를 낳는 현실 자체다.

 

덧붙여 나는 삶에서 의미를 찾는 유형의 사람이라는 점에서 책을 통해 습득한 내용에 내 생각을 붙여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는 현실은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시미즈 이쿠타로는 논문 잘 쓰는 법에서 표현이라는 우회로를 거침으로써 우리는 진정으로 서적을 읽고 그 내용을 자신의 정신에 깊이 새길 수 있다고 말한다.(12 페이지)

 

또한 쓰는 것을 통해 진정으로 읽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13 페이지) 읽지 않으니 쓸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하고 그렇기에 정신에 새길 내용도 부족하고 그럭저럭 만나는 내용도 제대로 새기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난 시기의 독서에 의거해 하루도 빼놓지 않고 산만한 글일망정 쓴다. 하지만 시미즈 이쿠타로가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책을 읽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전면적인 독서를 못하는 현실이다. 단편적인 독서, 닥친 현안(懸案)을 해결하기 위한 땜질식 독서는 한다.

 

오늘 아침 예스24에서 내 리뷰를 읽고 도움을 받아 책을 구매한 사람으로 인해 내게 소액의 적립금이 셍겼다. 김태연의 소설 기형도를 잃고 나는 쓰네란 책을 읽고 쓴 리뷰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리뷰를 쓴 것은 지난 해 9월이었으니 아직 1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아주 오래 전의 일인 듯 느껴진다.

 

나는 무엇을 잃고 (책을 제대로 읽지는 못하고) 겨우 글이나 쓰고 있는 것인가? 자신감, 희망, 방향, 목표 등이 그것일까? 내게 적립금이 생긴 이 일은 나로 하여금 지난 시절 내가 치른 독서의 흔적을 기억하게 하는 사건이라 해도 좋겠다.

 

책은 나의 스승이고 친구였다. 아니 지금도 그러니 현재형으로 써서 스승이고 친구라고 해야 옳다. 우치다 다츠루가 이런 말을 했다. “스승을 섬기는 것이 불가능한 자는 텍스트를 읽을 수가 없다. 타자 안에서 무한을 찾아낸다고 하는 목숨을 건 도약을 해내지 못하는 자는 텍스트 안에서 무한을 찾아낸다고 하는 목숨을 건 도약도 역시 잘 해낼 수 없다.”(‘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44 페이지)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자신의 전 생애를 건 기투(企投) 즉 내던짐이다. 책 역시 그렇게 해야 할 중요한 만남 대상 중 하나다. 현실적으로 모든 책이 그런 대상은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좋은 책을 의미한다. 나는 한 번 읽고 더는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폭력적이지만 책으로 계산하지 않는다.

 

첫 시간이 지났지만 레비나스로 읽는 민중신학 혹은 민중신학으로 읽는 레비나스란 강의를 알게 되었다. 앞으로 다섯 차례(526, 62, 69, 616, 623, 경기대 앞 카페 까멜로. 14301630) 일정이 남았다.

 

무한을 찾아내는 목숨을 건 도약을 말한 레비니스와 민중신학의 만남이라니 흥미가 생긴다. 전혀 무연(無緣)한 관계항이 아니니 접점을 찾았겠지만 친연성을 짐작하지 못한 두 항을 만나게 한 것이어서 관심을 부른다.

 

지난 달 함석헌 기념관에서 열린 함석헌과 양심적 지식인들이란 시리즈의 마지막 순서를 맡으신 김진호 목사님과도 관계 있는 한백교회가 주최하는 모임이어서 친근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책을 많이 읽을 때 행복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책을 읽고 고투할 때 행복했다. 여기서 말하는 고투란 고투(苦鬪)이지만 고투(孤鬪) 즉 외로운 싸움이기도 하다.

 

그 외로운 읽기, 외로운 공부가 힘들어 다른 사람들을 찾아 이리 저리 다녔던 것이 지난 3년의 내 행적이었다. 그 안에서 최고의 스승 같은 도반(道伴)‘을 만났으니 더할 수 없이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여기 저기서 공부는 계속되고 좋은 만남이 생겨나지만 지속적이어야 의미가 있다. 인연을 더욱 의미 있게 하기 위해 책을 읽어야겠다고 다짐한다. 때맞춰(?) 나온 매리언 울프의 다시, 책으로를 읽고 독서의 의미, 방식, 전망 등을 다시 새기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