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자리‘라는 책을 계기로 존 버든 샌더스 홀데인, 스티븐 제이 굴드 등의 이름을 다시 확인한다. 홀데인은 신은 딱정벌레와 별에 대해 과도한 애정을 가진 것 같다고 말한 것으로 유명한 생물학자다. 이 에피소드를 근거로 하면 홀데인을 재기 넘치는 과학자로만 보는 것도 무리가 없겠다. 하지만 과학적 유토피아를 그린 ’다이달로스. 과학과 미래‘라는 책의 저자이기도 한 그는 공동체 지향의식이 강한 과학자였다.

 

김우재 교수는 '과학의 자리‘에서 과학과 인문학이라는 이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귀기울일만한 주장을 했다. 하지만 인문학 진영에서 자연과학을 소홀히 하는 문제는 많이 거론한 반면 자연과학 진영에서 인문학을 소홀히 하는 문제는 상대적으로 덜 언급한 점은 아쉽다.

 

책에서 거론된 ’과학이 만드는 민주주의‘의 저자 해리 콜린스와 로버트 에번스는 목을 180도 돌릴 수 있는 부엉이처럼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모두 바라볼 수 있는 과학자들을 진정한 과학지식인으로 정의했다. 인문학적 메시지를 반영해 해설하려는 지질해설사를 보고 펄쩍 뛰었다는 한 지질학 박사가 생각난다. 그 분에게 “과학과 인문학이라는 이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학의 자리‘의 메시지를 들려주고 싶다.

 

'과학의 자리'와 관련해 인상적인 점은 책이 어렵다는 기자의 푸념에 “그건 내가 독자를 존중하기 때문이다...편향적인 인문주의 전통에 매몰된 학자들은 책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한 저자의 대응이다. 나 역시 주위 사람들을 존중해 어려운 이야기도 꺼리지 않고 전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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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포성, 임진강 주상절리, 좌상바위 가는 버스를 확인했다. 당포성과 임진강 주상절리는 81번 버스, 좌상바위와 베개용암은 포천 가는 56번 버스, 백의리층은 고문리 가는 56번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지질공원은 아니지만 호로고루와 경순왕릉, 고랑포구 역사공원에 가려면 83번 버스를 타면 된다. 당포성에 별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호로고루도 생각했다.

 

고구려 시대에 두 성이 천문대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것은 내 막연한 생각이다. 김일권 교수의 ‘고구려 별자리와 신화’를 참고할 만하다.(당포성, 호로고루 두 성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 천문의 일반적 이야기를 참고해야겠다는 의미다.)

 

천문 이야기를 했지만 지난 해 영월에 갔을 때 본 별마루 천문대가 내가 간 첫 천문대다. 그간 실제로 별을 보는 것보다 천문 이론(그렇다고 많이 아는 것은 결코 아니다.)을 익히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 한계 안에서 관심 두는 별 이야기에 집중할 것이다. 가끔 하늘을 보는 것으로 별 관측을 대신할 것이다.

 

조 던클리의 ‘우리 우주’를 마저 읽어야겠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앞으로 몇 년 동안 우리는 분명히 충돌하는 블랙홀이나 중성자별에서 오는 신호를 더 많이 관측하여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는 조만간 보이지 않는 암흑물질 입자가 정말로 무엇인지 알아내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앞으로 몇 년 이내에 우주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은하들을 보게 되기를 기대한다. 이런 발견들은 훌륭한 새 망원경들과 계속 발전하고 있는 컴퓨터 성능 덕분에 가능해지고 있다. 다음 10년을 위해 준비되고 있는 망원경들은 모든 파장의 빛뿐만 아니라 중력파까지 관측할 것이고 넓은 하늘 전체뿐만 아니라 특정한 천체들을 높은 정밀도로 관측할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그 날에 망원경으로 새로운 관측을 한 사람의 글을, 때로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스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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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이 용이하지 않을 경우 한편으로는 난해한 학문이라는 딱지를 붙이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학습자의 준비 부족 혹은 열성 부족(수십 번이고 되씹어 생각해야 할 것)을 탓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지적 자질을 의심하게 된다. 별로 큰 능력도 없으면서 철저한 이해를 원하는 성향의 학생이 일차적인 좌절을 겪게 된다.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따라가는 사람에게는 별 문제가 없지만 굳이 달을 보겠다는 사람에게는 절망이다. 나는 만년에 이르면서도 여전히 달을 보겠다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에 나오는 내용이다. 조금 길지만 양자역학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참고할 만한 글이어서 인용했다. 물론 양자역학만이 아니라 학문 일반을 대하는 자세에 적용해도 좋을 이야기다. 장회익 교수는 공부하는 사람을 달을 가리키는 손만 보려는 사람과 "굳이" 달을 보려는 사람으로 나누어 비유한 뒤 별로 큰 능력도 없으면서 철저한 이해를 원하는 성향의 학생이 일차적인 좌절을 겪고 굳이 달을 보겠다는 사람은 절망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장회익 교수는 자칭 만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달을 보겠다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분이다. 이를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지질공원에 대해 공부(또는 해설)하는 데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려는 사람과 굳이 달을 보려는 사람의 이원적 대립(binary opposition)이 적용된다. 장회익 교수는 별로 큰 능력도 없으면서 철저한 이해를 원하기에 좌절을 겪는 학생 단계는 오래 전 넘어선 분이다. '만년에 이르러서도 굳이 달을 보기를 소망하는' 분이다.

 

장회익 교수의 분류에서 달을 보려는 이유 때문에 좌절을 겪거나 절망을 느끼는 사람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상징폭력을 겪는 사람이다. 상징폭력이란 선학(先學)들이 이루어놓은 지식의 장(場)에 진입해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그들이 이루어놓은 성과로부터 연구를 시작해야 하기에 감수할 수 밖에 없는 후학들이 겪는 고통이고 언어로 이루어진 상징공간에 진입해 그 장(場)에서 중요하다고 설정된 내기물이 연구할 만하다고 믿는(오인하는) 사람들이 감수하는 고통이다.

 

부르디외의 말과 장회익 교수의 말을 종합하면 달을 보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달은 아무런 흥미도 유발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장회익 교수의 말은 오컴의 면도날을 조금 변형해 생각하게 한다. 경제성의 원리라 불리는 오컴의 면도날은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불필요한 가정을 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원리다. 이를 변형하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려는 사람은 쉬운 내용만 다루고 조금 더 깊이 있는 내용은 고려하지 않는 태도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어쩌면 의문 자체를 갖지 않는 사람이라 할 수도 있겠다.

 

사실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의문이 들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의문을 갖지 않은 채 편하고 쉬운 내용만 전하려는 사람이 분명 있다. 해설계에 특히 지질해설계에서도 그런 일은 빚어진다.

 

브레너의 빗자루란 개념을 생각하기로 하자. 분자생물학자 시드니 브레너에 의해 고안된 이 개념은 탁월한 아이디어나 명쾌한 통찰을 지녔다고 믿는 사람은 일단 용감하게 발표하고 나서 해결되지 않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내용은 브레너의 빗자루를 이용해 양탄자 아래로 쓸어넣으면 된다는 것이다.(에른스트 페터 피셔 지음 '슈뢰딩거의 고양이' 참고) 이 역시 변형하면 해설하는 사람은 끊임 없이 의문을 가지고 기존의 개념이라도 색다르게 설명할 아이디어를 갖게 될 경우 기존 지식과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새롭게 가다듬어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최근 某 지질해설사와 대화를 하고 생각이 많아졌다. 그는 자신은 과학(책)을 읽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지질(해설)에 굳이 새로운 과학 내용이 필요하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관건은 조금 더 나은 기법을 찾아내는 것이고 과학 지식을 추가해 설명에 반영하는 것이다. 지질 책은 물론이고 여타 과학 책에서도 얼마든지 새롭게 생각하고 기법과 내용으로 삼을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조금 관념적일 수 있지만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를 읽으며 내가 이해한 이야기를 먼저 하도록 하겠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사물은 느린 사건이다. 빠름과 느림은 상대적이란 의미다. 이를 재인폭포에 적용하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각자 재인폭포가 관심을 끄는 이유에 대해 생각한 바가 있을 것이다. 내가 구상하는 설명(카를로 로벨리의 책을 쉽게 풀어 하는 설명)은 언급하지 않겠다.

 

어떻든 이제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로 다시 돌아가자. 먼저 말할 것은 부르디외가 말하는 상징폭력은 선학(先學)들의 지식(知識)으로부터 연구를 시작해야 하는 까닭에 그 개념에 익숙해져야 하므로 빚어지는 어려움이다. 이는 뉴턴이 말한 거인의 어깨와 관련이 있는 말이다. 즉 자신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섰기에 성과를 낼 수 있었다는 뉴턴의 말과 관계 있다는 뜻이다. 장회익 교수는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를 대비했다.

 

‘스피노자의 뇌’(원어는 Looking for Spinoza’)의 저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스피노자의 서재를 방문해서 본 스피노자의 많지 않은 책에 대해 그가 필요로 했던 책은 미니멀리즘이 무색할 정도라는 말을 했다. 흥미로운 점은 스피노자의 서재 방명록에 아인슈타인이란 이름이 올랐다는 사실이다. 아인슈타인이 스피노자의 서재를 다녀간 것은 1920년이다.

 

스피노자의 많지 않은 책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데카르트의 책이다. 스피노자는 뉴턴과 함께 데카르트로부터 영향을 받은 두 지적 거인이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를 다르게(창조적 배반?) 계승했다. 뉴턴 역시 데카르트에 빠져 있었지만 맹목적인 신봉자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데카르트에게서 적당히 떨어져 그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뉴턴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데카르트의 동시대 학자들의 이론을 폭넓게 공부했기 때문이다.

 

그런 동시대 학자들 중 한 사람이 가상디다. 물질의 본질을 외연(外延)으로 본 데카르트에게 공간과 물질은 구분이 불가능하고 전체 우주는 물질로 가득찬 플레넘(물질로 충만한 공간)이었다면 가상디에게 우주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자라는 입자'가 진공 속을 날아다니는 공간이었다.(박민아 지음 ‘뉴턴 & 데카르트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거인’ 참고) 곁가지이지만 세상 만물이 그렇듯 우리 몸 역시 거의 대부분(99. 999%) 텅 빈 원자로 구성되었기에 우리는 그 빈 공간을 뚫을 수 있으리라 생각할 법하지만 원자의 외곽을 구성하는 전자 사이의 전기적 반발력 때문에 빈 공간과 다름 없는 우리가 역시 빈 공간이나 다름 없는 벽을 뚫지 못한다는 말을 하게 된다.

 

스피노자는 몸과 마음을 별개의 것으로 본 데카르트와 달리 몸과 마음의 일원론을 제시했다. 장회익 교수는 스피노자에 의거해 “양자역학 이전에는 위치공간과 운동량공간을 서로 독립적인 두 공간으로 보았지만 양자역학을 이해하면서 이것이 한 공간의 두 측면임이 밝혀진 것”이란 말을 한다. 스티븐 내들러는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인간 내에 있는 정신과 신체 상태간의 상관관계는 독립된 두 계열간의 외적 관계가 아니라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펼쳐지는 하나의 계열이라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신체가 ‘베임‘ 하고 울리면 정신은 ’아픔‘ 하고 울리고 정신이 ’팔을 움직임‘ 하고 울리면 신체는 ’팔이 움직임‘ 하고 울린다는 흥미로운 말을 덧붙인다.(’에티카를 읽는다‘ 246 페이지) 신승철은 스피노자의 평행론을 이야기한다. 스피노자의 평행론을 잘 살펴보면 꼼짝 안 할 때의 마음이 감정이라면 움직일 때의 마음은 정동(情動)이라는 것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꼼짝 안 할 때의 마음인 감정은 망상과 같아 일시적이고 돌발적으로 찾아와 머릿속에서 공회전한다.(’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147 페이지)

 

요즘 오랜만에 양자역학에 다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는 내가 지난 3월 중순 문을 연 경기도 연천 전곡의 달달(달리는 달팽이) 서점에서 가장 먼저 구입한 책이다. 이 서점은 내게 사랑방 같은 의미 공간이다. 책을 주문하고 오기를 기다렸다가 도착했다는 연락이 오면 가서 받아 대화를 하는 의식(儀式; Officium) 같은 일이 펼쳐지는 곳이다. 작은 서점이 아니라면, 그리고 운영자가 함께 지질해설을 하는 분이 아니라면 가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든 그랬지만 처음으로 산 그 책을 꽂아두고만 있다가 양자역학에 대한 관심 재점화 덕에 집어든 것은 여름이 다 저물어 가는 8월 15일 이후의 일이다. 장회익 교수의 책은 근대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스스로를 스승으로 삼아 자신만의 세계를 완성시킨 이들과 그들의 학문을 ‘심학십도(尋學十圖)’의 형식으로 정리해 지성사의 흐름을 조망한 책이다. 심학십도란 이율곡의 성학십도(聖學十圖)와 불가의 심우도(尋牛圖)를 조합한 말이다.

 

2007년 나온 최종덕 교수와의 대화집인 ‘이분법을 넘어서’에서 장회익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과연 알고 가르치느냐 하는 점을 지속적으로 반추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모른다는 것을 자각하고 자기 지식을 새로 짜나가야 해요....학문을 다시 짜야 해요. 우회로를 버리고 직선으로 뚫어야 해요. 핵심만 명명백백하게 드러내는 방법을 강구해야지요.”(41, 42 페이지) 앞 부분에서 말한 굳이 달을 보려는 사람, 그 과정에서 절망도 느끼는 사람이 감내하는 길이다. 그리고 그 길은 내가 말한 조금 더 나은 기법과 과학 지식을 추가해 설명에 반영하는 길과도 통한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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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 로벨리. 이탈리아의 물리학자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모든 순간의 물리학’, ‘첫번째 과학자, 아낙시만드로스’ 등을 쓴 작가다. 찰스 코켈의 ‘생명의 물리학’을 주문하고 책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저 책들을 주문하고 싶어진다.

 

‘생명의 물리학’을 주문한 것은 생명의 꾸러미, 생명의 가장자리, 생명의 부호, 물; 생명의 액체 등의 챕터 때문이다. 어떻든 이렇게 오랜만에 물리학에 집중하게 된 것은 왜일까? 박문호 박사의 강의(뇌과학, 현대물리학, 지질학)가 한 계기가 되었다.

 

낮에 박문호 박사의 특강(2019년 프로그램)을 통해 리 스몰린의 ‘양자 중력의 세 가지 길‘과 전기한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등을 기본으로 한 내용을 들었다. 박 박사는 무한 대신 한계, 연속 대신 불연속, 실재 대신 관계를 키워드로 제시했다.

 

실재 대신 무엇일까요?란 질문에 나는 인연(因緣) 또는 연기(緣起)를 생각했다. 그러나 답은 관계였다. 같은 맥락의 말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연기는 불교적인 뉘앙스가 강하다. 집에 돌아와 강승환의 ‘불교에서 본 우주’를 펼쳤다.

 

꽤 오래 전 사서 1/3 정도의 분량만 읽고 지금껏 시간만 보낸 책이다. 이제 그 책을 읽을 차례가 된 듯 하다. 저자는 지리학을 전공한 분이다. 불교의 우주관과 현대과학의 첨단 우주론을 접목한 책이라는 설명이 눈에 들어온다.

 

물론 책을 처음 접했을 때도 그 요점에 주목해 책을 구입한 것이었다. 물리학(자의적이지만 천문학까지 포함)은 철학적인 면이 강한 분야다. 나에게는 이런 분야가 적격이다. 읽을 책이 쌓였다. 몇 달 틀어박혀 책만 읽고 싶으나 현실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런 점이 미덕이고 매력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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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기계 vs 생각하지 않는 인간 - 일과 나의 미래, 10년 후 나는 누구와 어떻게 일해야 하는가?
홍성원 지음 / 리드리드출판(한국능률협회)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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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와 인간의 대결은 흥미로운 일일까? 궁금하면 ‘생각하는 기계 vs 생각하지 않는 인간’을 읽으면 된다. 사실 답은 명약관화하지 않을까? 점점 생각하지 않는 인간으로 하여금 생각하는 기계에 맞서 이길 수 있도록 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는 산업화를 넘어 놀라운 기계들이 등장하는 시대가 우리에게 기회가 될지 새로운 분열과 고통의 시간이 될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인간은 기계와의 경쟁에서 승리할 것인가? 패배할 것인가? 현재 내가 하는 일의 본질은 무엇이고 미래의 기계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 나의 미래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어떤 능력을 갖춰야 하는가? 생각하는 힘을 위해 우리가 일상에서 준비하고 실천할 것은 무엇인가? 등의 질문이 중요하다. 저자는 이제 책은 내용을 전달하는 도구가 아닌 행간의 의미와 다양한 가치를 생각하게 하는 매개라 말한다.

 

과학자 에드워드 프레드킨은 우주의 탄생, 생명의 출현, 인공지능의 출현을 세 가지 위대한 사건으로 보았다. 인간에게는 인공지능이 구현해내지 못하는 메타인지 능력이 있다.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생각하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의미다.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은 인간과 기계가 벌인 대결의 5라운드다. 사회학자 조지 리치가 만든 말 가운데 맥도날드화가 있다. 이는 사회가 효율성, 측정 가능성, 예측 가능성, 통제성 등에 의해 움직인다는 의미다. 현대는 기계의 인간화가 진행중이다. 지능형 로봇, 휴머노이드, 사이보그, 로봇 사피엔스 등이 등장한 지 오래다.

 

1890년대 말똥 대위기 사건이 런던, 뉴욕 등에서 일어났다. 말은 짐을 나르는데 열 사람 이상의 몫을 하고 속도도 빠르다. 하지만 말은 차지하는 공간과 먹어치우는 식량 문제 말고도 배설물을 양산하는 문제의 주인공이었었다. 그런데 이 난제는 자동차가 만들어짐으로써 해결되었다. 기술이 이긴 것이 아니라 말이 일자리를 빼앗긴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늘날 기계의 발달로 인간이 일자리를 잃는 것을 연상하게 하는 부분이다.

 

저자는 기술은 상상보다 느리다고 말한다. 인공 지능 분야의 대가 토비 월시는 인공 지능의 발달을 4단계로 나누었다. 1단계는 약한 인공 지능, 2단계는 일반 인공 지능, 3단계는 초지능, 4단계는 강력한 인공 지능이다. 저자는 일자리 감소도 없을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무섭게 변하는 기술 발전에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기보다 낯설지만 새로운 길을 찾는 기쁨을 맛보라고, 가지 않을 수 없고 거부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말한다.

 

이는 당신이 미래의 주인공이 되는 길이라는 것이다. 신기술이란 결국 기존 분야에서 조금 달라지는 것일뿐이라 말한다. 눈에 띄는 말은 감성이 공감을 이끈다는 말이다. 최근 뇌과학 분야에서 강조되는 것이 감성임을 감안하면 타당한 말이다. 공감과 배려는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졌다.

 

현대의 일터에서 요구하는 창의성은 에디슨이나 갈릴레이처럼 세상을 뒤집는 발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늘 아래 새것을 만들어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조직이나 구조 속 창의성의 본질은 무심코 지나간 것을 새롭게 해석하고 새로운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기존의 많은 창의적인 작품에서 공통 패턴을 찾아내고 모방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면 된다.

 

저자는 직관의 의미를 강조한다. 직관이란 본질을 꿰뚫어 큰 그림을 보는 힘의 원천이다. 개인의 감인 직감과 다른 직관은 순간에 발현될 수도 있고 오랜 기간의 숙고 끝에 나올 수도 있다. 호모 파베르는 도구를 다루는 인간을 의미한다. 이 단어를 처음 만든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인간은 도구 외에 자신을 만드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 보았다.

 

생각의 힘은 정보의 양에 따른 지식이 아니라 생각을 운용하는 지혜에서 나온다. 지식은 기존 정보에 좌우되고 지혜는 기존 정보들을 새롭고 독창적으로 활용하는 데서 나온다. 어느 정도의 아니 충분한 정보가 필요하지만 그것을 새롭게 배치하고 연결하고 낯설게 바라보는 능력이 관건이다.

 

현대 사회의 패러독스 가운데 하나는 사고와 정보의 패러독스다. 이는 정보량이 늘어날수록 점점 더 사고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생각하는 힘을 단련하기 위해서는 정보를 줄이고 사유 행위를 늘려야 한다. 시대에 맞는 인간으로 거듭 날 필요가 있다. 사고력이 관건이다. 생각에도 근력이 필요하다.(저자는 스마트폰은 유용하지만 그것은 집중력과 사고 능력을 떨어뜨린다고 말한다.) 책에 무한 신뢰를 보내자. 책에는 세상을 바꿀 힘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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